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을해
지평 신후재(申厚載)가 합계에 대해 가부를 논할 수 없는 혐의가 있어서 체직을 청한다 아뢰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는데, 면직되었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로 유생들을 불러 달랬더니, 유생들이 ‘소두(疏頭)와 앞에서 주창한 자들이 모두 벌을 받았으니 우리들만 벌을 면한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는 없다.’고 하면서, 끝내 분부를 받들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예관으로 하여금 들어가게 달래도록 하였는데, 유생들이 또한 따르지 않았다. 상이 일렀다.
"유생들에게 벌을 시행한 것이 오늘날에만 있는 일이 아니고 소두가 벌을 받은 것도 역시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유생들이 이를 이유로 마침내 성묘(聖廟)를 버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다시 달래어 들어가도록 하라."
3월 2일 병자
지관사 김수항(金壽恒), 예조 참판 박세모(朴世模) 등이 면대를 청하였는데, 상이 국기(國忌)를 이유로 허락하지 않으면서 생각을 글로 써서 들이게 하였다. 수항 등이 아뢰기를,
"유생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앞에서 주창한 자와 소두가 벌을 받은 데에 전적으로 있습니다. 정거(停擧)를 풀어주도록 명한 뒤에 다시 예관을 보내어 달랜다면 다시 들어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묘가 오랫동안 비어 있으므로 내가 매우 걱정한다. 다시 승지로 하여금 말을 만들어 달래게 하라."
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상소했던 유생들의 벌을 풀어주도록 구원하기를,
"준엄한 위엄을 조금 거두어 환수하라는 청을 빨리 따르시고, 특별히 돈독히 달래어 즉시 도로 들어가게 하소서."
하는 한편, 황연(黃壖)이 터무니없는 말로 속여 사림을 모함한 것을 공척하기를,
"특별히 통렬한 배척을 가함으로써 간사한 말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했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3월 3일 정축
승지 심재(沈梓)가 성상의 뜻을 말로 만들어 달랬지만 유생들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답하면서 명을 받들려 하지 않았다고 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이익상(李翊相)을 지평으로,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목래선(睦來善)을 판 결사로 삼았다.
상이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되풀이하여 진달하면서, 상소를 올린 유생의 정거를 풀어줄 것을 청했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부가 영상 정태화를 파직하고 좌상 홍명하를 체차하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대사헌 이경억(李慶億), 정언 이단석(李端錫) 등이 앞에서 주창하여 상소를 올린 유생을 정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면서, 황연의 상소는 사림을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으로 매우 흉악하니 먼 변방으로 귀양을 보내라고 청했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상이 승지 심재에게 이르기를,
"대간이 어떻게 《일기(日記)》를 고증해서 논계할 자료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뒤 폐단과 관련된 일이니 금지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대간이 비록 본원에 간통으로 물어온다 하더라도 절대로 고증해 보내지 말라."
하였다. 김익렴(金益廉)이 일찍이 영상과 우상에게 죄줄 것을 청할 때 간통으로 《일기》를 물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진사 심유(沈濡) 등이 상소를 올려, 귀양간 대각과 죄를 입은 승지와 정거당한 유생들을 구원하면서, 좋다 싫다 비답을 분명하게 내려서 의리를 밝히고 국시(國是)를 안정시키고 사론(士論)을 중시하고 성묘를 존중하는 터전으로 삼으라고 청했는데, 답하지 않았다.
3월 4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시비를 밝히고자 상소를 올렸던 유생들을 정거시켰는데, 이로 인하여 권당(捲堂)하는 일이 있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성묘가 오랫동안 비는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이다. 이제 부질없이 시비를 밝힐 것만을 생각하여, 성묘가 비는 것을 근심하지 않을 수는 없다. 정거당한 유생들을 풀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다시 들어가서 성묘를 지키게 하라."
하였다. 이에 유생들이 도로 들어가서 재(齋)를 지켰다.
3월 5일 기묘
상이 승지 송시철(宋時喆)을 보내어 영상 정태화와 좌상 홍명하에게 유시를 전달하기를,
"아, 진실로 지난번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를 줄은 생각지 못했다. 말을 하자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 오늘날의 나랏일이 아슬아슬 위태하다고 말할 만하다. 조정에는 공론이 없고 선비들은 순후한 풍조가 없으니, 세도와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를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정승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묘당이 쓸쓸하며 좌우를 둘러보아도 노성한 덕을 지닌 명망있는 인사가 없다. 경들이 조정에 돌아와 정사를 의논하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이, 마치 큰가뭄에 비내리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기갈에 마실 것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즉시 들어와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해서 나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했는데, 시철이 회계하기를,
"태화는 말하기를 ‘신은 죄명이 가장 컸는데도 오히려 법망을 벗어났습니다. 어제 듣자니 탑전에서 정계했다고 하는데 여론이 펴지지 못하고 공의가 날로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오직 바라는 바는 죽기 전에 신을 삭직시켜 주는 것입니다.’ 했고, 명하는 말하기를 ‘신이 지고 있는 바는 임금을 저버린 죄이고, 대간이 주장하는 바는 임금을 높이는 의리입니다. 성상께서 윤허하지 않아 대간의 논계가 정지되었으니, 의리가 신으로 말미암아 밝아지지 못하고 공의가 신으로 말미암아 펴지지 못하였습니다. 감히 얼굴을 들고 다시 대궐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했습니다."
