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2권, 현종 7년 1666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11.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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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무신

유성이 나타났는데 빛이 땅을 비추었다.

 

10월 3일 경술

이단하(李端夏)·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송규렴(宋奎濂)을 정언으로 삼았다. 중시(重試)로 인해 오시수(吳始壽)를 통정으로 품계를 올렸다.

 

상이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겨울철에 우레가 친 변고로 인해 면직시켜줄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재이가 일어나지 않는 해가 없었지만, 오늘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하겠다. 사임하겠다는 말 또한 상례에서 나온 것이니, 지금부터 군신 상하가 힘써 삼가고 협력한다면, 화를 돌려 상서로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재앙을 없애는 데 한 가지 도움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진실로 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하였다. 대사간 강백년이 정부현(鄭傅賢)의 일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함사(緘辭)를 보고 나서 처리해도 늦지 않다."
하였다. 백년이 또 아뢰기를,
"근래에 기율이 엄하지 않아 사치하는 풍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풍조를 없애기 위한 방책을 다 써보았는데도 여염에서 여전히 사치를 숭상하고 있으니, 성상께서 힘써 검소한 덕을 닦으시어 몸소 솔선하신다면 자연히 보고 느껴 감화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10월 8일 을묘

김좌명(金佐明)을 형조 판서로, 김수항(金壽恒)을 대사헌으로, 이원정(李元禎)을 충청 감사로 삼았다.

 

10월 10일 정사

상이 다리 부분에 종기가 나서 침을 맞았다.

 

10월 11일 무오

유성이 나타났는데 빛이 땅을 비추었다.

 

좌상 홍명하가 상차하기를,
"원자가 현재 강독하고 있는 책을 다 마치면 《소학》을 강독해야 하는데, 언해에 잘못된 곳이 꽤 있으니 지금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고(故) 상신 이항복이 일찍이 고 찬성 이이(李珥)가 지은 《집주》 한 질을 올렸는데, 훈국(訓局)에 보내어 약간 부를 인쇄하여 중외에 반포하였습니다. 대개 그 책의 규례는, 《논어》·《맹자》에서 나온 정문(正文)은 모두 주자의 본주(本註)만을 따르고, 그 밖에는 여러 설을 참고하여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여 매우 정밀하게 저울질하고 가늠하였습니다. 다만 그 언해에 있어서는 구본(舊本)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구본은 바로 정유(程愈)의 설에 따라 언해한 것이므로 이 《집주》와 크게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예조로 하여금 유신에게 물어보고 《집주》에 의거하여 언해를 찬정하도록 하여 주와 언해가 서로 어긋나는 곳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예조로 하여금 지방에 있는 유신에게 가서 물어보게 하였다. 대사헌 송준길은 명하의 차자와 같은 내용으로 헌의하고, 송시열과 윤선거는 헌의하지 않았다.

 

10월 12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윤강(尹絳)을 예조 판서로,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오정일(吳挺一)을 판윤으로 삼았다.

 

10월 16일 계해

비국이 아뢰기를,
"사은사의 장계를 보니 ‘청나라 형부 낭중 1명이 김거군(金巨軍)·김대헌(金大憲)과 함께 자문(咨文)을 가지고 봉황성으로 나와 유황을 판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을 체포해 가고자 하는데 이름을 알지 못하니, 최선일(崔善一)을 압송하여 가리켜 줄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도총 도사(都摠都事)로 하여금 선일을 압송하여 거느리고 가서 급히 들여보내 봉황성에 교부하게 하고, 또 괴원으로 하여금 회답의 자문을 만들게 하여 급히 파발에 부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10월 19일 병인

여성제(呂聖齊)를 집의로, 신명규(申命圭)를 정언으로, 이지형(李枝馨)을 통제사로 삼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최근 몇 년 동안 재이가 거듭되어 운대(雲臺)의 글이 끊이지 않고 군읍(郡邑)의 보고가 잇따르고 있는데 보고 듣는 것마다 놀랍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겨울철에 우레가 번쩍이는 것의 경우는 재이 중에서도 특히 큰 재이라 하겠습니다.
아, 천도는 어긋남이 없어 사람의 행동과 상응하는 재앙을 내리지만 꾸짖는 뜻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상의 뜻이 확고하지 않고 대체가 정해지지 않아 모든 관료들이 해이해지고 온갖 일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하늘이 우레로써 놀라게 하여 분발하고 진작시켜 쓰러져가는 국운을 되돌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성상의 학문이 독실하지 않고 경연을 오랫동안 열지 않아 실질적인 공부가 진보되지 않고 다스림에 근본이 없기 때문에 하늘이 우레로써 놀라게 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학문에 힘써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연마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성상의 도량이 넓지 못하고 언로가 막혀 아첨하는 습관이 이루어지고 강직한 자가 용납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이 우레로 놀라게 함으로써 수렴하고 받아들여 좋은 말이 숨어 버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기근이 계속되고 부역이 과중하여 곤궁한 백성이 생업을 잃고 원망과 비난이 비등하기 때문에 하늘이 우레로 놀라게 함으로써 숨은 병폐를 제거하여 백성을 소생시키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형벌이 비웃음을 당하고 예법이 닦여지지 않아 죄를 지은 자가 법망에서 빠져나가기도 하고 청렴한 사람이 존경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이 우레로 놀라게 함으로써 크게 출척(黜陟)을 밝게 하여 세도(世道)를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도 이 시점에 하늘의 뜻을 받들어 더욱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재앙을 없애고 화를 그치게 하는 대책을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우대하는 답을 내렸다.

