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2권, 인조 19년 1641년 12월

싸라리리 2026. 1. 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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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임인

밤에 짙은 안개가 끼었다.

 

이명한(李明漢)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이 당시 관각(館閣)의 전최(殿最) 시기가 이미 다가왔는데도 문형(文衡)이 오랫동안 비어 있었으므로 대신이 계청하여 차출하였다. 전부터 의천(擬薦)하는 법은, 전 대제학이 그 의천을 맡고 그가 만약 유고하면 일찍이 그 자리를 거친 자가 그 다음으로 맡았는데, 전 대제학 이식(李植)은 고향에 내려가 있고 증임(曾任) 이경석(李景奭)은 심양에 있었으므로 조정이 최명길(崔鳴吉)에게 순차를 건너뛰어 의망하게 하니, 명길이 여러 번 사양하다가 되지 않자 이항복(李恒福)의 고사에 의해 의천하였다. 대체로 권점(圈點)을 받은 자는 두 사람이었는데 이식은 5점이고 명한은 6점을 받아 제수되었다.

 

12월 2일 계묘

호조가 아뢰기를,
"부산(釜山)의 개시 사목(開市事目)은 지극히 엄중하니 비밀 무역을 금지하고 있는 것은 구실을 걷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근래에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아 간세한 모리배들이 어두운 밤에 불법을 자행하고 마음대로 출입하니, 이러한데도 금하지 않으면 뒤폐단을 막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금법을 범한 자는 동래 부사로 하여금 적발하여 구금한 뒤에 계문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3일 갑진

유성이 정성(井星)으로 들어갔다.

 

12월 5일 병오

도승지 이명한(李明漢)이, 문형(文衡)을 겸임하면 벼슬과 품계가 서로 맞지 않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해조에 계하하였다. 해조의 복계에 따라 그대로 겸임하도록 허락하였다. 도승지가 문형을 겸임한 것은 명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2월 8일 기유

박씨 등이 의주에 돌아와 최효일(崔孝一)의 족속 12인을 죽이고 떠났다.

 

12월 9일 경술

허적(許積)을 올려 제수하여 의주 부윤(義州府尹) 겸 관운향사(管運餉使)로 삼았다. 허적은 일찍이 정태화(鄭太和)의 추천으로 평안 도사(平安都事)가 되어 금주의 군량을 감독해 운송하였는데, 유능하다는 이름이 나 관향사의 종사관으로 옮겨 제수되어 오랫동안 서로(西路)에 있으면서 청인과 서로 뜻이 맞았기 때문에 발탁하여 이 벼슬을 제수한 것이다.

 

12월 11일 임자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정치화(鄭致和)·윤강(尹絳)·정유성(鄭維城)은 어사(御史)의 행장을 꾸리도록 하라."

 

12월 12일 계축

전라도의 전주(全州)·여산(礪山)·임피(臨陂)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12월 13일 갑인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부제학 김광현(金光炫)이 부름을 받고 오지 않았다. 광현은 고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아들인데 상용이 병자년 난리 때 강도(江都)에서 절사하였기 때문에 광현이 벼슬길에 뜻이 없어 매번 내직(內職)을 사양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또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12월 14일 을묘

유성이 문창성(文昌星) 아래에서 나와 북하성(北河星) 위로 들어갔다.

 

12월 16일 정사

청역(淸譯) 변란(卞蘭) 등 세 사람이 청주(淸主)의 명이라고 하면서 대어(大魚) 2마리와 소주(燒酒) 2병을 가지고 의주로 와서 전달하였다.

 

12월 19일 경신

왈합 부락(曰哈部落)이 청국으로 투항해 들어갔는데, 그 땅은 심양과의 거리가 몇 개월 걸리는 곳이라고 한다.

 

12월 20일 신유

금성과 수성 두 별이 두성(斗星)에서 합쳐졌다.

 

이명한(李明漢)을 대사헌으로, 심연(沈演)을 대사간으로, 유림(柳琳)을 통제사로, 서경우(徐景雨)를 도승지로, 김육(金堉)을 부제학으로, 이시백(李時白)을 총융사로, 정지화(鄭知和)를 이조 정랑으로, 박의(朴漪)·김시번(金始蕃)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여이징(呂爾徵)이 육진(六鎭)에 저축해 둔 곡식 4백 50석을 거두어 경하창 부락(慶河昌部落)에 나누어 주었는데, 청국의 요구에 의한 것이다.

