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8권, 현종 5년 1664년 윤6월

싸라리리 2025. 12. 10.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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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6월 1일 신유

동부승지 목겸선(睦兼善)을 파직하였다. 겸선이 청풍 군수(淸風郡守)로부터 본직에 제수되어 서울에 들어왔는데, 집에 이상한 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소장을 진달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정원이 계청하여 다시 불렀으나 나아오지 않자, 상이 먼저 파직시키고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윤6월 3일 계해

이단하(李端夏)를 헌납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우승지로 삼았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전 면천 군수(沔川郡守) 강전(姜琠)은 권근(權慬)을 조사한 것이 분명치 못하다고 하여 먼저 추감을 받고 끝내 도배(徒配)되었다고 합니다. 신이 그 당시 도신으로 같이 추고를 받았으니, 지금에 와서 논죄할 적에도 이치상 죄과를 같이 받아야 하는데, 단지 전일의 추고하지 말라는 명으로 요행히 벌을 면하였습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감히 염치없는 것을 알면서 무릅쓰고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파직을 명하소서."
하였다. 홍연이 일찍이 충청 감사가 되었을 적에 덕산 현감(德山縣監) 권근이 환곡을 거두어들이려고 독촉하다가 인명을 장살(杖殺)하였는데, 옥사의 실정을 조사한 것이 분명치 못하다고 하여 추관(推官)인 면천 군수 강전과 홍연이 모두 추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간원이 처치하여, 도신과 사관(査官)은 다른 면이 있는데 이미 추고를 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으니 출사시키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함경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소장을 진달해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혐의쩍게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속히 가서 공경히 임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정중이 일찍이 좌전(佐銓)이 되었을 적에 엄한 전지를 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의 동생 민유중(閔維重)이 서필원(徐必遠)을 파직시키라고 논한 일이 있었다. 지금 필원의 직임을 대신 받게 된 것을 불안하게 여겨 이런 소를 올린 것이다.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근래 조정의 기강이 해이되어 사대부들이 임금의 명이 중한 줄을 모르고 패초하여도 나아오지 아니하니, 참으로 지극히 한심한 일입니다. 전일 목겸선(睦兼善)을 파직시킨 일이 있는데, 대사헌 정지화(鄭知和)가 지금 또 소명에 달려나오지 아니하니, 체면을 매우 손상시켰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명하가 장령 여민제(閭閔齊)가 한창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으로 또한 체차를 청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금부의 죄인 박형(朴泂)의 자식이 격쟁(擊錚)한 공사를 형조에서 본부로 이송하였습니다. 만약 특별한 전교가 없으시면 그 자식이 격쟁한 것으로 인하여 다시 추문(推問)을 하는 것은 전례가 없으니,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태화에게 이르기를,
"박형의 일은 어떠한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조귀석(趙龜錫)의 장계를 살펴보건대, 범한 것이 가볍지 않습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동래(東萊)에 상왜(商倭)가 나아오면 시장을 여는 거조가 있는데,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가 그들의 출입을 검찰하여 몰래 장사하는 것을 엄히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석류황(石硫黃)을 매매한 일로 인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이 또한 물화를 많이 싣고 몰래 중간 지점으로 가서 사사로이 서로 교역했다고 합니다. 과연 이와 같다면 참으로 지극히 한심한 일이며 앞으로의 폐단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 제수된 부사 안진(安縝)이 내려갈 때에 비국으로부터 통렬히 금하도록 분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경기 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한 뒤로 연호(烟戶)의 잡역이 지극히 편중되어 고통스럽습니다. 대체로 사대부는 잡역에 응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만 유독 그 피해를 받고 있으니, 지금부터는 사대부의 집을 막론하고 일체 역에 차출하도록 신칙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황해도에 여역이 크게 번져 죽은 자가 1백 74인이었다.

 

부응교 오시수(吳始壽)가 정사(呈辭)하여 체직되었다.
당초 서필원이 상소한 뒤 대각의 논핵이 일어나기 전에 유생들의 상소가 먼저 일어나 양사(兩司)가 부득불 인피하였다. 모두들 생각을 지나치게 하다 보니 늦어졌다는 등의 말로 변명을 하였는데, 정언 윤형성(尹衡聖)이 인피한 말은 앞뒤의 내용이 어긋나고 말의 뜻을 분명하게 맺지 않았으며 필원을 두둔하는 뜻이 있었다. 옥당이 처치할 때에 수찬 남이성(南二星)이 반드시 형성을 체직시키려고 하였는데, 시수가 교리로서 다른 의견을 내세워 참여하지 않았다가 당시의 의논에 크게 비방을 받아 오래도록 청망(淸望)에 비의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본직에 제수되자 정사하여 체직된 것이다.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과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사직하였으나, 허락치 않았다.

 

송도(松都)에 여역이 크게 번졌다.

 

왜인이 《퇴계집(退溪集)》과 《고사촬요(攷事撮要)》를 구입하고자 하였는데, 허락치 않았다.

 

윤6월 5일 을축

이에 앞서 경상도 진휼 어사가 남해(南海)와 거제(巨濟)의 수군과 육군을 바꾸어 정하는 것과 각포(各浦)에 방수군(防戍軍)을 모집하여 지급하는 일로 서계(書啓)하였는데, 비국이 도신 및 통제사로 하여금 그렇게 하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익숙히 강구하여 아뢰게 하라고 청하였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바닷가를 두 차례 순시하며 그곳의 물정과 사세를 가지고 통제사 및 수사·병사와 서로 의논하고, 또 각포를 차례로 살펴보고서 자기의 소견에 따라 조모조목 나열하여 치계하였다. 비국이 회계하여 새로 부임하는 감사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계문하게 하자고 청하였다.

 

밤 1경에 달이 태미성(太微星) 동원(東垣)으로 들어갔다.

 

윤6월 6일 병인

대간이 윤후익(尹後益)을 체차시키자는 일로 10여 일 동안 논집하다가 윤허를 받지 못하자, 이때 이르러 정계하였다.
후익은 본래 미천한 의관으로 일찍이 상의 옥체가 편치 못할 때에 침을 놓아 효험을 보았다. 상이 꼭 그에게 상을 주려고 한다면 그의 녹을 두텁게 해주고 하사를 풍족하게 해주어도 안 될 것이 없는데, 특별히 수령에 제수하자 대관이 법에 의거해 쟁집한 것이다. 그러나 끝내 한마디 허락을 아끼니, 애석하다.

