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3권, 인조 4년 1626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25.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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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임신

상이 혼궁(魂宮)에 행행하여 삭제(朔祭)에 참여하였다.

 

전라 감사 민성징(閔聖徵)이 여러 고을의 가뭄에 대한 상황을 계문하였다.

 

부호군 장현광(張顯光)이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고하니, 답하였다.
"경의 사장(辭章)을 보건대 매우 서운한 마음이 드는데, 경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고 더위가 점차 혹심해지니, 내가 감히 강청하지 못하겠다. 내일 아침 상견하고자 하니, 경은 우선 머물러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이명한(李明漢)을 동부승지로, 이성구(李聖求)를 병조 참지로 삼았다.

 

밤에 서방과 동방과 간방(艮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6월 2일 계유

원접사(遠接使) 김류(金瑬)가 치계하였다.
"양사(兩使)가 안주(安州)가 도착하여 역관(譯官) 등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 나라 왕이 조칙을 맞이할 때 천교(天橋)의 예(禮)가 있고, 노상의 각참(各站)에는 으레 은자(銀子)·인신(印信)·책자(冊子)가 있다고 들었다.’ 하므로 역관 등이 답하기를 ‘저희들이 전부터 많은 조사 노야(詔使老爺)를 모셨지만 이러한 예는 보지 못하였다.’ 하니, 양사가 말하기를 ‘조칙을 성문으로 들여갈 수가 없어 전부터 천교를 만드는 예가 있었다. 각참에는 으레 바칠 은자가 있어 개록(開錄)하여 정진(呈進)하였다고 한다. 우리들이 받을 수는 없지만 그대 나라에 과연 이런 일이 있다면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신품(申稟)하여야 하는데,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그대들이 지방관(地方官)과 함께 착복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역관들이 반복하여 변명하였으나 끝내 납득시키지 못하고 바로 말하기를 ‘천교 한 조항은 염 태감(冉太監)이 소방에 도착하여 은(銀)과 삼(蔘)을 요구하느라 교묘히 명목을 만들어 비로소 천교를 만들어 조칙을 갖고 넘어갔다는 설이 있었고, 납은 부책(納銀簿冊) 역시 전후의 태감들이 만든 폐단이다. 지금 두 노야께서 우리 나라에 임하시어 맑은 이름이 이미 전파되었는데 어찌 이처럼 무리한 말로 맑은 소문을 더럽히려 하는가.’ 하니, 양사가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우선 물러가 기다리라. 우리들이 마땅히 물어 살피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조사는 깨끗하고 검약하기가 근고에 드문데도 뜻밖에 이런 말을 제기하여 매우 놀라왔으므로 신이 연석(宴席)에서 반복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상이 부호군 장현광을 인견하였는데, 장현광이 아뢰기를,
"상께서 즉위하신 후 모든 일이 다 정비되었으나 교화 한 가지 일은 크게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흥기하여 선을 향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옛날 향약(鄕約)은 갑자기 행하기가 어렵지만 우선 교화의 큰 둑으로 삼아서 선을 권하고 악을 금하면 반드시 풍속에 도움이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향약의 법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인심이 순후하지 못하여 행하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장현광이 또 아뢰기를,
"옛날의 절목은 죄다 행할 수 없지만 상께서 권려하는 조치가 있으면 반드시 백성이 분발하는 효과가 있어, 아들은 부모에 효도하는 도리를 알게 되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알아서 사람마다 각기 사람된 도리를 다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상이 이어서 일로에 명하여 가교(駕轎)로 호송하게 하였다. 도승지 이홍주(李弘胄)가 아뢰기를,
"상께서 경연을 열지 않으신 것이 이미 반 년에 이르러 성학(聖學)의 공정이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래의 정이 상달될 길이 없으니, 지금부터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며칠 뒤에 마땅히 하겠다."
하였다.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신들이 조종조 국상 때 사례를 상고해 보니, 27일이 지난 후에는 정신(廷臣)이 권도를 따르시라고 계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혹 즉시 진달하지 않더라도 역시 한두 달은 지나지 않았습니다. 상정(常情)으로 말하면 이처럼 지레 청하는 것이 부당할 듯하나 그 까닭을 깊이 따져보면 참으로 임금의 몸은 종사와 백성의 주인이어서 서민들이 일절(一節)을 굳게 지키는 것과는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 성명께서는 계운궁(啓運宮)께서 편찮으신 뒤부터 근심하고 애태우며 탕제를 받드느라 일찍이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는데, 끝내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셨으니, 성명께서 애상(哀傷)해 하고 쇠약해지신 지 이미 8∼9개월이나 되었습니다.
사람이 기운을 받는 데 있어 위경(胃經)이 주가 되기 때문에 평일에 채소를 먹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상례를 지키다 제도를 지나치면 반드시 이름하기 어려운 질병이 몸이 상한 나머지에 쌓여 일어나게 됩니다. 신들이 밤낮으로 민망하고 절박하여 걱정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지금은 졸곡(卒哭)이 이미 지나갔고 조사(詔使)가 도착하게 될텐데 접대 의식의 번거로움이 평일보다 배가 될 것이니 원기(元氣)를 보양하는 방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성명께서는 위로는 조종조에서 이미 행한 사례를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억조 신민의 정을 살피시어 빨리 고기 반찬을 드실 것을 승낙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참으로 쇠로한 사람이 병으로 지탱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면 아주 부끄러움이 없는 자일지라도 상중에 고기를 먹는 자가 없는데, 경들이 차마 이런 말을 내니 내가 매우 놀라 답할 바를 모르겠다. 경들은 예(禮) 아닌 말을 말아 내 마음을 편하게 하라."
하였다.

 

경상도 산음현(山陰縣)과 지례현(知禮縣) 등에 소나기가 크게 내리고 탄환만한 우박이 내려 양맥(兩麥)과 목화(木花)가 모조리 손상되었다고 감사가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초혼(初昏)에 기운과 같은 먹구름 한 가닥이 건방(乾方)에서부터 일어나 곧게 간방(艮方)을 가리켰는데 길이는 4∼5척이었다.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으로 들어갔다.

 

6월 3일 갑술

금부에 명하여 원옥(冤獄)을 심리하게 하였는데, 가뭄 때문이었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정경세(鄭經世)·최명길(崔鳴吉) 등이 아뢰기를,
"모 도독(毛都督)이 모함한 일은 그가 먼저 도리를 잃은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정성과 믿음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그의 주문(奏聞)이 고변(告變)과 다름이 없으나 이번에 도독에게 이자(移咨)하지 않고 곧바로 황제에게 주문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신들의 뜻은 상께서 졸곡을 지내신 후에 즉시 이자하여 곡진하게 말을 만들어 조목조목 질문하고, 부득이 중국 조정에 주문하여 변명한다는 뜻을 상세히 통유하면 그도 반드시 제 스스로 잘못을 알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도 덕천(德川)·맹산(孟山)·삼등(三登)·벽동(碧潼) 등 고을에 바람과 우박이 크게 일어 모래와 돌이 날렸는데, 우박은 달걀만하거나 사람 주먹만하여 새와 짐승이 다치거나 죽고, 화곡(禾穀)이 손상되었다.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6월 4일 을해

황해도 평산(平山) 땅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주먹만하고 작은 것은 밤톨만하여 화곡이 죄다 손상되었다. 감사 이필영(李必榮)이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6월 5일 병자

정원이 아뢰기를,
"상께서 조사를 접견할 때에 상하가 모두 흑색 옷을 입을 일로 이미 결정하였습니다. 다만 혹자는 ‘상께서 무양적색흑포(無揚赤色黑袍)를 입으시면 근시(近侍)·시위(侍衛) 및 어전에 출입하는 관원 역시 마땅히 무늬없는 흑포에 보자(보자(子)078)  를 떼어야 한다.’ 하는데 이 말도 근리한 듯 합니다만 보자는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또 중국 사람은 무늬없는 흑의로 소복(素服)을 삼으니, 중국 사신을 대접하는 데 있어 소복을 순전히 써서는 안 됩니다. 시위하는 장사(壯士)의 옷은 군복(軍服)에 관계되니 무늬가 있어도 무방합니다. 행주(行酒)하는 재신(宰臣) 및 사옹원 제조는 조사에게 술을 올려야 하므로 또한 보자를 역시 제거해선 안 되고, 오직 승지 및 사옹원 가제조로 과반(果盤)을 어전에 올리는 자만 보자를 제거하고 무늬있는 흑포를 입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의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예조도 그렇게 여겼다. 또 아뢰기를,
"어전에 꽃을 바치는 것을 전폐한다는 한 조목은 부당할 듯합니다. 내시(內侍)가 받아 가지고 나가서 상(牀) 위에 놓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호패청(號牌廳)이 추가로 기록하여 성책(成冊)한 것을 바쳤는데, 남정(男丁)의 총수는 1백 23만여 명으로 그 전에 기록한 1백 3만여 명까지 합계 2백 26만여 명이라 하였다.

 

미시(未時)·신시(申時)에 해에 교훈(交暈)이 있었는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고, 햇무리 아래에는 이(履)가 있었으며, 이 안은 적색이고 밖은 청색이었다.

