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계축
계축003) 강릉(江陵)의 아비를 시해(弑害)한 죄인 옥기(玉只)가 복주(伏誅)되었다. 강릉 백성 박귀남(朴貴男)은 아들이 없이 단지 옥기(玉只)·연화(連花) 두 딸만 두었는데 귀남이 탄역(癱疫)을 앓아 온몸이 썩어 문드러졌다. 옥기의 남편 말남(末男)이 산골짜기에다 초막(草幕)을 지어 그곳에 데려다 두었는데 그 병이 집안에 전염될까 두려워하여 귀남의 처 난개(難介)가 옥기·말남 및 옥기의 아들 어둔금(於屯金)과 동모(同謀)하여 귀남을 결박(結縛)한 다음 단지에 넣어가지고 산골짜기에 묻었다. 연화도 그의 남편 김기(金墍)와 함께 또한 같이 갔었다. 그 뒤 향소(鄕所)에서 이 소문을 듣고 말남과 옥기에게 태형(笞刑)을 가한 다음 이를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헌부가 뒤늦게 그 소문을 듣고 그때의 관리를 추고할 것을 청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추관(推官)을 정하여 철저히 신문하게 했는데도 일이 오래도록 결단이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난개·김기·연화 등은 자복하지 않은 채 죽었고 어둔금 등은 오래되어서야 이에 자복하였다. 경차관(敬差官) 박증휘(朴增輝)를 보내어 안문(按問)한 뒤 왕옥(王獄)으로 잡아오니, 삼성 추국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옥기·어둔금이 아울러 복주되었으며 그 고을은 강호(降號)시키고 그 수령은 파직시켰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497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윤리-강상(綱常)
[註 003] 계축 : 원문에는 계축일이 초하루로 되어 있으나 이달은 임자일이 초하루이므로 계축일을 2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음.
강릉(江陵)의 아비를 시해(弑害)한 죄인 옥기(玉只)가 복주(伏誅)되었다. 강릉 백성 박귀남(朴貴男)은 아들이 없이 단지 옥기(玉只)·연화(連花) 두 딸만 두었는데 귀남이 탄역(癱疫)을 앓아 온몸이 썩어 문드러졌다. 옥기의 남편 말남(末男)이 산골짜기에다 초막(草幕)을 지어 그곳에 데려다 두었는데 그 병이 집안에 전염될까 두려워하여 귀남의 처 난개(難介)가 옥기·말남 및 옥기의 아들 어둔금(於屯金)과 동모(同謀)하여 귀남을 결박(結縛)한 다음 단지에 넣어가지고 산골짜기에 묻었다. 연화도 그의 남편 김기(金墍)와 함께 또한 같이 갔었다. 그 뒤 향소(鄕所)에서 이 소문을 듣고 말남과 옥기에게 태형(笞刑)을 가한 다음 이를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헌부가 뒤늦게 그 소문을 듣고 그때의 관리를 추고할 것을 청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추관(推官)을 정하여 철저히 신문하게 했는데도 일이 오래도록 결단이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난개·김기·연화 등은 자복하지 않은 채 죽었고 어둔금 등은 오래되어서야 이에 자복하였다. 경차관(敬差官) 박증휘(朴增輝)를 보내어 안문(按問)한 뒤 왕옥(王獄)으로 잡아오니, 삼성 추국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옥기·어둔금이 아울러 복주되었으며 그 고을은 강호(降號)시키고 그 수령은 파직시켰다.
2월 3일 갑인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이일상(李一相)은 약방의 제조였다는 것으로 가자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지금 이미 죽었으니, 어떻게 조처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가 있는가?"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고 판서 채유후(蔡𥙿後)는 죽은 뒤에 실록청의 당상이었다는 것으로 가자하게 했는데 신들이 그때 앙품했더니, 대신과 의논하여 추증하라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에 의거하여 하라."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유후는 자헌 대부(資憲大夫)였는데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가자해야 했기 때문에 품계를 뛰어넘어 찬성을 추증했습니다. 지금 일상은 정헌 대부로서 숭정(崇政)의 품계를 가자해야 되는데 품계를 뛰어 올린다면 정1품을 가자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2월 5일 병진
소결청(疏決廳)을 설치하고 우의정 허적에게 영솔하도록 명하였다. 허적이 이조에다 국(局)을 설치하고 여러 당상들을 차출하여 함께 조사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을 도제조로, 이상진(李尙眞)·이경휘(李慶徽)·김수항(金壽恒)·정만화(鄭萬和)를 당상으로 삼았다.
2월 7일 무오
정재희(鄭載禧)를 정언으로, 이단하(李端夏)를 부교리로 삼았다.
헌납 최일(崔逸)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동료가 옥과 현감(玉果縣監) 송이영(宋以穎)이 잘 다스리지 못하는 정상에 대해 신에게 말하기에 상의하여 탄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물의를 듣건대, 억울하다고 말하고 남쪽에서 온 사부(士夫)들도 그가 잘 다스린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이 일을 논함에 있어 잘못한 것이 드러났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정계주가 아뢰기를,
"송이영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리가 파다하기 때문에 신이 지난번 동료와 함께 상의하여 파직시키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지금 사실과 어긋난다는 것으로 와서 피혐하니, 그 의도의 소재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모두 신이 경시당한 소치이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강화(江華)의 덕포진(德浦鎭)을 통진(通津)으로, 철곶진(鐵串鎭)을 풍덕(豊德)으로, 정포진(井浦鎭)을 교동(喬桐)으로 옮기고, 가까운 고을의 육군(陸軍) 3백 15인을 세 진(鎭)에 나누어 주었다.
2월 8일 기미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처치하여 최일은 출사시키고 정계주는 체차시키게 하니, 상이 따랐다.
헌납 최일이 아뢰기를,
"앞서 동료의 말을 따라 논열한 것은 공심(公心)이었고 뒤에 잘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인피한 것도 또한 공심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료가 피사(避辭)에서 준열한 비난을 가할 줄은 뜻밖이었습니다. 이는 모두 신이 제우(儕友)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한 소치이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도 처치가 어긋나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는 것으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맹주서(孟胄瑞)가 처치하기를,
"처음에 상세히 살피지 못하고 경솔히 동참했다가 사실과 어긋났다고 핑계대어 지레 인피하였고, 의당 체직시켜야 하는데 출사시킬 것을 청하여 물의가 그르다고 하니, 대체(臺體)에 의거 헤아려 보건대 사세상 직에 있기가 곤란합니다. 최일·이경억을 아울러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0일 신유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이익(李翊)을 사간으로, 이동명(李東溟)을 헌납으로, 이혜(李嵆)·이동직(李東稷)을 정언으로, 이숙(李䎘)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집의 이유, 장령 맹주서, 지평 유헌이 제신과 내시(內侍)에게 가자하라고 한 것을 환수하라고 연계(連啓)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렇게 재변을 만난 때를 당하여 문무과(文武科)의 방방(放榜)이 있은 뒤 잔치를 베풀거나 유가(遊街)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일절 금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1일 임술
헌납 이동명, 대사간 이은상이 추감 대상자라는 것으로 인피하였다. 모두 체차시키라고 처치했는데 상이 특별히 은상은 출사하게 하였다.
상이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허적, 병조 판서 홍중보, 공조 판서 이완, 부호군 이경억, 예조 판서 박장원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조조(仁祖朝) 때 내가 원손(元孫)으로 책례(冊禮)를 행할 적에 흑관(黑冠)을 쓰고 행례했는데 지금은 무슨 복색(服色)으로 해야 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의당 장복(章服)으로 행례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중종조(中宗朝) 때 인종(仁宗)이 책례를 행할 적에 처음에는 관례(冠禮)를 치루지 않은 사람이 쓰는 관을 썼다가 책례를 끝낸 뒤 정식 관례를 추후 행했다고 한다. 《중종실록(中宗實錄)》을 조사하여 보면 책례와 관례의 선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책례 때에는 평천관(平天冠)으로 행하고, 관례는 추후에 행하는 것이 온편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복색은 비록 책례 때는 아니지만 내가 기축년004) 에 보양관에게 수학(受學)할 적에 곤룡포(袞龍袍)를 입었다."
하니, 장원이 아뢰기를,
"인종 대왕(仁宗大王)의 관례와 책례의 선후를 상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행장(行狀)이 옥당에 있으니 즉시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사해 본 뒤 품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오두인(吳斗寅)의 말에, 두 대비전(大妃殿)께서 궁녀를 선입(選入)하는 일이 있었다고 했는데, 내가 상세히 들어보니 실은 이런 일이 없었다. 양전(兩殿)의 일은 나의 궐실(闕失)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니, 상세히 알아가지고 아뢰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만일 이를 가지고 그르다고 한다면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무엇을 연유하여 진계(進戒)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허적도 태화처럼 두인을 신구(伸救)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반드시 뜬말을 만들어 두인의 귀로 들어간 것일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설사 조작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언근(言根)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만일 언근을 따진다면 곧은 말이 이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 김우석(金禹錫)이 아뢰기를,
"신이 물러가서 열성(列聖)의 행장(行狀)을 조사하여 보니, 인묘(仁廟)의 행장에 ‘6세 때 중조(中朝)에 책봉(冊封)을 청하고 8세에 관례(冠禮)를 행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의거 살펴본다면 관례는 책례 뒤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허적은 아뢰기를,
"강상(綱常)의 변이 근래 자주 발생하는 탓으로 해읍(該邑)의 수령이 여기에 좌죄되어 파직된 자가 많으니, 의당 변통해야 합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그 수령을 파직시키는 것은 교화를 잘 행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 변이 발생했을 때의 수령은 좌죄되어 파직되는 것이 당연할 듯합니다만, 성옥(成獄)되었을 때의 수령은 관여시킬 바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뒤로는 변이 발생했을 때의 수령을 파직시키라."
하였다.
평안도 박천(博川) 땅에 눈이 내렸는데 그 빛깔이 황적색(黃赤色)이었으며 안주(安州)·숙천(肅川)·태천(泰川) 등지에도 눈이 내렸는데 그 빛깔이 적색(赤色)이었다.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다.
2월 14일 을축
사방이 캄캄하고 누런 빛이 땅을 비추었으며 이어 눈이 내렸는데 눈위에 부애(浮埃)가 있었다.
홍처대(洪處大)를 승지로 삼았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추감받는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사은사(謝恩使)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 부사(副使) 김시진(金始振), 서장관(書狀官) 성후설(成後卨)을 청(淸)나라로 보냈다.
동부승지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해조의 회계에 대한 비답을 보니, 문권(文券)에 따라서 결급(決給)하도록 판하(判下)하셨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공한지(空閑地)가 된 전토(田土)는 국가에서 이미 백성에게 경작하여 먹으라고 허락을 했는데 개간할 때 입안(立案)을 내는 경우는 또한 적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 동안 세금을 내어왔고 누세(累世) 동안 전하여 오던 것을 문권이 없다고 멋대로 빼앗는다면 이는 백성을 속이는 것입니다. 대저 문권의 유무에 의거 입락(立落)시키는 것은 갑(甲)과 을(乙)이 쟁송할 적에 이에 의거하여 판결하는 준례인데 이를 어떻게 여기에다 견줄 수 있겠습니까. 궁가(宮家)에서 절수받기 전에 사람들이 모두 경작하여 먹을 수 있었고 궁가에서 절수받은 것은 그 뒤에 있었으니, 시기전(時起田)으로 입안(立案)하여 결급하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한데 지금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니 신은 몹시 개탄스럽고 백성들의 기대를 크게 잃게 될까 몹시 염려되어 감히 판부를 봉(封)하여 도로 봉입(捧入)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진년 이후 주인 없는 진황전(陳荒田)이라고 일컬어 절수한 것이 어찌 한둘이겠는가. 그 안에 또한 어찌 먼저 개간한 자가 없었겠는가마는 혁파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갑술년005) 에서 지금까지는 40년이 넘지 않았는데 누세(累世) 동안 전하여 왔다는 것이 어찌 옳은 말이겠는가. 곧바로 혁파하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가커니와 은연중 명목(名目)을 만들어 혁파시키는 데로 귀결하게 하는 것은 나는 취하지 않는다."
하였다.
2월 19일 경오
조복양(趙復陽)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은상(李殷相), 정언 최관(崔寬)이 아뢰기를,
"공조 정랑 김수홍(金壽弘)이 사설(邪說)을 창도하여 망령되이 조정에서 이미 정한 대례(大禮)를 논의하면서 문자를 지어 사람들에게 돌려 보이며 시비(是非)를 현란시킬 계책을 부리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무상(無狀)하여 진실로 책할 가치조차도 없습니다만 조의(造意)가 음험하여 또한 괴이한 논의를 하는 자들이 구실로 삼을 수 있는 자료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이런 사람은 의관(衣冠)의 반열에 둘 수 없으니, 사판(仕版)에서 삭거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왕세자의 책례(冊禮)는 인묘조(仁廟朝) 때의 일에 의거하여 먼저 책례를 행할 것으로 계정(啓定)하였습니다. 책례 때의 관대(冠帶)와 복색(服色)도 의당 그때 이미 행한 절목에 의거해야 하겠습니다만, 복색에 관해서는 전후 사관(史官)이 실록(實錄)을 등서하여 온 데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축년006) 위에서 세손(世孫)으로 있을 적에 책례를 관례보다 앞서 행하였으니, 그때의 복색을 전거로 삼는 것이 합당할 듯하나, 이는 세자(世子)의 책례 때 복색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막중한 의절(儀節)을 신조(臣曹)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중묘(中廟)·인묘(仁廟)의 책례 때의 실록을 조사하여 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0일 신미
대사간 이은상(李殷相), 사간 이익(李翊), 정언 최관(崔寬)이 잇따라 김수홍의 일을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설화(說話)가 분명하지 않다. 문자(文字)라고 한 것은 그것이 무슨 문자이며 사설(邪說)로 망령되이 논의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슨 사설로 망령되이 논의한 것인가? 임금에게 고하는 말과 간사함을 분변하는 이야기는 의당 환히 명백하게 하여 미진한 것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궁구한 지 여러날이지만 결국 계사(啓辭)의 본의를 알 수가 없었다."
하였다.
2월 21일 임신
간원이 아뢰기를,
"김수홍을 사판에서 삭거시키라는 계사는 말을 만드는 즈음에 명백하게 하는 것이 부족하여 성상의 하교를 수고롭게 했으니 신들은 두려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당초 예(禮)를 논한 제신들이 복제(服制)를 의정(議定)할 적에 《예경(禮經)》의 본의에 분명한 전거가 있었는데도 오히려 감히 곧바로 결단하지 않고서 국조(國朝)에서 이미 행한 예(禮)를 참고하고 명(明)나라 시왕(時王)의 제도에 의거 단정한 것으로서, 고금의 증거를 모두 원용(援用)하여 대신과 함께 품의(稟議)해서 정한 것입니다. 대개 종통(宗統)의 복제(服制)는 본디 하나로 통하는 것이 있고 각기 하나의 의의가 되는 것이 있으므로, 순서를 잇고 종통을 계승함은 복제의 경중에 관계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이치가 매우 분명한데도 윤선도(尹善道)가 이에 감히 흉론(凶論)을 수창(首倡)하여 의례(議禮)를 가탁, 이를 인하여 화(禍)를 빚어낼 계책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감(聖鑑)이 매우 밝아 그 정상(情狀)이 다 드러났으므로 공의에 의거 이미 그 죄를 바루었으니, 음험하고 간사하고 화(禍)를 즐기는 무리들이 의당 감히 다시 멋대로 임금의 마음을 엿보는 작태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김수홍이 선도의 무리의 여론을 주워 모아 하나의 논리가 없는 글을 만들어 진신(搢紳)들에게 전하여 보였습니다. 그 글이 아직 예람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지금 조목에 따라 변파(辯破)할 수 없습니다만, 대체로 전편(全篇)의 주의(主意)는 헌의(獻議) 가운데 ‘서(庶)’라는 한 글자를 점출(拈出)하여 의심해서는 안 될 자리를 의심한 것으로, 심지어 선왕(先王)에게 곧바로 천칭(賤稱)을 가했다고 하기까지 하였으니, 그가 지척하여 의의(擬議)한 것은 신하로서는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 있었습니다. 반복하여 헛말을 과장하고 극도로 음참(陰慘)스러움을 부리어 사람을 무함하는 기화(奇貨)를 만들고 억지로 제신들의 죄안을 만들었습니다. 그 조의(造意)가 그지없이 공교하여 절절(節節)이 패망(悖妄)스러우니, 또한 일종의 사설을 창도하는 자들이 구실로 삼을 자료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사판에서 삭거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충청 병사 정한기(鄭漢驥)는 성품이 본디 탐오스러워 전에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있으면서 읍기(邑妓)에게 고혹되어 읍민(邑民)에게 모욕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곤외(閫外)의 중임(重任)을 이런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되니 체차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김수홍이 올린 글은 다음과 같다.
