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신해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우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자전께서 목욕하시려면 기후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오늘이 바로 길일이니 잠시 목욕을 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년에 만약 과거를 시행하지 않았다면 본도(本道) 사람들이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금년에는 자전까지 모시고 왔으니 필시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격동되어 기쁘게 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이번에는 특별하게 과거를 시행하라."
하니, 도승지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작년에 본도 노인에게 음식을 하사하셨으니 이번에도 그대로 행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듣건대 관광 온 사람 중에 아흔살 된 노모를 업고 온 자가 있다는데 사실인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의 노인들에게는 마땅히 음식을 내려주어야겠지만, 경기에도 똑같이 제급(題給)해야 하는가?"
하니,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본도를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비로소 목욕하였다.
10일에 과거를 시행하여 인재를 뽑으라고 명하였다.
사관을 보내어 우찬성 송시열(宋時烈), 행 호군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 전 집의 윤선거(尹宣擧)에게 하유하여 행궁으로 오라고 하였다.
4월 2일 임자
자전이 비로소 목욕하였다.
도내의 노인 중에 관직에 있었던 자는 70세 이상에게, 사서인(士庶人)은 80세 이상에게 음식을 하사하였다.
4월 4일 갑인
헌부가 유세철(柳世哲)의 처벌을 청하는 계를 정지하였다.
4월 5일 을묘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목욕하신 후에 뵙지 못하였기에 감히 들어와 진찰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목욕한 이래로 효험이 있는 것을 확연히 느끼겠다."
하였고, 허적이 아뢰기를,
"자전의 기후는 어떠십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목욕한 후에 별다른 증세가 없으시니 이 점은 다행스러우나, 염려스러운 점은 앞으로 효험을 보게 될지 장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미 과거를 시행하기로 하였는데, 배종한 관원에게 응시를 허락할 것인가를 의논하여 정해서 분부해야 공연히 바라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본도 수령에게도 응시를 허락합니까?"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수령의 노고는 배종한 관원이나 차원(差員)보다 크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종한 관원과 이곳에 머물러 있는 차원에게 응시를 허락하라."
하였다.
4월 7일 정사
우찬성 송시열과 호군 송준길이, 유세철이 상소하여 배척한 일로 상소하여 자신을 탓하고 부름에 나오지 않았다.
4월 8일 무오
간원이 유세철의 처벌을 청하는 계를 정지하였다.
대사헌 조복양(趙復陽)과 장령 어진익(魚震翼)이 아뢰기를,
"안동 부사 이성징(李星徵)은 고을의 불량한 무리들과 함께 일을 모의하고, 예를 논한다는 거짓 핑계로 읍의 자제들을 꾀어 도내에 통문(通文)을 띄우게 하여 이렇게 음험한 일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를 사판에서 삭거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0일 경신
우상 허적과 대제학 김수항은 문시(文試)를 관장하고 병판 홍중보는 무시(武試)를 관장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비가 매우 많이 왔다. 우의정 허적이 승지 민희(閔熙)로 하여금 아뢰게 하기를,
"야외에 과장(科場)을 열었는데, 갑자기 큰비를 만나 수천 명의 유생이 그대로 흠뻑 젖어 제술을 할 수 없습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밖으로 나가 생명을 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일제히 호소하니, 달리 임시변통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영상 정태화(鄭太和)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과장의 일은 체모가 매우 중요하며, 또 훗날 이 일을 끌어다가 규례로 삼을까 염려됩니다. 곧바로 나가기를 자원하는 자는 허락해주고 나머지는 그대로 제술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유생을 내보내주라고 명하였다. 이에 수천여 명이 일시에 일어나 나가니, 흠뻑 젖은 채 이리저리 엎어지는 그 모양을 뭐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 약간의 유생만이 제술을 하여 냈는데 겨우 56장이었다. 허적 등이 급제한 사람의 순위를 정하여 3 장을 올렸는데, 상은 온양 사람에게 급제를 하사하고자 하여 낙폭(落幅) 가운데서 찾아보도록 명하였다. 허적 등이 불가하다고 쟁집하자 상이 그만두고 권열(權說) 등 3명을 뽑아 급제를 하사하였다.
