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8권, 효종 8년 1657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2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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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임신

헌부가 아뢰기를,
"전 검찰 부사(檢察副使) 이민구(李敏求)가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려 종사에 죄를 얻었습니다. 그러고도 홀로 형벌을 면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비록 종신토록 폐고(廢錮)되어 있더라도 그에게는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찌 다시 벼슬길에 나와서 보통 죄진 사람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도 서용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양사가 간쟁하여 마침내 성상의 마음을 돌렸으므로 여론이 모두 유쾌하게 여겼는데, 어찌 오늘날 또 서용하라는 명이 내릴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민구 서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뢴 뒤에야 따랐다.

 

사간 이정영(李正英)이 인피하기를,
"방금 정언 목래선(睦來善)과 상견례를 행하고, 이민구의 일을 가지고 완석(完席)에서 발언하기를 ‘이 논의는 이미 공론하는 자리에서 나온 것으로서, 여러 사람의 울분이 날로 심해지고 있으니 간관 신분으로서 지체할 수 없으니 오늘 논계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였더니, 내선이 말하기를 ‘소명(召命)이 마침 내려져서 부득이 나와서 사은하였으니 자신을 탄핵할 겨를도 없다. 어찌 감히 남을 논하겠는가.’ 하기에, 신이 또 말하기를 ‘이미 완석에게 수령에 대하여 서경(署經)하여 놓고 어찌 그 사이에 피차의 경중을 가려서 유독 이 논의에만 참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료가 끝내 들어 주지 않았으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그들의 진퇴하는 것을 기다려서 다시 논계해야겠다고 하고는 이렇게 파했습니다. 그런데 이윽고 물의(物議)를 듣건대 모두 이미 발언해 놓고 그만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구차하게 눌러 있을 수 없으니 신의 직책을 체차하소서."
하고, 정언 목래선이 인피하기를,
"동료가 이민구를 서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는 문제를 석상에서 발언하기에 신이 ‘명을 받고 서경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나 남의 시비를 논의하는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다.’고 답하였더니, 동료도 역시 그렇게 여겼습니다. 동료가 신 때문에 인피하였는데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얼굴을 들고 눌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책을 체차하소서."
하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니, 정영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발언 석상에서 동료의 의론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동료의 진퇴를 기다리고자 하였으니 비록 즉시 와서 인피하지 않았으나 잘못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출사하고도 이미 제기된 논의를 따르지 않았으니 뒤로 미룬 잘못을 면키 어렵습니다. 사간 이정영은 출사케 하고, 정언 목래선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일 계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신은 안흥(安興)의 새 진(鎭)을 본 적이 없어서 형세가 어떠한지 모릅니다만 이저(李竚)가 말한 것을 가지고 헤아려 본다면 형세가 좋은 것 같습니다. 다만 여러 사람이 모두 물이 없는 것을 걱정하니 폐지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자,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과연 물이 없다면 어떻게 쓰겠습니까."
하고,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이 곳의 형세는 사면이 모두 물인데 한 면은 조수(潮水)가 드나들므로 적병이 비록 오더라도 만일 굳게 지킬 수 있다면 필경 적들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개펄을 파내지 않더라도 어찌 평야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만일 적이 이 곳을 먼저 점거한다면 국가의 조운(漕運)하는 길이 반드시 끊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조운이 끊긴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이 곳은 실로 삼남의 관문이다. 무릇 일은 충분히 강구해야 하는 것이므로 헤아려 의논해 처리해야지 오늘 경솔하게 폐지해서는 안된다."
하였다.

 

6월 4일 을해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는데, 상이 서교에 거둥하여 전송하였다.

 

