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병오
상이 승지를 보내어 삼공을 돈유하였다. 영상 정태화, 좌상 홍명하에게 유시하기를,
"아, 몸을 다한 충성심으로 말하면 경은 실로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고 의지하고 믿는 정성으로 말하면 나는 훌륭했던 임금들에게 그다지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정의 풍습은 날로 낮아지고 세도는 날이 갈수록 흐려져서 나이 젊은 대간들이 서로 과격한 것만 힘쓰면서 우상에게 죄를 만들어서 동이(同異)의 자취를 엄폐하려 하고, 경들까지 아울러 거론하여 현혹시키는 계교를 부리고자 한 바람에 정승 자리가 텅텅 비게 되었다. 이에 분위기가 쓸쓸한데도 마치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고 전혀 개의하지 않으니, 이는 진실로 어떤 조짐이며 어떤 사기(事機)란 말인가. 당시의 일을 내가 감당했던 것은 혼자서 마음으로 결정한 것이지 남과 도모한 것이 아니었으니 경들이 쟁집한다고 해서 흔들릴 수 있었겠는가. 그 말에 대해서는 비록 많이 쟁변할 것은 없지만 그 조짐은 막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미 부박한 무리들을 잡아다가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였다. 경들이 만일 이 일로 기분 나쁘게 여겨 선뜻 마음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세 조정에서 특별히 받은 은혜를 저버리는 결과가 될 터인데 어찌하겠으며, 국가를 위한 큰 계획에 오점을 남길 터인데 어찌하겠는가. 속히 조정으로 돌아와서 지극한 나의 소망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이원정이 지어 올린 것이다.】 우상 허적에게 유시하기를,
"아, 오늘날의 일을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사문하는 일로 떠들썩하던 당시 경은 나에게 감당하지 말라고 권하였는데, 경의 말이 아직도 나의 귓가에 맴돈다. 경이 사신으로 떠날 때 내가 별도로 유시한 바가 있었으니, 경도 반드시 내가 한 말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한 것인데, 어찌 한때의 부박한 말 때문에 의심하여 멀리해서야 되겠는가. 대간이, 사신으로 갔던 신하가 힘껏 쟁집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을 하는데, 이는 내 뜻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저쪽의 형편도 모르고 한 말이다. 또 장황한 치계로 통역한 무리들에게 공을 돌렸다는 것으로 말들을 하는데, 이는 더욱 경의 본뜻을 알지 못한 것이다. 경의 마음을 내 이미 통촉하였는데 나의 성의를 경은 어찌 알아주지 않는가. 시비를 내 마음으로부터 판단하여 경망한 무리들을 이미 먼 곳으로 귀양보냈으니, 경에게 무슨 혐의할 일이 있겠는가. 속히 조정으로 돌아와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승지 심세정이 지어 올린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4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여, 양사의 관원이 모두 귀양가고 승지 두 사람도 잡아다 국문하게 하였는데 관대함을 베푸셔서 속히 위엄을 거두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응교 심재, 교리 윤심·오두인, 부교리 홍만용, 수찬 이정·홍주삼 등이 상차하기를,
"이번에 양사가, 전에 없던 수치를 처음 보고 군주가 모욕을 당하는 통탄스러움에 격분한 나머지 점점 확대되어 이 지경에 이른 것인데, 깊이 죄줄 것이 있겠습니까. 승지의 경우도 갑자기 하문을 받고 당황하여 대답을 잘못하기는 하였으나 그 본정을 따져보면 전혀 다른 뜻은 없었고 형제의 혐의가 있어서 전지를 받들지 못하였는데 어찌 이것이 임금의 명을 거스린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박장원·이단석이 특명으로 파척된 경우는 노여움을 남에게까지 옮긴 것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실 것입니다. 아울러 성명을 거두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2월 2일 정미
승지 심세정이 삼공의 말로 돌아와 아뢰었는데, 영상 정태화는 아뢰기를,
"신이, 합계가 제기되었다는 말을 듣고 몸을 이끌고 성밖으로 나가 삼가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곧이어 양사가 찬출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이 죄를 진 것으로 인하여 이런 거조가 있게 되었으므로 즉시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엄한 꾸지람이 죄를 진 신에게는 내려지지 않고 반대로 양사의 관원에게 미치었으니, 신의 죄가 더욱 무거워 용납받을 수가 없을 듯합니다."
하고,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죄는 만 번 죽어도 속죄할 수 없습니다. 오직 속히 죽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을 뿐입니다."
하였다.
2월 3일 무신
그전에 시강원이, 왕세자가 종묘에 전알(展謁)하게 하기를 계청하자,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승의 자리가 모두 비어서 오랫동안 의논을 수렴하지 못했는데, 이때 이르러 영중추 이경석이 헌의하기를,
"왕세자의 체기가 더욱 건강해지고 민간이 깨끗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좋은 날을 잡아 큰길로 가서 의례에 따라 차분하게 예를 거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의논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때 이조 판서 김수항이 사직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참판 조복양, 참의 민유중이 정청(政廳)에 나아가 아뢰기를,
"양사를 귀양보내라는 명이 내리던 날 옥당이 그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본조에서는 품정(稟政)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저께 정원이 말하기를 ‘옥당의 차자에 귀양보낸 사람의 직명(職名) 위에다가 전(前) 자를 썼으니 속히 품정해야 한다.’고 했고, 또 하리가 와서 말하기를 ‘전지가 이미 본조에 내렸다.’ 하므로 전례대로 품정하였습니다. 지금 신들이 정청에 나와서 비로소 들으니 귀양보낼 사람에 대한 전지(傳旨)는 단지 금부에만 내렸으며 본조에서는 현재 전지를 받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정규(政規)에는 비록 보통 관리라 하더라도 반드시 체차하라는 전지가 있은 연후에야 비로소 대임자를 낼 수 있는데, 더구나 대간은 사체가 특별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귀양가라는 명을 받았으면 응당 고신(告身)을 빼앗길 것인데, 체직하지도 않고 파직하지도 않았다고 해서야 되겠는가. 말썽을 피하려고 감히 이것으로 아뢰었으니 의도가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 중하게 추고하고, 잡혀가 있는 승지까지도 아울러 일시에 그 대임자를 차출하라."
하였다.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김익렴(金益廉)을 집의로, 심유(沈攸)·이동로(李東老)를 장령으로, 안숙(安塾)·박순(朴純)을 지평으로, 이숙달(李叔達)·권두추(權斗樞)를 정언으로, 최일(崔逸)을 헌납으로, 강유(姜瑜)·송시철(宋時喆)·이시술(李時術)을 승지로 삼았다.
2월 4일 기유
정언 이숙달(李叔達)이 산송(山訟) 문제로 남의 무함을 받아 성명이 현재 송사의 문건 안에 들어 있다는 것으로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처치하여 면직되었다.
헌납 최일(崔逸)이 인피하기를,
"합계에 ‘대신(大臣)이 힘껏 쟁집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으니, 신은 삼가 두렵습니다. 사문(査問)을 당할 당시에 신은 본직에 있으면서 성상이 스스로 감당하시는 것을 목격하고도 끝내 구원하여 바루는 말을 한 마디도 못하였습니다. 가사 신이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면 이는 불충이요, 몰라서 말하지 않았다고 하면 이는 의리에 어두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장차 남에게 규정을 받게 되었는데 어찌 감히 얼굴을 들고 대관의 자리에 앉아 대신이 힘껏 쟁집하지 않은 죄를 논열하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이경억은 현재 추감(推勘)을 당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다. 정언 권두추, 장령 이동로는 합계에서 언급된 사람 중에 상피할 사람이 있어서 감히 가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인피하니, 처치하여 모두 면직하였다.
