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임인
유성이 패과성(敗苽星) 위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정언 하진(河溍)이 상소하기를,
"기강은 국가에 있어서 사람에게 원기가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 힘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원기가 빠져버리면 사지에 맥이 풀리고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심복(心腹)이 보존될 수가 없고, 기강이 무너져 버리면 백관이 태만해지고 온갖 간교한 일이 빚어져 정령(政令)이 시행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기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로 대신에서부터 저 아래 서료(庶僚)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 몸과 제 처자를 보존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고, 국가를 위해서는 한푼의 심력(心力)도 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평소 태평할 때는 굶주린 호랑이가 고기를 보듯 앞다투어 이록(利祿)을 추구하고, 한번 사변을 만나면 도망치는 산토끼가 그물을 벗어나듯이 서로 안전과 편함만을 도모하려 합니다. 더 심한 자는 적에게 아첨을 부리고 공공연히 뇌물을 주어 험한 곳을 피하려고까지 합니다.
전에 신경호(申景琥)는 주사(舟師)의 부장(副將)을 싫어하여 정역(鄭譯)의 힘을 빌어 체직되었고, 뒤에 이민수(李敏樹)는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위태롭게 여겨 또 정역의 힘을 빌어 파직되었습니다. 온 나라 사람이 정역을 보기를 미친 개가 주인을 물어뜯는 것보다 더 밉게 보아 모두 분노와 증오심을 품고서 그의 살점을 씹어먹고 그의 가죽을 깔고 자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는데, 이 무리들은 나라의 후한 녹을 먹고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오히려 그런 일을 달갑게 여기고 원수에게 애걸하여 자기의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이는 모두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 것을 알고서 아예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는 것으로서, 그 죄는 복주시키더라도 시원치 않습니다. 이러한 일은 항간의 아이들이나 부녀자도 모두 환히 알고 분해 하며 욕하고 있는데, 유독 전하께서만 듣지 못하셨습니다. 전하의 기강이 이와 같으니, 비록 한번 무슨 일을 해보고 싶더라도 어찌 호령하여 상하를 유지하겠습니까. 말이 이에 이르니 저도 모르게 통곡하게 됩니다.
나라는 하루라도 지키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인도 군병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평한 때라도 오히려 그 힘을 키우는 법인데, 위태롭고 어지러운 날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즈음 묘당은 군사 문제 말하기를 꺼려하여 수비가 말이 아니고 변방이 텅 비었으니, 이는 마치 천금나가는 구슬을 밤중에 길거리에다 버려두고 간수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나라의 꼴을 보는 자들이 모두 한심해 합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오히려 있는 힘을 다해 저들을 섬기면 안전하여 걱정이 없을 것이나 군사를 훈련시키면 저들의 뜻을 거스릴 수도 있다고 하니, 아, 어찌 그다지도 생각이 못 미친단 말입니까. 우리 열성(列聖)들께서는, 덕을 밝히고 소국을 돌보아 땅처럼 길러주고 하늘처럼 감싸주는 황명(皇明)의 시기를 만나 수천리 강토가 마치 어린애가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믿고 두려워할 것이 없었습니다. 안으로는 서울을 강하게 하고 밖으로는 변방을 튼튼하게 하여, 성을 쌓고 진(鎭)을 설치하며 장수를 선발하고 군병을 양성하는 일을 당장에 위급한 일이 닥친 것처럼 서둘렀으니, 이는 참으로 황급한 변란은 뜻밖에 터지는 것이어서 사전의 대비를 미리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제는 밖의 적이 기승을 부리고 나라 안의 걱정거리가 많은 때로서, 백성에게 징수할 것은 끝이 없으나 재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지나간 일이야 그런대로 넘겼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어떻게 끌어갈 것입니까. 호랑이의 본성은 사람을 씹어먹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이니, 그들이 잠시 한입에 삼켜버릴 심산을 멈추고 잡았다 놓았다 하는 술수를 보이는 것이 어찌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지금 대국과 서로 버티고 있어 힘을 쓸 틈이 없으나 으르렁거리며 동국을 씹어삼킬 뜻은 진정 잠시라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도 담장을 튼튼히 하여 도적에 대비하고 새짐승도 발톱과 어금니를 지녀 제몸을 지키는데, 더구나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어찌 손을 묶어두고 편안히 앉아 외국의 침략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과거 임진년에 왜구가 침입하여 한 구석 용만(龍灣)이 겨우 남았으나 부모의 나라와 매우 가깝기 때문에 마침내 패배를 돌려 공을 세우고 거의 멸망한 나라를 다시 찾았는데, 지금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막아 천일(天日)이 바다 너머에 있다 하더라도 청나라를 협조하고 명나라를 배반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는 정도만이 아니니, 하루아침에 천심이 노하여 화변(禍變)이 갑자기 생긴다면 전하께서는 공허한 나라만 앉아 지키는 상황에서 누구를 붙잡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이르니 자신도 모르게 통곡이 터집니다.
