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임오
임오070) 대사헌 조복양 등이 아뢰기를, "얼마 전 영남 유생의 상소에 대해 성명께서 그 음험하고 사악함을 통촉하시어 상소를 중외에 내보여 사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성교가 지극히 엄함에 국시가 저절로 안정되어 불량한 무리가 마침내 조금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승문 부정자(承文副正字) 강석빈(姜碩賓)은, 사관(四館)이 유세철을 정거(停擧)하려는 간통(簡通)에 감히 ‘경문(經文)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등의 말로 제멋대로 이론(異論)을 세워 조금도 기탄함이 없었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사관(四館)이 유세철을 정거하려고 간통(簡通)을 보내 의논하니, 한편의 사람들이 다 이론(異論)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히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독 석빈은 독한 마음을 돋우어 감히 ‘이 일은 대단한 시비가 달려 있으니 반드시 그것이 경문(經文)에 어긋남을 밝혀야만 그 벌을 논할 수 있다. 경문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경문의 분명한 뜻을 듣기를 원하노라.’는 등의 내용을 간통 중에 써서 보내니, 여론이 다 그의 방자함에 분통해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판에서 삭제당하는 벌을 받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석빈이 간통 중에 써보낸 말이 진실로 옳다. 대간이 일의 시비와 이치의 당부를 따져보지도 않고 일이 시열과 관계되면 무조건 사판에서 삭제하는 것으로써 논죄하니, 억누르고 위협한 지가 오래되었다. 석빈의 강직함이 아니었다면 누가 능히 그 칼날을 건드렸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17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註 070] 임오 : 원문에는 임오일이 초하루로 되어있으나 이달은 신사일이 초하루이고 임오일은 2일이므로 2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음.
대사헌 조복양 등이 아뢰기를,
"얼마 전 영남 유생의 상소에 대해 성명께서 그 음험하고 사악함을 통촉하시어 상소를 중외에 내보여 사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성교가 지극히 엄함에 국시가 저절로 안정되어 불량한 무리가 마침내 조금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승문 부정자(承文副正字) 강석빈(姜碩賓)은, 사관(四館)이 유세철을 정거(停擧)하려는 간통(簡通)에 감히 ‘경문(經文)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등의 말로 제멋대로 이론(異論)을 세워 조금도 기탄함이 없었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사관(四館)이 유세철을 정거하려고 간통(簡通)을 보내 의논하니, 한편의 사람들이 다 이론(異論)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히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독 석빈은 독한 마음을 돋우어 감히 ‘이 일은 대단한 시비가 달려 있으니 반드시 그것이 경문(經文)에 어긋남을 밝혀야만 그 벌을 논할 수 있다. 경문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경문의 분명한 뜻을 듣기를 원하노라.’는 등의 내용을 간통 중에 써서 보내니, 여론이 다 그의 방자함에 분통해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판에서 삭제당하는 벌을 받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석빈이 간통 중에 써보낸 말이 진실로 옳다. 대간이 일의 시비와 이치의 당부를 따져보지도 않고 일이 시열과 관계되면 무조건 사판에서 삭제하는 것으로써 논죄하니, 억누르고 위협한 지가 오래되었다. 석빈의 강직함이 아니었다면 누가 능히 그 칼날을 건드렸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17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註 070] 임오 : 원문에는 임오일이 초하루로 되어있으나 이달은 신사일이 초하루이고 임오일은 2일이므로 2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음.
사신은 논한다. 사관(四館)이 유세철을 정거하려고 간통(簡通)을 보내 의논하니, 한편의 사람들이 다 이론(異論)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히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독 석빈은 독한 마음을 돋우어 감히 ‘이 일은 대단한 시비가 달려 있으니 반드시 그것이 경문(經文)에 어긋남을 밝혀야만 그 벌을 논할 수 있다. 경문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경문의 분명한 뜻을 듣기를 원하노라.’는 등의 내용을 간통 중에 써서 보내니, 여론이 다 그의 방자함에 분통해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판에서 삭제당하는 벌을 받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석빈이 간통 중에 써보낸 말이 진실로 옳다. 대간이 일의 시비와 이치의 당부를 따져보지도 않고 일이 시열과 관계되면 무조건 사판에서 삭제하는 것으로써 논죄하니, 억누르고 위협한 지가 오래되었다. 석빈의 강직함이 아니었다면 누가 능히 그 칼날을 건드렸겠는가.