 

10월 21일 무진

대사간 강백년(姜栢年), 정언 신명규(申命圭) 등이 아뢰기를,
"장흥 부사 한공신(韓公信)은 탐욕스럽고 방종하기가 더할 수 없습니다. 전세(田稅)와 대동미를 봉납(捧納)할 때에 친히 창고 안에 앉아서 바치는 자로 하여금 말질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받고 난 후에 또 추가로 징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말질하여 남는 것을 사용(私用)으로 돌렸습니다. 또 봄에 호적 정리를 하는 때에 지가미(紙價米)를 지나치게 많이 거두어 거의 4백여 석(石)에 달하였습니다. 신(臣) 명규가 호남을 왕래하면서 읍민이 마치 수화(水火)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실상을 목격하였으니, 법률로 다스리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나문하여 정죄하소서.
임실 현감 홍진(洪璡)과 진안 현감 이규명(李奎明)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평판이 있고 원망하는 백성이 많습니다. 모두 파직하소서.
근래 서참(西站)에서 뇌물을 지나치게 제공한 일로 도신(道臣)과 만윤(灣尹)이 모두 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병사(兵使) 이지형(李枝馨)은 같은 죄를 지었는데도 혼자만 벌을 받지 않았고 지금 또 발탁하여 통제사의 직책에 임용하니, 상벌을 내림에 있어 조금도 원칙이 없는 것입니다. 그를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으나 지형의 일은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2일 기사

부교리 홍만용(洪萬容)·심재(沈梓), 수찬 김석주(金錫胄) 등이 재이로 인하여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처음 보위에 오르시던 때에 슬기로운 자질이 일찍부터 뛰어나 아름다운 명성이 드러났었으니 전대(前代)보다 시작을 한결 훌륭하게 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이미 잃고 말았습니다. 근년에 요망한 혜성이 경고의 뜻을 보이자 전하의 마음이 경동되어 뭇 신하들을 불러모아 대대적으로 방도를 물으셨고 보면 재앙을 돌려 상서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 또한 이미 잃고 말았습니다. 지난 여름 온천에서 돌아오시던 때에 숙환(宿患)이 이미 나아 있었고 구학자(舊學者) 또한 이르러, 뜻과 기상을 가다듬을 수 있고 덕과 지혜를 정진할 수 있었고 보면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 또한 잃고 말았습니다. 만나기 어려운 기회는 다가오자마자 지나가버리고 쓰러지기 쉬운 정치는 움직일수록 상황이 더욱 나빠지기만 하니, 이것이 신들이 마음속으로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스스로 힘써서 뭇 벼슬아치들을 면려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먼저 마음에 맹세하기를 ‘재앙은 반드시 놀면서 편하게 지내는 데에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니, 먼저 기욕(嗜欲)을 물리치고 나태함을 징계하여 내 몸부터 과실이 없는 경지에 서게 할 것이며, 백성의 괴로움을 살피고 막히고 가려진 일을 해결하여 사방이 내 집안과 다름이 없게 하리라.’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서 자주 경연을 열어 강구하고 연마하는 자료로 삼고 큰 강령을 장악하시어 쓰러져가는 기강을 진작시켜, 이로써 재상을 면려하여 백성들을 구제하고 천명을 이어가는 대책에 힘쓰게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만 하신다면 오늘의 위태로움이 평안함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천재 지변과 물괴 인이(物怪人異)가 달마다 생기니, 가만히 반성해 보건대 그것은 오로지 내가 덕이 없는 때문이다. 근심스럽고 두렵고 부끄러움을 진실로 어디에 비겨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차자의 내용을 보건대, 말뜻이 실로 절실하여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이 말속에 넘치니, 내 비록 불민하나 가슴에 새겨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전라도 암행 어사 신명규(申命圭)가 서계(書啓)하기를,
"호남의 대동법은 산읍(山邑)에 불편하다고 하여 혁파하였는데, 지금 염문하느라고 촌락에 드나들다가 비로소 물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큰 읍의 세력있는 집안은 혁파한 것을 편리하게 여기고, 산골의 가난한 집은 모두 다시 시행하기를 원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충분히 검토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등대할 때에 여쭈어 처리하겠다고 회계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3일 경오

간원이, 여론이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에 대한 법률 적용이 너무 가볍다고 비난하는데도 그가 인피만 한 채 물러가 기다리지 않는다고 아뢰고 파직할 것으로 청하였다. 상이 따르지 않고 체차하라고만 명하였다.