하였다.
우승지 김만기(金萬基)가 상소하기를,
"대각이 있어온 이래로 논계했는데 비답을 내리지 않았던 적은 없습니다. 지난번 합계를 처음 했을 때 끝내 비답을 아끼셨는데, 귀양간 대신을 이유로 구례를 폐기해서는 안 됩니다.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같이 죄를 받겠다고 청한 일에 있어서 성상께서 처리하신 것은 부드럽게 용납하는 도리를 크게 잃었으니 정원이 계달한 것은 바로 직분이었는데, 도리어 노여운 목소리로 특별히 추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정원의 직책이 비록 낮다 하더라도 그 임무는 옛날 상서(尙書)와 중서(中書)입니다. 어찌 문서를 봉행하는 것일 따름이겠습니까. 신은 이미 시험을 받아 흐리멍덩함이 드러난 자인데도 그대로 이 직임을 띠고 있으니 어떻게 힘써 보답하여 큰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체직하라고 명했다. 상이 민유중(閔維重)을 서용하라고 정원에 분부했다.
민유중을 승지로, 박세당(朴世堂)을 수찬으로 삼았다.
장령 소두산(蘇斗山)이 상소를 올려 체직을 바랐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3월 6일 경진
간원이 김우석(金禹錫)·정계주(鄭繼胄)·이익(李翊)에게 내린 명을 도로 거두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좌의정 홍명하가 과천에서 상소를 올려 인책하면서 죄를 청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달랬다.
윤비경(尹飛卿)을 승지로, 이단하(李端夏)를 이조 정랑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응교로, 홍주삼(洪柱三)을 수찬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삼고, 이민구(李敏求)를 군함(軍銜)에 붙였다. 민구는 병자년 강도(江都)의 죄 때문에 오랫동안 폐기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별세초(別歲抄)로 인하여 서용하라는 명을 받은 것이다.
대사헌 이경억, 지평 이익상이 아뢰기를.
"이민구의 죄는 종사에 관련된 것으로 전후 대간의 계사에서 상세히 논했습니다. 아직까지 목숨을 보존한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 것인데 어떻게 세월이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함께 서용할 수 있겠습니까. 서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아뢰기를,
"황헌(黃瀗)이 저지른 낭자한 탐장질은 실로 보통에 비길 바가 아니어서 법으로 논해 볼 때 진실로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법을 굽혀 은혜를 베풀어서, 처형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벌써 다행한 일입니다. 서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7일 신사
영상 정태화가 성밖에서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의 죄는 가장 큽니다. 《일기(日記)》에서 전해진 바가 과연 실상이라면 형법으로 논죄하여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죄가 남습니다. 신을 삭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가의 형세가 어지럽고 일의 기미가 걱정되는 것이 많으니, 경이 좌시해서는 안 된다. 속히 들어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고, 인하여 사관을 보내어 달랬다.
3월 9일 계미
상이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국가의 기강이 해이하고 법령이 엄하지 못해서 은밀한 상소라 하더라도 입계하기도 전에 먼저 전파되어 버리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하자, 도승지 오정위가 아뢰기를,
"한림은 역사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니, 비록 밀소(密疏)라 하더라도 베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이로 인해서 바깥에 전파되는 것이라면 매우 놀랄 만한 일이다. 이제부터는 매우 엄하게 신칙해서 누설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만약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사초(史草)를 누설한 죄로 벌을 주어야 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생 심유(沈濡)가 애초의 상소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대개 배회하면서 관망하려는 뜻이었으며 뒤미쳐 상소를 진달한 것은 한때의 시비를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아름답지 못한 작태를 내가 매우 미워한다. 해조로 하여금 상당하는 벌을 시행하게 하라."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상소를 올린 유생에게 벌을 주는 것은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비들의 풍조가 바르지 못하니 벌을 주는 도리가 어떻게 없을 수 있겠는가. 이 상소는 물리치도록 하라."
하였다.
우상 허적을 삭출하라는 내용의 합계를 정지하였다.
3월 10일 갑신
도승지 오정위, 승지 민유중 등이 아뢰기를,
"상소를 올린 유생 심유 등에게 벌을 주라는 분부가 어제 내렸는데, 관관(館官)이 입시할 때에 그 상소를 도로 내주라는 명이 이어서 있었습니다. 관을 비웠던 유생들이 명을 받들고 도로 들어간 바에야 심유 등이 청한 바는 다시 시행할 것이 없습니다. 비답을 내리셔야지 괜히 내주어서 선비를 우대하는 도리를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비들의 풍조가 바르지 못한 실상을 등대했을 때 벌써 말했다. 번거롭게 하지말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던, 조사석(趙師錫)의 파직을 도로 거두라는 내용의 논계를, 이때와서 따랐다.
남용익(南龍翼)과 맹주서(孟胄瑞)를 삭출하라는 일을 정계했다.
좌상 홍명하와 영상 정태화가 또 상소를 올려 직명을 삭제하라고 청했는데, 명하는 상소 말미에서 귀양간 신하들을 또 언급하면서 매우 힘껏 구원하기를,
"아울러 소환해서 나랏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조정을 맑게 하소서."