흥망의 갈림길은 인심의 이합(離合)에 달려 있으니, 인심이 단단하게 맺어지면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어지러움을 다스려지게 할 수 있으나, 인심이 무너지면 위태로운 것이 더욱 위태로워지고 어지러운 것이 더욱 어지러워지는 것이니, 이는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역대의 흥망이 서책에 분명히 실려 있으므로 전하께서 사실 이미 그 이치를 통촉하셨겠지만, 오늘날 인심을 잃은 것이 또한 많습니다. 변란을 겪은 뒤로 수재와 한재가 겹쳐 기근이 계속되면서 떠돌아다니다가 굶어죽은 자가 널려 있는데도 은덕은 내리지 않고 부역은 날이 갈수록 무거워집니다. 그리하여 가렴주구하는 자는 나라에 충성한다고 하고 사랑으로 돌보는 자는 백성과 한패거리라고 말하여 백성과 나라를 갈라 둘로 만들었습니다. 나라와 백성 관계는 털과 가죽의 관계와 같으니, 가죽이 없어지면 털이 어디에 붙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고서도 백성에게 위를 떠받들기를 바란다면 어려운 일입니다.
사로잡혀 간 사람이 고향이 그리워서 산넘고 물건너 천신만고 끝에 도망해 돌아와 그 부모 처자를 만나는데 슬픈 마음으로 위로하는 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잡아 보내는 일이 곧 뒤따릅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아끼지 않고 부모가 계시는 나라라서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 하고 서로 뒤를 이어 돌아오는데, 압록강가에 당도하면 변방의 장수는 국법을 꺼리고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주야로 막고 지키면서 그들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이들은 강가에서 통곡하며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강물에 뛰어들어 죽거나 목을 매어 죽거나 혹은 굶어서 죽기도 합니다. 이리하여 창성(昌城)과 삭주(朔州) 지방의 강줄기 위아래에 백골이 널려 있으니, 이를 보고 들은 사람이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으며, 그 부모와 처자들이 길거리에서 소리쳐 통곡하며 가슴이 막혀 허둥대는 모습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대개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므로 오히려 핑계를 댈 만하지만, 기미년에 요동으로 건너가고 정묘년에 잡혀가고 병자년에 전사한 자들에 있어서는, 군안(軍案)을 상고해 보면 이러한 유가 태반이나 되는데도 조정에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돌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궐포(闕布)를 그의 부형이나 이웃·친족에게 징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도저히 살아가지 못하게 하여,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므로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비어 있습니다. 신은 일찍이 기성(騎省)005) 에 있을 때 그 문부(文簿)를 열람해 보니 해서(海西)가 가장 심하였으며, 여정포(餘丁布)도 매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점은 생각지 않고 이름을 지적하여 독촉해 받아들이므로 수령은 어디에 손을 댈 곳이 없어 거주민에게 분담시켜 징수합니다. 지금과 같은 때의 생민은 응당 내야 할 구실도 오히려 제대로 내지 못할 판인데, 더구나 이처럼 함부로 침해해서야 되겠습니까.
한 자의 땅이 임금의 땅 아님이 없고 한 사람의 백성이 임금의 백성 아님이 없는데, 수어(守禦)·총융(摠戎)·충훈(忠勳) 등 각 아문이 사적으로 농장을 두어 백성의 전답을 넓게 차지하고서 신역을 피한 인부들을 불러모아 그 신역을 면제하고 그 구실을 감해 주고 있으니, 거기에서 거두어 들인 것은 조금도 나라의 재정에는 도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답을 개간한 지가 오래되면 마땅히 본디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인데도 계속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바로 혼조(昏朝) 때 권세가가 백성의 재물과 전답을 수탈하고 점유하던 버릇입니다. 선을 앞장서서 행해야할 성균관에서도 또한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 더욱 가슴아픕니다. 요즘에는 또 하나의 명목을 새로 만들어 지리산 이십삼봉 별장(智異山二十三峯別將)이라 칭하고 승녀와 무당까지도 다 신포(身布)를 걷고 산골짜기 화전(火田)도 일체 구실을 징수하니, 이 어찌 성세(盛世)의 일입니까.