6월 5일 병자

헌납        이무(李袤)가 상소하기를,
"아, 천재지변과 인요물괴(人妖物怪)가 거듭 나타나는데 사기에도 보기 드문 일로서 이러한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역시 나라를 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변괴는 까닭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니 어찌 매우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대개 재이가 일어나는 것은 애정을 가진 천심(天心) 때문입니다. 옛날 잘 하려고 하는 임금이 혹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반드시 경계를 보이지만 포기한 임금은 하늘도 잊어버려서 도리어 재이가 없었으니, 재이가 없는 재앙이 재이가 있는 재앙보다 더 두려운 것입니다. 《서(書)》에 이르기를 ‘하늘이 선을 드러내고 악을 벌하는 것은 우리 백성이 선을 드러내고 악을 벌하려는 의도에 따라 한 것이다.’ 하였으며, 선현이 말하기를 ‘천재의 태반은 백성의 원성에서 나온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한 사람의 원망도 충분히 재앙을 부를 수 있다.’ 하였으니, 성현이 어찌 우리를 속이겠습니까.
신이 삼가 보건대, 지금 백성의 곤핍함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보다 더 심합니다. 책임을 대신 지게 된 헐벗은 친족과 이웃들이 아우성들이니 백성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으며, 세초(歲抄)에 든 강보의 어린애가 울어대니 백성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으며, 선상(選上)028)                  의 입법이 매우 엄밀하니 백성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으며, 환곡의 포흠(逋欠)을 모두 거두니 백성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으며, 성세만 있고 형체는 없는 영장(營將)의 소요에 백성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으며, 지키기는 어렵고 뺏기기는 쉬운 산성(山城)을 헛되이 쌓으니 백성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오늘날 백성의 원성이 이렇게 심하니 오늘날의 천재가 이렇게 혹독한 것은 조금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전하의 영명하심으로 천운이 막힘을 당하여 분발하여 진작하기를 우레가 치고 바람이 불듯이 하니 다시 회복될 형세가 팔구 할은 이루어졌을 만도 한데, 백성의 원성이 이러하고 하늘의 노함이 이러하니 신은 개탄하고 있으나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 요령을 얻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신은 옛날 책 중에서 그 한두 가지 계책을 얻었습니다. 옛날 월(越)나라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곤욕을 당했을 때 사방 1백 리였는데도 나라 안의 부형(父兄)을 초치하여 맹세하기를 ‘과인은 듣건대 옛날의 임금은 백성이 모여 들기를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모이는 것처럼 한다고 하는데 과인은 몇 사람도 거느릴 수 없으니, 부부(夫婦)로써 번식하게 하리라. 젊은이는 늙은 여자에게 장가들지 말고 늙은이는 젊은 여자에게 장가들지 말라. 여자가 17세가 되었는데도 시집가지 않거나, 남자가 20세가 되었는데도 장가들지 않으면 그 부모에게 죄가 있다. 장차 애를 낳을 자가 알리면 의사로 하여금 돌보게 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술 두 병과 개 한 마리를, 딸을 낳으면 술 두 병과 돼지 한 마리를 주고, 세 명을 낳으면 관에서 보모를 주고 두 명을 낳으면 관에서 먹여 주었으며, 적장자(嫡長子)가 죽으면 3년간 부역을 면제해 주고 서자(庶子)가 죽으면 3개월간 부역을 면제해 줌과 아울러 반드시 아들처럼 울면서 매장하였으며, 고아와 과부와 전염병이 든 자와 가난하고 병든 자는 그 아들을 관에 들이게 하였으며, 달통한 선비는 잘 입히고 배부르게 먹이고 의(義)를 연마케 하였으며, 사방의 선비가 오면 예를 갖춰 종묘에 고하였으며, 쌀과 고기를 배에 싣고 가게 하여 나라 안의 나그네가 먹지 못함이 없었으며, 몸소 심지 않은 것이면 먹지 않고 그 부인이 짠 것이 아니면 입지 않으며, 10년 동안 나라에서 거두지 않으니 백성의 집에 3년 먹을 양식이 있었습니다. 나라의 부형이 복수하기를 세 번 청한 후에 허락하니 나라 사람이 모두 권면하였습니다. 아비는 아들을 격려하고, 형은 동생을 격려하고, 아내는 남편을 격려하면서 말하기를 ‘누가 이 우리 임금 같은 이를 위해 죽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대개 범려(范蠡)의 꾀였습니다. 현인을 얻고 백성을 기르기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후세에 혼란을 다스리는 임금이 마땅히 본받을 일입니다. 백성이 원망하는데 끝내 그 뜻을 이룬 자는 없었습니다.
당 의종(唐懿宗)은 감국(監國)을 파견하여 재신(宰臣) 중에 성과가 없는 자를 아뢰게 하여 위법으로 단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두종(杜悰)이 양 공경(楊公慶)에게 말하기를 ‘주상이 새로 즉위하였으니 마땅히 인애로써 우선을 삼아야 할 터인데 어찌 살생하는 일을 찬성해서야 되겠는가. 만일 훗날 습관이 되면 여러분들이 걱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공경이 이를 아뢰니 제(帝)의 뜻도 풀어졌습니다.
경력(慶曆)029)                   때에 강도(强盜)인 장해(張海)가 고우군(高郵軍)을 지날 때 조중약(晁仲約)이 백성들로 하여금 고기와 술로 위로하게 하니 장해가 기뻐하여 난폭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이 일을 조정에 알리자 부필(富弼)이 주살하고자 하니 범중엄(范仲淹)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필이 말하기를 ‘요즈음 법이 지켜지지 않아 걱정인데 여러 모로 저지하니 어떻게 대중을 다스리겠는가?’ 하니, 중엄이 말하기를 ‘조종조 이래로 신하를 가볍게 죽인 적이 없었다. 이러한 성덕의 일을 왜 허물하고자 하는가. 훗날 주상이 이에 익숙해지면 여러 신하들이 감히 자신을 보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였으나, 부필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뒤 그가 하북(河北)으로부터 조정에 돌아올 때 도성의 문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조정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여 밤새 방황하며 잠도 못자고 평상을 돌면서 탄식하기를 ‘범 선생은 성인(聖人)이다.’ 하였습니다.
건염(建炎)030)                   초기에 간관 원식(袁植)이 황잠선(黃潛善) 등을 주살할 것을 청하자, 고종이 이르기를 ‘짐은 방금 자책하고 있는데 어찌 허물을 남에게 전가할 수 있겠는가.’ 하니, 여이호(呂頣浩)가 아뢰기를 ‘본 조정의 신하에게 비록 죄가 있더라도 가볍게 벌하니, 성대한 덕이 족히 하늘에 영원한 운명을 빌 수 있습니다. 원식의 이 말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폐하의 덕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중엄의 말은 두종과 대략 같으며 모두 지극한 논의이니 임금된 자가 거울삼을 만하다. 크도다, 고종의 덕이여. 지극하도다, 이호의 말이여. 당시에 만일 원식의 말에 따른다면 잠선 등은 죽고도 남을 죄가 있다. 그러나 이 문을 한번 열어 놓았다면 그 후 진회(秦檜)가 국권을 휘둘렀을 때 착한 사람들을 제거하면서 얼마나 화를 빚어냈었겠는가.’ 하였는데, 이것은 송나라의 신하 나대경(羅大經)의 말입니다.
신은 진실로 성명의 시대에 이런 일이 분명히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혹 비명에 죽은 자가 있다면 비록 자초한 것이라 하더라도 형벌이 대부에게 미치는 것은 옛 사람이 심히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대소 신료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나,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있어서는 결국 후세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 가슴 아프고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썩은 해골도 어두운 지하에서 원한을 머금을 것이니 이 역시 어진 정치로는 차마하지 못할 일이며 화기가 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 태종(唐太宗)이 위징(魏徵)에게 이르기를 ‘짐의 정치가 과거에 비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위엄으로 억누르는 것은 과거에 비하면 훨씬 낫지만 인심이 기뻐하며 복종하는 것은 과거보다 못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간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항상 유도하여 말하게 하였고, 중간에는 기꺼이 따르시더니, 지금은 애써 따르시면서도 힘든 기색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일에 대하여 자세히 들을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옛날에 원률사(元律師)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손복가(孫伏伽)가 법으로 볼 때 죽일 수 없다고 간하자 상으로 난릉 공주(蘭陵公主)의 동산을 하사하셨습니다. 그 동산의 값이 백만 전이나 되므로 어떤 이가 너무 후하다고 하자, 폐하께서는 ‘간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상을 주었다.’고 하셨으니, 이는 말하게 유도한 것입니다. 