행 호군 송준길이 또 상소하여 자신을 탓하고 부르는 명에 나오지 않으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고 다시 사관을 보내 전유(傳諭)하여 불렀다.
행 호군 이유태(李惟泰)도 사직소를 올리고 오지 않으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고 다시 불렀다.
4월 16일 병인
김석주(金錫胄)를 수찬으로 삼았다.
대사헌 조복양과 대사간 정만화(鄭萬和)가 청대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이번 거둥은 목욕을 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순수(巡狩)하여 지방을 살피려는 뜻이 있습니다. 작년의 예에 따라 도신(道臣)과 유대 수령(留待守令)을 인견하여 백성의 질고를 물어보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거둥할 때면 효행이 두드러진 사람에게 반드시 상을 내렸고, 불러서 만나보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이 도내의 효행이 두드러진 사람에게도 노인의 예에 따라 음식을 하사하소서."
하니, 상이 도신에게 거행하도록 분부하였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신인립(愼仁立)이라는 자가 있는데 아산인(牙山人)으로서 지극히 훌륭한 행실이 있습니다. 형제가 독종(毒腫)을 앓자 인립이 그 고름을 빨아내었고, 그 밖의 행실도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듣고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이르지 않았습니다. 윤삼(尹參)도 아산인으로서 일찍이 정축년067) 의 난에 조카와 아들이 다 포로가 되었는데, 속환(贖還)하려 하였으나 돈이 부족하자 조카를 먼저 속환하고 아들을 나중에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등백도(鄧伯道)068) 의 부류로구나."
하였는데, 복양이 아뢰기를,
"일찍이 영릉(英陵)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계문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4월 17일 정묘
전라 좌수사 이민발(李敏發)이 앞바다에서 훈련을 시키다가 전함에 불이 나서 3명이 빠져 죽었는데, 민발이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듣고 치계하여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상이 죽은 자를 위문할 것과 민발을 나문하여 처벌할 것을 명하였다.
송시열과 송준길이 또 사신편에 계를 부쳐 자신을 탓하고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4월 18일 무진
이유태가 부름에 나오니 상이 인견하였다. 도승지 김수흥에게 이르기를,
"잇따라 사관을 보냈는데도 우찬성과 좌참찬은 오지 않으니, 서운한 마음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승지를 보내어 가서 전유하게 하되 전유하는 뜻은 갈 때에 듣고 가게 하라."
하였다. 유태가 이에 예를 논한 상소를 언급하고, 송시열과 송준길의 편을 들면서 전후에 이론을 제기한 사람을 힘써 배척하고는 상에게 권하기를,
"유신을 예우하여 천위(天位)를 함께 하고, 임용을 하면 그를 신임함으로써 모함하는 말이 끼어들 틈이 없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어찌 이렇게 분란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강학의 직임을 사임하고 또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하였는데, 상이 거듭 달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전 집의 윤선거가 정산(定山)에 도착하여 상소하고 이르지 않으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승지 김우석(金禹錫)을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보내어 하유하였다.
4월 19일 기사
충청도 생원 윤택(尹擇) 등이 상소하여 예를 논하였는데, 내용이 모두 수백 마디나 되었다. 그러나 모두 송시열의 말을 주워모아 유세철의 의논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어 말하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왕의 뜻을 이어 더욱 어진 이를 높이는 성의를 다하여 국가의 원기(元氣)를 배양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신들의 이 의논은 세철과 겨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또 전하께서 단호히 배척하지 못하셨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위로 국가를 위하여 사설(邪說)이 세상을 의혹시킬까 깊이 우려하고, 아래로 유교를 위하여 참언(讒言)이 군자의 행실을 막을까 끝내 두려워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4월 21일 신미
대사헌 조복양 등이 아뢰기를,
"각읍이 빌려주었다가 거두어들이지 못한 곡식은 해마다 모곡(毛穀)을 계산하지 말고 1년치의 모곡만을 받도록 하였고, 감영과 병영의 곡식도 그와 같이 시행하라는 뜻을 재가받아 행회(行會)하였으며, 통영의 곡식도 5년을 기한으로 모곡의 수봉을 정지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통제사 정부현(鄭傅賢)이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예전처럼 독촉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쇠잔한 백성이 조정의 은덕을 다 입지 못하게 하였다 합니다. 그를 엄중히 추고하고, 아울러 삼도(三道)의 도신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여 처치할 근거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달 27일에 환궁할 것을 명하였다.