 

6월 6일 정축

예조가 아뢰기를,
"전부터 경사(慶事)를 반포하는 중국 사신이 나오면 조서를 맞이한 후에 으레 진하(陳賀)·교서 반포·과거 실시 등이 있었으니, 대개 천하가 경사를 함께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상께서 바야흐로 상중에 계시어 축하를 받을 수는 없더라도 진하·교서 반포·정부의 상전(上箋) 등의 일은 그만둘 수 없을 듯싶습니다. 또 계미년의 예대로 별시(別試)를 베풀어 명년 봄에 선비를 뽑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원접사 김류(金瑬)가 치계하기를,
"이번 조사는 청렴 검소함이 근고에 드문 사람으로 양서(兩西) 지방의 인심이 모두 비석을 세워 그 맑은 덕을 기리고자 하고, 양도 감사의 뜻도 또한 백성의 뜻을 따라서 그들이 돌아가기 전에 비석을 세워 덕을 기리고자 하나 감히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니, 조정에서 상량하여 지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영접 도감이 아뢰기를,
"양사(兩使)가 청렴 검약하게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것은 실로 근년에 보지 못한 바여서 일로에서는 비석을 세워 덕을 기리고 경도(京都)에서는 기로(耆老)로 하여금 칭송하게 하는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좌의정 윤방은 ‘창시하는 일이어서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우나 중국의 습관은 또 이전 시대와 다르니, 서로 백성의 뜻을 따라 비석을 새워 후래의 본보기를 삼아도 크게 방해로울 것은 없을 듯하다.’ 하고, 우의정 신흠은 ‘본국에 온 조사 가운데 허각로(許閣老)079)  와 위 급사(魏給事)080)  는 청덕이 사람들의 심정에 흡족하였는데도 그때 비석을 세워 덕을 기렸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지금 비석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실로 근년에 환관 신분의 사신 수삼 명이 와 인심에 맞지 않은 일을 하였기 때문에 격식 밖의 청원이 있게 된 것이다. 상도(常道)를 말하면 전에 없던 규정을 창시하여 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과 옛날은 시의(時宜)가 다르니, 비석을 세워도 무방하나 조사가 돌아가기 전에는 타당하지 않다. 돌아간 후에 소원대로 세우기를 허락하여 후래의 부끄러움 없는 자가 보고 느낄 터전을 삼아야 한다. 부로(父老)가 헌축(獻軸)하는 일은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대신이 옳지 않다고 하니, 따랐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상소하여 물러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뜻을 잘 알았다. 전부터 내 뜻을 여러 번 유시하였는데, 경이 이렇게까지 고사하니, 내가 매우 우려하여 답할 바를 모르겠다. 내가 전후에 머물도록 권한 것은 내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로 국가를 위해서이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집안에 누워서 도(道)를 논해 여망에 부응하라."

 

6월 7일 무인

영접 도감이 아뢰기를,
"삼가 원접사의 장계를 보니, 조사(詔使)가, 태사(太史) 허국(許國)이 본국에 사신 왔을 때 압록강에서 멀지 않는 곳에 각금정(却金亭)·각금교(却金橋)가 있었다며 정자의 터를 알고자 하니 급히 상고해 달라고 하였다 합니다. ‘허 태사의 청풍(淸風) 고의(高義)는 중국에서 으뜸이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어찌 감히 은을 줄 마음을 내었겠는가. 반드시 증정했을 리가 없다.’는 말로써 회답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근래 금부의 좌아(坐衙)가 매우 뜸하다. 이러한 극심한 무더위에 옥수(獄囚)를 오래 적체시키는 것은 매우 그르다. 해당 당상은 태만하여 직무를 유기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 모두 추고하라."

 

6월 8일 기묘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조칙(詔勅)을 친히 맞는 습의(習儀)를 행하였다.

 

헌부와 간원이 합계(合啓)하기를,
"예로부터 천하와 국가를 소유한 자가 반드시 먼저 후계자를 세운 것은 근본을 굳히고 인망을 붙여서 확고 부동한 형세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자께서 책봉된 지 해가 지나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졌는데도 오랫동안 주청하는 일을 지체하여 아직껏 봉전(封典)이 내려지지 않아 인심이 울적하여 우러러 바라는 것이 더욱 간절합니다. 전하께서 백성들이 거듭 고달플 것을 염려하시어 후일을 기다리고자 하시나 종묘 사직을 위하는 계책이니 어찌 민폐 때문에 큰 일을 조금인들 늦추겠습니까. 지난날 유사의 소청은 실로 여러 사람의 동일한 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해조의 진계(陳啓)대로 속히 주청하여 신민의 바람을 위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백성이 있은 연후에 국가가 있으니, 백성이 흩어지면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주청이 중하지만 민력(民力) 역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대들은 물러가 생각해 보고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호조 판서 심열(沈悅)의 추고 공사(推考公事)를 가지고 판하(判下)하였다.
"대론(臺論)은 관계된 바가 작지 않은데, 지난번 간원이 자세히 살피지 않고 헛된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허물을 해관(該官)에게 돌리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으니, 일을 논하면서 사실과 어긋난 죄를 면하기 어렵다. 호조 당상과 낭청은 별로 잘못한 바가 없으니, 그대로 두라."

 

승지 심액(沈詻)과 이명한(李明漢)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대각(臺閣)의 신하를 중히 여기는 것은 그가 임금의 이목(耳目)이 되기 때문입니다. 풍문을 잘못 듣고 논의가 지나치더라도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하고 관대하게 대하여 말을 다하는 길을 열어야지 문득 엄준한 배척을 가해 그 기개를 꺾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날 간원의 계사는 그 뜻이 실로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지 어찌 딴 뜻이 있었겠습니까. 삼가 판하의 사지(辭旨)를 보니, 언관을 견책함이 매우 엄준하여 신들은 국체(國體)를 손상하고 성덕(聖德)에 누를 끼칠까 싶은데,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근밀(近密)에 있으므로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간원이 해조의 문적을 상고하지 않고 한바탕 낭설을 꾸며내어 원근의 사람으로 하여금 조정에 유감이 없지 않도록 했으니, 그 잘못이 크지 않은가. 이 한 계사로 인하여 근년에 백성을 위해 절약하고 감손한 뜻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 내가 매우 가슴 아프게 여긴다."
하였다.

 

6월 9일 경진

대사간 이민구(李敏求), 사간 이준(李埈), 헌납 김육(金堉), 정언 김지수(金地粹)·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해마다 조사가 오므로 규정 외로 징수하는 것이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나 유사된 사람은 경우에 따라 비용을 아끼어 일분의 은혜라도 베풀어야 합니다. 조사가 이미 지나간 후에 쓰고 남은 잡물을 하인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말이 지금까지 떠들썩하니, 반드시 근거없는 발설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설화지(雪花紙)나 오색지(五色紙) 등을 관원에게 삭하(朔下)한 일은 그때의 판서가 누구였는지 모르나 낭관은 모두 그대로 있으니 환하여 속일 수가 없습니다. 쓰고 남은 것을 거두어 보관할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금년 분정(分定)할 때에 과연 하나하나 조사하여 그 숫자를 제하고 외방에 분정했습니까? 신들의 계책은 처음에 백성들을 위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데서 나왔으나 일을 논하는 즈음에 자세히 살피지 못해 끝내 사실과 어긋하는 결과를 면치 못했고 지금 엄한 분부를 받드니, 더욱 용납될 바가 없습니다. 신들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등이 아뢰기를,
"전일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해 조사가 왔을 때 쓰고 남은 물건을 해조에서 숫자를 조사해 보관하여 후일을 기다리지 않고 일이 지난 후에 공용(公用)이라 칭탁하여 쓸데없는 데에 낭비하고는 금일에 이르러 다시 징수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는데, 그 주된 뜻은 백성을 돌보고 나라를 근심하여 전일을 징계하고 후일을 경계한 데 있었습니다. 말을 만들면서 잘못된 곳이 있기는 하나 해조가 써서는 안 될 곳에 쓴 것은 확실하여 의심이 없습니다. 대개 이목의 관원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니 요컨대 일을 논하는 체모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이 일찍이 이민구 등의 피혐을 처치할 즈음에 출사를 계청하였습니다. 지금 심열 추고 공사의 판하를 보니, 사지가 매우 엄하여 미안한 말씀이 많았습니다. 신들의 소견은 전후가 다름이 없는데 어찌 감히 스스로 옳게 여겨 다시 처치하겠습니까.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홍문관 교리 윤지(尹墀), 부교리 이경석(李景奭)·박황(朴潢), 부수찬 김남중(金南重) 등이 상차하기를,
"대간이 일을 논하는 것은 흔히 풍문을 듣고 하여 소리(小吏)가 장부를 들고 따지는 행위와는 같지 않습니다. 만약 만분 자세히 살핀다면 참으로 크게 좋겠지만, 가령 한두 가지 말 만드는 것이 혹 어긋난 점이 있더라도 어찌 이걸 가지고 문득 견책하여 그 기개를 꺾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번 간원의 계사는 말 만드는 사이에 착오된 것이 있긴 하지만 그 마음은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근심한 것인데 어찌 한 가지 일이 마땅하지 않다 하여 가벼이 언관을 체직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전일 출사를 청한 것은 애초에 그르지 않았고, 금일의 소견도 전일과 다름이 없으니, 더욱 피혐할 것이 없습니다. 대사간 등과 대사헌 등에게 아울러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민구 이하는 아울러 체차하라."
하였다.

 

6월 10일 신사

상이 하교하였다.
"예장 도감 제조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한성 판윤 구굉(具宏), 도청(都廳) 김시양(金時讓)·이여황(李如璜), 명정 서사(銘旌書寫) 좌참찬 김상용(金尙容), 지문 서사(誌文書寫) 병조 참판 조희일(趙希逸), 제주관(題主官) 오준(吳竣)은 각 1자급을 더하고, 제조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 전 제조 사직 정광적(鄭光績), 공조 판서 신경진(申景禛), 지문 제술관(誌文製述官) 이조 판서 김류(金瑬), 표석 서사관(表石書寫官)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에게는 각기 숙마(熟馬) 1필씩을 하사하고, 관상감 제조 우참찬 서성(徐渻), 배위 대장(陪衛大將) 형조 판서 이서(李曙), 제조 예조 참판 김경징(金慶徵), 장생전 제조 행 사직 오백령(吳百齡), 경기 감사 권반(權盼)에게는 각기 반숙마(半熟馬) 1필씩을 하사하고, 낭청 이하는 승서(陞敍)하거나 상사(賞賜)하라."

