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계유
우의정 남이웅(南以雄)이 첫 번째 사직서를 올리니, 상이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경상 감사 허적(許積)을 그대로 재임시키라고 명하였다. 허적은 임기 만료로 체직해야 되었는데, 묘당에서 "허적은 오랫동안 재임하여 사정을 익히 아는데, 요즘처럼 남쪽 변방에 사건이 많은 때를 당하여 새로운 사람에게 그 곳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금년까지만 그대로 재임시킬 것을 청합니다." 하여 상이 따른 것이다.
대군의 가노(家奴) 김철(金鐵) 등 7인을 전가 사변(全家徙邊)시키라 명하였다. 병자년001) 에 우역(牛疫)이 전국에 널리 퍼져 소가 거의 멸종되기에 이르렀을 때 조정에서 도살을 엄금하여 살인한 것과 같은 죄를 적용하도록 하니 축산이 차차 번성하게 되었는데, 소를 도살하여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궁가에 투속하여 제멋대로들 도살하였다. 형조·한성부·사헌부의 금리(禁吏)들이 체포하여 고발하면 궁가에서는 그때마다 그 금리의 처자들을 구타하므로 금리들은 금패(禁牌)를 수령하지 않고 서로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민성휘(閔聖徽)가 형조 판서가 되어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여 소 도살자의 숫자를 한성부에 물으니, 인평 대군(麟坪大君) 집 소속이 42인, 능원 대군(綾原大君) 집 소속이 38인이었다. 성휘가 이에 두 궁의 18인씩을 뽑아서 아뢰고 한성부로 하여금 조사해서 전가 사변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부득이하여 따랐다.
2월 3일 갑술
유성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심액(沈詻)을 형조 판서로,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홍득일(洪得一)을 좌승지로, 강백년(姜栢年)을 동부승지로, 임전(林)을 사간으로, 원진명(元振溟)을 헌납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지평으로, 정언벽(丁彦壁)을 봉교(奉敎)로 삼았다.
2월 4일 을해
예조가 아뢰기를,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혼궁(魂宮)을 우선 인경궁(仁慶宮) 안에 설치하였으나 여기는 신주가 영구히 안주할 곳은 아닙니다. 3년 뒤에는 순회궁(順懷宮)002) 의 예에 따라 다른 곳에 별도의 묘우(廟宇)를 설립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순회묘에 부묘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그것을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는데,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영의정 김자점(金自點)·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모두 그렇겠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5일 병자
청(淸)나라 호부(戶部)에서 우리 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만주(滿洲) 뇌달호(賴達胡) 등이 농사를 지을 때 쟁기·가래·코뚜레 등의 기구가 부족하니 양쪽에서 공평하게 무역하여 농삿일에 도움이 되게 하라."
하였는데, 대개 의주(義州)의 중강 개시(中江開市)에 관한 일이었다.
2월 6일 정축
역관 이형남(李亨男)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돌아와 보고하기를,
"도주의 말이 ‘관백(關白)과 집정(執政)의 무리들이 조선과 달단(韃靼)이 연합한 것에 대해 매우 격분하여 앞으로 군사를 일으키려고 먼저 배 댈 곳을 탐지해 갔다. 그렇게 되면 귀국만 해를 당할 뿐만 아니라 본도가 먼저 그 피해를 입기 때문에 미봉책을 쓰려고 하는데 주선하기 어려울까 걱정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였다.
