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6권, 인조 23년 1645년 11월

싸라리리 2026. 1. 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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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기유

지진이 있었다. 큰 별이 천가성(天街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떨어졌는데, 그 빛이 땅을 비추었으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황해도 관찰사 정유성(鄭維城)이 치계하였다.
"도내의 진결(陳結)과 재결(災結)을 다시 살펴보니, 올해 조세를 내야 할 전지는 밭이 3만 7백 84결이고, 논이 5천 6백 20결입니다."

 

11월 2일 경술

중전이 경덕궁으로 옮겨갔다. 세자가 돈화문 밖에서 전송하고, 질병으로 인해서 따라가지 못하였다. 이때 예조가 의정한 이어 절목(移御節目)에는 세자가 궐문에서 전송하고 이어서 배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내전의 거둥에 세자가 배행하는 것이 전례가 있는가?"
하자, 회계하기를,
"내전이 거처를 옮기는 일은 전일에 없었던 일로, 세자가 배행하는 절목은 예조가 필시 인정과 예의를 참작해서 의정하였을 것입니다. 전례가 있는지의 여부는 상고할 수 없습니다."
하니, 또 전례가 없는 듯하다고 하교하였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세자께서 비록 배행은 못하더라도 당일에 친히 문안을 나아가는 일은 예의상 폐지할 수 없습니다."
하자, 또 하교하기를,
"세자가 요즘 감기가 들어서 갔다가 오는 사이에 더칠 우려가 있다."
하였다. 이때 세자의 병이 갈수록 깊어졌기 때문에 상의 하교가 이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뭇사람들은 모두 서운해 하였다.

 

전남 감사 윤명은(尹鳴殷)이 치계하였다.
"별시 무과 초시를 순천부(順天府)에서 설행하였는데, 낙방한 응시자들이 밤을 틈타서 시험장의 집을 불태웠습니다."

 

삼남(三南)에 하유하여 배 30척을 건조하여 보충해 운송할 때 쓸 수 있도록 하게 하였는데, 해변의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갈 생각을 품었다.

 

11월 3일 신해

예조가 아뢰기를,
"서울에 교관이 4명만 있다 보니 두루 가르칠 수 없어서 외진 곳에 살고 있는 어린이는 매번 스승이 없어서 걱정하는 형편입니다. 전례에 사교관(私敎官)과 사훈도(私訓導)를 두어서 곳곳에서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전례에 따라 오부(五部)에 각기 한두 명을 둔 다음, 생원·진사·유학을 막론하고 품행이 좋고 문장에 능한 사람을 선발하여 분교관(分敎官)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서울 내외의 어린이들이 어느 곳에서나 배울 수 있도록 하되, 반드시 《소학》과 《대학》 등의 책을 먼저 읽어서 효제(孝悌)와 예양(禮讓)의 도리를 익힌 뒤에 경사(經史) 자집(子集)을 배우게 하소서. 그리고 매월 고강(考講) 때에는 분교관 역시 어린이들을 거느리고 와서 고강을 받되, 성취된 것이 많은 자는 장부에 적어 놓았다가 교관의 결원이 있을 경우에는 실교관(實敎官)으로 승진시키고 결원이 없을 경우에는 다른 보직으로 별도로 서용하여 처음 입사(入仕)하는 길로 삼도록 하소서. 그리고 군직 체아(軍職遞兒)를 별도로 두어 등급의 고하를 매겨 돌아가며 요(料)를 주되, 그 가운데 명실이 상부하지 못하거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는 도태시키소서. 그러면 바른 길로 교양하여 인재를 성취시키는 도리에 있어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증설하는 것이 편한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물어서 정하라."
하였다. 이에 우의정 이경석이 아뢰기를,
"사교관 4명만을 4부(部)에 두고 중부는 각자 가까운 곳에 가서 배우도록 하고, 군직도 따로 설치할 것 없이 해조에서 항시 쓰는 사용(司勇) 한 자리를 돌아가며 요를 주는 자리로 삼으며, 교도한 지 오래되고 공이 현저한 자는 실교관으로 승급시키거나 아니면 다른 관직에 서용하며, 반드시 《소학》과 《대학》으로 차례차례 강독하도록 하소서. 또 사학으로 하여금 차관(差官)을 나누어 보내어 학생들을 분담하여 가르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김육이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이 의논을 주도하였다.

 

이때 왕세자가 앓아 오던 감기가 오랫동안 낫지 않아서 여러 의관이 약 처방을 의논하였으나 모두 효과가 없자, 상이 이형익(李馨益)에게 진맥하라고 명하였는데, 형익이 아뢰기를,
"이 병은 사질(邪疾)이므로 사기를 다스리는 혈(穴)에다 침을 놓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세자에게 명하여 형익에게 침을 맞으라고 하자, 세자가 거절하며 아뢰기를,
"이것은 감기입니다. 이것이 어찌 사질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다시 강권하였으나, 세자가 그것이 아니라고 극력 진술하고 끝까지 침을 맞지 않았는데, 얼마 안 가서 바로 나았다.

 

11월 4일 임자

이식(李植)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얕은 소견의 망령된 논의가 시의(時宜)에 맞지 않은데다 법규를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여 많은 선비들의 의혹과 비방만 불러일으켰습니다. 신의 본직과 겸대하고 있는 문형의 직을 해직시켜서 수사(修史)에나 전력케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형조 판서 오준(吳竣)이 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오준이, 이식이 입대한 자리에서 ‘정2품 가운데 인재가 아주 적어서 그저께 형조 판서의 의망에도 구차스러움을 면치 못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는 것을 듣고, 자신이 인망에 차지 않았음을 알고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한 것인데, 얼마 후에 다시 출사하였다.

 

11월 5일 계축

왕세자 입학 때의 사부 이하 관원 및 집사를 맡았던 관학 유생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사부와 빈객에게는 각각 호피를, 대제학에게는 숙마를 내리고, 보덕에게는 가자하였다가 얼마 뒤에 숙마를 내렸으며, 필선에게는 아마를, 명을 받든 유생에게는 《논어》와 《맹자》 중 한 질을, 향로와 향을 받든 유생에게는 《중용》과 《대학》 중 한 질을, 그 나머지 집사 유생에게는 종이와 붓을 내리고, 성균관 하인에게는 해조로 하여금 쌀과 베를 상으로 주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농장을 설치하여 백성에게 고통을 준 것은 바로 혼조 때 문란한 정치의 일단입니다. 반정 초기에 이러한 폐단을 통절히 혁파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좋아하였는데, 이제 얼마 안 되어 여러 궁가와 각 아문 및 권세가들이 다시 지난날의 폐습을 되밟아 둔전을 널리 설치하여, 오늘날에 와서 극에 달하였습니다. 관리도 감히 어쩌지 못하고 요역도 감히 매기지 못하는가 하면, 군액이 이 때문에 채우기 어렵고 세입이 이 때문에 날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더구나 민간의 전지를 차지하여 의식의 근원을 빼앗으므로 원망이 들끓어서 듣기에 놀랍기만 합니다. 이것이 어찌 성스러운 시대의 큰 허물이 아니겠습니까. 설치한 지가 이미 오래된 것은 다 혁파하지 못하더라도 정축년243)   이후에 새로 설치한 것은 궁가나 세도가, 각 아문을 막론하고 모두 혁파하고, 혁파하지 않고 그대로 둔 각 아문의 관향 둔전(管餉屯田)도 감관(監官)을 보내지 말고 본읍으로 하여금 그 해 거두어들인 수량을 관리하도록 하되, 평년의 수확으로 식례를 삼고 크게 풍년들거나 흉년든 경우에는 적당히 올리거나 내리게 하소서. 이런 내용으로 모든 도에 하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난리 후에 설치한 둔전은 이미 조사 처리하였으니, 아직은 그냥 두라."
하였다.