5월 5일 을유
이유(李秞)를 사간으로, 이광적(李光迪)을 장령으로, 권대운(權大運)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대사간 정만화 등이 전라 좌수사 정영(鄭韺)을 탄핵하기를,
"행실이 거칠고 천박하며 기생첩의 말만을 듣고 방자하게 불법한 일을 하였으니 체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함경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계문하기를,
회령(會寧)·경원(慶源) 두 진(鎭)에 교양관(敎養官)을 두어 북도의 유생을 가르치소서."
하니, 따랐다.
헌납 최일(崔逸)이 아뢰기를,
"올해 농사의 흉작은 해서(海西)가 특히 심합니다. 더구나 보리가 익을 날이 아직 멀어, 백성의 운명이 위급한 상황인데도 감사가 진휼할 것을 계문하지 않고 있으니 부당한 일입니다. 황해 감사 이상일(李尙逸)을 엄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6일 병술
응교 이민서(李敏敍)와 수찬 김석주(金錫胄)가 청대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양전(兩殿)께서 온천에서 목욕하시고 쾌차하는 효험을 보셨으니, 신민에게 이보다 더 큰 다행은 없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경연을 폐한 것이 전적으로 병환 때문이었는데, 지금 다행스럽게 평상대로 회복하셨으니, 일기가 맑은 때에 자주 경연에 참석하신다면 크나큰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석주도 아뢰기를,
"양전께서 온천의 효험을 보신 뒤로 대소 신민은 경연을 열어 강학하시기를 더욱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대(召對)하는 규례대로 강독하고 듣는다면 편리할 듯하다."
하였다. 민서가, 궁가(宮家)가 떼어 받은 곳은 개간의 선후에 따라 백성에게 내줘야 한다고 극력 주장하였고, 석주도 강력하게 말하였다. 민서가 또 상가(賞加)를 환수하는 일을 말하였다. 그러나 상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서가 아뢰기를,
"경외에 전염병이 극도로 성행하고 있으니, 여제(厲祭)를 즉시 지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자전의 환후가 쾌차하고 성상의 안질도 약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회복되신 경사가 있으니, 종묘에 고하고 진하(陳賀)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해 된 자전의 병환이 지금 회복되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경사이니, 종묘에 고하고 진하하는 등의 일을 속히 거행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경우는 효험을 보기는 했지만 병의 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 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는 할 수 없다. 이로써 종묘에 고하는 것은 자못 성실한 도리가 아니겠기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송시열이 병을 이유로 오지 않았다고 사관이 돌아와 아뢰었다.
5월 12일 임진
상이 인정전에 거둥하여 백관의 진하를 받고 나라에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왕대비전이 목욕한 후에 평상대로 회복한 경사 때문이었다.
여제를 북쪽 교외에서 거행하였다.
사간 이유가 아뢰기를,
"남천택(南天澤)이 금화(禁火) 구역인 태봉(胎封) 안에 전장(田莊)을 설치하였는데도 도신이 즉시 계문하여 처벌하기를 청하지 않았으니, 남천택과 죄가 같습니다. 추고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니, 전 감사 김휘(金徽)는 나문(拿問)하여 정죄하고, 신임 감사 민점(閔點)은 파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황해 감사 이상일(李尙逸)이 치계하기를,
"제도(諸道)의 관노비는 여러 차례 변란을 겪어 날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패 노비(賜牌奴婢)071) 는 절대로 면역(免役)하지 말라는 전후의 사목(事目)이 준엄하고 명백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근래에는 폐지되어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혹은 면역으로, 혹은 사패로, 혹은 기로소(耆老所)로, 혹은 상방 침선(尙方針線)으로 연이어 망정(望定)하니, 각도의 형편이 만에 하나도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해서는 면역 외에 또 사패를 망정하는 경우가 너무나 빈번합니다. 승전(承傳)을 받든 후에 사패를 자망(自望)한 부류에게는 의당 변통의 방도가 있어야 되겠으며, 면역한 부류도 일일이 쇄환하여 복역(服役)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국에 계하(啓下)하였다. 회계하기를,