사호(司戶) 유웅(柳雄)이 망령되게 자품이 떨어진 것을 호소하자 폐하께서 죄를 주려고 하다가 대주(戴胄)의 간언을 받아들여 그쳤으니, 이는 기꺼이 따른 것입니다. 근래 황보덕삼(皇甫德參)이 글을 올려 낙양궁(洛陽宮)을 폐지할 것을 청하자 폐하께서는 성을 내셨으니, 비록 신하의 말을 따라 폐지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애써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이 아니면 이런 것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니 괴롭게도 스스로 모르고 있었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근래 조정의 신하들이 자못 일을 논하지 않고 있는데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말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무릇 신하들 중에는 나라를 위하는 자는 적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많으니, 저들은 죄를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한 처음에는 기어코 훌륭한 정치를 일으켜 보고자 현인을 좋아하여 위세를 잊었으며 마음을 비우고 선을 좇았으니, 역시 유도하여 말하게 한 것이며 역시 기꺼이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 못해 따르고 힘든 기색이 있는 등 점점 처음보다 못해지면서 하문하는 성의가 도리어 당 태종의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보다 못하며,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조용히 있으면서 죄를 두려워하여 침묵을 지키는 것도 당나라보다 더욱 심한 점이 있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뜨거운 국물에 놀라 양념을 불어내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는 전하의 기세가 일세를 덮어서 여러 신하를 멸시하고 있으므로 비록 간쟁하더라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신료들이 임금에게 아뢰는 말이 아주 우매하고 성의가 부족하여 감동시키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말이 곧고 절실하여 성상을 공격해도 혹 온화하시며, 말이 진부하여 이미 쓸모없이 된 것이라도 혹 진노하시니 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으며, 역시 간쟁을 막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릇 사람은 춤을 추게 좋은 마음은 잊기 쉽고 좌절된 기백은 진정시키기 어려운 것이므로 모두 상께서는 직간을 듣기 싫어 한다고 하면서,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는 것을 지혜로, 비위를 거스리는 말과 이치에 맞는 주장을 미치광이로 여기면서 이를 부귀를 누릴 터전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식견이 있는 자가 크게 한숨을 쉬고도 부족한 것입니다.
엊그제 대각의 신하가 폄하(貶下)를 당하였을 때 풍헌관이라는 것을 믿어 피혐할 것은 생각지 않고 우물쭈물 하다가 일처리를 모호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라도 죄없이 죽는 것을 성상께서 측은해 하시니 법을 집행하는 관원은 진실로 이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원근의 어리석은 백성은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전하께서 궁노(宮奴)를 위해 대관을 죄준다고 하며, 무지한 궁노 또한 서로 자랑하며 세력을 부려서 백성들이 감히 마주 대하지 못한다면, 비록 작은 일이지만 끝내는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니 역시 성대한 세상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진 신하들은 일에 부딪치면 지나치게 과격하니 그 허물을 보면 그 기상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잘 길러주고 해치지 않는 것은 전하께서 어떻게 배양하는가에 달렸습니다.
아, 천재(天災)는 예측하기 어렵고 어떤 응험이 오리라는 것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만, 흰 무지개와 태백성은 전쟁의 징조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려울 때를 대비하는 것은 시급히 해야 하므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하여 늦출 수 없으며,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하여 정지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군민(軍民)은 그 명목이 너무 많습니다. 갑사(甲士)·정병(正兵)·보병·육군·수군·선상(選上)·조례(皂隷)·나장(羅將) 등이 있어서, 번(番)을 서는 자도 있고 군포를 내는 자도 있는데 군포를 준비하지 못하면 잇달아 도망가고 있어서 그 친족과 이웃에 대신 독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속오(束伍)까지 있어서 원군(元軍)과 사천(私賤)들은 한 몸에 백 가지 역할을 하므로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여름 내내 밭에서 고생하다 피골이 상접되었는데 가을 훈련 시기가 닥치면 장수의 명령이 화급하니, 군복과 군장(軍裝)은 어느 겨를에 준비하며 공사(公私)의 채무는 어떻게 갚겠습니까. 근심이 가득한 채 오랫동안 관문(官門)에 있고, 반 결(結)의 복호(復戶)는 모두 군량을 싸는 데 들어가니, 얼굴을 찡그리고 서로 수근대며 원망이 번갈아 일어납니다. 비록 기예(技藝)가 잘 다듬어지고 기계가 정비되었더라도 뭇 원망은 막기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다듬어지지도 못하고 정비되지도 못한 것이 과거와 같은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유사가 봉행하는 것은 순종하기 위한 것이고, 영장이 과장하는 것은 자기의 공으로 삼기 위한 것이니 전하에게는 조금도 이익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화를 빨리 오게 하고 원망을 부르는 것이 여기로부터 시작되고 있으니 이 무슨 일입니까. 허와 실은 헤아리지 않고 숫자만 채우려고 힘써 속박하고 채찍질하여 고혈을 짜내면서 물불 속으로 몰아넣고도 돌아보지 않고 있으니, 혹 급한 일이 있을 때 과연 망하기를 바라는 백성에게서 도움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봄에는 가물고 여름에는 장마가 져서 토질이 척박해져 보리나 밀은 전혀 없고 다른 밭곡식도 모두 흉년이 들었으므로 앞으로 구황(救荒)하기에 겨를이 없을텐데 어느 겨를에 병정(兵政)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목격하였는데 안에서는 군기(軍紀)가 성 안에 가득하고 병기와 말이 즐비하며 밖에서는 활과 화살을 허리에 차고 점호하는 소리가 요란하여 마치 난리 속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또한 무슨 기상이란 말입니까. 옛말에 ‘덕을 펴지 군사를 사열하여 위엄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또 ‘군사는 불과 같아서 단속하지 않으면 장차 자신을 불사르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 심히 절실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우연히 《오자(吳子)》란 책을 보았는데 한 가지 불화(不和)라는 설에 대해 흥미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조정이요 둘째는 장수이며 셋째는 군졸인데, 하나라도 불화하면 다른 두 가지도 따라서 불화하게 되는 법이니, 어떻게 군사의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서울에서 들었는데 붕당의 폐해가 심하다고 합니다. 아무개는 어느 당이므로 길을 열어주고 아무개는 어느 편이므로 길을 막는가 하면 자기의 당이 아니면 말을 만들어 공격하고 만일 자기 편이면 추켜올리면서 국가의 존망에 대해서는 마치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보고만 있는데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한 가닥의 맑은 의론이 근래에 전조(銓曹)에서 있자 사람들이 더러 훌륭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인화하고 협동하는 아름다움을 만일 오늘날 볼 수 있게 된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전하의 공명함으로 한 사람이라도 사사로운 탐관오리를 힘써 제거하기에 달렸습니다.
아, 하늘에 실지로써 응하고 말치레로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덕을 닦는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성인의 덕은 요 순보다 더 나은 이가 없고 요순의 덕은 효도와 공순일 뿐입니다. 전하의 효도하고 우애하는 지극한 정은 천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요 순과 은연중 일치하고 있으니 한(漢)        당(唐) 이후 예의를 아는 임금으로서는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하늘에게 실지로 응하는 것이 이외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인애하는 하늘이 친절히 명하니 전하께서는 두려워하며 고치셔서 아직 닦이지 않은 정치를 닦아 완성하십시오.
