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임신
야춘(也春)에 거주하는 호(胡) 억송아(億送阿)가 기근을 호소하고 식량을 요구하므로 본도로 하여금 곡물을 적당히 주도록 하였다.
1월 3일 계유
헌부가 아뢰기를,
"수령을 서경(署經)하는 법은 법전에 실려 있는 것으로서 비록 여러 번 주현(州縣)을 거친 사람이더라도 다시 서경을 한 다음에야 감히 사조(辭朝)하는 것이니, 이는 조종조의 옛 규례입니다. 그 뜻은 실로 자목(字牧)의 책임이 극히 중하기 때문이니, 진정 그 적임자가 아니면 이미 주현을 거쳤다고 해도 그대로 보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란을 겪은 뒤로 폐단을 줄이기에 급급하여, 처음 제수하는 사람 이외에 이미 경력이 있는 사람은 잘 다스리지 못하여 실패를 본 자이더라도 모두 서경을 면제하였으므로 무능하고 간교한 무리들이 징계되거나 두려워하는 일이 없으며, 혹은 오늘 제수되었는데 그 이튿날 사조(辭朝)하는 자도 있으니, 이 어찌 법전의 본의이겠습니까. 앞으로는 한결같이 구례에 따라 이미 거쳤거나 새로이 제수된 자를 막론하고 모두 서경한 뒤에 떠나보내게 하소서.
3조(曹)의 낭관은 음관(蔭官) 중에서는 아주 엄격히 선발하는 직인데, 요즈음은 잡다하고 구차하게 충원하여 신중히 가리는 뜻이 거의 없으므로 물론이 모두 비난하니, 해조로 하여금 도태시키게 하소서. 성천(成川)은 다른 고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곳이므로 그전부터 그곳의 부사가 되는 자는 모두 재신(宰臣)이거나 문무를 겸전하여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고, 당하관은 일찍이 대관과 시종을 거쳐 이미 준직(准職)을 행한 사람으로 차송하였으니, 이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인데, 신 부사 이석망(李碩望)은 4품 음관에서 갑자기 품계를 올려 제수하였으므로 정사(政事)의 체모가 두서가 없이 되었습니다. 이석망을 체차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서경의 일은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서경이란 조종조의 법제인데, 요즈음 변란으로 인하여 양사(兩司)가 일이 많아 그전에 수령을 거친 자는 다시 서경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한때의 임시 방편일 뿐입니다. 대간이 아뢴 것은 실로 사체를 얻은 것으로서 달리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4일 갑술
통제사(統制使) 유림(柳琳)이 전일 금주위(錦州衛)의 영병 대장(領兵大將)으로서 자헌(資憲)의 품계에 올랐는데, 이는 청국의 명에 따른 것이다.
1월 5일 을해
상이 하교하기를,
"비국의 모속 사목(募粟事目) 가운데 보통 사면시에 용서하지 않는 죄인은 면죄를 허락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는데, 사목은 곧 금주(錦州)에 곡식을 바친 자에 대해 서얼은 허통하고 범죄자는 면죄해주는 등의 정식(定式)이다.
1월 6일 병자
심양에 있는 재신들이 치계하였다.
"정명수가 관소에 와서 세자를 청해 아문(衙門)으로 모시고 가서, 압두패륵(押頭貝勒)001) ·대두패륵(大頭貝勒)002) 등과 함께 제왕이 모여 있는 곳에 앉힌 뒤에 용골대(龍骨大)·피패(皮牌)·가린(加隣)·어사거(於士巨)·정역(鄭譯) 등이 세자에게 한(汗)의 말을 전하기를 ‘김상헌(金尙憲)은 죽어도 남을 죄가 있으나 이제 병이 중하다는 말을 들었고 그 나머지 사람들도 다 질병이 있다고 하며, 함께 따라온 사람들도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이 불쌍하다. 상헌은 나이가 많지만 글을 잘하니 반드시 재능과 지혜가 있을 것이다. 그를 금주(錦州)로 보내 공을 세우게 하고도 싶고 도로 의주로 보내 구금시키고도 싶은데,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낫겠는가?’ 하자, 세자가 말하기를 ‘여러 사람이 이제까지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황제의 은덕이다. 그 처결은 오직 황제에게 달렸으니 어찌 감히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니, 용골대 등이 즉시 들어갔다가 나와 한(汗)의 말로 고하기를 ‘모두 의주에 구금해두고 사신이 왕래할 때 그들로 하여금 점검하게 해야겠다.’ 하므로, 세자가 말하기를 ‘황제의 은덕이 하늘 같아 뭐라고 사례할 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김상헌·박황(朴潢)·신득연(申得淵)·조한영(曺漢英)·채이항(蔡以恒) 등 5인을 내보냈고, 이사(貳師) 이경석(李景奭)도 나가게 하면서 말하기를 ‘선천(宣川)의 여자가 말한 선인(船人) 5명 중에 반드시 모의를 주도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감사·병사와 함께 한 자리에서 조사 심문하여 그 결과를 살펴보고 올 것이며, 전 부사(府使) 이계(李烓)도 의주에 구류하여 우리의 지시를 기다리게 하라.’ 하였습니다."