 

상이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가 지성으로 사대하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인데, 요사이의 참언(讒言)은 망극하여 두 마음을 가졌다는 소문이 뜻밖에 나와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해도 사실을 밝힐 길이 없었다. 대인께서 마침 우리 나라에 오시니, 이는 실로 신원할 기회여서 원통한 정상을 진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나라가 요동 백성이 굶주려 계속 양식을 대줄 길이 없어 여러 차례 주문하였는데, 병부(兵部)의 이자(移咨)를 받아보니, 우리 나라의 정성을 헤아리지 못한 말이 많아 지극히 송구하였다.’ 하는 이 몇 조항을 조사와의 문답(問答) 가운데 첨가해 넣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비변사가 아뢰기를,
"병부의 이자 가운데 있는 허다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변론하기는 어려우나 ‘해외의 정형(情形)이 조금 변하고, 속국이 두 마음을 가졌다.’는 등의 말은 오늘날 크게 의심을 사는 단서가 되고 있으니, 성려(聖慮)의 미친 바가 매우 윤당합니다. 하교에 의하여 첨가해 넣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알았다고 답하였다.

 

원접사 김류가 치계하기를,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허 태사(許太史)가 그대 나라의 사신으로 와 은관필(銀管筆)과 은병필銀柄筆) 두 개만 받았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관(管)과 병(柄)은 물속에 던져버리고 필모(筆毛)만을 가지고 갔었다고 내가 중국에 있을 때 들었는데, 어찌 원접사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고는 이어서 장예충(張禮忠)에게 말하기를 ‘이는 내가 선현(先賢)의 사적을 그대 나라에 선양하는 것일 뿐 아니라 관계된 바가 중대하기 때문에 사사로이 10냥쯤의 은자(銀子)를 내어 각금정(却金亭)을 중창하고자 하는 것인데, 답한 바가 이러하니 매우 괴이하다.’ 하면서 아주 불쾌한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영접 도감이 이를 인하여 또 청하기를,
"그 작은 정자를 각금정이라 가르쳐 주고, 인하여 중국 사신에게 기(記)를 청하는 것이 권의(權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대신이 불가하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국가에서 이목의 관원을 설치하고 언책(言責)의 직분을 맡긴 것은 위로 임금의 비리를 바로잡고 아래로 시정(時政)의 잘못을 규찰하려는 것입니다. 일을 논하는 즈음에 혹 말을 만든 것이 어긋난 곳이 있더라도 그 마음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위하는 데서 나온 것이면 임금은 너그러이 용납해 받아들여 말을 다하게 한 연후에야 언로가 넓어지고 곧은 기개가 펴져 백료가 두려워하고 모든 일이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간원의 여러 관원이 당초 논한 바는 실로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걱정한 데서 나온 것이지 결단코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해조에서 낭비하고 사사로이 썼다는 말이 사람들 입에 전파되어 분명히 숨기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도리어 해조에서 스스로 변명한 말을 믿고 언관을 견책하여 끝내 체직하고 말았으니, 이는 근래에 없는 거조입니다.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간원을 체차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간원이 일을 논하면서 사실에 어긋났으니, 체차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대들이 신구(伸救)하는 것은 불가할 듯하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6월 11일 임오

이식(李植)을 대사간으로, 윤지경(尹知敬)을 사간으로, 박황(朴潢)을 헌납으로, 김남중(金南重)·송시길(宋時吉)을 정언으로, 이준(李埈)을 세자 시강원 보덕으로, 김세렴(金世濂)을 홍문관 교리로, 민응회(閔應恢)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6월 12일 계미

원접사 김류가 치계하였다.
"조사가 벽제(碧蹄)에 도착하여 역관 등을 불러 말하기를 ‘국왕께서 이미 중복(重服)을 당했으니, 주객의 예법상 조문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대 나라의 의례 절목을 우리들이 알지 못한다. 응당 조문하지 않아야 하는데 조문하면 이는 우리들의 실례요, 응당 조문해야 하는데 받지 않으면 잘못이 그대 나라에 있다. 이런 뜻을 그대들은 원접사에게 말하여 회보(回報)하라.’ 하기에, 신이 역관으로 하여금 반복하여 신품(申稟)하게 하기를 ‘만약 조문하고자 하면 명일 조서를 반포한 후에 하겠는가, 어느날 하겠는가?’ 하였더니, 상사가 답하기를 ‘조서를 반포하는 날은 조문할 수 없고 후일 연례(宴禮)가 있다고 하는데 조문과 경사를 병행할 수가 없고, 이미 연회한 후에는 또 조문해서는 안 되니, 하지 않는 것이 옳다. 다만 내가 예를 다하고자 하는 뜻을 국왕께 전달하기만 하면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6월 13일 갑신

상이 모화관에 행행하여 조칙을 맞이하고 돌아와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의식대로 조칙을 받았다. 예를 마치고, 상이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를 입고 서문을 거쳐 전(殿)으로 올라가 조사에게 절하고 황상의 기거를 묻고 황자의 탄생을 하례하였다. 상이 이어 말하기를,
"불곡(不穀)이 바야흐로 상중에 있으나 오늘은 조서를 반포하는 큰 경사날이고 더군다나 대인의 명이 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온 천하가 경사가 함께 하는 것이니 소복(素服)으로 서로 만날 수 없고, 성천자(聖天子)의 제례(制禮) 역시 이러하기 때문에 감히 청한 것입니다. 명일 이후에는 스스로 소복으로 예를 행하여 한편으로는 황상에게 충성을 다하고 한편으로는 사친에게 효도를 다하시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말하기를,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니, 그지없이 황송하고 감격스럽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본국에서 예를 강정할 때에 흑포(黑袍)를 입고 조사를 접대하기로 했었는데, 조사가 홍제원(弘濟院)에 이르러 비로소 그것이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따르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예관과 대신이 모두 아뢰기를,
"그 말이 근거가 있으니, 따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이 행행하여 하마연(下馬宴)을 행하였다. 상이 절하기를 청하니, 조사가 허락하지 않아 서로 읍한 다음 자리에 앉아 의식대로 행주(行酒)하였다. 완배례(完盃禮)를 한 후에 좌의정 윤방(尹昉)으로 하여금 행주하게 하니, 조사가 사양하기를,
"예(禮)는 이미 이루어졌으니, 다시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행주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또 앉기를 청하였다. 상이 행주하여 연달아 3배(盃)를 건네고는 상이 묻기를,
"지난번 소문을 들으니, 노적(奴賊)이 반역하여 산해관(山海關)을 침범하였다가 크게 패배하여 달아났다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입니까? 우리 나라에서는 그 말을 듣고는 그지없이 기뻤습니다."
하니, 양사가 일제히 응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노적(奴賊)이 과연 영원(寧遠)에서 패배하여 죽은 군사가 수만여 명이고, 왕이라 칭하던 그의 손자(孫子)도 죽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매양 소문을 전해 듣고는 의심하였는데 지금 대인의 말을 들으니 너무 기뻐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고, 상이 또 말하기를,
"모든 연회에서 반드시 대선(大膳)을 올리고 종배례(終盃禮)를 행하는 것은 그 예를 완결짓기 위한 것이므로 감히 청합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단지 정(情)에 있을 뿐, 어찌 대선(大膳)이 필요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말하기를,
"대선은 올리지 말고 행배(行盃)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드디어 종배례를 행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완배(完盃)는 예를 완결짓는 것이나 감히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조사가 허락하여 드디어 의식대로 행하였다.

 

조서는 다음과 같다.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詔)한다. 짐이 생각건대 재왕(帝王)이 세상을 보존하고 집안을 잇는 도(道)는 자손의 보호에 있다. 오직 상서로움이 길게 발해야 자손의 복이 길이 창성한다. 종묘 사직에 신령이 있어 하늘이 훌륭히 강생시켰으니 우연이 아니다. 짐은 대운을 이어받고 큰 터전을 지키며 밤낮으로 전전긍긍하면서 생각하는 바는 선열을 앙양하며, 성헌을 준수하여 조정의 법식을 엄숙하게 하고, 악인을 미워하고 선인을 등용하기를 대도(大道)같이 받들어, 거의 치화(治化)를 유신(維新)하여 그 정통성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었다. 황천이 순수히 돕고 조상의 덕택이 후하여 금년 10월 1일에 세째 아들이 출생하여 예상이 들어맞고 온 세상에 빛을 발했다. 하늘에 계신 열성이 기뻐하심을 알겠고 만방 천하가 환호함이 마땅하다. 그대 해방(海邦)에 조(詔)하노니, 함께 경하하라. 천계(天啓) 5년 10월 25일."

 

칙서는 다음과 같다.
"황제는 조선 국왕 이(李) 휘(諱)에게 칙유(勅諭)하노라. 이번에 짐의 황자가 탄생하여 은혜를 우주 안에 베푸노라. 생각하건대 왕은 대대로 동방을 지키면서 직공을 정성스레 닦았으니, 마땅히 은사를 더해 충성에 답해야 하므로 특별히 한림원 편수 강왈광(姜曰廣)과 공과 급사중 왕몽윤(王夢尹)을 정사·부사에 충원하여 조유(詔諭)를 받들어 가게 하며 아울러 왕 및 비(妃)에게 채폐(綵幣)와 문금(文錦)을 내리노니, 이르거든 받아 짐이 우례(優禮)하는 뜻을 알라. 그러므로 유시하노라."