재이가 비록 많더라도 덕을 닦으면 그치게 할 수 있으며 결함이 있는 정치가 비록 많더라도 인재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탄식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더구나 오늘날은 세상이 쇠퇴하여 인물이 드뭅니다. 5백 년에나 한 번 나는 뛰어난 인재는 비록 쉽게 얻을 수 없더라도 두세 명 정도의 어진 신하야 어찌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늘이 인재를 배출하므로 다른 시대에서 빌려오지 않아도 역시 한 시대의 일을 마무리 질 수 있는 것이니, 재야에나 현 벼슬아치 중에 반드시 그런 사람이 있을 터인데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 걱정입니다.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전하께서 알고 공경하며 믿으시는 자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서로 공경하기를 스승이나 벗과 같이 하며, 서로 믿기를 사시(四時)처럼 하며, 친하기를 부자(父子)와 같이 하며, 서로 합치하기를 부절과 같이 하여, 이간하는 말로 인해 멀리하지 말며, 그의 권세가 크다고 하여 시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의(注擬)할 즈음에 두 전조와 삼공의 의논이 일치하여 쓸 만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임용하되 의심하지 말며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의심없이 버리십시오. 은혜나 원망을 생각지 말고 현인이나 유능한 이만 등용하되 한 가지 기능을 가진 자라도 반드시 기록하여 놓치지 마시고 내외의 많은 관원이 각각 제 임무를 수행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병사(兵使)는 그 육군을 사랑하며, 수사(水使)는 그 수군을 사랑하며, 수령은 그 백성을 사랑하며, 우후(虞候)·첨사(僉使)·만호(萬戶)·권관(權管)은 각각 그 졸병을 사랑하여, 그들의 고통을 짐작하여 편의에 따라 알맞게 가감하며 은혜로써 도와주고 상벌을 공평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요역을 줄여주고 군포를 덜어주어 오로지 연습에만 전념하게 하면 모두 병사가 되기를 즐거워하여 비록 힘들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며, 전쟁에 임해서는 창을 들고 함께 일어나 먼저 뛰어 나가 모두 의분을 품고 윗사람을 어버이 같이 여기며 윗사람을 위해 죽을 것입니다. 병사와 수사를 간택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영장을 별도로 파견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군사의 마음을 잃기에 알맞을 뿐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인심이 향하는 바에 따라 하늘의 뜻을 돌릴 수 있어서 원망하는 기운을 화합하는 기운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재이를 좋은 징조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되어 다시는 오늘과 같은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작게는 백 년을 무사할 수 있을 것이며 크게는 사방으로 횡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일한 공이 고요하고 무사한 중에 저절로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만전을 기하소서.
아, 여유 있는 중신은 계책이 원대하고 고락을 같이한 원로는 충성을 다하였으나 모두 오활한 것으로 여겨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신 같은 자의 어리석은 소견은 한 치의 막대로 큰 종을 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명색이 간관의 직책에 있는데 어찌 스스로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뜻밖에 말을 구하는 하교가 마침 상소하려고 할 즈음에 내려졌는데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하셨습니다. 이 마음이 전하의 마음과 맞은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신의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는데 바야흐로 언관의 직책에 있으니 성상의 분부를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상소를 올릴 즈음에 임박하여 봉을 뜯어 다시 남은 생각을 적었습니다.
아, 사치의 화는 천재보다도 심하니, 집과 옷을 화려하게 꾸미고, 음식은 별미(別味)만을 찾아 귀한 이와 천한 이가 서로 능멸하여 재물이 날로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신은, 먼저 스스로 절약하고 검소하게 함으로써 이런 근심을 구제하였으면 합니다. 기강이 문란한 것은 사람에게 비병(痞病)이 있는 것과 같은데, 왕의 기강이 이미 해이해져서 명분이 엄격하지 않으며 위엄과 형벌로 단속하기 어려워서 나쁜 풍속이 산이 무너지듯 번지고 있습니다. 신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만 가지 조목을 바르게 하였으면 합니다.
우선, 관의 창고에다 평소에 곡식을 쌓아두는 의도는 구휼하려는 것인데 일시에 채무를 독촉하고 있으므로 곤궁한 백성들이 부지할 수 없습니다. 신은, 잠시 동안 포흠(逋欠)을 받아들이는 일을 정지하였다가 풍년을 기다려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지형이 험난하고 견고한 것은 인화보다 못하나 신축한 산성은 이미 지난 것이라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신은, 앞으로 다른 곳에는 성을 쌓지 않았으면 합니다. 모두 다 나의 적자(赤子)이며 나의 백성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추쇄의 폐단에 대해서는 묘당에서 이미 모두 말하였습니다. 다만 신은, 다시 추은(推恩)하여 노비가 없을까 걱정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무예로나 문장으로나 출신하는 데 있어서는 같습니다만, 조종조로부터 예우에 다름이 있는 것은 대개 고려말에 무신이 발호한 것을 징계해 그런 것인데 송나라가 번진(藩鎭)을 걱정하여 병권(兵權)을 뺏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호탕하고 용맹스런 기개를 꺾을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만일 문신을 능멸하는 조짐이 있다면 국가에서 법을 제정한 뜻이 아닌 것 같으니 역시 깊이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죄가 있는 자를 모두 용서하는 것은 주나라 시대에도 어려운 일이었는데 오직 전하께서는 이를 능히 하셨으니 매우 성대한 덕으로서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강화도의 한 여죄수는 역모에 참여하였으니 만 번 죽어도 속죄할 수 없으나 스스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도리에 대해 당초 유신들이 상소로 간절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어찌 의롭지 않는 일을 현자가 말하였겠습니까. 역시 성상께서 진념해야 할 곳입니다. 재야에 버려진 현인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에 있는데, 은거하여 몸을 닦은 선비는 거의 모두 등용하였으나 풍파로 인해 떨어져나간 선비는 헛되이 반평생을 보냈으니 그들은 비록 번민이 없다 하더라도 성스러운 시대에 어떻다 하겠습니까. 하후승에게 비교하면 차이가 있습니다. 아,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흥하려면 반드시 간하는 신하에게 상을 주고 장차 망하려면 반드시 간하는 신하에게 죄를 준다.’ 하였는데, 간하는 신하란 스스로 간하는 신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간하는 신하라는 이름을 이루게 하는 자는 임금입니다. 상을 주면 이름이 드러나지 않으나 죄를 주면 이름이 더욱 유명해져 백세(百世)토록 이름이 전해지고 청사에 빛납니다. 국가는 망하는 것을 피하지 못하며,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니, 이는 간신의 복이며 나라의 화입니다. 삼대 이전에는 간하는 신하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가 직접 대하여 말씀해 주는 것보다도 더 간곡한데도 초야의 신하 중에 한 마디라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대개 불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 천하는 얻을 수 있으나 필부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필부의 마음은 얻을 수 있어도 오직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옥음(玉音)을 한 번 내리자 천 리에 큰 비가 내렸으니 하늘에 응답한 효험을 더욱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비록 비가 왔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재난이 없을 때에 항상 재난이 있을 것을 경계하였다면 어찌 한재가 이다지도 심했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두려워하며 생각하소서.
신은 대대로 국록을 먹는 집안에서 생장하였으나 아직 나라의 은혜를 갚지 못하였으니 늙은이가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충심은 아직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깊이 든 병 때문에 외람되이 직책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기 전에 돌아가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주시길 빕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신의 관직을 삭탈하셔서 미천한 분수에 편안히 있게 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걱정하고 사랑하는 성의를 내 가상히 여긴다.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올라오라."
하였다.