"안동 후인(安東後人) 김수홍(金壽弘)은 삼가 장자(長子)를 분변하고 서자(庶子)를 논하는 글 1통을 멀리 송이상(宋二相)007) 합하(閤下)에게 올립니다. 추생(鯫生)008) 은 초토(草土)009) 에서 3년을 있으면서 모진 목숨이 죽지 않고 부지되어 대략 예의(禮義)의 깊은 뜻을 섭렵하였는데 혹 엿볼만한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기해년010) 대상(大喪)이 있은 이후 상복(喪服)에 관한 의례(議禮)의 소장(疏章)과 제재(諸宰)들이 헌의(獻議)한 글을 모아서 상하를 열람한 것이 어찌 한두번만 되겠습니까. 이때를 당하여 의논이 분분하여 서로 제재했기 때문에 대왕 대비의 삼년 복제에 대해 통변(洞辯)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정례(正禮)를 어기게 됨으로써 군상(君上) 부자(父子)의 더없이 중하고 더없이 큰 예(禮)를 시종 폐기하고 행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 일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막혀 지붕을 바라보며 긴 탄식을 자아냅니다.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篇)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대저 예(禮)는 선왕(先王)이 천도(天道)를 받들며 인정(人情)을 다스렸던 것이므로 이를 어기는 자는 죽고 이를 어기지 않는 자는 산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쥐에게도 사체(四體)가 있는데 사람으로서 예(禮)가 없을 수 있겠는가. 사람으로서 예가 없다면 어찌 일찍 죽지 않는가.」 하였다. 이런 때문에 예는 반드시 하늘에 근본하고 땅을 본받고 귀신에게 행해지고 상제(喪制)에 통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예를 보이셨으니, 천하 국가를 바룰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부자(夫子)의 말씀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예의 득실(得失)을 가지고 사람의 사생(死生)과 국가의 안위(安危)에 대해 경계했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조정에서 이 대례(大禮)에 대해 노력했는데도 정례(正禮)를 찾지 못한 것인지, 당초 생각하지 않아 정례를 찾지 못해서 사람들이 모르고서 그르다고 하는 것인지, 정례를 어겼다는 것을 알고서 의심하는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오복(五服)의 제도는 각기 그 지위에 따라 적용해서 행하는 것이 오로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혹 명위(名位)와 존비(尊卑)에 잘못된 점이 있어 3년의 대례(大禮)를 폐기하고 거행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는 실로 일국(一國) 상하의 지극한 슬픔이니 마땅히 먹을 때나 쉴 때나 항상 잊지 않고 분명히 변해(辯解)하여 올바르게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잘못된 복제에 대해서야 지금 말할 것이 없습니다만, 명위(名位)가 문란된 것을 추후 바로잡는 것은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 성인이 말하기를 ‘경솔히 예(禮)에 대해 의논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같이 천박(淺薄)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막중한 대례를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선각자(先覺者)에게 질의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바루지 않으면 도(道)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이므로 관견(管見)을 진달하겠습니다. 첫머리에는 합하(閤下)께서 헌의(獻議)하면서 취사(取捨)한 것에 대해 조목별로 열거하고, 다음에는 경전(經傳)에서 변별(辨別)한 명문(明文)을 초기(抄記)하였으며, 끝에는 고금의 득실에 대한 논란을 붙였습니다. 비록 교제는 얕은데 말은 깊다는 경계를 범하는 것입니다만 이는 실로 나라를 위하고 예(禮)를 아끼는 정성에서 나온 조처이니, 합하께서는 평온한 마음으로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이 이하는 헌의(獻議)한 말에 대해 조목별로 열거한 것이다.】 첫째는 ‘지금 허목(許穆)의 소장에서 인증(引證)한 것이 많기는 하나 긴요한 부분은 단지 두 개의 단락입니다. 그 하나는, 장자(長子)가 죽으면 제이장자(第二長者)를 세우고 참최복(斬衰服)을 입는다는 것이고, 그 또 하나는 서자(庶子)가 후사(後嗣)가 되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데 이는 첩자(妾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종통(宗統)은 둘이 될 수 없고 참최복은 두 번 입지 않는다는 뜻에 있어 어떠합니까.’ 하였으며, 또 ‘주공(周公)이 경(經)을 세우고 자하(子夏)가 전(傳)을 짓고 정현(鄭玄)이 주(註)를 냈는데 모두 차자(次子)가 장자(長子)가 된다는 말이 없습니다만,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이르러 비로소 이 말이 있었습니다. 가공언은 명유(名儒)이고 또 황면재(黃勉齋)가 《통해(通解)》의 속편(續篇)에 거두어 입록(入錄)했으니 어떻게 감히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주자(朱子)·정자(程子)의 감파(勘破)를 거치지 않았으니 그 말이 과연 허목이 말한 것과 같은지 모르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이른바 서자(庶子)란 진실로 첩자(妾子)를 말하는 것이나 차적(次嫡) 이하는 임금의 동모제(同母弟)라도 또한 서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疏)에 「서자는 첩자의 호칭인데 적자로서 둘째인 자도 함께 서자라고 명명한다.」 했으니, 그렇다면 효종 대왕(孝宗大王)을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서자라고 해도 해가 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서(庶)는 천칭(賤稱)이 아니라 중자(衆子)의 뜻인 것입니다. 《예경(禮經)》을 상고하여 보면 이런 유(類)가 매우 많습니다.’ 하였으며, 또 ‘그리고 소(疏)의 이야기에서 이미 「차남(次男)을 세웠을 경우 또한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고는, 그 밑에 또 「서자가 승증(承重)했으면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이설(二說)이 서로 모순이 됩니다. 때문에 허목(許穆)이 기필코 서자를 첩자라고 하면서 차장(次長)은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반드시 차자가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明文)을 얻은 연후에야 허목의 말을 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또 한 가지 말이 있습니다. 가공언의 소(疏)에서는 단지 제일자(第一子)가 죽은 데 대해서만 말을 했고, 제일자가 후사(後嗣)가 없이 죽은 데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아마도 성인(成人)이 되기 전에 죽은 경우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긴요한 곳인데 지금 허목의 이야기는 입문(立文)의 본의(本意)를 상세히 고증하지 않고서 갑자기 입설(立說)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단궁(檀弓)의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011) 가 과연 모두 돌아보기에 부족한 것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인정과 사세로 미루어 보더라도 장자가 성인이 되어서 죽었는데 차장(次長)을 모두 장자라고 명명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적통(嫡統)이 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비된 자가 한 몸에 참최복을 입게 되는 횟수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습니다. 【또 경전(經傳)의 글을 초기(抄記)한 것이 아래와 같다.】 《의례(儀禮)》 참최장(斬衰章)의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한 경문(經文)에 대해 정현(鄭玄)이 주(註)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上下)로 통용하게 해서 한 말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長者)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고, 가공언의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정현이 말한 것은 장자(長子)만 상하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총자(冢子)도 또한 상하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註)에 이르기를 「총자는 장자(長子)라고 말한 것과 같아서 상하로 통용될 수 있다.」고 하였고, 또한 적자를 장자(長者)로 세운다고 한 것은 적처(嫡妻)의 소생은 모두 적자라고 명명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니,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장자(第二長者)를 세우고 또한 장자(長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할 경우는 제일자(第一者)에게만 해당되나, 장자라고 말하게 되면 적자를 장자(長者)로 세우는 점도 통해지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버지에게 정·체(正體)가 되고 또 이에 장차 전중(傳重)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서자는 장자(長子)처럼 삼년복이 되지 못하니 할아버지를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했는데, 정주(鄭註)에 ‘서자는 아버지의 후사(後嗣)가 된 사람의 아우이다. 서(庶)라고 말한 것은 원별(遠別)하기 위한 것이다.’ 했고, 가공언의 소에서는 ‘이는 적자와 적자가 서로 계승해 가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할아버지를 계승해야 이에 장자(長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고 적처 소생인 제이자(第二者)는 이것이 중자(衆子)인데 이제 똑같이 서자라고 명명하는 것은 장자(長子)와 원별(遠別)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첩자와 호칭이 같은 것이다.’ 했고, 또 ‘승중(承重)했어도 삼년복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 있으니, 첫째는 정·체(正體)이되 전중(傳重)할 수 없는 경우인데 이는 적자가 폐질(廢疾)이 있어 종묘(宗廟)의 주관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하고, 둘째는 전중은 했지만 정·체(正體)가 아닌 경우로 서손(庶孫)을 후사로 세운 것이 이것이다. 셋째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인 경우로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운 것이 이것이고, 넷째는 정이불체(正而不體)로 적손(嫡孫)을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습니다.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제후(諸侯) 별자(別子)의 대소종도(大小宗圖)의 주(註)에 유해손(劉垓孫) 선생이, 제사(祭祀)에는 반드시 종자(宗子)를 써야만이 법방(法方)이 문란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였고, 또 ‘종자는 적자라야만이 세울 수 있다. 따라서 서장(庶長)은 세울 수 없다. 그러나 적자가 없는 경우에는 또한 서자를 세울 수 있는데 이른바 세자(世子)의 동모제(同母弟)를 말하는 것으로 세자는 바로 적자인 것이다. 세자가 죽었을 경우에는 세자의 친제(親弟)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適)인 것으로 서자는 세울 수 없는 것이다.’ 했습니다. 《의례》 자최 삼년장(齊衰三年章)의 경문(經文)에 ‘어머니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그 소(疏)에 해석하기를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자최복(齊衰服)을 입기 때문에 또한 자최복을 입는다.’ 했습니다. 전(傳)에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버지가 낮추지 않은 것을 어머니 또한 감히 낮출 수 없기 때문이다.’ 했고, 정주(鄭註)에 ‘감히 낮출 수 없다는 것은 감히 자기가 높다는 것으로 조녜(祖禰)의 정체(正體)에 대해 낮출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례(周禮)》 춘관(春官)의 경문(經文)에 ‘소종백(小宗伯)의 직책은 삼족(三族)의 분별을 관장하여 친소(親疏)를 분변하는 것인데 정실(正室)을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 했는데, 그 주(註)에 ‘정실은 적자(嫡子)이고, 문자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문(家門)을 담당하는 아들이란 뜻이다.’ 했습니다.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증자가 묻기를 「종자(宗子)는 사(士)가 되고 서자(庶子)는 대부(大夫)가 되었으면 그 제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상생(上牲)으로 종자의 집에서 제사지내야 하며 축에는 효자(孝子) 아무가 개자(介子) 아무를 위하여 상사(常事)를 올린다고 써야 한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효자는 종자를 말하고 개자는 서자를 말한다. 서(庶)라고 하지 않고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는 비천(卑賤)한 칭호이고 개는 부이(副貳)의 뜻이니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이다.’ 하였습니다. 《의례》 참최장(斬衰章)의 경문(經文)에 ‘남의 후사(後嗣)가 된 자’라고 했고, 전(傳)에는 ‘어떻게 해야 남의 후사가 될 수 있는가. 동종(同宗)인 경우에는 지자(支子)가 가합하다.’ 했으며,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다른 집의 적자(嫡子)는 다른 집의 후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지자(支子)를 취하는 것인데 지자는 제이(第二) 이하의 서자인 것이다. 서자라고 말하지 않고 지자라고 말한 것은 서자라고 말하면 첩자를 지칭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서(庶)를 바꾸어 지(支)라고 말한 것이다.’ 했습니다. 《예기》 내칙(內則)에 ‘적자와 서자는 외침(外寢)에서 만나는데 임금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 방긋 웃게한 다음 이름을 지어준다.’ 했는데, 그 주(註)에 ‘여기의 적자는 세자(世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하였고, 방씨(方氏)는 ‘세자는 노침(路寢)에서 만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의례》 자최 부장기장(齊衰不杖期章)의 경문(經文)에 ‘대부(大夫)의 서자(庶子)가 적자(適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는데,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이는 대부의 첩자(妾子)이기 때문에 서(庶)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적처 소생의 둘째 이하라면 당연히 곧바로 곤제라고 할 것이요 서(庶)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했습니다. 《의례》 시마삼월장(緦麻三月章)의 경문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어 자기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소에서 해석하기를 ‘이는 총자(冢子)·적자(嫡子)가 없고 첩자(妾子)만 있는 경우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서자가 후사를 승계(承繼)하여 자기 어머니를 위해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뜻이다.’ 했습니다. 주문공(朱文公) 《가례(家禮)》 팔모도(八母圖)에 ‘서모(庶母)’라고 한 데 대한 주에 ‘서모는 아버지의 첩이다.’ 했습니다. 《서전(書傳)》 미자편(微子篇)의 편제(篇題)에 ‘미자(微子)의 이름은 계(啓)인데 제을(帝乙)의 장자(長子)이고 주(紂)의 서모형(庶母兄)이다.’ 했습니다. 《논어(論語)》 미자편(微子篇)에 ‘미자는 떠나갔다.’ 한 주(註)에 ‘미자는 주(紂)의 서형(庶兄)이다.’ 하였고, 소주(小註)에 이르기를 ‘《사기(史記)》 송세가(宋世家)에 의하면 미자는 은(殷)나라 제을(帝乙)의 아들이고 주(紂)의 서형(庶兄)이다.’고 했습니다. 《춘추(春秋)》의 경문(經文)에 ‘태묘(太廟)에 큰일이 있었는데 희공(僖公)을 제승(躋升)하기 위한 것이다.’ 한 주에 ‘희공은 민공(閔公)의 서형(庶兄)이다.’고 했습니다.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왕자가 시조(始祖)의 소자출(所自出)에게 체제(禘祭)를 지낼 적에 시조를 배향(配享)하여 사묘(四廟)를 세우는데 서자(庶子)인 왕도 또한 이렇게 한다.’ 했는데, 그 주(註)에 ‘세자(世子)에게 폐질(廢疾)이 있어 후사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서자를 세워 왕으로 삼은 경우인데 그때의 예제(禮制)도 세자가 하는 것과 같다.’ 했으며, 산음 육씨(山陰陸氏)는 말하기를 ‘한(漢)나라의 효문제(孝文帝)가 효혜제(孝惠帝)를 계승한 것이 적자(嫡子)로서 이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사(祭祀)를 받들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경문(經文)에서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서자(庶子)로서는 제사를 주관할 수 없고, 서자왕(庶子王)이 된 연후에는 제사를 주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끝에는 고금을 참작해서 논한 것으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아, 효종 대왕은 인조 대왕에 대하여 정실(正室) 제이적자(第二嫡子)의 자리이고 또 소현 세자(昭顯世子)에 대하여는 동모제(同母弟)요, 차적(次嫡)의 자리인 것입니다. 《의례(儀禮)》의 경문에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한 데 대해 자하(子夏)가 전(傳)을 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정·체(正體)로서 전중(傳重)했기 때문이다.’ 했고, 정현(鄭玄)은 주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가 통하기 때문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長者)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으며, 가공언의 소(疏)에는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자(第二者)를 취하여 세우고 또한 장자(長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하게 되면 제일자(第一者)에게만 의거하나, 장자(長子)라고 말할 경우에는 적자를 장자(長者)로 세우는 것도 통해지기 때문이다.’고 했으며, 《가례(家禮)》의 주(註)에는 ‘세자(世子)가 죽었을 경우에는 세자의 친제(親弟)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嫡)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공(周公)이 경(經)을 지은 조목의 순서를 관찰하여 보면 반드시 ‘아버지가 적장자(嫡長子)를 위하여’라고 했어야 하는데 ‘적장자’라고 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하여’라고 했으니, 이는 성인(聖人)이 사람들의 적장자가 사고가 있거나 혹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반드시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아야 하는 도리가 있음을 고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하로 통용하는 뜻을 취하여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하여’라고 한 것이니, 성인의 글은 간략하면서도 극진하여 참으로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저 약언(若言)과 약운(若云)이란 말은 적장(嫡長)·차장(次長)을 아울러 거론하여 나누어 해석한 것입니다. 또 전문(傳文)에서 정·체(正體)의 뜻을 논했는데, 정(正)은 정실(正室)의 적자(適子)를 말하는 것이고 체(體)는 부자(父子)가 서로 계승(繼承)하는 것입니다. 효종 대왕은 정실의 제이(第二)이자 소현 세자의 친제(親弟)로서 부왕(父王)의 명명(明命)을 받들어 종묘(宗廟)의 제사를 주관했으니, 바로 자하(子夏)의 전(傳), 정현(鄭玄)의 주 및 공언(公彦)의 해석, 《가례》의 주 등의 말과 비의(比擬)하여 논하여 본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합치됩니다. 헌의(獻議)에서는 ‘주공(周公)이 경을 세우고 자하가 전을 짓고 정현이 주를 냈는데 모두 차자(次子)를 장자(長子)라고 한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정현이 말하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하기 때문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다.’ 했으니, 실로 헌의(獻議)에서 논한 것과는 상당히 틀린 점이 있습니다. 주공의 경(經)과 자하의 전(傳)은 본의를 총괄한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따져서 생각하지 않으면 혹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참최장(斬衰章)에 삼년이란 글자가 없는데, 이를 고집하여 삼년의 복제를 폐기하겠습니까. 주자(朱子)·정자(程子) 양현(兩賢)이 다른 논의에 주를 내면서 정현과 가공언의 말을 인용한 것이 많았는데 그르다고 한 것이 있지 않았으니, 이는 면재(勉齋) 황간(黃幹), 유씨 해손(劉氏垓孫)이 주자의 문하에서 직접 수업하여 모두 저술한 것이 있으며, 대저 예컨대 《대학(大學)》의 경일장(經一章)에 대해 주를 내는 가운데 ‘증자(曾子)의 뜻인데 문인(門人)이 기록했다.’는 유(類)와 같은 것입니다. 헌의(獻議)에서 ‘주자·정자의 감파(勘破)를 거치지 않았다.’는 말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허목의 소장에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에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이유는 첩자이기 때문이다.’고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은 소장을 만들 적에 예서(禮書)의 언어(言語)를 절취(截取)하여 소장의 내용을 구성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비록 경전(經傳)의 전문(全文)은 아니지만 그 내용 가운데의 서자와 첩자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귀천을 분변하기 위해 말한 것이니, 기어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합하의 헌의에서는 허목의 소장 가운데서 제일조(第一條)인 ‘장자(長子)가 죽으면 제이장자(第二長者)를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고 한 한 조항은 버려두고 단지 제이조(第二條)의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으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한 것만을 취하여 논하였으니, 적자와 서자에 대한 것을 취사(取捨)하는 방도가 과연 정당하게 되었습니까. 