2월 7일 무인
앞서 폐빈 강씨(姜氏)가 내전에 있을 때 불교를 믿어 황금 2백 60 냥을 강원도 철원(鐵原)에 있는 보개산(寶盖山)의 절에 시주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감사가 장계로 아뢰었다. 상이 그 가운데 반은 강원도에 주어 민역(民役)에 보태 쓰게 하고, 나머지 반은 기보(畿輔)에 주어 객사(客使)의 인부와 말의 역가(役價)에 보조하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달 30일이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소상(小祥)이므로 중전께서 마땅히 변복의 절차가 계셔야 합니다. 그러나 《오례의》의 ‘왕비가 부모의 복을 벗는 것[王妃爲父母除服]’에 관한 조항을 보면 ‘13개월 만에 복을 벗는데 품지하여 공제(公除)하는 예는 13 일 만에 끝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작년 초상 때에 품지하여 공제하는 예를 행하였으니 소상 날에는 벗을 상복이 없습니다. 그날 새벽이 되면 소복을 입고 내전에서 망곡(望哭)을 하고는 이어서 소복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이 예에 합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초기일(初忌日)에 즉시 길복을 입고 그날 하루를 보내는 것도 미안할 듯합니다. 소복을 벗는 즉시 길복을 입고서 곡에 나아갔다가 도로 들어간 뒤 내전에서는 길복을 벗고 천담복(淺淡服)을 입으며 그 이튿날 다시 길복을 입게 하는 것이 인정과 예문에도 어그러지지 않고 전례를 헤아려 보아도 이와 같습니다. 이것으로 강정(講定)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8일 기묘
정언(正言) 김시진(金始振)이 대군의 집에 객실을 지어 주는 일에 대해 계사를 올려 극언하기를,
"신이 힘껏 다투며 중지시키도록 청하는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 임금에게 허물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를 일으켜서는 안 되는 점은 여섯 가지이고 합당한 점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천재(天災)가 극심하고 인심이 날마다 이반되며, 외적의 침입이 한창 성하고 국내의 변란이 자주 일어나고 있으며, 즐겁고 편안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져서도 사치한 단서를 열어 놓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전하같이 성명하신 자질로 어찌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셔서 이렇게 급박하지도 않은 역사를 하신단 말입니까.
옛날 순(舜)임금이 칠기(漆器)를 만들자 이를 간하는 자가 수십 인이었고, 한 문제(漢文帝)는 노대(露臺)를 건축하려 하다가 그 비용이 1백 금(金)인 것을 헤아리고는 이내 중지했습니다. 칠기는 사소한 물건이고 1백 금은 적은 비용입니다. 그런데도 순의 신하가 간하고 한 문제가 중지하였으니, 어째서이겠습니까. 남의 신하가 되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데는 끝까지 해야 하며, 임금이 절검(節儉)을 경계함은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지금이 순임금의 왕조나 한나라 시대와 견주어 어떻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순임금이나 한 문제가 경계로 삼았던 것으로써 스스로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집을 지어 주라는 명을 속히 정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연안(宴安)과 사치라고 표현한 것은 지나치고 칠기와 노대의 비유는 적절치 못하니, 오늘 아뢴 말은 졸렬하다고 하겠다."
하였다. 김시진이 이것으로 인피하니, 간원이 아뢰기를,
"일에 따라 과감하게 말하는 것은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인용한 비유가 간혹 적절하지 않다 하더라도 언관의 기를 꺾어서는 옳지 않습니다.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경석(李景奭)을 좌의정으로 삼았다.
2월 10일 신사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순회묘(順懷廟)에 나아가 자세히 살펴보니, 묘우(廟宇)가 3칸인데 순회 세자의 신주가 한중앙에 봉안되어 있고, 의물(儀物)로서 인갑(印匣) 하나, 일산 하나가 묘 안에 있었습니다. 소현 세자의 책·인장·우산·부채·일산 등 물품도 당연히 들여다 배설해야 할 것인데 지세가 온편치 못하니, 한 칸을 증축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제사의 규모를 보니 너무 매몰스럽다. 다시 더 참작하여 정하라."
