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강원도 금성(金城)·금화(金化)·평강(平康) 등의 읍에 우박이 많이 내렸다.
대신과 금부와 형조에 서울과 지방의 죄수를 심리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아, 과인이 왕위에 오른 이래로 수해·한해·재이가 달마다 거의 거르지 않고 발생하였다. 두렵고 근심스런 마음이 깊은 연못가에 서고 얇은 얼음을 밟을 때보다도 더 하니, 옛 사람이 말한 ‘내게는 임금된 즐거움이 없도다.’는 것은 진실로 오늘을 두고 말한 것이다. 밤낮으로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이 조종께서 물려주신 중책을 실추시킬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이번에 모진 한발이 해마다 흉년이 든 뒤에 발생하였다. 이렇게 된 연유는 과인의 덕과 재주가 부족하여 일처리를 마땅하게 하지 못하므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하여 위로 하늘을 거스렸기 때문이다. 그 허물이 과인에게 있으니 마땅히 견책과 벌을 받아야 할 것인데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대신받게 하였으니 과인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다만 애태우며 자책만 할 뿐이지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오늘부터는 정침(正寢)을 피하여 더욱 허물을 반성하고 선행을 하고 잘못을 고치고자 한다.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敎書)를 써서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여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을 보충할 것이며,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등의 일은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또 흉년과 심한 가뭄에 외로운 사람들이 더욱 불쌍하니, 해조로 하여금 의지할 데 없는 홀아비와 과부와 고아와 독신에게 특별히 죽거리를 지급케 하여 나의 동정하는 마음을 보여주라. 또 안팎에 명하여 여러 옥사를 너그럽게 처결하여 나의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보여주라. 또 이조로 하여금 인재를 발탁하도록 하여 덕있는 선비가 하급 관리에 묻혀 있지 않도록 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성상의 분부를 받아 보건대 구구절절이 뜻이 간절하고 애닯아서 다 읽기도 전에 자신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자신을 죄주는 정녕스러운 하교가 말에 넘쳐 흐르고, 백성을 걱정하는 사무치게 간절한 생각이 성상의 일신을 염려하는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로써 재난을 막으면 무슨 재난인들 막지 못하겠으며, 이로써 원한을 푼다면 무슨 원한인들 풀지 못하겠습니까. 깊은 산 속 오두막집에 사는 백성에게 이 말씀이 전파되면 아무리 버러지 같이 무지한 자라도 반드시 감동할 것이며, 내직과 외직의 신하에게 교유하시면 비록 무위도식하는 자라도 반드시 마음을 고칠 것입니다. 비록 성탕(成湯)의 여섯 가지 자책(自責)011) 과 송 경공(宋景公)의 한 마디 말012) 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달리 교서를 지을 게 아니라 이 성상의 분부로써 안팎에 유시하여 모두 들어서 알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란 작심(作心)과 방심(放心)이 무상하여 태만과 소홀함이 끼어들기도 하는 것이니, 진실로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오늘부터 하루하루 이 말을 성실히 실천하여 형식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우리의 백성들이 보고 들음을 통하여 보고 듣는 하늘이 어찌 감동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가장 가까이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을 책망하는 날을 당하여 외람되게도 백성을 몹시 걱정하시는 분부를 받고 구구한 생각을 황공스럽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자, 답하기를,
"말한 내용은 내 명심하겠다만, 하교한 말은 거칠고 졸렬하여 본의를 잘 나타내지 못하였으니 승지가 대신 초안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정원이,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내일 단오첩을 지어 올리게 할 것을 청하니, 지어 올리지 말라고 답하였다.
5월 2일 갑진
김좌명(金佐明)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평창 군수(平昌郡守) 유비(柳秠)가 상소하여 본군의 민폐에 대해 자세히 아뢰니 대동청에 명하여 본군의 세포(稅布)를 감해 주라고 하였다.
5월 3일 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4일 병오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상차하기를,
"가뭄을 탄식하는 일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만 금년의 한재가 더욱 참담하며, 천하가 비록 똑같이 가뭄이 들었지만 우리 나라가 특히 심하며, 사람들이 필시 똑같이 걱정하고 있겠지만 신의 근심이 유독 간절합니다. 대개 강과 하천이 마르면 거머리가 먼저 두려워하고 산악이 메마르면 이끼가 먼저 마르는 것인데 물성(物性)이 그렇습니다. 나라가 믿는 것은 백성이요 백성이 하늘처럼 믿는 것은 양식입니다. 백성에게 양식이 없고 나라에 백성이 없다면 전하께서는 누구의 임금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근년 이래로 가물지 않은 해가 없었으나 백성이 흩어지는 데 이르지 않고 나라가 위태로운 데 이르지 않았으니 성상께서 수신하고 반성하며 기도하는 성의를 다하신다면 하늘의 도우심을 그대로 믿을 수 있으므로 늦게라도 비가 내리면 가을에 추수를 바랄 수 있다.’고 합니다만, 어리석은 신은 감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경》에 말하기를 ‘심지 않고 거두지 않으면 어떻게 삼백 창고의 벼를 얻겠는가.’ 하였으니, 대저 농사란 반드시 심은 후에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서(兩西)와 경기의 백성들은 도로에서 반년을 보냈고 삼남(三南)의 백성은 이앙을 마쳤으나 이미 모가 말라버렸으므로 지금 비록 비가 내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삼남과 양서가 이미 모두 농사를 망쳤으니 나라가 무엇을 가지고 근본으로 삼겠습니까. 신이 우리 나라가 특히 심하다고 한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가뭄이 드는 이유는 백성의 원망 때문이니 동해의 한 지어미의 원통함이 가뭄을 들게 한 일013) 에서도 증험할 수 있습니다. 삼남은 땅이 넓고 사람이 많으므로 쌓인 원망도 가장 많습니다. 경기 서쪽은 간혹 비가 내렸으나 삼남은 한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고 남쪽에서 온 사람마다 말합니다. 신은 이로써 삼남의 가뭄은 필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오늘의 재난을 구원하는 계책은 오직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전하께서 직언을 구하는 하교를 내리시자 신이 지난번에 드린 말씀을 다시 올리니 이는 마치 장님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앞길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빨리 여러 도(道)의 영장(營將)을 파직시켜 한꺼번에 소환하고 모두 수령에게 맡긴 다음 방백과 관찰사로 하여금 엄히 훈련시키게 하소서. 영남의 급보(給保)를 없애어 다른 도와 같게 하시고, 긴요하지 않은 복호(復戶)를 정지하여 백성의 부역을 고르게 하시고, 노비를 찾아내어 그 신공(身貢)을 감해 주되 5명이 동거하면 한 명을 감해주고 10명이 동거하면 두 명을 감해 주되 해당 관서로 하여금 차등에 따라 감해 주게 하소서. 종량(從良)된 자가 상고할 만한 문서에서 발견되거나 주인을 배반한 노비가 증빙할 만한 공첩에서 발각되면 햇수가 비록 지났더라도 한결같이 법제대로 시행하여 원통한 일이 없게 하소서.
신이 매양 하는 말이라고 물리치지 마시고,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서 고치기 어렵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성상의 교지에 말씀하신 개과천선하는 방법도 이런 몇 가지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사람의 마음이 흡족해지고 하늘의 뜻도 저절로 돌려져서 반드시 메아리와 같은 보답이 있게 되어 백성들이 모두 일을 즐겁게 하고 가뭄도 재난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이러하니 너무 기뻐서 무어라 표현할 말이 없다. 말한 여러 가지 일들은 묘당과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가 졸하였다. 고상(故相) 윤방(尹昉)의 아들이자 선조조의 부마이다. 글을 잘 지었고 서화에도 능한데다 아들 윤지(尹墀)와 윤구(尹坵)도 모두 현달하였으므로 풍류와 복록이 일세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두 아들이 먼저 죽자 이 때부터 문을 닫고 일을 사절하기를 근 20년이나 하다가 죽었다.
5월 5일 정미
대신과 근신을 보내 종묘 사직과 여러 산천에 비를 빌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조촐하게 성의를 다하여 내가 친히 간 것처럼 하라."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에는 본래 본말이 있는데 그 근본은 임금의 마음이며, 나라를 보전하는 방책은 반드시 완급을 살펴야 하는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급한 것은 없습니다. 비록 다스리는 도리를 아는 옛날 사람에게 말하라고 하더라도 이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옥같은 자질은 뛰어나시고 성스런 도량은 활달하시어 진정 불세출의 자질을 가지셨으나, 오직 학문상의 실천하는 공부가 부족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따금 기질적인 병통이 말씀하시는 사이에 나타나고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이 중도를 잃어, 형벌이 온당치 않으며, 일을 점진적으로 하지 못하여 정령(政令)이 전도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는 대각의 말이 조금이라도 성상의 뜻을 거스르고 조정의 신하에게 조그만 과실이라도 있으면, 곧 준엄한 교지를 내려 사실에 맞지 않는 죄목을 씌워서 태산처럼 억누르고 천둥같이 떨게 하시므로, 대신은 감히 말하지 못하고 간관은 감히 간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몇 년 사이에 말을 한 것으로 인하여 죄를 받은 자가 몇 사람입니까. 이로 인해 오늘날 언로가 경색되어 임금과 신하 사이가 천리처럼 멀어졌으니 불행하게도 《주역(周易)》에 이른바 ‘상하가 사귀지 않아서 천하에 나라가 없다.’는 말과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백성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동안 진언하는 자들은 모두 추쇄(推刷)014) 와 조련(操鍊) 두 가지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사전에 대비하며 도망갔거나 죽은 자를 추쇄하는 일은 모두 국가에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진실로 적임자를 얻어서 점진적으로 시행하였다면 어찌 백성들이 살 곳을 잃어 국가를 원망하는 데까지 이르기야 하였겠습니까. 다만 막 추쇄할 때에 혹은 지나치게 엄격하게 하고, 혹은 많이 찾아내는 데에만 힘씀으로 인해 서로 붙들고 길을 떠나기도 하고 강탈당하여 원통해 울부짖기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추쇄의 일이 이미 끝났으므로 결단코 정지할 수는 없고, 그 중에 폐단을 살펴서 원한을 풀어주는 조치만은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한 집에서 부자와 형제가 동거하고 있는 자 중에서 식구가 많은 자는 일시에 공물을 징수하면 사세상 마련해 내기가 어려울 것이니 그 다소에 따라 적당히 줄여준다면 비록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조정의 작은 은혜를 알아서 뿔뿔이 흩어지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련할 즈음에 군민(軍民)에게 폐를 끼치는 실상에 대해서는 여러 신하가 한두 번 아뢴 것이 아니므로 성상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일을 주관하는 무리들이 혹 교만 방자하거나 혹 일을 알지 못한 자들로서 고을로 거침없이 다니면서 군졸을 약탈하는데도 도백은 제지하지 못하고 수령은 감히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므로써 군민이 원통해 하고 마을에 소요가 일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윗사람을 미워하는 백성들로부터 급할 때에 도움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흉년이 든 때에 조금 6개월 동안의 훈련을 연기하므로써 백성이 쉬고 원한이 풀리는 계기를 만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입니다.