집의 김익렴, 지평 안숙 등이 아뢰어, 양사를 찬축하도록 한 명과 두 승지를 잡아다가 문초하도록 한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듣지 않았다.
2월 6일 신해
좌승지 강유(姜瑜)와 동부승지 이시술(李時術)이 모두 병으로 면직되었다.
이때 이판 김수항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내리지 않았고, 참판 조복양, 참의 민유중이 모두 식가(式暇)로 나오지 않았다. 정원이 참판과 참의를 패초할 것을 청하니, 상이, 판서의 상소에 대하여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고, 이어 패초하여 정사를 열게 하고서 하교하였다.
"근래에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여 체통이 크게 무너졌다. 전조(銓曹)의 당상이 식가를 핑계대고 모두 정사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데, 만약 기공복(朞功服)에 성복(成服)을 하기 전인 경우가 아니라면 어찌 감히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더구나 참의는 직책상 하관이므로 더욱 핑계댈 곳이 없는데 끝내 나오지 않았으니, 교만스럽고 자존하는 모습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조복양은 중하게 추고하고, 민유중은 파직 추고하라."
판서가 정사를 열어, 이준구(李俊耉)·박정(朴烶)을 승지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이동명(李東溟)을 헌납으로, 소두산(蘇斗山)을 장령으로, 이단석(李端錫)·신후재(申厚載)를 정언으로, 홍주삼(洪柱三)을 교리로, 윤강(尹絳)을 예조 판서로, 이경억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함경도에 우역(牛疫)이 크게 성하여 수없이 많은 소가 죽었다.평안도 양덕(陽德)·맹산(孟山)·영변(寧邊) 등의 읍에는 큰 눈이 와서, 민간인 17명이 눈더미에 깔려 죽었다.
2월 7일 임자
전라도 유생 윤제민(尹濟民) 등이, 이이와 성혼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승지 박정이 병으로 면직되었다.
정언 신후재가, 합계에서 언급된 사람 중에 상피할 일이 있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처치하여 면직되었다. 신후재는 곧 우상 허적의 생질이다.
2월 9일 갑인
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사직서를 올려 면직되었다. 이원정이 영상과 좌상에게 내린 돈유문(敦諭文)을 대신 지을 적에 대관(臺官)을 배척한 말이 있었는데, 당시의 논의가 그르게 여겼기 때문에 스스로 편치 못하게 여겨 사면한 것이었다.
사간 이후(李垕)가 인피하기를,
"지금 사문할 당시의 얘기를 듣건대 합계의 내용이 크게 사실과 맞지 않았다고 하니, 신이 모호하게 연계(連啓)한 죄는 만 번 죽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날의 일을 듣자니 저도 모르게 놀랍고 뼈에 사무쳐서 눈물을 삼키게 됩니다. 천지 사이에 하늘의 이치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로 가장 큰 것은 군신간의 의리입니다. 그런데 당시 영상 정태화는 심지어 통역한 자가 말한 ‘성상께서 스스로 감당하시면 잘 될 것이다.’는 말을 감히 성상께 말씀드려 스스로 빠져나갈 소지로 삼고 은연중에 지극히 높으신 임금께 돌리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만약 후일에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이보다 더 크게 발생했을 경우 신하의 죄를 상에게로 돌리려 한다면 전하께서는 매번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상 허적의 경우도 전례를 끌어다 상의 앞에서 말하였는데 자기의 죄를 상에게 돌리려 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역시 어찌 차마 신하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진주(陳奏)할 때 제대로 주선하지 못한 것은 공죄(公罪)입니다. 단지 대신이 죄를 벗어나는 것만 다행으로 여기고 임금이 벌금을 내는 것이 통탄스러운 것인 줄 모르고 장황하게 치계하여 먼저 역관의 공을 논하였습니다. 벌금이 임금에게 미치는 일은 전에 없던 치욕이므로 당연히 대죄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느 여가에 역관의 공을 논한단 말입니까. 군신간의 의리에 대해 아주 꽉 막혔다 하겠습니다.
좌상 홍명하는 자기가 죄를 자인하는 뜻으로 누차 탑전에서 간쟁하였으며, 성상께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역관의 말이 나왔을 때 ‘선조(先朝)의 일은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어찌 신들의 죄를 가지고 이런 거조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니, 이 말은 전하께서 직접 들으신 것이며 그 당시 입시했던 신하들이 목격했던 일인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뭇 의론이 ‘영상과 우상의 죄는 모두 율을 잘못 적용했으며, 좌상의 경우는 끝까지 힘껏 쟁집하지 않은 죄가 진실로 있으나 그렇다고 똑같은 죄로 처리한다면 역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기에 신이 곧 이러한 뜻을 헌부의 여러 관원과 상의하였으나 의견이 엇갈려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다른 사람의 계초(啓草)를 옷소매에 넣고 다니면서 날마다 번독스럽게 하니,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집의 김익렴, 장령 심유, 지평 안숙 등이 인피하기를,
"이후가, 정태화에 대해 의율한 것이 너무 가볍다는 것으로 모인 좌석에서 발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생각에는 지금 양사가 논한 것은 단지 신하로서 끝내 스스로 감당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으니 이는 의리의 큰 관건입니다. 어찌 갑자기 근거없이 떠도는 말로 인하여 둘로 나누어서 경중의 차이를 둘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의견은 끝내 남을 따라 구차하게 굽힐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이단석도 이 일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인심이 바르지 못한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요즘 문제되는 이 일은 전파된 지 이미 오래이니, 그가 어찌 최근에서야 들어서 알았겠는가. 나의 뜻을 엿보아 교묘한 꾀로 농락하려는 작태를 진실로 감출 수가 없다. 이후를 우선 파직하라."
하니, 정원이 복역하고서 신구하여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니, 상이 이르기를,
"이후의 죄는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곡산(谷山)의 백성 13명과 양덕(陽德)의 백성 4명이 눈에 깔려 죽고, 의흥(義興)·신령(新寧) 등 읍에 지진이 발생하였는데, 세 도의 감사가 알려온 것이다.
2월 10일 을묘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후가 의리를 가탁하여 마음씀이 바르지 못하니, 나는 차마 바로 보지 못하겠다. 임금의 뜻을 엿보아 교묘한 꾀로 농락하려는 작태는 그 죄가 이숙보다 심하니 비단 파직만 하고 그칠 일이 아니다. 극변에 멀리 귀양보내서 마음씀씀이가 바르지 못한 자를 징계하는 경계가 되게 하라."
하니, 정원이 또 복역하여 재삼 힘껏 신구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강유(姜瑜)·이상일(李尙逸)을 승지로, 윤집(尹鏶)을 이조 참의로, 남이성(南二星)을 이조 정랑으로, 이완(李浣)을 공조 판서로, 최유지(崔攸之)를 사간으로, 조성(趙䃏)을 정언으로 삼았다.
교리 윤심, 부교리 홍만용, 수찬 이정이 양사의 인피한 자를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또 차자를 올리기를,
"이후를 귀양보내도록 한 것은 지나친 거조로서 실로 언로가 막히는 데 관계됩니다.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후를 온성(穩城)으로 귀양보냈다.
2월 11일 병진
집의 김익렴, 장령 심유, 지평 안숙 등이 인피하기를,
"대신에 대해 죄를 청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대하니 떠도는 말을 가지고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 됩니다. 신들이 이후의 말에 이견을 내세운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이 이미 간신(諫臣)들이 인피한 글에 나왔으니 덮어두어 사람들의 마음에 의혹만 가중시킬 수 없으므로 신들이 《정원일기(政院日記)》를 고증해 보았더니, 지난해 10월 8일에 모화관 막차에서 인견할 때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삼달(金三達)이 우리 나라를 위하여 거짓으로 정성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하기를 「서백(西伯)이 묘당과 더불어 감당하게 되면 사세가 고단하겠지만 만약 주상이 스스로 감당하시면 신하의 죄는 필시 가벼워질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그 사람의 말을 빌어 감히 성상에게 스스로 감당하라는 말을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가 감히 할 말이겠습니까.
