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경술
일식이 있었다.
6월 3일 임자
장선징(張善瀓)을 대사간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이조 참판으로, 이정(李程)을 부응교로, 윤심(尹深)을 부교리로 삼았다.
상이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년에 온천에 갔을 때 본도 감사와 온양 군수를 모두 가자(加資)했었다. 이번에도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되겠으니, 감사 임의백(任義伯)과 군수 박구(朴邁)를 모두 가자하라."
하였는데, 장령 이광적이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아뢰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6월 7일 병진
응교 이민서(李敏叙)가 상소하여 이유를 파직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8일 정사
이민서(李敏叙)를 사인으로 삼았다.
6월 10일 기미
장령 이광적 등이 아뢰기를,
"기강이 해이하여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서울의 백성들 중에도 호적에 누락된 자가 많습니다. 서울이 이와 같으니, 외방(外方)이 어떠할지 알 수 있습니다. 해당 부서로 하여금 적발하여 사목(事目)에 따라 논죄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6월 13일 임술
성후설(成後卨)을 사간으로 삼았다. 응교 이민서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근래 사소한 일로 인하여 일을 논한 신하의 기세를 꺾으시고 연이어 준엄한 비답을 내리시니, 신들은 지나치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두세 명의 유신(儒臣)이 ‘간교(奸巧)’라는 두 글자의 비답을 받은 뒤로 황공하여 들어가 공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후회하는 뜻을 보이시어 그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출사할 수 있도록 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진실로 성덕(盛德)의 일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가로부터 달리 출사하지 말라는 명이 없었는데, 어찌 돈독하게 타일러 출사하라고 권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15일 갑자
전 감사 이상일은 어의궁을 뒤섞어 기록한 죄로, 김휘(金徽)는 풍기(豊基)의 태봉(胎封) 사건의 죄로 모두 삭탈 관직하였는데, 의금부가 조율하여 아뢴 데 따른 것이었다.
6월 17일 병인
오상(吳尙)·최일(崔逸)을 장령으로, 이유상(李有相)을 헌납으로, 조헌경(曹憲卿)을 지평으로 삼았다.
6월 18일 정묘
정언 김징(金澄)이 아뢰기를,
"감역(監役) 박순(朴錞)의 처 조씨(趙氏)는 성격이 본래 패악스러운데, 그의 남편이 가까이하는 여종을 질투하여 혹독한 형벌을 마구 가하여 끝내 죽이고 말았습니다. 또 고(故) 익풍군 이속(益豊郡李涑)이 살아 있을 때에 가까이하던 여종이 있었는데, 그의 처 임씨(任氏)가 질투심이 많고 사납고 성질이 괴팍스러워, 이속이 죽은 뒤에 그 여종이 두려워 달아나 숨자 그 여종의 어미를 잡아다가 혹독한 형벌을 가해 죽이고는 시체를 도성 안에 버렸습니다. 유사(有司)로 하여금 법대로 처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형조로 하여금 그 문장(門長)과 가장(家長)을 함문(緘問)하게 하고, 또 매질을 했던 종을 추문(推問)하게 하였다.