간원이 아뢰기를,
"유진립(柳震立)이 해남(海南)의 수령으로 재직한 기간은 전부 계산하여 겨우 3개월일 뿐입니다. 부임 초기에 즉시 한 사람의 관원을 차정하여 관가의 포목(布木) 몇 동(同)을 주어 제주(濟州)로 들여보내 준마(駿馬)와 각종 잡물을 사오도록 하였는데, 그가 돌아오기 전에 진립이 파직되고 또 그 일을 조사하는 일이 일어나자, 진립이 당초에 보냈던 관원은 죄를 얻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남들의 이목에 드러나는 마필(馬匹)과 같은 물건은 전부 다시 팔고 가벼운 물건을 사가지고 왔으니, 이는 그 당시 제주 목사가 직접 목격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명백한 일을 용서하여 덮어둔다면 탐관 오리가 무엇을 두려워하여 경계하겠습니까. 사판(仕版)에서 삭제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7일 정축
유성이 천봉성(天棓星) 아래에서 나와 천진성(天津星) 위로 들어갔다.
비국이 아뢰기를,
"김상헌 등을 내보내는 일이 뜻밖에 생기고 안주(安州)에 구금된 사람에 대해서도 차사를 보내 조사하지 않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이계는 쇄마(刷馬)를 주어 내려보내고, 안주에 구금된 사람은 이사(貳師)로 하여금 감사·병사와 함께 상의하여 처단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이계가 선천(宣川)에 있을 때 한인(漢人)과 무역한 행적이 있었기 때문에 청국에서 문책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27면
【분류】외교-야(野)
ⓒ 한국고전번역원
이조 판서 남이웅(南以雄)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1월 8일 무인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호서(丁好恕)가 치계하기를,
"관지기(館守) 평지련(平智連)이 말하기를 ‘강호(江戶)에서 차송한 전 봉행왜(奉行倭) 평성행(平成幸)이 홍희남(洪喜男)·이장생(李長生)과 서로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뜻은 관백(關白)이 아들을 낳아 온 나라가 축하하고 있으므로 도주(島主)가 우리 나라의 축하 사절을 얻어 생색을 내는 소지로 삼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차(倭差)가 또 하는 말이 ‘지난 겨울에 당선(唐船)이 처음으로 장기(長崎) 등지에 와서 말을 전하기를 「대명 황제가 천하의 병마를 동원하여 청병(淸兵)을 완전히 토벌한 뒤에 남병(南兵)을 풀어줄 것이다. 이 때문에 무역을 하기 위해 나왔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강호에 전파되면 대군(大君)이 필시 도주에게, 너희 섬은 조선과 인접해 있는데도 이와 같은 일을 어찌 보고하지 않았느냐고 문책할 것이므로 이 일을 자세히 안 뒤에 미리 대군에게 보고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비국으로 하여금 명백히 지시하여 대답을 잘못하는 염려가 없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예조 좌랑 이태운(李泰運)을 접위관(接慰官)으로 차임하여 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치계하기를,
"다섯 신하가 모두 의주에 머물게 된 것이 또 청국의 분부로부터 나왔습니다. 김상헌 등이 이역에 구금되어 있다가 또한 살아 돌아왔으니, 온 나라 사람이 그 누가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의주의 물력이 결코 단독으로 감당하여 뒷바라지를 할 만한 형세가 없으니, 연로의 고을에 나누어 두더라도 왕래하는 청사에게 그들을 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주 첨사(昌洲僉使) 최득남(崔得男)은 예전부터 정역과 가장 친근하니, 이제 차원(差員)으로 정하여 심양으로 들여보내 의주의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를 그로 하여금 사적으로 정역에게 말하게 한다면, 마음이 움직여 들어줄 가망이 없지 않습니다. 비국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이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회계하니, 상이 따랐다.