아, 헌의(獻議)에 ‘이른바 서자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첩자(妾子)이지만, 차적(次嫡) 이하는 임금의 동모제(同母弟)라도 또한 서자라고 하기 때문에 소(疏)에 「서자는 첩자의 호칭인데 적자로서 둘째인 자도 같이 서자라고 명명한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가 되는 것이 해가 될 것이 없다.’고 갑자기 논설을 세웠습니다. 이는 바로 통융(通融)시켜 합쳐 말한 것으로 서자를 혼칭하여 마치 똑같은 것처럼 여긴 것이니, 서(庶)라고 말하여 원별(遠別)한 뜻을 전부 빼어버렸으니,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도 적(嫡)·서(庶)의 분별에 대해 명백히 변론하였고 뒷날의 유현(儒賢)들도 모두 이 뜻을 숭상했습니다. 다만, 차적(次嫡) 이하는 장자(長子)와 원별(遠別)한 까닭에 깊이 억제하여 첩자와 호칭이 같게 한 것이니, 이는 강쇄(降殺)시키는 도리로 대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경전(經傳)에서 서자(庶子)란 말을 통용해서 쓴 것인데 비천(卑賤)하다고 주석을 낸 것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서자가 비천하다는 것은 어찌 많은 말을 허비하고서야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반드시 명분을 바루어야 된다고 이부(尼父)012) 가 경계하였으니, 강쇄하기 위한 호칭을 감히 정적(正嫡)인 군부(君父)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의혹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자심합니다. 귀천(貴賤)을 가리켜 거론하여 명백히 변별(辯別)해 보자면, 정실(正室)이면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는 것이 《주례(周禮)》에 기재되어 있는데, 증자(曾子)가 공자(孔子)에게 종자(宗子)와 서자(庶子)의 제사에 대해 문의하니, 공자가 축에 효자(孝子)라고 쓰라고 답한 것은 전중(傳重)했기 때문이고,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가 비천한 것을 혐의해서이며, 개(介)라고 한 것은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라고 말했습니다. 자하(子夏)는 지자(支子)라야 된다는 것으로 《의례》 경문(經文)의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이라고 한 데 전(傳)을 내었으며, 가공언의 소(疏)에는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기 때문에 서를 고쳐 지(支)라고 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내칙(內則)에 세자(世子)·적자(嫡子)·서자(庶子)가 태어나면 아버지에게 보이며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주에 ‘세자는 국군(國君)의 원자(元子)이고 적자는 세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했는데, 한(漢)나라의 군유(群儒)들이 이를 《예기(禮記)》에 편차하기에 이르러 곡례(曲禮)의 ‘지자는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한 부분에 대해 ‘지자는 서자인데 서자는 비천하기 때문에 감히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주(註)를 내어 44편(篇)의 수편(首篇)에다 올려놓았습니다.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변별한 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다섯 조항이 어찌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차장(次長)은 서자(庶子)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明文)이 아니겠습니까. 《의례》의 경문(經文)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해서’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 했는데, 주공(周公)은 모두 이를 첩자의 호칭으로 곧바로 썼습니다. 내칙(內則)에 ‘서자를 아버지에게 보이면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것은 이미 상문(上文)에 보였습니다. 서모(庶母)는 《가례(家禮)》에서 아버지의 첩(妾)이라고 했고 아들을 낳으면 서얼(庶孽)이라고 한다고 했으며, 주(紂)의 서형(庶兄)인 미자(微子)에 대해서는 《논어(論語)》의 주(註)에 드러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주회암(朱晦菴)의 기록에서 나온 것입니다. 미자편(微子篇)의 서모형(庶母兄)과 노희공(魯僖公)의 서형(庶兄)이라고 한 것도 또한 선유(先儒)의 의논에서 나온 것인데, 이른바 서형이란 것은 측실(側室)의 천얼(賤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곱 조항이 어찌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서자가 첩자가 된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明文)이 아니겠습니까. 헌의에 ‘서(庶)는 천칭(賤稱)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서가 천칭이 됨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서자(庶子)라는 뜻은 하류(下流)가 많은 것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예경(禮經)》에 통용하였는데 주설(註說)에는 비천하다고 일컬은 것이 많았습니다. 여자가 남의 서모(庶母)가 되면 그 아버지가 반드시 천축(賤畜)이라고 했으며, 또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라는 경일장(經一章)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이 같지 않다고 한 의논이 많았으며, 제후와 서인에게 통달된다는 《중용(中庸)》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貴賤)·융쇄(隆殺)에 대한 의논이 있습니다. 이 두 절목(節目)은 모두 지극히 높고 지극히 낮은 것인데 공성(孔聖)이 말한 것이고, 증자문(曾子問)의 서자에 대한 주에도 이와 같습니다. 서자와 장자에 대한 전(傳)의 서자는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예경(禮經)》에 이런 유(類)가 매우 많다고 한 것이 이것인데 주(註)에는 천하게 여긴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소현(昭顯)이 세자(世子)의 지위에 있고 효묘(孝廟)가 봉저(鳳邸)로 있을 적에 혹 비의(比擬)해서 말할 경우가 있을 때 장자와 원별한다는 뜻에 의거 효묘를 서자라고 일컫는 것은 불가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다만, 지금은 정·체(正體)로 전중(傳重)하여 지위가 지존에 이르렀으며 인조(仁祖)의 적통이 이미 소현에게는 끊겼으니, 또한 원별할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자라는 천칭을 바로 효모(孝廟)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서자라는 호칭이 《예경(禮經)》에서 통용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귀천의 구별이 일성(日星)처럼 환히 밝은데,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차장(次長)을 세우고 또한 삼년복을 입는다는 것과 서자가 승중(承重)하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말한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모순이 된다고 한 말은 어디에 전거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승중했어도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가 사종(四鍾)이 있는데 그 세 번째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이니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는데, 합하(閤下)께서 서자라는 글을 가지고 효묘께 의심을 두고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효묘의 명위(名位)에 대해 원별(遠別)의 대상인 서자로 견주어 논하는 것도 오히려 불가한 것인데 더구나 부정(不正)이라는 글이 있는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옛날의 선유(先儒)들은 모든 소소한 절문(節文)에 관계되는 것도 반드시 그 경중을 헤아려서 갑을(甲乙)이 서로 논란했는데 갑의 의견이 옳으면 옳은 것을 갑으로 돌려 옳게 여겼으며 을의 의견이 그르면 그른 것을 을에게 책임지워 그르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피차를 분변(分辯)하고 시비를 판단하여 사리를 논하고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 글에 드러나 훈계로 전하여 오는데, 더구나 이렇게 대단한 거조를 하면서 하나의 문장(文章) 안에서 어찌 상하를 살피지 않고서 도리어 모순되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합하께서 의심해서는 안 될 서자에 관한 글에 생각이 미치어 일방적으로 고집하면서 마음을 돌리지 않은 채 도리어 모순된다고 하고 있으니, 저는 실로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이야말로 높은 것을 말하면서 물을 가리키고 낮은 것을 말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경(易經)》에 ‘하늘과 물은 서로 어긋나게 행한다.’ 했는데, 이는 이치가 그런 것입니다. 서자를 통용한다는 데 대한 변별은 잘되었으니, 귀천이 분명한 것에 의거 그 지위를 변별하여 귀한 이를 귀히 여겨 정적(正嫡)인 차장(次長)도 귀히 여기며 천한 이를 천히 여겨 비천한 서자(庶子)를 천히 여겨서 변별이 사의(事宜)에 맞음으로써 존비를 정한다면, 명분도 바르고 사리도 순하며 일도 마땅하게 되고 예(禮)도 제대로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무슨 모순될 것이 있겠으며 무슨 변론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합하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상세히 살피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질책하시기를 ‘반드시 차장(次長)이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明文)을 제시한 연후에야 허목의 이야기를 따를 수 있다.’고 한 것도 또한 어떠합니까. 정체(正體)의 귀한 것은 버려두고 비하(卑下)하는 천칭(賤稱)을 취택한 것이 존비(尊卑)를 변별하는 의의에 있어 과연 사의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아, 소현이 몰(歿)한 뒤 인조 대왕께서 특별히 효묘를 세워 저위(儲位)로 올렸는데 인조 대왕의 명이 헤아려 조처한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외신(外臣)은 인조 대왕의 마음이 그렇게 된 이유를 몰랐었으므로 소현에게 적통(嫡統)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부당한 점이 있었으니, 이때 의당 단궁(檀弓)의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예(禮)에 의거 쟁론했다면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언 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강씨(姜氏)의 죄적(罪跡)이 중외(中外)에 드러나는 데 이르러서는 소현이 인조에 대해 적통이 영영 끊어졌습니다. 따라서 헌의에서 제일자(第一子)가 성인(成人)이 되어 죽었다고 한 것은 논할 겨를도 없는 것입니다. 대저 적통에 대한 의리는 지극히 엄하고도 지극히 중한 것이니, 이는 조종을 높이고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혹 끊길 경우에는 적자를 세워 종통을 잇는 것은 고금이 모두 그렇게 해 왔으며 경대부(卿大夫)의 집에도 폐기한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더구나 국군(國君)이 어떻게 적통을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대부의 집은 본디 경상(經常)의 방도가 있습니다만 제왕가(帝王家)는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周)나라의 계력(季歷)과 무왕(武王), 한(漢)나라의 문제(文帝)는 모두 제일자(第一子)의 지위가 아니었으며, 당(唐)·송(宋)·명(明)의 여러 임금들도 제이(第二) 이하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많았는데 정실(正室)인 이도 있었고 서자(庶子)인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나라는 8백 년을, 한나라는 4백 년을, 당·송·명은 또한 3백 년을 이어왔습니다만 그 사이에 적통이 없었다는 기롱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효종 대왕께서는 정·체(正體)로 전중(傳重)하여 더없이 정정(正正)하고 장장(章章)한데 그 누가 간언(間言)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합하께서는 오직 장자(長子)가 성인이 되어 죽었다는 데에만 의혹을 품었을 뿐 강씨(姜氏)의 대의(大義)가 이미 끊겼다는 것은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헌의에서 도리어 적통이 엄하지 않다고 했고 또 두 번 참최를 입는 의리가 없는데야 어찌할 것이냐고 했으니, 의리를 헤아려 보자면 어찌 서로 틀리는 말이 아닙니까. 또 한 말이 있습니다. 참최를 두 번 입지 않는다는 글은 《의례》의 주소(註疏)에서 나온 것인데 신하가 임금과 후비에 대해서와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인 것으로, 이른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있을 수 없고 나라에는 임금이 둘이 있을 수 없고 가정에는 어른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인(聖人)이 인정에 따라 예법을 정한 것인데 5등(等)의 상복(喪服)에 대한 복제(服制)는 각기 그 지위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년상을 참최로도 하고 자최로도 하고 기년(期年)으로 해서 변복(變服)하기도 하고 복(服)이 없이 심상(心喪)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당한 처지에 따라 옛일을 고증하고 지금의 예법을 참고하여 사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정(正)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하와 고금을 통틀어 삼년의 참최와 자최의 복을 폐기하지 않고 통행하여 온 것은 《예경(禮經)》의 글에 기재되기도 하고 기재되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제가 감히 사설(辭說)을 설정하여 다시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는 데 비의(比擬)하여 논하여 보려 합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죽었으면 아들 된 사람은 삼년상의 복(服)을 입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재삼(再三) 장가들고 또 그 어머니들이 모두 죽었다면 아들된 사람은 그 복을 반드시 입는 것입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형제가 서로 대를 잇는 경우가 역대(歷代)에 또한 많이 있었는데 형위(兄位)에 있는 임금이 승하(昇遐)했으면 그 신하된 사람은 반드시 그 복을 입는 것이요, 아들된 사람과 신하된 사람이 한 몸에 자참복(齊斬服)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여겨서 폐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부모(父母)가 차장(次長)에 대해서 또 죽은 자가 있을 경우 자참(齊斬)의 삼년복을 입는 것은 조종(祖宗)을 높이고 공경하기 때문이니, 감히 자신이 높다는 것으로 강쇄(降殺)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의의가 아들이 계모(繼母)에 대해서와 신하가 제위(弟位)의 임금에 대해서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상도(常道)는 이미 그 지위(地位)에 있다면 반드시 그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은 본래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옛날에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 글은 반드시 곧바로 어머니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는 것을 가리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헌의(獻議)에서 ‘차장(次長)을 모두 장자(長子)라고 명명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아버지가 된 사람은 한 몸에 참최복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한 말은 또한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본래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은 천리(天理)의 자연(自然)인 것이고 세워서 대신하게 하는 것은 인도(人道)의 당연한 것입니다. 그 시종(始終)을 궁구해보아 천리와 인도가 합쳐져 어긋나지 않은 것이 똑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이치 밖에 도(道)가 없고 도 밖에 이치가 없다.’고 한 것이니, 다시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합하의 의견은 필연코 장자(長子)의 지위가 어떻게 둘이 있겠느냐고 여겨 탈적(奪嫡)의 혐의에 빠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근사(近似)한 서자(庶子)를 점출(拈出)하여 비의(比擬)해서 논한 것이나, 또한 대의(大義)를 가리운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대저 인조의 적통(嫡統)을 존몰(存歿)에 관계없이 기필코 대의(大義)가 이미 끊긴 성인(成人)이 되어 죽은 사람에게로 귀결시키려 한 것은 그 뜻을 말한다면 취할 만하지만 그 이치를 궁구하여 본다면 또한 모순되고 구애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데 그 말을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옳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말(本末)이 일관(一貫)된 말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아, 주공(周公)이 《의례》의 경문(經文)에 입언(立言)하기를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자하(子夏)가 ‘정·체(正體)로서 전중(傳重)한 것이다’고 전(傳)을 내고, 정현(鄭玄)은 ‘적자(嫡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용시키기 위한 것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長者)로 세운다는 말이다’고 했으니, 이것이 차장(次長)을 세워 장자(長子)로 삼는다는 점을 밝힌 말입니다. 또 경문(經文)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고 했는데 이는 곧바로 서자가 첩자의 호칭이 되는 것이며, 공자도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이 전적(典籍)에 환히 기재되어 천만고(千萬古) 동안 우주(宇宙)의 치란(治亂)이 있을 즈음에도 없어지지 않고 오늘날에까지 이르렀으니,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효묘(孝廟)의 상(喪)에 삼년 자최(齊衰)를 입는 것은 경전(經傳)을 참고해 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鬼神)에게 질정해 보아도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주머니의 입구를 꼭 묶어두듯이 말을 조심해야 허물이 없게 된다.’고 했으니, 삼가 조심해서 지키는 것이 의당한 일이겠습니다만, 의리에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운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경훈(經訓)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두루 생각하고 관대히 살펴주시어 혹 취할 점이 있으면 다시 《예경(禮經)》을 상고하여 사실에 따라 주의(奏議)하신다면 위로는 문란된 명위(名位)가 바로잡아지게 될 수 있고 아래로는 중인(衆人)의 의혹을 얼음이 녹듯이 풀리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취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허물이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을 기뻐하는 대선(大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자(父子)·군신(君臣)의 명위(名位)와 존비(尊卑)가 각기 올바르게 되어 예(禮)로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상하의 큰 경사인 것으로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수홍(壽弘)은 젊어서부터 강직한 것으로 이름이 나서 제류(儕流)들에게 크게 추허(推許)를 받았다. 항상 두 송(宋)의 의례(議禮)가 사리에 어긋난 것을 마음속으로 통한스럽게 여겨오다가 이에 거상(居喪)하는 동안에 예가(禮家)를 고열(考閱)하여 하나의 글을 지어 시열(時烈)에게 투시(投示)한 것이다. 그의 변별(辯別)이 상세하고 말이 정직했기 때문에 시열이 감히 답을 하지 못하고 단지 한하는 마음만 품었으며, 그의 당여(黨與)들이 일제히 일어나 공격하였으므로 결국은 사판서 삭제시키는 율(律)을 시행한 것이다. 아, 수홍이 동료들의 말에 동요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서 발기(拔起)하여 스스로 험난함을 취택하면서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자품이 고아하고 수립(樹立)이 확고하지 않으면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저 다른 사람들이야 진실로 말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그의 종당(宗黨)의 대관(大官)들은 괴이하고 망령되다고 지목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친척의 의리를 파기하고 왕래를 끊었다. 그리하여 경신년의 대침(大侵)이 있을 적에 하마터면 굶어죽는 것을 면하지 못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른바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않을 만큼 강하고도 굳세다는 사람은 수홍을 두고 한 말이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49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註 007] 송이상(宋二相) :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킴.[註 008] 추생(鯫生) : 자기의 겸칭.[註 009] 초토(草土) : 상중(喪中)을 뜻함.[註 010] 기해년 : 1659 현종 즉위년.[註 011] 단궁(檀弓)의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 : 단궁의 문은, 옛날 공의 중자(公儀仲子)가 적자(嫡子)의 상(喪)을 당했을 때 적손을 버리고 서자를 후사(後嗣)로 삼자 단궁이 이를 기롱하는 뜻에서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상관(喪冠)인 문(免)을 쓰고 가서 조문했던 것을 말함. 자유(子游)의 최(衰)는, 옛날 사구(司寇) 혜자(惠子)의 초상에 자유가 친구 사이에 조문하는 예(禮)에 벗어나는 최마복(衰麻服)을 하고 조문한 것을 말하는데 이는 혜자가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후사로 삼은 것을 기롱하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임.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註 012] 이부(尼父) : 공자.