 

11월 6일 갑인

별시의 전시(殿試)를 설행하여 문과에 권오(權悟) 등 15인을, 무과에 홍조(洪照) 등 1백 인을 뽑았다.

 

부호군 김집(金集)이 소를 올려 소명을 거절하면서 아뢰기를,
"신의 금년 나이는 이미 72세입니다. 몸에 고질이 들어서 힘을 펼 수 없는 형편은 이미 앞뒤의 사직소에서 다 밝혔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세자가 정위치에 서자 사방이 목을 빼고 기대하는만큼, 덕을 기르고 학문을 닦는 일은 하루가 급합니다. 그래서 서연(書筵)의 빈객들이 이미 인망이 극도로 높은 사람들인데도 또 초야의 사람을 불러다 교도에 도움을 주고자 하시니, 그 뜻이 매우 훌륭합니다. 단지 아쉬운 것은 신이 본래 걸맞지 않은 사람으로서 높은 은명에 끼어든 것입니다. 종전에 감히 무릅쓰고 나아가지 못한 것도 실은 거친 학문이 스스로 돌이켜보아도 보잘것없고 또 늙은 나이에 정신이 이미 흐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에 내리신 임무는 종전의 차출에 비하여 더더욱 가당치 않은데, 어떻게 구차스레 영광을 탐내어, 살아 나가서 죽어 돌아오는 것을 공손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른바 ‘오늘 배우고 아니 배운 것에 뒷날의 치란이 달려 있다.’라는 말을 세자를 위하여 올립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나니 너무도 서운하다. 그대는 사양하지만 말고 속히 올라와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11월 8일 병진

내전이 경덕궁으로 옮겨 거처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세자의 병이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뵈러 가지 못하고 내관과 시강원의 관원을 보내어 문안하였는데, 상이 하교하였다.
"세자를 대신하여 내관과 시강원의 관원이 날마다 경덕궁에 간다고 하는데, 역마를 공급하는 데에 따른 폐단이 있을 것이다. 시강원의 관원은 사흘에 한 번씩 가도록 하라."

 

전 지중추부사 조익(趙翼)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종묘 사직의 장래를 깊이 생각하여 위로 하늘의 뜻에 따라 훌륭하고 덕 있는 이를 선발하여 세자의 자리에 바로 앉혔습니다. 이에 왕세자가 어질다는 소문이 멀리 전파되어 온 백성의 마음이 왕세자에게로 쏠리고 있으니, 이야말로 어찌 동방이 태평해질 기반이자 국가 만세의 무궁한 복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왕세자께서 이미 세자의 자리에 앉은 이상, 성현의 학문을 강마하여 심지(心志)와 사위(事爲)를 한결같이 예전의 제왕처럼 하게 하여야 하니,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삼가 경전에 실려 있는 성인이 말씀하신 학문하는 방법을 상고하니, 순(舜)과 우(禹)가 제왕의 자리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말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하고 한결같아야만 참으로 그 중도를 잡으리라.’는 말씀이 가장 먼저 나오는데, 뭇 성현의 학문이 다 여기에 근원을 두었습니다. 대저 한 사람의 마음에는 인심도 있고 도심도 있는데, 도심은 성명(性命)에 근원을 두었으므로 발함에 의리의 바름이 되고, 인심은 형기(形氣)에 근본을 두었으므로 발함에 한 몸의 사사로움이 되니, 도심을 따르는 자는 착한 사람이 되고 인심을 따르는 자는 보통 사람이 됩니다. 여기에서 정(精)이란 이 둘 사이를 살펴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한결같음이란 의리의 정함에 순수하여 간단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도심이 늘상 마음을 주도하게 되어서 거기에서 발휘되는 언행과 시행하는 사업이 모두 의리의 바름에 일치하고 인심이 발하는 것도 제재를 받게 되니, 이른바 ‘참으로 그 중도를 잡으리라.’라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저 한 사람의 마음은 착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되는데, 만약 이 점에 대해 다스려 나가지 않고 희미한 도심은 희미한 대로, 위태로운 인심은 위태로운 대로 그냥 방치하여 둔다면 사람마다 다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서 악인이 되고 맙니다. 때문에 성인이 이 점에 대해 방도를 만들어서 다스렸으니 ‘정하고 한결같이 하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둘에 대한 좋음과 나쁨의 나뉨을 알고 나서 다시 인심을 제재하고 도심을 길러 희미한 도심을 일으켜 세워 주도하게 하고, 위태로운 인심을 억눌러서 지시에 따르게 해야 하는데, 이를 제대로 다하는 자는 성인이 되고 이를 지키는 자는 현인이 됩니다. 여기에서 인도(人道)가 확립되어 천지(天地)의 도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후세의 성현 공부에 있어서 공자의 박문 약례(博文約禮), 증자의 격치 성정(格致誠正), 자사·맹자의 명선 성신(明善誠身), 정자·주자의 이른바 거경 궁리(居敬窮理)도 그 요점은 모두 인심을 억제하고 도심을 확립시키는 것이고, 그 일은 모두 정하고 한결같은 두 단서에 대한 공부입니다.
이른바 성현의 뜻으로 나의 뜻을 삼는다는 것은, 천하의 모든 사업은 뜻을 세우는 일이 우선이 되는데, 신하로서 말한다면 도덕에 뜻을 두는 자도 있고 공명에 뜻을 두는 자도 있고 부귀에 뜻을 두는 자도 있으며, 임금으로서 말한다면 왕도 정치에 뜻을 두는 자도 있고 패도 정치에 뜻을 두는 자도 있고 욕망 추구에 뜻을 두는 자도 있으니, 인품의 높고 낮음과 사업의 높고 낮음은 모두 뜻을 말미암는 것입니다.
대저 성현은 사람으로서의 최상이고 성현의 공부는 사업으로서의 최상이며, 성현의 정치는 정치로서의 최상입니다. 이것이 어찌 우주 사이에서 더없이 바르고 더없이 크며 더없이 순수하고 더없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밖에는 모두가 지혜와 힘의 작용이지, 의리의 바름은 아니어서 그 가운데 수준이 높다고 하는 자는 오패(五伯)처럼 명분만 빌리고 수준이 낮은 자는 사심만 따르고 의리는 돌아보지 않으며, 심지어는 음란 방탕한 길로 끝없이 빠져들어 사람의 이성을 몽땅 잃어버리는 자도 많습니다.
신이 여론을 듣건대, 왕세자께서는 천품이 순미하여 고명하고 활달하기가 그지 없어서 다른 나라까지도 심복한다고 하니, 이는 참으로 종사와 생민의 복입니다. 그러나 신은 세자께서 성현의 학문에 있어서 혹시라도 깊이 탐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성현의 학문은 요점을 들어 말하면, 유정 유일(惟精惟一), 박문 약례(博文約禮), 격치 성정(格致誠正), 명선 성신(明善誠身) 등의 말이 참으로 그 요점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세자께서 깊은 궁중에 들어가 거처하는만큼 문안드리고 시선(視膳)하는 일 이외에는 이목을 번거롭히는 일이나 집무에 시달리는 일은 없을 것이니, 이때가 바로 정신을 쏟아 학문을 강마할 때입니다. 만약 이때 성현의 학문을 제대로 강마하여 성현의 심술(心術) 바탕을 터득하지 않고 그럭저럭 시일만 보내고 만다면, 어찌 너무도 안타깝고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미력한 신의 어리석은 이 뜻을 가지고 깊이 권면하소서. 그리고 또 춘방(春坊)의 진강관(進講官)도 극히 정선하되, 관직이나 품계의 고하 및 초야의 사람을 상관하지 말고 참으로 경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취하여다 강관에 임명하여 아침 저녁으로 더불어 학문을 강마하기를 마치 여염집 선비들이 친구끼리 모여 앉아서 강습하듯이 하소서. 그러면 반드시 도움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세자 같이 남달리 총명한 자질을 가지고 참으로 성심으로 탐구한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이 계도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깨닫는 곳이 많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동궁에게만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도 뜻을 더 기울이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학문 강마에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좋은 정치 구현에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정력을 쏟은 지도 오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치에 나타나는 효과로 볼 때는 전하의 학문 강마가 혹시라도 옛 성현들이 학문을 강마하던 법도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염려되고, 전하께서 좋은 정치를 추구하여 정력을 쏟는 것이 요령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참으로 특별히 분발하시어 집무를 보는 여가에 성현의 교훈을 되풀이하여 음미하고 그 의의가 무엇인지를 궁구하되, 성현이 나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믿으소서. 그리하여 어두운 방이나 어두운 구석과 같이 혼자서 방심할 수 있는 곳에서부터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즈음과 명령을 내리고 지시를 하는 사이에까지 모두 한결같이 경전의 취지로 법도를 삼으소서. 그러면 장차 성상의 덕이 날로 높아지고 성상의 정치가 날로 새로워져서 조정의 풍습이나 여염의 기상이 모두 저절로 크게 호전되어 정치 교화의 융성이 뜻대로 될 것입니다.
옛 사람이 어려운 일을 가지고 임금에게 권하는 것을 일러 공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어려운 일을 가지고 전하께 바라지 않고 우리 임금을 무능하다고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소를 다 살펴보았다. 경의 간절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진달한 내용은 아름다운 말과 지당한 논리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마땅히 깊이 생각하여 채택해 시행하겠다."
하였다.

