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8권, 현종 5년 1664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10.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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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임진

정언 맹주서(孟胄瑞)가, 일찍이 대간의 직에 있을 적에 서필원의 일을 논하지 않아 배척을 받았는데 지금에 이르도록 공의가 준엄하게 제기되니 신이 어찌 감히 다시 논열할 것이 있겠느냐고 하면서, 인피하여 체직을 청하였다. 부수찬 남이성 등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말의 빠르고 늦음에 관계없이 오직 그 책임을 스스로 다해야 마땅합니다. 청컨대 주서를 출사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주서가 소명에 나아가지 않아 체직되었다.

 

김수항(金壽恒)을 예조 판서로, 윤문거(尹文擧)를 이조 참판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조복양(趙復陽)을 강화 유수로, 조수익(趙壽益)을 형조 참판으로, 이홍연(李弘淵)을 대사간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우승지로, 김수흥(金壽興)을 우부승지로, 이준구(李俊耉)를 집의로, 여민제(呂閔齊)를 장령으로, 정창도(丁昌燾)를 지평으로, 김우석(金禹錫)을 헌납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수찬으로 삼았다.

 

6월 3일 갑오

대사간 이홍연이 추감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상이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고 이어 탕척을 명하였다.

 

지평 정창도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대간의 탄핵을 받았는데, 문득 거두어 녹용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방정한 품행에 관계되니, 어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월과(月課)를 제술하지 않아 바야흐로 추감을 받고 있으니,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청컨대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명하여 추고를 탕척하였다. 창도가 물러나 기다렸는데, 대사간 이홍연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지난번 대각의 탄핵을 입은 것은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다고 일컫고, 지금의 추감에 대해서는 이미 특별히 탕척하는 명을 받았으니 피할 만한 혐의가 따로 없습니다. 청컨대 출사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창도가 소명에 나아가지 않아 체직되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여러 의원들에게 들어와 진찰하도록 명하였다. 동부승지 남구만(南九萬)이 면대를 청하여 아뢰기를,
"근래 서필원의 일로 조정이 어지럽습니다. 성상께서 그 옳고 그름을 통찰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건만, 성상의 위엄이 한결같이 그치지 않고 진동하니 신은 성상의 뜻에 무슨 불평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할아비와 손자 사이는 서로의 원수에 대해서 반드시 보복해야 한다는 설을 일찍이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이 점 때문에 뭇사람이 마음으로 전하에게 실망하는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지난날 이정기(李廷夔)를 통신사(通信使)로 차임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소장에 진달한 일이 있자, 교린(交隣)과 청(淸)나라를 섬기는 일에는 다른 점이 있다고 상께서 전교하였다고 하니, 이런 의리는 더욱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국에 사신을 보내는 문제는 보내느냐 보내지 않느냐는 것이 나에게 달려 있지만 청나라에 대해서는 내가 저들에게 견제됨을 면치 못하고 있다. 만약 부득불 보낼 일이 있다면 어찌 내 편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뜻이 이와 같은데, 말하는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쩔 수 없다면 양송(兩宋)030)  이라도 가야 된다."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몰려서 그의 사사로운 정황을 펴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면 오직 허락하지 않으면 되지, 어찌 제도로 정하는 일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의 처치하는 도리로써는 오직 필원의 관직을 체직하는 길뿐이니, 진실로 대각의 논계를 따른다면 일이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이미 알고 있다."
하였다.

 

이일상(李一相)을 공조 판서로, 조수익(趙壽益)을 호조 참판으로, 임의백(任義伯)을 형조 참판으로, 심세정(沈世鼎)을 병조 참의로, 안후열(安後說)을 병조 참지로,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정언으로 삼았다.

 

6월 5일 병신

함경도 감사 서필원이 연달아 소장을 올려 체직을 빌었는데, 그 소장을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관찰사는 한 도의 풍헌(風憲)을 주관하는 사람이니, 탄핵을 무릅쓰고 그대로 재직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따랐다.

 

6월 6일 정유

상이 송준길(宋浚吉)의 상소에 답하였다.
"소를 살펴보고 깊이 감탄하였다. 나에게 잘못이 있는 것을 경이 말하지 않으면 내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상소 중에 찬성(贊成)의 상소를 마음에 공평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내가 경에게 바라던 바가 아니다. 내 어찌 필원의 상소가 내 뜻에 맞는다고 하여 찬성의 상소를 소홀히 하는 것이겠는가. 다만 서로 미더워하지 못하는 마음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관학(館學)의 유생들과 전관(銓官)에 대해서는 이미 그들의 벌을 감면하여 풀어주게 하였으니, 경은 안심하고 몸조리나 잘하여 올라와 나의 뜻에 부응토록 하라."