대사간 정만화 등이 아뢰기를,
"울산 부사 남천택(南天澤)은 입안(立案)을 사칭하여 금화(禁火) 구역인 문종 대왕(文宗大王) 태봉(胎封) 안에 전장(田莊)을 설치하였으니, 크게 법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나문하여 정죄하소서. 경상도의 전임과 후임 감사는 즉시 계문하지 않았으므로 사실을 숨긴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처음 거둥하실 때에 이미 온천신에게 제사를 올렸으니, 효험을 보게 된 뒤에야 어련하겠습니까. 환궁하는 날에 감사하는 제사를 올려야 하겠습니다. 작년에 제사를 올리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잘못된 일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송시열이 또 자신을 탓하며 병을 이유로 오려하지 않았다고 승지 김우석이 돌아와 아뢰었다.
좌참찬 송준길이 부름에 나왔다. 상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작년에는 이곳에 와서 곧 경들과 만났고, 우찬성은 비록 중도에 돌아갔으나 경은 함께 귀경하였는데, 지금은 불행히도 사설(邪說)이 중간에 일어나 경들이 인혐하며 나오지 못하게까지 하였다. 이제 경이 연로한 몸으로 더위를 무릅쓰고 와서 만나주니, 나의 기쁜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하니, 준길도 자신을 탓하고는, 아뢰기를,
"사람의 마음은 같은 법이어서 크게 다르지 않는데, 지금 영남의 무리가 신들의 심사를 이다지도 알지 못하니, 이는 모두가 신의 평소 언행이 남에게 신뢰받지 못해서입니다. 부끄러움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하고, 이어 물러나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그대들로 하여금 원자(元子)를 보양하게 하려 하니, 믿고 의지하는 바가 매우 크다. 또 찬성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경마저 돌아가고자 하니 이 어찌 내가 기대했던 일이겠는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시니 죄를 지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곳에 왔으니 작년처럼 나와 함께 귀경한다면 매우 다행스럽겠다. 내가 경을 보고자 했던 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마음을 털어놓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정세를 진달하고 싶지만 어찌 감히 오늘 곧바로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도신에게 분부하여 참찬의 처소에 양식과 반찬을 보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경상도의 소회(疏會) 유생 신전(申塼)을 앞장서 난을 일으킨 일로 논죄하여 장 일백 도삼년(杖一百徒三年)으로, 정문보(鄭文輔)를 장 팔십(杖八十)으로 조율 판결하니, 따랐다.
4월 25일 을해
무겸 선전관(武兼宣傳官) 남속(南涑)이 온양 아전을 구타하여 기절하였다가 깨어났는데, 간원이 처벌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이미 금령을 세워 놓았는데 이처럼 범하였으니, 호되게 곤장을 쳐서 다른 사람을 경각시키라."
영상 정태화, 우상 허적, 호판 정치화, 충청 감사 임의백(任義伯)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의 역(役)을 견감하는 일을 어떻게 정해야 하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상께서 특명을 내려 견감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년에는 얼마나 견감하였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온양은 전세(田稅)를 모두 감하였고 먼 읍은 수미(收米) 2두(斗)를 견감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역민(役民)이 작년의 배나 되니 한결같이 작년의 예에 따라 견감하고, 경기도 그와 같이 견감하라."
하였다. 의백이 힘써 수군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을 진달하고 추후에 변통하는 방도를 계문하겠다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노인들의 가자(加資)는 한결같이 작년의 예에 따르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사로 하여금 계문하게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계영(辛啓榮)은 인조조(仁祖朝)에 삼사(三司)에 출입했던 신하인데, 지금 나이가 아흔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 사람은 계문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종 1품에 초승(超陞)하라."