첫째는 ‘지금 허목(許穆)의 소장에서 인증(引證)한 것이 많기는 하나 긴요한 부분은 단지 두 개의 단락입니다. 그 하나는, 장자(長子)가 죽으면 제이장자(第二長者)를 세우고 참최복(斬衰服)을 입는다는 것이고, 그 또 하나는 서자(庶子)가 후사(後嗣)가 되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데 이는 첩자(妾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종통(宗統)은 둘이 될 수 없고 참최복은 두 번 입지 않는다는 뜻에 있어 어떠합니까.’ 하였으며, 또 ‘주공(周公)이 경(經)을 세우고 자하(子夏)가 전(傳)을 짓고 정현(鄭玄)이 주(註)를 냈는데 모두 차자(次子)가 장자(長子)가 된다는 말이 없습니다만,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이르러 비로소 이 말이 있었습니다. 가공언은 명유(名儒)이고 또 황면재(黃勉齋)가 《통해(通解)》의 속편(續篇)에 거두어 입록(入錄)했으니 어떻게 감히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주자(朱子)·정자(程子)의 감파(勘破)를 거치지 않았으니 그 말이 과연 허목이 말한 것과 같은지 모르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이른바 서자(庶子)란 진실로 첩자(妾子)를 말하는 것이나 차적(次嫡) 이하는 임금의 동모제(同母弟)라도 또한 서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疏)에 「서자는 첩자의 호칭인데 적자로서 둘째인 자도 함께 서자라고 명명한다.」 했으니, 그렇다면 효종 대왕(孝宗大王)을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서자라고 해도 해가 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서(庶)는 천칭(賤稱)이 아니라 중자(衆子)의 뜻인 것입니다. 《예경(禮經)》을 상고하여 보면 이런 유(類)가 매우 많습니다.’ 하였으며, 또 ‘그리고 소(疏)의 이야기에서 이미 「차남(次男)을 세웠을 경우 또한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고는, 그 밑에 또 「서자가 승증(承重)했으면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이설(二說)이 서로 모순이 됩니다. 때문에 허목(許穆)이 기필코 서자를 첩자라고 하면서 차장(次長)은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반드시 차자가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明文)을 얻은 연후에야 허목의 말을 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또 한 가지 말이 있습니다. 가공언의 소(疏)에서는 단지 제일자(第一子)가 죽은 데 대해서만 말을 했고, 제일자가 후사(後嗣)가 없이 죽은 데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아마도 성인(成人)이 되기 전에 죽은 경우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긴요한 곳인데 지금 허목의 이야기는 입문(立文)의 본의(本意)를 상세히 고증하지 않고서 갑자기 입설(立說)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단궁(檀弓)의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011) 가 과연 모두 돌아보기에 부족한 것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인정과 사세로 미루어 보더라도 장자가 성인이 되어서 죽었는데 차장(次長)을 모두 장자라고 명명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적통(嫡統)이 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비된 자가 한 몸에 참최복을 입게 되는 횟수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습니다. 【또 경전(經傳)의 글을 초기(抄記)한 것이 아래와 같다.】 《의례(儀禮)》 참최장(斬衰章)의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한 경문(經文)에 대해 정현(鄭玄)이 주(註)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上下)로 통용하게 해서 한 말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長者)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고, 가공언의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정현이 말한 것은 장자(長子)만 상하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총자(冢子)도 또한 상하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註)에 이르기를 「총자는 장자(長子)라고 말한 것과 같아서 상하로 통용될 수 있다.」고 하였고, 또한 적자를 장자(長者)로 세운다고 한 것은 적처(嫡妻)의 소생은 모두 적자라고 명명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니,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장자(第二長者)를 세우고 또한 장자(長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할 경우는 제일자(第一者)에게만 해당되나, 장자라고 말하게 되면 적자를 장자(長者)로 세우는 점도 통해지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버지에게 정·체(正體)가 되고 또 이에 장차 전중(傳重)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서자는 장자(長子)처럼 삼년복이 되지 못하니 할아버지를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했는데, 정주(鄭註)에 ‘서자는 아버지의 후사(後嗣)가 된 사람의 아우이다. 서(庶)라고 말한 것은 원별(遠別)하기 위한 것이다.’ 했고, 가공언의 소에서는 ‘이는 적자와 적자가 서로 계승해 가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할아버지를 계승해야 이에 장자(長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고 적처 소생인 제이자(第二者)는 이것이 중자(衆子)인데 이제 똑같이 서자라고 명명하는 것은 장자(長子)와 원별(遠別)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첩자와 호칭이 같은 것이다.’ 했고, 또 ‘승중(承重)했어도 삼년복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 있으니, 첫째는 정·체(正體)이되 전중(傳重)할 수 없는 경우인데 이는 적자가 폐질(廢疾)이 있어 종묘(宗廟)의 주관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하고, 둘째는 전중은 했지만 정·체(正體)가 아닌 경우로 서손(庶孫)을 후사로 세운 것이 이것이다. 셋째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인 경우로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운 것이 이것이고, 넷째는 정이불체(正而不體)로 적손(嫡孫)을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습니다.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제후(諸侯) 별자(別子)의 대소종도(大小宗圖)의 주(註)에 유해손(劉垓孫) 선생이, 제사(祭祀)에는 반드시 종자(宗子)를 써야만이 법방(法方)이 문란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였고, 또 ‘종자는 적자라야만이 세울 수 있다. 따라서 서장(庶長)은 세울 수 없다. 그러나 적자가 없는 경우에는 또한 서자를 세울 수 있는데 이른바 세자(世子)의 동모제(同母弟)를 말하는 것으로 세자는 바로 적자인 것이다. 세자가 죽었을 경우에는 세자의 친제(親弟)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適)인 것으로 서자는 세울 수 없는 것이다.’ 했습니다. 《의례》 자최 삼년장(齊衰三年章)의 경문(經文)에 ‘어머니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그 소(疏)에 해석하기를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자최복(齊衰服)을 입기 때문에 또한 자최복을 입는다.’ 했습니다. 전(傳)에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버지가 낮추지 않은 것을 어머니 또한 감히 낮출 수 없기 때문이다.’ 했고, 정주(鄭註)에 ‘감히 낮출 수 없다는 것은 감히 자기가 높다는 것으로 조녜(祖禰)의 정체(正體)에 대해 낮출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례(周禮)》 춘관(春官)의 경문(經文)에 ‘소종백(小宗伯)의 직책은 삼족(三族)의 분별을 관장하여 친소(親疏)를 분변하는 것인데 정실(正室)을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 했는데, 그 주(註)에 ‘정실은 적자(嫡子)이고, 문자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문(家門)을 담당하는 아들이란 뜻이다.’ 했습니다.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증자가 묻기를 「종자(宗子)는 사(士)가 되고 서자(庶子)는 대부(大夫)가 되었으면 그 제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상생(上牲)으로 종자의 집에서 제사지내야 하며 축에는 효자(孝子) 아무가 개자(介子) 아무를 위하여 상사(常事)를 올린다고 써야 한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효자는 종자를 말하고 개자는 서자를 말한다. 서(庶)라고 하지 않고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는 비천(卑賤)한 칭호이고 개는 부이(副貳)의 뜻이니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이다.’ 하였습니다. 《의례》 참최장(斬衰章)의 경문(經文)에 ‘남의 후사(後嗣)가 된 자’라고 했고, 전(傳)에는 ‘어떻게 해야 남의 후사가 될 수 있는가. 동종(同宗)인 경우에는 지자(支子)가 가합하다.’ 했으며,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다른 집의 적자(嫡子)는 다른 집의 후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지자(支子)를 취하는 것인데 지자는 제이(第二) 이하의 서자인 것이다. 서자라고 말하지 않고 지자라고 말한 것은 서자라고 말하면 첩자를 지칭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서(庶)를 바꾸어 지(支)라고 말한 것이다.’ 했습니다. 《예기》 내칙(內則)에 ‘적자와 서자는 외침(外寢)에서 만나는데 임금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 방긋 웃게한 다음 이름을 지어준다.’ 했는데, 그 주(註)에 ‘여기의 적자는 세자(世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하였고, 방씨(方氏)는 ‘세자는 노침(路寢)에서 만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의례》 자최 부장기장(齊衰不杖期章)의 경문(經文)에 ‘대부(大夫)의 서자(庶子)가 적자(適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는데,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이는 대부의 첩자(妾子)이기 때문에 서(庶)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적처 소생의 둘째 이하라면 당연히 곧바로 곤제라고 할 것이요 서(庶)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했습니다. 《의례》 시마삼월장(緦麻三月章)의 경문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어 자기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소에서 해석하기를 ‘이는 총자(冢子)·적자(嫡子)가 없고 첩자(妾子)만 있는 경우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서자가 후사를 승계(承繼)하여 자기 어머니를 위해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뜻이다.’ 했습니다. 주문공(朱文公) 《가례(家禮)》 팔모도(八母圖)에 ‘서모(庶母)’라고 한 데 대한 주에 ‘서모는 아버지의 첩이다.’ 했습니다. 《서전(書傳)》 미자편(微子篇)의 편제(篇題)에 ‘미자(微子)의 이름은 계(啓)인데 제을(帝乙)의 장자(長子)이고 주(紂)의 서모형(庶母兄)이다.’ 했습니다. 《논어(論語)》 미자편(微子篇)에 ‘미자는 떠나갔다.’ 한 주(註)에 ‘미자는 주(紂)의 서형(庶兄)이다.’ 하였고, 소주(小註)에 이르기를 ‘《사기(史記)》 송세가(宋世家)에 의하면 미자는 은(殷)나라 제을(帝乙)의 아들이고 주(紂)의 서형(庶兄)이다.’고 했습니다. 《춘추(春秋)》의 경문(經文)에 ‘태묘(太廟)에 큰일이 있었는데 희공(僖公)을 제승(躋升)하기 위한 것이다.’ 한 주에 ‘희공은 민공(閔公)의 서형(庶兄)이다.’고 했습니다.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왕자가 시조(始祖)의 소자출(所自出)에게 체제(禘祭)를 지낼 적에 시조를 배향(配享)하여 사묘(四廟)를 세우는데 서자(庶子)인 왕도 또한 이렇게 한다.’ 했는데, 그 주(註)에 ‘세자(世子)에게 폐질(廢疾)이 있어 후사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서자를 세워 왕으로 삼은 경우인데 그때의 예제(禮制)도 세자가 하는 것과 같다.’ 했으며, 산음 육씨(山陰陸氏)는 말하기를 ‘한(漢)나라의 효문제(孝文帝)가 효혜제(孝惠帝)를 계승한 것이 적자(嫡子)로서 이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사(祭祀)를 받들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경문(經文)에서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서자(庶子)로서는 제사를 주관할 수 없고, 서자왕(庶子王)이 된 연후에는 제사를 주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끝에는 고금을 참작해서 논한 것으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아, 효종 대왕은 인조 대왕에 대하여 정실(正室) 제이적자(第二嫡子)의 자리이고 또 소현 세자(昭顯世子)에 대하여는 동모제(同母弟)요, 차적(次嫡)의 자리인 것입니다. 《의례(儀禮)》의 경문에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한 데 대해 자하(子夏)가 전(傳)을 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정·체(正體)로서 전중(傳重)했기 때문이다.’ 했고, 정현(鄭玄)은 주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가 통하기 때문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長者)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으며, 가공언의 소(疏)에는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자(第二者)를 취하여 세우고 또한 장자(長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하게 되면 제일자(第一者)에게만 의거하나, 장자(長子)라고 말할 경우에는 적자를 장자(長者)로 세우는 것도 통해지기 때문이다.’고 했으며, 《가례(家禮)》의 주(註)에는 ‘세자(世子)가 죽었을 경우에는 세자의 친제(親弟)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嫡)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공(周公)이 경(經)을 지은 조목의 순서를 관찰하여 보면 반드시 ‘아버지가 적장자(嫡長子)를 위하여’라고 했어야 하는데 ‘적장자’라고 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하여’라고 했으니, 이는 성인(聖人)이 사람들의 적장자가 사고가 있거나 혹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반드시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아야 하는 도리가 있음을 고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하로 통용하는 뜻을 취하여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하여’라고 한 것이니, 성인의 글은 간략하면서도 극진하여 참으로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저 약언(若言)과 약운(若云)이란 말은 적장(嫡長)·차장(次長)을 아울러 거론하여 나누어 해석한 것입니다. 또 전문(傳文)에서 정·체(正體)의 뜻을 논했는데, 정(正)은 정실(正室)의 적자(適子)를 말하는 것이고 체(體)는 부자(父子)가 서로 계승(繼承)하는 것입니다. 효종 대왕은 정실의 제이(第二)이자 소현 세자의 친제(親弟)로서 부왕(父王)의 명명(明命)을 받들어 종묘(宗廟)의 제사를 주관했으니, 바로 자하(子夏)의 전(傳), 정현(鄭玄)의 주 및 공언(公彦)의 해석, 《가례》의 주 등의 말과 비의(比擬)하여 논하여 본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합치됩니다. 헌의(獻議)에서는 ‘주공(周公)이 경을 세우고 자하가 전을 짓고 정현이 주를 냈는데 모두 차자(次子)를 장자(長子)라고 한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정현이 말하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하기 때문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다.’ 했으니, 실로 헌의(獻議)에서 논한 것과는 상당히 틀린 점이 있습니다. 주공의 경(經)과 자하의 전(傳)은 본의를 총괄한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따져서 생각하지 않으면 혹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참최장(斬衰章)에 삼년이란 글자가 없는데, 이를 고집하여 삼년의 복제를 폐기하겠습니까. 주자(朱子)·정자(程子) 양현(兩賢)이 다른 논의에 주를 내면서 정현과 가공언의 말을 인용한 것이 많았는데 그르다고 한 것이 있지 않았으니, 이는 면재(勉齋) 황간(黃幹), 유씨 해손(劉氏垓孫)이 주자의 문하에서 직접 수업하여 모두 저술한 것이 있으며, 대저 예컨대 《대학(大學)》의 경일장(經一章)에 대해 주를 내는 가운데 ‘증자(曾子)의 뜻인데 문인(門人)이 기록했다.’는 유(類)와 같은 것입니다. 헌의(獻議)에서 ‘주자·정자의 감파(勘破)를 거치지 않았다.’는 말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허목의 소장에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에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이유는 첩자이기 때문이다.’고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은 소장을 만들 적에 예서(禮書)의 언어(言語)를 절취(截取)하여 소장의 내용을 구성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비록 경전(經傳)의 전문(全文)은 아니지만 그 내용 가운데의 서자와 첩자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귀천을 분변하기 위해 말한 것이니, 기어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합하의 헌의에서는 허목의 소장 가운데서 제일조(第一條)인 ‘장자(長子)가 죽으면 제이장자(第二長者)를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고 한 한 조항은 버려두고 단지 제이조(第二條)의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으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한 것만을 취하여 논하였으니, 적자와 서자에 대한 것을 취사(取捨)하는 방도가 과연 정당하게 되었습니까. 아, 헌의(獻議)에 ‘이른바 서자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첩자(妾子)이지만, 차적(次嫡) 이하는 임금의 동모제(同母弟)라도 또한 서자라고 하기 때문에 소(疏)에 「서자는 첩자의 호칭인데 적자로서 둘째인 자도 같이 서자라고 명명한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가 되는 것이 해가 될 것이 없다.’고 갑자기 논설을 세웠습니다. 이는 바로 통융(通融)시켜 합쳐 말한 것으로 서자를 혼칭하여 마치 똑같은 것처럼 여긴 것이니, 서(庶)라고 말하여 원별(遠別)한 뜻을 전부 빼어버렸으니,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도 적(嫡)·서(庶)의 분별에 대해 명백히 변론하였고 뒷날의 유현(儒賢)들도 모두 이 뜻을 숭상했습니다. 다만, 차적(次嫡) 이하는 장자(長子)와 원별(遠別)한 까닭에 깊이 억제하여 첩자와 호칭이 같게 한 것이니, 이는 강쇄(降殺)시키는 도리로 대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경전(經傳)에서 서자(庶子)란 말을 통용해서 쓴 것인데 비천(卑賤)하다고 주석을 낸 것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서자가 비천하다는 것은 어찌 많은 말을 허비하고서야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반드시 명분을 바루어야 된다고 이부(尼父)012) 가 경계하였으니, 강쇄하기 위한 호칭을 감히 정적(正嫡)인 군부(君父)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의혹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자심합니다. 귀천(貴賤)을 가리켜 거론하여 명백히 변별(辯別)해 보자면, 정실(正室)이면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는 것이 《주례(周禮)》에 기재되어 있는데, 증자(曾子)가 공자(孔子)에게 종자(宗子)와 서자(庶子)의 제사에 대해 문의하니, 공자가 축에 효자(孝子)라고 쓰라고 답한 것은 전중(傳重)했기 때문이고,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가 비천한 것을 혐의해서이며, 개(介)라고 한 것은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라고 말했습니다. 자하(子夏)는 지자(支子)라야 된다는 것으로 《의례》 경문(經文)의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이라고 한 데 전(傳)을 내었으며, 가공언의 소(疏)에는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기 때문에 서를 고쳐 지(支)라고 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내칙(內則)에 세자(世子)·적자(嫡子)·서자(庶子)가 태어나면 아버지에게 보이며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주에 ‘세자는 국군(國君)의 원자(元子)이고 적자는 세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했는데, 한(漢)나라의 군유(群儒)들이 이를 《예기(禮記)》에 편차하기에 이르러 곡례(曲禮)의 ‘지자는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한 부분에 대해 ‘지자는 서자인데 서자는 비천하기 때문에 감히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주(註)를 내어 44편(篇)의 수편(首篇)에다 올려놓았습니다.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변별한 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다섯 조항이 어찌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차장(次長)은 서자(庶子)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明文)이 아니겠습니까. 《의례》의 경문(經文)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해서’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 했는데, 주공(周公)은 모두 이를 첩자의 호칭으로 곧바로 썼습니다. 내칙(內則)에 ‘서자를 아버지에게 보이면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것은 이미 상문(上文)에 보였습니다. 서모(庶母)는 《가례(家禮)》에서 아버지의 첩(妾)이라고 했고 아들을 낳으면 서얼(庶孽)이라고 한다고 했으며, 주(紂)의 서형(庶兄)인 미자(微子)에 대해서는 《논어(論語)》의 주(註)에 드러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주회암(朱晦菴)의 기록에서 나온 것입니다. 미자편(微子篇)의 서모형(庶母兄)과 노희공(魯僖公)의 서형(庶兄)이라고 한 것도 또한 선유(先儒)의 의논에서 나온 것인데, 이른바 서형이란 것은 측실(側室)의 천얼(賤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곱 조항이 어찌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서자가 첩자가 된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明文)이 아니겠습니까. 