 

6월 7일 무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내국(內局) 도제조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서필원의 일은 당초 미세한 데에서 비롯되어 점점 확대돼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저 두 신하가 성은을 입어 벌을 감면받게는 되었지만, 죄명이 무거웠기 때문에 감히 태연하게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맡고 있는 직책이 모두 중임에 관계되니, 원컨대 전하께서 속히 진정하는 계책을 강구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반열에 나아갈 수 있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두 신하는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을 말한다.】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415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경성(京城)에 염병이 크게 번졌다.

 

6월 9일 경자

이유상(李有相)을 지평으로, 원두표(元斗杓)를 군기시 도제조로, 민정중(閔鼎重)을 함경 감사로, 이원정(李元禎)을 동부승지로, 권령(權坽)을 형조 참의로, 이지천(李志賤)을 한성 우윤으로 삼았다.

 

6월 10일 신축

상이 침을 맞았다. 내국 도제조 정유성이 아뢰기를,
"금년에는 염병이 매우 극성을 부리고 있으니, 상께서 친히 제문을 지어 중신을 보내 제사지내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품계하게 하였다. 유성이 또 아뢰기를,
"이만(李曼)은 신문하여 처분된 뒤에 한번도 정목(政目) 가운데 비의(備擬)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김휘(金徽)도 직책이 혁파되었지만 내외의 직책에 구애되지 않고 심지어 함경 감사가 되기까지 하였는데, 이만에 대해서만 유독 그렇게 하지 아니하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신과 이만은 죄가 같았는데 이만은 이미 이와 같이 되고 말았으니, 신이 어찌 얼굴을 버젓이 들고서 벼슬에 종사할 수 있겠습니까. 신과 같이 늙고 병든 사람은 이미 시험해 보았듯이 쓸모가 없지만, 이만은 큰 인재이고 나이도 늙지 않았으니, 어찌 오래도록 폐치해 두고 쓰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이 연행(燕行)을 갔다 돌아오면서 그와 얘기를 해보고 마음속으로 참으로 특출나게 여겼습니다. 지금 민정중(閔鼎重)이 강도(江都)를 번고(反庫)하고 돌아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전후의 유수 중에서 그 직책을 잘 거행하여 맡겨준 임무를 저버리지 아니한 자는 오직 이만 한 사람뿐이다.’ 하였습니다. 이만이 강도를 맡은 지가 벌써 10년이 되었는데, 유중이 그 공적을 성대하게 일컬으니, 이와 같은 사람을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 중에 직책을 혁파하는 것은 원래 대단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가 물러나기를 구한 상소에 대해 이조가 회계한 것을 좌부승지 김익경(金益炅)이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청컨대 그의 청을 허락하여 인신의 그칠 줄 아는 지절을 면려하고, 조정에서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아름다움을 드러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 허락치 않는 것이 영원히 치사(致仕)를 폐지하려는 뜻은 아니다."
하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상차하여 사직하고, 이어 대각이 일을 회피하는 풍습이 생겨 제수되면 곧바로 체차를 도모하는 폐단에 대해 진달하고서 결연히 건강(乾綱)031)  을 휘둘러 통렬히 징계하고 면려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였다.
"차자의 말은 참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왔으니, 어찌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좌참찬 허적(許積)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신의 종적이 불안하기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 평소에도 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의논이 시끄러운데, 성상의 은총이 뜻밖에 나와 도리어 사람들의 의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높은 벼슬자리에 두는 것은 온전하고 편안하게 하는 계책이 아닙니다. 산직(散職)으로 보내면 혹 물정을 조금은 달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곧 오늘날 지극히 바라는 바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속히 직책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허적이 성묘(省墓)한다고 휴가를 받아 떠나려 하였는데, 상이 그가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떠나지 말라고 곧바로 명하였다. 뒤에 인견하였을 때, 영상에게 이르기를,
"좌참찬이 이때에 휴가를 청한 것은 서필원(徐必遠)의 일로 불편한 점이 있어 내려가서 오지 않으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였는데, 태화(太和)가 들은 대로 대답하였다. 상이 이에 허적을 불러 친히 효유하였는데, 허적이 황공하고 감격하여 사은 숙배하고 물러갔다.
이때에 이르러 승지 남구만(南九萬)이 등대(登對)하여 상에게 아뢰기를,
"허적이 올라오지 않으려는 것을 전하께서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밖의 의논이 전하께서 혹 다른 경로를 통해 아신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허적이 그 소문을 듣고 스스로 편치 못했기 때문에 이 상소를 올린 것이다. 허적은 정밀하고 민첩하며 재주가 있고, 나랏일에 부지런하여 상이 매우 귀중히 여겼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더욱 심했다.