우상 허적이 예(例)를 끌어대었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비록 미처 상고해 내지 못했지만, 복명으로 인대하던 날에 ‘황제도 벌금을 내는 규례가 있다.’ 하였습니다. 아, 설령 청나라에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혐의로워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인데, 사신으로 가 임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죄를 해명하고자 하여 은연중에 벌금 내는 일을 치욕이 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듯이 하였으니, 이것이 신하로서 감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신들은 당초 이런 사실이 있는지도 모르고 단지 큰 의리로 범범하게 죄를 청했었는데, 지금 이 말을 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싹해지고 매우 놀랐습니다. 신들이 분명한 증거를 상고하지 못하여 임금을 높이고 명분을 바로잡으려는 논의로 하여금 사실과 어긋난다는 추궁을 면치 못하게 하였습니다. 파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신은 기록한다. 김익렴은 필선으로 있을 때 정원에 가서 가주서(假注書) 이제(李璾)가 기록한 병오년 사사(査事) 때 영상이 진달한 말을 살펴보고서 외부에 전파하여 그 논의가 격렬해지게 하였다. 그러다가 헌직(憲職)에 제수되자 망설이며 관망만 하다가 먼저 밀소(密疏)를 올려 "저 사람들이 비록 우리 나라에 합계에 대한 논의가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평소에 예의가 있는 나라로 일컬어져 왔으므로 필시 후환은 없을 것입니다."는 등의 말로 일찍이 상의 의중을 시험하였다. 그 뒤에 이후와 조방(朝房)에서 회의할 때에 《일기(日記)》를 매우 정녕하게 논증했었는데, 이에 계교하려는 마음을 내어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이리저리 다 써가며 그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떠도는 말이라고 핑계대고 짐짓 이견을 내세웠다. 이후가 죄를 받게 되자, 물의에 죄를 얻을까봐 또 인피하면서 자신도 직접 보았었던 사실을 감추려고 정원에 간통으로 물었던 것을 가지고 증거를 삼았으니, 그 마음씀씀이가 바르지 못한 작태를 차마 바로 볼 수 없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42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기록한다. 김익렴은 필선으로 있을 때 정원에 가서 가주서(假注書) 이제(李璾)가 기록한 병오년 사사(査事) 때 영상이 진달한 말을 살펴보고서 외부에 전파하여 그 논의가 격렬해지게 하였다. 그러다가 헌직(憲職)에 제수되자 망설이며 관망만 하다가 먼저 밀소(密疏)를 올려 "저 사람들이 비록 우리 나라에 합계에 대한 논의가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평소에 예의가 있는 나라로 일컬어져 왔으므로 필시 후환은 없을 것입니다."는 등의 말로 일찍이 상의 의중을 시험하였다. 그 뒤에 이후와 조방(朝房)에서 회의할 때에 《일기(日記)》를 매우 정녕하게 논증했었는데, 이에 계교하려는 마음을 내어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이리저리 다 써가며 그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떠도는 말이라고 핑계대고 짐짓 이견을 내세웠다. 이후가 죄를 받게 되자, 물의에 죄를 얻을까봐 또 인피하면서 자신도 직접 보았었던 사실을 감추려고 정원에 간통으로 물었던 것을 가지고 증거를 삼았으니, 그 마음씀씀이가 바르지 못한 작태를 차마 바로 볼 수 없다.
정언 이단석이 인피하기를,
"방금 헌부가 인피한 내용을 보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회의할 때 이미 동참하였으나 처음에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으니, 그 사실을 캐내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양사가 피혐한 계사를 들인 후에 오랫동안 비답이 내리지 않았었는데, 저물녁에 이르자 상이 명하여 김익렴·심유·안숙을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인피한 내용에 인증한 《일기》의 말은 태반이나 내가 듣지 못했던 것들이다."
하니, 김익렴이 나아가 아뢰기를,
"근거없이 나도는 말을 믿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신들이 전례에 의거하여 정원에 간통으로 물으니 정원에서는 극비의 일이어서 누설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대간이 알고자 하는 실상에 관해 상고하여 제시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법에 따라 간통하였더니 주서가 비로소 상고하여 보내 주었는데 신들은 그 내용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후가 인피한 말이 이미 저러하고 《일기》의 증거가 또 이러하니, 신이 어찌 인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때 혹 역관의 말로 인해 이러쿵저러쿵한 일은 있었지만 이른바 신하의 죄가 필시 가벼워질 것이라고 한 말은 나는 실로 듣지 못했다. 영상이 어찌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했겠는가. 그 뒤 우상을 인견했을 때 내가 ‘대신이 죄를 면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했더니, 우상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비록 이와 같으나 신이 사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성상에게 벌이 미치게 하였다.’라고 하며 인책하고 대죄하기에, 내가 위로하였다. 이어 그곳 사정을 물으니, 우상이 그곳 사정을 갖추어 진달하고 이어 서로 벌금을 무는 풍습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그 사이의 얘기는 이 정도에 불과했는데 자세히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다만 그 말하던 형세로 미루어 볼 때 말을 구사하는 사이에 우연히 전하게 된 말인 듯하다."
하였다. 김익렴이 아뢰기를,
"신이 또 듣건대, 우상이 좌상에게 말하기를 ‘저들이 심양에 있을 때 황제와 여러 왕이 잘못이 있으면 서로 벌금을 낸다.’고 하였다는데, 우상이 탑전에서 진달한 것이 혹시 이런 것이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말이 과연 그러했다."
하였다. 김익렴이 아뢰기를,
"신들은 현재 인피 중에 있습니다만 이미 사대(賜對)를 받았으니 감히 소회를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당초에 역시 이러한 합계의 논의가 있고 심지어 간통으로 문의한 일까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문자로 번거롭게 할 필요없이 뵙기를 청하여 곡절을 상세하게 진달하려 했었는데, 한 사람의 논의가 끝내 실행되지 못하여 시끄러움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점점 확대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은 실로 한스럽습니다. 다만 그때 영상이 비록 역관의 말로 인하여 진달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미 임금이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말을 감히 하였으니 공론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한때의 시비는 덮어두기가 어렵고 사람들의 답답해 하는 심정이 풀리지 않고 있으니, 속히 처치를 내리셔서 수습하게 하신다면 실로 국가의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글을 보는 법은 반드시 위아래를 전체적으로 본 후에야 글 뜻을 알 수 있다. 만약 위아래 말을 잘라버리고 그 가운데 몇 마디 말만 가지고 본다면 위아래가 서로 연속되지 않아 본뜻을 잃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지금 만약 ‘신하의 죄가 필시 가벼워질 것이다.’라고 한 말로 영상의 죄안을 삼고 ‘황제도 벌금을 낸다.’라고 한 말로 우상의 죄안을 삼는다면 역시 원통하지 않겠는가. 그대들이 비록 당초에 힘껏 간쟁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을 하지만 내가 이미 스스로 책임질 뜻을 정해 놓고 있었는데 어찌 간쟁한다고 해서 그 뜻을 돌릴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김익렴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두 정승의 말이 또한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신들은 다 듣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은 더러 역관의 말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과연 영상이 말했는지는 역시 기억할 수 없다. 우상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우연히 언급된 말이니, 만약 ‘황제도 역시…있었다.’고 했다 한다면 ‘역시’라는 글자의 뜻을 마땅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일기》에 이러저러하다고 한 말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당초에 설혹 역관의 말로 전달하였더라도 이 말은 이른바 망발과 같은 종류이다. 이것으로 죄를 준다면 그것이 어찌 인정이겠는가."