헌의에 ‘서(庶)는 천칭(賤稱)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서가 천칭이 됨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서자(庶子)라는 뜻은 하류(下流)가 많은 것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예경(禮經)》에 통용하였는데 주설(註說)에는 비천하다고 일컬은 것이 많았습니다. 여자가 남의 서모(庶母)가 되면 그 아버지가 반드시 천축(賤畜)이라고 했으며, 또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라는 경일장(經一章)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이 같지 않다고 한 의논이 많았으며, 제후와 서인에게 통달된다는 《중용(中庸)》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貴賤)·융쇄(隆殺)에 대한 의논이 있습니다. 이 두 절목(節目)은 모두 지극히 높고 지극히 낮은 것인데 공성(孔聖)이 말한 것이고, 증자문(曾子問)의 서자에 대한 주에도 이와 같습니다. 서자와 장자에 대한 전(傳)의 서자는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예경(禮經)》에 이런 유(類)가 매우 많다고 한 것이 이것인데 주(註)에는 천하게 여긴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소현(昭顯)이 세자(世子)의 지위에 있고 효묘(孝廟)가 봉저(鳳邸)로 있을 적에 혹 비의(比擬)해서 말할 경우가 있을 때 장자와 원별한다는 뜻에 의거 효묘를 서자라고 일컫는 것은 불가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다만, 지금은 정·체(正體)로 전중(傳重)하여 지위가 지존에 이르렀으며 인조(仁祖)의 적통이 이미 소현에게는 끊겼으니, 또한 원별할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자라는 천칭을 바로 효모(孝廟)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서자라는 호칭이 《예경(禮經)》에서 통용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귀천의 구별이 일성(日星)처럼 환히 밝은데,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차장(次長)을 세우고 또한 삼년복을 입는다는 것과 서자가 승중(承重)하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말한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모순이 된다고 한 말은 어디에 전거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승중했어도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가 사종(四鍾)이 있는데 그 세 번째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이니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는데, 합하(閤下)께서 서자라는 글을 가지고 효묘께 의심을 두고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효묘의 명위(名位)에 대해 원별(遠別)의 대상인 서자로 견주어 논하는 것도 오히려 불가한 것인데 더구나 부정(不正)이라는 글이 있는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옛날의 선유(先儒)들은 모든 소소한 절문(節文)에 관계되는 것도 반드시 그 경중을 헤아려서 갑을(甲乙)이 서로 논란했는데 갑의 의견이 옳으면 옳은 것을 갑으로 돌려 옳게 여겼으며 을의 의견이 그르면 그른 것을 을에게 책임지워 그르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피차를 분변(分辯)하고 시비를 판단하여 사리를 논하고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 글에 드러나 훈계로 전하여 오는데, 더구나 이렇게 대단한 거조를 하면서 하나의 문장(文章) 안에서 어찌 상하를 살피지 않고서 도리어 모순되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합하께서 의심해서는 안 될 서자에 관한 글에 생각이 미치어 일방적으로 고집하면서 마음을 돌리지 않은 채 도리어 모순된다고 하고 있으니, 저는 실로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이야말로 높은 것을 말하면서 물을 가리키고 낮은 것을 말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경(易經)》에 ‘하늘과 물은 서로 어긋나게 행한다.’ 했는데, 이는 이치가 그런 것입니다. 서자를 통용한다는 데 대한 변별은 잘되었으니, 귀천이 분명한 것에 의거 그 지위를 변별하여 귀한 이를 귀히 여겨 정적(正嫡)인 차장(次長)도 귀히 여기며 천한 이를 천히 여겨 비천한 서자(庶子)를 천히 여겨서 변별이 사의(事宜)에 맞음으로써 존비를 정한다면, 명분도 바르고 사리도 순하며 일도 마땅하게 되고 예(禮)도 제대로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무슨 모순될 것이 있겠으며 무슨 변론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합하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상세히 살피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질책하시기를 ‘반드시 차장(次長)이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明文)을 제시한 연후에야 허목의 이야기를 따를 수 있다.’고 한 것도 또한 어떠합니까. 정체(正體)의 귀한 것은 버려두고 비하(卑下)하는 천칭(賤稱)을 취택한 것이 존비(尊卑)를 변별하는 의의에 있어 과연 사의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아, 소현이 몰(歿)한 뒤 인조 대왕께서 특별히 효묘를 세워 저위(儲位)로 올렸는데 인조 대왕의 명이 헤아려 조처한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외신(外臣)은 인조 대왕의 마음이 그렇게 된 이유를 몰랐었으므로 소현에게 적통(嫡統)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부당한 점이 있었으니, 이때 의당 단궁(檀弓)의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예(禮)에 의거 쟁론했다면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언 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강씨(姜氏)의 죄적(罪跡)이 중외(中外)에 드러나는 데 이르러서는 소현이 인조에 대해 적통이 영영 끊어졌습니다. 따라서 헌의에서 제일자(第一子)가 성인(成人)이 되어 죽었다고 한 것은 논할 겨를도 없는 것입니다. 대저 적통에 대한 의리는 지극히 엄하고도 지극히 중한 것이니, 이는 조종을 높이고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혹 끊길 경우에는 적자를 세워 종통을 잇는 것은 고금이 모두 그렇게 해 왔으며 경대부(卿大夫)의 집에도 폐기한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더구나 국군(國君)이 어떻게 적통을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대부의 집은 본디 경상(經常)의 방도가 있습니다만 제왕가(帝王家)는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周)나라의 계력(季歷)과 무왕(武王), 한(漢)나라의 문제(文帝)는 모두 제일자(第一子)의 지위가 아니었으며, 당(唐)·송(宋)·명(明)의 여러 임금들도 제이(第二) 이하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많았는데 정실(正室)인 이도 있었고 서자(庶子)인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나라는 8백 년을, 한나라는 4백 년을, 당·송·명은 또한 3백 년을 이어왔습니다만 그 사이에 적통이 없었다는 기롱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효종 대왕께서는 정·체(正體)로 전중(傳重)하여 더없이 정정(正正)하고 장장(章章)한데 그 누가 간언(間言)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합하께서는 오직 장자(長子)가 성인이 되어 죽었다는 데에만 의혹을 품었을 뿐 강씨(姜氏)의 대의(大義)가 이미 끊겼다는 것은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헌의에서 도리어 적통이 엄하지 않다고 했고 또 두 번 참최를 입는 의리가 없는데야 어찌할 것이냐고 했으니, 의리를 헤아려 보자면 어찌 서로 틀리는 말이 아닙니까. 또 한 말이 있습니다. 참최를 두 번 입지 않는다는 글은 《의례》의 주소(註疏)에서 나온 것인데 신하가 임금과 후비에 대해서와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인 것으로, 이른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있을 수 없고 나라에는 임금이 둘이 있을 수 없고 가정에는 어른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인(聖人)이 인정에 따라 예법을 정한 것인데 5등(等)의 상복(喪服)에 대한 복제(服制)는 각기 그 지위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년상을 참최로도 하고 자최로도 하고 기년(期年)으로 해서 변복(變服)하기도 하고 복(服)이 없이 심상(心喪)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당한 처지에 따라 옛일을 고증하고 지금의 예법을 참고하여 사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정(正)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하와 고금을 통틀어 삼년의 참최와 자최의 복을 폐기하지 않고 통행하여 온 것은 《예경(禮經)》의 글에 기재되기도 하고 기재되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제가 감히 사설(辭說)을 설정하여 다시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는 데 비의(比擬)하여 논하여 보려 합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죽었으면 아들 된 사람은 삼년상의 복(服)을 입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재삼(再三) 장가들고 또 그 어머니들이 모두 죽었다면 아들된 사람은 그 복을 반드시 입는 것입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형제가 서로 대를 잇는 경우가 역대(歷代)에 또한 많이 있었는데 형위(兄位)에 있는 임금이 승하(昇遐)했으면 그 신하된 사람은 반드시 그 복을 입는 것이요, 아들된 사람과 신하된 사람이 한 몸에 자참복(齊斬服)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여겨서 폐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부모(父母)가 차장(次長)에 대해서 또 죽은 자가 있을 경우 자참(齊斬)의 삼년복을 입는 것은 조종(祖宗)을 높이고 공경하기 때문이니, 감히 자신이 높다는 것으로 강쇄(降殺)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의의가 아들이 계모(繼母)에 대해서와 신하가 제위(弟位)의 임금에 대해서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상도(常道)는 이미 그 지위(地位)에 있다면 반드시 그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은 본래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옛날에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 글은 반드시 곧바로 어머니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는 것을 가리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헌의(獻議)에서 ‘차장(次長)을 모두 장자(長子)라고 명명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아버지가 된 사람은 한 몸에 참최복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한 말은 또한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본래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은 천리(天理)의 자연(自然)인 것이고 세워서 대신하게 하는 것은 인도(人道)의 당연한 것입니다. 그 시종(始終)을 궁구해보아 천리와 인도가 합쳐져 어긋나지 않은 것이 똑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이치 밖에 도(道)가 없고 도 밖에 이치가 없다.’고 한 것이니, 다시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합하의 의견은 필연코 장자(長子)의 지위가 어떻게 둘이 있겠느냐고 여겨 탈적(奪嫡)의 혐의에 빠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근사(近似)한 서자(庶子)를 점출(拈出)하여 비의(比擬)해서 논한 것이나, 또한 대의(大義)를 가리운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대저 인조의 적통(嫡統)을 존몰(存歿)에 관계없이 기필코 대의(大義)가 이미 끊긴 성인(成人)이 되어 죽은 사람에게로 귀결시키려 한 것은 그 뜻을 말한다면 취할 만하지만 그 이치를 궁구하여 본다면 또한 모순되고 구애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데 그 말을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옳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말(本末)이 일관(一貫)된 말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아, 주공(周公)이 《의례》의 경문(經文)에 입언(立言)하기를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자하(子夏)가 ‘정·체(正體)로서 전중(傳重)한 것이다’고 전(傳)을 내고, 정현(鄭玄)은 ‘적자(嫡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용시키기 위한 것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長者)로 세운다는 말이다’고 했으니, 이것이 차장(次長)을 세워 장자(長子)로 삼는다는 점을 밝힌 말입니다. 또 경문(經文)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고 했는데 이는 곧바로 서자가 첩자의 호칭이 되는 것이며, 공자도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이 전적(典籍)에 환히 기재되어 천만고(千萬古) 동안 우주(宇宙)의 치란(治亂)이 있을 즈음에도 없어지지 않고 오늘날에까지 이르렀으니,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효묘(孝廟)의 상(喪)에 삼년 자최(齊衰)를 입는 것은 경전(經傳)을 참고해 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鬼神)에게 질정해 보아도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주머니의 입구를 꼭 묶어두듯이 말을 조심해야 허물이 없게 된다.’고 했으니, 삼가 조심해서 지키는 것이 의당한 일이겠습니다만, 의리에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운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경훈(經訓)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두루 생각하고 관대히 살펴주시어 혹 취할 점이 있으면 다시 《예경(禮經)》을 상고하여 사실에 따라 주의(奏議)하신다면 위로는 문란된 명위(名位)가 바로잡아지게 될 수 있고 아래로는 중인(衆人)의 의혹을 얼음이 녹듯이 풀리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취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허물이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을 기뻐하는 대선(大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자(父子)·군신(君臣)의 명위(名位)와 존비(尊卑)가 각기 올바르게 되어 예(禮)로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상하의 큰 경사인 것으로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수홍(壽弘)은 젊어서부터 강직한 것으로 이름이 나서 제류(儕流)들에게 크게 추허(推許)를 받았다. 항상 두 송(宋)의 의례(議禮)가 사리에 어긋난 것을 마음속으로 통한스럽게 여겨오다가 이에 거상(居喪)하는 동안에 예가(禮家)를 고열(考閱)하여 하나의 글을 지어 시열(時烈)에게 투시(投示)한 것이다. 그의 변별(辯別)이 상세하고 말이 정직했기 때문에 시열이 감히 답을 하지 못하고 단지 한하는 마음만 품었으며, 그의 당여(黨與)들이 일제히 일어나 공격하였으므로 결국은 사판서 삭제시키는 율(律)을 시행한 것이다. 아, 수홍이 동료들의 말에 동요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서 발기(拔起)하여 스스로 험난함을 취택하면서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자품이 고아하고 수립(樹立)이 확고하지 않으면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저 다른 사람들이야 진실로 말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그의 종당(宗黨)의 대관(大官)들은 괴이하고 망령되다고 지목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친척의 의리를 파기하고 왕래를 끊었다. 그리하여 경신년의 대침(大侵)이 있을 적에 하마터면 굶어죽는 것을 면하지 못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른바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않을 만큼 강하고도 굳세다는 사람은 수홍을 두고 한 말이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49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註 007] 송이상(宋二相) :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킴.[註 008] 추생(鯫生) : 자기의 겸칭.[註 009] 초토(草土) : 상중(喪中)을 뜻함.[註 010] 기해년 : 1659 현종 즉위년.[註 011] 단궁(檀弓)의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 : 단궁의 문은, 옛날 공의 중자(公儀仲子)가 적자(嫡子)의 상(喪)을 당했을 때 적손을 버리고 서자를 후사(後嗣)로 삼자 단궁이 이를 기롱하는 뜻에서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상관(喪冠)인 문(免)을 쓰고 가서 조문했던 것을 말함. 자유(子游)의 최(衰)는, 옛날 사구(司寇) 혜자(惠子)의 초상에 자유가 친구 사이에 조문하는 예(禮)에 벗어나는 최마복(衰麻服)을 하고 조문한 것을 말하는데 이는 혜자가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후사로 삼은 것을 기롱하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임.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註 012] 이부(尼父) : 공자.
《의례(儀禮)》 참최장(斬衰章)의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한 경문(經文)에 대해 정현(鄭玄)이 주(註)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上下)로 통용하게 해서 한 말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長者)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고, 가공언의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정현이 말한 것은 장자(長子)만 상하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총자(冢子)도 또한 상하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註)에 이르기를 「총자는 장자(長子)라고 말한 것과 같아서 상하로 통용될 수 있다.」고 하였고, 또한 적자를 장자(長者)로 세운다고 한 것은 적처(嫡妻)의 소생은 모두 적자라고 명명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니,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장자(第二長者)를 세우고 또한 장자(長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할 경우는 제일자(第一者)에게만 해당되나, 장자라고 말하게 되면 적자를 장자(長者)로 세우는 점도 통해지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버지에게 정·체(正體)가 되고 또 이에 장차 전중(傳重)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서자는 장자(長子)처럼 삼년복이 되지 못하니 할아버지를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했는데, 정주(鄭註)에 ‘서자는 아버지의 후사(後嗣)가 된 사람의 아우이다. 서(庶)라고 말한 것은 원별(遠別)하기 위한 것이다.’ 했고, 가공언의 소에서는 ‘이는 적자와 적자가 서로 계승해 가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할아버지를 계승해야 이에 장자(長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고 적처 소생인 제이자(第二者)는 이것이 중자(衆子)인데 이제 똑같이 서자라고 명명하는 것은 장자(長子)와 원별(遠別)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첩자와 호칭이 같은 것이다.’ 했고, 또 ‘승중(承重)했어도 삼년복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 있으니, 첫째는 정·체(正體)이되 전중(傳重)할 수 없는 경우인데 이는 적자가 폐질(廢疾)이 있어 종묘(宗廟)의 주관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하고, 둘째는 전중은 했지만 정·체(正體)가 아닌 경우로 서손(庶孫)을 후사로 세운 것이 이것이다. 셋째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인 경우로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운 것이 이것이고, 넷째는 정이불체(正而不體)로 적손(嫡孫)을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습니다.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제후(諸侯) 별자(別子)의 대소종도(大小宗圖)의 주(註)에 유해손(劉垓孫) 선생이, 제사(祭祀)에는 반드시 종자(宗子)를 써야만이 법방(法方)이 문란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였고, 또 ‘종자는 적자라야만이 세울 수 있다. 따라서 서장(庶長)은 세울 수 없다. 그러나 적자가 없는 경우에는 또한 서자를 세울 수 있는데 이른바 세자(世子)의 동모제(同母弟)를 말하는 것으로 세자는 바로 적자인 것이다. 세자가 죽었을 경우에는 세자의 친제(親弟)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適)인 것으로 서자는 세울 수 없는 것이다.’ 했습니다. 《의례》 자최 삼년장(齊衰三年章)의 경문(經文)에 ‘어머니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그 소(疏)에 해석하기를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자최복(齊衰服)을 입기 때문에 또한 자최복을 입는다.’ 했습니다. 전(傳)에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버지가 낮추지 않은 것을 어머니 또한 감히 낮출 수 없기 때문이다.’ 했고, 정주(鄭註)에 ‘감히 낮출 수 없다는 것은 감히 자기가 높다는 것으로 조녜(祖禰)의 정체(正體)에 대해 낮출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례(周禮)》 춘관(春官)의 경문(經文)에 ‘소종백(小宗伯)의 직책은 삼족(三族)의 분별을 관장하여 친소(親疏)를 분변하는 것인데 정실(正室)을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 했는데, 그 주(註)에 ‘정실은 적자(嫡子)이고, 문자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문(家門)을 담당하는 아들이란 뜻이다.’ 했습니다.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증자가 묻기를 「종자(宗子)는 사(士)가 되고 서자(庶子)는 대부(大夫)가 되었으면 그 제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상생(上牲)으로 종자의 집에서 제사지내야 하며 축에는 효자(孝子) 아무가 개자(介子) 아무를 위하여 상사(常事)를 올린다고 써야 한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효자는 종자를 말하고 개자는 서자를 말한다. 서(庶)라고 하지 않고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는 비천(卑賤)한 칭호이고 개는 부이(副貳)의 뜻이니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이다.’ 하였습니다.