대체로 이 몇 가지 일은 인심을 잃는 것 중에서도 큰 것인데,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해 이를 말하는 자가 없으니, 구중궁궐 깊숙이 계신 전하께서 무슨 수로 아시겠습니까. 마을마다 원성이 하늘에 사무치고 도로 위에 울부짖는 소리가 해에까지 비등하여 마치 세차게 흐르는 강물이 사방으로 터져 출렁거리고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은데, 전하께서는 이러한 인심으로 이러한 위급한 때를 당하여 장차 누구와 더불어 임금 노릇을 하시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이르니 저도 모르게 통곡하게 됩니다.
상벌은 군주의 큰 권한으로서, 제대로 시행하면 한 사람을 상주더라도 천만인이 권장되고 한 사람을 벌주더라도 천만인이 징계되는 것이지만,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다면 일체 이와 상반되는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세 신하가 국사를 논한 것이 시세를 헤아리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점은 있긴 하나, 당당한 논조와 충직한 정성은 청사(靑史)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노모와 처자들이 고독하고 미약하여 의지할 데가 없는데도 나라에서 물품을 대주는 일이 계속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온(鄭蘊)의 충직은 옛날에도 그 유례가 드문 것으로, 임금을 따라 국난에 앞장서서 더욱 그의 충성심이 드러났습니다. 비록 물러나 집안에 있기는 하였으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죽을 때까지 독실하였는데, 뜻을 품고 땅속으로 들어간 뒤에 나라에서 부의를 내렸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를 권장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김자점(金自點)은 원수(元帥)가 되어 손안에 병권을 쥐고서 군부(君父)로 하여금 궁지에 몰려 도성을 떠나게 하고 나라의 형세를 위태롭게 만들었으므로 그 죄는 하늘에까지 사무쳐 만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려울 판인데, 전하께서는 그 목숨을 용서하여 귀양보내는 벌만 약간 보이셨을 뿐이며, 그 뒤에 몇 년이 채 안 되어 도리어 크게 등용하시어 사마(司馬)006) 의 장관 자리를 주셨습니다. 대체로 사마의 장관은 책임이 극히 무거운 자리로서 명망이 걸맞지 않으면 앉을 수 없고, 공론이 찬동하지 않으면 앉을 수 없고, 공로가 드러나지 않으면 앉을 수 없고, 장사(將士)가 따르지 않으면 앉을 수 없는 것인데, 자점이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그 자리에 앉는단 말입니까. 명망으로 말하면 묘당이 천거하지 않은 바이고, 공론으로 말하면 온 나라가 다 분개하여 미워하는 바이며, 적을 놓아주고 임금을 버렸으니 공로가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인심을 많이 잃었으니 장사의 마음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는데 전하께서는 무엇을 취하여 서슴없이 발탁해 쓰셨습니까. 비유하자면 이미 시험해 본 범상한 의원과 같아서 나중에 아무리 화타(華佗)와 편작(扁鵲) 같은 신묘한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그를 업신여기고 업신여기면 그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데도 장수들을 호령하고 인물을 진퇴시킬 수 있겠습니까.
자점처럼 중대한 죄를 진 자를 높여 총애하고 중책을 맡겼으니, 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장신(張紳)과 김경징(金慶徵)의 혼령이 반드시 지하에서 통곡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신하를 징계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인심이 이로 말미암아 분개하고 사졸은 이로 말미암아 원망하여 배반하는데, 전하께서는 미약한 한 몸으로 외로이 위에 서서 그 누구와 함께 나라를 꾸려가겠습니까. 아, 네 가지 폐단 가운데 하나만 있더라도 충분히 나라가 위태롭고 멸망할 것인데, 더구나 모두를 갖추고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의 나라는 새알을 포개놓은 것보다 위태롭고, 불타는 집의 제비 둥지보다 다급하여 재난이 조석간에 닥칠 상황으로서 마치 만 길 높이의 썩은 나무가 회오리 바람 속에 서 있는 것과 같은데도 전하께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계실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질과 성스럽고 밝으신 바탕으로 고금의 흥성과 패망을 환히 꿰뚫어 보시는데 어찌 이를 일찍이 보지 못하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어찌 깊은 궁궐에서 침묵을 지키고 이런 때에 한 가지도 계책을 세우는 일이 없으십니까.