6월 19일 무진
응교 이민서, 부교리 이단하, 부수찬 유명윤 등이 일식의 변을 인하여 상차하였다. 경연을 열어 성지(聖智)를 넓힐 것, 기강을 세워 호오(好惡)를 분명히 할 것, 서정(庶政)을 다스려 고식(姑息)을 제거할 것, 어진 인재를 천거하여 직책을 맡길 것, 피폐한 정치를 혁파하여 민생을 편안히 할 것, 언로를 열어 총명을 넓힐 것 등에 관한 예닐곱 가지 조목이었는데, 모두 수백 마디나 되는 말이었다. 그 가운데 언로에 관해 논하기를,
"지금 전하께서는 말의 시비를 살피지 않으시고, 오직 관직의 높고 낮음만으로 취사(取舍)를 보이십니다. 그래서 국정을 맡은 재상으로 하여금 공론을 돌보지 않게 하시고, 언책(言責)을 맡은 대각으로 하여금 할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조정이 청명하여 권세있는 간신의 화가 없지만, 만약 오늘과 사정이 달라진 훗날 매우 간특하여 주상의 총명을 가리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쓰는 자가 있을 경우에 언로가 닫혀 감히 말하는 자가 아무도 없게 되면, 나라가 위태롭거나 망하게 되는 화를 장차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
군상(君相)이 모름지기 우장(優奬)을 가하고 기를 꺾지 않아야만 언로가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각이 한 해 동안 입이 아프게 논쟁한 일을 간혹 완강하게 거부하여 따르지 않으시고, 한두 가지 말을 아뢰었다가 뜻밖에 준엄한 배척을 당하기도 하니, 이는 성상께서 우장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또 근래 경연에서 대신이, 대간이 아뢴 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진달하면서 대간을 한꺼번에 배척하여 공공연히 비난하였고, 심지어 ‘대각을 믿을 수 없다’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성상에게 대각을 경시하는 조짐을 열어주어 대각을 한없이 수치스럽게 만든 것이며, 대신이 임금에게 아뢰는 체모가 아니니 이것으로 보면 상신 역시 대각을 꺾은 것입니다. 이러면서도 언로가 막히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 장령 이동직은 먼저 민점에 대한 의논을 꺼냈다가 대신에게 배척당하고 나서 인피하는 말을 명백히 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듯한 점이 있었습니다. 대각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켰으니 체차하소서. 주사 제조(籌司提調)는 임무가 매우 중요한데, 김시진(金始振)과 남용익(南龍翼)은 모두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 갈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천지의 변과 만물의 괴이가 오늘날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데 또 일식의 재변까지 생기니 나의 근심과 두려움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반성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해 만 가지 일의 실효가 드러나지 않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를 경계시키고 가르치는 말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와 말을 아뢰는 체제는 단지 정성만을 다하고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없어야만 지극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차자의 끝에 아뢴 일은 달리 뜻이 있어 한 말이다. 상신의 말에 버럭 화를 내어 ‘권세있는 간신’이라는 등의 말을 끌어오고 ‘임금에게 조짐을 열어주었다.’는 등의 말로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우연히 한 말이 아니니 참으로 놀랍다. 또 동직의 경우 지난번 온천에 있을 때에 추고하라고 의논하였으니, 그 의논을 먼저 꺼내었다가 대신에게 배척당했다는 등의 말은 더욱 근거가 없다. 더구나 주사 제조가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 어제 강연에서 앞으로 나와 일을 아뢰었는데, 차자 끝에 쓴 말은 어찌하여 아뢰지 않고 물러나 종이 끝에 적었단 말인가. 이것이 내가 더욱 그 뜻의 소재를 알지 못할 일이다."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오랫동안 빈청에 개좌(開坐)하지 않았는데 언제 개좌하였으면 하는가?"
하니, 회계하기를,
"비국에 물었더니, 우상 허적이 옥당 차자에 불안함이 있는 것 때문에 성밖으로 나갔으므로 개좌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 이원정을 보내 들어오라는 뜻으로 하유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죄는 언어에 관계된 작은 실수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상의 총명을 속여 가리고 언로를 막는 것은 신하된 자의 큰 죄인데, 신이 이러한 죄를 지었으니 도리로 보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바라건대 속히 나라의 법을 적용하여 여론에 답하시고, 또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도록 속히 허락하소서."
하였다.
6월 20일 기사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삼았다.