하였다. 김익렴이 아뢰기를,
"이는 망발 중에서도 큰 망발입니다만 어찌 망발이라고 핑계대고 논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경우라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그 혐의를 안고 있는 당사자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단석이 아뢰기를,
"비록 혐의가 없다 하더라도 신하된 자가 어찌 차마 이런 말을 임금 앞에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결코 실정이 아니다. 죄명이 가볍다면 대관의 합계를 오히려 따를 수 있겠지만 죄가 실정에 맞지 않으니 결코 윤허할 수가 없다."
하였다. 김익렴과 이단석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이미 인피하는 글을 올렸으니, 비답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익렴이 아뢰기를,
"영상·우상은 이미 ‘성상이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황제도 벌금을 낸다.’는 등의 말을 하였으므로 그 죄를 좌상과 같이 취급할 수가 없으니, 형벌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고, 이어 심유·안숙·이단석 등과 더불어 합계하여, 홍명하를 체차시키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영상 정태화는 비단 성상께서 스스로 감당하려 하실 때 끝내 힘껏 간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감히 역관이 말한 ‘주상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는 말로 진달하였으니, 임금과 신하의 분의(分義)로 볼 때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을 기록한 것이 소루한 것이지 결코 실정이 아니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진주상사(陳奏上使) 허적은 이미 사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가 있고, 또 복명하기 위해 등대하던 날에 감히 ‘황제도 역시 벌금을 낸다’는 말로 주달하여 마치 수치로 여길 만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할 말이겠습니까. 관직을 삭탈하고 성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익렴·이단석 등이 인피하기를,
"남용익(南龍翼)·맹주서(孟胄瑞) 등은 대신과 차이가 있는데 신들이 범범하게 합계 가운데 아울러 논하였습니다. 체차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이어 이숙(李䎘) 등 세 승지와 조사석(趙師錫)의 일을 아뢰었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이후(李垕)의 일을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단석이 역시 이숙 등 세 승지와 허적, 남용익, 맹주서, 이후의 일을 아뢰었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상이 승지 심세정(沈世鼎)에게 이르기를,
"지난해 사사(査事) 때의 《일기(日記)》가 이렇게 착오가 나니, 몹시 놀라운 일이다. 당해 주서를 파직하라."
하였다. 신하들이 드디어 물러갔는데 자정이 가까웠다.
사신은 기록한다. 상이 김익렴 등을 사대한 것은 대개 실상을 유시하여 근거없는 논의를 진정시키고자 한 것이었는데, 김익렴이 이를 틈타 들어가 아룀에 있어 상의 뜻을 멋대로 헤아려 그 뜻에 맞춰가면서 변론하여 끝내 형벌을 가하라 하고서야 물러나왔다. 그리고는 스스로 우레와 같은 성상의 위엄을 풀고 세상에 보기 드문 공을 세운 것으로 여겨 합문을 벗어나자마자 문득 자랑하는 말을 하였다. 지난번 상의 하교에 이른바 ‘임금의 뜻을 엿보아 교묘한 꾀로 농락하는 자’라는 말은 진정 김익렴을 두고 한 말이라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43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사신은 기록한다. 상이 김익렴 등을 사대한 것은 대개 실상을 유시하여 근거없는 논의를 진정시키고자 한 것이었는데, 김익렴이 이를 틈타 들어가 아룀에 있어 상의 뜻을 멋대로 헤아려 그 뜻에 맞춰가면서 변론하여 끝내 형벌을 가하라 하고서야 물러나왔다. 그리고는 스스로 우레와 같은 성상의 위엄을 풀고 세상에 보기 드문 공을 세운 것으로 여겨 합문을 벗어나자마자 문득 자랑하는 말을 하였다. 지난번 상의 하교에 이른바 ‘임금의 뜻을 엿보아 교묘한 꾀로 농락하는 자’라는 말은 진정 김익렴을 두고 한 말이라 하겠다.
2월 12일 정사
집의 김익렴 등이 아뢰기를,
"주서(注書)가 일기를 수정하면서 비록 착오를 빚은 일은 있으나 이미 요점이 되는 말을 빠드리지 않았는데, 지금 양사가 고출(考出)한 것으로 인하여 당해 주서를 파직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시니, 물정이 모두 미안하다고 합니다. 환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흥부(永興府)의 백성 26명이 눈에 깔려 죽었다. 도신(道臣)이 보고하자, 상이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2월 13일 무오
양사가 앞의 일에 대하여 합계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미 내 뜻을 다 말하였는데, 이렇게 번독스럽게 한 것은 무슨 의견이란 말인가. 천하의 일은 단지 성(誠)이란 한 글자에 있다. 만일 내 말을 믿을 것이 못 된다 하여 논쟁한다면 이는 지난번 만난 자리에서 면유한 것이 헛된 투식이 되어 버리게 하는 것이며, 만일 내말이 비록 성의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선뜻 논의를 정지할 수 없다고 한다면 더욱이 임금과 신하가 서로 아끼는 뜻이 아니다. 아, 대관(臺官)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다같이 나라를 위하는 사람인데, 한갓 마음만 쾌하게 하는 논의를 고집하고 나랏일을 이렇게까지 도외시한단 말인가. 내 말이 우연한 것이 아니니 속히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여, 죄를 받은 여러 사람들을 힘껏 신구하고, 앞서 귀양갔거나 뒤에 귀양간 자와 심문을 받고 있거나 파직된 신하들 및 사관에게 아울러 관대한 은전을 내리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괴이하고 망령스런 말을 나는 몹시 미워한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부교리 홍만용 등이 상차하여, 죄를 받은 여러 신하들을 신구하고 또 속히 합계의 청을 따르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2월 14일 기미
헌부가, 세 승지에게 내린 명을 환수하라는 계사를 중지하였다.
찬선 송준길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양사의 많은 관원이 영상·좌상과 사신으로 갔던 신하들을 논핵한 것으로 인하여 크게 성상의 노여움을 사, 7명의 간신(諫臣)이 귀양가고, 2명의 승선(承宣)이 하옥되었으며, 도헌(都憲) 이하 여러 관원이 대부분 지척을 받고 물러갔다 합니다. 신이 병중에 놀라 일어나 목이 메이도록 장탄식하다가 기가 막혀서 오래도록 안정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아, 성상께서는 필시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실 텐데, 아마도 하늘이 우리 종묘 사직을 뒤엎고자 하여 성상의 마음을 야유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사를 당하던 처음에 전하께서 대신을 온전하게 살리기에 급급하셔서 제후의 존엄을 굽히시고 귀하신 몸을 가볍게 여기시어 이런 전에 없던 거조를 하셨으니, 이것이 실로 온 나라 신민이 원통해서 죽고 싶어하는 바입니다. 당시에 두 대신이 비록 자신의 잘못이라고 대답하였다고는 하나 끝내 조사받던 뜰 아래서 머리를 부수고 피를 흘렸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의 형편은 질실로 밖에 있는 신하가 자세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마는 중외의 여론은 자연 편하게 여기지를 못할 것입니다.