 

윤6월 7일 정묘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이행진(李行進)을 호조 참판으로, 남노성(南老星)을 병조 참판으로, 이준구(李俊耉)를 사간으로, 정륜(鄭錀)을 장령으로, 이유(李秞)를 정언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동래부가 대마도와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있어 조석으로 변란을 대비해야 할 곳인데 성지(城池)의 설비가 없다는 것과, 동래 부사 이성징(李星徵)과 좌병사 이지형(李枝馨)도 읍을 설치하고 성을 쌓는 것을 합당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으로 치계하여 그렇게 하기를 청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읍을 옮기고 성을 쌓는 것은 실로 중대한 일이니 새로 제수된 감사가 부임하길 기다려 다시 자세히 살펴 계문하게 한 뒤에 의논해 처결하자고 하였는데, 일이 끝내 행해지지 않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래는 대마도와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근거하여 지킬 수 있는 높은 성과 깊은 해자가 없다. 그러니 험한 성지를 설치해 나라를 견고히 하는 도리에 있어 엉성하다고 할 수 있다. 상진의 말은 채용할 만한 듯한데, 묘당이 어렵게 여기고, 또 새로 부임하는 감사가 다시 자세히 살피기를 기다리고자 해 지금까지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아, 나라를 도모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성취가 있을 수 있겠는가.

 

윤6월 8일 무진

박형(朴泂)에게 형을 더하는 일에 관한 문건을 의논해 처결하라는 명이 있었다. 박형이 일찍이 전라 좌수사가 되었다가 체직되어 돌아올 때에 잡물을 많이 싣고 와 온 도에 소문이 퍼졌다. 지난해 5월 감사 조귀석(趙龜錫)의 치계로 인하여 붙잡혀 와서 20여 차례 형을 받았으나 자복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의논해 처결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다. 아, 도신이 열읍을 순시하면서 그가 재물을 긁어모았다는 말을 직접 들었고, 또 양호(兩湖) 지방의 많은 선비들의 공론을 채용해 특별히 차사원을 정해 두 번씩이나 자세히 조사를 하였으며, 허다한 배 곁꾼들이 너나없니 정직하게 공초하여 긁어모은 장물이 낭자하다 했으니, 나라의 법으로써 논죄한다면 그 죄는 참으로 용서받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전교가 이와 같으니, 나라의 잘못된 형벌이 크지 않은가, 탐장(貪贓)을 다스리는 법률이 엄하지 않아 이전에 이미 황헌에 대한 논계를 윤허하지 않았고, 지금 또 박형의 일에 대해 이런 특별한 전교가 있으니, 탐욕스럽고 더러운 무리들이 징계되고 두려워할 바가 어디에 있겠는가.

 

경상도 안동부에 우박이 내렸다.

 

집의 이정과 장령 정륜이 조감(照勘)을 온당치 못하게 했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윤6월 12일 임신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격쟁인(擊錚人) 이승익(李承益)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다. 정언 신후재(申厚載)가 처치하여 출사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이에 앞서 출신 양사국(梁士國)이 이영(李楹)이라는 자와 노비를 쟁송하여 이미 두 번이나 처결하였다. 그뒤에 사국이 또 쟁을 쳐서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는데, 해원이 국가에 소속시키자는 뜻으로 예에 따라 회계하였다. 그러자 상이 하교하기를,
"이미 두 번 승소한 송사는 청리(聽理)를 허락치 말라는 연신(筵臣)의 진달로 인하여 정해진 제도가 있으니, 본원이 마음대로 송사를 판결하는 것은 참으로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당상과 낭청을 모두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홍연이 일찍이 판결사가 되었을 적에 방장(房掌)이 교대하기를 기다린 뒤에 처치하자는 뜻으로 또한 회계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유독 자신만이 파직 추고받음을 면하게 된 것을 불안하게 여긴 것이다. 또한 황간(黃澗)의 유학 이승익이 보은(報恩) 사람 김득수(金得洙)와 선산(先山) 때문에 서로 소송을 한 일이 있었는데, 홍연이 일찍이 본도의 감사가 되었을 적에 형조의 회계로 인하여 조사해 처결한 일이 있었다. 그뒤에 승익이 쟁을 두들겨 말하기를, 득수는 곧 감사의 6촌 손자 사위로 본도에서 조사해 처결한 것은 사정(私情)을 따른 데서 나왔다고 하며 비방하고 헐뜯기를 극도로 하였다. 그러므로 홍연이 이에 인피하면서 종이에 가득 여러 말을 하였는데, 말이 대부분 비루하고 속되며 소송하는 자리에서 시끄럽게 다투는 듯한 말이 있어 대각의 체모를 잃으니, 물의가 그를 비웃었다.

 

장령 정창도(丁昌燾)와 지평 이섬(李暹)이 서필원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초봄에 필원의 상소가 북관(北關)으로부터 들어오자 당시 의논이 놀라워하며 이르기를, 상소의 말이 성나고 패려한 데서 비롯되어 유현(儒賢)을 능멸하고 모욕하니 규찰해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사(三司)는 곧바로 논핵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필원의 무리들이 서로 구원해 감히 가벼이 거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소가 들어간 지 한 달이 지난 뒤에 유학 조해(趙楷) 등이 항쟁하는 소장을 올려 필원을 공격하고, 또 삼사가 논핵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였다. 대사간 김수흥(金壽興) 이하 양사의 관원들이 서로 이어 인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를 청한 뒤에도 또한 추급해 논핵하지 않았다. 그뒤 지평 이규령(李奎齡) 등이 먼저 논의를 일으켰다가 박증휘(朴增輝)에게 저지를 당하였고, 정언 조성보(趙聖輔)가 뒤이어 의논을 일으켰다가 또 박세당(朴世堂)·윤심(尹深)에게 저지를 당하였다. 태학생 윤헌(尹攇) 등이 또 소장을 올려 논척하니, 상이 특별히 하교하여 조정을 멋대로 제재한 것으로 죄를 삼아 소두(疏頭)를 부황(付黃)하라는 명이 있었다. 비록 여러 신하들이 힘껏 간쟁함으로 인해 곧바로 벌을 풀어주기는 하였지만, 권당(捲堂)하는 데까지 이르러 여러 날이 지난 뒤에야 도로 들어갔다. 연이어 규령·성보 등이 배척을 받아 북변의 읍으로 보임되고 전관(銓官)을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다. 윤형성(尹衡聖)·조원기(趙遠期)를 특별히 대각의 직에 제수하여 진정하는 벌판을 만들고자 했지만, 필원을 대우하는 것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한 시대의 논의도 대부분 둘로 갈라져 준론(峻論)·완론(緩論)의 칭호가 있었다. 이른바 준론은 모두 송시열(宋時烈)을 숭봉하여 유종(儒宗)으로 삼고 청론(淸論)으로 자임하는 젊은 사람들이었다. 이른바 완론은 의논하기를, 필원의 상소에서 한 말이 거칠고 경솔하기는 하지만 원수를 갚는 데 차이가 있다는 등의 말은 일리가 없지 않다고 하며 양자간을 조정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로부터 조정이 날로 점점 어긋나고 틈이 벌어졌으며, 점괘가 날로 점점 아름답지 않게 되었다. 이경휘(李慶徽)·윤형성(尹衡聖)·유상운(柳尙運)이 삼간(三奸)을 이루고, 박세당(朴世堂)·조원기(趙遠期)·박증휘(朴增輝)·오시수(吳始壽)·윤심(尹深)이 오사(五邪)를 이루어, 점점 번져나가 서로 격렬해져 안정될 기약이 없었다.
5월이 되어 집의 민유중(閔維重)이 강도(江都)에서 돌아와 필원의 일을 홀로 아뢰면서 이어 전후 대관들의 잘못을 논하였는데, 엄한 전지를 내려 특별히 체직하였다. 그뒤에 대관들이 잠시 출사하여 논계할 적마다 엄한 전지를 받고 물러났다. 혹 고향으로 내려가 체직을 도모하는 사람도 있었고, 혹 소명에 나아가지 않아 인피하여 체직된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양사가 모두 비었다. 6월 10일 이후 집의 이준구(李俊耉)가 시골에서 부름을 받고 올라와 한 달 넘게 연계(連啓)하여 쟁집하였는데, 상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정창도(丁昌燾) 등이 이때 와서 정계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수를 갚는 의리는 《예경(禮經)》에 논해 놓은 것이 자세하다. 예에 이른바 원수를 만나면 그를 죽인다고 한 것은 대체로 한 장부와 원수가 되어 원수를 갚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오늘날의 사세와는 참으로 같지 아니한 점이 있다. 병자년 큰 난리를 만나던 날 사대부의 가문으로서 뜻밖에 적의 칼날을 만나 죽은 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아비의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으니, 원수가 있는데도 갚을 수 없는 자는 참으로 마땅히 애통함을 머금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일에 간여하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러나 손자가 할아버지에 대해서, 동생이 형에 대해서 비록 각각 마땅히 복수해야 할 의리가 있지는 하지만,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아비의 원수와 비교해 보면 또한 어찌 차등이 없겠는가. 필원의 말이 애당초 사리에 어긋난 것이 아니었는데, 시열이 이에 이적(夷狄)에 빠지고 금수의 지경으로 들어간다고 배척을 하였고, 그의 무리들이 또 이어서 그에 화답하여 어지럽게 거론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아 또한 괴이하다.
김만균(金萬均)이 이미 조정에서 벼슬하여 시종이 되었으니 대가(大駕)가 관소(館所)에 나아가는 때를 당하여서는 단지 배종하며 왕래하면 될 뿐으로 자신이 직접 저 사신들을 접대할 일이 진실로 없는데, 이에 감히 소장을 올려 종반(從班)을 면하기를 구하였다. 만균은 참으로 외람되고 참람하였고, 만균을 두둔하고 필원을 배척한 자 또한 자못 편벽되었다.