옛날의 성왕들은 정치가 안정되고 공적이 드러난 때에도 오히려 신하들을 맞아 접견하고 계책을 살펴 받아들여 감히 잠시라도 스스로 편안히 있지 않았는데, 더구나 걱정되고 위태로운 때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경연에 드물게 납신 지가 이제 몇 년째입니다. 구중궁궐이 하늘같이 높고 내전이 멀어 천리나 되므로, 비록 존귀한 대신과 친근한 관원이라도 오히려 나아가 뵙는 일이 드문데, 소원한 신하로서야 다시 어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위급한 형세가 임금 앞에 아뢰어지지 않고 충직한 말이 아래에서 다 올려지지 않아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모두 가슴아프게 여기는 네 가지 폐단007) 같은 것도 전하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 경연을 설치한 것은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조강을 하고 주강을 하고 석강을 하고 야대(夜對)를 하는 것은 대체로 임금의 덕을 보도하고 조정의 정사를 강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연방(延訪)할 때에 잘잘못을 상고해 볼 수 있고, 임금의 물음에 따라 대답하는 사이에 충성과 간사함을 가려낼 수 있고, 토론하고 담화하는 것으로 지혜를 넓힐 수 있고, 드나들며 움직이는 것으로 지기(志氣)를 통창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려가 이미 안정되고 덕업(德業)이 차츰 진보하면 태만한 마음이 끼어들 틈이 없고 경외하고 삼가하는 뜻이 사라지는 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옥당의 여러 관원들이 정원수만 채우고 대낮의 맑은 창가에 마주 앉아 한가로이 졸면서 모두 오랫동안 천안을 뵙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전하께서 항상 가까이하는 자는 환관과 궁첩이며, 항상 귀에 들으시는 것은 잡스럽고 비루한 말들이니, 조정 정사의 잘잘못을 무엇을 통해 알고 민생의 고통을 무엇을 통해 아시겠습니까. 그리하여 성덕(聖德)이 날로 낮아지고 성지(聖志)가 날로 태만해지며, 정신과 심려가 또 따라서 막히신 것입니다. 고질적인 폐단이 더욱 불어나고 나라의 형세가 더욱 위태로워지는 것이 이상할 게 없으며, 옥후(玉候)가 미령하신 지 여러 해가 지나도 완쾌되지 않으시는 것이 신의 생각에는 쌓인 피로가 병이 되거나 깊은 시름 때문에 생긴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깊은 궁궐을 편안하게 여기시거나 옥후가 미령한 것을 걱정하지 마시고 유신들을 맞아 접견하기를 한결같이 고사대로 하시어, 편전(便殿)이나 혹은 침각(寢閣)에서 옛날의 역사를 강론하고 사무를 널리 묻고 심지를 가다듬고 다스리는 도를 힘써 강구하소서. 이와 같이 하시면 크게는 이완된 조정 정사와 작게는 민간의 고통이 모두 임금 앞에 개진되어, 기강을 정돈할 수 있고 수비를 공고히 할 수 있으며, 인심은 저절로 단결되고 상벌은 저절로 밝아질 것이니, 위태로움을 돌려 편안하게 하는 전기가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답을 내리지 않았다.
2월 3일 계묘
3품 이상으로 하여금 수령·변장(邊將)·이임(吏任)에 합당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는데, 그 단자가 3백 19장(張)이었다. 살펴보건대, 식년 천거법(式年薦擧法)은 조종조의 아름다운 뜻이었으나 근년 이후로는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아 천거하는 자는 사정(私情)으로 함을 면치 못하고 주의하는 자는 그 천거된 자를 써주지 않으므로 그 명목은 있으나 내실이 없었으니, 어찌 인재를 얻어 쓰겠는가.
정익(鄭榏)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2월 6일 병오
함경 감사 여이징(呂爾徵)이 남도(南道)의 삼수군(三手軍)의 입방(入防)을 면제하여 그 대신 작미(作米)하고, 또 해조로 하여금 면강첩(免講帖)을 더 보내 곡식을 거두어 굶주림을 구제하게 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였다.