 

11월 10일 무오

이때 전염병이 크게 만연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공청 감사 이해(李澥)가 본도 군사의 합동 조련을 분부하는 즈음에 설사 전도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병사(兵使)가 어찌 감히 마음대로 진퇴시키면서 호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병사 김대건(金大乾)은 주장(主將)을 얕보아 명령을 어긴 죄를 범하였으며, 또 파출(罷黜) 조치에 분개한 나머지 버젓이 치계하여 스스로 해명하는 바탕을 마련하면서 패만스런 말을 수없이 늘어놓았습니다. 대건은 일찍이 육진(六鎭)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토병(土兵)을 못살게 굴면서 초피와 인삼을 책출해두었다가 도둑을 맞은 사실이 포도청의 조사에서 낭자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이 지난날의 악행을 생각하지 않고 병사의 직을 제수하였으니, 의당 마음을 가다듬고 모습을 바꾸어 모든 상사의 분부를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받들어 시행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감히 조정을 경멸하고 체통을 무너뜨렸습니다.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감사 이해는 본도 군사의 가을철 합동 조련에서 날짜를 마음대로 조정하고 호령이 전도되어 병사에게 얕보이고 조정에 모욕을 끼쳤으니, 체통을 무너뜨린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김대건은 추고하라."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자 이에 파직을 명하였다. 병조 판서 구인후(具仁垕)가 이해의 장계를 가지고 회계하기를,
"이해가 곧장 파출한 것은 상규에 어긋나서 그 잘못이 대건의 잘못보다 더 큽니다."
하니, 헌부가 아뢰기를,
"조정에는 나름대로의 사체가 있으므로 한 사람의 견해 때문에 좌우될 수는 없습니다. 감사는 순찰사를 겸하고 있으니 병사를 절제하는 것은 직무상 당연한 일인데도 병조가 파출시킨 일을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사체를 손상시키는 처사입니다. 병조의 당상을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12일 경신

조익(趙翼)을 예조 판서로, 정유성(鄭維城)을 동부승지로, 김익희(金益熙)를 사간으로, 송시열(宋時烈)을 지평으로 삼았다.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군사들에게 겨울옷 [襦衣]을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11월 14일 임술

경상도 재상경차관 박수문(朴守文)이 치계하였다.
"진결(陳結)과 재결(災結)을 다시 조사한 뒤로 금년에 조세를 내야 할 전지는 밭이 4만 5천 1백 70결, 논이 3만 4천 8백 36결입니다."

 

호조가 아뢰기를,
"금년 치의 세입 수량은 형편상 필시 태반은 감축될 것이며, 서도(西道)의 양곡 역시 이미 전수가 감축되었고 다른 여러 창고에 남아 있는 비축곡도 내년 2, 3월까지나 겨우 지탱할 형편입니다. 신들이 조사해 보니 황해도의 좁쌀 7만 8천여 석이 현재 창고에 있으니, 배편으로 적당히 헤아려 운반하여다 백관의 반료(頒料)에 대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해마다 흉년이 들어 세입이 줄어들어서 백관에게 반료할 때면 달의 대소를 따져서 되 수를 늘리거나 줄였지만 늘 모자랄까 걱정이었다. 한 해의 반료가 11만 6천 5백 81석이나 되는데, 그 중에서 호위 군관이나 어영군, 국출신(局出身) 및 기타 쓸데없이 먹는 무리가 절반을 차지하였다.