 

윤6월 13일 계유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이유(李秞)를 장령으로, 이진(李𥘼)을 병조 참의로, 조수익(趙壽益)을 예조 참판으로, 윤강(尹絳)을 공조 판서로, 정륜(鄭錀)을 정언으로, 이정(李程)을 수찬으로, 정치화(鄭致和)를 동지 정조 정사(冬至正朝正使)로, 이상일(李尙逸)을 부사로, 우창적(禹昌績)을 서장관으로,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을 북도의 시관(試官)으로 삼았다.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큰비가 온 뒤에 가뭄이 또 이와 같으니, 금년 농사도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는 장맛비가 열흘 넘게 쏟아졌는데 지금은 너무 가물어 비가 올 듯하면서 오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하였다. 태화는 아뢰기를,
"기전(畿甸)은 비를 바라는 것이 절실하지만, 호서·호남의 경우 천안 이하 전주 이상 지역은 빗물이 크게 불어 수전(水田)도 재앙을 입었습니다."
하고, 우의정 홍명하(洪命夏)는 아뢰기를,
"곡식이 물에 잠겨 썩을 근심이 있을 뿐만이 아니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많으니 참으로 놀랍고 참혹스럽습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아뢰기를,
"본조의 좌랑 여성제(呂聖齊)는 지금 바야흐로 병으로 정사(呈辭) 중에 있고, 참판 이상진(李尙眞)은 지방에 있으며, 참의 이경휘(李慶徽) 또한 휴가 중에 있어 소신 혼자서 전석(銓席)의 중임을 감당하고 있으니,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일찍이 선왕조 때에 이조 낭관의 정순(呈旬)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한 일이 있었는데, 근래 조정이 존중받지 못하고 체통이 크게 무너져 아랫사람들이 임금의 명이 무서운지를 모릅니다. 조금이라도 불안한 일이 있으면 염우(廉隅)를 핑계로 모두 직임을 살피지 않으니, 일의 체모로 헤아려보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판서가 정순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또한 어찌 감히 이렇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제가 불안해 하는 것은 어떤 일인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좌랑 이민서(李敏叙)를 특별히 파직할 때에 그가 같은 직임으로 마침 지방에 있다가 홀로 파직을 면하여 이 때문에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이조의 낭관은 근시(近侍)와 다른 점이 있으니, 조정에서 그들을 대우하는 것도 또한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민서와 거취를 함께 하려고 하니, 그 습성이 밉습니다. 인조(仁祖) 말년에는 젊은 사람들이 감히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순을 하면 받아들이지 아니할 수 없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비록 정순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만약 병가(病暇)를 내어 30일이 되면 으레 체차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 번으로 기한을 삼아 반드시 체직되기를 기약하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부터는 실제로 병이 나 사람들이 다 아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비록 병가를 내 30일이 되었더라도 체가(遞假)를 허락치 말라. 그리고 낭청의 단자 또한 정원에서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일찍이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아뢴 것으로 인하여 관서 지방의 쌀을 수령해 온 차사원 광량 첨사(廣梁僉使) 정섬(鄭暹)과 조선 압령관(漕船押領官) 정석달(鄭碩達) 등에 대하여 탑전에서 논상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대전(大典)》에 50척을 실패하지 않고 운송해 온 자는 가자하고 자궁자는 준직(准職)한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일 수령해 가지고 온 사람 강준(姜俊)도 만호에 제수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50척을 수령해 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인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바다를 건너 수령해 오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이들에게 준직의 상을 주더라도 그에 상당한 직책이 없으면 끝내 그들의 재주를 쓸 수 있을 때가 없을 것이니, 도리어 즉시 첨사에 제수하는 것만 못합니다. 또한 노강 첨사(老江僉使) 고엄(高嶖)도 서쪽에서 오는 쌀 1만여 석을 수령해 들인 일이 있는데, 전일 정치화가 진달할 때 빠뜨림을 면치 못했으니, 똑같이 논상해야 할 듯합니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만호는 첨사로 올려야 하겠지만, 정섬과 고엄은 모두 첨사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 두 사람 모두 무재(武才)가 있으니, 수령에 제수해도 무방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정섬과 고엄은 수령에 제수하고, 정석달은 품계를 올려 서용하라."
하였다.
좌명이 전일 유황을 무역해 온 사람을 논상하자고 말한 일을 가지고, 상이 소통사(小通事) 박명천(朴命天)에게는 통정첩(通政帖)을 지급하고, 부상(富商) 이응상(李應祥)에게는 가선첩(嘉善帖)을 지급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있게 베를 상으로 지급하라 명하였다. 박장원이 아뢰기를,
"북도 시재(試才)의 중신(重臣)을 본조에서 지금 차출하려 합니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중신을 차출해 보내는 것은 번거로울 듯합니다. 승지를 보내더라도 불가함이 없습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당초 서필원(徐必遠)이 이 일을 진달하였을 때 대신을 보내자는 것으로 건의하였었습니다. 대신을 보내지 않는 데다가 중신마저 보내지 않는다면 변방의 백성들이 반드시 실망할 것입니다."
하고, 좌명은 아뢰기를,
"변방의 백성을 순시하는 것은 그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조치에서 비롯된 것이니, 상께서 명을 내리시면 누가 가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신이 가겠습니다."
하자, 정원이 아뢰기를,
"대사마(大司馬)가 변방으로 가면 어찌 번거로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는 결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중신을 보내되 해조로 하여금 오늘 정사에서 가려 비의하게 하자고 청하자,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조정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법전은 나름대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일찍이 선왕조 때에는 나이 80세 이상인 자는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모두 당상으로 올려 주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지금 전 감사 홍헌(洪憲)은 나이 80세가 되었는데 아직 성대한 의전을 받지 못하였고, 청송(靑松)에 사는 전 주부 조준도(趙遵道)도 89세인데 그의 자제들이 소를 올리려고 하였지만 준도가 금지하여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 가자하도록 하고, 이들처럼 누락된 사람을 해조에게 수소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생각건대, 본도의 뒤폐단에 관계된 한 가지 일은 이미 체직되었다고 하여 망각의 지경에 놔두고 다른 사람에게 맡겨 그대로 잘못되게 해서는 의리상 온당치 못할 것입니다. 병조가, 신이 각포(各浦)를 차례로 순찰할 적에 먼저 계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우수영 우후(右水營虞候)를 파출시켰다는 등의 일로 추고를 청한 것은 매우 사려깊지 못한 일입니다. 수영의 우후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통제사에게만 파출시키거나 파출시키지 않는 권한을 일임하고 순찰사는 도리어 그 사이에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게 된다면 지금부터 통영(統營)은 오직 교만함을 길러 무비(武備)는 완전히 포기할 것이고, 여러 진(鎭)의 변장들도 그로 인하여 감사를 멸시하고 통영에 잘 보이려고만 힘쓸 것이니, 이 점이 바로 신이 해방(海防)을 위해 깊이 우려하는 바입니다.
또한 통영은 어민을 침탈하여 멋대로 거두어들이면서 한계가 없어 바닷가에 사는 민생이 참으로 매우 측은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발각되는 대로 통영으로 공문을 보내기도 하고 우후에게 전령하기도 하였기에 그들이 꺼리는 바가 없지 않아 조금은 저지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와 같이 부추기고 억제하는 거조가 있게 되면 통제사는 마땅히 공문을 보내지 않을 것이고 우후는 반드시 전령을 받지 않을 것이니, 방자하게 행하면서 누구를 다시 꺼려하겠습니까. 이 또한 한가지 폐단이 점점 불어나 만연되는 것입니다. 폐단이 신으로부터 시작되어 장차 무궁한 데 이를 것이니, 신은 실로 그 점을 부끄럽게 여기고 통분스럽게 생각합니다. 원컨대 신의 소장을 내려 묘당에 자문을 구해 분명히 지휘를 내리셔서 사체를 보존하고 변방의 군비를 엄중히 할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신이 새로 제수 받은 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고 직책을 살피라고 답하였다.
이에 앞서 상진이 주사(舟師)를 순시하며 점검할 적에 우수영 우후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일이 있어, 상진이 계문하여 파출하였다. 병조가 그것을 다른 관서를 침범한 것이라고 하고, 또 그가 차례로 순시할 적에 먼저 계문하지 않았다고 하여 추고를 청하자, 상진이 이로써 소장을 진달하였는데, 상이 선입견에 사로 잡혀 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사는 한 방면을 오로지 통제하고, 순찰하는 직임을 겸한다. 병마(兵馬)와 수군이 모두 절도(節度)의 안에 들어 있으니, 병사와 수사가 높고 중하지만 진실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가 있다면 또한 법에 비추어 용서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더구나 우후이겠는가. 병조가 다른 관서를 침범하였다 하여 추고를 청한 것은 이 점에서 체모를 잃은 것이 심하다.

