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2권, 인조 19년 1641년 11월

싸라리리 2026. 1. 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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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계유

이후원(李厚源)을 좌부승지로, 남선(南翧)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2일 갑술

예조 판서 윤의립(尹毅立)이 파직되었다. 의립은 질자(質子)를 보내는 것을 모면하기 위하여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진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간원이 삭탈 관직하고 문외 출송할 것을 청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다가 파직만 하였다.

 

말 5백 60필을 내어 금주(錦州)로 군량을 수송하였다.

 

11월 4일 병자

남선(南銑)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11월 5일 정축

전 병사 김대건(金大乾)을 영병장(領兵將)으로 삼아 유정익(柳廷益)과 교체시켰는데, 정익이 금주위(錦州衛)에 있으면서 모친의 상사를 만났기 때문이다.

 

11월 6일 무인

팔고산(八高山)의 차인(差人) 8인이 종호(從胡) 40여 인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와서 방기(房妓)를 요구하고 사람들을 때려 상처를 입히면서 하룻밤 사이에 끝없이 재물을 우려내어 마을이 텅 비어버렸다.

 

11월 7일 기묘

광주 목사(光州牧使) 송국택(宋國澤)과 전라 병사(全羅兵使) 황집(黃緝)이 탄일(誕日) 진하 전문(陳賀箋文)에 청국의 연호를 쓰지 않아 상이 파직할 것을 명하였다.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치계하기를,
"천리 밖으로 식량을 운송하다 보면 말이 병들어 죽는 것은 형세상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가지고 운량군(運糧軍)의 죄로 삼아 갑자기 벌방(罰防)의 법을 행한다면 이 또한 불쌍한 듯하니 청컨대 각자에게 면포(綿布) 4필씩 징수하여 식량 운송하는 비용을 보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1월 8일 경진

두 박씨가 삼전도(三田渡)에 가서 비각(碑閣)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11월 9일 신사

박씨 두 사람이 청국의 명령으로 전 의주 부윤 황일호(黃一皓)를 죽였다. 일호가 의주에 있을 때 청장(淸將) 마부대(馬夫大)가 우리 나라에 와 그의 말을 본주(本州)에 놓아두고 기르다가 그 말이 병들어 죽고 그 뒤에 마장(馬將)도 우리 땅에서 병들어 들것에 들려서 나갔다가 끝내 죽자, 일호가 말을 죽이고 저주했다고 청인이 의심하였다. 그 뒤에 본주 사람 최효일(崔孝一)이 그의 처자를 싣고 중원(中原)으로 투신하여 들어가니 의주에 있는 그의 족속이 사서(私書)로 비밀리에 서로 연락하다가 그 서찰이 청인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그 글에 ‘너는 중원에 들어가 높은 벼슬에 제수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럽다.’ 하였고, 또 ‘본국에서도 중원과 비밀리에 연락하려고 한다. 삼공 육경이 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네가 죄를 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아 처음에 너의 가족을 가두었다가 즉시 도로 다 석방하여 이제까지 생존해 있으니, 이는 황 부윤(黃府尹)의 은덕이다.’ 하였다. 본주의 잠상인(潛商人) 차충량(車忠良)도 청국의 명령으로 본부(本府)에 수금하였다가 조정이 도로 석방하였고, 안주(安州)와 선천(宣川)의 잠상들도 다 청인에게 잡혔다. 이로부터 저쪽에서 우리 나라를 더욱 깊이 의심하다가 효일의 사서(私書)를 손에 넣고서는 크게 노하여 박씨 등을 보내 죄상을 조사하였다.
박씨가 당도하여 일호와 효일의 족속 10여 인 및 잠상인 등을 관소(館所)에 잡아다 놓고 일호에게 묻기를,
"효일을 쫓아가서 잡지 않아 무사히 중원으로 들어가게 한데다가 용만(龍灣)에 남아 있는 그의 친족들까지도 목숨을 보존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슨 뜻인가?"
하니, 일호가 그 대답을 매우 자상하게 하였으나 끝내 못들은 체하였다. 박씨와 정명수가 관소의 동문(東門) 밖에 나와 앉아서 대신 이하 백관을 좌우에 차례대로 세우도록 재촉하고 일호와 최효일의 족속 및 잠상인 등을 동시에 베어 죽였으며 또 백관으로 하여금 모여 그 시신을 살펴보게 하였다. 일호는 형을 받을 당시에 신색(神色)이 변치 않았으며 대궐을 향해 사배(四拜)하고 또 노모(老母)가 있는 곳을 향하여 재배한 뒤에 붓을 달라고 하여 유소(遺疏)를 썼는데, 그 소에 이르기를,
"신은 이제 죽습니다마는 신이 죽은 뒤에 나라가 장차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부단히 국력을 기르고 뒤처리 잘하는 것으로 마음을 지니소서."
하였다. 그러고는 곧 평소에 차고 다니던 검으로 주륙되니 이 소식을 들은 자로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날 음산한 바람이 사방에서 일고 해가 빛이 없었다. 처음 상이, 사문(査問)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여러 번 불쌍히 여기는 분부를 내리고 뇌물을 매우 후하게 써서 기어코 그 죽음을 용서받으려고 했으나 모면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또 정뇌경(鄭雷卿)의 사례에 따라 교살(絞殺)하게 하려고 했으나 명수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일호의 노모와 처자가 고향에 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본도(本道)로 하여금 해마다 늠료(廩料)를 지급하는 것을 상례로 삼도록 하였다. 일호는 벼슬살이를 청렴하고 신중히 하였으므로 의주 사람들이 그를 위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고 한다.