2월 10일 경술
이래(李䅘)를 지평으로, 남선(南翧)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김상헌(金尙憲) 등에게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요미(料米)를 주게 하여 지공(支供)하는 폐해를 없애는 것이 마땅할 듯한데, 비국에서는 계품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렇게 할 것을 분부하였는가?"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신들은 사실 그 사람들이 필시 식량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의주에서도 그 폐해를 받는 일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나, 아래에서 요미를 주자고 계청하는 것 또한 좋지 않을 듯하여 미처 처치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성교를 받드니 참으로 매우 지당합니다. 본도로 하여금 품료(品料)에 따라 지급하게 하소서."
하자, 상이 따랐다.
2월 11일 신해
충청 감사 정양필(鄭良弼)이 치계하기를,
"민간에서는 이미 지난해 동짓달부터 싸라기죽도 이어가지 못하다가 해가 바뀐 뒤에 유리걸식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대체로 신사년008) 에는 전결(田結)이 경진년보다 6천 3백여 결이 더 많아서 기본으로 정해진 요역 이외에 지난해부터 금년 정월까지 과외로 결포(結布)를 더 정한 것이 통산하면 6만 5천 3백 57필인데, 그중에 삼운교체군(三運交替軍)과 운재쇄마(運載刷馬)와 농군(農軍)009) 의 자장(資裝)010) 등 명목의 포목이 도합 8천 8백 60여 필입니다. 이는 양남(兩南)에는 없고 본도에서만 치르는 요역이며, 더구나 병란을 치른 뒤로 흉년이 든 것이 이미 4년째입니다. 기근을 구제하는 정사는 부역을 견감하는 것이 상책이니, 청컨대 본도의 세염(稅鹽) 1천 3백여 석으로 수천 필의 면포(綿布)를 무역하여 말을 세내는 값을 충당하도록 허락하소서. 그러면 민력을 조금이나마 펴지게 할 수 있어 기근을 구제하는 데 하나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경상 우병사 정익(鄭榏)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그를 소견(召見)하고 남방의 일을 어찌할 것인가를 묻자, 대답하였다.
"신은 부임한 뒤에 작은 일은 감사와 의논하여 조처하고 큰 일은 조정에 계품할 생각입니다."
2월 13일 계축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저번에 승지 홍무적(洪茂績)이 외방에 있는 사람을 의망할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따랐으나, 신진의 무리가 두번 세번 하유한 뒤에야 비로소 올라오고 며칠 동안 서성거리다가 도로 곧 하향해 버리니, 군신의 관계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그리고 대간은 정원이 채워진 때가 없어 수령이 된 자가 40일이 지나도 서경(署經)을 얻지 못하니, 이들이 만약 벼슬을 하려고 하지 않으면 해조가 반드시 의망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니, 영의정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만약 벌을 시행하면 그 하향하려는 소원만 이루어 줄 뿐이며, 외임(外任)에 대해서는 갈구해 마지않으니 편한 쪽을 교묘히 도모하는 정상을 엄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부제학 김육이 아뢰기를,
"병란을 치른 뒤로 사대부가 먼 지방으로 유락(流落)하여 생계가 매우 곤란하므로 비록 소명을 받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노복과 말, 그리고 식량을 준비하여 떠나야 하니, 형세가 반드시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시종(侍從)이 지방을 왕래할 때는 반드시 선문(先文)이 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각 고을이 만약 모두 경비를 제공해 준다면 단기(單騎)로 달려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궁관(宮官)을 차출할 때는 사람들이 모두 일부러 죄를 지어 파직되니, 참으로 매우 한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파직된 자를 모두 주의(注擬)하라."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서쪽의 백성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으니 어느 겨를에 예의를 익히겠습니까마는, 따져보면 서쪽은 문교(文敎)가 폐기된 지 오래되어 사람들이 글을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번에 성천(成川)의 유생 박대덕(朴大德)이 서원(書院)의 일로 상소하려고 하자 정원이 그것을 물리친 일이 있었습니다. 대덕은 노인으로 고사를 많이 알고 있는데, 하는 말이 ‘조종조에 서원을 성천에다 세울 것을 명하고 학령 정사(鶴嶺精舍)라고 액호를 내렸는데, 임진년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이제 비로소 중건하여 정구(鄭逑)와 조호익(曺好益)을 향사(享祀)하고 있으니, 이 두 사람은 모두 명유(名儒)로 부(府)의 관리가 되었었기 때문에 향사하였다. 이러한 뜻을 임금께 상달하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남쪽에는 서원이 사실 폐단이 있으나 서로에는 인현 서원(仁賢書院) 한 군데만 있을 뿐이어서 선비들이 학문을 강론할 곳이 없으니, 권장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사(儒士)를 권장하는 곳으로 본디 향교가 있는데 어찌 꼭 서원만 찾는가. 선비들이 다 향교를 멸시하고 앞다투어 서원을 찾아가는데, 참으로 이는 못된 풍조이다."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박대덕은 사서 삼경을 구해 서원에다 두기 위하여 자기가 타는 말을 희사해서라도 반드시 사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내려주라고 하였다.