그리고 재난을 당해서 재심(再審)하라는 교지는 전부터 여러 번 내려졌으나 중죄에 대해서는 담당 신하가 감히 감면해 주자고 바로 청하지 못하고 매양 약간의 경범 죄인만을 예에 따라 석방하고 있으니 크게 사면해주는 도리에는 미진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는 죄명은 비록 무거우나 정상(情狀)은 용서할 만한 자도 있는데 오래도록 옥에 가둬두면 어찌 원통하고 울적한 기운이 온화한 기운을 해치지 않겠습니까. 만약 대신에게 묻고 실정을 조사하여 특별히 너그럽게 처결해 주신다면 재난을 막는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입니다. 추쇄할 때에 죄를 지은 어사와 수령은 역시 재심할 사람 중에 들어 있지 않았으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미 벌을 주었는데 하필 또 법에 준할 것이 있겠느냐고 여겨집니다. 그동안 말을 하였다가 죄를 얻은 신하 중에 여러 해 동안 갇혀 있는 자도 있고, 한 일은 하찮으나 죄는 무거운 자도 있으며, 죄는 같으나 벌은 다른 자도 있으니, 특명으로 석방시키고 임용하여 너그럽게 용서하는 덕을 보이신다면 어찌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마음에 부합하지 않겠으며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산림(山林) 중에 명망이 드러난 선비에게 그동안 벼슬을 주었으나 한 사람도 부름에 응한 사람이 없는 것은 필시 시세가 어려운 데에 구애되어 그런 것이겠으나, 또한 성상께서 어진이를 대우하는 정성과 부르는 예의에 오히려 미진함이 있어서인가 염려됩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공경과 예의를 다하여 재야의 어진이를 모두 조정에 모이게 하여 경연에 두고 서연(書筵)에 출입케 하여 상의 덕을 바로잡아 보필하고 동궁을 도와 인도하게 하소서. 그러면 어찌 도움이 적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말을 살펴보니 말은 매우 충직하고 일은 매우 절실하여 모두가 오늘날의 약석(藥石)이었으며, 사랑하고 근심하는 성의가 말에 넘치니 내 비록 불민하나 감히 명심하지 않겠는가. 인대하는 날 묘당과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상차하기를,
"조정에서 옳게 한 일을 백성들이 옳다고 하는 것은 치세(治世)이며, 조정에서 그르게 한 일을 백성들이 그르다고 하는 것도 치세입니다. 조정이 일을 하고서 스스로 옳다고 하면 백성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점이 자사(子思)가 위(衛)나라 임금을 위해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남달리 총명하시며, 기쁘거나 노한 감정을 절제하지 않습니다. 남달리 총명하면 아랫사람을 경시하는 병통이 있으며, 기쁘거나 노한 감정을 절제하지 않으면 상벌에서 당연한 원칙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기가 죽어 물러나 귀에 거슬리는 바른 말이 날로 전하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전에 죄를 지은 언관은 진실로 크게 거슬린 것도 없는데, 억측을 너무 심하게 하여 바람과 우레 같이 갑자기 진노하였으며, 한마디 말이 뜻에 거슬리자 형벌과 출척이 잇따랐던 것입니다. 대간의 직책은 우리 조종조로부터 예의로써 대우하여 왔습니다. 임금이 먼저 각별한 은혜와 예의로 대우하여 백관들이 모두 그 위세에 눌리므로써 공론(公論)를 주장하고 기강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소나 말을 속박하듯이 자신의 귀와 눈을 못쓰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또 기세 등등한 연소배들의 말은 비록 과격한 것 같기는 하나 나라의 형세를 부축하고 쇠퇴함을 일으키는 데 있어 그 공 또한 적지 않습니다. 임금은 가상히 여겨 장려하여 그 기백을 길러주고, 채택하여 그 중도를 선택해야지 들뜨고 조급한 것으로 보아 싫어하고 박대하는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실로 충고를 받아들이는 길을 넓히고자 한다면 잘 따르는 아름다움을 다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옛날의 잘못된 정신과 풍채가 크게 변해 지극한 말을 매일 듣게 되고 임금의 덕에 흠이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서는 매양 인재가 없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일세의 인재를 탄생시키매 넉넉히 일세의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데, 어찌 세상을 크게 속여 좋은 사람이 없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다만 임금이 좋아할 것인가 싫어할 것인가, 쓸 것인가 버릴 것인가에 달렸을 뿐입니다. 시험삼아 오늘날을 보면 빽빽한 조정에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민첩한 인사가 노성한 사람보다 많고 재간있는 신하가 경학(經學)의 신하보다 우세하며, 기개있게 감히 말하는 자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시세에 빌붙는 자만 조정의 자리에 많이 있습니다. 이는 성명께서 공을 세운 신하는 좋아하고 장려하면서 강직한 선비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본받아 길들여져서 점점 이처럼 된 것이니, 의향이 한번 달라지는 데에 따라 어찌 그 관계된 바가 적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공정하고 충실한 선비를 힘써 발탁하여 자신의 덕을 돕게 하고, 임금의 비위를 거스리며 간쟁하는 선비를 장려하고 나오게 하여 자신의 허물을 고치소서.
일전에 이조에서 죄적(罪籍)에 들어 있는 자를 서용하자고 청하였는데 진실로 좋은 뜻이었습니다. 부족한 자리를 구차하게 메꾸기보다는 차라리 죄과(罪過)를 용서하고 앞으로 잘 하도록 하는 것이 낫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정상과 죄를 참작하여 재주에 따라 쓰도록 하여 성명의 시대에 버려진 자가 없게 하소서. 그리고 서울 명문가의 후예라 하여 어찌 다 쓸 만한 자들이겠으며, 시골의 천한 자라 하여 어찌 다 쓰지 못할 자들이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비록 문벌이 좋은 사람을 쓰기는 하였으나 수십 년전만 하여도 오늘날처럼 이들만을 등용하지는 않아 호남·경상도 선비들이 조정의 반이나 차지하였습니다. 인재의 많고 적음이 비록 고금(古今)이 다르기는 하나 어진이가 진출하는 길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또 요즈음 주의(注擬)에 신진의 젊은이가 노성한 사람보다 많으며, 본디 명성과 기절이 드러난 사람이 한직에 있기도 하니 이 역시 인재 등용이 전도된 것입니다. 또 근일 문신(文臣)으로서 시골에 적체되어 벼슬길에 나가보지도 못한 사람이 거의 수백 명이나 되는데, 여기에도 기이한 재능을 가진 자가 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장구(章句)에 힘을 쏟아 각고의 노력으로 과거에 합격한 자를 권세 있는 집 자제 중 어리석어 분수넘게 벼슬하는 자에게 비해 볼 때 어찌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안으로는 보통 관직이나 밖으로는 군수나 현령 같은 관직은 권세 있는 집 자제들이 땅에서 물건을 줍듯이 차지하는 것이나 이들은 감히 바라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형관(銓衡官)들로 하여금 제도를 고쳐서 공정하게 듣고 모두 수렴하여 한갓 사람을 위해 관직을 설치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억울한 죄수를 심리하는 것은 한재를 막는 매우 시급한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유사(有司)에게 억울한 죄수를 심리하라고 하시었지만 하늘이 응하지 않아 전과 마찬가지로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으니, 이는 한갓 석방한다는 이름만 있을 뿐이지 억울함을 다스린 실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은 원컨대 대신과 금부 및 형부의 여러 신하가 죄수들의 명단을 모두 기록하여 탑전(榻前)에 모여 회의하되 죄명의 경중과 내외 원근에 대해 한 사람씩 심사하여, 만일 정상이 용서할 만하거나 법으로 볼 때 내보낼 만한 자가 있으면 비록 여러 해 동안 구금당해 원판결을 받지 못한 자라도 죄명이 너무 무겁다고 핑계대지 말고 반드시 정상을 따져 사실을 밝혀내 흔쾌히 용서하소서. 그러면 인심을 위로하고 원한의 기를 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근년 이래로 법의 뜻이 점점 무너져서 악을 징계하는 법은 너무 무겁고 생명을 중시하는 인애(仁愛)는 미덥지 못하여, 한 여름에 사람을 죽여도 유사는 왕명을 받들어 이행할 뿐 간쟁하지 않고 전하께서는 한 마디로 결단하고 의심이 없습니다. 공경이 삼복(三覆)015) 할 때 임금이 풍악을 듣지 않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뜻인데 오늘에 이르러 실추될까 염려됩니다. 근래에 작상(爵賞)이 너무 지나치고 형벌이 공정하지 못합니다. 지금 제가 어떤 상이 너무 지나치고 어떤 형벌이 공정하지 못한지에 대해 열거할 필요는 없으나 성상의 명령과 토죄가 혹 일시의 기쁨이나 성냄에서 나온다면 유사와 법은 장차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대저 지나친 상은 권장하는 효과가 없고 남발하는 형벌은 징계하는 실효를 볼 수 없는 것이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아집이 없이 공평하게 하여 경중(輕重)을 대상에 따라 공정하게 함으로써 반드시 선행을 한 자는 모두 장려되고 악행을 한 자는 모두 징계되게 하소서.
