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8권, 효종 8년 1657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2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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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갑진

안개가 짙게 끼었다.

 

3월 3일 병오

정유성(鄭維城)을 판의금부사로, 신유(申濡)를 대사간으로, 채충원(蔡忠元)을 승지로 삼았다.

 

3월 4일 정미

상이 서교(西郊)에 나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인정전에서 접견하였다. 칙서는 이러하다.
"예로부터 제왕이 천하를 통어(統御)함에는 존친(尊親)을 가장 중시하였다. 이 때문에 가례(嘉禮)를 하고 나면 반드시 현호(顯號)를 추존하고 그 큰 은택을 추숭하여 사해(四海)에 흡족하도록 하는 것이니, 이는 효를 넓히고 조상을 생각하며 후손들에게 모범을 내려주는 어진 마음으로 매우 훌륭한 법이라 하겠다. 짐이 성모(聖母)인 소성자수 공간안의 황태후(昭聖慈壽恭簡安懿皇太后)의 자애로운 교훈을 받들어 만방(萬方)을 무마하고 편안히 한 것이 이제 12년이 넘었다. 이에 다시 현숙한 사람을 선택하여 자전(慈殿)의 가르침을 보좌하고 내치(內治)를 돕도록 하였다. 우러러 생각건대 지극한 덕은 높고 두터워 보답하기 어려우니, 큰 칭호에 의지하지 않고서야 어찌 효성을 펼 수 있으랴. 이에 경건하게 천지와 종묘 사직에 아뢰고, 11월 24일에 제왕(諸王)과 패륵(貝勒) 및 문무 제신을 거느리고 공경히 책봉문(冊封文)과 보물을 받들어 성모(聖母)의 존호를 더하여 ‘소성자수 공간안의 황태후’라 한다. 융성한 의식을 이에 거행하니 큰 은혜가 이에 널리 퍼지는도다. 아, 빛나는 명호를 거듭 더하여 자위(慈闈)의 성선(聖善)을 천명하니, 큰 은혜가 멀리 퍼짐에 거의 온 천하의 즐거운 마음에 합치되리라."

 

청나라에서 공문(公文)을 보내 조총(鳥銃) 1백 자루를 곧 봉황성(鳳凰城)으로 운송하도록 요구하였다.

 

전남도 영광군(靈光郡)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갔다가, 50인이 익사하였다. 도신(道臣)이 아뢰니, 구휼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3월 6일 기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윤강(尹絳)을 공조 판서로, 이경억(李慶億)을 부교리로, 오정원(吳挺垣)을 수찬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정언으로 삼았다.

 

함경도 북청인(北靑人) 이방준(李邦俊)의 첩이 과부로 수절하면서 개가(改嫁)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홍원(洪原) 사람이 그 미모를 소문으로 듣고서 그 주인에게 사서 협박하여 데려가자, 바닷가에 이르러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감사가 아뢰니,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3월 7일 경술

함경도 경성(鏡城) 민가의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발이 6개였다.

 

3월 8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비국이 늦게야 개좌(開坐)를 했다는 이유로 유사 당상을 추고하라고 명하고, 또 하교하였다.
"임금이 치욕을 당해 신하가 그것을 위해 죽어야 하는 때에, 대신들이 어찌 감히 그 집에서 편안히 누워 달게 먹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반드시 하관(下官)들의 죄일 것이니, 비국의 낭청을 파직하라."

 

3월 10일 계축

권대운(權大運)을 집의로 삼았다.

 

3월 11일 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3월 12일 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강원도 춘천(春川)·횡성(橫城)·홍천(洪川)·원주(原州) 등 고을에 사나운 호랑이가 횡행하여 민간에 출몰하면서 우마(牛馬)와 사람을 잡아먹었다.

 

3월 13일 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평양성 안에 불이 났다.

 

3월 15일 무오

정치화를 형조 판서로 탁배하였고, 이시방을 공조 판서로, 김여옥(金汝鈺)을 강화 유수로, 이경억을 부응교로, 정만화를 부교리로, 목겸선(睦兼善)을 수찬으로, 박세성을 헌납으로, 정식(鄭植)을 정언으로, 이행도(李行道)·심재(沈梓)를 검열로 삼았다.

 

《실록》 수정청이 아뢰기를,
"선조조(宣祖朝) 《실록》은 정묘년부터 임진년까지 26년은 이미 중초(中草)를 썼고, 계사년 이후부터 병신년까지 4년은 쓰고 있으나 마치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은 이식(李植)이 적상산(赤裳山) 사고(史庫)에서 상고해다가 찬술한 것입니다. 정유년 이후 정미년까지의 《실록》은 강화도에서 가져왔는데, 11년 동안에서 빠진 것이 32개월분입니다. 이것은 다시 상고할 곳이 없으니, 본청의 당상과 낭청 각 한 명을 사관(史官)과 함께 적상산 사고에 보내어 상고하여 베껴오도록 하소서. 그리고 병신년 이전의 것으로 이미 수정한 것은 그것대로 먼저 인쇄하고, 정유년 이후의 아직 수정하지 못한 것은 베껴오기를 기다렸다가 빠진 달을 보충하면, 아마도 새해 전에 완전히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3월 16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상이 서교에 행차하여 전송하였다.