 

6월 11일 임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갔다. 여러 승지들이 승정원에 계류 중인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였고, 옥당도 함께 들어갔다. 승지들이 공사를 다 읽은 뒤에 교리 장선징이 나아가 《통감(通鑑)》을 강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이 위교(渭橋)에 나와 돌궐(突厥)을 방비한 대목에 이르러 선징이 아뢰기를,
"태종이 돌궐의 힘으로 천하를 얻어 신하로서 오랑캐를 섬겼고, 또 만승(萬乘)의 존귀한 몸으로 가벼이 편교(便橋)에까지 나아갔으니, 후세에서 마땅히 본받을 바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종이 처음에는 신하로서 돌궐을 섬기긴 했지만 끝내 돌궐을 신하로 삼았으니, 이는 능히 하기 어려운 일이다. 태종이 친히 위교로 나갔던 것은 곧 용병(用兵)의 계략이었으니, 상도(常道)로 논할 수 없다."
하자, 우승지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태종에게는 영특하고 호걸스러움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고, 안으로 행실이 바르지 못했으니 이 점이 바로 선유들이 허여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하였다. 선징이 또 강하여 현덕전(顯德殿)의 뜰에서 활쏘기를 연습했다는 대목에 이르렀는데,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효종 대왕(孝宗大王)도 후원(後苑)에서 재예(才藝)를 시험하였는데, 이상진(李尙眞)이 불가하다고 하며 백제(百濟)에서 황창랑(黃昌娘)이 검무(劍舞)를 추었던 일032)  을 인용하여 진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군이 의심하는 마음으로 아랫사람에게 임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불안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러니 성심성의껏 그들을 대우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선징이 다시 강하여 태종이 위징(魏徵)을 침실로 데리고 들어갔다는 대목에 이르러 아뢰기를,
"삼대(三代) 때에는 임금과 신하 사이가 매우 엄하지는 않았는데 진(秦)·한(漢) 이후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제하여 대우하는 예절이 현격히 차이가 났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정의 군신간의 예는 옛날에 비해 더욱 엄격합니다. 이는 대체로 우리 조정이 고려의 경우를 거울로 삼아 신하의 권위를 줄이고 임금의 권위를 더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엄하게 된 것이니, 이는 오랑캐 풍습입니다."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한(漢)나라 때에 번쾌(樊噲)는 고조(高祖)가 거처하는 궁중의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갔고,033) 원앙(袁盎)은 신부인(愼夫人)의 자리를 뒤로 물렸으니,034)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임금과 신하 사이의 관계는 오히려 후세의 엄함보다 못합니다. 비록 조종조(祖宗朝)의 고사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하루는 눈보라가 치고 매우 추웠는데 한밤중에 상이 형방 승지 윤필상(尹弼商)을 불러 침실에 입대하게 하고, 죄수 장부를 내놓고 가벼운 죄수를 장차 석방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필상이 물음에 따라 대답하는 것이 매우 정확하자, 상이 중전을 돌아보고 이르시기를 ‘이 사람은 나의 보배로운 신하이다.’ 하고, 술을 따라 내렸습니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전하는 자들이 아름다운 이야기거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자, 아뢰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날씨가 매우 무덥다고 하여 승지로 하여금 전옥서로 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6월 12일 계묘

대사간 이홍연(李弘淵), 헌납 김우석(金禹錫), 정언 신후재(申厚載) 등이 아뢰기를,
"대관에게 논박을 받은 자는 경중을 막론하고 대각의 의논이 결말이 나기 전에 감히 곧바로 먼저 상소를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체상 참으로 당연합니다. 그런데 전 함경 감사 서필원(徐必遠)은 대각의 논계가 일어나자마자 단지 분한 마음에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갑자기 사직하는 소장을 올렸으니, 청컨대 그의 직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단지 추고만 하라고 명하였다.

 