 

평안도 각읍의 포자(鋪子) 37개소를 파하였는데, 이는 우상 홍명하의 말을 따른 것이다.

 

경상도 거제현(巨濟縣)은 물과 토질이 매우 나빠 병으로 죽는 관리가 많았다.
감사 이상진이 계문하여 본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는 명진촌(明珍村)으로 읍을 옮기자고 청하였다.

 

관서 지방에 큰비가 내렸다.

 

윤6월 14일 갑술

장령 정창도(丁昌燾)와 지평 이섬(李暹)이 조율한 것이 온당하지 못하였다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지평 민시중이 아뢰기를,
"대소의 모든 명령이 반드시 정원을 말미암는 것은 사문(私門)을 막고 사경(邪徑)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정원 외에 또 차비관(差備官)을 통한 전교가 있어 환관이 전담을 합니다. 각사(各司)를 불러 마음대로 지시하고 취하면서 전지를 받았다고 하니 누가 감히 항변하겠습니까. 지난번 반궁(泮宮)에서 개좌(開坐)하던 날 신이 성균관 관원으로 나아가 참석하였는데, 내관이 본관의 하리를 불러 전언하기를, ‘상께서 나인들의 병 요양하는 집을 짓는데 북학(北學)의 섬돌을 가져다 쓰고 인수궁(仁壽宮)의 섬돌을 대신 주라고 명하였으니, 이대로 거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이는 환관이 왕명을 칭탁하는 말에 불과하니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장관과 상의하기를, 만약 상의 명이 있었다면 마땅히 정원에 내렸을 것이니 내관이 입으로 전하는 말은 믿고 따를 수 없다는 것으로 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자 하니, 그 일을 주장하는 내관이 곧바로 호조에 통지해 말하기를 ‘만약 본조로부터 초기(草記)에 사유를 갖추어 올리면 윤허를 받을 수 있다. 상의 뜻도 반드시 이와 같은 것이다.’고 하였다 하니, 아, 참으로 이런 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나라가 망할 조짐일 것입니다.
전하께서 한 나라에 군림하여 위엄이 혁혁하니 호령을 발하면 어찌 막힘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가노(家奴)를 시켜 은미한 뜻을 전해 보여서 조정의 신하들에게 넌즈시 명하여 뜻을 굽혀 거행하게 하시니, 성스러운 세상에 의당 있어야 할 바가 심히 아닙니다. 만약 이런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뒷날의 일은 이보다 큰 것이 있을 것입니다. 내관이 ‘상의 뜻이 이와 같다.’고 하면 조정의 신하들은 ‘내관이 전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서로 받들어 감히 어기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니, 이렇고서도 전복되는 데 이르지 않을 나라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폐단은 당초에 차비 내관이 왕명을 빙자하여 농간을 부리는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끝내는 조정의 신하들을 턱짓으로 부리는 데까지 이를 것이니, 그대로 놔두고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조는 내관이 지시하는 바를 받들어 조정의 사체를 무너뜨렸으니, 또한 매우 의리가 없습니다. 당해 내관은 적발하여 죄를 정하고, 호조의 당해 당상과 낭청은 모두 파직하소서.
북학의 섬돌을 호조의 초기로 인하여 옮겨다가 쓰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 일의 불가함은 의리상 매우 분명합니다. 왜이겠습니까. 불법(佛法)이 흘러 들어온 이래 역대 제왕으로서 이를 조장하지 않는 임금이 드물었는데, 그 무리들을 내치고 그들이 거처하는 곳을 학궁으로 만들되 우리 조정에서처럼 훌륭하게 한 사람이 그 누가 있었습니까. 팔방이 전송(傳誦)하고 사림이 기뻐서 날뛰었습니다. 곧이어 처한 곳이 편벽되어 학업을 익히기에 불편하다고 하여 성균관으로 철거해 옮겨 학당을 수리하는 데 쓰도록 하였습니다. 전후의 수교(受敎)가 매우 자상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 쓰도록 하시니, 당초 이교(異敎)를 내치고 학교를 숭상하려는 전하의 성대한 뜻에 이미 어긋나는 것입니다. 더구나 나인들의 병 요양소가 얼마나 미세한 것인데 학궁의 섬돌을 가져다 써 사방에서 듣고 놀라게 한단 말입니까. 공역(工役)이 편리하고 가깝다는 것으로 의리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북학의 섬돌을 옮겨다 쓰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호조가 초기를 올릴 때에 하리들이 내관이 진언한 자초지종을 이미 말하였으니, 사체로 헤아려보건대 받아들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원이 게을리 마음을 쓰지 않고 예에 따라 입계하였으니, 어물쩡하며 사체를 잃은 것이 또한 호조와 다름이 없습니다. 당해 승지를 파직하소서. 제가(齊家)와 치국(治國)은 수신(修身)에 근본을 둡니다. 궁중(宮中)과 정부(政府)가 일체가 되어 다름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근래 국가의 일이 갈라져 두 길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정원에서 나오고, 하나는 차비문에서 나오니 실로 사심이 없는 성인의 도리가 아니며, 조종조에 없었던 일입니다. 이를 따라 행하게 되면 희롱하고 방자한 마음을 기르고 외람되고 요행을 바라는 습관을 열어, 공사(公私)를 방해하는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모든 대소의 명령을 모두 정원에 내려 출납의 책임을 오로지하게 하여 공평하고 밝은 정치를 밝히도록 하소서.
여러 궁가(宮家)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것이 날로 더욱 심해져서 도망한 자를 부르고 주인을 배반한 사람을 받아들여 나약한 사람을 능멸하고 외로운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다. 이는 각궁의 주장 내관이 세력을 믿고 침탈하여 생기는 결과 아닌 것이 없으니, 어찌 크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근래 금평위궁(錦平尉宮)의 주장 내관인 김희안(金希顔)이 상민 이충준(李忠俊)의 비녀(婢女)를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충준이 사유를 갖추어 형조에 정장(呈狀)하자, 형조가 문안을 살펴보고서 이충준에게 지급하도록 판결하고 이어 주인을 배반한 비녀의 죄를 다스렸습니다. 그러자 희안이 궁노를 많이 보내 그 비녀를 강제로 빼앗아, 3년 동안 숨겨두고 있으면서 끝내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근래 충준이 부마(駙馬)의 본가에 연줄을 대고 통고하여 요행히 내어주길 바라며 궁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 비녀를 만나 붙잡으려고 하였는데, 궁노들이 갑자기 나와 마구 구타를 한 뒤 궁문으로 끌고 들어가 종일 거꾸로 매달아 놓았으니, 길가는 사람들이 보고서 놀라고 분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판결을 내린 뒤에 그대로 붙잡고 있어도 나름대로 그에 해당하는 법률이 있게 마련인데, 본주인을 구타하였으니 일이 매우 패악스럽습니다. 말썽을 일으킨 궁노들을 이미 본부에서 추고해 다스렸지만, 이치에 어긋나게 마구 빼앗은 죄를 통렬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궁의 주장 내관인 김희안(金希顔)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