 

6월 14일 을유

대사(大赦)하고, 백관에게 가자하였다.

 

교서(敎書)는 다음과 같다.
"무지개가 상서를 알리어 한 원량(元良)의 탄생을 증명하였다. 책색 봉황이 수놓인 조서를 반포하니 만방(萬邦)과 경사를 함께 하므로 황홀한 심정이 깊어 정령하게 크게 고하노라. 예로부터 아름다운 상서는 하늘의 후계자를 내리는 것 만한 것이 없어, 화봉(華封) 사람이 요임금을 축수하여 수(壽)·부(富)·다남(多男)을 기원하였고, 주아(周雅)에서는 임금을 칭송하여 본손 지손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준철(濬哲)한 우리 황제께서는 이른바 중국의 성인으로 서민을 돌보시고 오복(五福)을 다 누리지 않아 상제를 감동시켜 백가지 상서가 내려 태자가 일찍 태어나서 기대에 부응하였다. 밝은 빛이 계속 비추어 만년에 이르기까지 왕 노릇할 것이니 온 천하가 함께 기뻐할 것이지 어찌 나만 홀로 기뻐하겠는가. 본년 6월 13일에 조칙 받기를 마치고 중외에 포고하여 너희 대중으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노라."

 

영접 도감이 아뢰기를,
"세자가 접견할 지 여부를 관반 대신(館伴大臣)에게 물어 아뢰라는 일을 전교하셨습니다. 중국 사신이 왕세자 뵙기를 오는 도중에서도 여러 번 말하였고, 오늘 대궐에 나아올 때에도 온 김에 왕세자와 서로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신이 역관으로 하여금 고하게 하기를 ‘국왕 앞에서 함께 만나면 자리가 불편하다. 노야께서 만약 뵙고자 하시면 세자가 마땅히 한가한 날에 와서 인사할 것이다.’ 했더니 중국 사신이 ‘내가 가서 뵙고자 하는 것이 예이나, 세자가 와서 인사하는 것도 예이다.’ 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세자가 와서 인사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뵙고자 하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며, 그가 먼저 와서 뵙고자 한다는 것은 형식적인 말입니다. 세자께서 만약 배첩(拜帖)을 보내 인사하기를 청하면 그는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가 조사를 접견할 때의 관복(冠服)을 대신에게 의논했더니, 좌의정 윤방(尹昉)과 우의정 신흠(申欽)은 아뢰기를 ‘해조의 의견이 남김없이 극진하고, 신들 역시 기억하건대 병오년 중국 사신이 왔을 때 해조에서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로 계청하였으나, 선왕께서 아직 책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마침내는 대신의 의논을 따라 해조의 계사대로 하였다. 만약 모자(帽子)를 착용한다면 아래로 신료들과 같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을 듯하다. 지금도 병오년의 예를 따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정유년의 예에 의하되 모자를 쓰고 서로 보는 것이 합당할 듯하니,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대로 시행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간원이 해조의 의논을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세자부(世子傅)가 시강원으로 하여금 아뢰게 하기를,
"세자가 아직 책명을 받지 못하였는데 익선관을 중국 사신이 보는 앞에서 쓰고 있는 것은 혹 미안하고, 흑각대(黑角帶)와 무문포(無紋袍)는 본래 품복(品服)이 아니니 지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면 비단 질(秩)이 낮은 궁관(宮官)과 혼동되어 구별이 없을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세자께서 상중에 계시다는 이유로 갑자기 입어선 안 되는 옷을 입고 왕인(王人)을 접대하는 것은 사체에 미안하고, 중국 사신도 반드시 그 예 아닌 것을 의아해 할 것입니다. 유문포(有紋袍) 및 오각대(烏角帶)를 착용하는 것이 참으로 합당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유문포를 착용한다면 서대(犀帶)를 써야 하니, 다시 의논하여 정해야 할 듯하다."
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신의 뜻도 상의 분부대로 서대를 착용하는 것이 윤당하다고 여깁니다. 다만 이미 서대를 착용한다면 보자(子)로써 의장(儀章)을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용보(龍)는 쓰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군(大君)이 착용하는 기린(麒麟)을 쓰는 것이 마땅한데, 기린을 준비하지 못했으면 1품이 쓰는 백택(白澤)·선학(仙鶴) 가운데서 구하는 대로 써야 한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백택 보자(白澤子)를 쓰는 것이 옳다."
하였다.

 

조사가 성균관에 가서 문묘(文廟)을 배알한 후 전(殿)에 올라가 두루 구경하고는 걸어서 명륜당(明倫堂)으로 갔다. 관반(館伴) 이정구(李廷龜), 원접사 김류(金瑬)가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각기 자리에 앉았다. 유생들이 뜰에 들어와 예를 행하니, 조사가 일어나 서서 공수(拱手)하고 읍하여 답례했다. 조사가 역관에게 일렀다.
"귀국의 문묘 제도는 중국의 제도와 한결같이 같고 많은 선비가 성황을 이루고 있으니, 예의의 풍모를 볼 수가 있다. 다만 우리 두 사람이 마땅히 뜰에 갈라서서 예를 행해야 하였는데 모두 동정(東庭)에다 배석(拜席)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중국과 다르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행행하여 익일연(翌日宴)을 행하였다. 상이 예단(禮單)을 받지 않은 일에 대해 사례하니, 조사가 답하기를,
"귀국에서 요동 백성에게 계속 양식을 대주느라 지쳐 있으니, 우리들이 절제하는 것은 대개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인하여 말하기를,
"지난번 병부의 자문을 보니 ‘속국이 두 마음을 지녔다.’라는 등의 말이 있어 우리 나라 군신이 밤낮으로 황공해서 매양 부모의 나라가 혹 우리 나라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가 염려했습니다. 이번에 대인께서 마침 누추한 나라에 오셔서 원통한 마음을 거의 해명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귀국을 돌보신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으셨고, 지금 우리 황상께서도 역시 귀국의 사대하는 정성을 알아서 조서를 반포하는 거조가 실로 내지와 같이 보아 경사를 함께 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어찌 두 마음을 품은 일이 있겠습니까. 문신이었으면 반드시 그렇지 않았을 것인데 그가 무신이었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이제 대인의 말을 듣고 보니, 우리 나라의 사정을 거의 변명할 가망이 있어 과인의 마음이 조금은 스스로 위안이 됩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조정에 돌아가면 마땅히 황상께 진달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이렇게까지 분부해 주시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하였다. 인하여 행주(行酒)하기를 청하여 드디어 첫 잔을 돌리고 완배례(完盃禮)를 행하였다. 상이 또 재신(宰臣)에게 명하여 행주하기를 청하였다.

 