 

3월 17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실록》 수정청이 아뢰기를,
"적상산 《실록》에서, 선조조 정유년 이후 11년간에 빠진 32개월분을 장차 베껴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청의 낭청과 사관 두 사람만으로는 형세상 쉽게 다 써오기가 어렵습니다. 양호(兩湖)의 도사(都事) 및 그곳에서 2, 3일 거리에 있는 고을 수령과 찰방 가운데 글쓰기에 능숙한 사람을 문관이냐 음관이냐를 따지지 말고, 양도(兩道)로 하여금 5, 6인을 미리 뽑아 두었다가 본청 당상관이 내려간 뒤에 때에 맞춰 모두 모여서 한꺼번에 베껴쓰게 하여, 혹 지체함이 없도록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금궤 석실에 깊이 보관해둔 사서(史書)를 베껴내는 임무를 옛 사람들은 영광으로 여겼으니, 이는 대개 그 일이 비밀스러운 것이라서 모든 사람이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열성조에서 실록을 찬술할 때는 베껴쓰는 관원이 비록 그 숫자가 매우 많더라도 반드시 문신(文臣)으로 선임을 했으니, 그 뜻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사서의 빠진 글을 베껴쓰는 일에 음관(蔭官)까지 끼게 되었으니, 참으로 괴이하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82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인사-관리(管理)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금궤 석실에 깊이 보관해둔 사서(史書)를 베껴내는 임무를 옛 사람들은 영광으로 여겼으니, 이는 대개 그 일이 비밀스러운 것이라서 모든 사람이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열성조에서 실록을 찬술할 때는 베껴쓰는 관원이 비록 그 숫자가 매우 많더라도 반드시 문신(文臣)으로 선임을 했으니, 그 뜻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사서의 빠진 글을 베껴쓰는 일에 음관(蔭官)까지 끼게 되었으니, 참으로 괴이하다.

 

3월 18일 신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원정(李元禎)을 지평으로 삼았다.

 

3월 21일 갑자

종부시가 아뢰기를,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의 단자를 보니 ‘우의 아우 낭원 도정(朗原都正) 이간(李偘)이 우의 종을 빌려 상의 거둥에 참여하러 가던 중에 그가 탄 말이 마침 지평 민유중(閔維重)이 탄 말과 대궐 문 밖에서 서로 싸워, 양쪽 집의 종들이 싸움을 하였는데, 민유중의 집 종이 우 형제의 이름을 들먹이며 방자하게 욕을 했습니다. 민지평이 듣고는 크게 노해 말을 몰던 우의 종을 잡아 가두고 장령 오두인(吳斗寅)과 함께 앉아 잇달아 형신을 하여 끝내는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종 하나가 원통하게 죽은 것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지만, 당초에 종실을 모욕한 죄는 국법에 실려 있는 것이라 자연 해당되는 법이 있으므로, 아뢰어 처리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법부(法府)가 형벌하다 죽인 것은 비록 본시(本寺)가 알 바는 아니지만, 보통 사람이 종실을 모욕한 것은 마땅히 본시에서 추고하여 다스립니다. 다만 대신(臺臣)은 일반 관직과 다름이 있어 곧바로 그 종을 가둘 수 없으니, 청컨대 본시(本寺)에서 추고해 치죄(治罪)하여, 그 죄를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장령 오두인과 지평 민유중은 우선 먼저 체직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종부시에서 아뢴 글에 대한 비답을 보니, 장령 오두인과 지평 민유중은 우선 체직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이 일의 전말을 신들은 비록 듣지 못하였으나, 사람의 목숨이 끊어졌다니 과연 매우 놀랍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대간의 체모는 일반 관직과는 자연 다름이 있으니, 단지 한편에서 올린 글에 근거하여 갑자기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을 내리신 것은 대간을 우대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그 스스로 나서기를 기다려 실상을 자세히 안 뒤에 처리해도 될 것이니, 바라건대 더 깊이 생각하시어 내리신 명을 거두소서."
하니, 따랐다.

 