지금 흉년이 해마다 계속되어 전에 저축했던 것은 죄다 바닥이 난데다 햇보리 농사마저 이미 망쳤습니다. 애처로운 우리 백성들이 모두 성명께서 먹여주기를 바랄 것인데 모르겠습니다만 국가에서는 장차 어떻게 곤궁한 백성들을 먹여 죽음에서 구할 것입니까? 경기는 상평청에서 으레 지급한 것에 힘입어서 혹 조금은 지탱할 수 있겠지만 양서(兩西)는 초미(焦眉)의 위급한 형세입니다. 신은 두 도에 산재한 관향(管餉)의 원곡(元穀) 수가 막대하다고 들었는데 만일 상평청의 예에 따라 가격을 계산하여 나누어 준다면 어찌 한푼의 실질적인 혜택이 없겠습니까. 더욱이 역로(驛路)의 지탱키 어려움은 주(州)나 군(郡)보다도 심하니 역시 묘당으로 하여금 모두 헤아려 처리하여 혜택이 고르게 베풀어지도록 하소서. 또 서로(西路)의 원곡은 그 모곡(耗穀)을 해마다 늘려 받으므로 백성들이 조적곡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고, 받지 못한 곡물을 이웃과 친족에게 대신 물게 하는데, 겨우 살아 남은 피폐한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져 떠나는 것은 태반이 이 때문입니다. 국가가 창름과 부고(府庫)를 세운 것은 본래 백성을 위한 것인데, 비록 낙구창(洛口倉)016) 과 같이 큰 창고가 천개 만개 있더라도 곡식은 있으나 백성이 없다면 나라가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더구나 이미 지켜낼 수 있는 요새도 없는데 쌓아 놓기만 한들 훗날 위급할 때에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을 것이니, 이미 지난 일의 징험에서 훤히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모곡은 도백으로 하여금 칙사(勅使) 행차 때의 수용에 헤아려 지급해주게 하되, 대략 상평청의 규례와 같이 하여 백성의 힘을 덜어 주게 하고 대농가에서 그 나머지를 취해 경상의 비용을 보태게 한다면 어찌 공(公)과 사(私)가 함께 구제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육지(陸贄)가 ‘지금 급한 일은 여론을 자세히 살피는 데에 있습니다. 여론이 매우 갈망하는 것은 폐하께서 먼저 시행하시고, 여론이 심히 미워하는 것은 폐하께서 먼저 제거하십시오.’라는 말을 하였다 합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오늘날 여론이 심히 미워하는 것은 추쇄(推刷)만한 것이 없습니다. 백년간 폐지되었던 법을 거행하여 감춰지고 빠진 것을 수만 명이나 들추어내니 팔도가 소란한 지 지금 3년이 되었습니다. 혹은 여러 해 동안 사환 노릇을 하던 자나 여러 대 양민이 되었던 자들을 하루아침에 샅샅이 찾아 내어 관에서 모두 몰수하였는데 이미 입법이 엄한데다 위아래가 뜻이 맞으니 혹시라도 곡직(曲直)을 분명하게 처리하지 못하여 원통함이 있어도 풀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분주히 돌아다니며 관가에 호소하며, 가슴을 치고 울면서 살아 있는 것을 괴로워 합니다. 보고 듣는 것마다 놀랍지 않은 것이 없으니, 또한 위로 하늘의 화기를 거스릴 수 있습니다. 어찌 일체의 법만 고수한 채 상황에 따라 변통하는 도리를 생각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 중에 더욱 변통해야 할 것은 도감이 송사를 판결할 때 오로지 양적(良籍)으로만 대조하고 있는 점입니다. 난리를 겪은 이후로 문서가 산실되었는데 만일 이 한 가지만 가지고 공사(公私)를 분변한다면 오늘날 노비를 거느린 자가 누군들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성명께서 병사(兵事)에 유의하여 군영을 두고 단속하고 계시므로 이미 규율이 성립되어 군정(軍政)이 펼쳐지고 있는데 신료들로서 누가 전하의 뜻을 우러러 도우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오늘날 군졸은 모두 농사짓던 백성들입니다. 한창 김매고 거름 주는 시기에 양식을 싸가지고 병기를 들고 매일 관문 앞에 모입니다. 대저 조그만 농토에서 농사를 지어서 어버이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고 있는데 이미 그 때를 놓쳤으니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만일 모든 군영으로 하여금 겨울에만 훈련하고 그 이외는 모두 농사를 짓게 한다면 병사의 훈련도 미비되지 않고 백성도 다소 소생할 것입니다. 또 군사를 다스리는 방도는 관할권을 서로 이어지게 하되 책임의 한계가 분명해야만 위급할 때 힘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영장(營將)은 위세와 기력이 두 영과 비슷하여 위를 능멸하고 아래를 짓밟고 있으나 감히 말 한마디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정의 주장이 너무 지나치고 사목이 너무 중대해 일군(一軍)에 장수를 세 명이나 둔 데에 말미암은 것인데 주현(州縣)이 어느 곳을 따라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러하니 나중 일은 알 만합니다. 여러 해 동안 경영하여 조금 질서가 잡혔으므로 갑자기 혁파하는 것을 비록 어렵게 여기고 있으나 그 절목을 가감하는 것은 또 시의를 따르기에 달렸습니다. 만약 도백은 상벌권만 갖게 하고, 또 병사(兵使)는 지휘권만 갖게 하되 단지 훈련하는 책임만 맡기어 서울의 장관(將官)이 하는 것처럼 하게 하고, 선발하는 일들은 주현(州縣)에 일임한다면 지위의 서열과 권한의 기강이 도치되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병사는 정예화에 힘쓰고 다량화에는 힘쓰지 않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백 명의 농부가 한 명의 전사를 기르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옛날 목릉(穆陵)017) 께서 국난을 당했지만 구병력을 훈련시켰는데 그 수가 3천 명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군량을 걱정해 정예화에 힘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일 늘린 병력수가 6천 명에 이르는데도 여전히 마지 않고 늘리고 있는데 삼수미(三手米)는 겨우 반년 정도 지급할 수 있고, 포보(砲保)의 요역은 그 해독이 팔도에 퍼졌으며, 둔전의 설치로 인해 공세(公稅)는 날로 감축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구병력의 수를 그대로 두는 게 낫다고 여겨지는데 그래도 넉넉히 안으로는 궁궐을 호위할 수 있고 밖으로는 국가의 위용을 갖출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정전을 피해 거처하는 것이 궁궐의 출입을 통제하여 청탁하는 길을 막는 것만 못하며, 수라의 찬수를 줄이는 것이 검소한 덕을 숭상하여 낭비를 줄이는 것만 못하며, 해마다 좋은 말을 구하는 것이 한 가지 일을 실행하는 것만 못하며, 조정에 임하여 애통해 하시는 것이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하늘이 내게 경고한 것은 왜 그런 것이며 내가 하늘을 받드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반드시 살펴서 어떤 일이나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강구하여 체득하고 힘써 행하되, 오랫동안 유지하고 일관성 있게 해 나가 반드시 감응하는 실적이 있게 하고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소서. 신이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기력이 얼마나 되기에 밝은 세상을 영원히 하직하는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이 상소는 곧 유표(遺表)와 같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장차 죽을 자의 구구한 성의를 살피어 불쌍히 여기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에서 논의한 것은 흉금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닌 것이 없으니 만약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충심이 아니면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아, 과인이 좋아하는 것을 끊고 밤낮으로 몸달아 하면서 조그마한 효과라도 보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말단적인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진실로 가슴에 심한 한이 서려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과인이 어리석어 어긋난 일이 많으니, 대인 선생들이 우려해 잊지 못할 만도 하다. 스스로 반성하여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자 중에 재간있는 신하가 경학이 있는 신하보다 많다고 한 말이 있는데, 언제 재간있는 신하가 있었는가. 진실로 아직 보지 못했다. 근래 대각의 신하가 매양 당론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있으므로 과인이 심히 미워하고 있는데, 점점 격동되어 혹 지나친 거조를 면치 못하기도 하니 자못 한탄스럽다. 선생이나 어른들이 이끌고 권면하여 이 악습을 없앨 수 없겠는가. 폐단을 구제할 대책을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와 매일 서로 강구하여 노경(老卿)의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몸조리를 잘하여 아름다운 말과 직언을 매일 들려주기 바란다."
하였다.
5월 6일 무신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한재의 참담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금년 농사는 알 만하다. 어찌 차마 여러 도에서 바친 물품을 편안히 누리면서 백성의 힘을 더욱 고달프게 할 수 있겠는가. 각도의 방물(方物) 가격을 명년 가을까지 정지하라."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김육(金堉)과 이경여의 차본(箚本)을 모두 비국에 내리셨으나, 여느 관원의 상소문과 비할 바가 아니므로 탑전에서 의논하여 정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자에서 진술한 말은 모두 긴요하고 절실하니 변통할 만하다. 이조 판서의 차본도 가지고 왔는가?"
하자, 태화가 이를 가지고 조목별로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장을 혁파하기는 어렵다만 시월부터 정월까지 넉 달간 훈련하는 것은 과연 폐단이 있으니 절목을 조금 고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각사의 노비가 낳은 자 중에 다섯 명이 공물을 바칠 경우 그 부모 중 한 사람의 요역을 감해 주고 여섯 명이 공물을 바칠 경우 그 부모의 요역을 모두 감면해 주게 하고 나머지 다른 일은 묘당에서 서서히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경여는 탑전에서 심리하기를 청하였으며, 홍명하(洪命夏)의 차자에도 감옥에 억울한 기운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도 장죄(贓罪)를 범한 자는 비록 심리하는 날 거론할 수 없지만 살리기를 좋아하는 천지의 인애로써 특별히 죽음만은 면해 준다면 역시 화기를 불러 오는데 일조가 될 것입니다."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의견도 그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의 말이 불가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장법(贓法)이 매우 엄하므로 섣불리 용서해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에 없던 재난을 당하였으므로 진실로 비상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고 또 이들이 범한 죄는 그 행적이 의심스러우나 만일 장률로써 모두를 처단한다면 관대한 정치가 아닌 것 같으니, 금부로 하여금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이정현(李廷顯)·이급(李圾)·심총(沈棇)·송명규(宋明奎) 등을 먼 곳에 정배케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말한 것으로 인하여 죄를 받은 자는 누구인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심대부(沈大孚)·유계(兪棨)·조빈(趙贇)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실정은 가벼운데 죄가 무거운 자는 누구인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유철(兪㯙)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에 대한 일을 말하다가 견책을 받은 자는 오직 홍우원(洪宇遠) 한 사람뿐인가? 해조는 전례에 따라 임용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이경여의 차자 중에 ‘적체된 문관이 무려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한 말이 있었는데, 모두가 신이 직임을 다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노성한 사람이 한직에 있다고 하는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인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아마 민응형(閔應亨)을 가리킨 것일 것입니다."
하였다.
옥당이 【응교 이경억(李慶億), 수찬 정만화(鄭萬和).】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즉위한 처음에 큰 뜻을 분발하여 쇠퇴한 것을 일으키고 간란을 구제하고자 일찍이 경연에서 개연히 ‘삼대(三代)처럼 정치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다고 하는가.’ 하시자, 온 나라의 신민이 성상의 뜻을 우러르며 훌륭한 정치를 이내 보리라 고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근년 이래로 국세가 날로 위축되고, 다스린 효과는 마치 바람을 잡는 것처럼 망망하기만 하여 정교(政敎)와 호령이 신민의 바람을 위로함이 없으니, 전하의 입지(立志)가 독실하지 못하여 혹 간단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닙니까.
추쇄(推刷)의 한 가지 일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당초 성상께서 마음을 굳게 먹고 백 년간 폐지됐던 것을 한번 진흥시키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3년이 되었는데도 일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송사는 분분하여 그치지 않고 있으며 일을 담당한 여러 신하들도 느긋함을 면치 못하고 한결같이 뒤로 미루기만 하여 아득히 일을 완료할 기약이 없으니, 성명께서 끝까지 견지하지 못하자 여러 신하들의 뜻도 따라서 해이해 졌다는 것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옛날의 견해를 씻어 버리고 생각을 새롭게 하시어 혁연히 분발하여 지치를 일으킬 것을 기약하시되 옛날의 명철한 임금을 표준으로 삼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자기의 임무로 삼으소서. 임금의 한 마음은 만 가지 교화의 근원이므로 그 마음에서 나와서 그 정치에 나타납니다. 삼가함과 소홀함, 진실과 거짓은 터럭만큼의 차이에서 갈라지지만, 다스려짐과 혼란함, 득과 실이 일에서 징험되는 것은 밝고 밝아서 감추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격물·치지·성의·정심의 공부를 다하여 뿌리를 곧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하는 바탕으로 삼아야 하는데, 거기에 대한 학문의 방법은 학문을 강론하여 도리를 밝히고 신심을 공경히 가져 함양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지금부터 싹 바꿔서 분연히 발분하여 성현을 배울 수 있고 삼대를 반드시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높고 멀어서 실천하기 어렵고 하찮으니 소홀히 해도 된다고 여기지 마소서. 글을 대하여 강독할 때 의리를 깊이 탐구하여 반드시 자신에게 절실히 공부해야 할 곳을 찾아서 몸과 마음에 체험하시고, 정교(政敎)에 반영하시되 쉬지 말고 지속하며 성실히 행하소서. 위태로운 인심(人心)과 은미한 도심(道心)이 발현함에 반드시 그 기미를 살펴서 위태로운 인심은 막아서 끊고 은미한 도심은 확충하여 혹시라도 지나쳐버리지 말아서 성의와 정심의 공을 이루소서.