6월 15일 병술

영접 도감이 아뢰기를,
"도성 안 부로들이 와서 말하기를 ‘조사의 맑은 덕은 근고에 없는 바여서 시정의 백성들이 모두 안주할 수 있었다. 유람할 때에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기를 청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도성 백성의 실정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 조사가 떠나는 날, 도성의 부로들이 사현(沙峴)에 나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사례해 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영접 도감이 아뢰기를,
"두 중국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가도(椵島)에 이르러 비로소 국왕의 사상(私喪)을 들었는데 처음 뜻은 제문을 지어 조제(吊祭)의 예를 행하고자 하였다. 이어 들으니 이미 장례를 지냈다고 하였다. 이미 경사를 반포하고 연회를 행하여 형세상 별도로 조례(吊禮)를 행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우리들이 국왕과 더불어 같은 황상의 신하로서 의리상 희비를 함께 해야 하는데 이번에 와서 치제하지 못하였고, 또 조문하지 못하여 마음이 매우 미안하다. 국왕에게 우리들의 마음을 알리고자 한다.’ 하고, 이어서 정사가 제문의 난초(亂草)를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만약 조제(吊祭)를 지내면 이걸 쓰려고 했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배첩(拜帖)을 보내 말을 만들어 답하기를 ‘이처럼 마음을 써주시니 대인의 후의가 지극히 감사하다. 우리 임금께서 들으시면 반드시 감격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조사에서 정문(呈文)하여 요동 백성을 산동(山東)으로 돌려보내 주객이 함께 고달픈 걱정을 면케해 주기를 청하고, 또 병부의 자문 가운데 윤의립(尹義立)이 내응한다고 한 말은 전연 사실이 아니며, 속국이 두 마음을 품고 정형(情形)이 조금 변하였다는 등의 말은 지극히 원통하다고 진변(陳辯)하니, 조사가 답하였다.
"천자께서는 만리 밖을 환히 보시어 속국의 사정을 통촉하지 않으심이 없으니, 반드시 근거없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인데, 현왕(賢王)의 어진 보필들은 어찌 수고로이 강변(强辯)하시오. 우리들이 조정에 돌아가면 마땅히 귀국의 충순(忠順)함을 아뢰고, 또 요동 백성들로 하여금 본업을 복구하게 하여 귀국을 해치지 않게 하겠오. 이런 뜻을 국왕에게 알리시오."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회례연(回禮宴)을 행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오늘 온 것은 회례(回禮)를 위해서이니, 먼저 절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당치 않습니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감히 먼저 절하기를 꼭 청합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당치 않습니다. 당치 않습니다. 대인께서 과인이 먼저 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읍하기를 청합니다."
하여, 드디어 서로 향하여 두 번 읍하였다. 조사가 말하기를,
"보낸 예단(禮單)이 보잘것없으나 미미한 정을 받아주십시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이미 영광되게 오셨는데 또 분에 넘치는 예물을 주시니, 감히 사양하지는 못하나 당치 않습니다. 황공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이처럼 사례하시니, 성의를 알 수 있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서로 향하여 두 번 읍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과인이 상을 당한 것을 염려하여 영광되이 조문하고자 하셨으니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이번에 또 지으신 제문을 보내주시어 이렇게까지 후대하시니 그지없이 감격스러워 재배하여 사례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이미 조문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절을 받겠습니까."
하자, 상이 말하기를,
"허락하지 않으시는데 강청하는 것은 도리어 미안할 듯하니, 읍례를 행하기를 청합니다."
하여, 드디어 서로 향하여 두 번 읍하고는 자리에 앉기를 청하였다. 조사가 말하기를,
"현왕께서 맏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상견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나이가 어려 예를 모르는 데다 또 황조의 책명을 받지 못하여 감히 대인을 알현하게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조사가 말하기를,
"현왕께서 가르치신 바인데 어찌 예를 모르겠습니까. 한번 상견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아직 황조에 주문하지 못하였고, 그도 나이 어려서 예절에 익숙하지 못하며 또 자리 차서가 편치 못하여 예모에 구애될까 싶어서 감히 뵙게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조서가 말하기를,
"명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지난번 요동 백성에 대한 한 가지 일을 황조에 주문하였는데 해부(該部)의 자문을 보니 조금 우리의 충심을 모르는 말이 있어 우리 나라에선 그지없이 황공하였습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아침에 백관들의 정문을 보고 이미 자세히 알았습니다. 요동 백성이 매우 많아서 바다섬으로 몰아넣고자 하나 역시 용이하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별도의 조치가 있을 것이니, 어찌 귀국에 해를 끼치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계속 양식을 대줄 길이 없으니, 그 형세가 반드시 주객이 다 고달픈 상황에 이를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부득이 황조에 상달한 것인데 병부의 이자(移咨)가 이러하니 우리 나라가 깊이 황공해 하던 중 마침 대인께서 황명을 받들고 멀리 오시어 거의 사정을 해명하게 되어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아침에 배신(陪臣)의 말을 들으니, 대인께서 간곡하게 교유(敎諭)하시어 조정에 돌아가 주문하겠다고까지 하셨으니, 대인의 후의는 입으로 사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병부의 일은 별도로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귀국이 힘이 부족하여 요동 백성에게 계속 양식을 대줄 계책이 없으니 이는 조정에서 염려하는 바인데 현왕의 충분(忠憤)을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병부는 요동 백성을 위한 것도 아니요, 귀국을 위하는 것도 아닙니다. 별도로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어전 통사 이경직(李景稷)이 아뢰기를,
"조사가 이른바 깊은 뜻이라는 것은 반드시 모장(毛將)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이렇게까지 후의를 보이시니, 그지없이 다행합니다. 우리 나라의 안타까운 청을 만약 부모의 나라에 우러러 호소하지 못한다면 어디에 고하겠습니까. 전일에 주문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왔으나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하여 하정(下情)을 해명하지 못한 듯합니다. 이제 대인께서 우리 나라의 사정을 통찰하였으니 만약 등대(登對)하시는 날 황상께 아뢰시면 우리 나라에서 열 번 주달하는 것이 대인의 한 마디 말만 못할 것으로 구구히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대인께서 우리 나라를 성심으로 대해 주시기 때문에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감히 이처럼 우러러 고합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우리가 조정에 있을 때 이미 요동 백성 일을 들었습니다. 천자께서는 밝고 거룩하시니, 우리가 조정에 돌아가면 마땅히 정부(政府)의 정문으로 황상께 진달할 것입니다. 현왕께서 분부하시지 않더라도 내가 목도한 바이니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말하기를,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하였다. 의식대로 행주(行酒)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모장에 대한 일을 말하지 않았는가? 어찌 그의 답한 바가 이러한가?"
하니, 이경직이 아뢰기를,
"모장(毛將)이 단기(單騎)로 강을 건너서 의로운 명성이 이르는 곳마다 분기하지 않는 이가 없어 노적(奴賊)이 감히 변방에 접근하지 못하여 우리 나라가 거기에 힘입어 무사합니다. 이는 추호도 모두 성천자의 덕택 아님이 없으므로 우리 나라 군신이 밤낮으로 감축하고 있습니다. 다만 물력이 다 떨어져서 일이 마음과 같지 못하여 이 때문에 황공합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묘당과 병부 그 누구인들 귀국에서 요동 백성에게 계속 양식을 대준 일을 모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경직에게 말하기를,
"모장에 대한 일을 말하지 않았는가? 어찌 그의 답한 바가 이러한가?"
하니, 이경직이 아뢰기를,
"모장에 대한 일을 자세히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단지 알았다고만 답하고, 오로지 요동 백성의 일만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완배례 뒤에 상이 승지를 시켜 조사 앞에 예단을 올리게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단자만 받아 후한 정을 받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억지로 청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정(情)과 예(禮)가 다 융숭하니, 감히 명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6월 16일 정해

조사가 제천정(濟川亭)에 나가 놀았다. 우의정 신흠(申欽), 관반 이정구(李廷龜), 원접사 김류 등이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기를 청하니, 양사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해가 이미 저물어가고, 정자가 빼어난 경치이긴 하지만 배에 올라 양화도(楊花渡)로 내려가 배를 타고 돌아가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매우 좋은 일이외다. 더군다나 제현(諸賢)의 좋은 모임에 함께 배를 타고 가면서 중류에서 정답게 이야기를 하면 되니, 여기에서 연회를 베풀 것은 없소이다."
하고는 즉시, 배에 올라 모두 편복으로 자리에 앉게 하였다. 또 행주(行酒)를 청하니, 양사가 말하기를,
"오늘은 바로 좋은 모임이고 이미 관대를 벗었으니, 술잔을 돌리며 이야기를 나눌 것이지 하필 예수(禮數)로 사람을 피곤하게 하겠소이까."
하여, 드디어 자리 위에서 행주하여 5∼6순배가 돌았다. 두 사신이 노를 빨리 저으라고 재촉하여 양화도로 내려가게 하였다. 관반과 여러 사람이 상의하기를,
"이제 이미 해가 졌는데, 만약 잠두령(蠶頭嶺)으로 내려가면 거의 4경(更)에 이르러 형세상 반드시 낭패할 것이다."
하고는, 역관으로 하여금 고하게 하기를,
"잠두령은 본디 경치가 좋은 곳이어서 전부터 조사들이 놀지 않음이 없었으나 하루에 다 가서 본 때는 드물었습니다. 대인의 행차가 바쁘시고 또 왕래하는 폐단을 생각하시어 오늘 가서 보고자 하시지만 마침 해가 저물어 갔다 돌아오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오늘은 중류에서 흔들거리며 달빛을 타고 돌아갔다고 모름지기 다른 날 가서 유람하소서."
하니, 양사가 말하기를,
"행차가 바빠 다른 날 가기는 어려울 듯하외다."
하였다. 술을 8∼9순배 돌리고는 파하여 돌아왔다.

 

비변사가 비밀히 아뢰기를,
"중국에 주문하는 일을 숨겨서는 안 되니, 마땅히 접반사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뜻으로 말하는 사이에 조용히 묻게 하기를 ‘무무대(武撫臺)가 있을 때 노야(老爺)께서 이게(移揭)한 적이 있는가?’라고 하여 그의 답을 보고, 또 말하기를 ‘근일 경사(京師)의 소식을 어렴풋이 들으니 노야께서 무원(撫院)에 이게하여 본국을 비방하였는데, 두 마음을 지녔다는 등의 말까지 있다. 또 윤의립(尹義立)이 한윤(韓潤)과 서로 결탁하여 본국을 모반하고 경사에 가는 사신으로 차출되어 내응하기로 약속하였으니 엄히 사찰하기를 바란다고 하여 무무대가 이로써 제본(題本)하여 병부가 복제(覆題)해 성지(聖旨)를 받드니 본국으로 하여금 그 허실을 조사하게 하였다고 하므로 국왕께서 대단히 경악하며 모함한 사람이 노야의 막하에 있는가 염려하여 이자(移咨)해 신변(申辨)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미 노야께서 깊이 허물을 꾸짖은 뒤이기 때문에 마음이 매우 부끄러워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또 생각건대 이 일은 소인의 말로 인하여 우연히 이 지경에 이른 것에 불과하니, 노야께서 반드시 이미 허심탄회해져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니 본국은 단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여 더욱 우리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하여 참소하는 말이 저절로 행해지지 못하게 할 뿐으로서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 황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복주(覆奏)하는 일이 있어야 할 듯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도독(都督)이 만약 그 자세한 것을 물으면 ‘몸이 먼 곳에 있어 조정의 일을 자세히 들을 수가 없고, 듣는 바가 이뿐이다.’라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역관들을 십분 경계시켜 감히 함부로 말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이런 뜻을 비밀히 하유하고 병부의 자본(咨本) 1건을 등사하여 반신(伴臣)에게 보내 알고서 선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6월 17일 무자

