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3권, 현종 8년 1667년 윤4월

싸라리리 2025. 12. 1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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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4월 1일 을해

상이 목욕했다.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찬성 송시열과 참찬 송준길에게 유시하여 올라오게 했다.

 

행 지중추부사 허적이 상소를 올려 서추(西樞)를 사직했는데, 상이 부드러운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전하게 하였다.

 

교리 이유상(李有相), 부교리 이단하(李端夏)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오늘날의 급선무로는 유현(儒賢)을 불러들이는 일이 가장 급합니다. 지난번 돈독하게 유시하는 교지를 내렸는데도 교지를 받들어 나오려는 뜻이 없으니, 이는 대개 참소하는 말이 망극하므로 정세상 나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애초에 8, 9명의 간쟁하는 신하들을 무겁게 죄주었던 것은, 대개 그들이 당론(黨論)을 하는가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아, 국론이 그치지 않고 있으며 정론은 막기 어려운 것입니다. 위로 조정의 신하로부터 아래로 여항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감히 이 논의를 그르게 여기지 않고 있으니, 그것이 당론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황연의 상소는 마음씀씀이가 매우 참혹했는데, 성상께서 그 정상을 통촉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악을 징계하는 것이 엄하지 못했으므로 아직까지도 도성 아래에 살고 있어, 흉악하고 사악하게 화란을 일으킬 조짐이 막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매우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노니 전하께서는 더욱 성의와 예의를 다하시어 유현으로 하여금 멀리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빨리 돌리게 하고, 전후로 귀양간 신하들에 완전 석방하도록 빨리 명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유현을 불러오는 일에 대해서, 내가 비록 성의가 엷기는 하지만, 어찌 그대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하였다.

 

윤4월 2일 병자

상이 목욕했다.

 

윤4월 3일 정축

상이 목욕했다.

 

중신을 보내어 태뢰(太牢)로써 온양의 공자묘에 제사했다.

 

이 달 9, 10일에 통천(通川)·흡곡(歙谷)·평강(平康)·금화(金化) 등지에 눈이 겨울처럼 내렸고, 24일 함양(咸陽)·의령(宜寧)·합천(陜川)·밀양(密陽)·경주(慶州) 등지에 우박이 내렸다.

 

윤4월 4일 무인

상이 목욕했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윤선거(尹宣擧)가 사직하며 달려오지 않았다.

 

윤4월 5일 기묘

상이 목욕했다.

 

윤4월 6일 경진

상이 목욕했다.

 

윤4월 7일 신사

상이 목욕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허적이 있는 곳으로 다시 승지를 보내어, 환궁하기 전에 빨리 달려와서 내가 날마다 바라고 있는 뜻을 위안하라고 유시하라. 또 각별하게 말을 엮어서 일어나도록 권하여 반드시 함께 오도록 하라."

 

윤4월 8일 임오

상이 목욕했다.

 

우참찬 송준길이 상소를 올려 사직했는데, 상이 부드럽게 비답을 내리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행궁 편전에서 신하들을 인견했다. 판부사 신계영(辛啓榮)이 예산(禮山)으로부터 와서 알현했는데 당시 나이 아흔이었다. 상이 어린 환관으로 하여금 부축하여 들어오게 했는데, 계영은 무리없이 절하고 무릎을 꿇었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그렇게 늙은 나이로 어렵고 먼 길을 오다니, 내가 매우 기쁘다."
하니, 계영이 아뢰기를,
"신이 곧 죽을 나이로 이런 대면하는 은혜를 받았으니, 지금 죽더라도 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노신은 시골에 물러나 있고 이미 망령이 들었으니, 무슨 진달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여덟 명의 간쟁하던 신하가 양이해주는 조처를 받았다고 하는데, 매우 은덕있는 일입니다. 상께서는 이들을 완전히 풀어주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의 뜻을 모두 알았다. 조용히 생각해 보겠다."
하니, 계영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시니, 매우 황감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일어나 앉아서 나를 보도록 하라."
하니, 계영이 머리를 들고 자세히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며 나갔다.