했다. 상이 면직을 아울러 윤허하고, 사관을 보내어 달래기를,
"나랏일이 우려할 만하고 시세가 매우 어려우니, 경들이 자리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좌시해서는 안 된다. 지금 억지로나마 따르는 것은 나랏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로 경들을 위해서다. 안심하고 들어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벌을 받은 사람들에 관한 일은 글로 말할 수 없으니 경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조용히 의논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통진현(通津縣)의 사비(私婢) 사옥(四玉)이 한 배에 세쌍둥이 딸을 낳았다. 두 딸은 각각 얼굴과 팔다리가 있었지만 두 배가 합쳐져서 하나였는데 곧바로 다 죽었다.
3월 11일 을유
상이 도승지 오정위에게 이르기를,
"김익렴이 간통으로 정원에 물었을 적에 당시 주서가 《일기》를 미처 수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어디에 근거해서 함부로 간통해 답했단 말인가. 해당 주서를 파직하라."
했다. 가주서 안후태(安後泰)가 우상이 북경에서 돌아와 등대했을 때 입시하여 일을 기록하였는데, 그 속에 황제도 벌금을 낸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일기》를 정원에 미처 수정해서 보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뒤에 익렴이 피혐할 적에 간통으로 그 말을 후태에게 묻자 후태가 초고 가운데 기록되어 있던 여섯자로 회답했는데, 우상이 법률을 적용받게 된 것이 대개 이로 말미암아서였다.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상이 작년에 일을 조사할 때 일을 기록한 사관이 누구냐고 또 물었는데, 오정위가 가주서 이제(李璾)라고 대답했다. 상이 이르기를,
"되풀이해서 생각해도 끝내 영상이 그런 말을 했었는지 기억해 낼 수 없다. 애초 스스로 감당하려는 뜻이 이미 내 마음에 정해져 있었다. 신하가 어떻게 감히 임금에게 스스로 감당하라고 청할 수 있겠는가. 그때 역관배들이 전파한 말이 비록 경연석상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원래 영상의 말이 아니었다. ‘상께서 감당하시면 신하의 죄가 가벼워진다.’는 등의 말에 있어서는 일을 조사해온 이래로 전연 듣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영상이 올린 것이라고 일컬으니, 어디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인가. 그 기사가 의심할 여지없이 잘못된 것이니, 참으로 놀랄 만하다. 해당 주서를 삭직하라."
하였다. 이제가 지난해 유월에 일을 조사할 때 임시 관원으로 입시해서, 영상이 하지도 않은 말을 《일기》 속에 썼다. 그 뒤 집의 김익렴이 간통으로 정원에 물어서 이 증거를 찾아 영상에게 법률을 적용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정태화와 홍명하를 서추(西樞)에 붙이고, 심유(沈攸)를 헌납으로, 안숙(安塾)을 정언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이조 정랑으로, 조성(趙䃏)을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삼았다. 조성은 일찍이 정언으로 있으면서 합계할 때 의견이 같지 않아 인피했는데, 이것에 걸려서 외직에 보임된 것이다.
3월 12일 병술
우상 허적이 강가에서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죄가 극악해서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 어려우므로 날마다 벌을 기다렸는데, 성상께서 은혜롭게도 힘껏 비호하시어 대간의 논계를 윤허하지 않음으로써 끝내 공론이 펴지지 않게 하고 많은 사람의 감정이 울적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악을 징계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단지 소원은 고향으로 돌아가 집에서 죽을 수 있게 되는 것뿐입니다. 신의 직책을 삭제하시고 이어서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달래기를,
"아, 오늘날의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줄 어떻게 헤아렸겠는가. 마음과 힘을 다하려 하다가 끝내는 뜻밖의 배척을 당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의 망극한 말이 어떻게 이 지경에까지 이른단 말인가. 조용히 원인을 생각해 보니, 참으로 경이 조정을 사직하던 날 자상하게 면대하고 유시한 데서 말미암은 소치이다. 내가 참으로 다시 경을 볼 낯이 없다."
하였다. 나머지는 영상과 좌상의 상소에 비답한 것과 같다.
상이 침을 맞았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들어와 아뢰기를,
"해마다 과거를 베푸는 것은 일의 체모상 온당하지 않고 민간에 끼치는 폐단도 적지 않습니다. 이번 온천 거둥에는 과거를 베풀지 않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본도가 공상하는 물품의 종류에 대해 수를 줄여 조금이나마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의 물산만으로 공상하게 하라. 그리고 또 양남(兩南)은 호서와 경계를 접하고 있으니, 도내의 토산품을 한두 차례 자전께 올리게 하되 절대로 많이 하지 말도록 하라. 이 뜻을 양도의 감사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상이 승지 민점(閔點)에게 묻기를,
"우상이 현재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뱃길을 따라 충주로 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네가 즉시 도달한 곳으로 쫓아가서, ‘지금 일의 기미를 헤아릴 수 없어 경이 조정을 불안하게 여기고 갑자기 이 걸음이 있게 된 것이지만, 어찌 차마 선왕께서 융숭하게 인정해주고 대우해주던 것과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뜻을 저버리며 조금도 머무르려 하지 않아서, 나로 하여금 무엇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나랏일이 어려운 상황이고 묘당이 텅 비었으니, 이 어찌 대신이 과감히 떠날 때이겠는가. 조정이 대신을 대우하는 것은 일의 체모가 특별하니,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옛사람의 훈계를 경이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알아라.’ 하는 뜻으로 유시하는 말을 만들어 가서 달래어 빨리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라."
