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2권, 현종 7년 1666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11.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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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기유

도승지 김수흥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근래에 묘당이 비어 일의 완급을 막론하고 계하(啓下)된 공사(公事)가 회계되지 못하는 것이 매우 많으니 무척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급하지 않은 일은 대신이 출사하기를 기다렸다가 회계하고, 급한 일은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대신에게 가서 의논하여 회계하라."
하였다.

 

8월 2일 경술

대왕 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 원자궁을 같은 날에 옮겼다.

 

8월 3일 신해

김만기(金萬基)를 대사간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지평으로 삼았다.

 

의주(義州)와 철산(鐵山)에 극심한 황재(蝗災)가 발생하였다.

 

8월 4일 임자

집의 김익렴이 아뢰기를,
"남원 부사 김명열(金命說)은 재간과 도량이 직책에 걸맞지 않는 데다가 그의 집이 또 가까이 있으니, 절대로 백성을 바로잡고 제어하지 못할 것입니다. 순천 부사 한정일(韓井一)은 평소 지위와 명망이 없고 일찍이 치적(治績)이 없었으니, 절대로 쇠잔한 백성을 소생시킬 가망이 없습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5일 계축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근래에 가뭄이 극심하고 폭풍이 연이어 불어와 벼가 심하게 손상되어 결실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백성들을 생각하노라면 매우 근심스럽고 애가 탄다. 가을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상규(常規)에 얽매여서는 안 되겠으니 기우제를 지내도록 하라."

 

헌부가, 경자년078)   이전에 개간한 땅을 백성에게 돌려주라는 전계(前啓)를 정계(停啓)하였다.

 

8월 8일 병진

이시술(李時術)을 대사간으로, 조복양(趙復陽)을 대사성으로, 오정위(吳挺緯)를 도승지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가뭄이 이렇게 혹심하여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므로 심리(審理)를 행하고자 한다. 유사에게 말하여 거행하게 하라."

 

정원이 가뭄으로 인하여 하늘을 감동시켜 재앙을 그치게 하는 데 대한 계를 올렸는데, 크게 진작하여 성덕(聖德)을 닦으라는 내용이었다. 상이 우대하는 답을 내렸다.

 

8월 9일 정사

부응교 김만균(金萬均), 부교리 홍만용(洪萬容), 수찬 윤심(尹深)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귀신의 변고가 심상하지 않아 거처를 옮기는 조처가 있기까지 하였고, 가뭄이 이렇게 극심한 데다 태백성이 또 나타나니, 두려워하며 수성(修省)하는 도리에는 필시 적절한 대책이 있을 것입니다. 자주 경연에 납시어 성심으로 학문에 힘쓴다면 실로 성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고, 윤심도 학문에 힘쓰고 신하를 자주 접하라는 뜻으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가뭄이 이처럼 심하여 백성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절박한 근심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경연을 열어 신하를 접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나, 눈병이 수시로 발작하여 신하들의 소망을 저버리고 있으니 진실로 한탄스럽다."
하였다. 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사치의 해는 천재(天災)보다 심하다.’고 했는데, 근래에 여염에 사치가 극심하니, 성상께서 몸소 검소한 덕을 닦는 것만이 인도할 수 있는 방도가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치가 극성하면 민산(民産)이 다 소모되어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되는 근심을 초래하게 되는 법이니, 그 해가 천재보다 심하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8월 10일 무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거둥하여 대신, 금부·형조 당상, 삼사 및 신하들과 함께 경외의 죄수들을 심리하였는데, 경중을 나누어 소결(疎決)하였다.