 

조이중(趙爾重)·신인립(愼仁立)·박효상(朴孝相)·권회(權誨)에게 직책을 제수했다. 모두 도내의 사람들이었는데, 홍명하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도내의 노인들에게 옷감과 먹을 거리를 차등 있게 하사했다.

 

윤4월 9일 계미

상이 행궁 편전에 나아가 신하들과 더불어 도내의 죄수들을 소결했다.

 

윤4월 10일 갑신

대사헌 박장원(朴長遠), 장령 소두산(蘇斗山), 지평 이세장(李世長)이 아뢰기를,
"전주 부윤 이연년(李延年)이 감히 감사가 머무는 곳에 말을 탄 채 섬돌 앞으로 곧장 들어갔는데, 문을 지키는 졸병을 마구 때리며 꾸짖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상관을 능멸한 방자하고 기탄없는 정상이 참으로 매우 해괴합니다. 우선 파직한 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감사 홍처후(洪處厚)는 도신의 몸으로서 이미 부하에게 모욕을 받았다면, 계문하여 죄를 청하는 것이 일의 체모상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소를 올리고는 체직을 바랐으니, 무르다는 기롱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승지 심재(沈梓)가 충주에서 돌아와, 지중추부사 허적이 사직하며 부름에 달려오지 않았다고 아뢰었다.

 

충청 감사 이민적(李敏迪)의 진달로 인하여, 호서의 노비 신공을 탕감했다. 을사년조로 응당 받아들여야 할 수량이었다.

 

문천(文川)·고원(高原) 땅에 이달 23일에 우박이 내렸고, 함흥(咸興) 땅에 우박과 눈이 번갈아 내렸는데 거의 반 자에 이르렀다.

 

윤4월 11일 을유

상이 수레를 돌렸다. 저물자 직산에 머물렀다.

 

윤4월 12일 병술

상이 수원에 머물렀다.

 

행 지사 허적이 와서 알현하자, 상이 장전(帳殿)에서 인견했다. 허적이 부복한 채 눈물을 흘리고 사정을 갖추어 진달히기를,
"신이 한번 행차를 보고자 하여 이곳에 와서 삼가 문후합니다만, 정세가 위태로우므로 사은 숙배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대면을 하겠다는 명을 받자오니, 부질없이 지극히 송구스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한결같이 인혐하나 일의 체모로 보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사사로운 정으로도 간절히 만나고 싶었는데 만날 수가 없었다. 지금 다행히 와서 만나게 되었으니 매우 위안도 되고 기쁘다. 사은 숙배하기가 불안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변변치 못함으로 인하여 동료 재상이 낭패를 보았고 일을 논하던 신하들이 모두 귀양을 가게 되었으니, 신이 조정에서 어떻게 차마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수상의 일에 있어서는 명백하게 증거삼을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 당시 원접사(遠接使)의 장계를 지금 만약 가져다 본다면 실상을 환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장계에 있지도 않은 일로써 동료 재상으로 하여금 이런 막중한 죄를 얻게 했고, 이로 인하여 성상의 마음이 격렬해져 중도에 어그러지는 조처를 많이 내리게 했으니, 이것이 신의 마음이 더욱 불안한 이유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근거없는 일을 말했기 때문에 시비를 밝히고자 한 것일 뿐이다. 이것이 어찌 경이 초래한 것이겠는가. 오랫동안 보지 못하다 잠깐이나마 이렇게 상봉했는데, 경이 어째서 다시 물러나려 하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나 선조(先祖)께서 골육지친으로 대해주신 은혜를 죽어도 잊기 어려운데, 상께서 돌보아주시는 뜻을 생전에 또한 보답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국가에 불행한 일이 생겨 신을 쓸 때가 있다면 신이 어려움을 핑계하지 않고 즉시 달려가겠습니다. 지금은 정적(情迹)이 참으로 어가를 따라 강을 건널 면목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물러가고자 하였으나 성교가 간절하니, 신이 뒤에서 따라가다가 중도에서 물러갈 계획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을 건너는 것이 무슨 혐의가 된다고 굳이 중도에서 물러가려고 하는가? 경이 강을 건너 도성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면 잠시 도성 밖에 머물면서 한번 면대한 뒤에 거취를 결정해도 될 듯한데, 이것도 하기 싫은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정세가 아무리 불안하다고는 하나 나의 이 청을 어찌 차마 생각지 않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이 간절하니, 목석이 아닌 이상 눈물만 흐를 뿐입니다."
하니, 상이 승지 이정(李程)에게 이르기를,
"허 지사가 올라올 때 말을 제공하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가 어가가 너무 빨리 달려서 거조가 엉망이라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간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 행차에서 상이 말을 매우 빨리 몰아 시각을 넘기기도 전에 번번이 하나의 역참을 지났는데, 어가를 수행하는 백관들이 쫓아갈 수가 없었으며 길에서 엎어져 죽는 호위 군졸들도 있었다. 그래서 이 간언을 했던 것인데, 상이 끝내 그 말을 채택하지 않았으므로 양사가 모두 인피했다.