하였다. 우승지 민점이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서빙고로 쫓아가서 성상의 분부를 우상 허적에게 전했더니, 허적이 말하기를 ‘신이 지은 무거운 죄와 위태로운 자취를 돌아보면 감히 잠깐이라도 서울에 머물 수 없으니, 대궐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뱃길이 바빠서 다 진달할 겨를이 없으니, 짧은 상소로 저의 정성을 다시 드러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김익렴이 정원에 가서 일기를 보았다고 하는데, 그가 스스로 찾아서 본 것인가, 승지가 상고해 낼 때 본 것인가?"
하니, 회계하기를,
"현재 있는 관료들은 모두 그때의 승지가 아니므로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의 승지나 사관이 모두 다 생존해 있으니 어찌 물어볼 수 없단 말인가?"
하니, 회계하기를,
"《일기》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그때의 승지는 김우석(金禹錫)·심세정(沈世鼎)·정계주(鄭繼胄)·이익(李翊)이고, 사관은 가주서 안후태(安後泰)·유상운(柳尙運)·정유악(鄭維岳), 검열 조사석(趙師錫)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모두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니, 회계하기를,
"물어보니 이익은 말하기를 ‘익렴의 피사 가운데 「정원에 가서 일기의 내용을 들었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익렴이 어느 승지에게 들었는지 몰랐다. 그 뒤 익렴이 신을 만나 말하기를 「김우석과 신이 입직했을 때 일기를 가져다 보았다.」고 말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나는 기억할 수 없다. 내가 그때 조사(曺司)의 자리에 있어서 글씨 쓰는 일이 매우 많았는데, 그대가 비록 일기를 가져다 보았다 하더라도 바쁜 와중이었기 때문에 내가 알지 못한 것인가.」 했다. 이와 같이 문답하고 헤어졌는데, 그 뒤 익렴의 말을 가지고 우석에게 물어보니, 우석도 말하기를 「그가 일기를 가져다 본 일은 나도 모른다.」 했다. 익렴이 춘방에 입직할 때 정말로 신들을 와서 보기는 했지만 그가 일기를 가져다 본 것은 신이나 우석 모두 알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다시 이익에게 묻기를 ‘익렴이 왔을 때 일기를 상고한 일은 없었다 하더라도 혹시 말로라도 언급한 일이 있는가?’ 했더니, 이익은 또 말하기를 ‘일기 운운했다는 말을 애초 듣지 못했는데 어찌 말을 했겠는가.’ 했고, 우석은 말하기를 ‘신과 이익이 입직할 때 익렴이 마침 와서 만나 서로 마주하고 이야기한 외에는 원래 일기를 상고하여 본 일이 없고 일기에 대해 언급한 일도 없다.’ 했고, 심세정·정계주·안후태·정유악·유상운·조사석 등은 ‘정원에 있을 때 익렴과 접촉한 적이 없고 그간의 자세한 내용은 전연 들어 아는 바가 없다.’고 모두 말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회계를 보고 또 익렴이 피혐한 말을 보니 ‘보았다’는 글자는 없고 ‘들었다’는 글자만 있다. 그때의 승지에게 묻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 유사로 하여금 들은 사람을 함문하게 하라."
하니, 승지 민유중과 심재가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대답한 바가 익렴의 피혐한 말과 차이가 있으니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만, 《일기》 가운데서 운운했다는 말을 익렴이 눈으로 보았는지 귀로 들었는지는 자신이 알고 있으니, 규핵하는 방법은 질문을 준비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 한가지 일로 인하여 그때의 승지와 사관을 힐문하기까지 하는 것은 조처가 타당하지 못하며, 피혐한 내용 가운데의 말을 끄집어 내어 그때의 대관에게 함문을 띄우는 것은 일의 체모가 온당하지 못합니다. 다시 자세히 헤아리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함문하는 것은 정말로 일의 체모를 손상시킨다. 나문하는 것이 옳겠다."
하니, 승지 심재와 송시철이 아뢰기를,
"익렴이 전후로 한 짓이 매우 의심할 만하지만, 대간이었을 때의 일을 함문하는 것은 일의 체모에 손상이 될까 생각했기 때문에 품은 생각을 감히 진달했던 것인데, 살펴 받아들이지 아니하시고 나문하라는 명까지 하셨습니다.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끝내 온당하지 않으니,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헤아려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함문하라는 명은 진실로 범연했던 것이 아니었는데 감히 온당하지 않다고 말하니, 무엇하러 함문하겠는가. 번거롭게 말라."
하였다. 세 차례나 아뢰었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익렴이 드디어 법을 맡은 관리에게 회부되었다.
관학 유생 조상우(趙相愚)가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황연(黃壖)이 흉악한 상소를 올려 유현(儒賢)을 모함하는 데 힘을 남기지 않았고, 또 한 시대의 조정 신하들을 극죄로 논하면서 일망타진하여 전하의 나라를 텅 비게 만들려 했습니다."