 

대사헌 이경휘가 아뢰기를,
"의주 부윤 정륜(鄭錀)은 국경 지역을 지키는 신하로서 국경을 넘어오는 사람을 금하지 못하여 끝내 일이 생기게 하였고, 또 뇌물로 쓸 물건을 민결(民結)에서 징수함으로써 크게 변신의 도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은 묘당이 스스로 감당할 것임을 알면서도 제멋대로 공물(公物)을 가지고 통관의 무리에게 뇌물을 주었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않습니다. 전 수원 부사 구문치(具文治)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겁을 먹고 역관의 집으로 달려가 사사로이 뇌물을 주었으니, 참으로 형편없는 짓입니다. 이들을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조사를 받을 때에 역관의 무리가 그때그때의 상황을 즉시 통보하지 않아 끝내 나라의 계책이 전도되게 하였습니다. 이들이 나랏일을 망각하고 저들을 위하였으니 너무나 한심한 일입니다. 만약 중한 법률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훗날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역관 서효남(徐孝男)·현덕우(玄德宇)·장현(張炫) 등을 모두 법률대로 처단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나문하여 정죄하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신하들의 상가(賞加)를 환수하라는 계를 정지하였다.

 

상이 일렀다.
"호판 정치화의 병이 차도가 없다고 하는데, 세폐(歲幣)와 연분(年分) 등은 모두 긴급한 일이고 금오(金吾)의 직책 또한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치화의 본직 및 겸임한 판의금을 개차하라."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오늘날 인재가 귀하니 구신(舊臣)을 임명하도록 도모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윤강(尹絳), 조복양(趙復陽), 이상진(李尙眞), 이정기(李廷虁)는 모두 쓸만한 재목인데 오랫동안 밖에 있었으니 모두 거두어 써야 하겠습니다."
하고, 김만균은 아뢰기를,
"밖에 있는 유신(儒臣)을 제때에 불러들여 재앙에 대응하는 방도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올라와야 한다는 뜻으로 정원이 말을 만들어 하유하라."
하였다.

 

8월 11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경(二更)에 달무리가 지고 유성이 나타났는데 빛이 땅을 비추었으며 소리가 났다.

 

맹주서(孟胄瑞)·이광적(李光迪)을 장령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사간으로, 이완(李浣)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김수흥(金壽興)을 호조 판서로 발탁하여 임명하고 자헌(資憲)으로 품계를 올렸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민생의 대명(大命)이 거의 끊어질 위기에 처하였다. 지금 비록 가망은 없지만 어찌할 수 없다고 버려두고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병 때문에 몸이 성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희생(犧牲)을 바치는 예를 대신 행하게 하였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침에 차라리 죽고만 싶다. 헌관을 뽑아 보내 다시 한껏 정성을 다하여 기우제를 지내게 하라."

 

헌납 김징이 아뢰기를,
"장령 이광적은 어떤 사람과 산을 두고 서로 다투어, 상대가 본부(本府)에 정장(呈狀)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광적은 대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끝내 인혐하여 스스로 논열하지 않고 있으니 매우 염치없는 행동입니다. 그를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경흥인(慶興人)인 역관 유대영(兪大英)이 병으로 죽었는데, 그의 처가 관(棺) 앞에서 목매어 죽었다. 본도 감사가 그의 뛰어난 절개를 장계로 조정에 보고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정표하여 북방의 거칠고 비속한 풍속을 진작시키도록 하였다.

 