1월 9일 기묘
전 판서 김상헌 등이 의주에 당도하여 상소하기를,
"신들은 이역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모진 추위와 무더운 더위에 시달려 몸은 메마르고 숨은 거칠어져 날마다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 천지 부모 같은 인애가, 덕은 원근을 움직이고 정성은 상하를 감동시켜 살벌한 형구(刑具) 사이에서 빠져나와 편안한 보금자리로 되돌아오게 하였으니, 다시 살려주신 은혜는 마른 뼈에 살을 붙여주신 것과 같아 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국경에는 들어왔으나 서울 길이 막혀서 대궐로 달려가 다소나마 충정을 펴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해를 바라보며 감격의 눈물만 흘립니다. 삼가 간단한 소를 갖추어 죽을 죄를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날마다 바라다가 이제 다행히 풀려났으니, 기쁨을 가눌 수 없다."
하고, 하교하기를,
"이 사람들은 집안이 망가진 뒤에 오랫동안 이역 땅에 있었으니, 가지고 갔던 물건도 반드시 바닥이 났을 것이다. 해조로 하여금 입을 거리를 주게 하라."
하였다.
암행 어사 정치화(鄭致和)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신계 현령(新溪縣令) 정기풍(鄭基豊)에게 표리 1습(襲)을 하사하고, 봉산 군수(鳳山郡守) 정원필(鄭元弼)과 토산 현감(兎山縣監) 박윤서(朴潤緖)는 하옥하여 치죄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안주(安州)의 일은 걱정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결국 대단하게 확대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이사(貳師) 이경석(李景奭)의 장계를 보건대, 정역(鄭譯)이 스스로 공을 과시하는 기색이 많이 있고 한 자급을 얻기를 원한다고 하니, 그가 바라는 것이 그다지 중대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한 자급을 더해주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0일 경진
햇무리가 지고, 푸르고 검은 구름 두 가닥이 해를 끼고 햇무리를 꿰었는데, 그 길이가 각기 하늘 끝에 닿았다.
앞서 대제학 이식(李植)이 상소하기를,
"급제(及弟)003) 에게 강경(講經) 시험을 보이는 규정에 《역경(易經)》은 획수(畵數)를 갑절로 계산해 주는 것은 《역경》의 음과 새김, 장구(章句)가 가장 암송하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역》 본문의 구결(口訣)을 새로 고쳤으므로 순탄하여 암송하기가 쉽고, 전(傳)의 첫대목도 구례에는 두세 줄까지 암송하였으나 이제는 보통 10여 자를 넘어가지 않고 심지어 네댓 자에 그치는데도 그것을 합격이라고 합니다. 이로부터 응시자가 쉽고 간단한 것을 이롭게 여겨 모두가 《춘추(春秋)》는 제쳐놓고 애써 획수가 갑절되는 것을 추구하니, 《춘추》의 학은 머지 않아 폐기될 것입니다. 앞으로 《주역》의 강경 시험에 획수를 갑절로 계산하지 않는다면,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폐단이 바로잡혀 《춘추》의 학이 폐기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예조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대제학 이명한(李明漢)이 아뢰기를,
"《역》과 《춘추》의 강경을 변통하자는 의논은 물론 폐단을 바로잡자는 좋은 뜻에서 나왔습니다만, 단지 어렵고 쉬운 것으로 말하면 《춘추》는 쉽고 《역》은 어려운데, 이제 만약 획수를 갑절로 쳐주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어느 누가 쉬운 쪽을 놓아두고 어려운 쪽으로 가려고 하겠습니까. 반드시 머지 않아 《역》의 학이 또 폐기될 것입니다. 전(傳)의 첫머리 네댓 자 암송한 것을 가지고 합격이라고 하는 것은 그 책임이 시관에게 있는 것으로 응시자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강경 시험에서의 문자는 그 글자 수와 줄 수를 늘리고, 아울러 글뜻을 이해한 자를 뽑으며, 획수를 갑절로 계산해 주는 규정은 예전대로 하고 폐지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명수(鄭命壽)를 정헌(正憲)에 가자(加資)하였다.
1월 12일 임오
이명한(李明漢)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종2품으로서 올려 제수하였는데, 대신이 천거한 것이다. 남이웅(南以雄)을 대사헌으로, 박서(朴遾)를 집의로, 조수익(趙壽益)을 응교로 삼았다.
1월 14일 갑신
비국이 아뢰기를,
"이제 평안도 암행 어사 정유성(鄭維城)의 서계를 보니 서쪽 지방의 궤멸된 형편은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기민(飢民)을 구제하고 관군(館軍)을 찾아 모으는 등의 일은 본도로 하여금 헤아려 시행하게 하고, 국사에 죽은 사람에 대한 휼전(恤典)과 사객(使客) 접대 등의 일은 삼도(三道)로 하여금 다시 더 신칙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접대를 풍성하게 한 일은 참으로 놀랍다. 삼도의 감사를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전 현감 안몽정(安夢正)은 갑자년의 역변(逆變) 때 이괄(李适)에게 붙었다가 역적이 패하자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숨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사로잡아 복주(伏誅)시켰다. 사로잡은 자는 상으로 은 백 냥을 주고 숨겨준 자는 정배(定配)하였다.