하였다. 이어 허목(許穆)·조경(趙絅)·윤선도(尹善道)·홍우원(洪宇遠)·윤휴(尹鑴)·홍여하(洪汝河) 등 여러 사람을 매우 힘껏 공격하고, 끝에서 다시 말하기를,
"예로부터 소인들이 착한 사람을 해치는 일은 모두가 임금과 신하 사이에 틈이 생겼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지금 일을 말하는 신하들이 연달아 고개[鳥嶺]를 넘어갔으니, 이는 전하께서 맑은 의논을 싫어하는 점이 있는 듯한 것이며, 두 신하의 상소에 대해서 달이 지나도록 비답을 내리지 않으시니, 이는 전하께서 유현을 소홀히 버리는 점이 있는 듯한 것입니다. 참소가 일어난 것은 사실 이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황연에 대해서 비록 상소를 물리쳤다고는 하지만 벌을 가볍게 주신데다가 또 매우 곧은 절개라고 여기는 듯한 하교를 하셨으니, 좋고 나쁨을 분명하게 보인다는 뜻이 어디에 있으며, 흉악한 상소를 물리쳤다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신들은 참으로 천지처럼 크시고 일월처럼 밝으신 상에게 유감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조정의 시비가 이미 정해졌으니 귀찮게 말라."
하였다.
3월 13일 정해
상이 침을 맞았다. 상이 우승지 민점(閔點)에게 이르기를,
"우상이 지금 이미 떠났다고 하는데 대신의 행차는 일의 체모가 특별하다. 양도의 감사로 하여금 관례대로 호송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 김좌명에게 이르기를,
"훈국으로 하여금 온천 거둥시 도감의 포수를 8백 명으로 수효를 정하되 6백 명은 대가를 호위하게 하고 2백 명은 자전을 호위하게 하라."
하니, 좌명이 아뢰기를,
"충청과 경기 양도의 마군(馬軍)도 서로 교대로 호위해야 하는데, 충청도 해미(海美)와 공산(公山)의 두 군영 소속 천여 명 가운데는 노약자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경기는 총융사가 수원의 마군을 단속해서 호위하려고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충청도는 노약자를 제외하고 정예로운 자 4백 명을 뽑아서 호위하게 하고, 경기는 수원의 군사로 호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언 안숙(安塾)이 아뢰기를,
"대사헌 이경억이 새로 제수된 동료가 출사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해서 합계하던 막중한 논계를 혼자 정지했습니다. 대각의 체모를 이보다 더 손상시킨 것이 없습니다. 정언 이단석(李端錫)은 경억과 의견이 서로 달랐는데도 끝내 뜻을 굽히고 따르고 말았으니, 매우 나약합니다. 아울러 체직하소서. 부사직 박순(朴純)은 남용익(南龍翼)을 삭출하라는 논계에 대해서 자신이 스스로 혼자 아뢰기를 이틀간이나 했으니, 그가 합계를 그르게 여기지 않은 것을 대개 알 수 있습니다. 합계를 연계할 때에 미쳐 비로소 의견이 같지 않다고 핑계해서 끝내 분란을 일으키기까지 했으니, 그 작태가 미워할 만합니다. 파직하소서. 고산 찰방(高山察訪) 조성(趙䃏)은 일찍이 대간으로 있을 때에 서성이며 관망하다가 박순이 매우 장려받는 비답을 받았다는 것을 듣고 비로소 나와서 숙배를 하고는 앞장서 인피하면서 구제했으니, 참으로 해괴합니다. 파직하소서. 해운 판관 최일(崔逸)은 일찍이 대간의 직책에 있으면서 엄한 위엄에 겁을 먹고는 인혐에 해당하지도 않는 것으로 인혐했으니, 일에 닥쳐서 구차하게 모면한 자취가 있습니다. 파직하소서. 김익렴이 피혐한 내용 가운데 《일기》에 관한 말이 여러 신하들이 대답한 것과 서로 어긋나니, 전하의 의심을 초래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대간으로 있을 때의 일에 대해서 말의 뿌리를 캐묻고자 이번에 나문하라는 명을 하셨으니, 일의 체모에 손상되고 뒤 폐단과 매우 관계가 있습니다.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평 이익상(李翊相)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이경억이 홀로 막중한 논계를 정지했는데 비록 너무 갑작스러웠다 하더라도 신이 아직 나와서 숙배하지 못한 상태였던 바에야 이를 혐의로 삼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관례대로 업무에 종사했습니다. 이번 간원의 논계에 진실로 다른 동료가 있으면 일이 제대로 끝나기를 기다려서 처리하는 것이 본래 구례(舊例)라고 말했는데, 이른바 다른 동료란 바로 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나약함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심유(沈攸)가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본원의 새 논계는 상회례(相會禮)를 기다리지도 않고 지레 스스로 혼자 아뢴 것입니다. 신의 나약함으로 인하여 대각의 체모가 온통 무너졌습니다. 또 신이 사은 숙배를 지체했기 때문에 합계를 정론하려던 대관으로 하여금 미처 상의하지 못하게 했으니, 체차하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안숙의 계사를 보건대, 의도를 지니고 근거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가리기 어렵다. 아, 인심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이경억이 논계를 그친 것은 이미 펴진 공의를 따른 것이며 어려운 나랏일을 염려한 것이다. 대각도 역시 특별한 사람이 아니니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안숙이 일단 이를 말해놓고 자신은 심유와 함께 의논하지 않았으니, 이 한 가지 사항으로 그의 마음씨와 태도가 벌써 드러났다. 한편으로는 한결같이 오래 끌 필요가 없다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급급히 정계했다고 했으니, 앞뒤로 말을 한 것이 억양이 너무나 심하다. 사람이란 각기 다른 소견이 있는 법인데, 박순 등 세 사람에게 억지로 죄명을 뒤집어 씌워 한번의 계사로 아울러 때려잡아 위협하고 속박하려는 계책을 삼았으니, 참으로 얄밉고 놀랍다. 이와 같은 사람을 대각에 그대로 두어서 그 간악함을 키울 수 없다. 안숙을 우선 체차하라."