"이미 사목이 있고 난 후에 해당 관청이 법으로 금한 사항을 지키지 않은 일은 매우 놀랍습니다. 그러나 기왕의 일은 또한 책임을 물어 다스리기 어려우니, 해조(該曺)로 하여금 계하한 연월(年月)을 조사하게 하여 그 이후의 사패는 모두 본관(本官)에 돌려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서와 관북은 쇄환하는 법이 있으니 일체 금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해서의 경우에는 비록 양서(兩西)라고는 하지만 쇄환하는 법이 없으니, 지금 만약 돌려주고 다른 곳에 대신 보충하게 한다면 피차를 구별함이 있게 될 것이다. 전에 사노비(寺奴婢)를 수(數)에 준하여 대급(代給)하던 규례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5월 13일 계사
맹주서(孟胄瑞)를 헌납으로, 이만영(李晩榮)을 전라 감사로, 이시술(李時術)을 대사간으로, 여성제(呂聖齊)를 부응교로, 이단석(李端錫)·김징(金澄)을 정언으로, 이경억(李慶億)을 부제학으로, 박정(朴烶)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예조가 경과(慶科)를 시행하여 인재를 뽑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훈련 도감 군사 최태현(崔太玄)을 효시(梟示)하였다. 태현이 도망하자 도감이 그의 아비를 가두었는데, 여러 해 동안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그의 아비를 풀어주고 강등시켜 보(保)로 삼아 포를 바치게 하였다. 그의 아비가 태현이 있는 곳을 알고 찾아가 애절하게 타일렀는데, 그는 소리지르며 듣지 않았고, 심지어는 막대기로 뼈가 부러질 지경에 이르도록 아비를 구타하였다. 아비가 도감에 알리자 대장 이완(李浣)이 양주(楊州)에 밀령을 내려 체포하고, 군사들 앞에서 효시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삼가 살펴보건대, 태현이 뼈가 부러질 지경에 이르도록 제 아비를 구타하였으니, 이는 삼강 오상(三綱五常)에 관계되는 죄인이다. 그런데 단지 군대에서 달아난 죄로 효시하고 삼강 오상을 어긴 죄로 처벌하지 않았으니, 조정이 크게 실형(失刑)한 것이라 하겠다.
황해 감사 이상일을 옥리(獄吏)에게 회부하였다. 처음에 상일이 치계하여 면역한 노비를 쇄환할 것을 청하면서 제궁가(諸宮家)의 사패한 유(類)를 열거하였는데, 어의궁(於義宮)을 그 가운데 나열하여 썼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어제 이상일의 장계를 보니 관노비를 본역(本役)에 쇄환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어의궁의 사패를 거론하였는데, 이는 바로 선조(先朝)께서 잠저(潛邸)에 계시던 때의 사패이니, 상일이 비록 추환(推還)하고자 하더라도 어찌 감히 다른 궁(宮)의 아래에 뒤섞어 쓴단 말인가. 공경하고 삼가하는 뜻이 전혀 없으니 신하의 의리상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비국의 회계를 보고자 했으나 비국도 의례대로 아뢸 뿐 다른 말이 없었으니, 이 또한 지극히 해괴한 일이다. 상일을 나문하여 정죄하고 비국의 해당 당상도 아울러 엄중히 추고하라."
하였다. 이에 영상 정태화 등이 모두 대죄하니,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5월 15일 을미
사간 이유 등이 아뢰기를,
"이상일이 방백의 신분으로 각읍의 피폐함을 목격하고 제읍(諸邑)의 문보(文報)를 인하여 계문하면서 뒤섞어 나열하는 과실을 범하였습니다만, 그 본정을 헤아려보면 실로 살피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주상께서 대단히 진노하시어 ‘공경하고 삼가지 않았다.’는 것으로 죄안(罪案)을 결정하여 갑작스럽게 나문하라는 명을 내리시기에 이르니, 실로 지나친 조치입니다. 나문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궁의 아래에 뒤섞어 기록한 것을 공경스럽다고 하겠는가. 선조에 관계되면 법률 적용을 반드시 엄중하게 하는 법인데, 나문하라는 명이 과연 지나친 조치이겠는가. 지금 그대가 앞장서 구호하여 반드시 죄를 가볍게 하려 하니, 상일을 위해서는 지극하나, 선왕에게 보답하는 점에 있어서는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삼가는 뜻이 없는 것이다. 군신의 의리가 전혀 없어졌으니, 나는 너무도 놀랍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아,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여 체통을 아는 자가 거의 없다. 이번 이상일의 장계에 뒤섞어 나열한 것은 불경(不敬)의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나문하라는 벌이 어찌 지나친 것이겠는가. 그렇다면 간원이 아뢴 것도 불경하기가 상일과 다름이 없으니, 진실로 지극히 통탄스럽고 놀랍다. 사간 이유를 파직하라."