3월 22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오두인과 지평 민유중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외람되이 대간의 자리에 있으면서 혹독하게 무함과 모멸을 당해 견책하는 벌이 내려 놀랍고 두려웠는데,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성상의 도량으로 체직하지 말라는 명령이 잇달아 내렸으니, 신들의 낭패스러움이 더욱 심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이 일에는 자연 전말이 있습니다.
신 오두인이 지난 달 그믐쯤 무뢰인들이 칼을 빼들고 서로 싸운다는 말을 듣고 곧 잡아오게 했는데, 홍귀종(洪貴宗)과 강시망(姜時望)이었습니다. 이들은 곧 낭선군 이우의 겸종(傔從)이었는데, 한 명은 잡아왔으나 한 명은 궁가(宮家)로 숨었다고 하므로 신은 이어 잡아오도록 독책하였습니다. 이 달 4일 상께서 궁으로 돌아오신 뒤에, 신들이 금호문(金虎門)으로 물러나오는데, 신 유중의 말을 모는 종이 어떤 사람에게 매를 맞아서 피를 토하고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몰라 곡절을 자세히 물으니, 곁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낭선군의 집 종이 이유없이 구타하고 여러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짓밟고 차면서, 또 대관들을 마구 욕하는 말을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들의 생각은, 풍문을 듣고 발차(發差)한 일에 대해서 원망을 품고 이런 소란을 피운 것이라 여겨, 즉시 범인을 체포하도록 하여 그 실상을 알아 처리하고자 하였습니다. 신들이 귀가한 뒤에 궁가(宮家)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 하루에 두 번이나 부탁해 왔는데, 민유중의 종이 얻어맞았다고 말하지 않고 모두 오두인의 종이 얻어맞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신들은 이에 비로소 소문만 듣고 사람을 잡아온 원망 때문에 보복을 하려다가 잘못 다른 사람의 종을 때린 것임을 알았습니다. 나라의 체모에 관계되는 것이라 그냥 버려둘 수가 없어서, 전체 관원이 모였을 때 다른 동료와 상의하여 궁노(宮奴)를 잡아다가 잇달아 형신을 가하고 가두었는데, 며칠 뒤에 궁노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개 신들의 본래의 뜻은 애초에 꼭 죽이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범한 죄로 따져보면 실로 원통하거나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전후의 곡절이 이와 같을 뿐인데, 삼가 종부시에서 올린 글 속의 낭선군 우의 정장(呈狀)을 보면, 심지어는 두 말이 다툰 것이 싸움의 실마리가 되었다고 말을 만들어 마치 일 때문에 서로 다툰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본 일이라 본래 속일 수 없는 일인데, 실상을 모두 숨기고 없는 일을 날조하였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입니다. 저 매를 맞은 종은 어리석고 약해서 동서(東西)도 모르는데, 종반(宗班)의 이름을 어떻게 알아서 감히 멋대로 욕을 했겠습니까. 또 가령 참으로 욕을 한 일이 있었다면, 진실로 즉시 실상을 드러내 유사(有司)에 알려 치죄하도록 할 것이지, 어찌 이미 17일이나 지나도록 오래 두었다가 이 노여워하는 틈을 타서 곧장 종부시가 치죄하도록 하는 것입니까. 신들이 헌부에서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소문만 듣고 사람을 잡아온 까닭으로 가노(家奴)가 대신 매를 맞았고, 국가 수백년의 법을 무너뜨려 궁노들이 대간을 직접 해치는 조짐을 열었으니 어찌 가복(家僕)이라는 혐의 때문에 그 일을 그냥 넘기고 치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일이 관계된 바가 적지 않고 집안의 일은 가장(家長)의 책임이라 여겨 처음에는 그 주인을 들어 탄핵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으려 하다가, 곧 생각하기를 그 종이 창졸간에 일으킨 변이니 혹 그 주인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하여, 서로 의논하여 중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올린 글을 보건대 도리어 법을 어기고 사람을 죽인 죄에 빠뜨리려 하니, 신들이 일을 함에 있어서 무르게 한 잘못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커졌습니다. 이미 체직되었던 관직에 계속 있기가 어려우니, 신들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오두인 등이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여 아뢰기를,
"궁노(宮奴)들이 세력을 믿고 원한을 품어 유감을 풀었으니, 옥에 가두고 심문하는 것은 법에 있어 당연한 일이요, 매를 치다가 죽었다 해도 불쌍할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체직시키는 명이 뜻밖에 나왔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도 그 형세상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미 다시 그대로 있으라는 하교가 내렸고 체직이 될 잘못이 없으니, 장령 오두인과 지평 민유중은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궁가(宮家)의 노복들이 법을 멸시하고 방자하게 구는 습관은 요즈음 더욱 심해, 법사(法司)의 하인들이 걸핏하면 그들에게 끌려 다니면서도 아무도 감히 누구인지를 따져 묻지 못하니,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낭선군 이우는 작질이 높은 종재(宗宰)로서 평소에 하인들을 검칙하지 못하여 전에 없던 소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으며, 법사에서 그 일을 진계해 다스린 뒤에도 도리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에 도리어 거짓된 말로 글을 올려서 마치 사나운 종을 위해 보복을 하는 듯이 하였으니, 그 스스로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종실에 수치를 끼친 것이 큽니다. 낭선군 우를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이 일을 논하는 것은 전도됨이 매우 심하다. 민유중은 그 종들이 서로 싸운 일에 끼어들어, 그 혐의도 피하지 않고 멋대로 매를 쳐 죽여서 사사로운 분을 풀어 사람의 목숨을 진흙 정도로도 여기지 않았다. 오두인은 그에게 빌붙어 함께 그 일을 저지르면서 거리낌이 없었으며, 인피할 때 이에 말하기를 ‘궁노들이 직접 대간을 해치는 조짐을 열었다.’고 하여, 고의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그 일에 무게를 두려 했으면서 스스로 그 부당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종을 대신하여 원통함을 다투면서 염치를 상실하였는데, 그대들은 마치 모르는 체하면서 잘못이 없다 하여 감히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고, 왕손(王孫)으로써 사노(私奴)에게 치욕을 당해서 그 죄를 다스려 달라고 청한 자에게는 도리어 그르다 하여 심지어는 추고를 청하여 마치 보통 사람들이 보복을 하는 것과 같이 하였으니, 논의한 것의 잘못되고 전도됨이 어찌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진실로 한탄스럽다. 오두인과 민유중 등은 모두 체직하라."
하였다.