전하께서는 평일 대간의 말에 대해서 혹은 비위를 거스리는 것을 싫어하고, 혹은 과격한 것을 미워하며, 혹은 자기의 의견과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가 의심하고, 혹은 사욕을 따르는가 의심하시므로 오직 용렬하여 말없는 자와 유약하여 일을 제대로 못하는 자가 도리어 그 지위에 오래 있으니 직언을 듣기가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유(申濡)의 인피하는 말에 과연 잘못이 있으니, 전하께서 의심하시는 것도 당연하고 미워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바로 유배의 법을 적용하여 변방으로 내쫓으시는 것은 너무 과중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신유에게는 병든 어미가 있어 사정이 딱한데이겠습니까. 효도로 다스리는 치세 하에서는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당(唐)나라의 신하 유우석(劉禹錫)이 파주(播州)에 귀양가게 되었으나 모자(母子)가 함께 갈 수 없었는데, 중승(中丞) 배도(裵度)가 그에게 노모가 있다고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자식으로서 스스로 근신하지 않아 어버이에게 걱정을 끼쳤으니 거듭 책망해야겠다.’ 하니, 배도가 아뢰기를 ‘폐하께서 지금 태후를 모시고 계시니, 우석을 불쌍히 여기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짐이 말한 것은 자식된 자를 문책한 것이다. 그러나 그 어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 하고, 물러나와 좌우 신하에게 이르기를 ‘배도가 나를 끝까지 매우 아끼는구나. 우석을 연주(連州)로 고쳐보내라.’ 하였다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미담으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살펴 주소서.
옛말에 이르기를 ‘성문은 닫고 언로(言路)는 열라.’ 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재이를 당할 때마다 급급해 하고 당황해 하시면서 오직 직언을 듣지 못할까 두려워하십니다. 신하들의 진언을 으레 포상하시면서도 채택하여 쓴 것은 소소한 두서너 가지 일에 불과하고, 성상의 마음에 아끼는 것은 끝내 윤허하지 않으시며, 일이 지난 후에는 도움을 구하는 뜻도 따라서 나태해집니다. 사람들이 이와 같음을 알기 때문에 근년에는 비록 직언을 구하는 하교가 있더라도 그 뜻에 응하는 자는 극히 적습니다. 전하께서는 여기에 대한 까닭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명께서 유의하여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는 아름다운 말과 지당한 논의가 아닌 것이 없다. 만사의 뿌리는 모두 마음에 있는 것이고 보면 어찌 절박한 일 중에 큰 것이 아니겠는가. 내 비록 불민하나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더욱 숨김없이 일러주어 과인으로 하여금 개과천선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5월 7일 기유
유계(兪棨)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는데, 이경여와 홍명하의 말을 따른 것이다.
5월 9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11일 계축
조복양(趙復陽)을 집의로, 곽제화(郭齊華)를 지평으로 삼았다.
5월 12일 갑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 초자장(楚茨章)을 강하였다.
5월 13일 을묘
임의백(任義伯)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전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하교에 응하여 상차하기를,
"하늘이 진노하시어 큰 이변이 빈발하고 한발이 더욱 참혹하게 들어 들판이 황량합니다. 어인 일로 쇠퇴의 징조가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는 시대에 모여든단 말입니까. 연이어 내린 애통해 하시는 하교를 보니 걱정하고 애쓰시는 뜻이 더욱 간절합니다. 어공(御供)은 이미 감하였고 방물(方物)도 정지하였으니, 본말을 모두 갖추었으며 성의와 문채도 겸비하였습니다. 크게 덕음(德音)을 발하여 장기수를 모두 석방하시니 어두운 가운데 귀신의 감응이 메아리처럼 빨라 단비가 내렸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고 만민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성상의 이 마음은 요(堯) 순(舜)이 될 수 있고, 성상의 이 조처는 당우(唐虞)의 시대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성역(聖域)의 좋은 시대를 한 걸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이 마음을 확충하고 이 조처를 계속해서 힘쓰신다면 전하의 출중하신 어짐과 지혜로써 어찌 덕(德)이 지극하지 않고 정치가 옛날과 같지 못할까 걱정할 게 있겠습니까. 하늘이 인자하여 아끼기 때문에 경계를 보이는 것이고 많은 걱정을 하면 슬기가 열린다는 고인의 말이 진실로 빈말이 아닙니다.
신은 아직도 기축년018) 겨울에 탑전에서 아뢰었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데, 장법(贓法)과 군율이 엄하지 않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 곧 신의 말이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장기수를 다 감옥에서 내보낸 것을 기쁘게 여기는 것은 신의 기쁨이 아니라 바로 온 백성의 기쁨을 기쁨으로 삼은 것입니다. 대저 온 백성이 모두 어찌 몇 사람에게 개인적인 애정을 가져서 그러하겠습니까. 인정은 대개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성상의 마음은 지극히 어질고 지극히 공정한데 처음에는 어렵게 여기시다가 나중에는 석방하신 것은 실로 상천(上天)의 노여움을 공경하고 만민의 목숨을 구제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한 때의 사의를 헤아려 대사면의 은전을 베푼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하늘을 섬기기를 마치 효자가 어버이를 섬길 때 삼가고 두려워하며 부드러운 말소리와 온화한 얼굴빛으로 여러모로 정성을 다 쓰는 것처럼 하시므로 하늘의 감응 역시 마치 지성으로 하는 자식에게 노여움을 푸는 것과 같이 하였습니다. 그 일관된 이치가 이처럼 명백하니 어찌 더욱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쇠약한 기운이 갑자기 솟아올라 곧 교지에 응하고자 하였습니다만 연달아 상(喪)을 만나 노환이 더욱 악화되었는데 치통이 더욱 괴롭습니다. 볼 안팎에서부터 턱밑까지 크게 부어서 밤낮으로 신음하며 식음을 폐하다시피 한 지 여러 날입니다. 이제 겨우 조금 나았습니다만 아직 완치되지는 않았습니다. 때문에 품은 생각을 쓰려다 도로 그만두어 지연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또 성상께서 조처하신 일이 이미 잘 되었다 하고, 두세 통의 차자를 보니 역시 모두 상세한데 신이 무슨 말을 할 것이 있겠습니까만 구구한 생각을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활한 말이라서 반드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니 성명께서 헤아려 택하소서.
아, 전하의 마음은 곧 요순의 마음이니, 요순의 정치를 행하시면 이 또한 요순의 정치가 되는 것입니다. 요순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효도와 공손일 뿐이며, 요순의 정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인의(仁義)일 뿐입니다. 효도하고 공손한 행실을 미루어 만민을 가르쳐서 효도와 공손함을 일으키고, 인의의 정치를 닦아서 만민을 인솔하여 인의를 일으키면, 백성이 된 자는 평상시에는 안도하여 베개를 높이 벨 수 있고 난리를 당해서는 윗사람을 어버이처럼 여기고 상사(上司)를 위해 죽을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이치를 어기고 윤리를 어지럽히는 일이나 윗사람을 원망하며 질시하는 백성이 있겠습니까. 인의(仁義)의 말이 세상에 행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인의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듣는 사람이 반드시 오활하다고 여기니 누가 이를 따라 행하겠습니까. 그러나 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晋文公)은 이를 빌려서 제후 중에 패자가 되었고, 당 태종(唐太宗)은 이를 힘써서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임금이 행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지 행하기만 하면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만, 하고 안하고는 오직 전하께 달려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눈 앞에 보이는 이익만 탐내시거나 일정한 법규에만 구애받지 마시고, 큰일을 해야겠다는 뜻을 분발해 계속 쉬지 않고 해나가되 요순의 마음을 본받고 요순의 정치를 행하시며, 강론한 《시전(詩傳)》·《서전(書傳)》의 가장 긴요한 곳으로서 성스런 황제와 지혜로운 임금이 현인에게 위임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한 까닭을 체득하여 반드시 몸소 힘써 실천하고, 쇠퇴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화를 불러 망하게 된 까닭을 체득하여 반드시 애써 징계하여 고치소서. 그리고 진대(珍臺)·한관(閒館)에서나 혼자 있어 흩으러지기 쉬운 곳에서도 항상 잊지 않고, 계속 힘쓰고 힘써서 반드시 당우(唐虞)와 삼대(三代)의 정치처럼 해야겠다고 다짐하소서.
이른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하나의 정성일 뿐입니다. 이른바 정치라는 것 역시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마음에 뿌리를 둔 정성이 일에 나타나 정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성으로 이런 정치를 한다면, 정치가 어찌 바로서지 않겠으며, 다스림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창졸간에 모두 말하기 어렵고 또한 한두 가지로 세기도 어려운 것입니다만 시험삼아 그 대략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서경》 전모(典謨)와 《시경》의 아송(雅頌)에서 일컬은 것은 이런 마음과 이런 정치가 아닌 것이 없으나 어진이에게 위임하며 백성을 편안히 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현인에게 성의로써 위임하지 않으면 현인을 쓸 수 없고, 현인을 전일하게 쓰지 않으면 백성이 편안할 수 없으며, 백성이 편안하지 않으면 나라가 편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인을 의심하지 않고 위임하며 백성을 편안히 하면 바로 이게 인애(仁愛)이므로 정치가 이로 인해 거행되어 나라의 근본이 견고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오늘날에 찾아볼 때 과연 모두 다 발탁되어 재야에 버려진 현인은 없으며 과연 어루만지고 보호하여 그 혜택이 아래에까지 미쳤습니까.
아, 임금을 만나 도를 행하는 것은 군자의 소원입니다. 초야와 산림에서 늙어 죽는 것이 어찌 어진이의 뜻이겠습니까. 다만 당시의 임금이 성의를 다하지 않고 그의 말을 쓰지 않으면 겉치레로는 붙들어둘 수 없으니, 이것이 흰말을 잡아 매어 두기 어려운 까닭입니다.019)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욱 편리하지 못한 형편이 있고 또 몹시 추운 때나 매우 더운 때에 예복을 갖춰 입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것은 한가로이 지내던 자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에는 현인을 존중하여 그를 위해 특별히 집을 지은 자도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특별히 새로 짓지는 못하더라도 창경궁 궐문 밖의 이조의 직방(直房) 중 빈 곳을 수리하고 청소한 다음 춘하 추동 중 매우 춥거나 덥지 않은 때에 부름을 받고 와서 여기에 거처를 정하게 하고 창름의 고기를 공급해 줍니다. 그리고는 공사의 모임에는 출입하지 않게 하고 경연이나 서연에서 시강하게 하거나 혹 여러 선비들과 반궁(泮宮)에서 토론하게 합니다. 그리고 더욱 널리 초청하여 무리지어 올라 오게 하여 올바른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다시금 불편한 형세가 없을 것이며 나라에 현인을 쓴 실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 백성이 편안하면 나라도 편안하고, 백성이 불안하면 나라도 불안한 법이니, 백성은 실로 불쌍하지만 두렵기도 합니다. 지금 백성의 힘이 쇠진하였으므로 조금 쉬게 해주어야 할 것이니 무릇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서둘러서 해주어야지 미루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제 만수전(萬壽殿)이 이미 완공되어 정성스런 효심을 폈으니 이제부터는 토목 공사를 일체 중지하십시오. 백성을 부역시키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군사를 모집하는 것은 재물을 축내는 것이 아닙니까. 재물을 축내고 백성을 해쳐서 지나치게 사치하는 것은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군과 읍의 병기는 거의 모두 정예로우니 수리하는 일과 월과(月果)에 대비하는 일과 세초(歲抄)하는 일은 잠시 기한을 정해 정지해야겠습니다. 염초를 굽는 일이 크게 민력을 허비한다는 것에 대해 전일 신의 견해를 대략 말씀드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하고 있습니까? 만일 지금까지 계속한다면 감당할 만한 큰 읍은 그래도 괜찮겠지만 쇠진한 작은 읍은 매우 큰 곤욕이 될 것이니, 다만 편의에 따라 준비하게 해야지 강제로 굽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폐지할 수 없는 것은 농한기를 이용한 군사훈련입니다만, 훈련을 하지 않는 기간에 영장(營將)이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인가는 살펴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이 일찍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 받을 길도 없는데 백성의 원망만 쌓이게 하는 적곡(糴穀)을 탕감해 주자고 청해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들으니 각 읍의 관리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받았다고 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지 혜택을 입지 못했다고 하니 진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이런 유들을 상세히 조사하여 탕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홀아비와 과부와 고아와 독신으로서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을 여러 사람이 모두 알고 있는 자는 역시 감사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하여 모두 세금을 받지 않게 하면 이것도 삼대의 어진 정치 중의 하나입니다. 또 나라의 경비가 넉넉치 못하므로 전지의 세금을 감해 주는 것을 비록 옛날과 같이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태창(太倉)020) 에 남은 콩이 있다고 하니 영남과 호남에 해마다 흉년이 든 이 때를 당하여 받아들일 콩을 경감시켜 조그만 혜택을 베푸는 것이 기근을 구제하는 정책에 합당한 듯합니다만 이 일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수사 노비도 하늘이 낸 백성인데,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유독 학대를 받고 있으니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서로(西路)와 청남(淸南)의 신공(身貢)은 일 년에 명주 한 필을 바치는 것인데, 한 필의 값 대신 반드시 대여섯 냥의 백금을 준비하여 내사(內司)에 바쳐야만 무사하고 명주로는 바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북도(北道)에서 징수하는 공물 역시 점점 많아진다고 말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러한 폐단은 통렬히 혁파할 수는 없습니까.