대신이 그 곳에 갔을 때 그들은 전적으로 성상을 견책하고 결국은 편복(鞭扑)의 형벌을 적용할 일로 가하였으니 이게 어떤 치욕입니까. 그들이 갈 때에는 단지 두 신하의 죄만 해명하려 하였고 그들이 돌아올 때에는 치욕을 군부에게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마음에 편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사신으로 간 입장에서는 마땅히 가슴을 두드리며 목숨을 걸고 힘껏 쟁집하여 서로 형벌을 무릅써가며 자기가 대신 벌을 받겠다고 했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허물이 신하에게 있는데 이제 그것을 임금에게 돌린단 말입니까. ‘내가 비록 이것을 받아가지고 돌아가고 싶어도 나는 유사(有司)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나라의 대대로 내려오는 법에 따라 처벌할 것이다. 내가 돌아가서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대로 여기에서 죽겠다.’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뜰에 버티고서서 하루를 기다려도 허락하지 않으면 이틀을 기다리고, 이틀을 기다려도 허락하지 않으면 한 달을 기한으로 하고 한 달을 기다려도 허락하지 않으면 연산(燕山)에다 뼈를 묻을 계획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저들이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역시 군신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니 필시 의롭게 여겨 허락했을 것입니다. 비록 이로 인하여 우여곡절 끝에 다시 두 신하에게로 죄가 돌아가서 두 신하가 끝내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는 명분이 정당하고 말이 순리적이어서 이치에 타당하고 마음에 편안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지 아니하고 어리석게 받들고 돌아와서 또 반대로 그 겸종(傔從)의 노고를 과시하고 마치 이것을 자신의 공인 양하여 은전을 바라는 자처럼 하고 있으니, 너무도 옳지 못합니다.
또 귀양갔거나 죄에 저촉된 신하들을 신구하는 자들이 그 논설을 다하고 있으니, 그 신하들은 비록 먼 변방에서 죽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청아한 이름을 누리게 될 것이니 무엇이 한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만 홀로 사람들의 대단한 기세를 꺾으므로 해서 후세 사람들의 기롱을 감수해야 되는데도 깨닫지 못하시니, 신이 삼가 통탄하는 바이며, 삼가 상심하는 바입니다."
하고, 이어 치사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에게 경이 있는 것은 마치 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으니, 내가 어찌 차마 경을 놓아 두겠으며 경이 어찌 차마 나를 버리겠는가. 더구나 경의 나이는 옛사람이 치사하던 나이에 차지 않았다. 경은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찬선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은 삼가 듣건대, 정신(廷臣)이 일을 논하다가 대부분 무거운 견책을 받았다 합니다. 신도 일찍이 망령스레 그 일을 말하였으니 국법으로 헤아려 보면 마땅히 함께 벌을 받아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죄를 소급해 의논하여 귀양가는 형벌을 똑같이 받게 하셔서 공평하고 밝은 정치를 밝혀 주소서.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당초 면직을 청했을 때 마침 그 일을 듣고 망령되게 우려하기를 ‘옛날 고려 때 원(元)나라의 위엄에 눌려 고유한 예의(禮義)를 지키지 못하여 마침내 호원(胡元)으로 하여금 부자간의 송사를 처리하게 하고 군신간의 옥사를 결정하게 한 결과 비우(妃耦)로 하여금 공공연하게 그 남편을 참소하게 한 일까지 있었으니, 진실로 차마 말 못할 일이었다. 지금은 반드시 갑작스레 이런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겠지만 억세고 간악한 저들의 성품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는데 구습에 젖어 길들여진다면 어찌 오랜 뒤에도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나친 염려를 견디지 못하여 성상의 마음에 경각심을 일으켜 속히 우리의 일을 스스로 강인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시도록 한 것입니다. 구구한 이 마음이 슬프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인혐할 일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올라와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2월 15일 경신
동지사 정지화, 부사 민점 등이 연경(燕京)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중로에서 장계를 올렸다.
"신들이 들어갈 때 계주(薊州) 지역에 도착하자, 양전(量田)을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북경에 도착하여 들어 보니, 호부 상서 및 포정(布政) 두 사람이 잡혀가 교수형을 당했다고 했는데, 대개 양전을 고르게 하지 않아 백성들의 원망을 많이 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2월 17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중추 이경석이 상차하여 이숙 등 여러 사람 및 이후를 신구하고, 청하기를,
"우레와 같은 노여움을 돌리시어 해와 달이 일식·월식을 치른 뒤 다시 회복되듯이 하신다면 천지의 생성하는 덕이 단번에 두루 미칠 것이며 대신들도 스스로 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뜻은 이미 앞서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 유시하였다. 다시 무슨 말을 많이 하겠는가."
하였다.
2월 18일 계해
정지화(鄭知和)를 예조 판서로, 이유상(李有相)을 이조 정랑으로, 민점(閔點)·심재(沈梓)를 승지로 삼았다. 심재는 당시에 응교(應敎)로 준직(準職)을 거치지 않았는데, 상이 특명으로 의망하도록 하여 승지에 제수한 것이다.
수찬 김석주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이숙 등 7인 및 이후의 일을 논하면서 매우 강력하게 신구하고, 끝에 가서 다시 김익렴의 일에 대해 언급하기를,
"익렴은 연달아 합계할 때에 모든 논의할 일을 한꺼번에 계사에 언급했어야 하는데도, 별도의 소를 겸해서 구비하여 결국 동석했던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고 기밀인양 가탁하여 편법으로 전달되기를 급히 요구하였으니 괴상한 그 행위가 이미 광명하고 준걸한 자의 소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후와 함께 조당(朝堂)에서 상의할 때 이후가 말한 것을 모두 수긍하고 심지어 ‘나도 일찍이 이 말을 《정원일기》에서 보았다.’고 하며 그 증명한 것이 정녕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계교심이 생겨 이랬다저랬다 쓸데없는 말을 하였는데, 그 사이의 실정을 상께 다 진달드릴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후가 드디어 격분하여 먼저 인피하니, 익렴이 이어 인피한 계사에 다시 근거없이 떠도는 말이라고 하며 마치 캄캄하여 전혀 들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후가 죄를 받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잘못을 지적하니, 익렴이 재차 인피할 즈음에 일부러 정원에 간통하고서는 마치 처음으로 확실한 증거를 잡아서 부득이 논하는 것처럼 하였는데, 그 말에 ‘이미 직접 들은 말이 아니기 때문에 믿기 어려울 듯하였습니다. 신이 부득불 서로 버틴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처음에는 이런 증거가 있는지 몰랐었는데 지금 이 말을 보니 저도 모르게 한심하고 놀라웠습니다.’ 하였습니다. 아, 대각이 일을 논할 때는 이치상 마땅히 밝고 바르게 해야 할 텐데, 처음에는 증명을 했다가 끝에 가서는 말을 바꾸어 이랬다저랬다 하다가 근거없는 말이라고 둘러댔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발설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면하고 나서는 간통으로 정원에 문의하여 비로소 알았다고 가탁하여 끝내 목격한 자취를 숨겼으니, 이 사람의 마음씀씀이가 바르지 못하고 일에 교묘한 것이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만일 이후가 훗날 다시 수문(修門)에 들어선다면,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이 장차 무슨 얼굴로 다시 이후를 보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2월 19일 갑자