6월 13일 갑진

집의 이준구(李俊耉)가 전 함경 감사 서필원을 탄핵하여 아뢰기를,
"그가 전후로 올린 소장은 구구절절 사리에 어긋나며, 더구나 대각의 논계가 한창 일어나는 날 버젓이 소장을 올려 대관과 서로 쟁송하는 듯이 하였습니다.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진주사(陳奏使)의 정사 홍명하(洪命夏), 부사 임의백(任義伯), 서장관 이정(李程) 등이 청나라로부터 돌아왔다. 당시 유황(硫黃)을 밀수입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조처를 범한 자는 사형으로 논죄하고, 사신 등은 그 직책을 혁파하는 것으로 조율하였는데, 금지 조치를 범하여 죽은 자가 2인이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우상 홍명하에게 이르기를,
"무사히 갔다 왔으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다행이다."
하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모두 성상의 은덕입니다."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공무역하는 쌀을 보내는 연한이 이미 찼습니다. 그러므로 비국에서 일찍이 면포(綿布)로써 하는 것이 편한지 쌀로 하는 것이 편한지의 여부를 가지고 도신(道臣)에게 민간의 실정을 묻게 하였습니다. 지금 감사 이상진(李尙眞)의 장계를 보니 ‘지금 옛 제도를 회복하는 거조로 인해 목면의 품등(品等)을 올리지 않으면서 다시 쌀을 허락치 않는다면 매우 좋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달성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대마도(對馬島)는 본래 곡식이 귀하여 도주(島主)가 이 쌀을 얻는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연한이 차기는 했지만 지금 만약 정지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기꺼이 따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전처럼 쌀을 지급하더라도 만약 그 양을 줄인다면 꽤 다행이겠습니다. 먼저 양을 줄이자는 것으로 말을 했다가 부득이한 뒤에 그대로 허락한다면 양을 줄일 수는 없더라도 점점 더해주는 데에는 반드시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도주가 본도로 돌아오면 위문하는 역관을 으레 보내게 되니, 그때에 의논해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명하에게 청나라 소식을 물으니, 대답하며 아뢰기를,
"어린 황제가 재용을 절약하여 창고가 가득찼으며, 해마다 풍년이 들어 인물이 번성하며, 수레에 말을 매는 것을 금지하여 말로 짐을 실어나르지 못하게 하며, 바야흐로 과거를 베풀어 선비를 취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명하가 올린 방목(榜目)을 영상에게 내어주며 이르기를,
"저들이 거짓으로 방목을 만들어 우리 나라에 자랑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운남(雲南)과 복건(福建) 사람들도 그 방목 안에 들어 있으니, 통일된 것을 이에 근거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신이 길에서 한 과거 응시자를 만났는데, 그 응시자가 말하기를 ‘은(銀)이 없으면 진사가 될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본다면 빈말이 아닌 듯합니다."
하자,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그 말은 낙방한 자의 말이구나."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비밀스런 일들을 대통관(大通官)들이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강도(江都)·남한(南漢)·자연(紫燕) 등처를 경영한 일과 같은 것도 그 대략을 알고 있어 역관들에게 말을 하니,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벼슬아치 사이의 당론과 같은 것도 통관들이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무개는 무슨 당이고, 아무개는 무슨 당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하니, 이는 실로 조정의 수치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판돈녕 윤경(尹絅)은 나이가 1백 살에 가까운 사람으로 얼마 전에 죽었는데, 예장(禮葬)을 얻지 못한 데다가 또 특별히 부의를 보내라는 명도 없었습니다. 그의 집이 몹시 가난하여 어떻게 장례를 지낼 길이 없으니, 마땅히 돌아보고 구휼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례 비용을 넉넉하게 지급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양서(兩西) 지방 백성들의 원망이 매우 극성합니다. 혹 조적(糶糴)의 포흠(逋欠)으로, 혹 각사(各司) 노비의 신공(身貢) 때문에 이미 그 족속을 침탈하고 또 그 이웃에까지 징수하여 온 도가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습니다. 관향(管餉) 포자(鋪子)에 대해서는 그 폐단이 더욱 심합니다. 관서(關西) 지방은 그것을 설립한 지 오래되었고, 해서(海西) 지방은 설립한 지 겨우 10여 년이 되었는데, 이는 있는 데서 없는 데로 무역하여 옮기는 뜻이 아닙니다. 강제로 화물(貨物)을 지급하고서 몇 년 동안 이자를 늘린 뒤에야 바야흐로 독촉해 징수하는데, 채무를 진 자가 혹 달아나거나 죽기라도 하면 침탈이 그의 족속과 이웃 마을에까지 미쳐 울부짖고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그러니 혁파하여서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 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기 소견을 진달하게 하였다. 태화는 아뢰기를,
"이 일은 처음에 물력(物力)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자를 늘려 백성을 도와주려고 한 일인데, 오늘에 와서는 그 폐단이 과연 많습니다."
하고, 정치화는 아뢰기를,
"백성들의 마음에 혁파하기를 바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양서(兩西) 지방은 마땅히 다 혁파해야 합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폐단이 이와 같으니 혁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약 포자(鋪子)를 혁파하면 관아에서 민간의 말을 빌려 쓰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이니, 반드시 말을 관아에 준비시킬 계책을 먼저 강구한 뒤에야 혁파할 수 있습니다. 황해도는 먼저 혁파하고, 평안도는 도신에게 물어 변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적의 말을 따르라고 명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 형조에 몸담고 있을 적에 각도에서 온 집안 식구를 모두 죄인으로 처리한 명부에 대해 다시 살펴보고 재단해 처결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 자리에서 체직되었으니 그대로 처결하는 것은 온편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그대로 처결하여야 옳다."
하였다.

 

6월 14일 을사

홍중보(洪重普)를 예조 판서로, 김소(金素)를 판 결사로, 정륜(鄭錀)을 정언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수찬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지평으로, 목내선(睦來善)을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사간 이정(李程)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헌부에 있을 때 정창도(丁昌燾)를 탄핵한 일이 있는데, 그때 들은 바에만 의거했지 그 사이에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그가 인피한 말과 처치한 계사를 보니, 혹 무함을 받았다고 하고, 혹 억울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나간 일을 신이 장황하게 분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신이 논한 것을 이미 무함이라고 하였고 보면, 어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체차하소서."
하고, 물러나 기다렸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이정의 인피 때문에 또 인혐하였다. 헌남 김우석(金禹錫)과 정언 신후재(申厚載)가 처치하여 이정은 체직하고 홍연은 출사시키라고 청하였는데, 따랐다.