지난해 사신의 행차가 끊이질 않아 접대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는 모두가 백성의 고혈입니다. 그러니 불쌍한 우리 삼로(三路)의 피폐한 백성은 다른 도보다도 더욱 심하여 배고파도 먹지 못하고 목이 타도 마시지 못하고 피곤해도 쉬지 못하면서 역에서 대기하고 도로에서 분주하여 잠잘 겨를도 없었는데 더구나 씨뿌려 밭갈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가슴을 치며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을 듣기만 하여도 불쌍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이 연로(沿路)는 병화(兵火)를 겪은 것이나 다를 게 없으니 사리상 넉넉히 은혜를 베풀어 국가가 불쌍히 여기고 있음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관서의 수비군은 강가의 분둔(分屯)을 해체한 뒤로 병영(兵營)에다 예속시켜 베포를 거두는 군졸로 삼았는데 병조에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신이 심양을 왕래할 적에 이 일을 듣고 마음속으로 매우 괴이하게 여겨 돌아와 선조(先朝)에 아뢰었는데 그 후에야 비로소 병조의 관할이 되어 수비군에게 거둔 베는 받아서 그 곳에 두었다가 안팎의 수요에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군인 또한 대부분 유약자로 채워져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어린아이에게 베를 독촉하고 있으니 원망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 군인 중 유약자는 사실대로 조사하여 기록해 일정 기간 징세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감영 소속의 요수군포(遼水軍布)도 헤아려 감해주시고, 새로 추쇄하여 얻은 노비의 공물도 다른 도와 같게 하지 말고 특별히 감해 주소서. 또한 양서(兩西)는 균등하게 해야 하는데 해서(海西)에는 쌀 다섯 말을 받는 것이 있으니 이것도 일정 기간 동안 그 중 두세 말을 감해 주십시오. 또 관향(管餉)의 곡식으로 양서의 역참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풍년이 들면 그 반만 받고 풍년이 들지 않으면 받지 마소서.
개성부(開城府)는 재물은 이미 고갈되고 힘은 이미 다했으므로 돕지 않으면 지탱하지 못할 것이니 해서의 관향곡과 관서의 군포를 넉넉히 주어서 재화의 밑천으로 삼게 해주어야겠습니다. 경기에서 가을에 받아들일 것은 적절한 수량으로 감해 주면 역시 곤궁한 자를 돌봐주는 유지(遺志)입니다. 또 생각건대 새로 추쇄할 일은 그만둘 수는 없으나 허실과 시비 간에 놀라지 않는 백성이 하나도 없고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원근이 매우 소란합니다. 깊이 생각해 보건대 많지만 도망가는 것보다는 감해주어 있게 하는 것이 더 낫고, 그 수효만 얻는 것보다는 그 마음을 얻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지금 들으니 10명이 사는 집은 2명의 세금을 감해준다고 하는데, 10명이 사는 집은 많지 않지만 6, 7명이나 7, 8명이 사는 집은 필시 많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쳐야 할 군포는 적어도 십여 필이 될 것인데 뼈만 남은 파리한 백성들이 밤낮으로 쉴 사이 없이 마련할 즈음에 그 고생하고 괴로워하는 실상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6, 8명이 사는 집은 2명분을 감해주고 9, 10명이 사는 집은 3명분을 감해 준다면 받아들이는 것은 비록 줄어들지만 백성이 지탱할 수 있어서 오래 지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 수효만을 가지고 많이 거두려고 힘쓴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도망자가 속출하여 친족과 이웃의 폐해가 전보다 몇 갑절이나 될까 신은 두렵습니다. 혹은 《대전(大典)》에 일정한 법이 있다고 합니다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저 헌장은 가벼이 고쳐서는 안 되지만 백성을 구휼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때로 경장(更張)하더라도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어렵고 위태로운 때는 태평한 시대와는 크게 다르며, 극빈한 백성은 삶을 즐기는 백성과는 현격히 다른 것이니, 백성을 위해서 폐단을 제거하는 데 비록 《대전》의 규정보다 지나치게 한다 하더라도 불가한 점이 뭐가 있겠습니까.
또 국가가 국가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기강이 있기 때문이며,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강상(綱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인(良人)이 변하여 천인이 된 자도 있고, 노비가 그 주인을 배반한 자도 있고, 사천(私賤)이 공천(公賤)이 된 자도 있고, 혹은 반은 양민의 부역을 하고 반은 공천에 속한 자도 있고, 혹은 소송에서 요행히 이겨 한 집안을 죽인 자도 있습니다. 연줄을 타 청탁하거나 간사한 아전들에게 아부하는 자는 이기고, 한적한 시골의 고독하고 힘없는 자는 집니다. 도감이 기일(期日)을 정해 알리면 먼 곳의 우매한 자는 여기저기 달려다닙니다마는 본관이 심리하지 않고, 어사가 자세히 살피지 않고, 송관(訟官)이 공명하지 않으니 억울함을 당하여 원한을 품은 자가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라에서 몰랐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알았다면 어찌 기일이 지났다고 핑계대고 심리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왕도 정치는 옥송(獄訟)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기강이 이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강상이 이로 말미암아 땅을 쓴듯이 없어진다면, 이미 끝났다고 하여 다시 분별해 바로잡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태조조에 노비 변정 도감(奴婢辨定都監)을 설치한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었겠습니까.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하는 것이니 인장을 새기고 없애고 열 번 바꾼들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것은 관계된 바가 매우 크므로 왜곡된 것을 펴주고 원한을 씻어주고 기강을 세우고 강상을 부식하여 한 번 어지러운 백성을 바로잡아서 크게 인심을 위로하는 것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아뢰게 한다면 이는 백성들을 분분히 거둥길로 나오도록 유도하는 것이고 유사를 앞세운 뜻도 아니니, 송사의 법이 어디에 있다고 하겠습니까.
아, 당우(唐虞) 시대는 오교(五敎)를 공경히 펴고,021) 주(周)나라 때는 삼물(三物)로 가르쳐 현인을 빈례(賓禮)로 천거하니022) 백성은 순박하고 풍속이 후하였으나 오히려 교도하는 일을 부지런히 하였는데 더구나 이런 말세에 몇 차례 변란을 겪고도 교도하고 통솔하는 방안을 전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백성이 박절하지 않고 풍속이 구차스럽지 않기를 바라기란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안에는 교수관을 두고 밖에는 교양관을 두었으니, 그 뜻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교수관의 일은 번갈아 돌아다니는 것에 불과하고 제술(製述)하는 것도 드무니 자주 시험을 보게 하더라도 이것은 이른바 매일 경쟁하게만 하는 일입니다. 교양관의 임무는 여러 읍을 때때로 순력하면서 잠깐 강의만 하고 잠깐 제술만 하고서 그치는 데 불과하니 역시 근본적인 것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물뿌리고 쓸고 대답하는 절목 역시 망연히 알지 못하고 있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의정부에 있을 때 그 조목과 법규를 간략히 하고 대략 향약을 모방하여, 서울에서는 예조와 한성부가 관장하고 지방은 감사와 수령이 관장하게 하여 오부(五部)와 여러 읍으로 하여금 다달이 신칙하게 하고, 또 각동과 각면으로 하여금 그 풍속을 바로잡게 하라고 공문을 보내 권유한 적이 두서너 번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속된 관리들이 소홀히 여기는 것은 옛날부터 통탄해 온 일이라 받들어 이행하는 자가 많다고는 못 들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서쪽으로 나갔을 때 전하는 말을 들으니 조정에서 교유한 뒤로 어린이와 시골 사람 중에 깨닫고 착해진 사람이 왕왕 있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오래 지속해 지켜서 행한다면 어찌 그 효과가 없겠습니까. 또 신이 근래 관동에 갔었는데 지나는 군과 길가의 마을에 혹 새로 지은 서재가 버려져 잡초가 우거진 것이 있기에 물어보았더니, 조정에서 법을 만든 후에 서재를 만들어 어린이를 가르쳤으나 신이 퇴임한 후로 이 일도 결국 폐지되었다고 하므로 신은 삼가 몹시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인심은 점점 악해지고 풍속은 점점 무너져서 강상의 변고가 역사에 끊이지 않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관서의 변방 읍은 오랑캐 땅과 가까워 다른 풍속에 젖어 있어서 본래 걱정이 많았습니다만 근래 역모하는 적들이 도내에서 나오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풍속을 바꾸는 일이 비록 쉽지는 않다고 하나 가르치고 바로잡는 법을 진실로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사신의 행차가 계속 끊이지 않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하겠느냐고 한다면 그 점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진실로 성심이 있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이는 해조에서 전날의 문서를 찾아내어 전국에 일제히 밝히고, 조정은 감사를 신칙하고 감사는 수령을 신칙하여 오래도록 태만하지 않게 하여 반드시 하도록 시키는 데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착실히 해 오랜 세월 동안 연마한다면 어찌 산란하게 내버려 두어 날로 버릇이 없어져 구제하지 못하게 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아, 한 사람이라도 무고한 자를 죽이는 것을 왕도를 행하는 자는 하지 않으며, 사형수를 삼복(三覆)하는 법은 지극히 엄중합니다. 그리고 태장(笞杖)과 형신에 이르기까지 경중에 따른 격식이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관리들은 죄의 대소와 일의 공사(公私)를 불문하고 오직 혹독한 형벌과 준엄한 법만 숭상하여 도리어 정치를 돕는 도구를 분풀이 하는 밑천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칠고 포악한 진장(鎭將)의 무리들이 잘못 죽이는 것을 경계하지 않고 많이 죽이는 것으로 위엄을 삼아 풀을 베고 짐승을 잡듯이 하여 혹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살육당하는 경우도 있으나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고 먼 지방 사람은 호소할 곳이 없으니, 원통한 일 중에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이런 일을 통렬히 금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움직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 옛날에 형벌에 대해서 반드시 조심하라, 불쌍히 여기라, 공경하라, 공명(公明)하게 하라고 하였으니, 신중히 하면서 측은해 하고 불쌍히 여기는 그 뜻을 천년 후에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 차라리 잘못하여 죄인을 놓칠지라도 의심스러운 죄는 경감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천리와 인정이 병행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민심에 흠뻑 젖어 그 넓고 큰 것을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지난번에 죄인의 심리를 마치자 비가 내렸는데 또 다시 심리하게 하셨다니 이 역시 성상의 마음이 요순의 마음과 꼭 부합하는 것입니다. 몸가짐을 삼가며 정치를 닦는 것이 주 선왕(周宣王)보다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죄명이 심히 무거우면 비록 실정은 가볍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내막을 알 수 있겠으며, 신분이 미천하면 비록 죄가 의심스럽더라도 어떻게 밝힐 수 있겠습니까. 죄는 같은데 혹은 용서받기도 하고 혹은 용서받지 못하기도 하며, 실정은 가벼운데 혹은 죄명을 벗기도 하고 혹은 벗지 못하기도 하는 것에 있어서는 유사의 잘못이지만 성스런 세상에 억울한 기운이 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집집마다 사람 하나씩 두어 분변하지 않는다면 살펴 제재하기란 역시 어렵습니다.