8월 12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내가 임금의 재목이 못 되면서 외람되이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조종(祖宗)이 물려준 중대한 일을 실추시킬까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7년 사이에 비와 햇볕이 시절에 맞지 않고 바람과 서리의 피해가 뒤를 이어 닥쳐오니, 가련한 우리 백성들이 사방에서 곤궁을 당하여 죽음을 면하지 못한 자가 모두 얼마인가. 더구나 올 한해는 장마가 졌다가는 또 극심한 가뭄이 닥쳐와 들판이 텅 비어 결실을 거둘 희망이 끊어졌으니, 백성들을 어찌할 것인가. 말이 이에 미치니 심장이 끊어지는 듯하다.
아, 하늘은 어찌하여 나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고 백성들을 구학에 쓰러져 뒹굴게 하여 살려달라고 애처로이 호소하는데도 모른 체한단 말인가. 백성의 부모된 자라면 내 몸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걱정해야 되니, 감히 내게는 재앙이 없다 하여 소홀히 하겠는가. 나라가 의지하는 것은 백성이요,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은 양식이다. 나라에 백성이 없고 백성에게 먹을 것이 없으면서 나라를 제대로 유지하는 자를 보았는가.
아, 하늘이 이렇게 재앙을 내리니, 나는 빨리 허물을 반성해야겠다. 나는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고 더욱 경외하는 도리를 다할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반찬 수를 줄이고 술을 금하는 등의 일을 속히 거행하게 하라. 또 생각하건대, 죄는 실로 내게 있으니 어찌 남을 책망하겠는가. 그러나 오늘의 대소 신료 또한 자신을 문책하고 마음을 합해 조심하고 공경하여 각자의 직책을 다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아, 전에 말을 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아직 그 실효를 보지 못하였으니, 내가 일을 해내기에 부족한 자라고 여겨서인가? 허물이 실로 내게 있으니 다시 누구를 탓하겠는가. 말이 지나치다 하더라도 내가 죄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지를 초안하여 널리 바른말을 구해서 나의 부족한 점을 돕게 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사무치게 간절하여 가뭄을 안타까워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훌륭하신 뜻이 말속에 넘치고 있으니, 하늘의 진노를 돌리고 인심을 감화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신들의 거칠고 졸렬한 문사는 그러한 뜻을 만에 하나도 표현하기에 부족하므로 상례대로 대신 초안하더라도 알맹이 없이 형식만 갖추는 격이 될 것입니다. 곧바로 왕의 말씀대로 중외에 선포하여야 성실로써 하늘에 응하는 도리에 합치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문사가 거칠고 졸렬하여 나의 안타깝고 절박한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하겠으니, 매우 부끄럽다. 나를 대신하여 교지를 초안하라."
하였다. 정원이 강경하게 아뢴 후에 허락하였다.

 

전라도에 7월 6일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11일에 그쳤는데, 하천과 도랑이 넘쳐 흘러 물가에 인접한 논밭 중에 모래에 뒤덮인 곳이 많았다.

 

8월 13일 신유

상이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소결청(疎決廳)의 문서는 지금 막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내사(內司)의 죄인은 원통한 경우가 있더라도 외정(外廷)에서는 알 수 없으니, 그 문서를 소결청에 내주거나 상께서 친히 소결하시어 판결이 지체되는 폐단이 없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사의 죄인은 두세 사람이 있을 뿐이고 심적(沈賊)의 첩은 이미 정배하였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강씨의 내인이 강씨의 유서에 관한 일로 여러 번 무거운 형벌을 받았고, 그 친족으로서 판결이 지체되고 있는 자가 많습니다. 외정에서 모두 그 원통함을 알고 있으나 내옥에 관계된 일이므로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소결청 당상 김시진이 아뢰기를,
"특별히 이들을 풀어주시면 감격하게 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8월 14일 임술