 

지평 이원정(李元禎)이 인피하기를,
"이제 동료들을 처치한 일로 갑자기 엄한 비답을 받았으니, 놀랍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오두인과 민유중이 죄에 따라 징벌하여 다스린 것은 그들의 직분일 뿐이었습니다. 꼭 죽이려 했다는 것은 본의가 아닌 듯하니 체직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낭선군이 능멸을 당한 것이 과연 말한 바와 같다면, 당시에 그대로 아무말 안한 것은 혹 관대한 듯한데 지금에 이르러 노여워하는 것은 너무 늦지 않습니까. 종의 죽음을 인하여 말에 자세함을 결여한 채 스스로 글을 올려 매우 체면을 손상하였으니, 한 차례 추고하기를 청한 것은 단지 백관이 서로 규찰하는 뜻일 뿐입니다. 신이 두 동료에 대해 얼굴이나 아는 정도의 사이이지 실로 특별히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니, 그들의 보복을 위하여 상놈들이 하는 짓과 같게 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는 것은 반드시 그럴 이치가 없습니다. 식견이 혼미하고 일을 논함이 전도되었다는 데 이르러서는 실로 신이 죄를 모면할 수 없으니, 계속 자리에 있을 수 없는 형세는 처치가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청컨대 신의 직책을 삭탈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종부시가 아뢰기를,
"전일에 아뢴 글에 대한 비답에 따라 민유중의 종에게 이미 형신을 가하였으니, 이제 형조로 이송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해조에 이송하여 법을 상고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강화 유수 김여옥이 사조하니, 상이 직접 효유하여 보냈다.

 

상이 대신과 형조 참판 김좌명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도 오늘 대관들의 인피하는 글을 보았는가? 내가 민간에 있을 때부터 풍문의 폐단을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정(反正) 초기에 곧 삼현령(三懸鈴)을 제거하고 단지 풍문의 규정만 남겨둔 것이다. 이것은 으레 대부분 핑계로 삼아 폐단을 일으키는 걱정거리가 되었는데, 혹 사송(詞訟)이나 혹 사원(私怨)으로 청탁을 하면, 대관 가운데 못된 자들이 이 틈을 타서 기세를 부리니, 매우 통탄스럽다. 민유중은 진실로 이것이 자신의 일이지만, 오두인 같은 자는 아직 나이도 어린 자가 아는 것도 없으면서, 이에 감히 연명으로 인피하면서 마치 담당자인 체하니, 이것이 무슨 의도인가? 민유중도 역시 그 종의 일로써 장황하게 변명을 하니 그 비루함은 가히 말할 것도 없는데, 심지어 그 끝에 ‘대간을 직접 해친다.’는 말로써 고의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어 그 일에 무게를 두려고 하니, 이 무슨 도리인가. 오늘날 나라의 정치가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은 모두가 이런 괴상하고 망령된 무리들이 망치는 것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거니와, 대사헌 이하도 역시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하니, 우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대관(臺官)에게 죄가 있다면 진실로 벌을 줌이 당연하지만, 각기 관직을 나누어 설치한 뜻이 있으니, 종부시가 직접 대관의 종을 가두고 죄를 다스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무슨 안될 것이 있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밖의 의견들이 모두 성상께서 종실을 비호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국조보감》을 보지 못했는가? 태종 때 한 대간이 종실을 모욕하자, 태종께서 즉시 명을 내려 죄주면서 이르기를 ‘그대만 유독 이씨(李氏)의 신하가 아닌가?’ 하였으니, 만약 이 책을 지은 자를 아첨하는 자라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의 대관들은 대부분이 형편없는 자들이라, 풍문을 칭탁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국가에서 대간을 설치한 것이 우연히 한 것이 아닌데, 지금은 도리어 나라 한가운데 함정을 파놓은 꼴이 되었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민유중은 사람들이 모두 단정하고 중후하다고 칭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중은 오래 사관(史官)을 하였기 때문에, 나도 그의 사람됨을 안다. 부박하고 경망한 사람이 아닌데, 오늘 일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진실로 애석하다."
하였다.

 

3월 23일 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강원도 통천(通川)·흡곡(歙谷) 등 고을에 큰 바람이 불어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굴러 천지가 깜깜하다가 다음날 그쳤다.

 