 

6월 6일 정축

홍중보(洪重普)를 대사간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사간으로 삼았다.

 

갑주(甲胄)를 만들어 금군(禁軍)에게 나눠주라고 명하였다.

 

6월 7일 무인

대사헌 민응형(閔應亨)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품이 뛰어나시나 도를 보는 것은 통쾌하지 못하며, 경연에 매일 거둥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한갓 말단적인 구두(口讀)만 일삼은 채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키라.’는 교훈을 연구하지 않으셨으므로 본원이 맑지 못하여 여러 폐단이 모였습니다. 신은 이 점에 대해 다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목수가 집을 짓는 데도 규범이 있는데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도리어 규범이 없고, 소리(小吏)가 관직을 맡아도 아랫사람의 사정을 아는데 전하께서는 임금인데도 아랫사람의 사정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치우치게 분노하는 것을 고훈에서 경계하였는데 전하께서는 굳이 스스로 가지시며,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은 필부도 부끄러워하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오래도록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다스림에 실효가 없고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말을 하면 희로(喜怒)가 알맞지 못하고 일에 임해서는 치우쳐서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성상께서 평소 학문에 강명(講明)한 것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의정부에 의연한 기풍이 없고 한갓 성상의 뜻만 따르려는 습관만 있어서 위로는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없고 아래로는 민생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오직 떼 지어 나오고 떼 지어 물러가는 것만 일삼아서 한가로운 여느 관원들이 하는 것처럼 하니, 기둥이 약하면 집이 기우는 것이 진실로 그런가 봅니다.
아, 옷자락을 당기며 항의하는 풍도와 촛불로 조서를 불사르는 미풍은 진실로 보기 어렵습니다만,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뜻을 헤아리려 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이 따라 주는 것을 좋아하여 군신 간에 구차하게 거스리는 일이 없기만을 구하고 있으니, 신은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정착할 곳이 없을 것으로 봅니다. 근래 조정의 기색이 더욱 심히 아름답지 못하여,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청관(淸官)의 후보자로 선정된 지 바로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현명함과 우매함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간사하다고 지적할 것까지 뭐가 있겠으며, 다른 부서에서 문제를 제기하였으니 변명하는 데 혐의가 있는 것인데 반드시 억지로 피혐하면서 시끄럽게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서용하라는 어명을 간쟁함에 이르러서는 인피한 내용이 각각 다르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 괴이합니다. 오래 가무는 때에 상하가 근심하고 경황이 없는데 큰 책임을 맡은 사람이 술에 취해 부축을 받으며 하산(下山)하고, 임금을 면대할 즈음에 여러 재상은 분주하고 있는데 법을 맡은 관원은 마음대로 강가에 나가 놀고 있으니 이다지도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을 모릅니다.
지난번에 왕자를 더 두라고 청하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는 너무나 생각해 보지 않고 한 말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왕비께서 왕자를 낳는 경사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세자궁이 창성한 시기는 바로 경사가 넘치는 것으로서 신민의 바라는 바가 다만 여기에 있으니, 일을 모르는 젊은이의 말은 성상께서 유념할 것이 못됩니다. 옛날 유향(劉向)이 성제(成帝)의 후사가 없음을 걱정하여 세자를 두라고 청하였던 일을 끌어다 오늘의 일에 비유할 수 없습니다.
재물을 모으면 백성이 흩어진다는 것은 옛날부터 항상 그러한 것입니다. 이번 추쇄하는 정책은 오랫동안 폐지되었던 끝에 나왔으니 문권(文券)을 가지고도 억울함을 펴지 못하고, 양적(良籍)이 있어도 면하지 못하는 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지금 추쇄하는 일을 이미 완료하여 얻은 인구가 매우 많으니 재물은 모아졌습니다만 백성은 흩어질 것입니다. 살 곳을 잃고 유랑하다가 먹고 입을 것이 없어서 산 속에 모여 도둑질을 하는 것은 사세상 이르고야 말 것이므로 신은 이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잠시 동안 공물을 징수하지 말고 서서히 풍년이 드는 해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공물 징수를 의논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내수사를 설치하는 것은 심히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에 어긋나며, 수진궁(壽進宮)·명례궁(明禮宮) 등은 또한 내수사와 일체인데 그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신은 원컨대 빨리 내수사를 폐지하고 그 재물을 호조로 옮기소서. 그리하여 무릇 쓸 물건을 모두 호조에서 취급하게 하면 온 나라의 백성이 사욕이 없는 왕자(王者)의 정치를 눈을 씻고 볼 것입니다.
왕자와 공주 그리고 공경과 사대부의 저택의 칸수는 본디 정해진 규정이 있으므로 진실로 혹 참람하게 규정보다 지나친 것이 있다면 곧 철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일 나라에 기강이 있다면 애당초 어찌 감히 규정을 어기겠으며, 유사다운 사람이 있다면 또한 어찌 그대로 두었겠습니까. 지금 낙현(駱峴)에 커다란 집이 가득 차 있으며, 그 동네의 두 사람이 나락산(羅絡山) 아래에 새로 집을 짓고 있는데도 한성부는 보고만 있고 법부(法部)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여염의 사이에 집짓는 일이 한창 일어나서 모두 규정을 넘게 지으면서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니, 신은 개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근래 각 아문의 차관(差官)들과 여러 궁가(宮家)의 차지(次知)031)   등이 모두 남의 물건을 빼앗아 차지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는데도 직업을 잃은 양민은 입이 있어도 간쟁하지 못하며, 현관(縣官)은 두려워하고 꺼려서 감히 사실을 조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어전(漁箭)이나 시장(柴場)에도 모두 손을 댈 수 있는 곳이 없어 민생이 장차 날로 초췌해져 끝내 살아갈 희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사치의 피해는 천재보다도 심한데 지금 담장을 옷처럼 꾸미고 신발에 선을 두른다는 조롱과 술을 간장처럼 고기를 콩나물처럼 흔하게 여긴다는 풍자가 불행히도 지금과 비슷합니다. 국혼(國婚)을 하는 사람이 예로써 스스로 절약하지 못하고 앞을 다투어 성대하게 해 궐내에서 하는 것보다 더 화려하게 하려는 듯하니 낭비가 많음을 들으면 놀랄 만합니다. 공사(公私)와 빈부는 본래 다르고 더구나 존귀와 비천이 하늘과 땅 차이인데 감히 맞먹으려는 꾀를 갖고 있으니 어찌 그리도 미혹하여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까. 신은 듣건대 국구(國舅) 장유(張維)는 국혼 때에 각 관아에 도움을 청하지 않고 조용히 보냈다고 하니, 어찌 오늘날 두세 사람이 본받을 만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신은 또 듣건대, 성종(成宗)이 병들어 누웠을 때 대신들이 들어가 병문안을 하였는데 침실의 다갈색 이불이 다 헤졌으나 바꾸지 않았으며, 선조(宣祖)가 승하한 후에 무명옷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니, 조종조의 검소한 기풍을 본받는 것이 매우 좋을 것입니다.
형장(刑杖)은 정치를 돕는 도구이며 감옥은 착해지도록 교정하는 곳이고 보면 이는 진실로 나라를 가진 자가 신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울이나 지방에서나 매질을 마음대로 하고 있으며 혹 공초도 없이 신문한 기록이 있고, 혹 어명을 받지 않고 처결하기도 하며, 태형(笞刑)에만 해당한 자를 형벌을 주며, 추고에만 해당한 자를 구속하며, 판결해야 할 자를 지체하며, 파면해야 할 자를 유배보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통해 하는 것이 이보다 막중한 것이 없으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임금의 한 순간의 생각이 공(公)인가 사(私)인가에 따라 치란(治亂)이 달렸으므로 옛날의 명철한 임금은 여기에 조금도 소홀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왕손(王孫)이 소송에서 패하자 갑자기 호되게 꾸짖는 교지를 내리셨으며, 공주(公主)의 노비가 살인을 하였으나 법대로 처벌하지 못하니 신은 개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날 김홍욱(金弘郁)의 망언을 용납하지 않자032)   감히 아무도 용기를 내어 말하지 못하였고, 김육(金堉)의 충간을 받아들이지 않자033)   모두 입을 다물고 제 몸을 지킬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집안에서 사담을 나눌 때 주먹을 불끈 쥐고 세상을 한탄하는 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마는 전하의 조정에서 꺼리지 않고 다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렇게 되고 만다면 굶주린 까마귀가 날이 갈수록 입을 더욱 다물 것이며 직간하는 신하가 직언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확 바꿔서 과거의 허물을 통렬히 뉘우치지 않으십니까. 무릇 망언하다가 원통하게 죽은 자는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무릇 망언으로 인하여 내쫓긴 자는 거두어 등용하시며, 태풍과 우레 같은 분노를 흔쾌히 거두시고 따뜻한 온정을 이어 베푸시면, 신이 보건대 대궐 앞에 시장처럼 사람이 몰려들어 다시는 간쟁할 만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근래 전하께서 처리하시는 일을 보건대 말치레가 아닌 것이 없어 전혀 실질적인 덕행이 없으니 신은 개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시험삼아 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흰 무지개가 해를 가리면 전하께서는 두려워하여 수리하는 일을 중지하십니다만 재이가 지나가면 토목 공사를 다시 계속하니 이는 전하께서 하늘을 섬기는 것이 말치레뿐인 것이며, 재야에 이름난 자가 있으면 전하께서 기뻐하며 초치할 뜻을 두었다가 병이 있어 못 나오겠다는 상소가 이르자마자 직명을 으레 교체하고 마니, 이는 전하께서 현인을 우대하는 것이 말치레뿐인 것이며, 스스로 자책한 후에 으레 진언한 것이 많으나 모두 비국(備局)의 휴지가 되고 마니 이는 전하께서 직언을 구하는 것이 말치레뿐인 것이며, 오두막집의 백성이 실질적인 혜택을 보지 못하였는데 부질없이 하전(夏氈)034)  에 들러 걱정만 하고 계시니 이는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말치레뿐인 것입니다.
절의(節義)가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크므로 비록 태평한 때라도 포상하기에 겨를이 없는 것인데 더구나 이 어려운 때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고 신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은 의리를 굳게 지키고 굽히지 않아 충절이 늠름하여 우리 조정의 기강이 이들 때문에 부지되었으니 마땅히 정려(旌閭)를 세워 주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인데 아직까지 은전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조헌(趙憲)·이순신(李舜臣)·김제갑(金悌甲)·김응하(金應河)·김준(金浚) 등의 자손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모두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인데 녹용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장차 어떻게 뒷사람을 권장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선조(宣祖) 때 국가에 공훈이 있었던 재상인 이준경(李浚慶)·유성룡(柳成龍)·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등의 자손도 마땅히 일체로 등용하여 그들 조부의 노고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지금 지방 산성(山城)의 폐단은 비록 일일이 말할 겨를이 없으나 강도(江都)의 폐단으로 시험삼아 말씀드리겠습니다. 축조 등의 부역에 골몰하여 오랫동안 관아에 있게 되어 집에 있는 날이 적으니 자기 일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앉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더더구나 1결(一結)에 대해서 받은 10여 휘[斛]035)  의 환곡은 오래되어 묵고 썩은 쌀로서 태반은 싸라기입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갚아야 할 환곡은 그보다 더 많이 준비해야 하므로 환곡을 갚은 후에는 한두 섬의 여분도 없으니, 섬에 사는 백성들이 어떻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강도에 이미 쌓아 두었던 것은 백관에게 주는 녹봉으로 전용하고 삼남(三南)의 세미(稅米)를 매년 강도로 실어 들여 옛것을 쓰고 새것을 저축하게 한다면 좋을 것 같으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전하께서 즉위한 처음에 신이 밖에서 들어와 연석에 입시했을 때 다스리는 도리에 대해 언급이 되면 전하께서는 매번 삼대의 정치를 스스로 기약하셨습니다. 그 후에 모든 행위가 한결같이 사의(私意)로써 만들어낸 것에서 나와서 대부분 선대 성왕의 규범을 어기며, 인재를 씀에는 일을 할 때 뜻에 순종하는 것을 유능하다고 여기며, 말을 들음에는 귀에 부드럽고 겸손한 것을 충성으로 여기며, 기강을 세우고자 함에 가혹한 처리를 하는 데 힘쓰며, 군사를 독려하고자 함에 침해하여 소요를 일으킬 폐해를 생각하지 않으며, 은혜가 궁가(宮家)에 치우치며, 폐해가 재물과 이익에서 고질화되어, 아래로는 백성의 원성과 위로는 하늘의 분노를 사서 국사가 장차 어찌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를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처음의 의지와 이렇게 어긋나게 하십니까. 과거 조경(趙絅)이 말씀드린 마음을 기르는 방법이 전하의 병에 꼭 맞을 것인데, 전하께서는 범연히 듣고만 말으셨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정신을 집중하여 맹렬히 반성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6월 9일 경진