그러니 풀어주는 은택을 사방에 베풀고자 한다면 오직 늙고 오래된 자에게 해야 합니다. 고례에 ‘가련한 자와 혼몽한 자에게는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023) 하였는데 대개 어린이와 늙은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춘추》의 전(傳)에 말하기를 ‘천도(天道)는 10년이면 크게 변하고 인도(人道)는 10년이면 미움을 버린다.’고 하였는데, 정축년024) 부터 오늘까지 10년이 두 번 지나고도 1년이 되었으며, 기축년025) 부터 지금까지는 10년에서 겨우 1년이 모자랍니다. 세월이 이미 오래된 데다가 죽을 날도 멀지 않았는데 고향을 떠나 백발이 되도록 슬피 울부짖고 있으므로 보는 이나 듣는 이가 불쌍히 여기고 있으니, 이것도 음양의 화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미 형륙을 가하지 못할 자인데다가 또 역모죄에 관련된 것도 아니라면 모두 탕척하는 가운데에 넣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한(漢)나라의 하후승(夏侯勝)은 무제(武帝)의 사당에 쓸 풍악에 대한 논의를 반박한 것 때문에 하옥되어026) 두 해 겨울을 지냈으나 선제(宣帝)가 재이를 당하자 하후승을 사면해 간대부(諫大夫)로 삼았고, 함께 하옥되었던 황패(黃霸)도 자사(刺史)로 삼았는데, 사가(史家)가 이를 책에 기록하여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었고, 후세에도 비평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혹 견책을 받은 지 이미 오래되었거나 여러 번 사면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조정의 사적에 끼이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왜 그렇게도 법망이 지나치게 엄밀하단 말입니까.
죄는 자식에게 미치지 않고, 상은 대대로 뻗치게 하는 것은 요순의 법이고 부자와 형제간에 서로 죄를 입히지 않는 것이 옛날의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벌이 혹 후손에게까지 미치고, 죄가 혹 친족에게까지 가해집니다. 자식이 아비를 위해 송사를 제기하는 것은 인정과 의리로 보아 용서할 만한 일이니 들어주지 않는 것까지는 그래도 괜찮은데, 거기다 더욱 엄중히 다스리고 있으니 관대한 기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옛날 선정신 김굉필(金宏弼)이 죄를 지어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그 노모가 상소하자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자손이 선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너그러운 조종조의 은전은 오늘날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닙니까. 어질고 안 어질고를 막론하고 집에 노모가 있는데 자식이 먼 곳으로 유배가게 되면 그 절박한 정이 어찌 한 사람의 슬픔만 되겠습니까. 죄입은 이런 사람만 유독 큰 천지에 용납될 수 없단 말입니까. 후손에게 미친 형벌을 거두어 주어 덕을 넓히고, 후세에 뻗친 상을 미루어 선행을 권하소서. 그리하여 버려졌거나 폐고된 자들이 성세(聖世)에서 함께 은혜를 입게 하며, 전쟁에서 죽은 자의 자손이나 청백리의 후예에게 모두 벼슬을 주신다면 어찌 치세의 성대한 은전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지난 해에 본도에서 취재(取才)한 육진(六鎭)의 무사를 병조에서 이관(移關)하여 초치해 처음에는 친히 만나보시고 쓸 것 같이 하였다가 끝내는 다시 시험을 보여 헛걸음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얼음과 눈이 쌓인 여러 관문과 중첩한 고갯길을 밟고 와서 결국은 쓸쓸하게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이 7, 8명의 마음을 잃은 것은 한 도 천만 명의 마음을 잃은 것입니다. 신은 이를 우려하여 올라와 면대하였을 때 감히 그 진상을 아뢰었더니, 재주에 따라 쓰라는 어명이 계셨는데 그 뒤에 등용된 자가 몇 명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직까지 등용하지 않았으면 등급에 따라 추천하소서. 그러면 먼 곳 사람들의 바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서북의 용감한 사람 중에 제일인자를 선발한다면 필시 장수의 재목에 합당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해조가 힘써 찾아본다면 어찌 적임자가 없겠습니까. 이것도 조정이 깊이 생각해야지 무심히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아울러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이러한 큰 재이를 만나 크게 놀라 깨우친 마음이 있어서 대사면의 은택을 특별히 베푸시니 이는 천 년에 한 번 있는 일입니다. 이에 백성과 더불어 다시 일을 시작해 함께 쉬겠다는 뜻을 교유하여 일세를 감동시켜 고무시키소서. 또 글 잘 쓰는 신하에게 명하여 옛글을 모방하여 널리 알리되, 재물을 탐하는 것을 경계하는 글을 짓게 하여 탐내는 자로 하여금 큰 요행이 두 번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경계함이 있어서 날로 허물에서 멀어지게 하소서. 그리고 포악함을 경계하는 글을 짓게 하여 잔혹한 자로 하여금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거울삼는 바가 있어서 악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또 게으름을 경계하는 글을 짓게 하여 교화를 소홀히 한 관리로 하여금 법을 농락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경계하는 바가 있어 어명을 신중히 봉행하게 하십시오. 또 그로 하여금 각각 한 통씩을 더 쓰게 하여 내외와 대소의 공관 벽에 걸어 놓고 항상 보면서 후세에 전하도록 하소서.
또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잠깐 사이에도 능히 생각해 상제를 대하듯이 하여 날로 새롭고 또 새롭게 하여 점점 새로워지는 교화를 성취하여 나라의 운명이 새로워지게 하소서. 그러면 요임금이나 순임금처럼 되어 억만 년의 무궁한 아름다움이 오늘로부터 시작될 것이니 종사의 그지없는 다행이며 신민의 큰 다행일 것입니다. 신은 이제 늙고 병들어서 혼몽함이 이미 심해져 말이 졸렬합니다만, 오직 충성코자 하는 어리석음을 진실로 억누를 수 없는 바가 있어 감히 성상을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살펴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나라의 원로로서 상하가 모두 걱정하는 이 때를 당하여 감히 모른다고 하겠는가. 간절한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공경하고 탄복해 마지않는다. 내가 비록 불민하나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목별로 아뢴 일은 당연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케 할 것이다."
하였다.
5월 14일 병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 초자장(楚茨章)을 강하였다. 지경연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요즈음 신하들의 진언이 자못 많으나 시행한 것은 매우 적으니, 진언한 자에게 필시 서운한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도 묘당에 있으니 만일 시행할 만한 일이 있다면 왜 상의하여 시행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하면서 남의 일처럼 여기는가?"
하자, 유성이 아뢰기를,
"대신 이하가 신유(申濡)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이는 신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법 적용이 너무 무겁게 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신유에게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직책이 대사간인데 멀리 오지에 유배시켰으니 역시 지나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특함과 정직함을 변별한다고 한 말은 다 헛말이다."
하였다. 시독관 이만웅(李萬雄)이 아뢰기를,
"신유의 본 뜻에 어찌 다른 것이 있었겠습니까. 애당초 자기의 견해를 견고히 정하지 못하여 끝내 착오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대신이 어찌 신유 한 사람을 위해서 이처럼 변명하여 구하겠습니까. 이로 보면 그가 사특한 마음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헌부의 차자에도 한 쪽편의 말만 듣는다는 말이 있기에 내 진실로 의심하였는데 반드시 이를 가리켜서 말한 것일 것이다. 신유에게 다른 뜻이 있다는 게 아니라 다만 처음에는 자기 주장을 굳게 지키지 못해 물의를 불러왔고 끝내는 벼슬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여 갑자기 인피하였다. 그러다 죄를 얻게 되자 대군(大君)이 꾸며 모함한 것이라고 핑계대었으니 어찌 통탄치 않을 수 있겠는가. 여러 사람이 비록 변명한 바가 있으나 내 마음에는 끝내 석연치 않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요즈음 한 광무제(漢光武帝)의 본기를 보니 구양흡(歐陽歙)이 장죄(贓罪)를 지어 하옥되자 수백 명의 태학생이 대궐에 엎드려 그가 억울하다고 말하였으나 끝까지 석방하지 않아 옥중에서 죽었다. 오늘의 일을 가지고 보건대 만일 이런 일이 있으면 필시 ‘저 수백명이 대궐에 엎드려서 간쟁하면 상께서 왜 들어주지 않겠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 장오죄로 갇힌 관리 네 명을 일시에 석방하였으니 사체로 말한다면 아랫사람의 도리로서는 진실로 간쟁하여 뒤 폐단을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흔연히 서로 기뻐하였다. 범사가 이러한데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이경석의 차자에 탐욕을 경계하는 글을 지으라고 하였는데, 한편으론 장오죄를 지은 관리를 석방하고 또 탐욕을 경계하는 글을 짓는다는 것은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대사헌 김좌명(金佐明) 등이 상차하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천재지변이 오는 것은 백성의 원한이 부른 것이다.’고 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오늘의 백성이 원망한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라고 여기십니까? 혹독한 추위와 무더운 장마도 원망하며 탄식하는데, 오늘날 수고롭게 하고 원망하게 만든 것은 신들이 자세히 열거하지 않아도 전하께서 이미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수고롭게 하고 원망하게 만든 것을 따져 보면 폐기되고 실추되었던 것을 다시 개선하고 거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역시 나라를 다스림에 없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작으면 입으로 저주하고 크면 마음에 원한을 품습니다. 한 방면으로 말한다면 하나도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으며, 한 고을로 말한다면 하나도 그렇지 않은 마을이 없으며, 한 마을로 말한다면 하나도 그렇지 않은 집이 없어서 웅성거리며 난리라도 났으면 하는 생각들을 너나없이 하고 있어 조석도 보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는 것은 즐겁지 않고 일하고 싶은 의욕도 없으며 윗사람을 질시하는 마음만 있으니, 설령 창고가 조금 차 있고 군대가 조금 정돈되고 병기가 훌륭하더라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신 좌명이 작년 경연에 입시하여 바야흐로 《주서(周書)》 문후지명편(文侯之命篇)을 강하면서 그 편제(篇題)에 대하여 말씀드린 바가 있었는데, 전하께서 신들을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오늘날을 깨우치는 바가 아닌가. 군신 상하가 이렇게 태평 무사하게 지내고 있으니 혹 뜻하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하시며 매우 간절하게 탄식하셨습니다. 신이 조정에서 시행하는 일을 볼 때마다 성상의 생각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수준에서 나온 것이어서 부득이한 것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적임자가 아닌 자가 임용되어 일을 점진적으로 하지 않고 기세만 올려서 위세로만 해나가 군현에 소란을 일으키며 백성들을 학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급변을 만나기도 전에 장차 붕괴될 사세가 되었습니다. 신들은 듣건대 병사는 정예화에 힘쓰고 병력의 다량화에는 힘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더구나 장수이겠습니까. 인심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 힘들며, 국세는 한번 기울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신중히 생각하소서.