 

소의 전염병이 다시 크게 번졌다.

 

6월 15일 병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소를 진달해 사직하였는데, 허락치 않았다. 당시 두표가 병이 심해 정부의 포폄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사직소를 올린 것이다.

 

인정전에서 유생들의 전강(殿講)을 행하여 장원한 유학 박문도(朴文道)를 곧바로 회시(會試)에 나아가게 명하였다.

 

6월 16일 정미

이정(李程)을 수찬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김시진(金始振)을 경상 감사로, 남이성(南二星)을 교리로, 안후열(安後說)을 우승지로, 이상진(李尙眞)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헌부가, 대각을 처치한 옥당의 관원을 체차하는 일과 이규령(李奎齡)·조성보(趙聖輔)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달라는 일에 대해 이때 와서 정계(停啓)하였다.

 

6월 18일 기유

전 수찬 홍우원(洪宇遠)을 서용하였다. 우원이 지난해 소를 진달해 윤선도(尹善道)를 석방해달라고 청하였다가 거듭 시휘(時諱)에 저촉되었다. 대각의 의논이 드디어 일어나 삭출을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상이 파직시키라고만 명하였다. 이때 이르러 비로소 서용하는 명이 있게 되었다.

 

장령 여민제(呂閔齊)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요즈음 상하가 서로 버티는 것이 오직 서필원(徐必遠)을 죄주느냐 죄주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버팀으로써 전관(銓官)의 자리와 대각과 관학(館學)이 모두 텅 비고 말았으니, 군신 상하가 서로간에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은 선왕께서 지우(知遇)로써 허여하셨고, 전하께서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열이 죄를 기다리는 상소와 필원이 사직한 상소에 대해 같은 날 비답을 내리셨는데, 온화하게 대하고 소홀히 대하는 것이 현격히 차이가 나는 정도 이상이었습니다. 준길의 상소는 입계한 지 두 달 만에 비로소 비답을 내렸는데도 또한 시비를 판별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이 두 신하에 대해 어찌 소홀히 박대함이 있겠습니까마는, 사람들이 혹 이를 가지고 의심을 한다면 이 또한 윗사람 쪽의 잘못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6월 19일 경술

호서 지방에 큰비가 내려 벼곡식을 침수시켰다.

 

6월 20일 신해

대사간 이홍연 등이 아뢰기를,
"황헌(黃瀗)이 재물을 탐한 실상은 당시에 물론이 자자했을 뿐만이 아닙니다. 뒤이어 선원의 공초로 인해 두 도의 도신이 사실에 근거해 올린 장계가 매우 명백했습니다. 당초 사형을 면케 한 것도 이미 커다란 실형(失刑)이었는데 곧바로 너그러운 용서를 받았고, 지금은 다시 거두어 서용하기까지 하니, 신들은 참으로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겠습니다만, 황헌이 맡긴 임무를 저버리고 죄를 범한 것은 심상한 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녹을 타 먹고 직첩을 받은 것도 그에게 있어서는 이미 분수에 지나친 일인데, 어찌 다시 조정의 명부에 올라 탐관 오리들로 하여금 징계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서용하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강원도 강릉 등의 15읍에 염병이 크게 번졌다.

 

6월 21일 임자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이만영(李晩榮)을 강원 감사로, 이회(李檜)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목겸선(睦兼善)을 동부승지로, 김익경(金益炅)을 형조 참의로, 권대운(權大運)을 병조 참의로, 이유(李秞)를 장령으로, 홍만용(洪萬容)을 교리로 삼았다. 의관(醫官) 윤후익(尹後益)을 삭령 현감(朔寧縣監)으로 삼았는데,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전라도 고부군(古阜郡)에서 12살 난 아이와 6살 난 아이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

 

6월 22일 계축

오시수(吳始壽)를 부응교로, 이단하(李端夏)를 부수찬으로, 민시중(閔蓍重)·이섬(李暹)을 지평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이조 좌랑으로, 남이성(南二星)을 북평사(北評事)로 삼았다.
평사의 직임은 혁파한 지 오래되었는데, 서필원(徐必遠)이 감사가 되었을 적에 다시 설치하도록 건의하였다. 비국이 복계(覆啓)하여 시종신으로 가려 보내 변방의 백성을 진압하는 터전을 삼자고 청하였다. 이에 이성이 교리로 있다가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 달 10일경부터 연일 큰비가 내렸는데, 팔로가 모두 그랬다.