집의 권대운이 인피하기를,
"신이 비록 못났으나 어찌 감히 억지로 말을 만들어 왕손(王孫)을 경시하고 동료를 비호하여, 스스로 임금을 속이는 죄에 빠지겠습니까. 신은 식견이 어둡고 그릇되어 시비를 가리지 못하니, 계속 직책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대사간 신유(申濡)는 인피하기를,
"지난번에 종부시의 아전이 낭선군 이우의 정장(呈狀)을 가져와 보여주면서 도제조가 장차 이것을 진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의 곡절을 신은 자세히 모르지만, 마음속으로는 혼자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장령 오두인과 지평 민유중의 인피한 글을 보니, 정장이 날조된 것이라 하고 또 본시(本寺)에서 곧장 치죄한 것을 가지고 말하였는데, 신이 외람되게 본시의 제조(提調)로 있으면서 비록 있으나마나한 존재이기는 했습니다만, 어찌 감히 태연히 헌부를 처치하겠습니까.
또 신은 여기에 마음속으로 한탄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낭선군 우가 올린 글에는 오로지 자기 종이 부당하게 피살당하고 유중의 종이 그 형제를 욕했다는 것으로 말을 만들고 있으나, 두인 등의 인피하는 글에는 크게 서로 상반된 점이 있습니다. 그 양쪽 끝을 잡아서 그 일을 따져보면 그 사이에 어찌 흑백의 구별이 없겠습니까. 체직했다가 다시 그대로 있도록 하여 가히 성상의 마음을 알 수 있었는데, 곧바로 출사하게 하라는 아룀에 대해 다시 특별히 체직하라는 하교를 하셨으니, 기를 꺾고 견책을 하심이 뜻밖에 나온 것입니다. 신하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반드시 속임이 없는 것을 법으로 삼는 것이요, 사대부가 처신할 때는 오직 스스로 염치(廉恥)를 힘쓰려고 해야 할텐데, 종의 원한을 대신해서 다투고 동료의 의견에 따라 꼬임에 넘어가 스스로 불의에 빠졌다는 것은 아마도 이럴 이치가 없을 듯합니다. 나아가 헌부의 처치에 대한 비답에 이르러서는 신하된 사람이 감히 듣기 어려운 것입니다. 왕실의 친척도 진실로 존귀하지만, 대각의 신하도 역시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처럼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백성의 풍속이 방자해진 때, 무릇 풍헌(風憲)과 관계되는 일은 실로 마땅히 부식(扶植)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이제 두인 등에게 행한 일은 갑자기 억지를 더해 대각을 대접하는 도리를 손상시킨 점이 있습니다. 성상께서 비록 왕족을 높이고자 하시나, 조정에서 누가 함께 높여주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반복해서 구구한 말을 하면서도 그 지리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정세(情勢)가 미안한데다 번잡하고 소란스럽게 한 죄까지 거듭하였으니, 한 시각도 직책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운 등이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3월 24일 정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심세정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풍문으로 사람을 잡아오는 것은 법부(法府)에서 늘 있는 일인데, 이 때문에 원한을 품어 그 종에게 분노를 푸는 것은 실로 전에 없던 변고였으니, 형신하여 다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이려고까지 의도했던 것은 아니니, 만약 사사로운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면 본래 실정이 아닐 것입니다. 관질이 높은 종재(宗宰)가 애초에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하고 뒤에 다시 분노를 품어 거짓말로 글을 올려 체면을 손상시켰으니, 추문하라는 요청을 한 의견은 상규(常規)에서 나온 것이라, 한 때의 엄한 비답으로 가볍게 언관을 체직해서는 안 됩니다. 신유의 경우 직책이 제조로 있어 처음부터 참여해 알았으니, 감히 처치를 하지 못하는 것은 형세상 당연한 것이며, 품은 생각을 진술한 것 역시 임금을 근심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평 이원정 등을 모두 출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신유는 애초에 일을 함께 하다가 뒤에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게 하였으니, 어찌 차마 대각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체차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나이 어린 대관들은 한갓 동선(董宣)과 같은 충성심006)  을 가진 것일 뿐 결단코 다른 속셈이 없는데, 엄한 하교가 여러차례 내려 체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사간 신유는 처음에는 일을 함께 하다가 뒤에 배반한 일이 없는 듯한데, 갑자기 꺾어버리셨습니다. 자신이 대장(臺長)으로 있기 때문에 단지 속이지 않겠다는 마음을 진술한 것일 따름이니, 어찌 남에게 아첨하는 모습이라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조금 상의 위엄을 거두시어, 체직하라는 명을 특별히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사간 심세정, 헌납 박세성이 인피하기를,
"삼가 상의 비답을 받드니, 대사간 신유의 체직을 명하는 하교가 있어 두려움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신유의 인피하는 글 가운데 ‘있으나마나한 존재입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사이에서 가타부타할 수 없었음이 명백합니다. 또 그가 진술한 말은 실로 우군 애국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기에 감히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은 엄하여 심지어 ‘뒤에 배반해 다른 사람에 아첨한다.’고 하교하셨으니, 어째서 성상께서는 그 실상을 헤아리지 않고 대관을 대함이 이처럼 각박하신 것입니까. 신들의 처치가 합당함에서 어긋난 잘못이 드러났으니,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간원이 【정언 정식(鄭植).】  처치하여 아뢰기를,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는 의논은 진실로 안될 것이 없는데, 엄한 비답으로 기를 꺾는 것이 너무 심합니다.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령이 뜻밖에 나왔으니, 감히 스스로 편안할 수 없음은 형세상 당연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가볍게 언관을 체직할 수 없으니,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도승지 이행진(李行進)의 괴이하고 망령됨은 늙어갈수록 더욱 심하여 이에 민유중 등을 동선(董宣)의 충성에 비기기까지 하였으니, 그 동선을 욕되게 함이 심하다. 동선이 그 종과 다투던 자였는가. 비록 명류(名流)에 아첨해 붙고자 한다 해도 임금에게 아뢰는 말이 어찌 감히 이처럼 형편없을 수 있겠는가. 그 사특한 마음을 품고 윗사람을 속이는 죄를 징벌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먼저 파직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대간의 인피하는 글에, 신유가 가타부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임금에게 하는 말을 어찌 감히 억측으로 말하였겠는가. 반드시 자세히 알고서 한 것일 것이다. 이미 동열(同列)에 있으면서 다른 제조 등이 끝내 서로 가부를 묻지 않아서 만약 신유가 말한 바대로 그 사이에서 무시를 당한 일이 있었다면 이것은 매우 놀랍고 괴이한 일이며, 다른 제조들이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간의 곡절을 종부시에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사간 심세정, 헌납 박세성이 인피하기를,
"삼가 정원에 하교하신 것을 들으니, 신들의 말로 인하여 종부시에 그 곡절을 물으라 하셨다고 합니다. 신들이 비록 못났지만, 어찌 감히 없는 일을 만들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신유가 스스로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고 말했고 보면, 어찌 가타부타한 바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임금께 믿음을 받지 못하여 하교를 내리시게 하였으니, 어찌 감히 얼굴을 들고 계속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의 인피하는 말은 지리하고 일이 매우 전도되었다. 말이 전혀 근거가 없으니, 볼 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3월 25일 무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시해(李時楷)를 대사헌으로, 신천익(愼天翊)을 대사간으로, 곽제화(郭齊華)를 지평으로 삼았다.