집의 김익렴이 인피하기를,
"김석주가 상소하여 있는 힘을 다해 신을 배척하였으니, 신은 그지없이 놀랍고 황송합니다. 신이 이달 10일에 양사가 회의할 때 이후가 문득 석상에서 발언하기를 ‘영상이 역관 무리의 말을 빌어다가 감히 성상이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을 진달하였으니, 지난번의 합계에서 의율한 것을 지금 그대로 쓸 수 없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이런 말이 과연 있으나 막중한 논의이니 분명한 증거를 얻은 연후에야 말을 덧붙여 형벌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후가 묻기를 ‘요사이 듣건대 집의가 《일기》를 직접 보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지난번 춘방(春坊)에서 숙직할 때 정원에 가서 《일기》 안에 이러이러한 내용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매우 비밀스러운 얘기인데 어찌 감히 이것을 임금에게 진달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후도 그렇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인피한 글 중에 이른바 ‘어찌 근거없이 떠도는 말로 인하여 경중을 가릴 수 있겠는가.’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후가 홍명하를 억울하다고 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임금께서 스스로 감당하려 하실 때 힘써 간쟁하지 못했고 보면 대대적인 논의가 나온 후에는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는 어려울 듯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인피한 글에 이른바 ‘지금 와서 구별하는 것이 과연 될 일인지 모르겠다.’고 한 것도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날 그 자리에 동참했던 양사의 신하들이 신이 이후에게 답하는 말을 직접 들었고 신이 이후를 만류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필시 공정하게 논의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심유, 지평 안숙이 인피하기를,
"양사가 회의할 때 이후가 영상과 좌상을 구별하여 논죄해야 할 것이라는 뜻으로 발언하고 이어 들은 바를 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의견에는, 대신을 논핵하는 것은 일의 체모가 중대하므로 비록 이러저러하다는 말이 있으나 이미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니니 분명한 증거를 찾아내어 다시 더 상의하여 확정하자고 했더니, 이후가 그렇게 여기지를 않고 지레 먼저 인피하였습니다. 대개 이후가 먼저 피혐한 것은 들은 바를 자신한 것이고 신들이 어렵게 여긴 것은 또한 신중히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정원일기》를 상고해 보고서 비로소 이후가 들은 것을 믿게 되어 신들도 즉시 인피하였습니다. 그날 있었던 일은 이 정도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때 김익렴의 생각과 태도가 과연 김석주가 말한 대로였다면 신들이 분하게 여겨 미워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텐데 어찌 그와 같이 연명(聯名)하려 했겠습니까. 익렴이 배척받은 말이 모두 실정 밖의 일이고 보면 익렴의 마음에도 부끄러운 바가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같은 자리에서 직접 들은 사람으로서 어찌 익렴만 공격받도록 두고 스스로 배척받는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2월 20일 을축
정언 이단석도 이 일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교리 오두인(吳斗寅) 등이, 인피한 양사의 관원을 처치하기를,
"인피한 말에서 자신을 해명한 것이 상세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이후가 발언할 때 김익렴이 이미 ‘이런 말이 과연 있으나 분명한 증거를 얻어야만 한다.’고 했고, 또 ‘마침 정원에 가서 《일기》 안에 이러저러한 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고 하였으니, 어찌 즉시 《일기》를 상고해 보지 않고 끝내 이견을 내세우다가 직차에 나아간 후에 비로소 이후의 말을 끝내 덮어두기 어렵다고 하고 전례에 의거하여 간통으로 물은 것인가 하는 이 한 조항은 남의 말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고 또 비밀히 상소한 거조는 더욱 부당한 일인 듯합니다. 전후의 인피한 사람들도 이미 더불어 같이 일을 하였으니, 형편상 그대로 있기 어렵습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2일 정묘
이흥발(李興浡)을 장령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지평으로, 홍만형(洪萬衡)을 정언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집의로 삼았다.
왕세자가 처음 서연(書筵)을 열어 《동몽선습(童蒙先習)》을 강하였다.
2월 23일 무진
왕세자 책례에 따른 별시에 대하여, 모두 서울에 모아 강경(講經)은 제외하고 3소(所)로 나누어서 각각 2백 명을 뽑도록 판하하였다.
지평 박순(朴純)이 인피하기를,
"신은 두 정승의 죄를 논의할 때 의견이 같지 않았습니다. 주대(奏對)한 말이 비록 과연 운운한 하는 것과 같다고 하더라도 이 역시 말의 실수였지 어찌 본뜻이었겠습니까. 사신으로 갔다온 대신들이 진달한 것도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일 뿐이니 자신의 죄의 유무가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고의로 말하려 했겠습니까. 또 좌상을 체차하도록 청하는 논의가 아직까지도 정지되지 않고 있는 데 있어서는 신은 더욱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죄를 논의한 지 이미 오래되어 의리가 밝혀졌고 대관의 논의도 이미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상하가 서로 버티고 있어 끝날 기약이 없으니 나랏일의 어려움이 또 염려됩니다. 신이 합계를 정지해야 한다는 뜻으로 발언하였더니 동료 및 간원(諫院)의 관원들이 안 된다고 고집하였습니다. 신이 어찌 구차하게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인피한 글을 보니 말뜻이 절실하다. 여러 사람들의 비방이 집중되는 논의를 말하였으니 만일 국가를 위하는 정성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매우 훌륭하게 여긴다. 책망은 돌아갈 곳이 있으니, 그대는 피혐할 일이 없다. 사직하지 말라."
하니, 박순(朴純)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이단석, 정언 홍만형이 인피하면서 박순이 논의를 정지하도록 한 잘못을 공격하기를,
"죄명이 경중이 있으니 마땅히 차례대로 논의를 정지해야지 모두 하루 안에 정지해서는 안 됩니다. 의견이 서로 틀려서 형편상 구차하게 동의하기 어려우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박장원이 병을 핑계대고 들어가 여러날 동안 정고하니, 상이 체직을 허락하였다.
교리 오두인, 수찬 이정 등이 처치하여, 이단석과 홍만형은 출사시키고 박순은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고 이르기를,
"만약 정지해서는 안 된다면 모르지만, 국가의 형편이 이러하고 변방의 일이 저러하니 국사를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어찌 작은 일에 구애받겠는가. 옛사람이 이른바 ‘어찌 내년까지 기다리겠는가.’ 한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 한 말이다. 박순은 별로 잘못한 일이 없으니 역시 출사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교리 윤심은 의견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처치하는 차자에 끼지 않았다.
2월 25일 경오
정지화를 대사헌으로, 정치화를 겸 판의금으로 삼았다.