충훈부(忠勳府)가 아뢰기를,
"일찍이 공신의 처자에게 추수할 때까지 요미(料米)를 지급하라는 분부가 계시어 2년 동안 이 규례에 따라 시행하였기 때문에 공신의 처자들이 굶어죽는 것을 면하였으니, 이는 모두 성상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제 옥산군(玉山君) 장돈(張暾), 순원군(順原君) 박효립(朴孝立), 인성군(麟城君) 이우(李佑), 오천군(鰲川君) 문회(文晦) 등의 아내가 서로 뒤를 이어 정장(呈狀)하여 규례에 따라 요미를 지급해 주기를 원하니, 청컨대 해조로 하여금 규례에 따라 요미를 지급해 주게 하고, 앞으로도 만일 와서 정장하는 자가 있을 때는 그때 다시 입계하여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원훈(元勳)의 처자에게는 정소(呈訴)를 하지 않더라도 요미(料米)를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4일 갑인
식년 감시(式年監試)를 실시하여 생원 조현양(趙顯陽) 등과 진사 이면하(李冕夏) 등 2백 인을 뽑았는데, 현양은 조익(趙翼)의 아들이고 면하는 이식(李植)의 아들이다.
2월 18일 무오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정사(呈辭)가 25번째에 이르니, 상이 허락하였다.
강석기를 판중추부사로, 박종부(朴宗阜)를 이조 좌랑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지평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이조 정랑으로, 정태제(鄭泰齊)를 헌납으로, 신유(申濡)를 부교리로, 서상리(徐祥履)를 수찬으로 삼았다.
일본국의 일광산(日光山) 사당(社堂)이 준공되자, 왜차(倭差)가 와서 편액(扁額)과 시문(詩文)을 청하므로 조정이 허락하였다. 전에 도주(島主) 평의성(平義成)이 평행성(平幸成)011) 을 보내 말하기를,
"일광산에 가강(家康)의 묘당(廟堂)이 있으므로 그 묘당 뒤쪽에다 사당(社堂)을 건립하였는데, 기둥과 들보와 사방의 벽을 모두 대리석으로 꾸며 호화롭기가 그지없습니다. 국왕의 어필(御筆)과 시문을 얻어 천추만대에 전해줄 보물로 삼고자 합니다."
하고, 또 종(鍾)과 서명(序銘)을 구하였는데, 접위관(接慰官) 이태운(李泰運)이 이 사실을 계문하였다. 상이 묘당에 의논하여 선조(先朝)의 왕자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012) 에게 일광정계(日光淨界)라는 큰 네 글자의 편액을 쓰게 하고 또 종을 주조하여 보내게 하였는데, 이명한(李明漢)이 서(序)를 짓고 이식(李植)이 명(銘)을 짓고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다. 또 시문을 제술할 사람을 뽑았는데, 김류(金瑬)·최명길(崔鳴吉)·이식·홍서봉(洪瑞鳳)·이명한·이성구(李聖求)·이경전(李慶全)·신익성(申翊聖)·심기원(沈器遠)·김시국(金蓍國) 등이 참여하였다. 상이 대제학 이명한으로 하여금 먼저 칠언율(七言律) 한 수를 짓고 뽑힌 신하들에게 그에 화답하게 하였으며, 또 명한에게 오언 배율(五言排律)을 더 지어 이웃 나라로서 영광으로 생각하는 소지로 삼게 하였다. 김류는 그의 아버지 김여물(金汝岉)이 임진 왜란에 죽었기 때문에 사양하고 짓지 않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전에 이직언(李直彦)과 정광적(鄭光績)은 모두 나이가 80세가 찼기 때문에 연신(筵臣)이 아뢴 것에 따라 모두 초자(超資)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지금 전식(全湜)은 가선(嘉善)인데, 가자(加資)와 초자 중에서 삼가 상의 재택(裁擇)을 기다립니다."