 

11월 15일 계해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사은사 김자점이 북경으로 가던 중 심하역(深河驛)에 도착하여 치계하였다.
"길에서 운미 차사원(運米差使員) 김형(金瀅)을 만나 납미(納米)의 수량을 물으니 ‘미납된 것이 5만 석인데, 청나라의 회자(回咨)에 추가 납입을 독촉하고 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청나라 사람이 남경(南京)을 함락하여 홍광 황제(弘光皇帝)는 남쪽으로 망명하고, 이자성(李自成)은 섬서(陝西)로 패주하여 험한 곳을 점거하고 있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11월 17일 을축

영의정 김류가 병을 이유로 면직을 비는 소를 열다섯 번이나 올렸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고 다시 승지를 보내어 돈독히 타일렀다. 이에 김류가 또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상이 따뜻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자, 드디어 나와 일을 보았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금년의 흉작은 팔도가 똑같지만 그 중에서도 경기가 가장 심하고 호서가 그 다음이며, 영남이 또 그 다음입니다. 지금 요역을 덜어 주면 나라가 반년의 비축도 없을 것이고, 창고를 열어서 진휼하면 고을이 백일의 비축도 없을 판입니다. 오늘날 수령으로 있는 자들이 참으로 성심껏 진휼하여, 경내 부민(富民)의 먹고 남은 곡물과 관청에 쌓아둔 곡물 중 절반을 가져다 많은 곳은 나누고 적은 곳은 보태주어서 골고루 나누어 주고 보리가 익기를 기다린다면, 아마 굶어죽을 우려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조정의 지극한 뜻을 받들어 열읍을 돌며 몸소 검칙한 다음, 한 도 내에서 어느 고을은 자력으로 구제할 만하고, 어느 고을은 반드시 별도의 조처가 있어야 하며, 현재 이미 굶주려 유랑하는 자가 있는지의 여부를 조정에 치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8일 병인

전 관찰사 박황(朴潢)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박황이 심양에 있을 적에 세자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이번 세자 책봉에 대한 반사(頒赦)에 이르러서 세자가 그의 억울함을 상에게 말하였기 때문에 상이 이에 석방한 것이다.

 

부제학 여이징(呂爾徵)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난세를 구제하는 데는 반드시 도의로써 구제하고 퇴폐한 풍속을 바로잡는 데는 반드시 교육으로써 진작시켜야 합니다. 고유의 이치를 따라 당연히 행해야 할 길을 닦는다면 어찌 멀다 하겠으며, 어찌 어렵다 하겠습니까. 오직 숭상하고 창도하는 데에 달렸으니, 의지의 성실성과 확립 여부를 걱정할 따름입니다. 대저 의지가 성실하지 못한 것은 이치에 밝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치에 밝지 못한 것은 극기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루만 극기하여도 천하가 그 어짊에 쏠릴 것입니다. 그 종사하는 방법은 나의 일상 생활에서 사물을 응접하는 데 있어 시청과 언동이 예의에 맞는지의 여부와 하여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의 여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에 대한 공부의 요점은 정자(程子)의 사물잠(四勿箴)에 있는데, 이 네 가지 단서는 그 지시가 친절합니다. 참으로 기미(幾微)에 생각을 두고 응접하는 즈음에 잘 살펴 한계를 알아서 흑백을 분간하듯이 분명히 하기를 날마다 그렇게 하여 조금도 중단됨이 없게 한다면, 즐거운 구경 거리에 빠져 뜻을 잃거나 좋고 미움에 총명이 가리워져서 사령(辭令)이 이치에 닿지 않거나 희로(喜怒)가 절도에 맞지 않을 것이 뭐가 걱정이 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본원의 공부에 더더욱 힘쓰고 수작의 도리를 잘 밝혀서 경륜이 일관성이 있고 처사가 정당성을 얻게 하소서. 그러면 기강이 진작되고 풍속이 바로잡혀서 막힌 것을 트고 불운을 행운으로 만드는 것도 아마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실로 약석 같은 말이다. 내가 불민하기는 하나 나름대로 힘쓰겠다."
하였다.

 

11월 19일 정묘

사직(司直) 송시열이 부름을 받고도 오지 않고 상소하여 극력 사양하니, 답하였다.
"그대는 사양만 하지 말고 부디 속히 올라와서 위아래의 바람에 부응하라."

 

11월 20일 무진

순천 군수(順川郡守) 이옥련(李玉鍊)이 숙천(肅川)의 관비 사생(四生)을 첩으로 삼았는데, 사생이 질투 끝에 앙심을 품고 술에 취해 있는 틈을 타서 죽였다. 옥련은 정명수(鄭命壽)의 세력을 업고 누차 수령이 되었는데, 교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죽고 나자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11월 21일 기사

이조 판서 이식이 병을 이유로 면직을 빌었다.

 

11월 22일 경오

경기 감사 윤순지(尹順之)가 치계하였다.
"제릉(齊陵)의 정자각과 신문(神門)·신상(神床)·향축상(香祝床)이 불에 타는 변고가 있었습니다."

 