김좌명(金佐明)을 도승지로, 최온(崔蘊)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1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치화(鄭致和)를 대사헌으로, 이준구(李俊耉)·송시철(宋時喆)을 장령으로, 유거(柳椐)·이무(李堥)를 정언으로, 김시성(金是聲)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前) 정(正) 심광수(沈光洙)는 옛날 나의 스승인데 지금 거상(居喪)하고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약물과 쌀과 소금을 넉넉히 주게 하라."

 

6월 13일 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시매(李時楳)를 도승지로, 이시방(李時昉)을 형조 판서로, 민응형(閔應亨)을 이조 참판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이조 좌랑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진선으로, 정도응(鄭道應)을 자의(咨議)로, 안후직(安後稷)을 지평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부교리로,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정랑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이조 좌랑으로, 이지익(李之翼)을 정언으로, 정익(鄭榏)을 사서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상소문에 모두 김세룡(金世龍)의 처의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뭇 의논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후의 상소문에 이를 말한 자가 많으나 사람들의 견해가 또한 각각 다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두 왕자와는 다른 점이 있다고 봅니다. 이 사람은 이미 반역죄를 범하였으므로 당초에 온 조정이 법대로 처결할 것을 청하였으나, 성상께서 ‘선조(先朝)에게 다만 따님 한 분만 있다.’는 하교가 계셨으므로 신들은 모두 감읍하여 다시 간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두 왕자와 함께 석방한다면 신의 생각으로는 결단코 불가한 줄로 압니다."
하였다. 좌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만일 특별한 은전을 베푸신다면 그만이지만, 신들은 감히 석방해 주자고 청할 수 없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특별한 은전을 베푸신다고 하더라도 간쟁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대간과 옥당이 방금 입시하였으니 하문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대사간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신은 당초에 마침 대간을 맡고 있으면서 법대로 처결할 것을 논계(論啓)했었는데 지금 어떻게 석방해 주자고 청하겠습니까."
하고, 교리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전에 두 왕자의 작호(爵號)를 도로 거두자고 청할 때, 신도 동참했었는데 하물며 이 사람에 대해 감히 석방시킬 뜻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두 왕자를 석방하는 날, 어찌 모두 석방하고 싶지 않았겠는가마는 외정(外廷)에서는 필시 자세히 알지 못한 자가 있을 것이다.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 이징(李澂)과 이숙(李潚)은 나날이 두려워하면서 지냈고 방면해 서울로 돌아와서도 매우 근신하였는데, 이 사람은 요사한 일을 저지른 것이 많았기 때문에 전에 궁인(宮人)들을 잡아다가 고문한 것이다. 또 근일의 소행을 들으니 더욱 심히 괴이한데 그 뜻이 필시 밖으로 발설하여 현혹시키려는 데에 있으므로 내가 미리 수직(守直)하는 내관에게 보고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대개 부녀자의 습성은 편안하고 조용한 것인데 이 사람의 성정은 이처럼 뒤틀렸다. 서울에 온 이래로 혹은 지아비의 무리들과 상통하거나 혹은 궁궐을 드나드는 우려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필시 후회를 끼칠 것이다. 당초에 그의 가산을 적몰(籍沒)할 때에 세룡의 처의 재물은 그대로 두고 쓰지 못하게 한 것은 생각이 있어서였는데 지금 이러하니 매우 통탄할 일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위리 안치 속에서 일어난 괴이한 일은 신도 대략 들었습니다만, 무릇 상소한 사람들이 그가 저러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왕실의 지친(至親)은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장래의 우려는 일단 제쳐두고라도 이미 본인에게 지은 죄가 있으니 어떻게 두 왕자와 함께 석방할 수 있겠습니까. 그 곳에 그대로 두고 양식을 후하게 대주는 것이 곧 성상의 덕있는 일일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어린 아이가 역모를 꾀하였다고 하는 것은 더욱 지극히 가증스러운 일이나 그 역모한 것이 자전(慈殿)에게 있다면 전하께서 비록 간곡히 보호하고 싶어도 안될 것입니다."
하고,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두 왕자를 입히고 먹이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으면 보전해 주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항상 경계하고 신칙하므로 그들도 조심하고 근신할 것이다."
하였다.