지평 박순이 직차에 나아가서 인피하기를,
"장려하며 일깨우시는 성상의 비답이 뜻밖에 나오고 특출한 은명을 특별히 내리시니 하도 놀랍고 송구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동료 및 간관이 인피한 내용 중에 ‘마땅히 차례대로 논의를 정지해야 하는데 갑자기 시끄러움을 야기했다.’고 했는데, 논의하는 일이 이미 정지해도 되는 것인 줄 알았다면 어찌 반드시 고의로 쟁집하여 마치 형식적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만 하겠습니까. 그릇된 견해가 이러하여 스스로 전도됨을 취하였으니 마땅히 체직되어야 하는데 특별히 출사하라는 명을 받으니 진퇴하기가 더욱 곤란합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이단석, 정언 홍만형도 인피하여, 더욱 힘껏 박순을 공격하고 상의 뜻에 영합한다고 배척하기까지 하였다. 또 앞서 인피한 내용 중에 ‘차례대로 논의를 정지해야 한다.’는 말이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는 것으로 잘못을 자인하면서 체직을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2월 26일 신미
정언 조성(趙䃏)이 인피하기를,
"대각의 논의가 비록 정도에 지나쳤더라도 성상의 포용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기를 꺾고 귀양을 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감당하려 하실 때에 대신이 끝까지 힘껏 간쟁하지 못했다는 데 대해서는 그래도 지적할 만한 점이 있겠지만, 자신의 죄를 성상의 몸에 돌리려 했다는 것은 결코 본뜻이 아닐 것입니다. 사신의 치계는 혹 글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착오가 없지는 않겠으나, 탑전에서 상의해 정하여 이미 자문(咨文)으로 아뢰었으니 그곳에 가서 무슨 말로 저들에게 쟁변할 수 있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환수하라는 청은 그만둘 수 없겠지만 합계의 논의만은 어찌 한결같이 쟁집해서야 되겠습니까. 의견이 이러하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교리 윤심(尹深)이 처치하였는데 박순에 대해서는 "특별히 출사하라는 명을 받고도 체차하기를 청하였으니 형세상 그대로 있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이단석에 대해서는 "차례대로 논의를 정지해야 한다는 것이 이미 본뜻이 아니었다고 지금 비록 스스로 해명하였지만 구차함이 더욱 심합니다." 하고, 홍만형에 대해서는 "지난번의 피혐 때 이미 실상을 들어 말한다 하고 지금 와서 자세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앞뒤가 다릅니다." 하고, 조성에 대해서는 "이미 의견을 진달하였으면 억지로 인피할 혐의가 없는데, 언관의 직책으로 있는 사람이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아울러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관학 유생 진사 홍천서(洪天敍) 등이 상소하기를,
"신하의 죄로 인하여 임금이 대신 모욕을 받았으니 이는 실로 수백 년 동안 없었던 변입니다. 이 일을 당하고 나서부터 경대부 및 일반 백성과 하인들까지 억울해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서로 마음 아파하고 있으니, 이는 타고난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서 스스로 그칠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이숙(李䎘) 등 여러 사람을 구원하여 변호하고 사신으로 다녀온 신하들을 공격하여 배척하는 한편 의리를 밝히고 명분을 바로잡고 국시(國是)를 정해야 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시비는 조정에 있는 것이어서 사람마다 참여하여 알 일이 아니다. 더구나 조정에서 이미 그 점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는데이겠는가. 이 상소를 물리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관학 유생들이 감히 장황한 소를 올렸는데, 명분상으로는 의리를 가탁하고 있으나 마음은 실로 아름답지 못하다. 만일 권세있는 간신으로 국정을 마음대로 하는 대신이 아닐 것 같으면 선비의 신분으로 어찌 감히 상소하여 배척하며, 또한 어찌 감히 대관의 논계가 이미 발한 후에 말을 한단 말인가. 그 마음의 소재를 진실로 알 만하다. 앞으로는 국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조정(朝政)을 논의하지 않는 선비가 없게 되었다. 수창(首倡)과 소두(疏頭) 등을 아울러 정거(停擧)시켜서 선비의 습속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수창 생원 이희택(李喜澤)과, 소두 홍천서(洪天敍)가 정거당하였다.
정원이, 상소한 유생들을 변호하여 해명하고 재차 복역하여 환수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렇게까지 격렬해지는 것은 내가 시킨 것이 아니다. 하루가 쌓이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쌓이면 한 해가 된다. 그러나 천하의 일이 어찌 실마리도 없고 끝도 없는 일이 있겠는가. 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라."
동지 정사(冬至正使) 정지화, 부사(副使) 민점, 서장관(書狀官) 조원기가 연경에서 돌아왔다.
대사헌 정지화가, 합계에 언급된 사람 중에 상피할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인피하고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여 면직되었다. 정태화가 곧 그의 종형(從兄)이다.
신후재(申厚載)·이숙달(李叔達)을 지평으로, 심유(沈攸)·이단석(李端錫)을 정언으로 삼았다.
유학(幼學) 황연(黃壖)이 상소하기를,
"바야흐로 지금 위로는 주상의 위엄이 박탈당하였는데 아래로는 당여(黨與)가 성립되어 나이 젊고 경박한 무리들은 뜻을 얻어 횡행하며 노련하고 충후한 사람은 의욕을 잃고 초췌합니다. 저들의 기염과 대단한 권세에 분위기가 소침하여 조정에서는 모두가 숨을 죽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데, 한 가닥 공론(公論)이 초야에 남아 있으니 감히 벼슬아치들이 하는 걱정에만 맡겨 둘 수 있겠습니까.
삼가 보건대, 유신 송시열·송준길 등이 산림에 묻혀 있으면서 풍습과 절의를 가다듬어 일찍이 재상이 될 만한 인물로 기대를 받았고 출사하여 세상에 쓰여지게 되어서는 중외(中外)가 다 마음으로 귀의하여 경영하는 사업이 머지않은 날 실행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실시한 일이 여망에 맞지 않았으니, 논의가 맞지 않고 색목(色目)이 같지 않으면 현우(賢愚)를 따지지 않고 일체 물리쳤습니다. 세 조정에서 중망(重望)을 받았던 조경(趙絅), 사림의 모범이었던 허목(許穆), 학문과 재기(才器)가 뛰어났던 윤휴(尹鑴), 청아한 명성과 곧은 절개를 지녔던 홍우원(洪宇遠)과 같은 사람들도 조금 그 뜻을 벗어나자 당세의 버림받은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권시(權諰)와 같은 경우에는 뜻이 맞을 때는 출처를 함께 하다가 한 마디 말이 합치되지 않아 영원히 한평생을 금고당하였으니, 김시진(金始振)·서필원(徐必遠)·이상진(李尙眞) 등이 당시의 의론에 용납받지 못한 것은 하나의 잗단 일에 불과합니다.
오늘날의 대신이 비록 옛날의 대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역시 이 한때의 재량이 있고 충근(忠勤)한 사람들입니다.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가고 그릇된 논의가 날로 확산되어 가는 것을 보고 집에 앉아 탄식을 금치 못하였겠지만 감히 임금께 들어가 고한 일이 없었으니, 이는 그들의 풍채와 역량으로는 진압할 수 없어서였을 것입니다. 이는 남의 소나 말을 맡아 놓고는 그대로 죽어가는 것만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경우이니, 이것으로 그들의 죄를 성토하면 의당 스스로 해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국가에 일이 생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알력을 부리니 같은 편은 감싸고 다른 편은 공격하는 자취를 스스로 감출 수 없습니다. 삼공을 아울러 논핵하여 임금의 판단을 흐리게 하려다 천일하에 속셈이 다 드러나자 엎치락뒤치락하며 이기기를 좋아하여 수상에게까지 죄를 더하니, 그 꾸며대고 가리려는 꾀는 교묘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옹졸하게 된 것이라 할 만합니다.
사문(査問)한다는 떠들썩한 말이 처음 나왔을 때는 온 조정이 한결같은 말로 모두 성상이 직접 감당하시겠다고 하는 것을 훌륭한 덕을 베푸는 일이라고 하면서, 청의(淸議)가 준엄하게 허적이 순순히 따르려 하지 않는 것을 공박하였으니, 벌금을 내게 된 일은 실로 여기에서 빌미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끝내 도리어 허물을 사신으로 갔다온 사람들에게 돌린 자들은 바로 모두 지난날 청의를 내었던 사람들이니, 이는 실로 무슨 마음입니까. 저들의 규례에 대하여 범연히 들은 바가 있어서 상께서 물으실 때 사실대로 아뢴 것인데 이것이 또한 무슨 죄입니까.
정태화와 홍명하의 경우 묘당(廟堂)에서 감당하기를 앞장서서 청하였던 사람들이고 보면, 자신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군상에게 옮겼다는 죄명을 어찌 감히 이들 대신에게 억지로 더한단 말입니까. 조복양·김만기·민유중·원만리·이민서 등은 방략(方略)을 나누어 주어 뒤에서 지시하고서도 이숙의 무리가 귀양가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고 같이 처벌되기를 청하지 않았으니 역시 그들의 의기(義氣)를 엿볼 수 있습니다. 김익렴의 간악한 성품과 짐승같은 행실은 이미 한때의 표방(標榜)에 들어 있으니 지금 출몰하는 그의 태도를 어찌 거론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정원이 소(疏)를 올리면서 아뢰기를,
"상소 중의 위험한 생각과 불미한 태도는 진실로 성감(聖鑑)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미 스스로 유생의 상소라고 하므로 부득이 봉입(封入)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 소를 보건대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올곧은 듯하나 자세히 따져 보니 의도한 바가 확실히 드러난다. 아, 요즘 인심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이것을 보고도 알 수 있으니 정말 한심하다. 조정의 처치에 있어 뒷날을 징계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 되겠으니, 유소(儒疏)를 올린 황연은 정거(停擧)토록 하라. 이와 같이 위험한 상소에 대하여 어찌 비답을 내리겠는가. 물리도록 하라."