《의례》 참최장(斬衰章)의 경문(經文)에 ‘남의 후사(後嗣)가 된 자’라고 했고, 전(傳)에는 ‘어떻게 해야 남의 후사가 될 수 있는가. 동종(同宗)인 경우에는 지자(支子)가 가합하다.’ 했으며,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다른 집의 적자(嫡子)는 다른 집의 후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지자(支子)를 취하는 것인데 지자는 제이(第二) 이하의 서자인 것이다. 서자라고 말하지 않고 지자라고 말한 것은 서자라고 말하면 첩자를 지칭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서(庶)를 바꾸어 지(支)라고 말한 것이다.’ 했습니다.
《예기》 내칙(內則)에 ‘적자와 서자는 외침(外寢)에서 만나는데 임금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 방긋 웃게한 다음 이름을 지어준다.’ 했는데, 그 주(註)에 ‘여기의 적자는 세자(世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하였고, 방씨(方氏)는 ‘세자는 노침(路寢)에서 만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의례》 자최 부장기장(齊衰不杖期章)의 경문(經文)에 ‘대부(大夫)의 서자(庶子)가 적자(適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는데,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이는 대부의 첩자(妾子)이기 때문에 서(庶)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적처 소생의 둘째 이하라면 당연히 곧바로 곤제라고 할 것이요 서(庶)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했습니다.
《의례》 시마삼월장(緦麻三月章)의 경문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어 자기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소에서 해석하기를 ‘이는 총자(冢子)·적자(嫡子)가 없고 첩자(妾子)만 있는 경우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서자가 후사를 승계(承繼)하여 자기 어머니를 위해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뜻이다.’ 했습니다.
주문공(朱文公) 《가례(家禮)》 팔모도(八母圖)에 ‘서모(庶母)’라고 한 데 대한 주에 ‘서모는 아버지의 첩이다.’ 했습니다.
《서전(書傳)》 미자편(微子篇)의 편제(篇題)에 ‘미자(微子)의 이름은 계(啓)인데 제을(帝乙)의 장자(長子)이고 주(紂)의 서모형(庶母兄)이다.’ 했습니다.
《논어(論語)》 미자편(微子篇)에 ‘미자는 떠나갔다.’ 한 주(註)에 ‘미자는 주(紂)의 서형(庶兄)이다.’ 하였고, 소주(小註)에 이르기를 ‘《사기(史記)》 송세가(宋世家)에 의하면 미자는 은(殷)나라 제을(帝乙)의 아들이고 주(紂)의 서형(庶兄)이다.’고 했습니다.
《춘추(春秋)》의 경문(經文)에 ‘태묘(太廟)에 큰일이 있었는데 희공(僖公)을 제승(躋升)하기 위한 것이다.’ 한 주에 ‘희공은 민공(閔公)의 서형(庶兄)이다.’고 했습니다.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왕자가 시조(始祖)의 소자출(所自出)에게 체제(禘祭)를 지낼 적에 시조를 배향(配享)하여 사묘(四廟)를 세우는데 서자(庶子)인 왕도 또한 이렇게 한다.’ 했는데, 그 주(註)에 ‘세자(世子)에게 폐질(廢疾)이 있어 후사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서자를 세워 왕으로 삼은 경우인데 그때의 예제(禮制)도 세자가 하는 것과 같다.’ 했으며, 산음 육씨(山陰陸氏)는 말하기를 ‘한(漢)나라의 효문제(孝文帝)가 효혜제(孝惠帝)를 계승한 것이 적자(嫡子)로서 이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사(祭祀)를 받들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경문(經文)에서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서자(庶子)로서는 제사를 주관할 수 없고, 서자왕(庶子王)이 된 연후에는 제사를 주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끝에는 고금을 참작해서 논한 것으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아, 효종 대왕은 인조 대왕에 대하여 정실(正室) 제이적자(第二嫡子)의 자리이고 또 소현 세자(昭顯世子)에 대하여는 동모제(同母弟)요, 차적(次嫡)의 자리인 것입니다. 《의례(儀禮)》의 경문에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한 데 대해 자하(子夏)가 전(傳)을 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정·체(正體)로서 전중(傳重)했기 때문이다.’ 했고, 정현(鄭玄)은 주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가 통하기 때문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長者)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으며, 가공언의 소(疏)에는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자(第二者)를 취하여 세우고 또한 장자(長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하게 되면 제일자(第一者)에게만 의거하나, 장자(長子)라고 말할 경우에는 적자를 장자(長者)로 세우는 것도 통해지기 때문이다.’고 했으며, 《가례(家禮)》의 주(註)에는 ‘세자(世子)가 죽었을 경우에는 세자의 친제(親弟)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嫡)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공(周公)이 경(經)을 지은 조목의 순서를 관찰하여 보면 반드시 ‘아버지가 적장자(嫡長子)를 위하여’라고 했어야 하는데 ‘적장자’라고 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하여’라고 했으니, 이는 성인(聖人)이 사람들의 적장자가 사고가 있거나 혹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반드시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아야 하는 도리가 있음을 고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하로 통용하는 뜻을 취하여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하여’라고 한 것이니, 성인의 글은 간략하면서도 극진하여 참으로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저 약언(若言)과 약운(若云)이란 말은 적장(嫡長)·차장(次長)을 아울러 거론하여 나누어 해석한 것입니다. 또 전문(傳文)에서 정·체(正體)의 뜻을 논했는데, 정(正)은 정실(正室)의 적자(適子)를 말하는 것이고 체(體)는 부자(父子)가 서로 계승(繼承)하는 것입니다. 효종 대왕은 정실의 제이(第二)이자 소현 세자의 친제(親弟)로서 부왕(父王)의 명명(明命)을 받들어 종묘(宗廟)의 제사를 주관했으니, 바로 자하(子夏)의 전(傳), 정현(鄭玄)의 주 및 공언(公彦)의 해석, 《가례》의 주 등의 말과 비의(比擬)하여 논하여 본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합치됩니다. 헌의(獻議)에서는 ‘주공(周公)이 경을 세우고 자하가 전을 짓고 정현이 주를 냈는데 모두 차자(次子)를 장자(長子)라고 한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정현이 말하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하기 때문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다.’ 했으니, 실로 헌의(獻議)에서 논한 것과는 상당히 틀린 점이 있습니다. 주공의 경(經)과 자하의 전(傳)은 본의를 총괄한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따져서 생각하지 않으면 혹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참최장(斬衰章)에 삼년이란 글자가 없는데, 이를 고집하여 삼년의 복제를 폐기하겠습니까. 주자(朱子)·정자(程子) 양현(兩賢)이 다른 논의에 주를 내면서 정현과 가공언의 말을 인용한 것이 많았는데 그르다고 한 것이 있지 않았으니, 이는 면재(勉齋) 황간(黃幹), 유씨 해손(劉氏垓孫)이 주자의 문하에서 직접 수업하여 모두 저술한 것이 있으며, 대저 예컨대 《대학(大學)》의 경일장(經一章)에 대해 주를 내는 가운데 ‘증자(曾子)의 뜻인데 문인(門人)이 기록했다.’는 유(類)와 같은 것입니다. 헌의(獻議)에서 ‘주자·정자의 감파(勘破)를 거치지 않았다.’는 말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허목의 소장에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에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이유는 첩자이기 때문이다.’고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은 소장을 만들 적에 예서(禮書)의 언어(言語)를 절취(截取)하여 소장의 내용을 구성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비록 경전(經傳)의 전문(全文)은 아니지만 그 내용 가운데의 서자와 첩자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귀천을 분변하기 위해 말한 것이니, 기어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합하의 헌의에서는 허목의 소장 가운데서 제일조(第一條)인 ‘장자(長子)가 죽으면 제이장자(第二長者)를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고 한 한 조항은 버려두고 단지 제이조(第二條)의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으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한 것만을 취하여 논하였으니, 적자와 서자에 대한 것을 취사(取捨)하는 방도가 과연 정당하게 되었습니까. 아, 헌의(獻議)에 ‘이른바 서자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첩자(妾子)이지만, 차적(次嫡) 이하는 임금의 동모제(同母弟)라도 또한 서자라고 하기 때문에 소(疏)에 「서자는 첩자의 호칭인데 적자로서 둘째인 자도 같이 서자라고 명명한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가 되는 것이 해가 될 것이 없다.’고 갑자기 논설을 세웠습니다. 이는 바로 통융(通融)시켜 합쳐 말한 것으로 서자를 혼칭하여 마치 똑같은 것처럼 여긴 것이니, 서(庶)라고 말하여 원별(遠別)한 뜻을 전부 빼어버렸으니,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도 적(嫡)·서(庶)의 분별에 대해 명백히 변론하였고 뒷날의 유현(儒賢)들도 모두 이 뜻을 숭상했습니다. 다만, 차적(次嫡) 이하는 장자(長子)와 원별(遠別)한 까닭에 깊이 억제하여 첩자와 호칭이 같게 한 것이니, 이는 강쇄(降殺)시키는 도리로 대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경전(經傳)에서 서자(庶子)란 말을 통용해서 쓴 것인데 비천(卑賤)하다고 주석을 낸 것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서자가 비천하다는 것은 어찌 많은 말을 허비하고서야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반드시 명분을 바루어야 된다고 이부(尼父)012) 가 경계하였으니, 강쇄하기 위한 호칭을 감히 정적(正嫡)인 군부(君父)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의혹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자심합니다. 귀천(貴賤)을 가리켜 거론하여 명백히 변별(辯別)해 보자면, 정실(正室)이면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는 것이 《주례(周禮)》에 기재되어 있는데, 증자(曾子)가 공자(孔子)에게 종자(宗子)와 서자(庶子)의 제사에 대해 문의하니, 공자가 축에 효자(孝子)라고 쓰라고 답한 것은 전중(傳重)했기 때문이고,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가 비천한 것을 혐의해서이며, 개(介)라고 한 것은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라고 말했습니다. 자하(子夏)는 지자(支子)라야 된다는 것으로 《의례》 경문(經文)의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이라고 한 데 전(傳)을 내었으며, 가공언의 소(疏)에는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기 때문에 서를 고쳐 지(支)라고 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내칙(內則)에 세자(世子)·적자(嫡子)·서자(庶子)가 태어나면 아버지에게 보이며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주에 ‘세자는 국군(國君)의 원자(元子)이고 적자는 세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했는데, 한(漢)나라의 군유(群儒)들이 이를 《예기(禮記)》에 편차하기에 이르러 곡례(曲禮)의 ‘지자는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한 부분에 대해 ‘지자는 서자인데 서자는 비천하기 때문에 감히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주(註)를 내어 44편(篇)의 수편(首篇)에다 올려놓았습니다.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변별한 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다섯 조항이 어찌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차장(次長)은 서자(庶子)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明文)이 아니겠습니까. 《의례》의 경문(經文)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해서’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 했는데, 주공(周公)은 모두 이를 첩자의 호칭으로 곧바로 썼습니다. 내칙(內則)에 ‘서자를 아버지에게 보이면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것은 이미 상문(上文)에 보였습니다. 서모(庶母)는 《가례(家禮)》에서 아버지의 첩(妾)이라고 했고 아들을 낳으면 서얼(庶孽)이라고 한다고 했으며, 주(紂)의 서형(庶兄)인 미자(微子)에 대해서는 《논어(論語)》의 주(註)에 드러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주회암(朱晦菴)의 기록에서 나온 것입니다. 미자편(微子篇)의 서모형(庶母兄)과 노희공(魯僖公)의 서형(庶兄)이라고 한 것도 또한 선유(先儒)의 의논에서 나온 것인데, 이른바 서형이란 것은 측실(側室)의 천얼(賤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곱 조항이 어찌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서자가 첩자가 된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明文)이 아니겠습니까. 헌의에 ‘서(庶)는 천칭(賤稱)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서가 천칭이 됨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서자(庶子)라는 뜻은 하류(下流)가 많은 것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예경(禮經)》에 통용하였는데 주설(註說)에는 비천하다고 일컬은 것이 많았습니다. 여자가 남의 서모(庶母)가 되면 그 아버지가 반드시 천축(賤畜)이라고 했으며, 또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라는 경일장(經一章)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이 같지 않다고 한 의논이 많았으며, 제후와 서인에게 통달된다는 《중용(中庸)》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貴賤)·융쇄(隆殺)에 대한 의논이 있습니다. 이 두 절목(節目)은 모두 지극히 높고 지극히 낮은 것인데 공성(孔聖)이 말한 것이고, 증자문(曾子問)의 서자에 대한 주에도 이와 같습니다. 서자와 장자에 대한 전(傳)의 서자는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예경(禮經)》에 이런 유(類)가 매우 많다고 한 것이 이것인데 주(註)에는 천하게 여긴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소현(昭顯)이 세자(世子)의 지위에 있고 효묘(孝廟)가 봉저(鳳邸)로 있을 적에 혹 비의(比擬)해서 말할 경우가 있을 때 장자와 원별한다는 뜻에 의거 효묘를 서자라고 일컫는 것은 불가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다만, 지금은 정·체(正體)로 전중(傳重)하여 지위가 지존에 이르렀으며 인조(仁祖)의 적통이 이미 소현에게는 끊겼으니, 또한 원별할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자라는 천칭을 바로 효모(孝廟)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서자라는 호칭이 《예경(禮經)》에서 통용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귀천의 구별이 일성(日星)처럼 환히 밝은데,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차장(次長)을 세우고 또한 삼년복을 입는다는 것과 서자가 승중(承重)하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말한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모순이 된다고 한 말은 어디에 전거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승중했어도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가 사종(四鍾)이 있는데 그 세 번째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이니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는데, 합하(閤下)께서 서자라는 글을 가지고 효묘께 의심을 두고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효묘의 명위(名位)에 대해 원별(遠別)의 대상인 서자로 견주어 논하는 것도 오히려 불가한 것인데 더구나 부정(不正)이라는 글이 있는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옛날의 선유(先儒)들은 모든 소소한 절문(節文)에 관계되는 것도 반드시 그 경중을 헤아려서 갑을(甲乙)이 서로 논란했는데 갑의 의견이 옳으면 옳은 것을 갑으로 돌려 옳게 여겼으며 을의 의견이 그르면 그른 것을 을에게 책임지워 그르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피차를 분변(分辯)하고 시비를 판단하여 사리를 논하고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 글에 드러나 훈계로 전하여 오는데, 더구나 이렇게 대단한 거조를 하면서 하나의 문장(文章) 안에서 어찌 상하를 살피지 않고서 도리어 모순되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합하께서 의심해서는 안 될 서자에 관한 글에 생각이 미치어 일방적으로 고집하면서 마음을 돌리지 않은 채 도리어 모순된다고 하고 있으니, 저는 실로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이야말로 높은 것을 말하면서 물을 가리키고 낮은 것을 말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경(易經)》에 ‘하늘과 물은 서로 어긋나게 행한다.’ 했는데, 이는 이치가 그런 것입니다. 서자를 통용한다는 데 대한 변별은 잘되었으니, 귀천이 분명한 것에 의거 그 지위를 변별하여 귀한 이를 귀히 여겨 정적(正嫡)인 차장(次長)도 귀히 여기며 천한 이를 천히 여겨 비천한 서자(庶子)를 천히 여겨서 변별이 사의(事宜)에 맞음으로써 존비를 정한다면, 명분도 바르고 사리도 순하며 일도 마땅하게 되고 예(禮)도 제대로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무슨 모순될 것이 있겠으며 무슨 변론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합하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상세히 살피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질책하시기를 ‘반드시 차장(次長)이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明文)을 제시한 연후에야 허목의 이야기를 따를 수 있다.’고 한 것도 또한 어떠합니까. 정체(正體)의 귀한 것은 버려두고 비하(卑下)하는 천칭(賤稱)을 취택한 것이 존비(尊卑)를 변별하는 의의에 있어 과연 사의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아, 소현이 몰(歿)한 뒤 인조 대왕께서 특별히 효묘를 세워 저위(儲位)로 올렸는데 인조 대왕의 명이 헤아려 조처한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외신(外臣)은 인조 대왕의 마음이 그렇게 된 이유를 몰랐었으므로 소현에게 적통(嫡統)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부당한 점이 있었으니, 이때 의당 단궁(檀弓)의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예(禮)에 의거 쟁론했다면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언 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강씨(姜氏)의 죄적(罪跡)이 중외(中外)에 드러나는 데 이르러서는 소현이 인조에 대해 적통이 영영 끊어졌습니다. 따라서 헌의에서 제일자(第一子)가 성인(成人)이 되어 죽었다고 한 것은 논할 겨를도 없는 것입니다. 