하였는데, 정원이 재고를 요청하고 옥당이 상차하여 간쟁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5월 16일 병신
대사헌 조복양 등이 아뢰기를,
"동료들이 이유를 파직하라는 명을 거두시도록 청하려고 하는데, 이유는 신의 처사촌입니다. 법으로 보면 마땅히 상피(相避)하여야 하니 가부를 논할 수 없는 처지이고, 또 생각건대, 이상일을 나문하라는 명이 내려지자 물정이 다 놀라고 의혹되었으니 대신(臺臣)으로서 마땅히 논집(論執)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이 착오에 관계되므로 감히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모궁(某宮)이 어떤 궁인지는 외정(外廷)의 신하로서 아는 자가 적으니, 상일처럼 오랫동안 시골에 있었던 자는 필시 알지 못하여 이런 망발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명께서 그 실정을 너그럽게 보아주지 않으시고 갑자기 과중한 조처를 취하셨습니다. 신은 대장(臺長)의 자리에 있으면서 침묵만 지킨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우니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놀라고 의혹되었다.’는 말은 불경(不敬)으로 죄준 것을 말한 것인가? ‘모궁이 어떤 궁인지는 외정의 신하로서 아는 자가 적다.’ 하였는데, 어쩌면 그리도 상일을 구제하기에 급급하여 정직하지 못한 것임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상일이 오랫동안 시골에 있었다 하더라도 나이 예순이 넘었고 조정에 벼슬한 지가 오랜데, 감히 시골에 있었으므로 몰랐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는 성실을 다해야 할 뿐인데, 제 동료를 해명하고자 빈말과 거짓 설명을 감히 군상에게 고하면서도 그것이 임금을 속이고 당(黨)을 비호하는 죄임을 깨닫지 못하니, 진실로 괴이한 일이다. 경은 이미 양조(兩朝)를 섬겼으니 어찌 분의(分義)와 체통을 모르겠는가. 오늘의 말은 모두 상일을 위해 해명하려는 의중에서 나온 것이다. 신하가 성실로써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과연 이와 같단 말인가?"
하니, 복양이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정계주(鄭繼胄)가 아뢰기를,
"신은 이유와 사돈간인 혐의가 있습니다. 이상일을 나문하라는 명을 모두 다 과중하다고 하는데, 신에게는 침묵만 지키고 있는 잘못이 있습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고, 지평 어진익(魚震翼)과 장령 이동로(李東老)도 모두 침묵한 과실을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맹주서(孟胄瑞)가 아뢰기를,
"신은 이동로와 사돈지간으로 상피하는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처치하지 못하겠습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전라도 유생 안음(安崟) 등이 상소하여 예를 논하였다. 시열의 논지를 주워 모아 유세철의 상소를 공격 배척하고, 세철을 처벌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왕법의 준엄함을 보일 것을 청한 것이었는데, 상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5월 17일 정유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아뢰기를,
"이상일을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은 실로 과중한 것이니, 이유가 대간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에 따라 간쟁한 것은 바로 그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준엄한 비답이 내려지자마자 견책이 곧바로 가해지고,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리기까지 하시니, 대각을 우대하고 용납하는 도리가 이렇지는 않을 듯합니다. 이유를 파직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양사(兩司)의 인피한 자들을 처치하여 아뢰기를,
"체직해야 할 혐의가 없으니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왕대비전의 환후가 평시대로 회복된 것을 인하여 경과(慶科)를 시행하자고 아뢰었는데, 육백관시(六百館試)로서 강경(講經)은 제외하기로 결정하였다.
5월 18일 무술
유창(兪瑒)을 승지로, 민희(閔熙)를 황해 감사로, 이태연(李泰淵)을 경상 감사로, 김만기(金萬基)를 전라 감사로 삼았다.