 

동래 부사 안진(安禛)이 치계하여 아뢰기를,
"차왜(差倭) 귤성진(橘成陳) 등이 은밀히 역관들에게 말하기를 ‘10여 년 전에 아란타(阿蘭陀) 군민(郡民) 36명이 30여 만 냥(兩)의 물건을 싣고 표류하여 탐라에 닿았는데, 탐라인이 그 물건을 전부 빼앗고 그 사람들을 전라도 내에 흩어 놓았다. 그 가운데 8명이 금년 여름에 배를 타고 몰래 도망와서 강호(江戶)에 정박했다. 그래서 강호에서 그 사건의 본말을 자세히 알고자 하여 서계(書契)를 예조에 보내려 한다. 아란타는 바로 일본의 속군(屬郡)으로 공물(貢物)을 가지고 오던 길이었다. 황당선(荒唐船)이 표류해 오면 즉시 통지해 주기로 전에 굳게 약속하였는데, 지금 통지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억류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성실하고 미더운 도리인가. 차왜가 나오면 반드시 서울에 올라가 서계를 올릴 것인데, 본부(本府)와 접위관(接慰官)의 문답이 예조가 답한 서계와 다르지 않아야 일이 어긋나는 단서가 없게 될 것이다. 또 도주(島主)와 강호의 집정자 사이에 틈이 있는데, 이번 일은 매우 중대하여 만약 서로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도주가 먼저 화를 입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회계하기를,
"장계에 말한 아란타 사람은 몇 년 전에 표류해 온 만인(蠻人)을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복색이 왜인과 같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무슨 근거로 일본으로 들여보내겠습니까. 당초에 파손된 배와 물건을 표류해 온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였으므로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숨길 만한 일도 없습니다. 차왜가 오면 그대로 답하면 그만입니다. 역관을 시켜 복장과 말이 왜인과 같았는지를 한번 물어보고 그들의 답을 들은 다음에 만인의 실상을 갖추어 언급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4일 신미

이하(李夏)를 정언으로, 정치화(鄭致和)를 예조 판서로, 오시수(吳始壽)를 승지로, 박경지(朴敬祉)를 평안 병사로 삼았다.

 

10월 25일 임신

대사헌 김수항이 재이로 인하여 상차하였다. 성상의 마음을 광명 정대하게 가져 치우치거나 가리움이 없도록 하라는 것과 정령(政令)의 완급과 경중이 제대로 되도록 하라는 것으로 권면하고, 또 신하를 가까이 접하고 궁궐의 기강을 엄히 하라는 내용이었는데,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렸다.

 

10월 26일 계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여 표류해 온 만인에 관계된 서계에 응답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만인이 도망간 일이 아직 보고되지 않았으니, 지방관을 적발하여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상이 본도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게 하여 죄를 다스리라고 명하였다. 공조 참판 이시매(李時楳)가 아뢰기를,
"신이 후릉(厚陵)080)  을 봉심하였는데, 사대석(莎臺石), 병풍석(屛風石), 상석(裳石) 등에 간혹 잡석(雜石)을 사용하였고, 망주석(望柱石)과 양·마(羊馬)는 체제가 단소(短小)하고 조각도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개수하려면 반드시 전부 고쳐야만 미진한 점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당시에 일을 맡았던 신하가 어찌 감히 이렇게 신중히 하지 않았겠습니까. 혹시 유명(遺命)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 일이라 자세히 알기 어렵지만, 만약 유명이 있어서 그렇게 하였다면 이제와서 개수하여 지나치게 화려하고 크게 하는 것 또한 미안한 일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유명이 있었다면 반드시 어디엔가 기록되어 있을 것이니, 사관을 보내 실록을 상고해 보게 하라."
하였다. 대사헌 김수항이 아뢰기를,
"조정의 체면이 날로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지사 유혁연(柳赫然)은 감히 편복차림으로 대신을 찾아갔으니, 체모나 전례로 보아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하였다.

 

박경지(朴敬祉)를 통제사로, 이도빈(李道彬)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10월 28일 을해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이익(李翊)을 응교로, 이단하(李端夏)를 부수찬으로, 조성보(趙聖輔)를 지평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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