대저 적통에 대한 의리는 지극히 엄하고도 지극히 중한 것이니, 이는 조종을 높이고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혹 끊길 경우에는 적자를 세워 종통을 잇는 것은 고금이 모두 그렇게 해 왔으며 경대부(卿大夫)의 집에도 폐기한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더구나 국군(國君)이 어떻게 적통을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대부의 집은 본디 경상(經常)의 방도가 있습니다만 제왕가(帝王家)는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周)나라의 계력(季歷)과 무왕(武王), 한(漢)나라의 문제(文帝)는 모두 제일자(第一子)의 지위가 아니었으며, 당(唐)·송(宋)·명(明)의 여러 임금들도 제이(第二) 이하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많았는데 정실(正室)인 이도 있었고 서자(庶子)인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나라는 8백 년을, 한나라는 4백 년을, 당·송·명은 또한 3백 년을 이어왔습니다만 그 사이에 적통이 없었다는 기롱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효종 대왕께서는 정·체(正體)로 전중(傳重)하여 더없이 정정(正正)하고 장장(章章)한데 그 누가 간언(間言)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합하께서는 오직 장자(長子)가 성인이 되어 죽었다는 데에만 의혹을 품었을 뿐 강씨(姜氏)의 대의(大義)가 이미 끊겼다는 것은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헌의에서 도리어 적통이 엄하지 않다고 했고 또 두 번 참최를 입는 의리가 없는데야 어찌할 것이냐고 했으니, 의리를 헤아려 보자면 어찌 서로 틀리는 말이 아닙니까. 또 한 말이 있습니다. 참최를 두 번 입지 않는다는 글은 《의례》의 주소(註疏)에서 나온 것인데 신하가 임금과 후비에 대해서와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인 것으로, 이른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있을 수 없고 나라에는 임금이 둘이 있을 수 없고 가정에는 어른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인(聖人)이 인정에 따라 예법을 정한 것인데 5등(等)의 상복(喪服)에 대한 복제(服制)는 각기 그 지위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년상을 참최로도 하고 자최로도 하고 기년(期年)으로 해서 변복(變服)하기도 하고 복(服)이 없이 심상(心喪)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당한 처지에 따라 옛일을 고증하고 지금의 예법을 참고하여 사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정(正)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하와 고금을 통틀어 삼년의 참최와 자최의 복을 폐기하지 않고 통행하여 온 것은 《예경(禮經)》의 글에 기재되기도 하고 기재되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제가 감히 사설(辭說)을 설정하여 다시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는 데 비의(比擬)하여 논하여 보려 합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죽었으면 아들 된 사람은 삼년상의 복(服)을 입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재삼(再三) 장가들고 또 그 어머니들이 모두 죽었다면 아들된 사람은 그 복을 반드시 입는 것입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형제가 서로 대를 잇는 경우가 역대(歷代)에 또한 많이 있었는데 형위(兄位)에 있는 임금이 승하(昇遐)했으면 그 신하된 사람은 반드시 그 복을 입는 것이요, 아들된 사람과 신하된 사람이 한 몸에 자참복(齊斬服)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여겨서 폐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부모(父母)가 차장(次長)에 대해서 또 죽은 자가 있을 경우 자참(齊斬)의 삼년복을 입는 것은 조종(祖宗)을 높이고 공경하기 때문이니, 감히 자신이 높다는 것으로 강쇄(降殺)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의의가 아들이 계모(繼母)에 대해서와 신하가 제위(弟位)의 임금에 대해서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상도(常道)는 이미 그 지위(地位)에 있다면 반드시 그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은 본래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옛날에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 글은 반드시 곧바로 어머니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는 것을 가리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헌의(獻議)에서 ‘차장(次長)을 모두 장자(長子)라고 명명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아버지가 된 사람은 한 몸에 참최복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한 말은 또한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본래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은 천리(天理)의 자연(自然)인 것이고 세워서 대신하게 하는 것은 인도(人道)의 당연한 것입니다. 그 시종(始終)을 궁구해보아 천리와 인도가 합쳐져 어긋나지 않은 것이 똑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이치 밖에 도(道)가 없고 도 밖에 이치가 없다.’고 한 것이니, 다시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합하의 의견은 필연코 장자(長子)의 지위가 어떻게 둘이 있겠느냐고 여겨 탈적(奪嫡)의 혐의에 빠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근사(近似)한 서자(庶子)를 점출(拈出)하여 비의(比擬)해서 논한 것이나, 또한 대의(大義)를 가리운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대저 인조의 적통(嫡統)을 존몰(存歿)에 관계없이 기필코 대의(大義)가 이미 끊긴 성인(成人)이 되어 죽은 사람에게로 귀결시키려 한 것은 그 뜻을 말한다면 취할 만하지만 그 이치를 궁구하여 본다면 또한 모순되고 구애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데 그 말을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옳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말(本末)이 일관(一貫)된 말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아, 주공(周公)이 《의례》의 경문(經文)에 입언(立言)하기를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자하(子夏)가 ‘정·체(正體)로서 전중(傳重)한 것이다’고 전(傳)을 내고, 정현(鄭玄)은 ‘적자(嫡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용시키기 위한 것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長者)로 세운다는 말이다’고 했으니, 이것이 차장(次長)을 세워 장자(長子)로 삼는다는 점을 밝힌 말입니다. 또 경문(經文)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고 했는데 이는 곧바로 서자가 첩자의 호칭이 되는 것이며, 공자도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이 전적(典籍)에 환히 기재되어 천만고(千萬古) 동안 우주(宇宙)의 치란(治亂)이 있을 즈음에도 없어지지 않고 오늘날에까지 이르렀으니,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효묘(孝廟)의 상(喪)에 삼년 자최(齊衰)를 입는 것은 경전(經傳)을 참고해 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鬼神)에게 질정해 보아도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주머니의 입구를 꼭 묶어두듯이 말을 조심해야 허물이 없게 된다.’고 했으니, 삼가 조심해서 지키는 것이 의당한 일이겠습니다만, 의리에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운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경훈(經訓)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두루 생각하고 관대히 살펴주시어 혹 취할 점이 있으면 다시 《예경(禮經)》을 상고하여 사실에 따라 주의(奏議)하신다면 위로는 문란된 명위(名位)가 바로잡아지게 될 수 있고 아래로는 중인(衆人)의 의혹을 얼음이 녹듯이 풀리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취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허물이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을 기뻐하는 대선(大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자(父子)·군신(君臣)의 명위(名位)와 존비(尊卑)가 각기 올바르게 되어 예(禮)로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상하의 큰 경사인 것으로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수홍(壽弘)은 젊어서부터 강직한 것으로 이름이 나서 제류(儕流)들에게 크게 추허(推許)를 받았다. 항상 두 송(宋)의 의례(議禮)가 사리에 어긋난 것을 마음속으로 통한스럽게 여겨오다가 이에 거상(居喪)하는 동안에 예가(禮家)를 고열(考閱)하여 하나의 글을 지어 시열(時烈)에게 투시(投示)한 것이다. 그의 변별(辯別)이 상세하고 말이 정직했기 때문에 시열이 감히 답을 하지 못하고 단지 한하는 마음만 품었으며, 그의 당여(黨與)들이 일제히 일어나 공격하였으므로 결국은 사판서 삭제시키는 율(律)을 시행한 것이다. 아, 수홍이 동료들의 말에 동요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서 발기(拔起)하여 스스로 험난함을 취택하면서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자품이 고아하고 수립(樹立)이 확고하지 않으면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저 다른 사람들이야 진실로 말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그의 종당(宗黨)의 대관(大官)들은 괴이하고 망령되다고 지목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친척의 의리를 파기하고 왕래를 끊었다. 그리하여 경신년의 대침(大侵)이 있을 적에 하마터면 굶어죽는 것을 면하지 못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른바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않을 만큼 강하고도 굳세다는 사람은 수홍을 두고 한 말이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49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註 007] 송이상(宋二相) :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킴.[註 008] 추생(鯫生) : 자기의 겸칭.[註 009] 초토(草土) : 상중(喪中)을 뜻함.[註 010] 기해년 : 1659 현종 즉위년.[註 011] 단궁(檀弓)의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 : 단궁의 문은, 옛날 공의 중자(公儀仲子)가 적자(嫡子)의 상(喪)을 당했을 때 적손을 버리고 서자를 후사(後嗣)로 삼자 단궁이 이를 기롱하는 뜻에서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상관(喪冠)인 문(免)을 쓰고 가서 조문했던 것을 말함. 자유(子游)의 최(衰)는, 옛날 사구(司寇) 혜자(惠子)의 초상에 자유가 친구 사이에 조문하는 예(禮)에 벗어나는 최마복(衰麻服)을 하고 조문한 것을 말하는데 이는 혜자가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후사로 삼은 것을 기롱하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임.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註 012] 이부(尼父) : 공자.
아, 효종 대왕은 인조 대왕에 대하여 정실(正室) 제이적자(第二嫡子)의 자리이고 또 소현 세자(昭顯世子)에 대하여는 동모제(同母弟)요, 차적(次嫡)의 자리인 것입니다. 《의례(儀禮)》의 경문에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한 데 대해 자하(子夏)가 전(傳)을 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정·체(正體)로서 전중(傳重)했기 때문이다.’ 했고, 정현(鄭玄)은 주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가 통하기 때문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長者)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으며, 가공언의 소(疏)에는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자(第二者)를 취하여 세우고 또한 장자(長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하게 되면 제일자(第一者)에게만 의거하나, 장자(長子)라고 말할 경우에는 적자를 장자(長者)로 세우는 것도 통해지기 때문이다.’고 했으며, 《가례(家禮)》의 주(註)에는 ‘세자(世子)가 죽었을 경우에는 세자의 친제(親弟)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嫡)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공(周公)이 경(經)을 지은 조목의 순서를 관찰하여 보면 반드시 ‘아버지가 적장자(嫡長子)를 위하여’라고 했어야 하는데 ‘적장자’라고 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하여’라고 했으니, 이는 성인(聖人)이 사람들의 적장자가 사고가 있거나 혹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반드시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아야 하는 도리가 있음을 고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하로 통용하는 뜻을 취하여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하여’라고 한 것이니, 성인의 글은 간략하면서도 극진하여 참으로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저 약언(若言)과 약운(若云)이란 말은 적장(嫡長)·차장(次長)을 아울러 거론하여 나누어 해석한 것입니다. 또 전문(傳文)에서 정·체(正體)의 뜻을 논했는데, 정(正)은 정실(正室)의 적자(適子)를 말하는 것이고 체(體)는 부자(父子)가 서로 계승(繼承)하는 것입니다. 효종 대왕은 정실의 제이(第二)이자 소현 세자의 친제(親弟)로서 부왕(父王)의 명명(明命)을 받들어 종묘(宗廟)의 제사를 주관했으니, 바로 자하(子夏)의 전(傳), 정현(鄭玄)의 주 및 공언(公彦)의 해석, 《가례》의 주 등의 말과 비의(比擬)하여 논하여 본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합치됩니다. 헌의(獻議)에서는 ‘주공(周公)이 경을 세우고 자하가 전을 짓고 정현이 주를 냈는데 모두 차자(次子)를 장자(長子)라고 한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정현이 말하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하기 때문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다.’ 했으니, 실로 헌의(獻議)에서 논한 것과는 상당히 틀린 점이 있습니다. 주공의 경(經)과 자하의 전(傳)은 본의를 총괄한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따져서 생각하지 않으면 혹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참최장(斬衰章)에 삼년이란 글자가 없는데, 이를 고집하여 삼년의 복제를 폐기하겠습니까.
주자(朱子)·정자(程子) 양현(兩賢)이 다른 논의에 주를 내면서 정현과 가공언의 말을 인용한 것이 많았는데 그르다고 한 것이 있지 않았으니, 이는 면재(勉齋) 황간(黃幹), 유씨 해손(劉氏垓孫)이 주자의 문하에서 직접 수업하여 모두 저술한 것이 있으며, 대저 예컨대 《대학(大學)》의 경일장(經一章)에 대해 주를 내는 가운데 ‘증자(曾子)의 뜻인데 문인(門人)이 기록했다.’는 유(類)와 같은 것입니다. 헌의(獻議)에서 ‘주자·정자의 감파(勘破)를 거치지 않았다.’는 말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허목의 소장에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에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이유는 첩자이기 때문이다.’고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은 소장을 만들 적에 예서(禮書)의 언어(言語)를 절취(截取)하여 소장의 내용을 구성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비록 경전(經傳)의 전문(全文)은 아니지만 그 내용 가운데의 서자와 첩자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귀천을 분변하기 위해 말한 것이니, 기어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합하의 헌의에서는 허목의 소장 가운데서 제일조(第一條)인 ‘장자(長子)가 죽으면 제이장자(第二長者)를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고 한 한 조항은 버려두고 단지 제이조(第二條)의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으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한 것만을 취하여 논하였으니, 적자와 서자에 대한 것을 취사(取捨)하는 방도가 과연 정당하게 되었습니까.
아, 헌의(獻議)에 ‘이른바 서자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첩자(妾子)이지만, 차적(次嫡) 이하는 임금의 동모제(同母弟)라도 또한 서자라고 하기 때문에 소(疏)에 「서자는 첩자의 호칭인데 적자로서 둘째인 자도 같이 서자라고 명명한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가 되는 것이 해가 될 것이 없다.’고 갑자기 논설을 세웠습니다. 이는 바로 통융(通融)시켜 합쳐 말한 것으로 서자를 혼칭하여 마치 똑같은 것처럼 여긴 것이니, 서(庶)라고 말하여 원별(遠別)한 뜻을 전부 빼어버렸으니,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도 적(嫡)·서(庶)의 분별에 대해 명백히 변론하였고 뒷날의 유현(儒賢)들도 모두 이 뜻을 숭상했습니다. 다만, 차적(次嫡) 이하는 장자(長子)와 원별(遠別)한 까닭에 깊이 억제하여 첩자와 호칭이 같게 한 것이니, 이는 강쇄(降殺)시키는 도리로 대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경전(經傳)에서 서자(庶子)란 말을 통용해서 쓴 것인데 비천(卑賤)하다고 주석을 낸 것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서자가 비천하다는 것은 어찌 많은 말을 허비하고서야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반드시 명분을 바루어야 된다고 이부(尼父)012) 가 경계하였으니, 강쇄하기 위한 호칭을 감히 정적(正嫡)인 군부(君父)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의혹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자심합니다.
귀천(貴賤)을 가리켜 거론하여 명백히 변별(辯別)해 보자면, 정실(正室)이면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는 것이 《주례(周禮)》에 기재되어 있는데, 증자(曾子)가 공자(孔子)에게 종자(宗子)와 서자(庶子)의 제사에 대해 문의하니, 공자가 축에 효자(孝子)라고 쓰라고 답한 것은 전중(傳重)했기 때문이고,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가 비천한 것을 혐의해서이며, 개(介)라고 한 것은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라고 말했습니다. 자하(子夏)는 지자(支子)라야 된다는 것으로 《의례》 경문(經文)의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이라고 한 데 전(傳)을 내었으며, 가공언의 소(疏)에는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기 때문에 서를 고쳐 지(支)라고 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내칙(內則)에 세자(世子)·적자(嫡子)·서자(庶子)가 태어나면 아버지에게 보이며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주에 ‘세자는 국군(國君)의 원자(元子)이고 적자는 세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했는데, 한(漢)나라의 군유(群儒)들이 이를 《예기(禮記)》에 편차하기에 이르러 곡례(曲禮)의 ‘지자는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한 부분에 대해 ‘지자는 서자인데 서자는 비천하기 때문에 감히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주(註)를 내어 44편(篇)의 수편(首篇)에다 올려놓았습니다.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변별한 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다섯 조항이 어찌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차장(次長)은 서자(庶子)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明文)이 아니겠습니까.