승지 민점(閔點)·심재(沈梓)가 복역(覆逆)하여 아뢰기를,
"안숙이 이미 정계한 의논을 소급하여 허물함으로써 다시 분란의 단서를 야기했으며, 현재의 동료와도 가부를 의논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아직 숙배하지 않은 동료를 이경억이 기다리지 않았다고 꾸짖었으니, 신들도 역시 의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직책은 대관이고 그의 말은 대간의 의논입니다. 갑자기 특별 체직시킨다면 뒤 폐단과 관련이 됩니다.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정상이 간악한데도 체직시키는 벌만을 특별히 준 것인데, 너희들이 감히 운운하다니, 김만기(金萬基)의 말에 어째서 이와 같이 겁을 먹는단 말인가. 참으로 근거가 없다."
하였다.
3월 14일 무자
권두추(權斗樞)를 장령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특명으로 안숙을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삼고, 이어서 서경(署經)을 면제하여 보내라고 명했다.
수찬 이정(李程)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지평 이익상은 상의를 기다리지 않고 홀로 막중한 의논을 정지하고는 애초부터 인혐하지 않았으니, 대간의 전례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헌납 심유는 의논을 정지할 때에 사은을 지체함으로써 참여하지 않고 혼자 아뢰던 날에는 경시당했다고 핑계하였으니,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대답한 것이 김익렴이 피혐한 말과 다르니 상께서 의심을 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익렴이 지금은 체직되었지만 그 말은 대간으로 있을 때의 말입니다. 법을 맡은 관리에게 회부하기까지 하여 말의 뿌리를 캐내려 하시니, 성스러운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다가 뒤 폐단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안숙은 비록 상회례를 행하지 않고 동료와 연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논계한 것은 공의를 따르고 대각의 체모를 지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의도를 지니고 근거없는 말을 하고 위협하여 속박하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바닷가의 고을로 멀리 내치라는 명을 뜻밖에 내리셨는데, 대신을 부드럽게 용납하는 도리가 전혀 아닙니다. 아울러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받아들이지 않고, 이르기를,
"익상과 심유는 별로 체직당할 만한 잘못이 없으니 아울러 출사시키라."
하였다.
우의정 허적이 길에서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근시가 멀리 강외에까지 와서 성상의 비답을 전하고서 또 성상의 뜻을 알리니, 신이 비록 우둔하고 완악하다 하나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아, 신이 누구이며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선왕이 골육지친으로 대우해주신 은혜를 신이 어찌 차마 잊겠으며, 나랏일의 어려운 상황을 신이 어찌 생각지 않겠습니까. 다만 신의 죄명이 매우 무거워서 천지간에 용납받기 어려웠기 때문에 미처 아뢰어 물러나지도 못하고 한 범선으로 동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머리를 돌려 남산을 바라보니 성곽과 대궐이 점점 멀어지고, 영릉을 바라보니 소나무 잣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신이 이에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 있겠습니까. 신의 정세는 또한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받았던 명부(命符)는 이제 감히 규례대로 정원에 봉환합니다. 빨리 신을 삭직하시고 아울러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달래기를,
"경의 상소를 살펴보니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근심되어 좌우의 손을 잃어버린 듯하다. 경의 이번 행동은 만부득이해서 나온 것이니 내가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아, 삼공이 무함을 입고 당론이 자행되니 가만히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한심한 생각이 든다. 경이 비록 자기 몸을 가벼이 하고 싶겠지만 나랏일은 장차 어느 지경에 두려 하는가. 나의 뜻을 깊이 생각하여 즉시 노를 돌려 빨리 들어와서 시대의 여망에 부응하라."
하고, 또 선전관을 보내어 명부를 싸가지고 도달한 곳에 가서 전해주게 하였다.
3월 15일 기축
지평 이익상이 인피하여 공의를 어기며 특별히 출사시킨 것은 진실로 뜻밖이라는 이유로 체직을 청했고, 헌납 심유도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을 청했다. 모두 물러나 처치를 기다렸는데 면직되었다.
3월 16일 경인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안숙을 바닷가의 고을로 멀리 물리친 것은 지나친 거조라는 내용으로 차자를 올려, 풀어주라고 요구했는데, 상이 답하였다.
"오늘날 세도(世道)가 참으로 해괴하다. 사를 따르며 공을 멸시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있으니, 또한 매우 가슴아프지 않는가. 안숙의 심보는 길가는 사람도 아는 바이다. 외직에 임명한 벌도 또한 가볍다고 이를 만하다. 무슨 용서해 줄 만한 이치가 있겠는가."
능원 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의 집에 영시연(迎諡宴)을 베풀었는데, 상이 술과 풍악을 내리라고 명했다.