 

경상도 창녕현(昌寧縣) 향교 건물 안의 양쪽 기둥에 벼락이 쳤다.

 

6월 23일 갑인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강도 어사(江都御史) 민유중(閔維重)이 올린 별단 서계(別單書啓)를 조목조목 아뢰었다.
그 첫번째는 강도는 사방 곳곳에 배를 댈 수 있어 적을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연해 일대에 보루를 많이 설치해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게 해서 급할 때에 적을 막을 수 있도록 하자는 일이었다. 태화가 아뢰기를,
"오래 전에도 이 논의가 있었는데 이완(李浣)이 더욱 힘껏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번거롭게 소문이 날까 염려하여 오히려 과감히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천천히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그 두 번째는 물결이 사납고 급해 배들이 조수(潮水)를 따라 오르고 내리니 물길의 상류 하류에 전선(戰船)을 많이 배치한 뒤에야 급할 때 조수를 살펴보고 진퇴할 수가 있으며, 또한 월곶(月串) 등 네 진(鎭)은 원래 전선(戰船)이 없고 병선(兵船)만 있으니 반드시 전선을 넉넉하게 만들어 돌발적인 사태에 대비하게 해야한다는 일이었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무장들과 이 일을 의논해 보니 모두 수호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하니, 유혁연(柳赫然)은 아뢰기를,
"수호하기 어려울 뿐만이 아니고, 군사를 얻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하고, 이완은 아뢰기를,
"배 한 척에 소용되는 군사가 많게는 80여 인이나 되니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강도는 물결이 매우 급해 원래 배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일찍이 선왕조 때에 방패선(防牌船)을 개조한 것은 신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귀중한 점은 견고하게 하는 데 있으니, 방패선이 전선보다 반드시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정치화(鄭致和)와 이완이 모두 배를 만들 목재가 절대 부족하다고 말을 하고, 태화가 우선 놔두자고 청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 세 번째는 이전미(移轉米) 및 양호(兩湖)의 대동미로서 본부에 들이는 것은 잘 빻은 백미를 가려 받아야 한다는 일이었다. 태화가 서계대로 시행하자고 청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 네 번째는 강도의 쌀을 옮겨 개색(改色)하는 것은 인근 고을에 커다란 폐해가 되니, 양호의 대동미를 실은 배가 반드시 강도를 거쳐 서울로 들어가게 마련이므로 만약 해청으로 하여금 싣고 오던 대동미를 강도에다 내려놓고 강도의 쌀을 바꾸어 싣고 올라가 경창(京倉)에다 수송해 놓으면, 군향(軍餉)은 오래 묵은 쌀이 되는 근심을 면하게 되고 인근 각읍에는 개색하는 폐단이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태화가 아뢰기를,
"고 정승 김육(金堉)이 일찍이 이 의논을 주장하여 선왕조께서 강구해 정했지만 시행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세상 어려운 점이 있으니, 우선 놔두어라."
하였다.
그 다섯 번째는 창고의 곡식이 줄어드는 것은 실로 자주 열었다 닫았다 하여 창고지기가 농간을 부리는 데서 말미암으므로 번고(反庫)할 적에 한 창고에다 회계한 것 이외의 것을 별도로 두어 원곡(元穀)과 섞이지 않게 하고 본부로 하여금 예에 따라 준행토록 하자는 일이었다. 태화가 서계대로 하자고 청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 여섯 번째는 강도의 백성들은 내어주는 환곡을 받는 것으로 목숨을 구제하는 바탕을 삼기 때문에 나누어주는 것이 점점 많아져 포흠(逋欠)이 더욱 심해지니 의당 남한 산성의 예와 같이 해서 석수(石數)를 정하고 계문하여 환곡을 나누어주자는 일이었다. 태화가 서계대로 하자고 청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 일곱 번째는 각보(各堡)에 군량미를 나누어준 것은 본래 본곡은 보존하고 이자를 취해서 각 보의 재용에 보태 쓰려고 한 것인데, 별장이 된 자들이 대부분 본부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인정에 따라 나누어주어 대부분 기준치대로 거두어들일 수 없으므로 본 보에 도움은 없고 국가의 곡식만 축나게 하니, 본부로 하여금 각 창고로 날라 들이게 해야 한다는 일이었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전량을 다 날라 들이면 그것을 받아 먹고 살던 백성들이 반드시 대부분 원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우선 각 보로 하여금 전처럼 나누어주고 거두어들이게 하되, 본부에서 거두어들이는지 않는지를 검사하여 만약 거두어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으면 별장 및 본부의 관원을 아울러 논죄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 여덟 번째는 화기(火器) 중에 소소 황자포(小小黃字砲)와 소소완구 오자포(小小碗口吳字砲) 등은 힘이 먼 데까지 미치지 않고 사용하는 데 긴요하지 않으니 부셔서 다른 화기를 만드는 데 보태자는 일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만들어 놓은 화기를 부수어버릴 필요가 있겠는가. 우선 놔두도록 하라."
하였다.
그 아홉 번째는 각진의 화기가 뒤섞여 있어 사용하기 어려우니 본부에 신칙하여 혹 부족한 것은 늘리고 혹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급할 때 쓸 수 있도록 하자는 일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에 의거하여 분부하라."
하였다.
그 열 번째는 본부의 별파진(別破陣)에게 과제를 부과하여 기예를 성취시키되 그 중에 우수한 자를 뽑아 특별하게 상을 베푸는 일이었다.