하였다.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 영의정 김자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곡량전(穀梁傳)》을 상고하니 거기에 ‘공자(公子)를 대부보다 중시한 것이다003) .’ 하였는데, 진 무제(晋武帝) 때에 박사(博士) 심적(沈寂) 등이 이것을 인용하여 헌의하면서 ‘위로 황제로부터 아래로 배신(陪臣)에 이르기까지 예는 다를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보건대, 순회 세자가 비록 당대에는 존항(尊行)이었으나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으니, 전하와는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있으므로 고문(告文)의 첫머리에 전하의 위호를 쓰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물며 예조의 계사에서 순회묘의 제사에는 애당초 축문이 없었다고 했으니, 당시에 참작해서 결정한 본의를 알 수 있습니다. 향사(享祀)를 드릴 때 축문이 없는데 유독 사유를 고하는 제사에만 예제(禮制)를 달리해야 하는지 신들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번 역시 구례에 따라 거행한다고 해도 불가할 것은 없을 듯합니다. 신주를 안치하는 장소에 있어서는 순회 세자는 그대로 제2칸에 두고, 소현 세자를 다음의 제3칸에 두거나 아니면 순희 세자와 소현 세자를 제1칸과 제2칸에 두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장소 문제는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형편을 보아 하게 하고, 축사 문제는 유신으로 하여금 널리 예경을 상고하여 품지해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근래 두씨(杜氏)의 《통전(通典)》에 있는 묘주(廟主)를 옮기는 논의를 살피건대, 동진(東晋) 효무제(孝武帝) 때 행묘(行廟)004) 를 세우고 신주를 이안(移安)하는데 부원(傅瑗)이 서막(徐邈)에게 묻기를 ‘네 부군(府君)의 방이 협소하여 신주 넷을 수용할 수가 없으니 문밖에 휘장을 설치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니, 서막이 ‘방이 좁아 신주 넷을 수용할 수 없어서 문밖에 휘장을 설치하는 것은 권도(權道)를 따르는 예라 할 수 있겠다.’ 하였습니다. 이번 순회 세자의 사랑에는 본디 목(穆)·소(昭)를 번갈아 옮기는 예가 없으므로 당초 한중앙에 설치했습니다. 만약 소현의 신주를 제3칸에 모시고 제1칸을 비워 둔 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근거할 데가 없는 예법인 듯하며 배설도 미진할까 걱정이 되니, 오직 예관이 형세를 헤아려서 편리한 대로 봉안해야 할 것입니다. 또 예문에 ‘아비가 자식을 제사지내고, 임금이 신하를 제사지낸다.’는 문구가 있는데 순회의 사당에서 일찍이 축문이 없었던 것은 필시 그 당시에 참작해서 정한 본의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옮겨 안치하는 즈음에 사유를 고하지도 않고 신주를 움직이는 것은 미안한 듯합니다. 그러나 예경을 상고해 보아도 근거할 명문이 없으니, 다시 예관으로 하여금 참작해서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예조가 "1칸을 증축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다."고 하니, 상이 따르면서 고축(告祝)을 먼저 시행하라 명하였다.
2월 11일 임오
이시백(李時白)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당시 의망할 수 있는 1품으로는 단지 민형남(閔馨男)과 구인후(具仁垕) 두 사람뿐이었기 때문에 이조가 이들을 의망했는데, 상이 2 품 중에서 더 의망하라 명하고는 드디어 이런 제수가 있었다. 유심(柳淰)을 집의로 삼았다.
우의정 남이웅(南以雄)이 병으로 사직서를 올리니, 상이 승지를 보내서 도탑게 하유하였다.
대교(待敎) 이항(李杭)이 자기 집에 염병이 있어 감히 입직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소를 올리고 나갔다. 봉교(奉敎) 정언벽(丁彦璧)이 굳이 도로 들어오라고 요구하자, 항은 소를 올리고 일단 나온 뒤에 무단히 도로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언벽이 화가 나서 상소하여, 이항의 병은 원래 염병이 아니고 또 새로 추천되었을 때 논의가 모순되고 낭패스러운 형세였으니 그의 직을 체직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상이 이에 이항을 파직하라고 명하고 얼마 있다가 또 사판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정언벽을 불러 입직하도록 했는데 언벽 역시 감히 나가지 못하여 입직을 거른 죄로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2월 14일 을유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이만(李曼)을 도승지로 삼았다.