민광소(閔光熽)를 장령으로, 성후설(成後卨)을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검열 이민채(李敏采)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사관이 맡은 일은 당시의 기록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기밀에 관계되는 보고나 변방의 비밀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사관이 알도록 한 것은 그 뜻이 매우 깊고 그 법이 매우 엄합니다. 그러나 근래에 사서(私書)가 반입되는 것이나 밀계(密啓)가 올려지는 것에 대해 사관으로 하여금 미리 알지 못하게 하니, 너무 지나치게 가려 막고 너무 지나치게 염려한 처사입니다. 경솔히 나라의 제도를 무너뜨리는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하단 말입니까. 한 명의 하찮은 신하가 무시당함으로 인해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사국(史局)의 규례를 무너뜨렸으니, 어찌 감히 하루라도 직책을 맡고 있겠습니까. 신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부호군 김수흥(金壽興)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모든 소차(疏箚) 및 장계는 반드시 먼저 사관에게 보이지만, 제도(諸道)의 계본(啓本)·계목(啓目) 공사(公事)와 각사의 초기(草記)와 본원(本院)의 계사는 본래 사관에게 먼저 보이는 규례가 없고 비답이 내려진 뒤에 사관에게 보이는 법이니, 이것은 실로 원중(院中)의 구례(舊例)입니다. 반신(伴臣)의 별지(別紙) 및 신의 계사는 비국의 초기(草記)와 본원의 계사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그것을 사관에게 먼저 보이지 않은 것은 숨김이 있어서가 아니라 구례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사관은 단지 내려지기를 기다렸다가 일기(日記)에 기록하면 그만이며, 혹 안에 머물려두고 내려 보내지 않을 경우에는 내려주도록 여쭈어 사필(史筆)을 갖추면 될 것이니 이 또한 전례가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민채가 상소한 뜻에는 승지가 새로운 규례를 만들어 사서(私書)와 밀계(密啓)를 남몰래 올린 것처럼 여기는 점이 있으니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관의 말은 매우 중대한 데에 관계되므로 태연히 있을 수 없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8월 20일 무진

이숙(李䎘)을 응교로, 남이성(南二星)을 교리로, 이정(李程)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좌상 홍명하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8월 23일 신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때 관동과 경기에 심한 흉년이 들었으므로 역(役)을 견감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등의 일을 의논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기의 세태(稅太)는 반으로 감하고, 수미(收米) 가운데 한전(旱田)에서 거두는 것은 추등(秋等)에서 1말을, 내년 춘등(春等)에서 2말을 감하라. 또 영남 연해지(沿海地)의 쌀 5천, 6천 섬을 관동으로 옮겨 기민을 구제하라."
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근래에 불법 행위를 하는 수령이 많다고 하니 염문(廉問)하는 조처를 취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사로 보낼 만한 자를 뽑아 아뢰라."
하였다. 승지 김만기와 교리 남이성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문종 대왕의 행장을 보건대, 안질로 인하여 대신이 경연을 열지 말도록 청하였는데도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지금 성상께서 비록 환후가 있으시더라도 선조(先祖)의 고사를 본받아 침실 안으로 유신을 불러 들여 수시로 진강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대(召對)라면 경연과는 차이가 있으니, 비록 친히 스스로 읽지는 못하더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만기가 아뢰기를,
"일찍이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별 일이 없는 날에는 취품하게 하되 옥당으로 하여금 동참하여 진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8월 24일 임신

홍중보(洪重普)를 숭록에, 김좌명(金佐明)을 숭정에, 장선징(張善瀓)을 가선에, 유혁연(柳赫然)을 자헌에 가자(加資)하니, 모두 온천에 배종한 공로로 인한 것이었다.

 

8월 26일 갑술

간성(杆城) 백성 13명이 굶어 죽었다고 도신이 아뢰니, 휼전(恤典)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8월 27일 을해

어사로 치장(治裝)한 사람들을 패초(牌招)하여 봉서(封書)를 내주고 각도에 나누어 파견하여 수령의 다스림을 살펴보게 하였다.

 

의주 부윤 성후설이 부임에 앞서 하직 인사를 하였다. 상이 인견하고 수비를 엄중히 하라는 뜻으로 힘써 하유하여 보냈다.

 

8월 28일 병자

좌찬성 송시열과 좨주 송준길이 병을 이유로 오지 않았다고 사관이 돌아와 아뢰었다.

 

평안 병영에 비축된 면포 15동(同)을 함경도로 수송하여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군사를 구휼하라고 명하니, 감사 민정중의 계청을 따른 것이었다.

 

8월 29일 정축

상이 흥정당에 거둥하여 소대하였다. 응교 이숙(李䎘)과 수찬 윤심(尹深)이 《통감》 당 태종기(唐太宗記)를 진강하였다. 승지도 공사를 가지고 들어와 아뢰었다.

 

북로(北路)에 쇄환을 정지하라고 명하니, 기근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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