 

6월 14일 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15일 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함경도에 황충(蝗虫)이 일었다.

 

충청도에 지진이 있었다.

 

6월 16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오정일(吳挺一)을 이조 참판으로, 강백년(姜栢年)·홍처량(洪處亮)을 승지로, 이증(李曾)을 장령으로 삼았다.

 

6월 17일 무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18일 기축

홍중보(洪重普)를 도승지로, 권우(權堣)를 대사간으로, 권령(權坽)·조한영(曹漢英)을 승지로, 황준구(黃儁耉)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충청좌도 추쇄 어사(推刷御史) 오정원(吳挺垣)은 국사에 마음을 다하여 추쇄해 낸 수가 다른 도보다 많을 뿐만 아니라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도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한다. 매우 가상하니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안동 도회 어사(安東都會御史) 이연년(李延年)은 명확하게 조사하지 못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가 매우 많다. 극히 놀라우니 유사로 하여금 추고케 하라."
하였는데, 그 후 고신(告身)을 박탈하였다.

 

6월 21일 임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장령 송시철(宋時喆).】  아뢰기를,
"근래에 벼슬로 상을 주는 것이 지나치게 남발되어 식자가 한심해 한 지 오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러 도의 노비를 추쇄하는 일에 으뜸인 자를 가자하라는 어명까지 있었습니다. 당초에 상벌을 논하겠다는 하교가 이미 사목(事目)에 있었으니 지금에 이르러 권면하고 징계하는 일은 사실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만, 각읍의 대소가 다르고 색출해낸 숫자의 다과도 다르므로 이를 가지고 저것과 비교하면 역시 큰 차이가 없는데 어찌 이를 공으로 여겨 후한 상을 내려서야 되겠습니까. 만일 조정이 신뢰를 잃도록 하고 싶지 않다면 어찌 적당한 상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4품관이 준직(准職)을 거치지 않으면 승자(陞資)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정해진 규정이 있으므로 더욱 흔들려 고쳐서는 아니됩니다. 어사 오정원에게 가자하라는 어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 금군의 작폐가 끝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한 사족(士族)의 부녀가 강가로부터 마교(馬轎)를 타고 들어올 즈음에 금군 두 명이 길을 비키라고 다투다가 화를 내 거느리고 있는 노비를 거듭 구타하였으며, 가마를 좌우로 에워싸고 차마 들을 수 없는 욕을 퍼부었으니 도로에서 보던 이들 중에 경악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런데도 다스리지 않는다면 장래의 폐해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별장이 된 자가 평상시에 단속하지 못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좌우의 금군 별장을 모두 추고하고 본청으로 하여금 적발하여 엄히 다스려서 교만하고 방자하게 구는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충청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치계하기를,
"서원(書院)의 사체는 향교에 버금갑니다. 그런데 근래 조정에 금하는 규칙이 없고 선비들에게 정론(定論)이 없는 것을 틈타서 욕심대로 하면서 거리낌이 없습니다. 서원으로 짓기에 부족한 것을 향현사(鄕賢祠)라고 부르면서 서로 모방하여 날로 조금씩 번성하고 있는데, 개괄적으로 말한다면 그 폐단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향교와 서원은 그 비중이 다릅니다. 그런데 시골에 사는 선비 중에 사족으로 불리우는 자는 조금만 재주와 식견이 있으면 서원에 적을 두고 원유(院儒)라고 부르면서, 향교를 마치 주막같이 보며 향교생을 노예처럼 대우하여 선성(先聖)에게 석전을 드리는 곳을 잡초가 무성하게 하며 국가의 문(文)을 숭상하는 뜻을 헛되게 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첫째 폐단입니다.
양민과 천민을 막론하고 한가한 백성을 모집해서 보노(保奴)라고 부르면서 마음대로 부리는데, 그 얻은 수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집해 얻은 후에는 계속해서 서원의 물건으로 삼아서, 만일 빼앗아 군역(軍役)으로 이관하려는 일이 있으면 떼 지어 일어나서 떠들어대며 반드시 그들의 의향대로 하고야 마니, 이것이 둘째 폐단입니다.
그들이 높이어 받드는 사람은 한결같이 공론을 따르지 못해 혹은 그 자손이 자기 선조를 사적으로 위하거나, 혹은 자기가 좋아하는 자에게 아부하여 지나치게 추존하기 때문에 창립할 즈음에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싸우다가 선대의 누나 숨겨져 있는 허물을 모두 들추어 내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아침에는 취향이 같다가 저녁에는 원수가 되곤 하니, 풍속을 해치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셋째 폐단입니다.
서원과 향사(鄕祀)의 춘추 제물을 본관에서 준비하여 지급할 때에 그 비용이 심히 많으나 학궁(學宮)에 관계된 일이므로 수령된 자는 힘을 다해 마련하여 보내면서도 오히려 부족할까 염려합니다. 그 중에 쉽게 마련할 수 있는 물건은 그래도 지장이 없겠으나 돼지나 염소 등과 같은 것은 회부(會付)에 기록된 것으로서 예사 물건이 아닌데 쓰는 데 절제가 없어서 점점 더 소모되어 가고 있으니, 이것이 넷째 폐단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만일 제때에 억제하지 않고 마음대로 번성해지도록 방치한다면 오월(吳越)의 참람함을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선성의 사당을 보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뒤에 기록한 서원과 향사 중에서 서원으로 짓기 부족한 것은 향사로 강등하고, 향사로 짓기 부족한 것은 즉시 철거케 하십시오. 그 가운데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치 않은 자는 구별하여 위패를 떼내게 하고, 비록 그 도학(道學)이 서원에 합당하다고 하더라도 한 도 안에 서원을 중복하여 건립하지 못하게 하며, 액호를 하사받은 서원 외의 서원에 드는 춘추 향사(享祀)의 제수는 관가에서 마련하여 지급하지 말게 하십시오.
오늘 이후로 서원이나 향현사를 세우려고 하는 자에 있어서는 그 행적을 갖추어 입궐하여 아뢰게 한 다음 이를 묘당에 하문하여 여러 의견이 일치해야만 허락하며, 조정에 품의하지 않고 마음대로 창립한 자에 있어서는 음사(淫祀)로서 논죄하여 앞장선 유생을 죄주십시오. 이른바 보노는 액호를 하사한 서원이나 향현사를 막론하고 모두 혁파하여 본관에 돌려 보내 군대에 소속케 하십시오. 입교한 유생으로 과거를 보려는 유에 대해서는 서울의 사학(四學)의 규례에 따라 10일간 입번(立番)하여 본관의 공문을 받은 연후에 경향시(京鄕試)에 가는 것을 허락하여, 한편으로는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고 한편으로는 선성을 높여 받드는 터전을 삼으소서."
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서원의 설립은 송유(宋儒)에게서 비롯되었고, 향 선생(鄕先生)을 제사하는 것은 당나라 때에도 있었으니, 이것은 사실 유현(儒賢)을 흠모하고 분발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진실로 쉽게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충청 감사 서필원의 장계를 보니, 이 일을 처음부터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니라 이익은 없고 해로움만 있는 것을 미워한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서원과 향사를 등급을 매겨 강등하자 한 것은 가볍게 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배와 후생이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아 인품의 고하를 상세히 알기 어려우며, 오랜 시일이 지난 후라서 그 행적을 모으기도 어렵습니다. 향사에 모시기 부족한 자를 구별하여 위패를 떼어내자는 것은 그 형세가 더욱 어렵습니다. 도학과 절의가 일세에 높다 하더라도 한 사람을 위해 곳곳에 사당을 세우는 것은 과연 너무 번잡하니 한 도 안에 서원을 중첩하여 세우는 것은 마땅히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대개 서원과 향현사를 설립하는 것은 이미 아름다운 뜻입니다. 후세에 본보기가 될 만한 현인과 의사(義士)의 신위(神位)를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고을 사람과 유림이 흠모하는 데서 나온 것이니 다른 음사(淫祀)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이처럼 많이 사우(祀宇)를 헐고 위판(位版)을 묻어서는 안됩니다. 국가에서 제도를 만들어 피차에 다름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 말대로 한다면 반드시 팔도를 똑같이 해야 할 것이니 어찌 중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서원과 향현사의 보노가 비록 너무나 많기는 하나, 다만 서원은 산골짜기에 있는 것이 많아서 지키는 사람이 없을 수 없으니, 액호를 하사받은 서원은 보노 7명, 그 외의 서원은 보노 5명을 정해 주고, 향현사의 사체는 서원보다 가벼울 뿐만 아니라 읍내와 마을에 있는 것이 많으므로 보노 2명만 주게 하소서. 그리하여 모두 제도로 하여금 길이 규정으로 삼게 하되 그 외의 군역을 모면하려는 양정(良丁) 및 속오(束伍)를 면하려는 공사(公私)의 천인으로서 서원과 향현사에 들어간 자는 모두 색출하여 군에 편입시키게 하소서.
앞으로 서원과 향현사를 건립코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 행적을 갖추어 아뢰게 하여 묘당에 하문한 다음 건립을 허가하라는 것은 그 생각이 심히 옳으므로 이대로 시행하시고, 사사로이 창립한 자에 있어서는 본관이 즉시 금지하고 앞장선 자는 논죄토록 하십시오. 액호를 하사받은 서원 외의 서원과 향현사의 제수를 관에서 지급하는 일은 일절 폐지하며, 입교한 유생이 과거를 보는 것 등은 서울 사학의 예에 따라 입번(立番)하게 하며, 각읍에서 입교한 유생의 수를 통계하여 차례대로 입직하게 하되 만일 10일이 차지 않으면 공문을 내주지 말게 하고 공문이 없이 경향시에 응시한 자는 1년간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여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전남도의 용담(龍潭)과 금산(錦山) 등의 읍에 폭우로 산이 무너져 압사한 백성이 있었다. 본도에 명하여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게 하고 두 읍의 전세를 감면토록 하였다.