2월 16일 정해
청(淸)나라 사신이 갑자기 이르렀는데, 그 칙서에,
"입조한 관원이 진공한 예물 품목 중 소루한 것이 많으므로 특별히 호부(戶部)의 계심랑(啓心郞)과 포당(布黨) 등을 파견하여 묻게 한다……"
하였다.
2월 17일 무자
상이 번침(燔鍼)을 맞았다.
2월 18일 기축
상이 번침을 맞았다.
청나라 사신이 원접사 한흥일(韓興一)의 벼슬이 육경(六卿)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러 날 동행하면서도 현관례(見官禮)를 허락하지 않고 의주(義州)와 정주(定州)의 위로연도 모두 받지 않았다. 비국에서 이조 판서 이행원(李行遠)으로 대신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9일 경인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어제 간통(簡通)을 보니, 전 목사 최계훈(崔繼勳)이 재임시에 전세(田稅)를 지나치게 거두고 사선(私船)을 세내어 실어온 것에 대해 그를 잡아다 추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근실(謹悉)’이라는 말로 답을 해 보냈는데, 입계할 때가 되어서는 최계훈의 사실은 거론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신과 같이 노둔한 자가 외람되게 수석의 자리에 앉아서 있으나마나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이경휘(李慶徽)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휴가를 받아 고향에 내려 갔다가, 전 청주 목사 최계훈이 전세를 징수할 때에 잉미(剩米)라고 하면서 규정 외에 더 거두고 그것을 실어 나를 때는 수참(水站)을 전례에 따라 이용하지 않고 경선(京船)을 개인적으로 임대하였는데 3척에 실었던 쌀이 끝내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자 잃어버린 수량을 다시 민간에서 징수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신이 잡아다 추문하자는 논의를 어제 원의석(圓議席)에서 발의하여 집에 있는 동료들에게 간통했더니 집의 유심은 뒤에 회좌(會座)할 때 상의하자고 답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이것을 장관에게 왕복시켰어야 했지만 상회례(相會禮)를 거행하기 전에는 간통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규례입니다. 또 날이 저물려 하므로 혼자서 귀일된 의논으로 먼저 아뢰었던 것입니다. 장관의 피혐하는 말을 보았으니 어찌 감히 편안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장령 권집이 아뢰기를,
"지평 이경휘가 최계훈의 탐욕한 사실을 원의석상에서 발론할 때 신 역시 참여해서 논의했으니, 장관에게 간통하지 아니한 잘못은 신도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집의 유심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간통을 보니 전 목사 최계훈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계훈은 이르는 곳마다 선치를 했고, 청주의 목민관(牧民官)으로서도 포장(褒奬)을 받았습니다. 경휘가 그의 말대로 고향에 내려 갔다가 들은 것이라면 토호배들의 모함하는 말일 것입니다. 신의 소견이 시종 이와 같았기 때문에 시끄러운 사단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2월 20일 신묘
상이 번침을 맞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대사헌 김남중 등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났습니다. 대각(臺閣)에서 일을 논하는 체모는 풍문을 듣고 발론하였다가 동료간에 의견이 서로 다를 때에는 의견을 사리에 맞도록 왕복하여 귀일될 때를 기다리는 것이 관례입니다. 회좌하기 전에 간통을 전송(轉送)했다면 동료에게 회보하지 않은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을 논박하는 법도는 아무리 의논한다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니, 뒤에 회좌하여 의논하자는 것은 신중히 하자는 데 그 본의가 있습니다. 김남중·이경휘·유심은 출사시키고 권집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원접사 한흥일(韓興一)이 치계하였다.