3월 17일 신묘
정리사(整理使) 김수흥(金壽興)이 들어와 아뢰기를,
"신이 온천을 왕래하다 백성들의 말을 들으니, 3년째 거둥하시어 원망과 고통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지나는 각읍에는 세미(稅米)를 견감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1결당 5두(斗)에서 2두를 감하라고 일렀다.
왕세자의 책봉을 이유로 사면령을 반포하여 각도에 정배되어 있는 죄인들을 풀어주었다.
3월 18일 임진
선공 제조 정지화(鄭知和)를 보내어 영릉(寧陵)의 발라논 회가 떨어진 곳과 사초(莎草)가 말라 죽은 곳을 수리하게 하였다.
찬선 송준길이 황연의 상소에서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상소를 올려 인책했는데, 상이 답했다.
"세도와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참으로 한심해할 만하다. 허황된 유생의 말을 개의할 것이 뭐 있겠는가. 힘써 넓은 도량을 지녀 즉시 올라온다면 하루살이와 같은 무리들은 저절로 혼이 빠질 것이다. 무엇 때문에 사직하는가."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삼공이 자리를 채우지 못했으니 정승 뽑는 일을 늦출 수 없다. 일찍이 선묘(宣廟)가 사관을 보내어 대신에게 의논했다고 하고, 또 특배하는 규정도 있다고 들었다. 정원은 상고하여 아뢰라."
하니, 회계하기를,
"선조조 때 승지를 우상 정지연(鄭芝衍)에게 보내어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했는데, 지연이 이산해(李山海)를 천거했습니다. 명묘조(明廟朝) 때 어비(御批)로 권철(權轍)을 우상으로 특배했고, 선묘조 때 한응인(韓應寅)을 특명으로 영상에 임명했습니다."
하자,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3월 19일 계사
홍주삼(洪柱三)을 사간으로, 이유상(李有相)을 헌납으로, 이규진(李奎鎭)·여경(呂儆)을 지평으로 삼았다. 정치화(鄭致和)를 우상으로 삼았는데, 정태화(鄭太和)의 동생이다.
3월 20일 갑오
세자의 책봉례를 거행할 때 도감 도제조였던 영의정 정태화 이하에게 각기 차등있게 논상했다.
3월 21일 을미
사은 겸 진주 정사(謝恩兼陳奏正使) 회원군(檜原君) 이륜(李倫), 부사 호조 참판 김휘(金徽), 서장관 경최(慶㝡)가 연경에 갔다. 지난해 겨울 동지사 정지화(鄭知和)가 들어갔을 때 청나라 왕이 상이 벌금으로 낼 은(銀)을 면제해 주었기 때문에 사신을 보내면서 사은도 겸해서 하게 한 것이다.
좌의정 허적이 또 상소를 올려 체직을 빌고 이어서 형벌을 받기를 청했는데, 상이 부드럽게 답하고 본직의 면직을 허락했다.
판중추부사 홍명하가 상소를 올려 중추부 직함을 해직시켜줄 것을 빌었는데, 상이 부드럽게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3월 22일 병신
이경억을 도승지로 특배하고, 홍중보(洪重普)를 예조 판서로, 이유상(李有相)을 교리로, 송규렴(宋奎濂)을 부교리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이동로(李東老)를 헌납으로, 허적을 지충추부사로 삼았다. 이원정(李元禎)을 가선 대부로, 이정(李程)·최일(崔逸)을 통정 대부로 자급을 올렸으니, 모두 책봉례를 거행할 때의 노고 때문이었다.
온천에 거둥할 길일을 4월 11일로 택해서 아뢰었다.
헌부가 아뢰던 이민구(李敏求)의 서용을 도로 거두라는 일을 이때 와서 따랐다.
간원이 이경억과 이단석을 체차하는 일에 대한 논계를 멈추었다.
상이 희정당에서 침을 맞았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들어가 아뢰기를,
"온천 거둥시 지나는 각읍에 대해서 거두는 쌀을 감하여 거두어들이라는 분부가 지난번에 있었습니다. 원읍(遠邑)의 백성들도 왕래하며 지공하느라 역사(役使)에 피폐해졌는데, 유독 은혜를 입지 못하니, 참으로 고르지 못하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거두어 들인 쌀을 덜어내어 도신으로 하여금 지쇄(支刷)한 값으로 나누어주게 한다면, 은혜가 고르게 돌아갈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농사철이 이미 급박해졌으니, 외방의 마병(馬兵)은 징발하지 말도록 하고 도감의 마병 5백 명을 데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3월 24일 무술
우상 정치화(鄭致和)가 상소를 올려 체직을 빌었는데, 상이 부드럽게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3월 25일 기해
최유지(崔攸之)를 집의로, 이익상(李翊相)을 정언으로 삼았다.