 

6월 22일 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윤강(尹絳)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6월 23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민응형(閔應亨)을 부제학으로, 홍위(洪葳)를 동래 부사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가뭄이 이러한데 이것은 초봄과는 다르니 더욱 걱정스럽다. 장차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얼마 전에 비가 흡족하게 내렸기에 자못 풍년을 바랐더니 근래에 또다시 이러하니 진실로 적은 걱정이 아닙니다. 이미 가을이 되었다면 전례대로 기우제를 지낼 수 없으나 지금은 아직 가을이 되지 않았으므로 지낼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해조와 상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채유후(蔡𥙿後)가 아뢰기를,
"지금은 봄철과는 다르니 단지 종묘 사직에만 지내야 하는데 대신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중신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우선 중신을 보내는 게 좋을 것이다."
하였다. 교리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상의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마음이 처음보다 크게 못한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무릇 일에는 흐지부지할 우려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니, 그 두려워하는 마음이 어찌 봄에 가뭄을 처음 당했을 때와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효자의 슬픔도 항상 초상(初喪) 때와 같을 수 없는 것이니 인정이 본래 그러한 것이다. 나도 한가할 때에 흐지부지하였다는 것을 느낀다."
하니, 은상이 일어나 절하고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처음에 이미 애닯은 교지로 감응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는데 지금 또 스스로 흐지부지하였다는 것을 아시니 앞으로 반성을 실행하시기를 마치 송 인종(宋仁宗)이 한데서 기도하는 정성처럼 하신다면 어찌 그 효과가 없겠습니까. 성상의 마음이 이러하시니 신의 생각에는 비가 필시 머지않아 내릴 것으로 봅니다."
하였다.

 

6월 24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평안도 귀성(龜城)과 태천(泰川) 등 읍에 우박이 내렸다.

 

추쇄 도감 도제조  좌의정 심지원에게는 그 자제 중 한 사람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전 제조 우의정 원두표(元斗杓)에게는 말을 하사하고, 좌참찬 이후원(李厚源)과 판서 이시방(李時昉)은 모두 가자하고, 판서 홍명하(洪命夏) 이하에게는 공로에 따라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6월 25일 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26일 정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29일 경자

조귀석(趙龜錫)을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용담과 금산이 혹독하게 수재를 입어 사망자가 무려 40여 명이나 났으니 지극히 경악스럽다."
하니, 호조 판서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장계 중에도 자세히 진술하지 않았으나, 신이 남쪽에서 온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산이 무너지는 변고가 곳곳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재난을 당한 백성을 마땅히 황급히 진구(賑救)해야 하겠으나 본도에서는 현재 남은 곡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찌 구원할 계책이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을 구제하는 방도는 진구하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다. 반드시 요역을 감면해 주어야만 거의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6월 30일 신축

목성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찬선(贊善) 송시열(宋時烈)이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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