하니, 승품(陞品)하라고 답하였다. 이 일은 영의정 이성구(李聖求)가 일찍이 연석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2월 20일 경신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에 해묵은 단향(檀香)을 백관에게 나누어 주라는 분부가 계시어 아래에서 모두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다만 수많은 신료들에게 두루 줄 수는 없고 또 국가의 사전(祀典)에 쓰는 향을 사가(私家)에서 쓰는 것도 온당치 못한 듯하니, 청컨대 호조에 저장해 두었다가 각 고을의 향교에 나누어 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살펴보건대, 백관에게 나누어 주라는 분부는 매우 거룩한 뜻이었는데도 예조가 억지로 저장해 두기를 청하였다. 종묘에 쓸 수 없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성묘(聖廟)에는 쓸 수 있다는 말인가.
2월 21일 신유
경상 감사 구봉서(具鳳瑞)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 당시 봉서의 임기가 임박하자 상이 보리가을 때까지 유임시킬 것을 하교하였었다.
2월 23일 계해
상이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묻기를,
"왜차(倭差)가 온 것은 특별한 의도는 없겠는가?"
하니, 영의정 이성구가 아뢰기를,
"왜인은 교활하여 그 속사정을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가 청한 것은 오로지 일광산 사당의 일로서 모두 따라주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며, 청국의 일을 제기한 점에 있어서는 그저 공갈을 해보는 뜻인 듯합니다."
하였다.
2월 25일 을축
전 주서(注書) 이유창(李有淐)이 상소하기를,
"하늘의 재변은 거듭 발생하고 백성의 곤궁은 계속 극한 상황이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여 정상으로 되돌릴 방도를 구하신다면, 백성의 원망을 없애고 하늘의 재변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도감과 군기시(軍器寺)의 공역(功役)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식량이 지나치게 소비되고 각 아문의 군관과 경포수(京砲手)들이 받는 요미(料米)가 쓸데없이 지출되고 있으니, 이제 그만 공역을 중지하고 그 식량을 가난한 백성에게로 옮겨 구제하며, 입직하는 인원수를 분명히 조사하여 쓸데없이 요미를 먹는 폐단을 막는다면 만분의 일이나마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생명을 희생하여 인(仁)의 도를 성취하고 몸이 죽더라도 후회가 없는 것은 홍익한(洪翼漢)의 정충(精忠)이고, 청천의 백일처럼 떳떳하여 국가의 원기가 된 것은 김상헌(金尙憲)의 기절이니, 전하의 조정에는 두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매일 경연을 열어 많은 현인에게 널리 하문하신다면 덕이 날로 불어나고 치도(治道)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원손(元孫)의 춘추가 차츰 장성하니, 마땅히 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은 선비를 가려뽑아 가르치고 인도하여 어릴 때 교육하는 방도에 유감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2월 26일 병인
조경(趙絅)을 전한으로, 홍처대(洪處大)를 봉교로 삼았다.
2월 28일 무진
대사헌 남이웅(南以雄)과 대사간 이기조(李基祚)가 모두 전관(銓官)에서 막 갈려왔는데, 연석에서 상이 이조(吏曹)가 승전책(承傳冊)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분부를 내린 것으로 인하여 모두 인피하였다. 집의 심동귀(沈東龜)와 지평 이래(李䅘) 등은 처치할 때 모두 체차할 것을 청하려 하고, 장령 박수문(朴守文)은 그와는 달리 이웅을 감싸줄 생각으로 체차할 것을 청하려 하지 않아 이 때문에 동료의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여 이들도 다 인피하였다. 사간 윤강(尹絳)이 아뢰기를,
"이조가 승전책을 오랫동안 수정하지 않은 것은 비록 한 사람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최근에 전장(銓長)을 지냈으니 법을 지키는 자리에 눌러 있을 수 없으며, 한 사람은 또 일찍이 좌이(佐貳)013) 의 관원으로 있었으니 잘 검칙하지 못한 잘못을 혼자서만 면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헌부가 처치하는 과정에서 문서를 가져다가 상고하고 서로 의논하여 체차를 청하려고 한 것은 일을 논하는 사체가 제대로 된 것이나, 전후의 전관(銓官)이 모두 잘못한 것이 있는데도 따로 의견을 내어 구차한 말을 하였으니, 남이웅·이기조·박수문은 체차하고 심동귀·이래는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서쪽으로 가는 영병장(領兵將) 김대건(金大乾)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불러 접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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