 

윤4월 13일 정해

상이 환궁했다. 어가가 서빙고 너머 모래사장에 머물 때 별군직 무사(別軍職武士)로 하여금 일자진(一字陣)을 이루게 한 뒤 일시에 돌격하게 하여 구경하고는, 초저녁에 환궁했다.
대개 별군직이라는 것은 효종 즉위 초에 중외의 무사 가운데 용기와 힘이 뛰어난 자들을 모집해서 군직을 제수하여, 번을 나누어 궐내에 직숙하게 하였으며 거둥할 때에는 반드시 수레를 에워싸고 가게 했다. 그리고 때때로 후원에서 불러 보아 재능을 시험하고는 상을 후하게 내렸고 간혹 발탁하여 변방의 큰 고을에 제수하기도 했는데, 늙은 자는 비록 퇴직시켰지만 모집해서 대신 채웠다.

 

윤4월 14일 무자

동래부(東萊府)의 왜관(倭館)에 불이 나서 모두 탔는데 왜인들이 몸만 빠져 나와 죽음을 면했다. 부사가 치계하여 상황을 알리고, 이어서 신유년 화재 때의 전례대로 동서관(東西舘) 및 좌우의 행랑을 지어줄 것을 청했다.

 

함경도에 큰 기근이 들어, 관서의 영원(寧遠)·맹산(孟山)·양덕(陽德)에 쌓아 둔 관향곡(管餉穀) 1만여 곡(斛)을 옮겨다가 북관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감사 민정중(閔鼎重)의 계청을 따른 것이다.

 

윤4월 17일 신묘

가뭄으로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내리고, 전례대로 정전을 피하고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 연주를 그쳤다.

 

상이 대신 및 재상·금부·형조·삼사의 관원들과 더불어 경외의 죄인들을 소결했다. 판의금 홍중보(洪重普)가 나아가 유배된 윤선도(尹善道)의 죄목을 아뢰니, 상이 각자의 소견을 말하라고 일렀다. 우상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죄목이 비록 중하기는 하나 귀양간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나이도 늙어 죽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도리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렇지만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으니, 삼사에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대사헌 박장원(朴長遠), 교리 이단하(李端夏)가 석방하는 것은 안 된다고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그의 죄가 비록 무겁다 하나 나이가 이미 늙었으니, 지금 석방해서 집에 돌아가 죽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옳겠다."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석방한 뒤에 만약 시끄러운 의논이 있게 된다면, 애초 거론하지 않은 것만도 못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약 무죄라고 여겨 석방한다면 대간이 간쟁하는 것이 옳겠지만, 나이가 늙어 곧 죽으려 하기 때문에 석방하는 것이니, 어찌 다시 시끄러운 의논이 있겠는가."
하였다. 지의금 이경억(李慶億)도 석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중보도 역시 반드시 뒤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중보가 또 이숙(李䎘) 등의 죄목을 아뢰니, 상이 이들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석방시키라고 청하자, 상이 이숙 등을 아울러 석방하라고 명했다.