3월 26일 경자
장령 권두추(權斗樞)가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탑전의 비밀스런 대화 및 아직 비답을 내리지 않은 상소에 대해서는 누설하지 말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성상의 의도가 참으로 범연한 것이 아닙니다. 대개 근래 조정의 기강이 엄하지 못해 기밀에 관련된 일들이 반드시 모두 먼저 누설되어 아무리 먼 곳이라 하더라도 끝내 전파되지 않는 곳이 없으니, 그 폐단이 참으로 우려할 만합니다. 그러니 엄하게 신칙하는 거조가 부득이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정원의 신하가 전교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비밀스럽게 해야할 지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일체를 굳게 감춘 채 감히 전달하지 않습니다. 추밀(樞密)에 참여한 직임이나 이목(耳目)의 책임을 맡고 있는 신하들까지도 끝내 들을 수가 없으며 심지어는 경악의 유신들이 궐내에 숙직하면서도 조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에 간악한 참소가 틈을 타서 조금씩 스며드는데도 언책을 맡아 논계하는 신하들이 혹시라도 때미쳐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 환난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해방 승지를 무겁게 추고하소서. 기밀에 관련된 일 외에는 계하한 상소나 차자, 경연에서 주고받은 이야기 등을 모두 굳게 숨기지 말도록 하시어 중외에서도 들어 알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헌부가 김익렴을 잡아다 추문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라는 논계를 멈추었다.
우의정 정치화가 재차 상소를 올려 체직을 빌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7일 신축
이숙달(李叔達)을 지평으로, 김석주(金錫胄)를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이비(吏批)에게 하교하기를,
"새로 당상이 된 사람이 이정(李程) 한 사람뿐이 아닌데, 한 사람만을 승지의 망단자(望單子)에 의망하다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회계하여 아뢰기를,
"이정 외에 또 최일(崔逸)이 있었습니다만, 간원이 파직하라는 논계를 막 멈추었으므로 은대(銀臺)의 청선(淸選)에 가벼이 의망할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최일은 금고당하는 벌을 받은 적이 없다. 회계의 뜻을 내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또 근래 정목(政目)간에 온당하지 못한 점이 많았지만 한 번도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 일을 보니 더욱 놀라움을 견딜 수 없다. 당상과 낭관을 아울러 추고하고 망단자는 다시 써서 들이라."
하였다. 이조가 최일을 추가해서 의망하여 들이자 낙점하였다. 또 하교하였다.
"고산 찰방(高山察訪) 조성(趙䃏)을 경직(京職)에 붙이고, 그 자리를 이조 정랑 홍만용(洪萬容)으로 대신케 하라. 남이성(南二星)은 어천 찰방(魚川察訪)에 제수하라."
대사간 강백년(姜栢年), 사간 홍주삼(洪柱三), 헌납 이동로(李東老) 등이 아뢰기를,
"이번 승선(承宣)의 의망은 나름대로 정사의 체모를 따른 것이었으니 그 사이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조의 낭관 두 사람을 서북 지역의 마관(馬官)으로 보임하셨으니, 화평한 도리에 어긋납니다. 성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장령 권두추(權斗樞)도 아뢰어, 홍만용과 남이성을 마관으로 임명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고, 또 논핵하기를,
"승지 최일은 일찍이 간관이 되었을 적에 엄한 위엄에 겁을 먹고는 일에 임하여 회피했으므로 대간의 탄핵을 무겁게 입었습니다. 전하께서 이 사람에게 무슨 취할 점이 있다고 갑자기 특별 제수의 명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또 엄한 비답으로 기를 꺾었다.
3월 28일 임인
장령 권두추가 성상의 준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을 청하면서 최일을 매우 힘껏 공격했는데, 상이 답하였다.
"이 피혐한 내용을 보건대 참으로 가소롭다. 내가 말한바 속박한다는 것을 가지고 도리어 저지 억제한다는 등의 말로 만들어 동료간에 서로 다투는 일처럼 하였으니, 이런 행동이 곧은 기풍이란 말인가, 아, 당파를 비호하는 폐단이 나날이 더욱 깊어간다는 것을 너를 보면 더욱 알 수 있다. 너같은 무리에게 무슨 취할만한 점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3월 29일 계묘
정원이 아뢰기를,
"허적이 이미 재상의 직책에서 체직되었으니 선전관을 보내어 명소(命召)한 밀부(密符)를 싸가지고 오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몸소 직명을 띤 채 법을 어기고 고향에 내려갔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체직을 청했는데, 처치하여 면직시켰다.
지평 이숙달(李叔達)이 권두추를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했는데, 상이 이르기를,
"당파를 비호하는 사람을 그대로 대각에 두어서 그 풍조를 키울 수 없다. 체차하라."
하니, 승지 김우형(金宇亨)·심재(沈梓)가 복역(覆逆)하기를,
"대각의 처치에 공의를 한결같이 맡긴 것은 그 의도가 있는 것인데, 문득 기를 꺾고서 특명으로 체직시키니, 대각을 대우하는 도리가 매우 아닌데다가 뒤 폐단에 관련이 되므로 감히 진달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평 이숙달이 소견이 혼매하여 처치가 타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체직을 청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3월 30일 갑진
정원이 아뢰기를,
"온천 거둥이 점점 다가오는데, 동부승지 최일(崔逸)을 아직도 대간이 논계하는 중이라서 궁전을 지키는 문제와 대가를 호위하는 문제를 모두 품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우선 체직시키라고 일렀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우상 정치화, 판중추부사 정태화·홍명하에게 유시하였다.
"온천 거둥이 아주 가까워졌는데 공무를 집행하고 있는 대신이 없으므로 대가의 수행과 서울에 머물러 지키는 일을 모두 품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일의 체모에 있어 온당하지 못하다. 속히 공무를 집행하여 여러 가지 일을 품정할 수 있도록 하라."
대사간 강백년 등이 이숙달을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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