"정명수(鄭命壽)의 말이 ‘일찍이 언급한 사은사(謝恩使)를 북경에 보내는 문제에 대해 조정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했는데, 대개 세자가 입조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답하기를 ‘상께서 오래 병중에 계시므로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느라 실로 겨를이 없는데 어떻게 입조 문제를 논의하겠는가.’ 했더니, 명수는 듣고도 못 들은 척했습니다."
2월 21일 임진
지평 이경휘가 아뢰기를,
"신과 최계훈(崔繼勳)은 평소에 전연 안면이 없어 사람됨이 선한지 악한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고을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는 정상은 신이 직접 본 것이고, 전세를 받아들이는 일은 뭇사람들이 목격하여 쉽게 알 수 있는데 지나치게 거두고 배를 임대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인근에 전파되었으니, 어찌 토호가 날조한 것이라 핑계대고 안문(按問)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유심(柳淰)이 피혐한 말은 장황하게 신구(伸救)하면서 ‘가는 곳마다 잘 다스려 포상을 받은 일까지 있다.’고 했습니다. 일찍이 대간과 시종을 역임한 사람이 포상까지 받았다면 마땅히 십분 청렴하고 신중하게 해서 선발해 준 본의를 저버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삼가고 단속하지 않아서 사람들의 말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이 계훈을 위하여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동료들의 의논이 이미 귀일되었는데도 자기 한 몸만 빠져 나와 막아대고 홀로 이론을 세우면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발론한 사람을 배척하는데, 신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신은 의견을 왕복하면서 귀일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아뢰었으니 경솔한 잘못이 현저한데도 출사하기를 청한 가운데 끼이게 되었습니다.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집의 유심이 아뢰기를,
"최계훈이 도임한 뒤에 공무를 보다가 원한을 사게 되었다는 말은 신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벌써 전최(殿最)의 조항에 드러나 있는 것이며 또 방백이 아뢴 내용에도 들어 있습니다. 신이 구차스레 동료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아니한 것은 애당초 계훈을 위하여 신구하자는 것도 아니고 경휘를 배척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경휘가 ‘고향에 내려 갔다가 들었을 뿐이다.’라고 했는데, 청주(淸州)는 바로 경휘의 고향으로 친척과 노비들이 거기에 살고 있으니 설사 논박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실로 혐의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렇게 하니 여기에서 세도(世道)를 볼 수 있습니다. 신은 이미 추하다는 배척을 받았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2월 22일 계사
상이 번침(燔鍼)을 맞았다.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이경휘가 이미 들은 것이 있다면 사실에 따라 발론할 뿐이니, 어찌 고향이라고 혐의하여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겠습니까. 동료들의 의논이 서로 어긋나서 말이 너무도 번잡하니, 신은 병통으로 여깁니다. 신은 이미 그의 의논에 동조하였으니 처치하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최혜길(崔惠吉) 등이 아뢰기를,
"이경휘가 피혐한 말 중에 ‘함께 출사하기를 청한 것은 잘못이다.’라고 했으니, 신들의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유심이 피혐한 말은 실로 최계훈을 구원하는 듯하니 체직시키고, 대사헌 이하는 모두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3일 갑오
상이 번침을 맞았다.