그 열한 번째는 화기 가운데 불랑기(佛狼器)를 특별히 넉넉하게 제조하는 일이었다.
그 열두 번째는 화기 가운데 무게가 매우 무거워 황급할 때 빨리 운반하기 어려운 것이 또한 많으니 의당 본부로 하여금 몇 사람이 싣고 끌 수 있는 작은 수레를 별도로 만들어 급할 때 대비하자는 일이었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 몇 가지 일은 본부로 하여금 서계대로 행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 열세 번째는 월곶(月串) 등 네 진은 설치할 때 수군을 지급하지 않고 병조로부터 가포(價布)를 지급해 고립(雇立)케 하였는데 중간에 그 예산이 줄어들고 깎여서 평일에도 모양을 이루지 못하므로 위급할 경우에는 더욱 힘을 얻기 어려울 것이니, 경기·황해 두 도의 가까운 읍에 있는 육군을 나누어주고, 별장 자리를 높여 만호로 하는 일이었다. 태화가 아뢰기를,
"수군과 육군은 힘들고 편한 것이 현격히 달라 반드시 죽을 각오로 피하길 도모할 것이고, 별장을 만호로 올리는 것도 일이 연혁에 관계되어 또한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수가 올라오길 기다려 다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그 열네 번째는 철곶(鐵串)과 덕포(德浦)에 배를 숨겨두는 곳을 더 파자는 일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수사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우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신이 북경(北京)에 있을 때 송시열(宋時烈)의 상소를 보았는데, 단지 김만균(金萬均)이 소장을 진달했다가 나포된 것에 대하여 개탄하는 바가 있었고, 또한 점점 원수를 잊어버리는 지경으로 들어가는 것을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의논이 시열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는, 원수를 잊고 인륜을 어지럽힌다는 등의 말로 곧 필원을 공격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를 금수에 비유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나 필원이 대각의 논계가 한창 일어나는 때에 대항하는 소장을 올려 변명을 늘어놓았으니, 이 또한 옳지 못한 일입니다. 간원의 논계는 실로 일의 체계로 볼 때 규정(糾正)하는 조처이니, 의당 속히 윤허하고 따르셔야 합니다."
하고, 태화도 아뢰기를,
"대각의 논계가 그치기도 전에 소장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는 것은 전에 없던 바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허락하지 않는 데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본정을 헤아려 보면 원래 대단한 것이 아니었는데 일이 불어나 서로 격해져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 매우 괴이하게 생각한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관학의 유생들이 올린 상소는 혹 중도를 넘어선 것이긴 하지만 이미 성균관을 비우고 나간 뒤에는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타일러 도로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삼가 듣건대, 상께서 전교를 내리시어 심지어는 소를 올리는 데 참여하지 않은 다른 유생들로 하여금 대신 들어가게 하셨다고 하니, 듣기에 매우 거북합니다. 이는 비록 지나간 일이지만 뒤의 폐단이 있을까 하여 아울러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국경을 넘어가 삼을 캐는 것을 금지하는 것에 대해 저들이 이미 신칙하였고 보면 일의 형세가 전에 비해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삼을 캐는 절기가 되었으니 거듭 엄하게 신칙하여야 합니다. 청컨대 양계(兩界)의 감사와 병사를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서필원을 파직시키자는 일을 아뢰었는데, 따랐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경기의 대동미(大同米)를 실어나르는 쇄마비(刷馬費)의 한 조항에 대하여 우상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의논해 정하자는 일을 일찍이 품달하였습니다. 지금 홍명하가 이미 조정으로 돌아왔으니 하문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신이 서쪽에서 올 적에 지나는 연로(沿路)마다 각읍의 민정을 또한 모두 물어 보았습니다. 외국 사신에 대한 쇄마비는 형세상 민결(民結)에 나누어 배정하고 상평청(常平廳)으로부터 예에 따라 그 값을 지급해야겠지만, 그외 다른 쇄마비는 절대로 민결에 떠넘겨 거두어들이지 못하도록 사목을 만들어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부교리 장선징이 아뢰기를,
"북평사 남이성(南二星)은 병이 많아 지금 만약 멀리 변방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반드시 중도에서 쓰러질 염려가 있으니 아랫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도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하고, 명하는 아뢰기를,
"신 또한 그가 병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더구나 또한 술을 좋아하니, 그가 반드시 변방을 제압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개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남에 큰비가 내려 익산(益山) 경내의 미륵산(彌勒山) 동·서·남 세 모퉁이가 무너져 그곳에 살던 백성으로 깔려 죽은 자가 2인이었다. 임피(臨陂)의 공주산(公周山)·오성산(五聖山)이 무너져 그곳에 살던 백성으로 깔려 죽은 자가 3인이었다.