집의 이시만(李時萬)이 상소하기를,
"신이 길에서 들으니, 어머니의 초상을 당한 화공을 상복을 벗기고 궐내로 불러들여 날마다 그림을 그리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해 들은 말이라 믿을 수는 없지만, 혹시라도 비슷한 일이 있다면 전하께 바라고 있는 바가 전혀 아닙니다. 임금이 집안을 바로잡는 법은 반드시 궁금(宮禁)을 맑게 하여 내외의 분별을 엄격하게 해야 하는 것으로, 내인이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외인이 감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법례상 그렇게 되어 있는 일입니다. 궁금의 비밀스런 일을 누가 감히 함부로 억측하겠습니까마는, 내외가 엄격하지 못하다는 말이 요사이 항간의 예사로운 이야기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집안을 바로잡는 법도가 혹시라도 미진한 데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닌가 삼가 두렵습니다. 그리고 궁가에 사사로이 물건을 바치는 일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탄신날과 명절날이면 음식물이 줄을 이어 여염 사람이 함부로 궁궐문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난잡한 폐단을 통렬히 개혁하여 외간의 비난이 일지 않도록 하소서.
남녀가 한 집에 거처하는 것은 인륜의 시작이자 건곤의 배합으로, 제왕이 그 법을 취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전의 병환이 오랫동안 낫지 않고 있으니 별궁으로 옮겨 거처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국모가 거처를 옮기는 것은 사체가 지극히 중대합니다. 그러므로 정원이 그만둘 것을 청하고 대신이 진계하고, 대간이 쟁집하는 것은 사체상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성상의 전지(傳旨)는 몹시 준엄하여 대관(臺官)의 기를 꺾고 의관(醫官)을 나추하여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를 주었습니다. 설령 뭇 신하가 혹시 내전이 앓고 있는 병 증세를 들었더라도 신하로서 감히 입 밖에 내어 말할 일이 아니니,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였다는 하교는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살피지 못한 것인 듯합니다. 그리고 양전(兩殿)께서 서로 공경하는 도리로 보아서도 역시 너무 박절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세자께서 문안과 시선(視膳)을 날마다 별궁에 나아가 하지는 못하더라도 시강원 관원을 시켜 날마다 문안드리는 것은 인정으로 보나 예의로 보나 폐지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역마를 세우는 데 따른 폐단을 염려하여 특별히 사흘에 한 번으로 규정을 정하셨습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이라면 어찌 작은 폐단을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세자로 하여금 내전에서 기거하며 아들된 직분을 다하여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소서.
세자는 국가의 근본이니, 교양하는 방법도 반드시 정도를 써야 합니다. 세자께서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소문이 멀리 알려졌고 학문 역시 통달하기는 하였으나, 동궁의 덕을 기름은 모두가 초기에 달려 있어서 온 나라가 목을 길게 빼고 더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사물을 접하심에 모두 깊은 교훈 아닌 것이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검소는 덕으로서 공손한 것이고 사치는 가장 나쁜 것입니다. 일반 사람이 자제를 가르침에도 오히려 사치를 경계하고 검소를 숭상하는데, 더구나 제왕은 온 백성의 본보기로 없앨 수 없는 법칙인 데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안으로 성색의 즐거움을 없애고 밖으로 사냥의 즐거움을 끊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물건을 이목에서 물리치지 못하고 진기한 물건을 안에 간직해 두는가 하면, 간혹 남북간의 별무역도 있으니, 검소를 숭상하는 일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난리를 겪은 뒤로 잡류(雜類)로서 심양(瀋陽)을 오간 자를 공로가 있다 하여 정직(正職)을 제수하기가 일쑤이며 심지어 수령의 관직을 제수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사로(仕路)의 혼탁함이 혼조 때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왕실의 가까운 친척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앉아서 부귀의 낙이나 누리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지, 외정(外廷)의 제수에 대해서는 간여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요즈음 항간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자못 많으니,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세자에게 보여줄 일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왕업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시세의 불안함을 절박히 여겨 새 세자의 가르침을 한결같이 정도에서 나오게 하소서.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덕을 받아들이는 총명이 없는 것은 아니나 받아들이는 아량이 넓지 못하고, 직언을 권장하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니나 거슬리는 말을 듣기 싫어하십니다. 이에 조정 신하들의 글발에 범범하게 시폐나 논하면 따뜻한 말로 너그러이 답하시고, 조금이라도 강직한 듯하면 소외시키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언사(言事)로써 뜻을 거스른 자는 모두가 말을 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아무 잘못 없이 죄를 얻은 자는 정상을 밝힐 길이 없으니, 참으로 성대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못 됩니다.
작록(爵祿)은 임금이 세상을 가다듬는 기구입니다. 만약 여탈(與奪)의 권한을 가지고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함을 보인다면 국가의 체모에 손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요즈음 제수 명단이 나올 적마다 사람들이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아무개는 아무 일이 있으니 필시 아무 관직을 받을 것이고, 아무개는 아무 일이 있었으니 필시 아무 관직을 얻지 못할 것이다.’고 합니다. 소인의 마음으로 성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어리석고 부질없는 짓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필경에는 그것이 들어 맞으니, 이것은 전하의 마음을 사람마다 엿보는 것입니다.
삼사(三司)가 주의(注擬)하는 과정에 각기 명론(名論)의 경중에 따라 차례를 매겨서 주의하는 것은 곧 전형의 직분인데도 오늘날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 하나 같이 임금의 기색에 따라 주의할 만한 사람을 주의하지 않기도 하고 수망에 주의하여야 될 사람을 말망에 놓기도 하니, 이것 역시 이해를 따지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흉금을 비워 간언을 받아들이고 뭇 선행을 널리 모아들이며, 성심을 다하여 신하를 접하여 뭇사람의 마음을 수습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크게 노하여 답하지 않았다.
이때 이징(李澄)이라는 자가 그림에 능하였는데, 상이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이징이 적모(嫡母)의 초상을 당하여 분상을 가 있는 것을, 얼마 안 되어 불러들여 옷을 갈아 입고 궁중으로 들어오도록 하고는 그 일을 비밀에 부쳤다. 또 병조 판서 구인후(具仁垕)와 이조 참판 한흥일(韓興一)은 모두가 외척인데, 관직을 제수할 적에 여러 대군들이 청탁하면 인후 등이 그때마다 들어주므로, 식견 있는 자들이 모두 한심스러워하였다. 이때 와서 시만이 강개히 항변하자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11월 23일 신미

태백이 나타났다.

 