 

11월 10일 임오

박로(朴𥶇)를 형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다. 처음에 정역(鄭譯)이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접대소(接待所)에 말하기를,
"접반사(接伴使) 이경헌(李景憲)은 전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을 때 조금도 풍력(風力)이 없었다. 이번 의주 등 고을에서 처치해야 할 일은 반드시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이 사람은 체직하고 풍력이 있어 감당할 만한 자로 금부의 형관(刑官)을 겸임시켜 보내시오."
하였는데, 마침내 박로로 교체하였다.

 

이옥련(李玉連)을 수구 만호(水口萬戶)로 삼았는데, 정명수의 말에 따른 것이다.

 

11월 12일 갑신

박씨와 정명수가 전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계(李烓)와 잠상(潛商) 세 사람을 불러들여 먼저 계에게 묻기를,
"잠상을 잡은 것은 어느 달 어느 날이었는가? 잡을 때의 곡절을 모두 다 말하라."
하자, 계가 매우 자세히 대답하니, 박씨들이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죄인을 잡은 자로서 별로 물을 만한 일이 없다."
하고, 그 다음 잠상인들에게 물으니, 그 대답이 계가 한 말과 똑같으므로 박씨들이 그들을 나가게 하였다. 이어 형관(刑官)을 불러 비밀히 말하기를,
"이계가 잠상인을 잡아 가벼운 벌만 주었다가 우리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가두었으니, 계의 죄가 큽니다. 그를 구류하여 놓고 기다리시오."
하였다. 영의정 이성구(李聖求)가 관소에서 상마연(上馬宴)을 거행하면서 명수에게 말하기를,
"이계가 낙상(落傷)으로 인하여 병세가 중한데 이제 만약 오랫동안 옥중에 구류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니, 어떻게 조처해야겠소?"
하니, 명수가 말하기를,
"왕복하는 사이에 날짜가 반드시 많이 걸릴 것이니, 그의 집에 구금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명수가 계의 금은(金銀)을 많이 받았으므로 상당히 감싸주는 기색이 있었다.

 

김광현(金光炫)을 부제학으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간으로, 박종부(朴宗阜)를 이조 좌랑으로, 김체건(金體乾)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11월 13일 을유

금성과 화성 두 별이 저성(氐星)에서 합쳐졌다.

 

상이 유의(襦衣)를 상번(上番)한 군사 중에 옷이 얇은 자에게 나눠줄 것을 명하였다.

 

11월 14일 병술

영병 대장(領兵大將) 유정익(柳廷益)이 치계하였다.
"송산성(松山城) 밖에 남아 있던 원병(援兵)들이 보병은 선두에 서고 기병은 그 뒤를 따라 도망갔는데, 청병(淸兵)이 그 사실을 알고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한병(漢兵) 1천 4백여 인을 죽였으며 청장(淸將) 한 사람과 군병들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항복한 한인의 말이 ‘홍군문(洪軍門)과 영원(寧遠) 주도야(朱道爺), 조(曹)·왕(王) 두 총병(摠兵), 서(徐)·최(崔)·유(劉)·장(蔣) 부총병 등이 다 항복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달 1일에 한인 10여 기(騎)가 성안에서 나와 청국의 기병과 교전할 때 우리 나라의 포수 김봉(金鳳)이 실수로 청인의 한쪽 팔을 맞추었는데, 우진왕(右眞王)이 김봉을 죽이려고 하므로 형부(刑部) 관원들이 그의 무죄를 극력 말하여 채찍으로 결죄(決罪)하고 놓아줬습니다. 그리고 해주위(海州衛)에 있는 쌀을 운송하는 일을 용장(龍將)에게 말하니, 대답하기를 ‘해주의 쌀은 곧 조선의 쌀이니 본국에서 인마(人馬)를 조발하여 운송하라.’ 하였습니다."

 

11월 15일 정해

밤에 짙은 안개가 끼었다.

 

11월 16일 무자

짙은 안개가 끼었다.

 

11월 18일 경인

짙은 안개가 끼었다.

 

11월 20일 임진

이유성(李惟聖)을 동부승지로, 이행원(李行源)·유준창(柳俊昌)을 지평으로 삼았다.

 

11월 22일 갑오

전라도에서 황새가 남북 두 부대로 나뉘어 한참 동안 서로 싸웠는데, 남쪽이 이기지 못했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11월 23일 을미

한선(漢船) 한 척이 전라도 영광(靈光) 땅의 임치도(臨淄島)에 표류해 왔는데, 수수(水手) 여섯 사람만 겨우 살아 있고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붓을 요구하여 글자를 써서 보이기를 ‘살아 돌아가게 해주길 간절히 빈다.’ 했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일은 심양이 모르는 것이 없으니 이번에 표류해 온 이 사람들을 덮어둘 수는 없습니다. 본도로 하여금 의복을 마련해 주게 하고 따로 차원(差員)을 정해 심양으로 압송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24일 병신

밤에 짙은 안개가 끼었다.

 

11월 25일 정유

밤에 짙은 안개가 끼었다.

 

소 1백 69마리를 가지고 해주(海州)의 식량을 금주(錦州)의 전쟁터로 실어보냈다.

 

11월 26일 무술

밤에 짙은 안개가 끼었다.

 

박씨 등이 안주(安州)에 도착하여 국경을 넘어가 삼을 캔 사람을 국경에서 죽여 효시(梟示)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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