상이 남별궁에 행행하여 회례연(回禮宴)을 행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영광스럽게 와림하신 지 오래지 않아 갑자기 돌아가실 뜻을 보이시니 온 나라의 신민이 서운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제 조금 더 머물겠다는 명을 받았으니 이는 다행이지만 오래 머물러 동방 사람의 바람을 위로해 주시길 다시 바랍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사신의 직무는 조서를 반포하는 것에 불과하고, 더군다나 돌아가는 길에 모영(毛營)의 병마를 반드시 점검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조금인들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병마를 점검하는 것이 급하다 하더라도 돌아갈 때 며칠이면 처리할 일에 불과하니 우리에게서 하루 이틀 더 묵으신다 해서 못 미칠 걱정이 뭐 있겠습니까. 전부터 조사가 오면 반드시 몇 순(旬) 동안 머문 것은 동방 사람의 바람을 위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인께서는 돌아갈 기일을 조금 늦추어 이 소원에 부응해 주십시오."
하고, 누누이 머물기를 청해 마지않으니, 조사가 비로소 말하기를,
"우리들도 역시 전의 규례를 들었는데 사신으로 온 사람이 일찍이 5∼6일 동안 체류한 적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후의에 감격하여 억지로 며칠 머물렀으니 또한 이미 족하였습니다. 현왕께서 또 머물기를 청하시는 것이 이처럼 지극하시니 의를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패문(牌文)을 돌이켜 날짜를 조금 물렸으면 합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단히 기쁘고 다행스럽습니다."
하고는 이어서 의식대로 행주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돈아(豚兒)가 예절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 책명(冊命)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대인을 뵙도록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대인의 명을 어기기가 어려워 와서 알현하게 하고자 하니, 대인께서 불러다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어진 부왕이 위에 계시어 가정의 교훈이 반드시 엄할 것인데 예절에 대해 어찌 모를까 걱정하겠습니까. 상견하기를 원합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당치 않습니다."
하였다.

 

왕세자가 모자(帽子)·유문 흑포(有紋黑袍)·오서대(烏犀帶) 차림으로 남별궁으로 가 중국 사신과 만났다. 중국 사신이 묻기를,
"계단 위에서 맞이하는가, 계단 아래서 맞이하는가?"
하니, 빈객 오윤겸(吳允謙)·정경세(鄭經世)가 강관(講官)과 상의하고 역관을 시켜 대답하게 하기를,
"이 예는 노야께서 헤아려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니, 중국 사신이 말하기를,
"이미 국왕을 문밖에서 맞았으니, 왕의 맏아들은 계단 아래에서 맞아야 한다."
하였다. 왕세자가 문밖에 이르니, 중국 사신은 계단 위에 서서 왕세자에게 정문(正門)으로 들어오기를 청하였다. 왕세자가 답하기를,
"부왕께서 출입하신 곳이어서 소자가 감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는 세 번 사양한 연후에 서협문(西夾門)을 거쳐 들어갔다. 중국 사신이 중계(中階)에 내려와 맞으면서 왕세자에게 함께 정로(正路)에 서서 읍하기를 청하니, 왕세자는 부왕께서 거치신 곳이라고 두 번 사양한 연후에 답하기를,
"대인께서 명이 계시니, 어찌 감히 고사하겠습니까."
하고는 드디어 함께 정로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읍하였다. 인례(引禮)에 중국 사신을 인도하여 계단 위로 올라가 서로 읍양(揖讓)하고 정청(正廳)에 이르렀다. 왕세자가 돈수 재배례(頓首再拜禮)를 청하며 양사 앞으로 나아가 각기 재배례를 청하고 황상의 안부를 묻고 또 황자의 탄생을 경하한 다음 자리에 나아간 후 위로하였다. 조사가 답하기를,
"위문을 받으니 감사합니다. 황자의 탄생을 천하가 함께 경하할 뿐만 아니라, 금일 청광(淸光)을 바라보니 동국에도 경사가 있습니다."
하고는 양사가 돌아보며 기뻐하였다. 왕세자가 답하기를,
"과분하게 칭찬하시니, 대단히 감사하며 부끄럽기도 합니다."
하였다. 조사가 묻기를,
"왕장자(王長子)께서는 강학(講學)하십니까?"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지금 《대학(大學)》을 읽고 있습니다."
하고, 왕세자가 사례하고 나오면서 재배례를 청하니, 조사가 사양하기를,
"이미 배례를 행하였으니, 어찌 두 번이나 하겠습니까."
하였다. 세 번 청하여 허락하지 않은 연후에 읍례 행하기를 청하고 중계(中階)에 이르러 계단에서 내려오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조사가 계단에서 내려가 읍하여 보냈다.

 

평안 감사 윤현(尹暄)이 치계하였다.
"창성 부사(昌城府使) 김시약(金時若)의 치보에 ‘서고신(徐孤臣)의 화패(火牌) 및 마문(馬文)에 이르기를 「노추(奴酋)가 먼저 강동(江東)을 침범한 후에 광녕(廣寧)을 침략하려 하여 유병(遊兵)이 이미 고산(孤山)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인하여 원병을 요청한다.」라고 하였으므로 원자(元咨) 1각(角)을 전서(傳書)하여 올려보낸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 말과 같다면 이처럼 경내의 둔병(屯兵)이 굶주리는 날을 당하여 반드시 양식을 요구하는 일이 있을 것이어서 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6월 18일 기축

상이 여러 차례 중신(重臣)을 보내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조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우의정 신흠을 보내 머물기를 청하자, 게첩(揭帖)을 보내 왔다.
"우리들은 재능이 박하여 사신 구실을 제대로 못하였는데 노 전하(老殿下)께서 예의(禮儀)로 대접해 주고 존문(存問)하여 찾아주시니, 높고 깊은 명덕(明德)은 악산(岳山)·한수(漢水)로도 비유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앞서 명을 받들고 온 자는 대례(大禮)를 이루면 바로 왕사(王事)를 마친 것인데 우리들은 다시 병마를 점검하라는 성지를 받들어 황명을 몸에 지니고 있으니 서둘러서 처리하는 것이 신하의 의리입니다.
지난번 경조(慶詔)를 한번 선포하고 즉시 복명하고자 하였으나 삼가 노 전하를 뵈니, 현풍(玄風)이 덕음(德音)에 나타나고 간정(懇情)이 독의(篤義)에서 발하여 마치 사람이 봄볕에 앉아서 순주(醇酒)을 마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말을 못하고 주저하며 고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뒤 분의(分義)를 헤아려 보니 만에 하나 지연시키기가 어려웠으나 분부하신 대로 오히려 기일을 고쳤습니다. 이 역시 우리들의 엄숙히 따르는 고심을 밝히기에 족합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손님이 하루에 하루를 묵고, 손님이 이틀에 이틀을 묵는다.’라고 하였는데 우리들이 와 묵는 것이 이미 이틀은 지났습니다. 또 옛날 사람이 노상에서 잠시 만난 교제로도 천추의 사귐을 맺는다고 하였으니, 정신이 서로 통하는 데 있어 어찌 시간의 길고 짧음으로 정의 후박을 삼겠습니까.
지금 요동 백성이 귀국에 기생하여 기식이 엄엄하게 죽어가고 있으니, 마치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져 우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구해달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데, 바야흐로 우물 위에 있는 자가 조용히 느린 걸음으로 간다면 오히려 어진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일곱 개의 불사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일찍 복명하여야 성명께서 반드시 속히 처분을 내리실 것이니 구제될 자가 혹 한 생명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노 전하께서 진심으로 간청하는 정은 돌사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감동할 것인데, 두세 번이나 계속 분부하시는데 어찌 어리석은 고집을 이토록 부리겠습니까.
노 전하께서는 아량을 보이시어 저희 뜻을 조금 살피시어 우리들로 하여금 수레를 돌려 빨리 출발하게 하여 위로는 성명께 죄를 짓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죄를 짓지 않게 하면 옥성(玉成)한 대덕(大德)이 오히려 평소의 후의와 함께 가슴에 새겨질 것입니다. 구구한 저희 정성을 말로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감히 편지를 보내 밝게 비추어 보시기를 빕니다. 이만 줄입니다."

 

상이 우의정 신흠을 보내 중국 사신의 관사에 가서 회첩(回帖)을 바치고 더 머물기를 다시 청하였다. 회첩은 다음과 같다.
"두 분 대인께서는 한원(翰苑)과 과대(科臺)로 향안(香案)을 가까이 모시어 천자의 밝은 명을 받들어 천하의 큰 경사를 반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외지고 누추한 나라에 광림하셨는데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 같은 의표와 옥처럼 깨끗하고 난초 향기같은 기풍은 사람의 마음을 배부르게 하고 정신을 취하게 합니다.
불곡(不穀)은 죄많은 인생으로 상중에 있어 제대로 받들어 대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이에 대인께서 너그러이 용납하여 후하게 대해 주시니, 불곡은 두터운 성의에 감격하고 덕스런 기품에 경복하여 사모하고 공경하는 정성이 실로 가슴 속에서 우러나옵니다. 단지 예연(禮筵)에 격식이 있고 역관(譯官)이 유창하지 못해 구구히 경도하는 마음을 그 한둘도 전달하지 못할까 걱정했습니다. 떠나는 수레를 잡아 묶는 소원을 펴지 못해 갑자기 돌아가시겠다는 명이 계시니, 이는 불곡의 성의가 천박해 광도(曠度) 아래에 믿음을 사지 못한 것으로 처음에는 송구스럽고 마침내는 부끄러워 비단 불곡만 부끄럽고 슬플 뿐만 아니라 대소 신료도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 없어 모두 길을 막고 수레를 붙잡아 잠시 만류시키고자 합니다.
예로부터 황화(皇華)081)  가 이곳에 와서 일찍이 열흘을 채우지 않고 갑자기 돌아간 이가 없었으니, 허 태사(許太史)·위 급사중(魏給事中)처럼 법도를 엄히 지킨 분들도 오히려 우리 나라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손님으로 머무시는 것을 승낙하였는데, 더군다나 두 대인께서는 이미 노상에서 잠시 만난 교제로도 천추의 사귐을 맺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는 불곡이 다시 듣기 어려운 말씀이고, 저희 나라에 일찍이 없던 성대한 만남입니다. 시간의 길고 짧음으로 정의 후박을 삼지 않는다고 하지만 한번 모시면 문득 한번의 영광됨을 깨달았는데, 하루 아침에 표표하게 수레를 돌리시어 천지가 현격히 막히면 두 대인의 맑고 우아한 풍도는 단지 꿈에서나 어렴풋이 떠오를 것이니, 불곡이 어떻게 마음을 가누겠습니까.
돌아가시는 길에 군사를 점검하고 요동 백성의 굶주림을 걱정하시니, 두 대인의 황명 수행에 겨를이 없는 지극한 뜻을 더욱 보겠습니다. 다만 조금 더 이곳에 머물더라도 사실 복명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니, 거듭 연회에 모시면 더욱 우리 나라에 영광이 되겠습니다. 감히 다시 번거롭혀 조금 더 머물겠다는 분부를 받고자 바랍니다. 발돋움하고 목을 빼어 기다려 마지 않습니다. 살피기 바랍니다."