남이웅(南以雄)을 이조 판서로, 정태화(鄭太和)를 대사헌으로, 김시번(金始蕃)을 장령으로, 이시매(李時楳)를 사간으로, 양만용(梁曼容)을 보덕으로, 목행선(睦行善)을 교리로, 배시량(裵時亮)을 공청 병사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우의정 이경석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자니 대신은 사람을 가지고 임금을 섬긴다고 하는데, 경이 훌륭한 사람을 천거할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신하된 자 중에는 큰 사업을 몸소 처리한 자도 있고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자도 있는데, 그러한 사람들이 명망 있는 사람 중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더러는 초야의 소원한 사람도 있고, 향당에서 천시당하던 사람도 있다."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절의를 지키다가 죽는 사람은 대개가 과감히 직언하는 사람 중에서 나옵니다. 신하의 진언이 비록 과격하더라도 포용하여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대각(臺閣)에 둔다면 어찌 보탬이 적겠습니까. 일찍이 듣건대 유계(兪棨)가 언사로 뜻을 거슬려 전하께서 오랫동안 낙점하지 않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전형관 역시 그를 의망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자가 어찌 한두 사람뿐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경석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원진명(元振溟)이 술에 취해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논한 적이 있는데, 지금에 와서 들으니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심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처음의 소견을 끝까지 고수하여 공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른 것도 옳다고 우겨대는데, 경의 말은 이와 같으니, 매우 좋다."
하였다. 상이 이시만(李時萬)의 소장을 자리 옆에 두고 경석에게 이르기를,
"나라 안에 위를 원망하는 자가 필시 많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시만의 소를 본바, 맨 먼저 화공에 대한 일을 말하였는데, 이처럼 근거없는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외방에서 전해 들었다고 하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하자, 경석이 아뢰기를,
"신이 아직 그 소를 보지는 못하였습니다만, 화공에 대한 일은 항간에 말이 전해진 지가 퍽 오래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그런 일이 과연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8월께 있었던 일인데 우레의 변고가 일어났을 적이라고 말하니, 이것이 괴이쩍다."
하자, 경석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말을 전하는 자가 잘못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너그러이 용서해야지, 깊이 꾸짖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승지 이시해(李時楷)가 아뢰기를,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람들의 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기의 선후는 따질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상이 또 경석에게 이르기를,
"시만의 상소에는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데가 있다. 의관(醫官)을 잡아다 문초한 것을 가지고 병의 원인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만약 의관이 그 병을 분명히 말하였더라면 임금을 사랑하는 자가 아마 이를 통하여 나의 뜻을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렇지 않으므로 죄를 주려고 한 것이지, 찍어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왕의 친척이 정사에 간섭한다고 하는데, 이는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 그 말이 과연 바른말이라면 어찌하여 그 이름을 지적해서 말하지 않는가. 세자가 문안하는 일만 해도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이것이 역마를 세우는 데 따른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중사(中使)를 보내고 나서 또 내인을 보내고 거기다 빈궁이 또 내인을 보내는 것을 날마다의 준례로 삼았으니, 이것만도 하루 동안의 문안이 이미 잦다. 그런데 어찌 시강원의 관원을 날마다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내전께서 거처를 옮기신 뒤로 항간에 말들이 파다합니다."
하자, 상이 불쑥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러한 병이 있는 사람과 여염 사람들은 술잔을 같이 나눈단 말인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전하와 내전은 백성의 부모인데, 하루아침에 불행하게 되어 두 분이 따로 거처하시니, 신하의 절박한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두고 간언을 막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신하된 자로서 임금이 하는 일에 대해 애당초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은 채 근거 없는 말을 글로 써서 감히 올려도 되는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말하는 자가 비록 사실을 모르고 망발하였다 하더라도 임금이 받아들이는 도리는 오직 너그러이 용납하여야 됩니다."
하자,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현재 하늘의 변고가 극에 달하고 인심이 헤아릴 수 없는데, 이처럼 터무니없는 말을 중외에 유포한다면 사람들이 누가 복종하려 들겠는가."
하니, 공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언관은 비록 풍문으로 들었더라도 다 말하는 것이 곧 그 직분입니다. 어찌 허물할 수 있겠습니까.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힘쓴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서둘러 비답을 내려서 깨우쳐 주소서."
하고, 부제학 여이징(呂爾徵)이 아뢰기를,
"《서경》에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말라.’고 하고 ‘상왕(商王) 수(受)처럼 미혹되지 말라.’고 하였으니, 옛사람도 과격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만이 아니다. 임금을 환제(桓帝)나 영제(靈帝)에 비긴 자도 있다. 그 말은 대개 장래를 경계하기 위하여 한 말이다."
하자, 경석이 아뢰기를,
"망언은 따지지 않고 감언(敢言)만을 권장한다면 국가의 복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11월 24일 임신

호조 판서 민성휘(閔聖徽)가 일찍이 원접사로 나갔을 적에 의주의 어떤 하찮은 역관이 정명수(鄭命壽)에게 빌붙어서 그 세력을 믿고 횡포를 심하게 부리므로 지나는 고을마다 시달리지 않는 고을이 없었는데, 언젠가 성휘가 말에서 내려 잠시 쉬고 있는데 그 역관이 말을 탄 채 앞을 획 지나가는 것을 성휘가 붙잡아 곤장을 쳐서 죽였으므로, 명수가 성휘에게 유감을 품은 일이 있었다. 이때 와서 명수가 또 나오게 되자, 성휘가 당시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대접하는 과정에 그가 지난 일을 가지고 노할 것이 두려워 체직을 청하여 피하고자 하였다. 이에 비국이 의계하여 성휘를 그만 체직시켰는데, 명수가 나와서 소문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호조 판서는 국가의 중임인데 어찌하여 지난날의 하찮은 일을 가지고 갑자기 체직시킨단 말인가."
하였다. 묘당이 비웃음과 경멸을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11월 25일 계유