 

12월 21일 임술

경상도 칠곡 부사(漆谷府使) 임타(林㙐)가 본도 감사에게 보고하기를,
"본부(本府)는 건국한 뒤 수백 년 뒤에 창설되어 사환(使喚)하는 관속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해 정사를 시행하려 해도 전혀 손을 쓸 도리가 없습니다. 또 첨방군(添防軍) 열 사람으로는 여러 곳의 수직(守直) 임무에 대비하기 부족하여 성문이나 창고의 수비가 다 허술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부는 일찍이 성주(星州)의 속현(屬縣)으로서 유치해 둔 창고의 곡식 중에 손실된 수량이 상당히 많은데다 통영(統營)에서 저축해 둔 곡식의 손실된 수량은 햇수가 오래되어 어디 징수할 데가 없이 2백 80여 석에 이르니, 장래의 걱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이 무슨 허물이며 무슨 죄이겠습니까. 이것은 달리 변통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 성의 형세는 한 도에 으뜸가는 곳으로서 비좁은 금오(金烏)나 물이 없는 천생(天生)과는 다르니, 만약 성을 지킬 일이 있다면 이곳을 놓아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저 부족한 것은 군병과 기계입니다. 만약 동래(東萊)의 동철(銅鐵)을 가져온다면 군기(軍器)를 주조해 만들 수 있으며, 성첩(城堞)은 1천 7백 57개소인데 소속된 군병은 1천 4백 6인뿐이니, 만약 이 지방 사람으로서 여러 아문에 투속된 자를 본성에 전속하도록 허락한다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감사가 이것을 치계하였다. 그 일이 비국에 계하되었는데, 비국이 복계(覆啓)하기를,
"새로 창설한 지역이라서 온갖 일이 형편없으니, 만약 깊이 유념하지 않으면 장차 도로 폐지될 것입니다. 분방(分防)하는 군사를 적절히 헤아려 더 주고, 동래의 동철도 해도로 하여금 참작하여 보내주도록 하되, 통영의 곡식은 쉽게 탕척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전부터 맡아 지키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통영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이 지방 사람으로서 다른 곳에 가 소속된 자는 본도로 하여금 이름을 낱낱이 대조하여 문서를 만들어 그것을 참고로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통영의 손실된 곡식은 특명으로 탕척하여 민심을 위로하게 하고 동철은 동래로 하여금 충분한 수량을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12월 22일 계해

달이 오른쪽 각성(角星)을 범하였다.

 

배종 재신(陪從宰臣)이 치계하였다.
"정명수가 용골대의 뜻으로 세자의 관소에 와서 말하기를 ‘속담에 「나그네살이 3년이면 생업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제 세자가 이곳에 들어온 지가 이미 5년이 되었으니, 어찌 생업이 이루어진 것이 없겠는가. 제고산(諸高山)과 제왕(諸王)들도 다 자기의 힘으로 먹고 있는데 세자·대군·재신(宰臣)·질자(質子) 등에게 어찌 살아갈 식량을 늘 줄 수가 있겠는가. 경작할 땅을 줄 터이니 내년부터 각자 농사를 지어 먹도록 하라.’ 하기에 신들이 세자 하령(下令)의 뜻으로 대답하기를 ‘상하 여러 사람들이 오늘까지 목숨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다 황제의 은덕이긴 하나 이제 우리에게 스스로 농사를 짓게 하니, 황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우리 나라의 물력(物力)은 전후에 걸쳐 군병을 조발하고 군량을 운송하는 데에서 이미 바닥이 났으니, 양서(兩西)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온갖 필요한 물력은 삼남(三南)에서 우려내는데 삼남의 민력도 이미 고갈되었다. 그런데 이제 또 경작하는 조처가 있다면 백성이 어떻게 지탱하고 나라는 어떻게 보존하겠는가. 그리고 토산품이 각기 다르고 경작하는 작업도 같지 않으니, 농사지을 일꾼을 마련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농사를 지어 그 쌀을 먹게 될지도 자신할 수 없다.’ 하니, 정역이 한참 동안 말이 없이 깊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금 후에 일어나서 나갔습니다. 그가 이튿날 다시 와서 말하기를 ‘말을 기르고 풀을 베고 경작할 장소로 이미 세 군데를 정해 두었다. 한인(漢人)은 농사일에 익숙하고 그 품삯도 매우 적은데 어찌 그들을 사서 데려다가 농사를 짓게 하려고 하지 않는가.’ 하기에 신들이 품삯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으로 대답하고 재삼 사리를 따져 말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을묘일에 용골대(龍骨大)·피패(皮牌)·가린(加隣)·어사거(於士巨)·노씨(盧氏) 등이 와서 세자에게 고하기를 ‘어영군(御營軍)들이 제왕의 말 앞에서 하소연하기를 「산성의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사는 다 들여 보내지 않았으니 우리들은 사실 그 군사도 아니고 가지고 온 식량도 바닥이 나서 오래 머무르기 어려운 형편이다.」 하였다. 어찌 어영군을 들여 보내지 않았는가? 그전 부대는 상당히 정예병이었는데 이번에 그전과 다른 것은 어째서인가?’ 하므로 세자가 말하기를 ‘인심이 선하지 못하여 이러한 호소를 한 것이다. 산성에 들어간 뒤에 간혹 미처 들어가지 못한 자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감히 이러한 말을 하였으나 어영군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은 오래 머무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고 있으니 어찌 마음을 다해 기술을 발휘하려고 하겠는가.’ 하니, 용장이 그렇겠다고 하고 떠났습니다. 조금 후에 다시 와서 말하기를 ‘군사들의 마음이 저러한데 억지로 머물려 두게 하면 변을 일으킬 우려가 없지 않으니, 다른 군사들로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 하므로 세자가 말하기를 ‘12개월만에 교체하는 것이 이미 정례로 되어 있는데 이제 만약 이를 변경하여 군대 출발 시기를 앞당겨 정한다면 조발하여 보낼 때 형세가 반드시 곤궁할 것이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경포수(京砲手)를 조발하여 보내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니, 세자가 극력 말하여 거절하였습니다. 용장이 말하기를 ‘여러 말 할 것 없다. 다만 정예하고 건장한 자들을 가려 즉시 보내도록 하라.’ 하여, 세자가 화병(火兵)을 줄여서 정하자는 뜻으로 그에게 말하였으나 그 또한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12월 23일 갑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유성이 고루성(庫樓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비국이 아뢰기를,
"근래에 국가가 계속 전쟁을 하고 있는데다 기근까지 겹쳐 곡식 바칠 백성을 모집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으므로 곡식을 바친 자에게 관직을 제수하라는 하교가 전후에 걸쳐 계속 내렸는데도 해조가 즉시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곡식을 바치도록 권장하는 방도를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헤아려 더 많은 사람을 임용하여 주의를 끄는 소지로 삼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으로 또 곡식을 모아들일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5일 병인