탐장죄(貪贓罪)를 다스리는 법률은 법령에 밝게 있으니 일시적인 너그러운 은혜 때문에 흔들리거나 굽히게 하는 바가 있어서는 진실로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박형(朴泂)은 어리석고 무식하여 탐학과 욕심을 성사시키고 간사하게 재물을 긁어모은 것이 낭자합니다. 자취가 이미 드러났으니 유사는 마땅히 법에 비추어 주벌을 내려 한 사람을 징계해 많은 사람들을 면려하게 하는 바탕을 삼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이미 실형(失刑)인데, 더구나 의논해 처결하라는 명이 뜻밖에 나와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분하게 여기며 그 단서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정의 법이 관대한 것을 오로지 숭상하지만 유독 탐장죄를 다스리는 법에 있어서만은 가장 엄격함을 유지하여 조금도 용서한 적이 없었습니다. 청렴을 가르치는 데에는 탐욕스런 마음을 다스리는 것 만한 것이 없고, 청렴을 드날리려면 반드시 먼저 혼탁한 것을 격발시켜야 하기 때문에 아니겠습니까. 지금 한 무부가 법을 희롱하고 은혜를 저버려 스스로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되었으니, 무슨 용서할 만한 점이 있다고 특별히 너그럽게 놓아 주어서 탐관 오리들로 하여금 경계되어 움츠려드는 바가 없게 하십니까. 나라에는 법이 있어 사사로운 것을 용납할 수 없으니, 박형을 의논해 처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정원의 임무는 오로지 왕명 출납을 주관하는 것이니, 상의 모든 명령에 있어 타당치 아니한 점이 있으면 일에 따라 개진하여 잘못을 바로잡아 구원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직임입니다. 어찌 단지 뜻하시는 대로 받들어 성명(成命)을 봉행할 뿐이겠습니까. 근래 박형을 의논해 처결하라는 명이 법에 있어 실형(失刑)이 되고, 일에 있어 지나친 거조가 되는데 게을리 마음을 쓰지 않고서 준행하기만을 겨를없이 하고 끝내 복역(覆逆)하는 거조가 없었으니,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그냥 놓아둘 수는 없습니다. 당해 승지를 무거운 쪽을 따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파직시키는 일과, 의결해 처리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는 일과, 추고하는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당해 내관 김희안은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마지막 박형 등에 관한 두 조항은 네가 생각지 못함이 심하다. 악역(惡逆)의 죄라고 하더라도 형신을 하여도 자복하지 않으면 혹 의논해 처결하는 일이 있다. 비록 탐장죄를 지은 관리라 하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일 만하다고 하지 않으면 혹 의논해 처결하거나 사실을 조사해 처결토록 하여, 또한 한 가지 방법 만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혹 죄가 있는데도 의논해 처결하는 것이 너무 느리다면 뭇 관원들의 논계가 안 될 것이 없다. 왕명을 봉행한 승지를 추고하자는 등의 일은 참으로 망령되고 경솔한 데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비망기를 정원에 내려 이르기를,
"나인들의 질병을 요양하는 집을 설치하려 한 것은 단지 내외를 엄히 하고 궁금을 엄중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일이 비록 미세하고 요긴치 않은 것이지만 말세에 궁금이 엄중하지 않은 것이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기 때문에 우선 당해 내관으로 하여금 공문을 보내 다시 설치하게 하면서 대단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지금 능멸하는 뜻으로 말을 하면서 단지 한 내관과 한 하리가 왕복하는 사이에 잘못한 말을 취해서 곧바로 군상을 의심한 것이 이런 데까지 이르니, 아, 상하가 막히고 틈이 난 것이 어쩌다 이와 같이 되었단 말인가. 어찌 한 가지 미세한 일로 인해 이와 같이 모욕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인들의 질병 요양하는 집을 다시 설치하는 일을 속히 그만두도록 하라. 전에는 질병을 요양하는 집을 설치해 질병이 있는 나인들을 거처하게 하였는데, 어느 때 중도에 폐지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상이 근래 궁인 중에 병을 앓는 자가 연이어 계속된다고 하여, 호조에 명하여 궁인들이 질병을 요양하는 집을 짓게 하고, 내시 윤완(尹完)으로 하여금 이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인수궁(仁壽宮)과 자수궁(慈壽宮) 두 궁궐을 혁파하였는데, 자수궁을 헌 것은 성균관에 내려 학사(學舍)를 수리하게 하였고, 질병을 요양하는 집의 섬돌과 여러 돌은 장차 인수궁을 헌 것에서 취해다 쓰게 하였었다. 그런데 윤완이 인수궁은 성균관에 가깝고 자수궁은 질병을 요양하는 집을 짓는 곳에서 가깝다는 것으로 상에게 편리에 따라 그 돌을 바꾸어 쓰자고 아뢰고는 호조의 구실아치로 하여금 성균관에 말하게 하였다. 당시 이경억(李慶億)이 대사성이었고, 민시중이 성균관 관원이었는데, 당초에 배당받은 것이 탑전의 계청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지금 내관의 말을 받들어 행하기는 결코 어렵다고 하였다. 윤완이 또 자기 뜻으로 호조의 관리에게 말하여 호조로 하여금 스스로 초기(草記)를 만들게 하였다. 경억이 당시 호방 승지가 되었었는데 그 초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억이 신시에 퇴근했는데, 대방 승지(代房承旨) 이원정(李元禎)이 그 곡절을 모르고 받아들여 상이 따르자, 시중이 이 논계를 한 것이다. 그 말이 곧기는 곧았지만 말이 대부분 지나쳐 한바탕 소란을 격렬하게 일으켜 상하의 뜻이 어긋나고 벌어지게 하였으니, 애석하다.