장악원 주부 허서(許舒)의 아내는 고 능창 대군(綾昌大君)의 천첩 딸이다. 이 때문에 벼슬을 주었는데, 당시 이조 판서 이식(李植)의 아내는 상의 외친이었고 참판 한흥일(韓興一)은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종형이었다. 능원 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와 인평 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가 다 같이 허서에게 수령을 주도록 이식과 흥일에게 청탁하였는데, 이식이 면전에서 허락은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난처해 하였다. 부여(扶餘)에 빈 자리가 났을 때 이식은 정고(呈告) 중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흥일에게 이 고을을 청탁하는 것을 흥일이 대뜸 대군의 부탁이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 뒤 혼자서 정사하면서 과연 허서를 수망(首望)으로 주의하여 낙점을 받자 물의가 들끓었다. 이에 조복양(趙復陽)이 논계하기를,
"왕실의 친척은 외조(外朝)의 신하들과 서로 통할 수 없는 법으로, 그 한계가 지극히 엄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정관(政官)이 제배(除拜)하는 즈음에 청탁을 들어 주어서야 되겠습니까. 허서가 부여 현감에 제배될 적에 이조 참의 한흥일은 대군의 청탁이 있었다고 핑계하더니 혼자서 정사하던 날에 가서는 수망으로 주의하기까지 하였으니,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킴이 너무도 심합니다. 한흥일을 파직하소서. 그리고 허서는 사람됨이 어리석고 경망하여 수령으로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간원의 계사 중에 이른바 대군이란 어느 대군을 말한 것인가?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정원이 복양에게 물어서 아뢰기를,
"흥일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로는 두 대군이 다 같이 청탁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흥일을 불러다 묻기를,
"이 계사가 옳은가? 경은 어떻게 능원 대군을 알아서 청탁을 들어주기까지 하였는가?"
하니, 흥일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판서 이식과 수령에 합당한 사람을 논한바, 허서 역시 그 대상에 들었습니다. 은진 현감(恩津縣監)을 의망할 적에 이식이 말하기를 ‘공은 허서를 본 적이 있는가?’ 하기에, 신이 ‘아직 보지는 못했다.’ 하였더니, 이식이 ‘이 자리에 의망하고 싶기는 하나 이곳은 도로를 낀 일 많은 곳이니 한적한 고을에다 시험해 보는 것만 못하다. 부여 수령 자리가 머지 않아 필시 빌 것이니 이곳에 의망하는 것이 괜찮겠다.’ 하였습니다. 두 대군이 청탁하였다는 말에 있어서는, 일찍이 들은 적이 없는데 어찌 감히 남에게 말하였겠습니까. 그리고 능원 대군은 본시 뵈온 적이 없으니, 피차간에 통정한다는 것은 형세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였다. 이는 대개 흥일이 먼저 발설하고서 도리어 이식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상이 크게 노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일이 너무도 해괴하다. 이른바 상대하여 말을 들은 사람들을 잡아다 추문하여 남을 공격하고 모함한 죄를 다스리라."
하였다. 복양이 이에 아뢰기를,
"근래 궁가의 청탁이 양전(兩銓)에 많이 개입되고 있다는 말이 항간에 떠들썩한데, 신은 어느 사람, 어느 관직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날 허서가 대군의 청탁으로 은진 현감 자리를 구하였다가 되지 않았으니 앞으로 부여 현감이 될 것이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파다하였는데, 정목(政目)이 나온 것을 보니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았고, 흥일 역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여서 소문이 파다하고 물의가 들끓습니다. 궁가와 외신 사이에는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는데, 정관(政官)이 궁가의 청탁으로 관리를 임명한다면 요행의 길이 열리고 국가의 체모가 손상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흥일이 아뢰면서 대군의 청탁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신은 못내 놀랍고 괴이쩍습니다. 허서의 일은 실로 수많은 입으로 전파되어 듣지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흥일은 재상 반열에 있는 신하로서 임금의 앞에서는 감히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도, 그 말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뭇 사람들이 입으로 전하는 말은 어디에서 나왔단 말입니까.
임금이 대간에게 이목의 역할을 맡김에 있어서 풍문을 듣고 일을 논하도록 허락하여 숨김없이 말할 수 있는 길은 터 주었을지언정, 위엄으로 압박하며 심지어 언근(言根)을 적발하기까지 하였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언근을 적발함에 있어서는 달리 적발할 방도는 없고 필시 신으로 하여금 고발하도록 할 것인데, 이 일은 전파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입 있는 자는 다 말하고 귀 있는 자는 다 들었으니 비록 적발하려 한들 또한 그 사람이 누구라고 어떻게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신이 못나기는 하였으나 직임이 대관(臺官)인데 어찌 차마 언근을 끌어대어서 조정을 욕보이고 대각의 그지없는 화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신은 혼자서 망언에 대한 죄를 쓰고 죽음의 길을 택할 뿐, 결코 그렇게는 차마 못하겠습니다.
아, 간관으로 있으면서 이 같은 일을 보고서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전하를 저버리는 것이고, 이미 언책의 자리에 앉혀 놓고서 말을 하였다는 이유로 신에게 죄를 내리신다면 이는 전하께서 신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신은 한갓 구구한 충심에서 사사로이 입은 은총에 감격한 나머지 아는 대로 다 말하여 조금이나마 보탬을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오직 전하만을 믿고서 몸을 사릴 줄도 모르고 차마 말없이 있지 못하고 감히 부질없는 말을 하였다가 이처럼 성상의 과중한 조처가 내려지게 하였습니다.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더욱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신의 관작을 삭탈하고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때 도승지 김세렴(金世濂), 좌승지 이래(李䅘)가 겁에 질려서 대답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상이 다그치자 이에 아뢰기를,
"대간이 지금 이 일로 해서 인피하고 있어 본원에서 적발하기도 어려운데, 또 대간의 계사로 인해서 이처럼 준엄한 유지를 내리시니, 널리 포용하는 대성인의 도리에 손상이 갈까 두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그리고 조복양이 자신의 당파를 비호하고 상대를 칠 적에는 반드시 대군을 침해하니, 오늘날의 어리석은 자의 사술이라 할 만하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심기원(沈器遠)의 옥사(獄事) 때 상이 기원의 첩을 내옥에서 국문하면서 평소에 서로 사이가 좋은 사람을 물은바, 박황(朴潢)·심동귀(沈東龜)라고 하였다. 이에 곧장 그 추안을 국청으로 내려보내고 이어 박황과 심동귀를 귀양보내었는데, 복양이 당시에 정언으로 있으면서 내옥의 잘못을 극력 논박하였다. 그리고 또 마침 그때 능원 대군의 객실을 짓도록 명하여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는데, 복양이 함께 말하였다. 때문에 상이 노하여 이때 와서 또 이러한 하교를 내린 것이다.

 

11월 26일 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도승지 김세렴이 동료를 거느리고 아뢰기를,
"삼가 본원의 계사에 대한 비답을 보니, 말씀의 내용이 갈수록 더 준엄하여 일을 논한 간관을 거짓말이나 하는 사람으로 지척하셨습니다. 간관이란 한 때의 언책을 주관하는 관직으로 임금이 눈과 귀의 역할을 맡겨 놓았으니 이처럼 박대하여서도 안 되거니와, 임금의 말이란 한번 나오고 나면 사방에서 쳐다보기 때문에 이처럼 노골적으로 하여서도 안 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11월 27일 을해

대사간 조경이 아산(牙山)에 있으면서 병을 이유로 올라오지 않고 소를 올려 사직하고 이어서 시사에 대하여 진술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군자를 친하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친한 사람 중에는 토색질이나 하는 신하가 많으니, 전하의 생각이 아직도 잇속을 좋아하는 사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며, 전하께서 충성스러운 말과 곧은 의논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용납되는 자는 우유 부단한 무리에 불과하니, 전하의 생각이 아직도 나를 거역하여서는 안 된다는 사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며, 전하께서 궁금(宮禁)을 맑게 하고 뇌물을 끊으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궁내의 말이 바깥에 많이 퍼지니, 전하의 생각이 아직도 근습(近習)들에 대한 사심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지난날 궁궐 안에서 저주를 한 변고는 또한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항간에 떠도는 말들이 헤아릴 수 없이 파다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내옥(內獄)에서 내인의 죄를 다스린 일이 있으니, 이것이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닌 듯합니다. 저주한 물건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닌 이상, 바깥에서 들어간 것이 분명합니다. 전하께서 만약 안팎을 엄히 다스려서 비록 천백 명의 내관일지라도 하나같이 법으로 엄단하여 사사로이 왕래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저주의 일이 어떻게 저절로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죄를 지은 내인을 내옥에 가두고 내관을 시켜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으니 이 무슨 꼴입니까. 궁내에 감옥을 두는 제도가 한(漢)나라에서 시작되어 애제(哀帝)·성제(成帝) 연간에 가장 두드러졌으니, 이것이 쇠퇴한 시대의 좋지 못한 형정(刑政)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내옥을 혁파하여 형정이 한 곳에서 나오도록 하지 않습니까.
예전에 궁원(宮媛)244)  이 아이를 낳으면 다 궁중에 있었지, 밖으로 나갔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으니, 지난 역사를 상고하여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신사년245)  에는 궁원의 산실을 누추한 여염집으로 정하였습니다. 이른바 궁원도 족당(族黨)끼리 서로 연관이 없지 않으니, 안부를 묻는다는 핑계로 거침없이 오가다 드디어 연줄을 찾아 뇌물을 싸들고 청탁을 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은 무지한 하천배들의 상정입니다. 신은 궁금과 내통하는 시초가 여기에서 발단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또,
"전하께서 병자년 이후 옥체가 불편하시어 10년 동안에 시조(視朝)하는 날이 아주 드물었던 까닭에 경악의 신하가 숙직실에서 헛되이 잠만 자고 붓을 잡는 사관이 임금의 일에 대하여 쓸 것이 없게 되었으니, 성덕의 손상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신하들을 인접하여 수기 치인의 요령을 묻거나 혹 지난 시대의 득실에 대해 물어서, 민간의 고통과 사방의 재변까지 모두 빠짐없이 어전에서 진달하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 비록 법복(法服)을 입고 경연에 앉아서 경전을 강론하지는 않더라도 조용히 몸을 펴서 안석에 기대거나 혹 칸막이를 설치하고서 뭇 신하들에게 할 말을 마음대로 다 하도록 한다면, 조섭하는 효과에 있어서도 반드시 내관들을 가까이하여 한갓 심기만 어지럽히는 것보다는 더 나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좋은 말, 지당한 논리 아닌 것이 없다. 내가 각별히 생각하여 스스로 힘쓸 터이니 그대는 사피하지 말고 속히 올라오라."
하였다.