전라도 능주(綾州) 땅에 쌓인 눈 속에서 죽순이 자라나 길이가 한 길 남짓하였고 잎이 난 것도 있었다.

 

심대부(沈大孚)를 이조 정랑으로, 정태제(鄭泰齊)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12월 26일 정묘

이경증(李景曾)을 지경연사로, 이명한(李明漢)을 동지 경연사로, 박종부(朴宗阜)를 부교리로, 김홍욱(金弘郁)을 부수찬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영릉 참봉(英陵參奉)으로 삼았다. 중보는 홍명구(洪命耉)의 아들인데 상이 일찍이 연석에서 명구를 추념(追念)하여 애도하길 마지않다가 연신(筵臣)에게 물어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녹용할 것을 명하였다.

 

12월 29일 경오

대신이 금주(錦州)에 군량을 운송해 가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군전(軍前)으로 곡식을 바친 자에 대해 서얼은 허통하고 범죄자는 죄를 면해주기 위하여 아뢰기를,
"서얼을 허통하는 문제는 국법이 매우 엄중한데 한번 변란을 치른 뒤로 기강이 해이해져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이 조금도 구애를 받는 일이 없으니, 일이 매우 한심합니다. 돌아오는 임오년부터는 해조로 하여금 과조(科條)를 엄격히 세워 서얼로서 공문(公文)이 없는 자는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말고, 이전에 공문이 없이 과거에 오르고 벼슬길에 들어간 자는 비록 과적(科籍)을 삭제하고 벼슬을 삭탈하지는 않더라도 모두 사목(事目)에 따라 곡식을 바쳐 증빙하여 상고할 수 있는 소지로 삼게 하며, 만일 불법으로 그대로 있다가 발각된 자는 중죄로 논하게 하소서.
아울러 납속 사목(納粟事目)을 정하되, 양첩(良妾)의 아들은 쌀 2석, 천첩(賤妾)의 아들은 3석, 잡범 죄인으로서 참(斬)은 12석, 교(絞)는 10석, 유 삼천리(流三千里)는 4석, 도 삼년(徒三年)은 3석, 도 이년반(徒二年半)은 2석반, 도 이년(徒二年)은 2석, 도 일년반(徒一年半)은 1석반, 도 일년(徒一年)은 1석, 기신 충군(己身充軍)은 4석, 한년 충군(限年充軍)은 2석으로 하고, 또 관직을 제수하는 규례는 평상시의 규례에 따라 시행하되 군전(軍前)으로 바친 것은 1석을 평상시에 바친 10석과 맞먹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전에 독보(獨步)021)  가 바닷길로 돌아올 때에 천조(天朝)의 도독부(都督府)가 자문(咨文)을 주어 보내고, 우리 나라의 표류한 군졸을 아울러 풀어 보냈다. 그 자문에 이르기를,
"흠명 독사 태자 태보 병부 상서(欽命督師太子太保兵部尙書) 홍(洪), 흠차 순무 요동 우첨도어사(欽差巡撫遼東右僉都御史) 구(丘), 흠차 순무 등래 우부도어사(欽差巡撫登萊右副都御史) 증(曾)은 황상(皇上)의 명지(明旨)에 따라 포로를 돌려보내 황상의 어진 덕을 넓히는 일로 자문을 보냅니다.
저번에 역노(逆奴)가 제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함부로 날뛰었는데, 귀국의 두세 좌우 근신이 그에 대한 방어를 신중히 하지 않아 협박을 감행하는 결과를 빚었으나 우리 성스럽고 용맹하고 어질고 밝으신 황상께서 당신들이 평소에 매우 절개가 있고 공순했던 것을 감안하셨기 때문에 그 즉시 귀국에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지난해에 노(奴)를 제어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하여 이 때문에 해상의 전투가 있었는데 뜻밖에 순풍을 타고 멀리 나가 적의 배를 불사르고 포로를 잡았으며 그중에는 조선 사람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천자께서는 당신들 나라의 백성을 생각하여 이처럼 살리기를 좋아하신 나머지 주륙을 용서하셨으며, 