우상 허적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난번 등대(登對)하던 날 말끝에 우연히 대관(臺官)이 성상을 속이는 모양을 대략 아뢰었지만, 그래도 눈치를 보느라 생각을 다 토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신이 스스로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제 몸보다 임금을 더 사랑하지 못하여 세 조정에서 특별히 받았던 은혜를 저버리고 도리어 성상의 총명을 속여 가리고 언로를 막는 죄에 빠진 것입니다. 옥당이 차자로 의논드렸다는 말을 듣고 경황없이 성을 나가 짚자리를 깔고 견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삼가 듣건대 차자의 비답에 유신을 우대하는 예가 결여되었다고 하니, 신의 죄가 배로 늘어났습니다. 신을 삭탈 관직하고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민심이 아름답지 못하여 논의가 엇갈리니, 자기편은 사랑하고 상대편은 미워하며 사정(私情)을 앞세우고 공사(公事)를 뒤로 미룬다.「075) 어제 옥당의 차자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었으니, 행동의 바르지 못함이 진실로 매우 놀라웠다. 경은 어찌하여 거기에 개의하여 경황없이 성을 나가 거듭 체면을 손상시키는가. 나는 한탄스럽고 애석하게 여긴다. 나라의 체면을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 되고 나랏일의 어려움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니,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속히 들어오라. 가뭄에 구름을 바라는 것보다 간절한 나의 소망을 경은 잘 살피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6월 21일 경오
원접사 김좌명(金佐明)이 보고하였다.
"청사(淸使)가 이달 18일에 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했는데, 도망왔던 안추원(安秋元)도 체포하여 같이 데리고 왔습니다."
상이 신하들을 인견하고 묻기를,
"빈신의 장계 가운데, 대통관(大通官) 김삼달(金三達)이 말했다는 ‘고단(孤單)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영상 정태화와 좌상 홍명하가 대답하기를,
"만약 번신(藩臣) 한두 명이 담당한다면 저들이 비록 사죄(死罪)로 논하고자 하더라도 어렵지 않을 듯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미리 의논을 정하여 빈신에게 분부하여 그로 하여금 수답하게 해야 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번신에게 전부 위임하면 과연 대처하기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다. 조정이 담당하면 대단한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듯하지만, 완전히 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니 이 점이 진실로 염려스럽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스스로 담당하고자 하는데, 우상 허적은 간여하지 않았던 사람이므로 그가 들어오기를 기다려 참작하여 의논을 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허적은 출사할 생각이 없다고 하니, 상께서 별도로 돈독히 타일러 출사하기를 권하신다면 이와 같은 때에 어찌 감히 끝내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근래 조정의 기강이 엄하지 않고 인심이 경박하니, 이를 진정시키는 방도는 상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도승지 김수흥을 보내어 우의정 허적에게 하유하기를,
"재차 내 생각을 하유하였으니, 할말도 생각도 이미 다 말하였다. 체면이 달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게다가 지금은 객사(客使)가 경내에 들어와 있어 일이 매우 복잡하니 빨리 상의하여야 하겠다. 경이 조정에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가. 나라의 일은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망령된 말은 개의할 것이 없다는 것을 살펴, 속히 들어와 나랏일을 도와 해결하라."
하니, 승지가 돌아와 아뢰기를,
"허적이 아뢰기를 ‘전후의 성지(聖旨)가 간절하신데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했던 것은 진실로 만부득이한 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특별히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를 보내어 신하의 의리로 꾸짖으시고 속히 나오라고 하유하시니, 신이 비록 못났으나 그래도 사람인데 어찌 오늘날의 나랏일이 어렵다는 것을 모르겠으며, 또 어찌 군신의 의리는 천지 사이에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신이 진 죄가 지극히 무겁고도 크므로, 형벌을 면하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고 다시 조정에 들어가는 것은 실로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한 몸의 구구한 염치나 절개를 위해서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6월 22일 신미
이유상(李有相)을 수찬으로, 이동로(李東老)를 헌납으로 삼았다.
우상 허적이 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사관편에 비답을 보내어 "조정의 체면을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 되고, 나라의 어려움을 돌보지 않아서는 안 된다. 급히 의논하여 정할 일이 많으니, 모름지기 조정에 나오라."는 뜻으로 하유하였다.
용천(龍川)·철산(鐵山)·선천(宣川)·곽산(郭山)·정주(定州) 등지에 해일이 있었는데, 사람이 휩쓸려 죽고 민가가 떠내려가기까지 하였다.
6월 24일 계유
이경휘(李慶徽)를 대사헌으로, 정만화(鄭萬和)를 대사간으로, 정계주(鄭繼胄)를 집의로, 김익렴(金益廉)을 사간으로 삼았다.