집의 정계주 등도 이유를 파직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계청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청사(淸使)가 유황(硫黃) 및 도망해 온 사람의 일을 조사하기 위해 나오려 한다는 보고가 이르자, 상이 대신(大臣)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칙사가 오는 것은 필시 유황에 관한 일 때문일 것이다."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유황에 관한 일은 그래도 해명할 수 있으나, 도망해 온 사람의 일은 대처하기가 무척 곤란합니다. 나라에서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 저들에게 대답할 말을 의논하여 정하여야 합니다. 우상의 생각은 사실대로 말하지 말고 숨기자는 것인데, 신의 생각으로는 만약 조정이 숨기면 죄가 평안 감사와 의주 부윤에게 돌아가게 되어 앞으로의 일을 헤아릴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조정이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공명 정대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안추원(安秋元)이 도망왔을 때 비국이 그를 내지(內地)에 처하게 하도록 청하였는데, 저들이 만약 그 공사(公事)를 보여달라고 요구해오면 이것을 그대로 내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 공사는 내용을 고쳐서 하나의 공사를 만들어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상일의 장계를 회계한 일은 신이 실제로 주관하였고, 다른 당상은 도장만 찍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 벌을 대신 받으니 신은 황공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더러 제조(提調)를 겸임하니, 관여하여 아는 일이 없지 않지만 의례상 하관(下官)이 추감(推勘)을 받는다. 상일이 어의궁 노비를 쇄환하고자 했다면 마땅히 별도로 아뢰어야 했다. 어찌 감히 뒤섞어 쓴단 말인가."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상일이 이미 착오를 했기 때문에 감히 고집하여 논쟁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성상께서 너그럽게 살펴 화평하게 조처하신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일을 화평하게 조처한다면 어찌 괴이하지 않겠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특별히 대간을 파직하시는 것이 어찌 화평한 일이겠습니까. 조복양 또한 구신(舊臣)인데 몹시 심하게 배척하여 말씀이 지극히 준엄하시니 더욱 미안한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군신간에는 과실을 서로 말해주어야 하는데, 복양의 말이 매우 잘못되었으니 내가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옥당의 행위 또한 무어라 말할 것이 없다. 비망기를 내린 지 하루가 지나도록 전혀 명을 거두라는 의논이 없다가 이유가 파직되고 나서야 한꺼번에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세상에 어찌 이런 옥당이 있단 말인가. 이는 밖으로 여론을 두려워하고 안으로 처벌을 두려워하여 관망하고 엿보다가 억지로 한 것에 불과하니, 그 간교한 습성은 진실로 통탄스럽다. 사람들은 내가 잘못이라고 하지만 나는 반드시 큰 조처를 취하고자 한다."
하였다. 상의 말과 기색이 매우 준엄하였으므로 태화 등이 다시 말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대사헌 조복양이 아뢰기를,
"이상일이 범한 것이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일이라는 말은, 신이 전에 몰랐던 것으로 인해 그도 필시 몰랐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하여 인피하는 말에서 감히 그렇게 아뢰었던 것입니다. 어찌 감히 꾸미고 속여가면서 구제하기를 꾀한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성상의 조처가 과중하다.’고 한 것은 경솔한 생각에서 나온 망언이었습니다. 신이 한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평소의 언행이 군부에게 신임받지 못하여 이러한 심정을 밝히지 못하고 끝내 정직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하여 임금을 속이고 당을 옹호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니, 어떻게 세상에 설 수 있겠습니까. 신이 세 조정을 두루 섬겼었는데, 백발이 된 지금에 와서는 몸이 무척 쇠약해지고 만사에 흥미를 잃었지만, 입은 은혜가 너무 많아 결단을 내려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우러러 믿는 것은 성상뿐이었는데, 이렇게 죄를 범하여 다시 용서받을 수 없으니 소패(召牌) 아래에 끝내 나아가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하니 신을 먼저 삭탈 관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명을 기다렸다. 집의 정계주 등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1일 신축
이원정(李元禎)을 승지로 삼았다.