하였다.
관학 유생 생원 권회(權誨) 등이, 홍천서 등이 올린 소를 물리친 것으로 상소하여, 똑같이 죄를 받기를 청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모두 정거하는 벌을 실시해도 안 될 것이 없지만 조정에서 구별하여 실시했던 것은 범연한 뜻이 아니었는데, 지금 또 소를 올리니 매우 터무니없다. 이 소를 물리도록 하라."
승지 심세정·심재 등이, 권회의 상소를 퇴각시켰다는 것으로 복역하기를,
"단지 알아듣게 타일러 돌아가 성묘(聖廟)를 지키게 했어야 할 텐데, 터무니없다고 배척하여 그 상소를 퇴각시킴으로써 너무 기를 꺾으시니 기상이 참담하여 배양하는 도가 크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원컨대 우대하여 포용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계사를 보니 그 주된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실로 한때의 시비를 모면하려 한 것이니, 일의 체모에 있어서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당해 승지를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황연(黃壖)과 권회(權誨)는 다 같은 유생이며, 그들이 올린 소도 다 같은 유생의 소이다. 그 소에 논의한 내용으로 말하면 황연은 옳고 권회는 그르다. 더구나 황연은 이미 정거를 당했고 또 올린 소가 퇴각되었다. 그런데 승정원 신하들은 일찍이 한 마디도 권회를 구원하는 말을 하지 않다가 단지 그 소를 퇴각시킬 때 남에게 뒤질세라 서둘러 복역하였다. 아, 위세가 사람의 심성을 바꾸어 놓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성상의 비답에 이른바 ‘한때의 시비를 모면하려 한다.’는 말은 참으로 심세정 등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았다고 하겠다.
2월 29일 갑술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김만기(金萬基)를 승지로, 이유상(李有相)을 교리로, 이정(李程)을 수찬으로, 경최(慶㝡)를 장령으로, 최일(崔逸)을 해운 판관(海運判官)으로 삼았다. 최일은 합계에 이견을 내세웠었는데, 여기에 연루되어 외직에 보임된 것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성균관이 보고한 내용을 보니, 본관 유생 등이 궐하(闕下)로부터 곧장 신문(神門) 밖에 나아가 배사한 후에 이어 성균관을 비웠다고 합니다. 막중한 성묘(聖廟)를 하루라도 비워두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초하루 분향(焚香)이 단지 하루밤밖에 남지 않았는데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관사(知館事) 김수항, 대사성 조복양을 속히 나와서 직숙하게 하여 먼저 타이르게 하고, 끝내 들어오지 않으면 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유생을 불러모아 수직(守直)하게 하여 분향하는 예를 빠뜨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간원이, 배종(陪從)했던 신하들과 의관(醫官)·내관(內官)에게 내린 상과 가자를 환수하도록 청하는 계사를 정지하였다.
정언 이단석이 아뢰어 수창(首倡) 및 소두(疏頭) 유생에게 내린 정거하라는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하인을 나누어 보내 상소에 참여하지 않았던 유생을 불렀더니, 모두 하는 말이 ‘비록 사정이 있어서 상소할 때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의견은 동일하다. 현재 상소에 참여한 유생들이 수창과 소두에게 벌을 내린 것 때문에 이미 권당(捲堂)하고 나갔으니, 결코 상소할 때 참여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무릅쓰고 재(齋)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하고, 들어올 뜻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밤은 깊어 내일 분향하는 일을 달리 변통할 길이 없으니, 본관 낭청으로 임시 차출하여 예를 행하게 하자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정태화·홍명하 등이 대신으로 국사를 담당하면서 처치가 정당성을 잃어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처음에는 북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는 모욕을 겪게 하고 끝내는 죄를 처분받아 벌금을 내는 수치를 당하게 하였으니, 그 죄가 가장 큰 자를 논한다면 두 대신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더구나 정태화는 통역하는 무리가 얘기한 ‘주상이 스스로 감당하면 신하의 죄가 가벼워질 것이다.’는 말로 감히 임금에게 고하였으니, 이후가 이른바 ‘역관의 말을 빌어 스스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도 심한 말은 아니었다.
허적의 경우는 주회인(走回人)의 일에 대하여 당초 참여하여 아는 바가 없었으나, 상이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논집하여 상의 앞에서 쟁변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벌금 문제로 염려하여 성상께 진달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말은 상께서 친히 들으신 것이며 여러 신하들이 다같이 아는 일이다. 그러나 허적은 처음 가진 뜻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끝내 힘껏 쟁변하지 못했으니, 이것으로 죄안을 삼았다면 허적도 감히 사양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 지난해 사문(査問)이 있었을 때 상이 받은 곤욕을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늦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었는데 저녁 때까지 예복을 차려 입고서 저들을 대하여 수응함에 있어 모두 스스로 감당하셨고 대신을 염려하시어 곤욕을 꺼리지 않으셨으며, 몸을 일으켜 자리를 벗어나 북향하고서 머리를 조아린 것은 청주(淸主)에게 죄를 청하는 것 같았으니, 그날 모시고 있던 신하들 중에 만약 조금이라도 강개하는 자가 있었다면 반드시 비분에 못 이겨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간들이 대신을 논핵하려 했다면 마땅히 청사(淸使)가 돌아간 후에 즉시 발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는 하지 않고 심지어 주상이 스스로 감당하겠다 하는 말을 청론(淸論)이라고 하고 허적이 주상께서 감당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을 잘못이라고 하여 비방하는 논의가 판을 쳤다. 그러다가 허적이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자 이숙의 무리가 ‘벌이 상께 미치게 되었는데 목숨을 걸고 쟁집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허적의 대죄안(大罪案)을 삼고서 양사를 격동시켜 일제히 이 논의를 발하게 하였는데, 군상을 높이고 의리를 밝히는 것으로 명분을 삼아 매우 급하게 죄고 각박하게 공격하여 불측한 곳으로 빠뜨리고 임금을 무시했다는 죄로 얽었다. 그리고는 사사로움에 치우친 흔적을 가리려고 두 신하의 죄까지 아울러 논의하였으나, 말한 내용이 논리적으로 치밀하지 못하여 당초 처치의 잘못이 벌금을 물게 된 빌미가 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숙의 무리가 사사로움을 자행하고 당여를 비호한 행위는 심하다 하겠다.
아, 성상께서 두 신하의 죄가 중죄에 저촉될까 특별히 염려하시어 혼자 마음을 써 결연히 스스로 감당하려 하셨던 것이고 보면 저들이 벌금으로 논죄한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 이숙의 무리가, 조사를 받을 때 주상이 모욕을 받는 것을 통탄스럽게 여기지 않고 잠자코 말이 없다가 단지 오늘날 벌금을 물게 된 것을 치욕이라 하여 삼공을 아울러 탄핵하고 허적을 정태화와 홍명하보다 무겁게 논죄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공정한 마음에서 발로된 것이겠는가. 상이 그들의 마음씀씀이가 간교한 것을 꿰뚫어 보고 궁벽한 곳으로 귀양보낸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허적은 총민하고 재주가 있었으며 또 상의 총애도 받고 있었으므로 당시의 무리들이 꺼려 온 지 오래되었다. 지금 이 일로 인하여 이숙의 무리가 기회를 잡았다고 여겨 때에 미쳐 밀어뜨려 기필코 제거하려고 송시열과 송준길로 하여금 상소하여 배척하게 하고 관학 유생으로 하여금 상소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니, 통탄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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