또 우리들 변리(邊吏)를 신칙하시어 후히 보살펴 주어 우리 땅에서 굶주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남관(南冠)022)  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시어 풀어주라는 성지를 내리고 본원(本院)으로 하여금 군사를 신칙하여 배를 손보아 그들을 호위해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하셨으니, 요임금의 명철하심과 순임금의 인애로움으로서도 그 이상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본원에서는 삼가 성천자의 마음을 받들어 배에 들어가는 비용과 파도의 위험을 꺼리지 않고 이들을 인도해 국경을 내보내어 신령하고 용감하여 살생하지 않으시는 우리 황상의 은덕을 선포함과 동시에 조공을 들여보내지 않는 이유를 따져 묻습니다. 당신 나라에서는 마땅히 국가가 3백 년 동안 보살펴 준 큰 은덕을 생각해야 할 것이며 임진난 때 부산(釜山)과 평양(平壤)의 작전만 보더라도 당신 나라의 모든 백성이 그 누가 우리 신묘(神廟)023)  께서 재생해 주신 은덕을 받지 않았습니까. 이는 참으로 천만년이 지나더라도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역(逆)을 버리고 순을 따르며 오명을 씻고 충성을 바쳐서 번방(藩邦)을 잘 지키고 선업(先業)을 대대로 지킨다면 성천자께서 새로운 마음으로 장려하고 우대하며 노얼(奴孽)을 섬멸하여 국운이 영원히 이어가게 하시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귀국은 예의와 슬기로움을 스스로 표방해온 터이니, 진정 본원의 말뜻을 잘 알 줄 압니다.
이 때문에 귀국에 자문을 보내니 잘 살펴 수납하길 바라며 아울러 익히 헤아려 보고 본원에 회신을 보내 그에 따라 황상께 아뢸 수 있도록 하십시오. 이상과 같이 이자합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게첩(揭帖)으로 회답하기를,
"소국이 신명(神明)에 죄를 져 스스로 하늘과의 관계를 끊고서 부모의 나라에 사정을 통하지 못한 지가 이제 몇 년이 지났는데, 먼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한밤중에 잠 못 이루며 가슴을 치곤 하였습니다. 이번에 자유(咨諭)를 받고서 우러러 황상께서 시종 사랑하고 돌보시는 뜻이 한 가정의 부자간이나 다름이 없음을 알고 종이를 받들고 비통에 잠기니, 곡성과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나왔습니다. 소국의 포로병에 대해서도 아울러 주륙을 면제하고 도리어 후한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고국의 땅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셨으니, 천지의 인애로움이 포용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일월의 광명이 어느 구석 비추지 않는 데가 없으므로 부끄럽고 두려우며 감격하여 몸둘 곳이 없습니다. 소국은 비록 불초하여 오늘의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으나 구구한 본심은 하늘의 일월성신이 굽어보고 있으니, 어찌 여러 말을 한 뒤에야 그 진정을 다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 도마 위의 고기 신세가 되어 걸핏하면 첩자의 탐지가 경계되기 때문에 하많은 깊은 사정은 전부 돌아가는 인편에 부칩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회신을 봉함하자니 간장이 찢어질 듯합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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