 

6월 24일 을묘

헌부가 아뢰기를,
"기성(騎省)035)  의 낭관(郞官)은 곧 청선(淸選)에 가기 위한 중간 단계입니다. 그런데 이번 새로 천거된 인물들 중에는 외람되고 잡되게 함부로 차지한 사람이 자못 있습니다. 조정의 기강이 엄하지 않아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은 소치입니다. 청컨대 그 천거를 삭제하고, 의논하여 천거한 낭관을 아울러 중한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도방군(到防軍)을 숙경 공주(淑敬公主)의 집을 조성하는 곳으로 보내 일을 시키라고 명하였다. 숙경 공주는 바로 선왕조의 다섯 번째 공주인데, 원몽린(元夢麟)이 곧 부마이다. 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아뢰기를,
"도방군을 사가(私家)의 일에 뽑아 보내는 것은 애당초 법례(法例)가 아닌데 전 인원을 부역시키기까지 하는 것은 더욱 온당치 않습니다. 이처럼 덥고 비내리는 날 먼 지방에서 새로 도착한 군인들에게 갑자기 과외의 일을 정해준다면 원망과 고통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신이 해방에 있다 보니 구구한 생각을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는 새로운 규정이 아니고, 바로 그전부터 행해지던 일이다."
하였다.
원정의 아뢴 말이 참으로 옳은데, 일이 궁척(宮戚)에게 관계되어 굳이 왜곡되게 비호하려고 하여 그전부터 행해지던 일이라고 핑계하고 윤허를 하지 않았다. 만약 그 일이 잘못인 줄 알았다면 고치는 것이 귀한 것이다. 설령 잘못된 규례가 있었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굳이 끌어다 증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평안도에 여역이 크게 번졌다.

 

간원이 아뢰기를,
"우윤 이지천(李志賤)은 사람됨이 괴이하고 흠이 있으니 청컨대 개정하소서. 전일 도목 정사 때 의관 윤후익(尹後益)을 삭령 현감(朔寧縣監)으로 특별히 제수하는 명이 있었는데,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옳지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후익은 사람됨이 경망하고 일을 처리함이 뒤죽박죽인지라 여러 차례 기전(畿甸)의 읍을 맡았었지만 다스리는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다시 목민관의 임무를 주어 민생의 폐해를 거듭 끼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삭령은 비록 기전의 고을이라고는 하지만 거리가 자못 멀어 서울을 왕래하는 데 민폐가 우려되니,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지천의 일은 다시 아뢰자, 따랐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죽어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근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예장(禮葬) 등의 일은 모두 전례와 같이 하였다.
두표는 백신(白身)의 신분으로 일어나 정사(靖社)의 녹훈에 참여하여 갑자기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여러 차례 지방관을 맡으면서 자못 위풍(威風)이 있었고, 일찍이 대사마(大司馬)·대사도(大司徒)가 되었을 적에도 직임을 잘 수행한다는 칭송이 있었다. 이에 앞서 두표가 역적 김자점(金自點)과 공이 같은 사람으로 명망과 지위가 서로 엇비슷하여 각각 사당(私黨)을 세웠다. 당시 원당(原黨)·낙당(洛黨)의 칭호가 있었는데 한때 조정의 진신들로 두 문하에 발을 들여 놓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인조(仁祖)가 승하한 당초에 두표가 앞장서서 한 통의 상소를 진달해 권간이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른 죄를 논하였는데, 상소 가운데 이름을 숨겨 비록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기실은 자점을 가리킨 것이었다. 자점이 끝내 반역을 도모하다 삼족이 멸망한 것은 실로 두표가 빚어내 만든 일이었다. 그뒤 신묘년036)   사이에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재주는 많지만 덕이 없고 음험하여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다는 등의 말로 두표를 배척하였다. 말년에 드디어 정승에 제수하는 명을 받고 황각(黃閣)037)  에 7년 동안 있었으나 정승으로서의 업적이 없었다. 성품이 엉큼하고 시기심이 많으며 거칠고 사나워 조금이라도 협조하지 않으면 끝내 반드시 몰래 해친 뒤에야 그만두어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두려워하였다.

 

호남에 큰비가 내려 산이 무너져서 백성 중에 깔려 죽은 자가 있었다.

 

충청도에 여역이 크게 번졌다.

 

6월 29일 경신

이정(李程)을 집의로, 정창도(丁昌燾)를 장령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수찬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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