6월 25일 갑술
우상 허적이 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6월 26일 을해
원접사 김좌명이 장계를 올려 아뢰었다.
"청사가 임반(林畔)에 도착했는데, 제독(提督) 이일선(李一善)이 감사의 군관(軍官) 전발영(全發英)을 불러 ‘안추원이 도망오던 날 의주에서 반드시 감사에게 보고했을 것인데, 감사가 즉시 계문하였는지를 감사에게 가서 물어보고 답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감사 이정영(李正英)과 상의하여 답하기를 ‘그때 과연 급히 보고하였으며, 의주 부윤이 곧장 원적관(原籍官)에게 공문을 보내 추원의 거주를 물었는데, 과연 풍덕인(豊德人)이라고 했으므로 잠시 친척집에 보수(保授)076) 하도록 하였다. 당초 즉시 치계하지 않은 책임은 진실로 면하기 어렵다.’ 하였더니 일선이 화를 내며 ‘그 당시 계문한 연유 및 경기에서 풍덕으로 교부한 때에도 계문한 일이 있었음을 추원이 분명히 납초(納招)하는데 어찌 이렇게 대답하는가? 이는 감사가 스스로 감당하려는 것이다. 조정에 이름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은 매우 중요한 데에 관계되므로 서울에 도착하여 조사할 때에 평문(平問)하는 데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니, 어찌 끝내 바른대로 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했습니다.
앞으로 신들에게 물어오는 일이 있을 경우, 조정을 떠나올 때에 정해준 대로 말을 만들어 꾸며대야 하겠지만, 혹시 묘당에서 달리 지시할 일은 없으십니까?"
상이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와 좌상 홍명하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우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지 않고자 했던 뜻은 그다지 대단한 데까지 이르지 않을 것으로 여겨서였다. 지금의 형세로 보면 가볍게 끝나지는 않을 듯하니, 우선 ‘조정도 알고 있었다.’는 등의 말로 범범히 답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이러한 뜻으로 빈신에게 분부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신들의 생각으로는 훗날 조사하는 때에 저들이 물으면 ‘처음에 공문을 왕복한 것은 그의 거주를 상세히 알려는 것이었고, 그 친척에게 보수(保授)한 것은 대개 구류하려는 의도였다. 비국이 주문(奏聞)하려 하였으나 이 사람이 이미 달아났으므로 도망가버린 일을 상국(上國)에 감히 아뢸 수 없었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죄를 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동의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정영은 조사를 받는 대상에 들어 있을 것이니 즉시 갈고 후임자를 속히 내려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정만화(鄭萬和)를 평안 감사에 특별히 제수하고 가선 대부로 승계(陞階)하였다.
상이 우상 허적에게 승지를 보내어 들어오라는 뜻으로 하유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상께서 이렇게 하유하시니 염치를 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신병이 또 악화되었으므로 며칠간 조리하여 들어가겠습니다."
하였다.
6월 29일 무인
이때 비가 많이 내려 장마가 졌으므로 기청제를 지냈다.
홍만형(洪萬衡)을 지평으로, 윤심(尹深)을 수찬으로, 이정(李程)을 응교로, 유철(兪㯙)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상주(尙州) 유생 성진승(成震昇) 등이 상소하였다.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유현(儒賢)을 무함한 유세철의 죄를 다스리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이미 관학(館學)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6월 30일 기묘
장령 김징(金澄) 등이 아뢰기를,
"호조 참의 조한영(曺漢英)은 대정(大庭)의 문안드리는 반열에서 형관(刑官)을 면대하여 욕보였는데, 말이 거칠고 패악스러웠습니다. 화를 잔뜩 내어 법관을 능멸한 것만도 진실로 이미 놀라운데, 또 추문(推問)하는 함서(緘書)에서 대관(臺官)을 멸시하며 공공연히 분을 내어 욕하였습니다. 사대부의 풍습이 어찌 이와 같단 말입니까. 그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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