 

상이 숭정전에 나아가 청연(請宴)을 행하였다. 상이 먼저 절하기를 청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온 것은 작별하기 위해서이니, 먼저 절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더 머물 것을 청하고자 하는데 어찌 작별하십니까. 대인께서 광림하셨으니 절하여 사례하고자 합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천하의 후의는 이미 회첩에 나타나 있으니, 사은의 절을 올리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광림하셨으니, 사은의 절을 올리고자 합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우리가 작별하기 위해 왔으니, 먼저 절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감히 억지로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읍하기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하고는 드디어 서로 읍하고 앉았다. 조사가 말하기를,
"어제 현왕의 맏아들을 보았는데 금옥(金玉)같은 상(相)이니, 실로 동국 신민의 복이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하례드립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과분하게 칭찬하시니, 실로 부끄럽습니다."
하고 상이 또 말하기를,
"오늘은 청연(請宴)하는 날인데 대인께서 작별하신다고 하시니, 한편으로는 서운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조사가 말하기를,
"오늘 두 가지 연회를 겸하여 행해도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단지 하루 더 머무는 것만 허락하시니, 이 어찌 우리 나라가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전부터 황명을 받고 온 대인이 이처럼 갑자기 돌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과인이 성의가 박하여 만류시키지 못하였으니 스스로 돌이켜보아 부끄러워 뭐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산천에 또 구경할 만한 곳이 있으니 조금만 더 머물러 동방 사람의 바람을 위로하소서."
하자, 조사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미 실정을 알았습니다. 전날 사신으로 온 이들을 단지 조서를 반포하는 한 가지 일 뿐이었기 때문에 왕래하는 기간이 1년이나 되었으나, 지금은 병마를 점검하라는 명이 있어 일정이 매우 빡빡하므로 감히 지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이 어찌 차마 현왕과 곧장 작별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관사가 협소하며 누추하고 대접이 시원치 않아 더 머물기를 청하는 것이 미안한 줄은 잘 아나, 지성으로 바라는 바라 존엄한 면전에서도 피치 못하는 바입니다. 대인께서는 하루 이틀 더 유숙하는 것을 허락하시어 동방 사람의 바람을 위로하십시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이렇게까지 간절히 머물기를 청하시니 하루를 물려 21일에 출발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하루 머무는 것 역시 매우 빠르지만 머물지 않는 것 보다는 낫습니다. 하루만이라도 거절하시는 것보다는 좋으니, 지극히 감격하여 사례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처음에는 18일에 출발하고자 하였는데, 이처럼 지체하는 것은 모두 전하의 후의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더 머물기를 원하는 하찮은 정성을 굽어 살피시니 대단히 영광입니다. 사은의 절을 올리고자 합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당치 않습니다."
하여 드디어 서로 읍하였다. 상이 첫째 잔을 돌리고 완배례(完盃禮)를 행하였고, 재신(宰臣)이 모두 의식대로 행주하였다.

 

세자가 중국 사신을 접견할 때에 배종한 관원으로 보덕(輔德)에게는 표피(豹皮) 1영(領)을, 필선(弼善) 이하에게는 각기 녹피(鹿皮) 1영을 하사하였다.

 

권확(權鑊)을 장령으로, 김육(金堉)을 지평으로, 엄성(嚴惺)을 부교리로, 홍명구(洪命耉)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6월 19일 경인

조사가 잠두(蠶頭)로 나가 놀 때 도승지 이홍주(李弘胄)가 어첩(御帖) 및 예단(禮單)을 바치자 답하기를,
"매양 근시를 보내 문안하니, 후의에 감사합니다."
하였다. 인하여 다주례(茶酒禮)를 행하여 한 잔 든 후에 배에 올라 중류로 가 좌상에서 행주(行酒)하게 하여 10여 순배에 이르렀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유봉(仙遊峯)에 이르러 해가 이미 황혼이 되어 촛불을 밝히고 배를 돌렸는데, 아주 흡족하게 즐기었다. 파할 무렵에 여러 사람을 앞에 늘어서도록 하여 한꺼번에 행주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러분께서 현왕의 성의을 받들어 여러 차례 조용한 기회를 만들어 주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현왕은 밝고 거룩하시니, 여러분은 잘 섬기십시오. 상봉한 지 오래지 않아 헤어질 날이 이미 박두하니, 슬픈 마음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재삼 정녕하게 말하면서 아주 친근한 뜻을 보였다.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6월 20일 신묘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행행하여 상마연(上馬宴)을 행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의 맑은 덕은 백세토록 잊기가 어렵습니다. 떠나는 수레 바퀴를 묶어둘 순 없으나 이곳에 끼치신 은덕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신민이 그 불후의 사실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찌 기록할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이 과분한 분부를 받자오니 한편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감사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들도 역시 전하의 성대한 덕을 돌아가 황조(皇朝)에 아뢰어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알지 못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당치 않습니다."
하였다. 종연 배례(終宴盃禮)를 모두 전의 의식대로 하였다.

 

6월 21일 임진

상이 모화관에 행행하여 전연(餞宴)을 행하였다. 중국 사신이 상과 이야기를 나누는 즈음에 상당히 애모하는 기색이 있었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우리 나라를 염려하시어 의서(醫書)까지 선사하시니 동방 백성이 이로부터 거의 횡사하는 걱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감격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전하께서 백성을 돌보는 정성이 지극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백성을 치료하는 방서(方書)를 올린 것인데 뭐 사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모 도독(毛都督)이 대인께서 이곳에 계실 때 올라와 면대해 의논하고자 하여 패문(牌文)까지 냈는데, 이제 사신의 수레가 갑자기 출발하게 되어 그가 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그가 오는 것이 무슨 일 때문입니까? 설령 온다고 하더라도 역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대개 모문룡(毛文龍)이 패문을 내어 군사를 이끌고 상경하겠다고 한 것은 본국을 공갈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상이 이 말을 살짝 언급하여 중국 사신이 알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상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도독에게 정성을 다해 대접하지만 수만 명의 군량을 계속 댈 길이 없어 힘이 마음을 따르지 못해 이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올 때에 모수(毛帥)를 보았는데 그의 말이 귀국에서 군량을 대어주는 것에 감사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뒤 글을 받았는데 하나는 봉전(封典)에 대한 일을 진달한 것이요, 하나는 군량 조달을 청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군량 조달은 조서를 반포하는 사신이 알 바가 아니라고 여겨 그렇게 답하였습니다. 설령 그가 올라오더라도 역시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말하기를,
"두 대인께서 우리 나라의 사정을 환히 아시어 친절하게 분부해 주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였다. 상이 술을 권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감히 마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자리가 비밀스럽지 못하여 말 나누기가 불편하니, 종배(終盃)를 기다려 조용히 서로 이야기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양사의 기색이 도독의 일을 비밀히 말하려다가 도로 중지하고 말았다. 상이 의식대로 행주(行酒)하였다. 조사가 말하기를,
"차마 현왕과 곧장 작별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한 번 만나면 한 번 헤어짐이 있는 법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들이 조정에 돌아가면 전하를 꿈속에서나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감격스럽고 송구합니다. 불볕 더위가 두렵고 바닷길이 험하니, 두 대인께서는 여정을 잘 마치시어 멀리 있는 사람의 소망에 부응하소서."
하였다. 조사가 절하여 하직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고사하였으나 우겨서 드디어 서로 두 번 절하였다. 상이 계단을 내려가 전송하였다.

 

도성 백성들이 길을 막고 조사의 맑은 덕을 칭송하였는데, 그 숫자가 거의 1만 5천∼1만 6천 명에 이르렀다. 부로(父老) 50여 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근고 이래 일찍이 이런 행차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노야의 은덕을 감사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양사가 다 가마에서 내려 손을 들어 감사하다 하고 한참 후에야 떠났다.