2월 24일 을미
채유후(蔡𥙿後)를 부제학으로, 남노성(南老星)을 집의로, 권령(權坽)·신상(申恦)을 장령으로, 유거(柳椐)를 정언으로, 이이존(李以存)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2월 25일 병신
대사헌 김남중, 지평 이경휘가 아뢰기를,
"전 목사 최계훈은 일찍이 청주(淸州)를 맡았을 때 교묘한 명목을 만들어 한도가 없이 마구 거두어 들였으며, 납부할 군포(軍布)를 포흠한 것이 있으면 수량을 채우기에 급급하여 백성과 상인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 많습니다. 전세(田稅)에 있어서는 일정한 숫자 외에 제멋대로 더 징수하였고, 또 그것을 운반할 때는 전례와 같이 수참(水站)을 이용하지 않고 경선(京船)을 세내어 실어 나르다가 배 세 척에 실은 쌀이 어디로 갔는지 끝내 알 수 없게 해 놓고는 민간에서 재차 징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최계훈을 잡아다 추문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자 따랐다. 계훈이 옥에 잡혀와 말한 공초에 이르기를,
"신이 본 고을에 부임하여 국곡(國穀)의 납부를 독촉하였는데, 상환하지 않는 것이 많은 경우는 5백∼6백 석에 이르므로 신이 엄형을 가하며 독촉했습니다. 그랬더니 ‘판서댁’이라고도 하고 ‘한림댁’이라고도 했으며 ‘지평댁(持平宅)’이라고도 했는데, 신은 조금도 용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신이 토호에게 미움을 받아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대개 경휘의 아버지가 고(故) 판서 이시발(李時發)이고, 경휘가 한림에서 지평으로 승진했으며 또 그의 친척과 전장(田庄)이 본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상이 본주의 국곡을 가장 많이 미납한 자를 잡아다 추문도록 명하였다. 본주가 대봉(大奉)과 송란(宋蘭) 두 사람을 잡아 보냈는데 미납한 수량이 겨우 80∼90석이었다. 의금부가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하자고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바로 토호들이 전토를 종의 이름으로 등록하여 놓은 것인 듯한데, 금부가 이것을 살피지 못하고 흐리멍덩하게 회계하니 일이 매우 잘못되었다."
하였다. 금부가 그대로 대봉 등을 심문하기를 청하니, 상이 다시 토호를 잡아다 심문하라고 명하였다.
2월 26일 정유
비국이 비밀히 아뢰기를,
"신들이 궐하(闕下)에 모여 신 김자점(金自點)이 직접 받든 성상의 하교를 반복해서 상의하였는데, 여름철에 갔다가 가을에 돌아오는 것이 편할 듯하나 그곳에 도착하여 지체하다가 만약 두어 달 이상 오래 걸린다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염려스러운 단서가 있을 것입니다. 예전부터 매양 상의 옥체가 오래도록 미령하시기 때문에 세자가 여러 날 곁을 떠날 수 없다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이 거짓말이 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세자의 병환은 본래 수토(水土)에 익숙하지 못한데서 말미암은 것인데 한창 더울 때 오래도록 그곳에 지체하게 된다면, 첫추위가 닥치는 계절보다 병환을 덧들일 걱정이 도리어 더 심하게 되지 않을지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하물며 요동(遼東) 길은 더운 장마철이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만약 7월 보름 이후에 길을 떠나서 10∼12월 사이에 돌아올 수 있다면 병환을 덧들일 걱정이나 오래도록 지체하는 폐단을 거의 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쪽에서 이미 쾌히 허락했으니 저들도 필시 두서너 달 차질이 난다고 해서 불만스럽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돌아올 때 만약 심한 추위라도 만나게 되면 앓고 있는 담증(痰症)이 필시 다시 발병하게 될 것이니, 초여름에 들어가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2월 28일 기해
칙사(勅使)가 입경(入京)하였다. 상이 양화당(養和堂)에서 접견하니, 칙사가 말하기를,
"이번 세폐는 성심을 다하지 않은 점이 있는 것 같은데, 소홀히 살핀 결과가 아닌가 생각되어 이 때문에 칙서를 받들고 왔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관리들에게는 이미 벌을 내렸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송구함을 감당할 수 없소이다."
하였다. 칙사가 말하기를,
"당초의 약조(約條) 중에 사은사는 반드시 삼공 중에서 뽑아 보내고 기타 사신은 반드시 육경으로 한다고 했는데, 이번 사신은 비록 벼슬이 높다고는 하나 일찍이 육경을 역임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부사는 목숨이 겨우 붙어 있어 실례 또한 많았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약조된 일을 변경했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그 사람이 비록 육경을 거치지는 않았으나 관직이나 품계가 높기 때문에 무심코 뽑아 보냈소이다."