성상의 하교 중에 ‘나는 사실 선비를 사랑하나 혹 아랫사람을 본받는 도리에 어긋나기도 하며, 나는 사실 곧은 말을 좋아하나 혹 자만한 기색이 보일 적도 있다.’고 하셨으니, 아, 전하의 잘못은 전하께서 이미 알고 계십니다. 《역(易)》에 이르기를 ‘머지않아 선으로 돌아오므로 후회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으니 매우 길하다.’ 하였으니, 위기를 바꿔 안정시킬 기틀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 예로부터 천하와 국가를 가진 자는 누구나 현인을 임용하고 싶어했지만 끝내 멀리하여 버리게 되고, 누구나 간하는 말을 듣고 싶어했지만 끝내 싫어서 박대하게 되었던 것은 그 병통이 스스로 성인으로 여겨 자신의 의견대로 하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 어찌 일세의 일을 맡아 해낼 만한 인재가 없겠습니까만 성의로써 찾지 않고 예의로써 대우하지 않으니 누가 나서려 하겠습니까. 일찍이 인재가 없는 적이 없었는데 현재 조정에 이토록 심히 인재가 부족하니 초야에 깊이 숨은 선비가 있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속어(俗語)에 말하기를 ‘이긴 자가 쓴 것은 진 자의 바둑이며, 흥성한 나라가 쓴 것은 망국의 신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고금의 치란(治亂)에 밝으신데 어찌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곧장 성상의 지혜가 오늘날의 여러 신하보다 낫다 하여 지나치게 자만하십니까. 옛날 위 무후(魏武候)가 일을 도모함에 여러 신하가 미치지 못하였는데 조회를 마치고 즐거워하는 빛이 있자 오기(吳起)가 나아가 아뢰기를, 옛날 초 장왕(楚莊王)이 일을 도모함에 여러 신하가 미치지 못하였는데 조회를 마치고 근심하는 빛이 있자 신공(申公)이 묻기를, 「임금께서 근심하는 빛이 계신데 왜 그러십니까?」 하니, 답하기를 「과인은 들으니 세상에는 성인이 끊이지 않고 나라에는 현인이 부족하지 않으므로, 그 스승을 얻은 자는 왕천하(王天下)를 하고 그 벗을 얻은 자는 패제후(霸諸侯)한다고 하는데, 지금 과인이 재주가 없는데도 여러 신하가 미치지 못하니 초나라는 위태로울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초 장왕은 두려워하였는데 임금께서는 기뻐하시니 신은 삼가 두렵습니다.’ 하였습니다. 신들 역시 옛 사람이 두려워하였던 바로써 오늘 다시 두려워하면서, 지붕을 쳐다보면서 한숨 쉬며 울고 싶은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지금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이조로 하여금 인재를 선발하여 덕있는 사람이 미관말직에 침체되어 있지 않게 하라는 하교가 계셨으니 신들은 삼가 감읍하고 다행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선발하는 책임이 비록 이조에 있으나 선발하는 법은 임금의 한 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는 진실로 볼 만한 사람이 없으나 어찌 사람마다 임금을 속이고, 사람마다 자기 붕당을 옹호하고, 사람마다 명예를 구하고, 사람마다 사욕을 도모하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성의로 대우하지 않고 예의로 접대하지 않습니다. 일반 관료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간관을 대우함도 그러하며, 간관을 대우함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중신을 대우함도 그러합니다. 전하께서 이러하시니 오늘날의 선비로서는 오직 산에 깊이 들어가지 못할까를 두려워하니 누가 나와서 전하를 위해 쓰이려고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현인을 얻어 함께 다스리고자 하시면 반드시 먼저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 역마로 자주 부르는 것으로써 선비를 대하는 성의로 삼지 마시고, 관직과 품계를 높여주는 것으로써 선비를 대하는 예의로 삼지 마십시오. 지성으로 물으셔서 모든 계책이 다 드러나게 하고, 마음을 기울여 채택하고 받아들여 좋은 말이 감춰지지 않게 하되, 한 사람에게서 완벽하기를 구하지 말며, 처음에는 잘 하다가 끝에 가서 게을러짐이 없게 하소서. 그러면 비록 움직일 때마다 그 뜻을 기다렸다는 듯이 백성들이 명을 순종할 수는 없더라도 정치가 옛날에 가까워져서 국사가 오늘날처럼 해이해지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 충직한 말이 행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며 정직한 선비가 용납받기 어려운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오직 나의 말대로만 따라하고 어기지 말라고 하는데 이게 임금의 큰 병통입니다. 전하께서 다스린 지 9년 동안에 일에 대해 말하다가 죄를 얻은 자가 무릇 몇 사람입니까. 작게는 파면시키고 크게는 유배를 보내는가 하면 심지어 형벌을 받거나 사형된 자도 있으니, 이것이 어찌 말하게 유도하는 도리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이 대각(臺閣)을 마치 덫이나 함정에 들어간 것처럼 보아 조금이라도 기휘(忌諱)에 관련되면 감히 입을 열려고 하지 않으므로 구언(求言)하는 하교를 여러 번 내려도 직언은 들리지 않고 때로 출세하기를 바라 스스로를 자랑하는 무리가 이리저리 뜯어 맞추어 교묘하게 들어 맞으면 상께서 이를 지나치게 칭찬하시는데 다만 여염의 의논만 증가시킬 뿐입니다. 전하의 총명으로써 어찌 이를 살펴 잘못을 고치지 않으십니까. 정원이 봉박(封駁)하는 것은 국조의 좋은 법으로서 전하께서도 이미 허락한 것입니다. 임금의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반드시 모두 도리에 합당한 것은 아니므로 반드시 위에서 옳다고 하는 것을 아래에서 그르다고 한 다음에 봉박하는 일이 있게 되는데, 이는 상이 좋아하는 것을 어기는 것이므로 그 형세가 쉽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며 얼굴 빛을 너그럽게 하여 용납하시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 걱정인데, 말은 이미 시행하지도 않으면서 견책과 벌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차라리 애당초 봉박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전하께서 한번 개과천선하고자 한다면 말만 하고 말아서는 안됩니다. 전후 일에 대해 말씀드렸다가 견책을 받은 사람을 골라서 전형에서 막지 말고 대각에 두소서. 그리고 전하께서 평일에 누구를 가장 미워하였는가를 생각하셔서 혹은 우연한 실수로 지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혹은 억울함을 펴주셔서 사방의 만민으로 하여금 전하께서 직간을 좋아하는 것이 진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그러면 언로(言路)가 열릴 수 있을 것이며 정직한 선비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아첨하는 기풍이 사라지고 위태로운 기미를 만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밖으로는 두려워하는 빛을 보이면서도 안으로는 선행을 하는 실상이 모자라고 비록 좋아한다는 말씀을 하시더라도 끝내 허물을 고치는 효과가 없다면 비록 나쁜 징조가 날로 사라지고 좋은 징조가 매일 이르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징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요즈음 사치가 심하여 안으로는 궁중으로부터 밖으로는 여염에 이르기까지 분수와 품계를 넘는 일이 많아서 의복이나 장신구들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할 뿐만이 아니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중종 때 부마 송인(宋寅)이 타는 말의 안장이 제도보다 지나쳤으므로 금리(禁吏)에게 적발되었으며, 명종 때 왕대비의 서모가 자적(紫的)으로 말고삐를 만들었다 하여 금리에게 적발되었다고 하니, 그 때 법이 잘 집행되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가사 지금의 유사가 과거의 법집행과 같이 한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전하께서 몸소 먼저 검소하게 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 달렸을 뿐입니다.
아, 풍속이 퇴폐해져 윤리가 무너지고 기강이 해이해져 법령이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자도 있고 노비가 주인을 죽이는 자도 있으며 아내가 지아비를 죽이는 자도 있는가 하면 원한이 조금만 있어도 대낮 도회지 가운데서 서로 죽이고 있습니다. 오늘 법을 시행하여 단속하고 나면 내일 또다시 그럽니다. 이로써 보면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고 별이 낮에 나타나며 지진이 일어나고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얼어 붙고 양기가 강성하여 가무는 것은 다만 그 그림자일 뿐으로, 이것은 업적을 교화보다 앞세우고 형벌을 덕정(德政)보다 앞세운 데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교화를 밝히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행하셔서 이 백성들로 하여금 향할 바를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안으로는 경성으로부터 밖으로는 사방에 이르기까지 비록 향약을 널리 펴지는 못하더라도, 무릇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거나 순종하지 아니하거나 공손하지 않거나 윤리를 어기고 강상을 거스리는 것들이 골육지간에 있는데 혹 의리보다 은혜를 중시해 관가에 고발하지 않으려는 자가 있으면 각 관원을 신칙하여 적발하여 논죄하소서. 그리고 주인을 배반한 실정이 드러났는데도 그 주인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을 경우 마땅히 관사로 하여금 법대로 죄를 다스려 명분을 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그러면 백성이 뜻을 정하고 풍속을 후하게 하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임금이 정치를 하는 요점은 선행을 상주고 악행을 벌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후세의 걱정거리는 상이 분수에 넘치고 벌이 남발되는 데 항상 있습니다. 상이 분수에 넘치므로 권면됨이 적고 벌이 남발되므로 징계됨이 적습니다. 그러므로 아랫사람에게 금과 옥이 질펀하여도 부족하게 여기며, 대부에게 형벌을 주어도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아낄 뿐만 아니라 예의와 겸양을 숭상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전 이조 참의 송준길(宋浚吉)이 여러 번 불러도 나오지 않고 상소하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사람이 임금 스승 아버지 세 분에게서 생성(生成)되는데 한 가지 도리로 섬기는 것은 천지의 변함없는 법이며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신은 젊어서 고 참판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워서 실로 옛 사람이 말한 것처럼 망극한 은혜가 있는데 신만큼 오랫동안 섬겨서 자세히 아는 자가 없습니다. 시론(時論)이 두 길로 나뉜 후로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자들의 마음이 서로 다르고 비방과 칭찬이 반반입니다만, 장생에 이르러서는 피차를 막론하고 이구동성으로 후덕한 군자라고 하니 도가 훌륭하고 덕이 높음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 저서들을 살펴보면 세교(世敎)에 보탬이 되는 것이 또한 한둘로써 셀 수 없으니 진실로 성세(聖世)의 종장(宗匠)이고 유가(儒家)의 표적(標的)입니다.