하였다. 관원을 보내어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과 판중추 김집(金集)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도승지 김수흥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4월 26일 병자
영상과 우상 및 송준길과 삼사를 명초(命招)하니, 죄수를 소결(疏決)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대신의 진달로 인해 정지하였다. 상이 준길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경과 함께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근거없는 의논을 진정시키고자 해서이다."
하였으나, 준길이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상이, 경자년069) 이후에 제 궁가(諸宮家)가 떼어 받은 곳은 모두 개간의 선후에 따라 본래 주인에게 내줄 것과 고 상신(相臣) 조익(趙翼)에게 치제할 것을 명했는데, 모두 준길이 진달한 것이었다.
우찬성 송시열과 전 정랑 이상(李翔)이 부름에 나왔다. 상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이곳에 온 지 오래도록 서로 만나보지 못하여 내 마음이 서운하였는데, 경이 지금 와서 만나게 되니 나의 기쁨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은 죄를 진 사람인데 성교가 이러하시니, 황공하고 감격스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예를 의논하던 당초에 전혀 신의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었는데, 영남 유생의 상소에 유독 신의 이름을 들어 배척하였으니, 이는 신이 스스로 반성해야 할 바입니다. 어찌 감히 남을 탓하겠습니까. 국조 이래 유생 1천여 명이 연명(連名)하여 처벌을 청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며, 국가가 유생의 상소를 중외에 내걸어 보인 것도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일이니, 이것은 다 신의 죄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스스로 죄가 유독 무겁다고 말하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경이 선왕의 지우(知遇)를 입어 국사를 담당했으므로 그들의 원망을 더욱 많이 받은 것이니, 어찌 이것을 죄라고 하겠는가."
하니, 시열은 매번 자신을 탓하며 처벌을 청하였고, 상도 지극한 정성으로 위로하고 타일렀다. 시열이 아뢰기를,
"기해년에 자의 대비의 복상을 기년으로 정한 이후 사람들의 말이 망극하였으나 신은 그때마다 스스로 반성하였지, 감히 조금이라도 남을 탓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근거없는 의논이 더욱 심합니다. 이것이 어찌 말하는 자의 잘못이겠습니까. 실로 신의 죄입니다."
하고, 힘써 물러갈 것을 청하였다. 상이 반복하여 타이르면서 이르기를,
"내가 굳이 경과 함께 서울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근거없는 의논을 진정시키고자 함이다."
하고, 도신에게 명하여 음식을 보내게 하였다.
4월 27일 정축
송시열과 송준길이 모두 길 옆에서 전송만 하고 물러가고자 하니, 옥당관 이단하(李端夏)와 박세당(朴世堂)이 상차하여 더욱 돈독히 면려하여 뒷수레에 태우고 가기를 청하였고, 승지 김수흥과 김우석도 청대하여 아뢰었다. 상이 승지를 보내 함께 가자는 뜻으로 하유하니, 시열은 어가를 따라 나아가겠다고 대답하고 준길은 목욕을 하고나서 올라가겠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시열에게 말을 내주라고 명하였다.
이날 아침 비가 내리다가 사시(巳時)에 그쳤다. 상이 먼저 행궁을 출발하고 자전의 거가가 뒤따라 출발하였다. 천안에 머물렀는데, 자전이 뒤따라 도착하니 상이 의식대로 공경히 맞이하였다.
온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4월 28일 무인
소사(素沙)에 머물렀다. 송준길이 천안에 도착하여 뒤쳐졌다.
4월 29일 기묘
송시열이 성환(成歡)에 도착하여 상소하고 물러가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4월 30일 경진
상이 비가 조금 개이기를 기다려 거가를 움직이라고 명하고, 백관으로 하여금 모두 우구(雨具)를 갖추도록 하였다.
상이 비를 무릅쓰고 환궁하였다. 자전의 거가가 뒤따라 들어왔다.
대신을 보내어 도성으로 돌아온 것을 종묘에 고하고 제사지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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