 

종부시가 아뢰기를,
"낭선군 이우가 본시에 정장(呈狀)하였을 때 신 이요(李㴭)007)  가 입계하여 처치하자고 하였습니다. 동료들과 의견을 모은 후에는 차관(次官)이 으레 초고를 만들게 되어 있는데, 신유가 요에게 말을 전하기를 ‘하관(下官)이 마땅히 초고를 만들어야 하나 대간의 몸이기에 형세상 불편합니다.’ 하여, 요가 곧 초고를 만들어 보냈습니다. 이렇게 오가는 사이에 자연 날이 저물었는데, 다음 날 신유가 또 사람을 신에게 보내 말하기를 ‘이 일의 곡절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계사(啓辭) 가운데 남형 살인(濫刑殺人)이란 네 글자는 말이 너무 과중하니, 고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여, 신들이 네 글자를 없애버리고 법부 형살(法府刑殺)이란 네 글자로 바꾸어 통지해 보여 주었더니, 신유가 그렇게 하자고 하여서, 곧 잘 써서 올렸던 것입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 회계를 보건대, 전 대사간 신유는 마음가짐이 간사하고 임금을 깔보아 방자한 행동을 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임금보다는 차라리 권세가에게 아첨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 사람은 비록 꾸짖을 것도 없다 하더라도 그 앉아서 이것을 받는 것이 어찌 남의 신하된 자의 일이겠는가. 이처럼 음험하고 사특하며 불량한 무리를 서울에 둘 수가 없으니,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전 장령 오두인은 북청 판관(北靑判官)에, 전 지평 민유중은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제수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경성 판관 민유중과 북청 판관 오두인은 모두 오늘 안으로 떠나보내라."
하였다. 금부에서 신유를 전남도 강진현(康津縣)으로 정배(定配)하니, 강계부(江界府)로 고쳐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전 사간 심세정, 전 헌납 박세성 등은 한갓 사당(私黨)이 있음만 알고 국가가 있음은 모르며, 한갓 소인에게 아첨하고 붙을 것만 알고 미워해야 할 것임을 모른다. 그래서 한편으로 ‘우군 애국의 정성에서 나왔다.’ 말하고, 한편으로는 ‘그 사이에서 가타부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자가 과연 이런 모습을 갖겠는가. 두세 차례 왕복하면서 문자(文字)까지 바꾼 자가 과연 가타부타하지 못한 것인가. 그 사람의 마음씀이 놀라울 뿐만이 아니라, 몽롱하게 동서(東西)와 사리(事理)도 모르면서, 마치 적의 칼날을 꺾고 적진에 깊이 뛰어들어 생사를 돌보지 않는 용사들처럼 혹은 나와서 증거를 대고 혹은 찬양하고 칭찬하여 애호하고 이끌어 주기에 급급하지만, 그 속을 두루 살펴보면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다.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대신(臺臣)이 있으며, 이들에게 어찌 이목(耳目)의 무거운 책임을 맡길 수 있겠는가. 나라의 기강이 무너짐과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감은 이런 무리들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심세정 등은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간원이  【정언 정식.】  아뢰기를,
"전 도승지 이행진은 근밀한 직책에 있으면서 일을 당하여 문득 아뢴 것이니, 비유로 인용한 말이 비록 타당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마음에야 어찌 딴 생각이 있겠습니까. 다만 성상께서 대신(臺臣)들의 기를 꺾으심이 너무 지나친 것을 보고 스스로 ‘생각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야 한다.’는 의리에 따라 아뢴 것인데, 심지어 사특한 생각으로 윗사람을 기만했다는 말로 하교를 내려서 그를 특별히 파직하셨습니다. 노여움을 조금 거두시어 파직하라는 명을 다시 거두소서. 신이 삼가 종부시의 계사를 보니, 전 대사간 신유는 물러나서 뒷말을 한 잘못이 없지는 않으나, 그 본래 실정을 따져보면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음험하고 간사하며 불량하다는 등의 말로 그의 죄안을 만들어 갑자기 먼 곳에 유배하는 벌을 더하였습니다. 대각이 쓸쓸하여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신이 논하는 것은 단지 한 명의 신유 때문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행동이 적절함을 잃어 벌을 내림이 너무 무거우니, 혹 널리 포용해야 하는 덕에 손상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안정된 마음으로 살펴서 신유를 멀리 유배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집의 권대운, 지평 이원정이 인피하기를,
"오두인 등을 외직에 제수하고 신유를 유배하라는 명이 하루 사이에 잇달아 내렸으니, 상의 노여움이 너무 격하고 처벌이 과중합니다. 승지와 간신(諫臣)을 특별히 파직하는 것도 역시 너무나 뜻밖입니다. 이 어찌 대성인(大聖人)의 화평한 도리이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의기소침하여 기상이 참혹하니, 언관의 직책에 있으면서 의리상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만, 신들이 당초에 처치한 글 때문에 일이 점점 커져서 여기에 이르러 성상께서 지나친 행동을 하시도록 하였으니, 신들이 어찌 감히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하여 얼굴을 들고 대각에서 논열(論列)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운 등이 모두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좌승지 김소(金素), 우승지 채충원(蔡忠元), 좌부승지 홍처량(洪處亮), 동부승지 김수항(金壽恒) 등이 장관(長官)과 같이 벌을 받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이행진이 말한 동선(董宣)과 같은 충성이라고 한 충(忠)이란 글자는 도무지 무슨 뜻인가? 일이 매우 원통하고 가증스러운데, 어제 우선 파직만 한 것은 장차 죄를 더 주고자 한 뜻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죄를 더하지 않은 것은 그대들이 불안해 할까를 걱정해서인데, 어찌 이처럼 번잡스럽게 소란을 피우는가. 사직하지 말고, 직분을 잘 수행하라."