엊그제 듣건대 경연관이 건의하여 시호(諡號)의 은전을 내려 주라고 청하자 생시의 관직 품계로는 시호를 내리는 규례에 해당하지 않는데도027) 성명께서 특별히 소청을 허락하셨다 합니다. 이에 유림들이 활기를 띠고 유생들이 반색하며 모두 성명께서 선비를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는 훌륭한 뜻을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이윽고 또 들으니 유사가 문경(文敬)과 문원(文元)으로 주의(注擬)할 것을 의논하여 정하였다고 합니다. 대저 경(敬)은 성학(聖學)의 기본인데다 장생이 항상 힘쓴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칭호가 아니겠습니까만, 사람의 자품과 기상에 각각 걸맞는 바가 있으니 반드시 서로 걸맞아야만 진실로 공론에 부합되고 후세에 보일 수 있을 것이며 이를 받은 자의 마음 역시 편안합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장생은 순진하고 온후하며 너그럽고 온화한 기상이므로 두 번째의 예비 시호가 진실로 딱 맞는 제목입니다만 한스럽게도 논의한 자가 두 번째에다 두었습니다. 이것은 신이 아첨하는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장생을 본 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여론의 소재는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경(敬)’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원(元)’이 그 사람에게 걸맞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여 사물에 맞춰 공평하게 베풀어서 모두 마땅하지 않음이 없으니 취하거나 버리는 데에 반드시 잘 처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이 이름은 한 번 정해지면 영원히 고치기 어려우므로 진실로 마땅함을 잃으면 무궁한 한을 남길 것으로 여기는데 그 관계된 바가 또한 어찌 중대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역사를 고찰해 본 적이 있습니다. 송(宋)나라 조정에서 처음 주자(朱子)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하였는데 중론이 부족하게 여기자 재차 의논하여 ‘문(文)’이라고 고쳤으며, 또 생전에 시호에 대해 맞지 않는 점을 논박한 자가 있었는데 주자가 옳게 여기었습니다. 또 어른들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 조종조 때에 유사가 어떤 신하에 대한 예비 시호를 써 올리자 성상이 적당치 않다고 하여 다시 써 올리라고 분부하니 경연의 신하가 주석한 여섯 글자 중에서 선택하여 비하(批下)해 주기를 청하였고, 고 유신 성혼(成渾)의 시호는 인조 대왕이 특별히 둘째 번 예비 시호를 선택해 비하하였으니, 당시 성상의 뜻이 필시 범연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일 송나라의 예대로 한다면 비록 이미 결정한 것이라도 고칠 수 있는데 하물며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또 우리 선조의 전례가 있는데이겠습니까. 만약 성명께서 특별히 살피시어 옛것을 참작하고 오늘에 맞춰서 실정에 맞는 글자를 골라서 정해 주신다면 유신(儒臣)을 숭상하고 보답하는 도에 있어서 지극히 아름답게 되어 유감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삼가 보건대, 옛 사람 중에 혹 자기 스승에게 사사로이 시호를 올린 자가 있었고, 송나라에 이르러 문헌의 성대함이 삼대(三代)에 비길 수 있었는데 횡거(橫渠)의 학도들 역시 이를 하였으니, 대개 그 스승의 장점과 단점에 대한 논의를 그 생도보다 더 잘 아는 자가 없으므로 사실과 벗어나게 시호를 지어 스승에게 누가 되게 하는 것은 의리상 감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고 참찬 신 백인걸(白仁傑)은 늙고 병들어 이미 퇴임한 후에도 그 스승 조광조(趙光祖)를 위해 자력으로 대궐에 나와 은전을 내려 주라고 빌었습니다. 이러한 선배의 독실한 의리의 기풍에 대해 신은 항상 감격하고 흠모하였으나 질병이 매우 깊어 몸을 일으킬 길이 없기에 감히 글로 대신하여 외람되이 번거롭게 하니, 신은 진실로 인걸의 죄인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한 말은 진실로 옳으니 짐작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특별히 고 참판 김장생(金長生)에게 문원(文元)이란 시호를 내렸다.
5월 15일 정사
월식이 있었다.
5월 16일 무오
윤강(尹絳)을 대사헌으로, 정세보(鄭世輔)·허후(許厚)를 장령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지평으로, 김옥현(金玉鉉)을 정언으로, 민희(閔熙)를 보덕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전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올린 차자에 ‘옛날에 현인을 위하여 별도로 집을 지은 자가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특별히 새로 짓지는 못하더라도 공관을 수리하고 청소하여 부름을 받고 온 자가 여기에 숙소를 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이 뜻은 매우 좋으나 현인이 기꺼이 부름에 나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교는 나라를 위한 급선무이다. 진실로 현인을 얻어 공관에 묵게 하고 국가에서 먹여 주면서 여러 선비의 모범으로 삼는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경석의 차자에서 ‘조적을 탕감해 주는 일에 대하여 아직 받지 못한 것을 이미 받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지의 혜택을 입지 못하였습니다.’고 진달하였습니다."
하고,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그 중에 홀아비와 과부와 고아와 독신자가 있으면 가려 내어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종친 중에 너무나 빈곤하여 조석간에도 부지하지 못하는 자가 많이 있으니 종부시(宗簿寺)로 하여금 사실대로 조사해 내어 미곡으로 구휼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 참판 민응형(閔應亨)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응형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을 경계하는 말에 ‘백성들을 화합케 하는 것으로 하늘에 영원한 운명을 비는 근본을 삼는다.’고 하였는데, 신이 백성을 화합케 하는 데 대한 말을 성상을 위해서 진달하겠습니다. 신이 경기 고을들의 형세를 미루어 멀리 삼남(三南)의 농사를 짐작해 보건대 지금 비록 비가 오더라도 필시 모두 흡족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라의 근본이 오직 삼남에 있는데, 삼남에 흉년이 들면 국가의 경비를 어디에서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실지로써 하늘에 응하는 도리는 본래 백성을 위로하고 보호하는 것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서(書)》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세 번이나 잘못하였는데 원망이 어찌 큰 잘못이 드러나야만 있겠는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방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원망이 이미 드러나면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드러나지 않았을 때 방비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폐단의 조목이 셋인데, 형정(刑政)과 군정(軍政)과 추쇄(推刷)입니다. 나라 안에 한 사람도 편안한 사람이 없고 한 사람도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그 원망이 이미 드러나서 위로 하늘을 거스렸습니다. 수년 이래로 재이가 거듭 발생하였으나, 이번 가뭄의 절박한 근심은 다른 재난보다 더욱 심합니다. 다행히 조종(祖宗)의 도우심에 힘입어 성명께서 깨달으셔서 감옥의 장기수를 일시에 석방하셨으니, 이는 우(禹)임금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신 마음이며 성탕(成湯)이 여섯 가지로 자책(自責)하는 뜻입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요(堯) 순(舜) 같은 최상의 지혜로운 자질을 가지고 국가의 어려운 때를 당해서 무릇 시행하시는 일이 진실로 무언가 해 보겠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다스려지기를 구함이 너무 예리하고 빠른 효과를 보고자 하여 선왕의 정치를 따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는 뜻에 맞게 일을 하는 것을 충성으로 여기고, 말을 듣는 데 있어서는 겸손하고 귀를 기쁘게 하는 것을 직언으로 여기고 계시며, 기강을 세우고자 하면 한갓 각박만 숭상하고 군려(軍旅)를 다스리고자 하면 오로지 위력만 사용해 백성의 원성은 돌아보지 않아서 변괴가 날로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한번 크게 은혜를 베푼 후부터는 화기가 조정에 가득하고 교지에 응하는 말이 매일 이르고 있습니다. 만일 이 마음을 지속하여 태만히 하지 않고 더욱 힘써서 끝까지 한결같이 하신다면, 하늘과 사람이 감응하는 이치에 있어 어찌 전환의 계기가 없겠습니까. 성상께서 과연 진작시킬 뜻이 있다면 더욱 인심을 얻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심을 잃고도 나라를 다스린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마음을 잊지 마시고 수신과 성찰하는 도리를 다 하소서."
하고, 아울러 영장(營將)의 폐단과 성지(城池)의 폐해에 대해 반복하여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정성이 지극하다. 늙고 병든 사람으로서 집에 있으면서 말하지 않더라도 누가 허물하겠는가. 그런데 경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금하지 못한 끝에 어렵게 와서 면대를 청해 이처럼 간곡히 말하는데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릇 일은 충분히 강구해야 하므로 묘당과 상의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응형이 사례하고 물러가자 술을 주라고 명하였다.
5월 20일 임술
권시(權諰)를 집의로, 송시열(宋時烈)을 찬선으로, 오정원(吳挺垣)을 사간으로, 정만화(鄭萬和)를 교리로, 송규렴(宋奎濂)을 지평으로 삼았다.
5월 21일 계해
상이 특별히 찬선 송시열을 불렀다. 시열이 이때 어머니의 상복을 벗었으므로 승지에게 교지를 기초하도록 명하여 하유하였으나 끝내 병을 핑계대고 오지 않았다.
5월 23일 을축
상이 서교(西郊)로 거둥하여 청나라 사신을 맞아 인정전에서 접견하였다. 청나라가 그 부친과 조부를 천지(天地)에 배향하고 사신을 보내 조서를 반포하였다. 다음날 사면이 있었다.
5월 26일 무진
김수항(金壽恒)을 이조 참의로, 이민적(李敏迪)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홍문관이 아뢰었다.
"지난 해에 본관으로 하여금 선기옥형(璿璣玉衡)을 만들라는 하교가 있어서 그 때 강관(講官) 홍처윤(洪處尹)이 이미 명을 받들어 만들어 올렸습니다. 지금 들으니, 김제 군수 최유지(崔攸之)가 일찍이 기형(璣衡) 일구(一具)를 만들었고 물을 사용하여 스스로 작동하게 하였는데, 해와 달의 운행 도수와 시각의 흐름이 조금의 오차도 없어서 본 사람은 모두 정밀하고 완벽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 기계를 서울의 집에 두었다고 하니, 그가 임지로 떠나기 전에 관상감으로 하여금 천문을 웬만큼 이해하는 자 한 사람을 선발하여 가서 법을 배우게 하고, 아울러 상방(尙方)의 솜씨 좋은 목공을 선발하여 그 제도를 모방하여 일구를 본관에 보관하게 하소서."
옥당이 【부응교 이경억(李慶億), 교리 이만웅(李萬雄), 수찬 이단상(李端相).】 상차하기를,
"이민구(李敏求)의 죄는 실로 종사에 관련된 것으로서 왕법(王法)에 있어서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며 온 나라 백성이 다 같이 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초 의율(擬律)할 때 홀로 형벌을 면하였고 끝내 은혜로운 용서를 받아 한가로이 살게 놓아 두었으니, 이것만도 성조(聖朝)의 너그러이 포용하는 은전입니다. 어찌 햇수가 오래되었다 하여 싸잡아 수록하여 다시 사적에 올려 보통 죄를 짓고 규례에 따라 사면을 받은 자와 같이 할 수야 있겠습니까. 서용하라는 명이 내리자 사람들이 놀라고 의심하니 간쟁하는 논란은 결단코 그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근래 대각의 신하가 기상이 떨어지고 게을러진데다가 유약한 습성이 이루어져 무릇 논할 만한 일이 있어도 마음으로만 알고 입은 다물고 있어서 사사로운 감정에 끌려서 눈치를 보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이민구가 서용된 후로 물의가 오래도록 시끄러우니 이런 일들의 시시비비는 확연히 명백한데도 머뭇거리고 물러서서 말하지 않아 그 명을 도로 거두자는 청이 지금까지 없으니, 국가에서 대간을 설치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이민구를 서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대사헌 윤강(尹絳), 장령 허후(許厚)·정세보(鄭世輔), 사간 오정원(吳挺垣), 정언 정석(鄭晳)을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5월 29일 신미
민응형(閔應亨)을 대사헌으로, 이정영(李正英)을 사간으로, 곽지흠(郭之欽)·정익(鄭榏)을 장령으로, 목래선(睦來善)을 정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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