《의례》의 경문(經文)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해서’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 했는데, 주공(周公)은 모두 이를 첩자의 호칭으로 곧바로 썼습니다. 내칙(內則)에 ‘서자를 아버지에게 보이면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것은 이미 상문(上文)에 보였습니다. 서모(庶母)는 《가례(家禮)》에서 아버지의 첩(妾)이라고 했고 아들을 낳으면 서얼(庶孽)이라고 한다고 했으며, 주(紂)의 서형(庶兄)인 미자(微子)에 대해서는 《논어(論語)》의 주(註)에 드러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주회암(朱晦菴)의 기록에서 나온 것입니다. 미자편(微子篇)의 서모형(庶母兄)과 노희공(魯僖公)의 서형(庶兄)이라고 한 것도 또한 선유(先儒)의 의논에서 나온 것인데, 이른바 서형이란 것은 측실(側室)의 천얼(賤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곱 조항이 어찌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서자가 첩자가 된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明文)이 아니겠습니까. 헌의에 ‘서(庶)는 천칭(賤稱)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서가 천칭이 됨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서자(庶子)라는 뜻은 하류(下流)가 많은 것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예경(禮經)》에 통용하였는데 주설(註說)에는 비천하다고 일컬은 것이 많았습니다. 여자가 남의 서모(庶母)가 되면 그 아버지가 반드시 천축(賤畜)이라고 했으며, 또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라는 경일장(經一章)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이 같지 않다고 한 의논이 많았으며, 제후와 서인에게 통달된다는 《중용(中庸)》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貴賤)·융쇄(隆殺)에 대한 의논이 있습니다. 이 두 절목(節目)은 모두 지극히 높고 지극히 낮은 것인데 공성(孔聖)이 말한 것이고, 증자문(曾子問)의 서자에 대한 주에도 이와 같습니다. 서자와 장자에 대한 전(傳)의 서자는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예경(禮經)》에 이런 유(類)가 매우 많다고 한 것이 이것인데 주(註)에는 천하게 여긴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소현(昭顯)이 세자(世子)의 지위에 있고 효묘(孝廟)가 봉저(鳳邸)로 있을 적에 혹 비의(比擬)해서 말할 경우가 있을 때 장자와 원별한다는 뜻에 의거 효묘를 서자라고 일컫는 것은 불가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다만, 지금은 정·체(正體)로 전중(傳重)하여 지위가 지존에 이르렀으며 인조(仁祖)의 적통이 이미 소현에게는 끊겼으니, 또한 원별할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자라는 천칭을 바로 효모(孝廟)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서자라는 호칭이 《예경(禮經)》에서 통용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귀천의 구별이 일성(日星)처럼 환히 밝은데, 헌의(獻議)에서 이른바 차장(次長)을 세우고 또한 삼년복을 입는다는 것과 서자가 승중(承重)하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말한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모순이 된다고 한 말은 어디에 전거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승중했어도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가 사종(四鍾)이 있는데 그 세 번째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이니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는데, 합하(閤下)께서 서자라는 글을 가지고 효묘께 의심을 두고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효묘의 명위(名位)에 대해 원별(遠別)의 대상인 서자로 견주어 논하는 것도 오히려 불가한 것인데 더구나 부정(不正)이라는 글이 있는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옛날의 선유(先儒)들은 모든 소소한 절문(節文)에 관계되는 것도 반드시 그 경중을 헤아려서 갑을(甲乙)이 서로 논란했는데 갑의 의견이 옳으면 옳은 것을 갑으로 돌려 옳게 여겼으며 을의 의견이 그르면 그른 것을 을에게 책임지워 그르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피차를 분변(分辯)하고 시비를 판단하여 사리를 논하고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 글에 드러나 훈계로 전하여 오는데, 더구나 이렇게 대단한 거조를 하면서 하나의 문장(文章) 안에서 어찌 상하를 살피지 않고서 도리어 모순되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합하께서 의심해서는 안 될 서자에 관한 글에 생각이 미치어 일방적으로 고집하면서 마음을 돌리지 않은 채 도리어 모순된다고 하고 있으니, 저는 실로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이야말로 높은 것을 말하면서 물을 가리키고 낮은 것을 말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경(易經)》에 ‘하늘과 물은 서로 어긋나게 행한다.’ 했는데, 이는 이치가 그런 것입니다. 서자를 통용한다는 데 대한 변별은 잘되었으니, 귀천이 분명한 것에 의거 그 지위를 변별하여 귀한 이를 귀히 여겨 정적(正嫡)인 차장(次長)도 귀히 여기며 천한 이를 천히 여겨 비천한 서자(庶子)를 천히 여겨서 변별이 사의(事宜)에 맞음으로써 존비를 정한다면, 명분도 바르고 사리도 순하며 일도 마땅하게 되고 예(禮)도 제대로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무슨 모순될 것이 있겠으며 무슨 변론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합하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상세히 살피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질책하시기를 ‘반드시 차장(次長)이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明文)을 제시한 연후에야 허목의 이야기를 따를 수 있다.’고 한 것도 또한 어떠합니까. 정체(正體)의 귀한 것은 버려두고 비하(卑下)하는 천칭(賤稱)을 취택한 것이 존비(尊卑)를 변별하는 의의에 있어 과연 사의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아, 소현이 몰(歿)한 뒤 인조 대왕께서 특별히 효묘를 세워 저위(儲位)로 올렸는데 인조 대왕의 명이 헤아려 조처한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외신(外臣)은 인조 대왕의 마음이 그렇게 된 이유를 몰랐었으므로 소현에게 적통(嫡統)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부당한 점이 있었으니, 이때 의당 단궁(檀弓)의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예(禮)에 의거 쟁론했다면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언 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강씨(姜氏)의 죄적(罪跡)이 중외(中外)에 드러나는 데 이르러서는 소현이 인조에 대해 적통이 영영 끊어졌습니다. 따라서 헌의에서 제일자(第一子)가 성인(成人)이 되어 죽었다고 한 것은 논할 겨를도 없는 것입니다.
대저 적통에 대한 의리는 지극히 엄하고도 지극히 중한 것이니, 이는 조종을 높이고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혹 끊길 경우에는 적자를 세워 종통을 잇는 것은 고금이 모두 그렇게 해 왔으며 경대부(卿大夫)의 집에도 폐기한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더구나 국군(國君)이 어떻게 적통을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대부의 집은 본디 경상(經常)의 방도가 있습니다만 제왕가(帝王家)는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周)나라의 계력(季歷)과 무왕(武王), 한(漢)나라의 문제(文帝)는 모두 제일자(第一子)의 지위가 아니었으며, 당(唐)·송(宋)·명(明)의 여러 임금들도 제이(第二) 이하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많았는데 정실(正室)인 이도 있었고 서자(庶子)인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나라는 8백 년을, 한나라는 4백 년을, 당·송·명은 또한 3백 년을 이어왔습니다만 그 사이에 적통이 없었다는 기롱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효종 대왕께서는 정·체(正體)로 전중(傳重)하여 더없이 정정(正正)하고 장장(章章)한데 그 누가 간언(間言)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합하께서는 오직 장자(長子)가 성인이 되어 죽었다는 데에만 의혹을 품었을 뿐 강씨(姜氏)의 대의(大義)가 이미 끊겼다는 것은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헌의에서 도리어 적통이 엄하지 않다고 했고 또 두 번 참최를 입는 의리가 없는데야 어찌할 것이냐고 했으니, 의리를 헤아려 보자면 어찌 서로 틀리는 말이 아닙니까.
또 한 말이 있습니다. 참최를 두 번 입지 않는다는 글은 《의례》의 주소(註疏)에서 나온 것인데 신하가 임금과 후비에 대해서와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인 것으로, 이른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있을 수 없고 나라에는 임금이 둘이 있을 수 없고 가정에는 어른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인(聖人)이 인정에 따라 예법을 정한 것인데 5등(等)의 상복(喪服)에 대한 복제(服制)는 각기 그 지위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년상을 참최로도 하고 자최로도 하고 기년(期年)으로 해서 변복(變服)하기도 하고 복(服)이 없이 심상(心喪)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당한 처지에 따라 옛일을 고증하고 지금의 예법을 참고하여 사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정(正)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하와 고금을 통틀어 삼년의 참최와 자최의 복을 폐기하지 않고 통행하여 온 것은 《예경(禮經)》의 글에 기재되기도 하고 기재되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제가 감히 사설(辭說)을 설정하여 다시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는 데 비의(比擬)하여 논하여 보려 합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죽었으면 아들 된 사람은 삼년상의 복(服)을 입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재삼(再三) 장가들고 또 그 어머니들이 모두 죽었다면 아들된 사람은 그 복을 반드시 입는 것입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형제가 서로 대를 잇는 경우가 역대(歷代)에 또한 많이 있었는데 형위(兄位)에 있는 임금이 승하(昇遐)했으면 그 신하된 사람은 반드시 그 복을 입는 것이요, 아들된 사람과 신하된 사람이 한 몸에 자참복(齊斬服)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여겨서 폐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부모(父母)가 차장(次長)에 대해서 또 죽은 자가 있을 경우 자참(齊斬)의 삼년복을 입는 것은 조종(祖宗)을 높이고 공경하기 때문이니, 감히 자신이 높다는 것으로 강쇄(降殺)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의의가 아들이 계모(繼母)에 대해서와 신하가 제위(弟位)의 임금에 대해서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상도(常道)는 이미 그 지위(地位)에 있다면 반드시 그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은 본래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옛날에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 글은 반드시 곧바로 어머니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는 것을 가리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헌의(獻議)에서 ‘차장(次長)을 모두 장자(長子)라고 명명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아버지가 된 사람은 한 몸에 참최복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한 말은 또한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본래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은 천리(天理)의 자연(自然)인 것이고 세워서 대신하게 하는 것은 인도(人道)의 당연한 것입니다. 그 시종(始終)을 궁구해보아 천리와 인도가 합쳐져 어긋나지 않은 것이 똑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이치 밖에 도(道)가 없고 도 밖에 이치가 없다.’고 한 것이니, 다시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합하의 의견은 필연코 장자(長子)의 지위가 어떻게 둘이 있겠느냐고 여겨 탈적(奪嫡)의 혐의에 빠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근사(近似)한 서자(庶子)를 점출(拈出)하여 비의(比擬)해서 논한 것이나, 또한 대의(大義)를 가리운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대저 인조의 적통(嫡統)을 존몰(存歿)에 관계없이 기필코 대의(大義)가 이미 끊긴 성인(成人)이 되어 죽은 사람에게로 귀결시키려 한 것은 그 뜻을 말한다면 취할 만하지만 그 이치를 궁구하여 본다면 또한 모순되고 구애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데 그 말을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옳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말(本末)이 일관(一貫)된 말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아, 주공(周公)이 《의례》의 경문(經文)에 입언(立言)하기를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자하(子夏)가 ‘정·체(正體)로서 전중(傳重)한 것이다’고 전(傳)을 내고, 정현(鄭玄)은 ‘적자(嫡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용시키기 위한 것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長者)로 세운다는 말이다’고 했으니, 이것이 차장(次長)을 세워 장자(長子)로 삼는다는 점을 밝힌 말입니다. 또 경문(經文)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고 했는데 이는 곧바로 서자가 첩자의 호칭이 되는 것이며, 공자도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이 전적(典籍)에 환히 기재되어 천만고(千萬古) 동안 우주(宇宙)의 치란(治亂)이 있을 즈음에도 없어지지 않고 오늘날에까지 이르렀으니,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효묘(孝廟)의 상(喪)에 삼년 자최(齊衰)를 입는 것은 경전(經傳)을 참고해 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鬼神)에게 질정해 보아도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주머니의 입구를 꼭 묶어두듯이 말을 조심해야 허물이 없게 된다.’고 했으니, 삼가 조심해서 지키는 것이 의당한 일이겠습니다만, 의리에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운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경훈(經訓)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두루 생각하고 관대히 살펴주시어 혹 취할 점이 있으면 다시 《예경(禮經)》을 상고하여 사실에 따라 주의(奏議)하신다면 위로는 문란된 명위(名位)가 바로잡아지게 될 수 있고 아래로는 중인(衆人)의 의혹을 얼음이 녹듯이 풀리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취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허물이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을 기뻐하는 대선(大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자(父子)·군신(君臣)의 명위(名位)와 존비(尊卑)가 각기 올바르게 되어 예(禮)로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상하의 큰 경사인 것으로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수홍(壽弘)은 젊어서부터 강직한 것으로 이름이 나서 제류(儕流)들에게 크게 추허(推許)를 받았다. 항상 두 송(宋)의 의례(議禮)가 사리에 어긋난 것을 마음속으로 통한스럽게 여겨오다가 이에 거상(居喪)하는 동안에 예가(禮家)를 고열(考閱)하여 하나의 글을 지어 시열(時烈)에게 투시(投示)한 것이다. 그의 변별(辯別)이 상세하고 말이 정직했기 때문에 시열이 감히 답을 하지 못하고 단지 한하는 마음만 품었으며, 그의 당여(黨與)들이 일제히 일어나 공격하였으므로 결국은 사판서 삭제시키는 율(律)을 시행한 것이다. 아, 수홍이 동료들의 말에 동요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서 발기(拔起)하여 스스로 험난함을 취택하면서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자품이 고아하고 수립(樹立)이 확고하지 않으면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저 다른 사람들이야 진실로 말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그의 종당(宗黨)의 대관(大官)들은 괴이하고 망령되다고 지목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친척의 의리를 파기하고 왕래를 끊었다. 그리하여 경신년의 대침(大侵)이 있을 적에 하마터면 굶어죽는 것을 면하지 못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른바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않을 만큼 강하고도 굳세다는 사람은 수홍을 두고 한 말이다.
상이 침을 맞았다.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소결(疏決)하기 위한 문서를 지금 조사해냈습니다. 전가 사변의 부류는 평소 심리할 때 넣을 수 있습니다만, 자기에 한해 충군(充軍)시킨 자와 연한을 한정하지 않고 정배시킨 자에 대해서는 당초 거론하지 않았으니, 실로 억울하고 원통한 데에 관계가 됩니다. 지금 의당 아울러 조사해 낼 것을 허락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2일 계유
장령 맹주서 등이 아뢰기를,
"홍순민(洪舜民)이 중물(重物)을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에게 보냈는데 퇴각시킨 것을 인하여 결국 탄로가 나기에 이르렀으나,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게 된 뒤에도 실토하지 않음으로써 중신이 소장을 올려 사실을 밝히고 인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감히 끝내 숨기지 못하고서 하나는 전부터 세시(歲時)에 보내던 것이라고 했고 또 하나는 망령되이 혼수(婚需)를 보낸 것이라고 했으니, 그가 거짓말로 꾸며서 속여온 것이 너무도 가증스럽습니다. 만일 무거운 율(律)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탐오를 막고 기강을 진기시킬 수 있겠습니까.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낸 다음 중한 율로 조감(照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처음 순민이 표피(豹皮)와 군목(軍木)을 우의정 홍명하(洪命夏),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에게 보냈으나 명하 등이 이를 받지 않았는데 대관(臺官)이 듣고 잡아다가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순민이 처음에는 사실대로 공초하지 않다가 명하 등이 소장을 올려 스스로 논열하니 순민이 감히 숨기지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도배시키라고만 명하였는데, 대간이 다시 엄히 국문할 것을 청하였고 순민이 이에 갖추 자복하니, 다시 정배시킬 것을 명하게 되었다. 물의는 방형(邦刑)을 바루지 않았다는 것으로 한스럽게 여겼다.
양사가 온천에 행행하는 것을 정지하라는 논계를 중지했다.
2월 23일 갑술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포수(砲手)들에게 대포 쏘는 것을 익히게 하고 싶지만 탄약을 준비하기가 어려우니, 이를 회계(會計)에 부쳐 쓰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군병들에게 시재(試才)할 때 상격(賞格)으로 줄 물품이 없으니, 호조의 노비 공목(貢木)이나 회계(會計) 이외의 쌀이나 노직(老職)인 통정첩(通政帖)을 헤아려 지급해 주거나 하면 온편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고, 우의정 허적은 아뢰기를,
"호조의 포목(布木)은 지급할 수 없으니, 의당 회미(會米) 5백여 석(石)을 지급해야 합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는 아뢰기를,
"회미를 쓰게 하고 회계로 보고하게 한다면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첩문(帖文)에 이르러서는 매우 구차스러운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양사에서 이미 온천의 행행에 대한 논계를 중지했으니, 반드시 먼저 날짜를 가린 연후에야 바야흐로 분부(分付)하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날씨를 보아가면서 날짜를 가리려 한다. 응당 행해야 될 일에 이르러서는 미리 헤아려 조처하도록 분부하게 하라."
하였다. 응교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이번의 행행은 만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민정(民情)과 사세(事勢)가 전과는 크게 다릅니다. 지난해는 실로 처음 행행한 것이기 때문에 만백성이 다투어 우모(羽旄)를 보면서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마다 잇단 행행인데다가 민간에 폐를 끼치게 되니 반드시 원망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일을 반드시 십분 절약하고 감손시켜야 바야흐로 사의에 맞게 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사간 이익(李翊)도 폐를 줄이고 간략하게 하라는 내용으로 극력 진달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익이 정한기(鄭漢驥)의 일이 사실과 어긋났다는 것으로 인피하였고 최관(崔寬)·이혜(李嵆)도 이 때문에 인피했는데 모두 체직시킬 것으로 처치하였다.
2월 24일 을해
전라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강진(康津)·해남(海南) 등 바닷가 여덟 고을을 전영(前營)에 예속시켰는데 전영을 순천(順天)에 설치했습니다. 강진에서 순천까지의 거리는 3일 노정(路程)이고 해남에서 순천까지의 거리는 4일 노정이어서 먼지방의 군사들이 왕래하기에 폐단이 있으니, 일을 마땅히 변통시켜야 합니다. 한결같이 김해(金海)·해미(海美)의 규례(規例)처럼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 영장(營將)을 겸하게 한다면 온편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비국이 장계에 의거 시행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5일 병자
대사간 이은상(李殷相)이 또한 정한기의 일 때문에 인피하여 체면되었다.
동지 정사 김좌명(金佐明), 부사 홍처대(洪處大), 서장관 이경과(李慶果)가 북경(北京)에서 돌아왔다.
2월 26일 정축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이동직(李東稷)·정재희(鄭載禧)를 정언으로, 정만화(鄭萬和)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27일 무인
헌부가 경원 부사(慶源府使) 노즙(盧濈)은 위인이 용렬 잔약하여 변진(邊鎭)의 자목(字牧)의 임무에 합당치 않다고 탄핵하고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2월 28일 기묘
경상 감사 민점(閔點)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인견하고서 이르기를,
"영남(嶺南)이 잇따라 흉년이 들었으니 조설(措設)의 어려움이 타도(他道)에 배가 될 것이다. 경은 의당 마음과 힘을 다해야 한다. 근래 제도의 소위를 살펴보면 오로지 허문(虛文)만을 일삼고 실사(實事)가 적으니, 경은 이를 본받지 말라."
하였다. 민점이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이 중임을 받고 보니 실로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어떻게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각 고을의 창곡(倉穀)을 으레 다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보고하였으나 창고에 들어간 실제의 수효는 적으니, 앞으로 진구할 일이 진실로 우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곡(糴穀)은 긴급할 때 쓰기 위한 것인데 긴급함을 닥쳐 쓸 수 없게 된다면 참으로 우려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민점이 아뢰기를,
"듣건대 본도의 물력이 탕갈되어 아병(牙兵)을 조련(操鍊)시킬 적에 쓸 상격(賞格)의 물품을 판출해 낼 데가 없다고 합니다. 본도에 유치되어 있는 군포(軍布)를 미루어 쓰는 것이 온편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국에 말하여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안주(安州) 성 안에서 실화(失火)하여 잇따라 1백 50여 가호(家戶)가 불탔고 관향(管餉)·천류(泉流) 두 창고도 다 불에 타버렸는데,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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