 

이조가 이식(李植)을 칙사의 관반(館伴)으로 삼았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제3사가 이식을 경멸하므로 지금 관반으로 차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제3사는 정명수(鄭命壽)를 말하는데, 대개 상이 이식이 싫어서 개차를 명한 것이다. 묘당이 김육(金堉)을 대신 차출하였다.

 

11월 28일 병자

사간 이시매(李時楳)가 아뢰기를,
"국가가 간관에게 풍문을 듣고 논계하도록 허락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이번에 간관의 논계가 뭇사람의 입에서 전파된 말에서 나왔으니, 간관의 관직에 있는만큼 듣는 대로 반드시 상달하는 것은 바로 그의 책무입니다. 그런데도 하루 동안에 엄한 전지를 여러 차례 내리시어 지나치게 사기를 꺾으시니, 전하의 현명하심으로 이처럼 전례 없는 조처를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였습니다. 조복양을 출사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조복양은 체차하라. 그리고 동료를 처치하는 데는 두어 마디의 말이면 족할 것이다. 어찌 꼭 이처럼 말을 많이 늘어놓는가. 복양이 사정을 따른 처사를 너희들 역시 그르게 여기지 않고 이처럼 구제하려 드니, 오늘날의 국사는 한심스럽다 할 만하다."
하였다.

 

11월 29일 정축

태백이 나타났다.

 

이날 아침에 정원이 비로소 조복양을 체차한 전지를 받들었는데, 도승지 김세렴 등이 또 아뢰기를,
"간원의 계사에 대한 앞뒤의 엄한 비답만도 이미 사기를 한껏 꺾어 놓았는데, 처치에 대한 아룀에 대해서도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대간의 처치를 한번 공론에 부치고 나서 특별히 체차를 명하는 것도 실로 성스러운 시대의 좋은 일이 못 되거니와, 두려움에 질리는 버릇이 습성을 이루어 저마다 회피만 하여 끝내 언로가 막히게 된다면, 어찌 크게 우려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어제 하명한 일을 오늘 아침에서야 비로소 승전을 받들었으니, 이것 역시 이상한 일이라 할 만하다."
하였다. 이에 동부승지 정유성(鄭維城)이 대죄하기를,
"어제 밤에 조복양을 체차하는 전지를 곧장 받들어야 마땅하나, 밤이 너무 깊었을 뿐만 아니라, 간관을 특별히 체차하는 일은 예사 규정과 달라서 동료들이 모이기 전에는 감히 단독으로 전지를 받들 수 없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사간 이시매(李時楳)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간원의 아룀으로 인한 성상의 하교가 하도 준엄하여 우레 같은 진노에 당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바로 곁에서 모시고 있는 신하까지도 간곡히 진계하였는데도 미안스런 하교가 시종 더 준엄하기만 하시니, 대각의 사기가 꺾이어 언로가 장차 막히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처치하는 과정에서 감히 품은 뜻을 다 진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성상께서는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도리어 구제하려 든다는 하교를 내리고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시니, 이는 언로를 넓혀서 임금을 허물 없는 경지로 인도하려는 신의 성의가 도리어 임금의 잘못을 더 보태어 준 결과가 되었습니다. 신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30일 무인

김익희(金益熙)를 집의로, 조한영(曺漢英)을 헌납으로, 강호(姜鎬)를 정언으로, 이이존(李以存)을 이조 좌랑으로, 유백증(兪伯曾)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사간 이시매 등이 전의 아룀에 연이어서 아뢰기를,
"한흥일(韓興一)이 회계한 말로 보면, 판서도 그 사람을 모른다고 하였고, 참판도 그 사람을 모른다고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허서(許舒)는 아무 공로도 없고 또 승전을 받든 사람도 아닌데, 기어코 부여 현감의 자리가 빌 때까지 기다려서 마침내 수망(首望)에 주의하기까지 한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흥일이 정사(政事) 석상에서 이러니저러니한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도 마치 전혀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 물의가 일어남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파직을 명하소서. 요즘 허서의 일로 인해서 물의가 비등하여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궁가의 청탁이 있었다 해도 그 일의 옳고 그름은 오직 이행 여부에 달려 있는만큼 끝내 수망에 주의한 것은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정사 석상에서 은진은 길가이므로 다른 한적한 고을에 주의하고자 하여 이런 이야기를 서로 나눈 일이 었었으니, 전 판서 이식(李植) 역시 그 잘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고, 또 허서를 체직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이식의 파직만 윤허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운미선(運米船)을 일부러 전복시켜서 7만여 석의 쌀을 잃었으나 물에 빠져 죽은 뱃사람은 약간 명일 뿐이고, 역관 홍예길(洪禮吉)은 쌀 80여 석을 훔치고, 차사원 송천경(宋天擎)은 온 배의 쌀을 실어다 잇속을 차렸다고 하는데, 해외의 일이라 아직 사실을 조사해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지금 주청사의 장계를 보니 ‘청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차사원이 청장(淸將)의 말을 듣지 않고 배를 해변의 물이 얕은 곳으로 몰았고, 또 연해 고을에서 마냥 지체하면서 배가 전복되었다고 핑계대는데, 수수(水手)는 죽지 않았다. 제왕(諸王)이 다들 조선이 이 뒤에 다시 쌀을 요청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한 나머지 배가 전복되어 쌀을 운반하기 어렵다는 모양을 보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이러한 일이 있었다면 청나라 사람들이 트집을 잡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만약 다시 조사하지 않는다면 한갓 청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살 뿐만 아니라, 뒷날에 혹시 이런 일이 생기더라도 사람들이 조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맨 처음에 배가 전복되었다고 말한 차사원들을 모두 잡아다 추고하여 되도록 중하게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라 차사원 송천경 등 6명을 잡아다 추문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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