하였다.
옥당이  【부응교 이경억(李慶億), 부교리 정만화(鄭萬和), 수찬 오정원(吳挺垣), 부수찬 이만웅(李萬雄).】  차자를 올리기를,
"임금된 사람이 사물에 대응하는 도리는, 마음에 편벽된 바가 없은 뒤에야 호오(好惡)가 마땅하게 되고, 이치를 살피지 않음이 없은 뒤에야 시비(是非)가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와 반대가 되면 호오가 전도되고 시비가 어긋나, 정치에 손상을 입히기에 이르지 않는 경우가 드뭅니다.
신들이 삼가 요즈음 헌부의 일을 보니 시비 곡직을 분별하기 어렵지 않은데, 전하께서 처리하시는 바는 편파적으로 사심에 얽매임을 면하지 못해서 평명한 다스림에 손상되는 바가 있으니, 이 어찌 성상에게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무릇 대관의 임무는 한 시대의 풍헌(風憲)을 주관하여 국가의 기강에 연결된 것입니다. 대관이 무거우면 국가의 체통도 역시 무거워지고, 대관이 가벼우면 국가의 체통도 역시 가벼워지니, 예로부터 임금된 사람이 대관을 중시함은 이것이 곧 국가의 체통을 무겁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번 낭선군의 가노(家奴)가, 대관이 풍문으로 사람을 잡아간 것을 혐의로 삼아 이들에게 원한을 품고 그 종에게 분풀이를 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전에 없었던 변고입니다. 법에 따라 징계함은 직책상 당연히 해야 할 바인데, 만약 법을 담당하는 관원이 되어서 그 일을 보고도 그대로 방치하고 따지지 않았다면, 이것은 풍헌을 담당하는 대관의 체통을 손상시키고 방자한 습관을 키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형벌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나, 또한 법을 어겨 살인을 한 것에 비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서로 싸웠다는 데 원인을 돌리고 거짓말로 글을 올려서 욕을 했다고 꾸며댔으니, 그 말에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이것을 가지고 마음을 안정시켜 차근차근 따져보신다면, 피차의 실정을 또렷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낭선군의 말은 믿어 의심하지 않고, 대관의 말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지적하며 잘못이라 하십니다. 풍문을 듣고 사람을 잡아온 것이라 말하는 것은 이미 분명한 증거가 있는데도 전하께서 믿지 않으시고, 서로 싸우고 욕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뒤에 꾸민 것인데도 전하께서 믿으셨습니다. 일월같은 전하의 밝으심으로 어찌 이것을 살피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아마도 편벽된 바가 있어 그런 것 같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모든 형상에는 가림이 있으나, 오직 이치는 속일 수 없다.’ 하였습니다. 신들은 그 가리움이 있는 형상에 대해서는 놓아두고, 곧바로 그 속일 수 없는 이치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조정의 대각(臺閣)에 있는 신하 가운데는 도학(道學)으로 스스로를 힘써 모든 일마다 법도에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어찌 일률적으로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사이에 전혀 우열이 없겠습니까. 저 두 신하들은 모두 나이 어리고 뜻이 예리하여 일찍이 용렬하고 패망(悖妄)함에 이르지 않았음은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아는 바요, 전하께서 이미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노복들의 한 때 싸움으로 사사로운 유감을 품고 인명(人命)을 살해했다는 것은 본뜻이 아닌 듯합니다. 다만 그 혐의를 피하지 않고 감히 멋대로 응징하여 잇달아 형을 가하고 오래 가두어 끝내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것은 진실로 잘못이 있지만, 그 마음은 단지 ‘이 일을 공법(公法)에 있어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니 작은 혐의와 같은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런 사리는 분명하여 속이기 어려운 것인데, 전하께서는 어째서 그 이치를 형상에 가린 속에서 궁구하며 돌이켜 생각하여 그 바른 실정을 알아내시지 않는 것입니까. 하물며 욕을 했다는 죄를 단지 그 올린 글에만 근거하여 본시(本寺)로 하여금 단죄하여 다스리게 했으니, 이는 훗날의 무궁한 폐단거리입니다. 가령 궁노들이 폐단을 부려 이보다 더 심한 일이 있을 때, 대관이 비록 법대로 다스리고자 하여도 문득 욕을 했다고 속임수로 소송하면, 금법이 어떻게 시행될 수 있겠습니까. 또 가령 잘못이 오로지 대관에 있다 하더라도, 단지 당시의 저울로 그 경중을 적절히 살펴 시행함이 마땅하고, 본래 임금의 위세를 떨쳐 중화(中和)의 절도를 잃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제 상하가 서로 제 주장을 갖고 점차로 사이가 막혀, 온 조정의 신하들을 모두 대각에 부회(附會)하는 신하라고 의심하여 혹 먼 외방 고을에 임명하고 혹 변방으로 유배하였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놀랍고 두려워 참담해 하니, 이 무슨 행동이십니까. 삼가 성상을 위해 애석하게 여깁니다. 바라건대 뇌정(雷霆)의 위세를 거두시고, 신유를 먼 곳에 유배한 것과 오두인·민유중을 외임에 보직한 명을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26일 기사