하였다. 칙사가 말하기를,
"지금 비밀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손짓을 하여 승지나 사관을 모두 내보냈다. 내용은 비밀이어서 전하지 않는다. 칙사가 말하기를,
"개시(開市)는 본래 변방 주민들을 위하여 물화를 교역하자는 계책인데 교역할 즈음에 편파적이고 사사로이 하는 폐단이 많습니다. 이후부터는 더욱 신칙(申飭)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원접사(遠接使) 역시 육경을 역임한 사람이 아닌데 이것도 불만스러움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과실이니 용서를 바라오."
하였다. 칙사가 나가자 도승지 이만(李曼)이 나아가 아뢰기를,
"칙사가 비밀히 한 말을 사관이 알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입조하는 한 조항이다."
하니, 이만이 아뢰기를,
"상께서 어떻게 대답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1년에 한 번씩 조회하는 일이 폐할 수 없는 예절인 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도로가 멀고 인마를 마련하기 어려운데다 지금은 또 몸에 병이 있어 즉시 입조할 수가 없으니,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더니, 저쪽의 대답이 ‘세자의 입조는 감히 우리들이 강청할 일은 아니고 오직 이곳에서 스스로 조처하기에 달렸다.’고 하였다."
하였다.
2월 29일 경자
영접 도감이 아뢰기를,
"접견례를 마친 뒤에 세 칙사가 이어 삼공과 육경에게 말하기를 ‘경원(慶源)·의주(義州) 두 곳의 개시(開市)가 모두 착실하지 않다. 장사치들이 가격을 터무니 없이 높이 매겨 교역을 할 수 없게 하는데, 이것은 모두 조정에서 지시한 것이 아닌가.’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장사치들은 이익을 보는 데만 뜻이 있으니 양쪽의 상인들이 서로 따져서 가격을 정하는 것이지 어찌 조정의 지휘에 따라 하는 것이겠는가. 청(淸)나라 상인들이 이익을 다투는 일을 어찌 청나라에서 알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칙사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돌아갈 때 마땅히 의주에 머물러 값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 항식(恒式)으로 삼겠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변방 백성으로서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자들을 조정에서 엄격히 금지한다면 어찌 이런 폐단이 있겠는가.’ 하기에, 신들이 ‘변방 관리들 중 전후로 이 문제 때문에 죽음을 당한 자들이 한두 명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칙사도 이미 잘 아는 바일 터인데 도리어 엄격하게 금하지 않는다고 책망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은가.’ 하였습니다.
칙사가 즉시 보을하(甫乙下)와 전 첨사 곽덕립(郭德立) 및 칙사 일행이 압송해 온 3인을 잡아들여 대질시키며 추궁하였는데, 3인 모두가 덕립의 지시로 들어갔다고 하니 덕립이 끝내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덕립은 효시(梟示)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감사(減死)로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접 도감이 아뢰기를,
"정(鄭) 칙사가 신 정태화(鄭太和)에게 말하기를 ‘오는 길에 평안 감사를 보니 우둔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본국에서 만약 우리들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고 여긴다면 이 사람을 그대로 두어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속히 조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 어제 접견할 때 세자를 입조(入朝)시킬 것인지의 의향을 국왕께 품의했더니 위에서는 쾌히 허락하셨다. 우리들의 소견을 말한다면 이제 겨우 칙사가 지나갔는데 곧바로 세자의 행차가 있게 되면 서로가 필시 지탱하지 못할 것이니, 이번 사은사는 대군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그리고 세폐사(歲幣使) 역시 불가불 육경 중에서 뽑아 보내야 한다. 대군이나 대신의 부사인 경우라면 비록 육경이 아니더라도 무방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묘당에 말하라고 답하였다.
2월 30일 신축
법성포(法聖浦)의 조운선(漕運船)이 바람을 만나 침몰하여 수부들이 모두 익사하였다.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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