 

윤6월 15일 을해

좌승지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삼가 어젯밤 정원에 내리신 전교를 보니, 말씀하신 뜻이 지극히 엄하였고 질병을 요양하는 집을 짓는 것을 속히 그만두게까지 하시었습니다. 신이 받들어 읽다가 다 읽기도 전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오싹하였습니다. 신은 어제 아침 해조를 추고하자고 경솔하게 청하였습니다. 지금 이러한 하교는 비록 대각의 논계가 과당한 것으로 인한 것이지만 신의 아룀이 실로 그 전에 있었으니, 황공하여 죄를 기다립니다."
하였다. 또 우승지 안후열(安後說)과 함께 아뢰기를,
"당초 질병을 요양하는 집을 짓는 거조는 실로 궁금을 엄중히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고, 또 조종조의 옛 제도를 회복하려는 것이었으니, 이는 참으로 그만 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각의 논계로 인하여 능멸하는 뜻으로 말하였다느니 곧바로 군상을 의심한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 전교하기까지 하셨고, 이어 그 일을 그만두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거조가 평안치 못한 결과가 됨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평안한 마음으로 사리를 살피시어 비망기를 도로 거두시고 전처럼 거행하소서. 그래서 상하 사이가 막히고 틈이 벌어지는 근심을 없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어젯밤 헌부에 답한 비답을 보고, 이어 정원에 내린 비망기를 보니, 말씀하신 뜻이 지극히 엄하였습니다. 신들은 서로 돌아보고 깜짝 놀라며 천지와 같이 커다란 도량에 아쉬운 감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저 질병을 요양하는 집을 설치하는 것은 오로지 나인들의 병 조리하는 곳을 만들어주어 나인들로 하여금 여염에 뒤섞여 거처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조종조에서 설립했던 본 뜻이 실로 내외를 차단하고 궁금을 엄중히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이런 폐단을 염려하시어 다시 설치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니 실로 한만하게 집을 짓고 수리하는 데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분부할 적에 내관의 하인들이 왕복하며 잘못을 저지른 일이 있었습니다. 헌부가 이같이 규찰해 논핵하는 거조가 있었던 것은 그 의도가 단지 사경(邪徑)을 막고 사문(私門)을 막아서 뒷날 슬며시 커져가는 조짐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을 뿐입니다. 그 장구하고 원대한 생각과 과감히 말하는 기상은 숭상할 만한 것이지, 노여워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대각의 논계는 섬돌을 옮겨다 쓰는 것이 불가하다는 점만을 논하였을 뿐인데, 전하께서 갑자기 그 일을 그만두라는 전교를 내리셨으니 이는 실로 사기(辭氣)가 불평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어찌 전하께서는 이미 그 논계를 윤허하시고서 또 엄한 전지를 내려 듣는 사람들을 놀라고 의혹하게 하신단 말입니까.
곧바로 군상을 의심하여 능멸하고 모욕하였다는 등의 말은 더욱 인정 밖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성인의 너그럽고 넓게 선을 받아들이는 도량은 마땅히 이와 같지 않아야 할 듯싶습니다. 더구나 형벌을 받고 있는 탐장한 관리에 대해 의논해 처결하라는 명이 갑자기 있었습니다. 헌부의 관원이 그 명을 도로 거두기를 계청한 것은 실로 법을 집행하려는 의논인데, 어찌 망령되고 경솔하다는 등의 말로 지레 기를 꺾어버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민시중은 신진의 사인(士人)으로 처음 언관이 되어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해야 하는 줄만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논열한 것이 설혹 지나친 말이 있더라도 참으로 너그러이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 이런 특별한 전교를 내리시니 말소리와 안색이 사람을 못오게 한다는 것에 가깝지 않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일식 월식이 걷히듯이 허물을 고친 모습을 속히 보이시고, 탐장죄를 다스리는 법률을 늦추지 마셔서 무너진 기강을 엄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평 민시중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어제 정원에 내리신 전교에서 군상을 지나치게 의심한다고까지 전교하셨다고 하니, 신은 지극히 두려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아,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는 의리상 부자지간과 같으니, 아비를 의심하는 자식이 일찍이 없었던 바에야 어찌 임금을 의심하는 신하가 있겠습니까. 지금 내관이 상의 뜻을 칭탁하여 말을 했으니, 그 일이 미세하긴 하지만 그 조짐은 두려워할 만한 것입니다. 구구한 신의 생각으로는 단지 즉시즉시 논죄하여 그 기미를 방지하려 한 것일 뿐이었는데, 말이 뜻을 다 나타내지 못하여 도리어 엄한 전지를 받들었습니다. 군상을 능멸한다는 전교와 같은 것은 더욱 신자로서 감히 들을 바가 아닙니다. 신이 논한 내용은 환관이 임금의 명이라고 속이고 섬돌을 옮겨다 쓴 것이 온편치 못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망령된 말이 한번 나오자 성상의 심기를 격분케 하여 질병을 요양하는 집을 짓는 일를 혁파하라고까지 하셨으니, 더욱 성인의 화평한 기상이 아닙니다.
박형(朴泂)을 의논해 처결하라는 명에 있어서도 실로 이는 커다란 실형(失刑)입니다. 박형이 임무를 저버리고 죄를 범한 것은 재물을 가득히 긁어모았을 뿐만이 아닙니다. 정황이 이미 드러나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 어찌 그가 자복하지 않는다고 하여 갑자기 용서해줄 수 있겠습니까. 왕명을 출납하는 신하는 끝내 되돌려 아뢰지 않았으니,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어찌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마음으로 격발한 것이 망령되게 성상의 노여움을 촉발시켰으니, 이는 신의 성의가 하찮은 소치 아님이 없습니다. 어찌 감히 얼굴을 치켜들고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시중이 물러나 기다리자,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평안도 양덕(陽德) 지방에 연일 큰 비가 내려 산언덕이 무너져서 4인이 깔려 죽었다.