 

백관이 조사에게 정문(呈文)하기를,
"우리들이 일찍이 본국의 위태하고 절박한 사정을 가지고 피눈물을 뿌리며 호소하여 존엄(尊嚴)께 누를 끼쳤으니, 참람하고 망령된 죄를 도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두 대인께서 마음을 비워 채납하시어 돌아가 주달하겠다고 승낙하시니, 온 나라의 신민이 마음에 고마움을 새긴 것을 어찌 다 형언하겠습니까. 다만 본국에 또 지극히 원통한 일이 있는데 만약 우리 두 대인께 고하지 않으면 천하에 스스로 밝힐 수 없어 여러번 번거롭히는 혐의를 피할 겨를이 없습니다.
본월 20일, 모영(毛營)의 접반 배신(接伴陪臣) 정두원(鄭斗源)의 문보(文報)를 보니, 중국 조정에 한 가지 뜬 비방이 있는데, 그 말은 ‘봉전(封典)을 받기 전에 본국에서 은냥 40만을 독부(督府)에게 뇌물로 주어 봉전을 청하도록 요구하였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공가(公家)의 문자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만약 성하게 전파된 것이 아니면 어떤 연유로 바다 건너 만리 밖에까지 흘러왔겠습니까. 바로 독부가 말한 바이며, 본국 배신(陪臣)이 보고한 바이니, 참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라 핑계하여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본국에서 전왕을 폐위하고 신왕을 옹립한 일은 명분이 바르고 조리가 정연하여 온 나라가 이구 동성입니다. 독부가 우리 경내에 와 있으니, 한 집안 일로 여겨 눈과 귀로 보고 들은 일을 사실에 의거해 주문할 뿐이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이 비호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의 말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과연 이 말과 같다면 이는 본국의 일이 천리(天理)에 어긋난 일이며, 독부의 청원이 천조를 기망한 것이며, 성천자께서 책봉한 은전도 광명 정대하고 하늘에 순종하고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어서 천하 후세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는 비단 본국의 억울함일 뿐이 아니고 실로 독부의 억울함이요, 비단 독부의 억울함일 뿐이 아니고, 실로 성조(聖朝)의 깊은 수치입니다. 더군다나 본국에는 평소 은화(銀貨) 40만이 없었으니, 온 나라의 고혈을 다 짜더라도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이치는 매우 분명하여 변명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두 대인의 밝은 식견으로 사신으로 오셨으니, 본국의 모든 사정을 어느 것인들 환히 알지 못하겠습니까. 바라건대 두 대인께서는 조정에 돌아가신 후 쾌히 해명해 주시어 공론(公論)이 더욱 밝아지고 유언(流言)이 행해지지 못하게 해 주소서. 이는 실로 두 대인께서 시종 은혜를 끼치시는 것입니다. 심정이 답답하고 말이 막혀 이만 말을 마칩니다."
하였는데, 양사가 백관의 정문을 보고는 말하기를,
"이 일은 자꾸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국왕의 봉전(封典)은 구경(九卿) 육과(六科)가 회의하여 준허(准許)한 것이지 제독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40만의 은자에 대한 설은 조정에 있을 때 그런 말을 듣지 못하였고 지금 비로소 들었습니다.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모문룡이 한편으로는 봉전을 이룬 것을 자기의 공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은을 뇌물줬다는 설을 지어내었다. 그의 음모와 야릇한 계책이 헤아리기가 어렵고, 스스로 뜬 소문을 만들어 우리 나라를 고달프게 하였다. 이 때문에 이 정문이 있게 된 것이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6월 22일 계사

헌부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서리(胥吏)의 폐단이 오래되었습니다. 낭료가 자구 바뀌어 관원은 객이 되고 아전이 주인이 되어 오로지 문서를 잡고 속이고 가리어 협잡을 부립니다. 중국의 법대로 관원을 모두 구임(久任)시키고 서리는 각사에 윤차(輪差)하되 그 가운데서 호조와 병조는 신중히 가려 구임시켜 효과를 보도록 하소서."
하니, 이조에 내렸다. 이조가 아뢰기를,
"이는 바로 오늘날의 고질적 폐단입니다. 헌부의 계사는 시폐를 구제하는 절실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각사의 관원으로 본사의 사례를 잘 아는 자가 매우 드물어서 만약 일을 아는 해당 서리를 갑자기 옮겨 차임하면 관원과 하리가 모두 일이 생소하여 직무가 엉망이 될 걱정이 반드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구임하는 법을 시행하여 본말을 익히 알도록 한 연후에 하리를 윤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3일 갑오

정경세(鄭經世)를 대사헌으로, 이경여(李敬輿)를 집의로, 강석기(姜碩期)를 사간으로, 강대진(姜大進)을 장령으로, 이경의(李景義)를 지평으로, 윤지(尹墀)를 헌납으로, 이경(李坰)·최혜길(崔惠吉)을 정언으로, 김지수(金地粹)를 문학으로, 개성 경력(開城經歷) 조정호(趙廷虎)를 특명하여 홍문관 교리로 삼았다. 조정호는 집에서 효우(孝友)하고 청렴 결백하게 자신을 지켰는데 송도(松都)를 다스리자 정치적 명성이 높았다.

 

6월 24일 을미

상이 하교하였다.
"모장(毛將)이 군량이 떨어지면 문득 노여움을 보이며 변방의 양식을 억지로 빼앗으니, 이런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된다. 재신(宰臣) 가운데서 한 사람을 골라 차임하여 문안사(問安使)라 일컬어 모영(毛營)에 보내 따를 수 없다는 뜻을 분명하게 말해야 옳다. 또 원접사 김류(金瑬)가 지난번 도독을 만나던 날에 잘 주선하지 못하고 경솔히 1만 석의 양곡을 허락하여 오늘날의 곤욕을 초래했으니, 대단히 그르다."

 

함경도 함흥(咸興)·홍원(洪原)·북청(北靑)·정평(定平)·덕원(德源)·문천(文川) 등의 고을에 황충(蝗蟲)이 크게 번져서 각종 곡식이 모두 피해를 입어 전야가 다 붉게 변하였고, 단천(端川)·명천(明川)·길주(吉州) 등지는 피해가 더욱 참혹하였다. 감사 남이공(南以恭)이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6월 25일 병신

의금부가 아뢰기를,
"조경운(趙景雲)이 상을 향해 한 부도(不道)한 말은 참으로 흉악하고 참혹하여 글로 기록할 수 없습니다. 조경운을 가형(加刑)하여 끝까지 국문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완악한 백성이 범하는 바가 중한 줄 모르고 한갓 귀양가는 것이 괴로운 줄만 알아 그런 고약한 말을 한 것이다. 이는 실로 무지하여 함부로 한 짓이지 어찌 위를 원망하는 데 뜻이 있었겠는가. 인명은 지극히 중하니, 그냥두는 것이 어떨지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금부가 회계하기를,
"조경운의 죄는 참으로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가 없는데, 성은이 하늘같이 덮어주어, ‘무지하여 함부로 한 짓이다.’라고까지 전교하시니, 모든 숨쉬는 무리로서 누군들 어질고 큰 은덕에 감읍하지 않겠습니까. 성상의 분부대로 불문에 부치고 배소(配所)로 보내는 것이 윤당합니다."
하니, 상이 그 의논을 재가하였다. 처음에 포수(砲手) 조경운이 호패(號牌)를 차지 않은 이유로 먼 변방에의 유배에 처해졌다. 떠날 임박에 부도한 말을 많이 하여 삼성 국문(三省鞫問)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런 하교가 있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평안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였다.
"정주(定州)의 수영패(隨營牌) 김진(金進)이 도망해 와 말하기를, ‘김경서(金景瑞)의 부하로 오랑캐에게 투항한 지 8년 만에 지금 비로소 도망하여 왔다.’ 하고, 또 그곳 사정을 말하기를, ‘부원수 김경서는 병사한 지 이미 3년이 되었고,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은 아직 머리를 깎지 않았기 때문에 달녀(㺚女)를 주지 않고 한녀(漢女)를 아내로 주어 아들을 낳았고, 한윤(韓潤) 형제는 성(姓)을 고치고 귀화해서 노한(老汗)이 매우 후대하여 호녀(胡女)를 아내로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6월 26일 정유

호조가 아뢰기를,
"당초 조사가 올 때에 은(銀)과 삼(蔘)의 비용이 많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빈청의 대신이 함께 의논하여 전례대로 충청·전라·경상·강원 등 도에 3결(結)마다 베 1필을 거둘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곧이어 도독에게 은자를 대출한다는 의논이 있어 산군(山郡) 86개 고을에서 우선 작목(作木)하여 상납해서 삼을 무역하는 값을 삼고, 그 나머지는 가을을 기다려 작미하여 은자 대출을 상환하는 값을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산군에서 3결마다 베를 거두는 것은 치우치게 괴롭히는 것 같기 때문에 4결마다 1필을 거둘 것으로 낮추었습니다. 4결마다 1필씩 거두어 들인 무명이 4백 20동이었습니다. 이번 조사가 전과 달리 청렴하고 검소하였지만 인삼을 지출한 숫자가 5백 1근, 그 값이 3백 30동 30여 필이었으니, 산군에서 거두어 들인 무명을 남김없이 다 쓴 것입니다. 그러나 추수 때 작미하는 것은 이제 받아서는 안 되는데, 산군의 베만 유독 받기는 어려울 듯하여 이미 납부한 무명은 장래 응당 납부해야 할 무명으로 옮겨 계산해 감한다는 뜻을 전에 이미 계지(啓知)하였습니다. 인하여 산군 각 고을에서 응당 납부할 무명을 조사해 보니, 을축년 조(條)는 5결에 1필씩 베를 거두게 했는데, 전혀 와서 바치지 않아서 이것에다 옮겨 시행했으나 4결과 5결은 많고 적음이 같지 않았습니다. 그 부족한 숫자를 을축년 조 전세(田稅)로 거둔 쌀을 가지고 작목하여 와서 바친 숫자에 준해 계산해 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조사의 행차에는 실로 1척의 베도 걷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4도(道) 감사에게 통지하여 민간에 개유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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