1월 16일 병술
상이 호조 판서 이명(李溟)을 인견하고 묻기를,
"심양에서 농사를 짓는 일이 어렵다는 점에 대하여 본조가 진술한 말이 상당히 자세하지만 나의 소견과는 다른 듯하다. 의주에다 곡식을 쌓아두고 각자 운반하게 하자는 설은 아무리 부득이한 형편에서 나온 것이라지만 재신(宰臣)과 질자(質子)도 오히려 그런 일을 하게 될 것인데, 국가에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운반하게 하는 것은 너무 박정할 듯하다. 금군(禁軍) 등도 모두 노복과 말이 없으니, 어떻게 운반해 갈 것인가. 혹시 말이 있다 하더라도 매달 운반해 가는 것은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리고 1년간 방출하는 식량이 매우 많으니 만약 농사를 잘 짓는다면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나, 다만 초기에 소비되는 재력이 반드시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하니, 이명이 아뢰기를,
"경작을 한 뒤에 만약 실농하여 끝내 식량을 운반해가는 일을 면치 못한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스스로 식량을 운반해 가는 것만 못합니다. 그리고 관향(管餉)의 임무는 감사가 그 일까지 살펴볼 수 없으니, 관향사를 따로 차출하여 그로 하여금 전적으로 관장하게 한다면 혹시 도움이 있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모가 있는 자를 잘 가려 관향사로 차견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김자점(金自點)을 병조 판서로 삼았는데 특지에 의한 것이다. 하진(河溍)을 정언으로 삼고, 정치화(鄭致和)를 동래 부사로 삼아 통정의 품계로 승진시켰다.
1월 17일 정해
선혜청(宣惠廳)이 춘등(春等)004) 으로 받는 쌀을 특별히 두 말을 감하여 조정이 한푼의 혜택이라도 베푸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18일 무자
우박이 내렸다.
무장(茂長)에 사는 고 현령 오전(吳晪)은 늙은 아비와 계모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섬겼으며, 부모의 상을 만나 예를 다하다가 끝내 슬픔으로 병이 들어 죽었다. 교생(校生) 강귀중(康貴中)은 어미가 병이 나서 혼수 상태가 되자, 자기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넣어 마침내 소생케 하였다. 본 고을 사인(士人) 정종량(丁宗亮) 등이 그 일을 상소로 아뢰니 모두 정려(旌閭)할 것을 명하였다.
1월 19일 기축
이식(李植)을 대사간으로, 박종부(朴宗阜)를 헌납으로, 전익희(全益禧)를 정언으로 삼았다.
1월 22일 임진
달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원두표(元斗杓)를 형조 판서로, 이기조(李基祚)를 대사간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사간으로 삼았다.
1월 24일 갑오
상이 유림(柳琳)을 인견하고 묻기를,
"경이 통제사에서 체직되어 온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남쪽에서 무슨 들어본 일이 있었는가?"
하니, 유림이 대답하기를,
"홍희남(洪喜男)이 대마도를 왕래할 때 신이 진하(鎭下)의 사람을 보내 일본의 소식을 탐문하였더니, 먼 지방에 사는 상왜(商倭)들도 세자와 대군이 심양에 인질로 들어간 사실을 알고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자까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1월 27일 정유
승문원이 아뢰기를,
"국가가 비록 혼란한 때라도 문교(文敎)의 일은 사실 폐한 적이 없었으며 조종조 때 문교를 숭상하고 인재를 길러내는 방도도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유생에 대해 불시로 과제(課製)하는 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전강(殿講)과 같은 일은 한때의 특전에서 나온 것이고, 문신 정시(文臣庭試)·이문 정시(吏文庭試)·서당 삭제 월과(書堂朔製月課) 등의 일은 모두 인재를 육성하는 성대한 뜻인데, 변란을 치른 뒤로는 모두 폐지하고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월과(月課)로 제술하는 것도 그 이름만 있고 내실은 없어, 대부분 막바지에 이르러 갑자기 얽어내거나 간혹 남의 손으로 대작하여 책임을 메우는 등 태만한 풍조가 이루어졌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선묘조(宣廟朝)와 계해·갑자년 경에는 문관 중에 문재가 있는 자를 가려내어 괴원 제술관(槐院製述官)이라 호칭하거나 혹은 별지제교(別知製敎)라고 호칭을 붙여 수시로 제술케 하여 그 재능의 유무를 시험하였는데 그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또한 당상 당하를 막론하고 재주에 따라 널리 뽑아 아뢰어 늘 권장을 가함으로써 선조(先朝)의 인재를 양성하던 뜻을 따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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