 

윤6월 17일 정축

이관징(李觀徵)을 장령으로, 이백린(李伯麟)을 지평으로, 홍처대(洪處大)를 병조 참의로, 이상일(李尙逸)을 형조 참의로, 정지화(鄭知和)를 한성 우윤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대사성으로, 이단하(李端夏)를 부수찬으로, 김우석(金禹錫)을 헌납으로 삼았다.

 

지평 민시중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망령되게 성상의 위엄을 촉발하여 스스로 죄를 불러들였으니, 죽음을 무릅쓰고 스스로 논열함은 견책하여 배척하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를 청하니, 실로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이어 옥당의 차자를 보니, 신의 말을 지나치다 하였습니다. 아, 내관의 교만 방자한 짓을 규찰해서는 안 되며, 군상의 잘못된 거조를 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또한 말하는 사이에 둘러대며 비호하기를 힘쓰고, 일을 좇아 곧바로 배척하여 시비를 가려 밝혀서는 안됩니까? 신은 보잘것없는 신진으로 교제는 옅으면서 말하는 것이 깊어 군부(君父)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였고, 옥당은 공론이 있는 곳인데 또한 지나치다고 신을 배척하였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태연히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하고, 물러나 기다렸다. 옥당이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 중에 지나치다는 말은 가설적으로 한 말이지, 특별히 지척하여 한 말은 아닙니다. 이로 인하여 혐의를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청컨대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따랐다.

 

호군 김수항(金壽恒)이 문형을 사양하였으나, 허락치 않았다.

 

호남에 큰 비가 내려 곡성(谷城)·구례(求禮) 등의 읍에서 산기슭이 무너져 5인이 깔려 죽고, 2인이 빠져 죽었으며, 민가 또한 대부분 물에 잠겼다. 남원부(南原府)에는 벼락이 쳐 2인이 죽었다.

 

전라도 광주(光州)에 지진이 있었는데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윤6월 19일 기묘

간원이 아뢰기를,
"훈련 도감의 은화(銀貨)는 근년에 민폐가 있을까 염려되어 절대로 빌려주는 것을 허락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 주부 이제현(李齊賢)이 일찍이 낭청이 되었을 적에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북경으로 가는 역관들에게 마음대로 빌려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마음대로 군수(軍需)를 내어 사사로이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 죄는 평범하게 처결해서는 안 되니, 청컨대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고, 또 도총부 경력 박진한(朴振翰)이 일찍이 관직에 있을 적에 탐욕스럽고 비루한 짓을 한 죄를 논핵하여 사판(仕版)에서 깎아버리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랐다.

 

전라도 고부(古阜) 등 7읍에 소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윤6월 20일 경진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의로, 장선징을 헌납으로 삼았다.

 

윤6월 21일 신사

헌부가 아뢴 바 초기(草記)를 받아들인 승지를 파직하라는 일을 네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자, 이에 정지하였다.

 

호남에 큰 비가 내려 전주(全州) 경내의 산기슭이 무너지고 골짜기와 강언덕이 뒤바뀌었다. 5인이 깔려 죽고 18인이 빠져 죽었다. 80여 호의 민가가 물에 잠겼으며, 깔려 죽거나 빠져 죽은 소·말·돼지·양도 또한 많았다. 본도 감사에게 명하여 구휼하는 예전을 거행하게 하였다.

 

전주·진안(鎭安) 등의 지역에 벼락이 쳐 4인이 죽었다.

 

윤6월 22일 임오

헌부가 호조의 당상과 낭청을 파직하는 일로 다섯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아 정지하였다.

 

행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동부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전일 호조의 초기를 받아들인 일로 상소하여 그 대략을 진술하고 체직을 빌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황해도 안악(安岳)·서흥(瑞興)·봉산(鳳山)·수안(遂安) 등읍의 포자(鋪子)를 혁파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감사 오정원(吳挺垣)의 계문을 따른 것이다. 오정원이 계문하기를,
"일년 동안 거두어들이는 것을 일년 동안 쓰는 것과 비교해 보면 태반이 부족합니다. 만약 전환하여 증식하지 않고 단지 본색(本色)만 가지고 잇대어 사용한다면 해결할 길이 실로 없습니다. 청컨대, 도내의 포자 열한 군데 가운데 여섯 곳은 혁파하여 민폐를 제거하고, 다섯 곳은 그대로 보존하여 재화를 유통하고 서로 무역을 하며 재물을 증식해서 취해 쓰는 바탕을 삼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지금 오정원의 계본을 보니, 포자 여섯 곳은 혁파하고 다섯 곳은 그대로 남겨두자고 하였습니다. 사세를 요량하여 혁파하기도 하고 그대로 보존하기도 하였으니, 일을 처리하는 데 마땅함을 얻은 듯합니다. 그리고 채무를 진 사람이 쇄마(刷馬)를 세울 경우 그 부채를 계산해 줄여주면 공사간에 모두 편리할 것이니, 모두 이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윤6월 23일 계미