 

상이 판부사 정태화와 홍명하를 명초해서, 내일 소결할 때 나와 참석하라고 했다.

 

윤4월 18일 임진

이 달 21일에 평창(平昌)·정선(旌善) 등지에 서리가 내렸다.

 

상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전례대로 죄인들을 소결했다. 상이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근래 궁중에 귀신의 변괴가 많았는데 자전께서 계시는 곳이 더욱 불안했으므로 지난번 경덕궁(慶德宮)에 받들어 옮겼다. 그러나 자전께서 옛 궁을 계속 폐지해 둘 수 없다고 여겨 지금 다시 돌아오셨는데, 변괴가 여전하다. 변통하는 조처가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경복궁의 옛 터에 간단하게 새로 궁을 지으려 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비록 절박한 데서 나왔다 하나 이 일은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양(陽)의 덕이 성하면 음(陰)의 사특함은 저절로 사라지는 법입니다. 이 시기에 어떻게 갑자기 토목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매우 절박하셔서 이런 분부를 하셨을 터이니, 유사에게 물어 재목과 칸수와 제도를 헤아려 너무 사치한 데 이르지 않으신다면 또한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우상 정치화가 안 된다고 힘껏 말하면서,
"가뭄이 이렇게 참혹하니, 비록 일심으로 하늘을 대하고 안정하면서 일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하늘의 견책에 답하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이 시기에 만약 역사를 일으킨다면 백성들이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기어이 이번 일을 하신다면 나라는 틀림없이 망할 것입니다. 어떻게 나라가 망했는데 자전께서 홀로 안락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하기까지 했는데, 상이 묵묵히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나도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형세가 매우 절박하기 때문에 대신들과 더불어 상의하는 것이다. 만약 안 된다고 한다면, 어찌 억지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어기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애당초 지극한 심정에서 나왔는데 뭇 아랫사람의 말을 듣고 문득 받아들이시니, 이는 참으로 성덕의 일입니다."
하였다.

 

윤4월 22일 병신

영녕전(永寧殿)의 신위를 경덕궁(慶德宮)으로 옮겨 안치했는데, 이는 대개 영녕전을 다시 건축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상이 태묘의 문 안에서 공경히 전송했다.

 

신주를 옮기는 수레의 긴 손잡이가 부러졌으므로 도감의 해당 낭청들이 모두 법을 맡은 관리에게 회부되었다. 도제조 이하는 차자를 올리고 대죄했다.

 

윤4월 23일 정유

이때 염병(染病)이 크게 번져, 서울 백성들 중 성밖에 나가 장막을 친 자 및 동·서활인서에 수용된 자들이 거의 수천 명에 이르렀으며, 관동과 관서의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이 뒤를 이어 모여들었는데, 오부(五部)로 하여금 그 실제 숫자를 파악하여 각각 양식 거리를 지급하게 했다.

 

윤4월 27일 신축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삼았으며, 다시 홍명하(洪命夏)를 영의정으로, 허적(許積)을 좌의정으로 삼았다. 이때 허적이 충주에 있었는데, 사관을 보내어 올라오라고 유시했다.

 

윤4월 28일 임인

함경도에 가뭄이 매우 심했는데 단천(端川)·삼갑(三甲) 등지에 이달 10일에 서리와 눈이 내렸다.

 

윤4월 29일 계묘

판중추부사 허적이 소사(素沙)로부터 진위(振威)에 이르러 뒤에 남아 상소를 올리고 면직을 청했는데, 상이 사관을 보내어 유시하였다.
"지금 이 상소를 보고, 마음을 아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더욱 탄식한다. 이제 막 의정에 제배했으니 굳이 사직하지 말고 즉시 올라와서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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