간원이 아뢰기를,
"권대운 등이 인피하고 물러났습니다. 이미 체직한 관원은 형세상 다시 나오게 하기 어려운 것인데, 당초 나오게 하기를 요청하였으니 경솔함을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인피하여 매우 번잡스럽고 소란스러우니, 권대운과 이원정 등을 모두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우의정 원두표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국가에서 벌(罰)을 쓸 때는 그 적절함을 얻음이 중요한 것이라서, 혹이라도 지나친 것이 있으면 공의(公議)가 비등하고 죄를 받은 자도 역시 그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이제 오두인·민유중 등을 변방 고을로 내보낸 것은 끝내 밝은 시대의 중도(中道)에 벗어난 일이 될 것이니, 신들은 탄식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대궐의 문은 싸움을 할 곳이 아닌데 궁가의 종이 멋대로 횡포를 부려 대신(臺臣)의 종을 걷어차고 때려 심지어는 상처를 입히기까지 하여 대관으로 하여금 공청으로 걸어 들어가고 종을 빌려 집에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의 상황을 두인이 직접 보았으니, 풍헌의 책임을 맡은 그가 놀라고 분하게 여겨 치죄를 하고자 한 것은 사리상 당연한 것입니다. 형벌을 가하고 오래 가두어 이 때문에 죽게 만들었으니 비록 본의는 아니었더라도 어찌 실수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성상께서 대간을 우대하심에 있어서는, 의당 그들의 실수로 말미암아 죄안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엄한 비답을 내린 뒤에 헌직(憲職)을 특별히 체직한 것만으로도 이미 그들의 과실을 징계한 것인데, 잇따라 먼 변방에 임명하도록 명하신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두 신하가 벌을 받는 것이야 신들이 실로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보건대 대각의 분위기가 참담하고, 먼 곳에서 서로 말을 전해 여러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말하기를 ‘대관이 궁노 한 명에게 형벌을 가했다가 잇따라 고개를 넘어 쫓겨갔다.’ 하니, 이 어찌 성상의 흠집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유의 경우, 앞뒤로 일을 함에 있어서 과연 잘못된 점이 있었으니, 성상께서 그것을 통촉하시고 어찌 감히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먼 변방에 유배된 것은 역시 지나친 듯합니다. 또 들으니, 신유에게는 노모(老母)가 있는데 여러 해 동안 고질병을 앓고 있고 얼마 전에 아들 하나를 잃어서 목숨을 의지할 것은 오직 신유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먼 곳에 유배를 당해 곧 사생(死生)으로 영결하게 되었으니, 이 점은 아마 성상께서 유의하셔야 할 점인 듯합니다. 신들이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조그만 보답도 못하고 있는데, 이제 또 입을 닫아서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이 어찌 전하를 섬김에 숨김이 없어야 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조금 성상의 노여움을 거두시어, 더욱 너그럽게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이와 같으니, 할 말이 없다."
하였다.

 

3월 27일 경오

남노성(南老星)을 함경 감사로, 이수인(李壽仁)을 집의로 삼았다.

 

3월 28일 신미

상이 서교에 나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인정전에서 접견하였다. 그 칙서는 이러하다.
"물화(物貨)의 매매를 금하는 것은 정해진 규례가 뚜렷하므로 예부(禮部)를 경유하여 그대 나라에 공문을 보냈다. 지난번 그대의 아우 이요(李㴭)가, 국경을 넘어 살인을 한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준 것을 인하여 감사를 전하는 사신으로 북경(北京)에 왔으니, 이치상 마땅히 지난 잘못을 통렬히 고치고 더욱 충경(忠敬)을 다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수행하던 일행이 금법을 어기고 멋대로 화약(火藥)을 사가지고 가다가,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러 성을 지키던 장경(章京)008)                  에게 수색을 당해 압수되자, 이요(李㴭)의 이름을 들어 그 사매(私買)한 사람을 잡아보내지 않고 도리어 용인해 줄 것을 애걸하였다. 이요는 이에 앞서 금지시키지 못하고 일이 발각되자 도리어 은폐하려 하였으니,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
이에 다아길(多兒吉)009) 앙방(昻邦)010)                          아로합 소부 겸 태자 태부 내한림 국사원 태학사(阿魯哈少傅兼太子太傅內翰林國史院太學士)        액색흑(額色黑)과 태자 소보 도찰원 좌참정(太子少保都察院左叅政)        능토(能吐), 이부 좌시랑(吏部左侍郞)        천대(千代)를 귀국에 보내어, 왕과 함께 사매(私買)의 실정과 폐단을 살펴 자세히 죄를 결정한 뒤에 갖추어 아뢰도록 특별히 효유하노라."

 

3월 29일 임신

권우(權堣)를 대사간으로 삼아 이조 참판을 특별히 제수하고, 오정일(吳挺一)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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