5월 23일 계묘
집의 정계주와 장령 이동로가 아뢰기를,
"여론이, 신들이 단지 간관을 파직하라는 명을 거두시라고만 계청하고 이상일의 일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니,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명을 기다렸다. 장령 이광적(李光迪)이 처치하여 체직하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정문부(鄭文孚)를 우찬성에 추증하였다. 문부는 임진 왜란 때 매우 큰 공을 세웠으나 끝내 억울하게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여워하였다. 이에 앞서 함경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문부 및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포상하고 추증할 것을 계청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물으니, 모두 시행해야 한다고 대답하였고, 수찬 이단하도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의 아비 이식(李植)이 일찍이 북평사로 있으면서 남·북도의 사실을 널리 채집하여 《북관지(北關志)》를 지었는데, 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한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 기록에 ‘그 당시 북도의 성읍이 다 반적(叛賊)에게 점거당하고 원융(元戎) 이하가 거의 적에게 함락되었으나, 오직 문부만이 유생과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먼저 경성(鏡城)을 회복하고 반적을 죽였다. 또 장사(將士)를 파견하여 여러 반읍(叛邑)의 괴수를 토벌하여 13명을 죽여 조리를 돌리고는 마침내 명천(明川)·길주(吉州)의 경계에 나아가 적과 쌍개동(雙介洞)에서 싸워 재차 이겼다. 재를 넘어 단천(端川)을 구원하여 가등청정(加藤淸正)과 싸웠는데, 전후 싸움에서 1천여 명을 죽였다.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문부의 명성과 공적이 자기보다 앞서는 것을 미워하여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아뢰고 번번이 군법으로 문부를 죽이려 하였으며, 문부의 장좌(將佐)도 왕왕 내쫓기거나 매로 고문을 당하여 죽을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군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갔고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고통만 당하면서도 문부를 배반하지 않았다. 문부가 또 북으로 육진(六鎭)으로 가서 변방의 오랑캐를 복종시키고 반당(叛黨)을 찾아 주벌하였다. 관북이 마침내 평정된 것은 모두 그의 힘이었다. 문부는 공으로 회령(回寧) 사람과 마찬가지로 6품으로 겨우 승진하였고, 당시 어려움을 함께 하였던 군사들은 하나도 고신(告身)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억울하게 여긴다.’ 하였습니다.
문부의 충절은 위란(危亂)의 때부터 밝게 드러났으며, 혼조(昏朝) 때에도 옳지 않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반정 후 원수(元帥)에 천거되어 조정이 크게 쓰려 할 때에 박래장(朴來章)의 옥사에 무고되었는데, 대질 심문에서 해명하여 무죄함이 밝혀졌습니다. 석방하려 할 때에 마침 시안(詩案)을 가지고 깊이 논의하는 대간이 있었으므로 끝내 억울하게 형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시안이란 문부가 창원 부사로 있을 때에 지은 영사(詠史)라는 시를 말하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초 비록 삼호라도 진을 멸망시키리라
예언한 남공의 말072) 맞은 건 아니었네
무관에 들어가자073) 백성 희망 끊겼는데
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074) 이는 본래 혼조 때에 지은 것으로 마침 이때에 발견되었는데, 그 시를 반복해 읽어보아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나라 사람들이 다 슬퍼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그에게 이 직(職)을 추증하고, 그와 함께 일하였던 유응수(柳應秀)에게 병조 판서를, 이유일(李惟一)·한인제(韓仁齊)에게 병조 참의를, 강문우(姜文祐)에게 군기시 정을, 최배천(崔配天)에게 사복시 첨정을, 원충서(元忠恕)에게 군기시 부정을, 이붕수(李鵬壽)에게 지평을, 지달원(池達源)에게 호조 정랑을, 허진(許珍)·김국신(金國信)에게 의금부 도사를 추증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19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註 072] 예언한 남공의 말 : 남공(南公)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삼호(三戶)에 대해서는 세 가구[戶]라는 설, 지명(地名)이라는 설, 초나라의 삼대성(三大姓)이라는 세 가지의 설이 있는데, 번역은 세 가구라는 설에 따랐다.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수삼호 망진필초야[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 하였다.[註 073] 무관에 들어가자 :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고사. 초 회왕은 위왕(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웅괴(熊槐).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사기(史記)》 권40.[註 074] 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 : 전국 시대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양(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사기(史記)》 권7.
이는 본래 혼조 때에 지은 것으로 마침 이때에 발견되었는데, 그 시를 반복해 읽어보아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나라 사람들이 다 슬퍼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그에게 이 직(職)을 추증하고, 그와 함께 일하였던 유응수(柳應秀)에게 병조 판서를, 이유일(李惟一)·한인제(韓仁齊)에게 병조 참의를, 강문우(姜文祐)에게 군기시 정을, 최배천(崔配天)에게 사복시 첨정을, 원충서(元忠恕)에게 군기시 부정을, 이붕수(李鵬壽)에게 지평을, 지달원(池達源)에게 호조 정랑을, 허진(許珍)·김국신(金國信)에게 의금부 도사를 추증하였다.