헌부가 아뢰기를,
"충청 병사        이두진(李斗鎭)이 지난번 서원현(西原縣)의 공도회(公都會) 때에 객사(客舍)에다 시험장을 설치했다는 이유로 거자(擧子)들에게 화를 내면서 그들을 몰아 내쫓고 시험장을 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사이의 곡절이 도신의 계본에 다 갖추어져 있으니, 두진의 전도되고 망령된 정상은 조정이 다 아는 바이고, 많은 선비들이 다같이 분개하는 바입니다. 무부의 어리석고 패덕한 거조로 인하여 막중한 국가의 시험을 끝내 시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의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죄는 놓아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외방의 과시(科試)는 으레 그 읍의 객사에서 베풀어지게 마련이다. 병사        이두진이 마침 염병으로 죽은 비첩(婢妾)의 상을 당해 객사 가까운 곳으로 피해 우거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과장(科場)을 개설하자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싫어해 고의로 다른 일을 핑계하고 군뢰(軍牢)를 시켜 거자들을 몰아 내며 시험지를 내게 하였다. 앞서 나가던 유생들이 달아나 피할 적에는 몽둥이로 맞은 자까지 있었다. 거자들이 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겨 우르르 물러갔고, 다음날 과장을 다시 열었을 때 끝내 제술한 것을 들이지 않아 과장을 파하기에 이르렀다. 도신이 사실에 의거해 치계하자, 대각의 신하가 법을 집행해 논열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윤허를 내리지 않았으니, 성상의 뜻이 대체로 무신을 중히 여기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윤6월 24일 갑신

권대운(權大運)을 좌승지로, 김우석(金禹錫)을 집의로, 오두인(吳斗寅)을 부교리로, 박세모(朴世模)를 형조 참판으로, 이단하(李端夏)를 북평사로,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이상한 질병을 심하게 앓아 비국이 아뢰어 체직되었다.

 

경상도 각읍에 충재(虫災)가 있어 곡식을 해쳤다.

 

밤 삼경에 달이 필성(畢星)의 큰 별을 범하였다.

 

윤6월 25일 을유

간원이 아뢰기를,
"사예(司藝) 맹주서(孟冑瑞)와 병조 정랑 정중휘(鄭重徽)는 일찍이 대관이 되었을 적에 혹 전후로 우물쭈물하여 일이 매우 근거가 없었으며, 혹 일에 임해서 위축되어 말을 못하여 자취가 구차한 데 관계되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김우석(金禹錫)과 지평 이백린(李伯麟)을 파직하였다. 당시 헌부의 관원들이 일제히 모이지 못해 도사(都事)와 수령(守令)들에 대해 오래도록 서경(署經)을 하지 못하였다. 정원이 헌부의 새로 제수된 관원을 패초하여 서경을 하게 하자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우석 등이 소명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 단지 사은 숙배만 행하고 곧바로 정고(呈告)하였다. 정부가 아뢰어 체차를 청했는데, 상이 하교하였다.
"아무 이유없이 인피하고 들어가니 일이 지극히 한심스럽다. 모두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 오늘 안으로 정사를 열어 대관을 차출해서 서경을 하지 않은 수령을 속히 서경하게 하라."

 

송시철(宋時喆)을 집의로, 장건(張鍵)을 지평으로, 임의백(任義伯)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 참판 이행진(李行進), 참의 이천기(李天基)가 질병 요양하는 집에 관한 초기(草記)의 일로 모두 사직소를 올렸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왜인이 야학(野鶴) 10마리와 옥대구(玉帶鉤) 10개를 무역하고자 구했는데, 단지 야학만 허락하였다. 대구는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고 알리고, 동래의 장사꾼으로 하여금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 사사로이 팔게 하였다.

 

왜인이 와서 대마 도주가 정월에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고, 서계(書啓) 안에 축하한다는 말을 삽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상이 안질이 있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도제조 이하가 모두 기둥 밖에 엎드려 있었다. 들어가 진찰할 적에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호조 판서 정치화는 나랏일에 마음을 다해 항상 경비를 걱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치화가 탁지(度支)의 장관이 된 뒤부터 저축이 매우 많아졌으니 체개하는 것은 애석합니다. 그러나 이미 봉명 사신의 직임에 차출되었으므로, 국경을 나간 뒤에는 장차 체개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치화가 이제 막 대각의 논핵을 받았으니, 중신이 탄핵을 견뎌가며 다시 나온다는 것은 또한 매우 온편치 않습니다. 지금 사직소를 올렸을 때 체차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명하가 아뢰기를,
"함경 감사가 아직도 교체되지 않아 우려할 만한 일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의 전례로는 대신 이외에는 감히 세 번씩이나 사직소를 올리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민정중(閔鼎重)이 세 번씩이나 사직소를 올렸으니, 반드시 체직된 뒤에야 그만두고자 하는 것이다. 이 일은 어떠한가?"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정중이 지난날 잠시 전하의 엄한 꾸지람을 받았지만 지금은 전하의 노여움이 이미 풀려 곧바로 거두어 쓰셨습니다. 비록 불안한 정세가 있기는 하지만 세 번씩이나 사직소를 올리는 데 이르렀으니, 번신(藩臣)의 체모와 규례를 매우 잃었습니다. 추고하고 독촉해 보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거운 쪽을 따라 추고하고, 재촉해 내려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전일 충청 병사 이두진(李斗鎭)과 전 서원 현감(西原縣監) 홍주삼(洪柱三)의 일은 똑같이 서로 다투는 것이 있고 다같이 잘못한 점이 있으니, 병사는 직첩을 회수하고 출두하여 추고하게 하며 현감은 잡아다 국문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사는 핵실하여 처결하지는 말고 직첩을 거두고 추고하라. 현감은 잡아다 국문하고, 감사도 추고하라."
하였다. 두진은 선비들을 구타한 일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을 몰아 내쫓은 일은 두진을 구원하는 자라도 또한 스스로 해명할 수 없을 것이다. 과장을 혁파한 거조가 두진에게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명하는 단지 상관을 능멸하는 것이 불가한 줄만 알았지, 선비를 몰아 내쫓아 끝내 과장을 혁파하기까지 한 일이 놀라운 줄은 모른 것이다. 논죄할 적에 이런 차등의 구별이 있으면 장차 무부의 교만하고 오만한 관습을 길러줄 것이니, 애석하다.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윤6월 29일 기축

헌부가 이두진(李斗鎭)을 파직하는 일로 여섯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아 정지하였다.

 

정언 신후재(申厚載)가 아뢰기를,
"전일 호조에서 섬돌을 옮겨 쓰게 하자고 초기를 올린 일이 마침 판서가 정고(呈告)한 밤에 있었습니다. 그때 작성한 초기는 실로 참판 이행진(李行進)의 손에서 나왔는데 행진의 사직소 안에는 그 실상을 전혀 감추고 단지 ‘신 또한 거기에 참여했다.’고만 말하였으니, 일의 근거없음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또한 한번 소를 올린 뒤에 곧바로 출사하여 오로지 장관에게 허물을 돌려 비방을 면하는 계책을 삼으려고 하였으니, 방정한 품위를 크게 손상시켜 사람들이 모두 비웃고 손가락질 하였습니다. 신이 어제 동료에게 간통을 띄워 논핵해 파직시키려고 하였는데, 동료들의 의견이 엇갈려 끝내 귀일되지 않았습니다."
하고, 인피하였다. 헌납 장선징, 대사간 이홍연, 사간 이준구는 모두 행진을 위해 난처하게 여기고, 정언 정륜은 말을 만드는 사이에 대략 삭제하거나 고치려고 하여 이틀 동안 왕복하였지만 끝내 귀일되지 못했던 것이다. 드디어 모두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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