부교리 이단하와 부수찬 유명윤(兪命胤)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번 이상일의 일은 어리석어 살피지 못한 과오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전하의 처벌이 너무 과중하셨으니, 대간이 간쟁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직분입니다. 이유를 특별히 파직하라는 명을 또 뜻밖에 내리셨으니, 옥당이 차자를 올려 논한 것도 그들의 직분입니다. 차자를 올리는 데 하루를 지체한 것은 민첩하지 못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곧장 간교하다고 공격하여 배척한다면 실정과 다르지 않겠습니까. 주상의 말씀이 한 번 내려짐에 여러 신하들이 실망하였으니, 삼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준엄한 하교를 내려 꺾어 버렸다.
5월 25일 을사
이동직(李東稷)을 장령으로, 조복양(趙復陽)을 대사성으로, 이정(李程)을 수찬으로,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이하(李夏)를 지평으로, 홍처후(洪處厚)를 전라 감사로, 여성제(呂聖齊)를 집의로, 이민채(李敏采)를 검열로 삼았다.
5월 28일 무신
영상 정태화와 좌상 홍명하가 빈청에 나아가 아뢰기를,
"조사하기 위한 칙사가 왔을 때 대답할 말을 경연에서 미리 의논하여 정해야 하는데, 우상 허적이 아직 공사를 보지 않고 있습니다. 전례에 따라 나오도록 권하소서."
하니, 상이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들어오라는 뜻으로 하유하였다. 허적이 명을 받들고 들어오니, 상이 즉시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칙사가 오는 것은 실로 도망해 온 사람의 일 때문일 것입니다. 대답할 말을 어떻게 정하여 빈신(儐臣)에게 일러 보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허적에게 물었다. 허적이 대답하기를,
"이 일은 그 당시의 번신(藩臣)이 담당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비국이 담당한다면 치욕이 반드시 군상에게 미칠 것입니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조정에서 담당하지 않고 끝까지 숨긴다면, 정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가가 치욕을 당하게 될 근심이 있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주상이 욕을 당하게 되면 신하는 죽어야 마땅하니, 설령 번신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더라도 치욕이 군부에게 미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이 일은 본래 죽을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은 이 일을 기화(奇貨)로 여길 것이니, 조정에서 만약 숨겼다가 조사하는 때에 공갈하는 말이라도 한다면 내가 곤란해질 것이다. 바른대로 말한다면 저들이 조종하고 욕보이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비국이 담당하면 영상과 좌상도 거기에 들게 되니, 필시 직책에서 파면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는 국가의 불행이니 다시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임금이 되어 대신으로 하여금 처벌을 받게 한다면 어찌 대신을 공경하는 의리이겠는가. 죄를 번신에게 돌려 저들의 처치를 기다려야 할 듯하다."
하였다. 공판 이완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번신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고 싶습니다. 번신이 벌을 받는 편이 임금이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한결 낫습니다."
하니, 호판 정치화와 이판 김수항이 아뢰기를,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바른대로 말하여 숨기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하자, 태화와 명하도 모두 아뢰기를,
"신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서울에 도착하기를 기다려 형편을 봐가며 말해야 하겠다. 비국이 담당한다는 말은 우선 퍼뜨리지 말고, 빈신도 이러한 뜻을 상세히 갖추어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에게 은밀히 하유하여야 될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대간을 이목(耳目)으로 여기시는데, 근래에 대관이 논핵함에 있어 간혹 그 사람에게 죄가 없는 줄 알면서 고의로 탄핵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처럼 부정한 대관도 이목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민점(閔點)이 탄핵을 당한 것에서 이러한 경우를 보았습니다. 민점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가 태봉(胎封)의 사건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매우 명백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끝내 탄핵을 당해 파직되었으니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민점을 서용하라."
하니, 허적이 또 아뢰기를,
"오늘날 빈청의 신하들은 모두 민점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신이 말을 꺼낸 뒤에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나랏일이 이 지경이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하겠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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