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계유
개기 일식이 있었다.
정초군(精抄軍)으로 양궁(兩宮)을 숙위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먼저 상번 군사 가운데 날래고 건장한 자를 뽑아내어 정초군이라 이름을 짓고 그들에게 잡역을 면제시켜 재능과 기술을 연습하게 하여 급박할 때 활용하도록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초군 가운데 또 1백 수십 인을 뽑아 절반은 대전(大殿)의 차비문을 지키게 하고 절반은 세자궁(世子宮)의 문 밖을 지키게 하면서 중사(中使)를 시켜 관장하도록 하였으며, 날마다 좌작(坐作)하고 격자(擊刺)하는 법을 가르치게 하고 잘하는 자는 주식(酒食)으로 상을 주었다.
12월 2일 갑술
강백년(姜栢年)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12월 3일 을해
정언 이무가 인혐하면서, 의심하고 멀리하는 폐단을 대략 진달하고 이어 아뢰는 좌석에 빠진 것으로 체임해 주기를 청하니,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하였다. 이무를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오지 않아 파직하였다.
12월 4일 병자
예조가 간직하고 있던 효자(孝子)·절부(節婦)의 행적에 대한 문서를 난리를 겪느라 잃어버리고 성명 총록(姓名摠錄)만 보존되어 있으므로, 다시 중앙과 지방으로 하여금 이름마다 기록해서 아뢰도록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악기 도감(樂器都監)의 공역은 며칠이면 응당 끝이 날 터이니 앞으로 춘향(春享)부터는 다시 묘악(廟樂)을 사용하되, 춘향은 1월 6일에 있으니 먼저 고(告)하는 행사가 있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종묘(宗廟)의 경우는 다음달 1일 삭제(朔祭) 때의 고유제(告由祭)를 겸해서 행하고, 영녕전(永寧殿)의 경우는 같은 날 별도로 고유제를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5일 정축
햇무리가 졌는데, 무리 위에는 배(背)가 있고 빛깔이 안은 붉고 밖은 푸르렀다.
12월 6일 무인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조경을 도승지로, 남중회(南重晦)를 정언으로, 원진명(元振溟)을 장령으로, 임전(林)을 부응교로, 김좌명(金佐明)을 수찬으로 삼았다.
12월 11일 계미
상이 형조의 녹수 단자(錄囚單子)를 열람하고 하교하기를,
"옥수(獄囚)의 처결이 많이 지체되기가 요즈음에 더욱 심하니 각사로 하여금 속히 처결하여 석방하도록 하라."
하니, 형조 판서 민성휘(閔聖徽) 등이 아뢰기를,
"요즈음 인심이 극도로 악독하여 종이 주인을 배반하고 젊은이가 어른을 업신여기며, 인명(人命)을 때려서 손상시키고는 그 사람을 숨겨놓고 법을 위반하면서 빼앗아 차지하고는 판결이 난 뒤에도 그대로 갖는 등의 죄 및 기타 신문하고 추고해야 할 일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내버려두면 원통함을 품은 자가 원한을 풀 수 없고 다스리려고 하면 형벌을 받는 이가 너무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중수(重囚) 외에도 간혹 죄명은 비록 중대하지 않더라도 그 정상(情狀)을 캐어보아 형신하거나 가두어 둔 자가 있습니다. 신들이 늘 수도(囚徒)를 입계(入啓)할 때에 반복하여 살펴보면서 성상께서 백성 보기를 다친 사람 보듯하는 어짊을 저버릴까 두려워하였는데,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고 황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자주 개좌(開坐)하여 많이 지체되지 않도록 하라."
하였는데, 당시 옥수(獄囚)가 1백여 인이었다.
12월 13일 을유
목성이 역행(逆行)하여 귀성(鬼星)에 들어가고 적시성(積尸星)을 범하였다. 【 12월에 나타났으므로 더욱 참담하다.】 달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가 있었고 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다.
12월 14일 병술
김남중(金南重)을 대사간으로, 이시해(李時楷)를 우승지로, 김원립(金元立)을 사간으로, 김중일(金重鎰)을 헌납으로 삼았다.
도승지 조경이 부름을 받고 들어와 상소하여 문형의 직을 사직하였다. 대략 아뢰기를,
"지금의 인재(人材)가 비록 옛날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신 같이 노둔하고 용렬한 자질로는 낮은 관직에 끼기에도 부족합니다. 김시국(金蓍國)은 사한(詞翰)에 노숙하고 김육(金堉)은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였으며 조석윤(趙錫胤)·채유후(蔡𥙿後)·황감(黃㦿)은 나이가 젊고 재주가 뛰어나 무슨 글이든지 잘 못하는 바가 없으니 이 직임에 가장 적합하며, 기타 증경(曾經)·시임(時任)의 양관 제학(兩館提學)도 모두 숙망(宿望)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앞장 서게 하니, 신은 실제로 재결하여 받아들인 이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개차(改差)하도록 명하시고 감당할 만한 사람을 임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6일 무자
안개가 많이 끼었다.
사은사(謝恩使) 유정량(柳廷亮) 등이 금주위(錦州衛)에 되돌아와서 치계하였다.
"신이 옥하관(玉河舘)에 있을 때에 정역(鄭譯)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목화(木花)가 더욱 심하여 형편없으니 앞으로의 세폐(歲幣)에 틀림없이 일을 일으킬 근심이 있소. 대체로 세폐는 본래 이웃 나라와 교통하면서 서로 주는 것인데, 지금 하나로 합쳐진 뒤에도 세폐를 그대로 두었으니 실로 명분이 없는 듯하오.’ 하였더니, 정역이 말하기를 ‘말한 바가 아주 옳으니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적당하겠소.’ 하고, 인해서 말하기를 ‘세자를 책봉한 뒤에 한번 입조(入朝)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소.’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세자께서 오래도록 이역(異域)에서 생활하느라 상로(霜露)에 손상이 되셨고, 또 국왕(國王)의 병환(病患)이 한결같이 오래 끌어 장기간 시약(侍藥)하는 중에 있으며, 도로가 그전에 비교하여 더욱 멀어 형세로 보아 입조하기 어렵소.’ 하였더니, 정역은 다시 말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이튿날 정역이 전천기(全天機)를 【 역관(譯官)이다.】 불러 신에게 말을 전하기를 ‘명년에 의당 별도의 거조(擧措)가 【 대체로 사신(使臣)을 보내려는 것임.】 있을 터이니 사신의 행차에 순부(順付)할 필요는 없겠소.’ 하므로,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겠기에 신이 전천기를 시켜 칙행(勅行)의 지속(遲速)을 탐문하도록 하였더니, 정역이 말하기를 ‘의당 좋은 시절(時節)에 나갈 것이오.’ 하였습니다."
공주(公州) 사람 김삼의(金三義)와 임실(任實) 사람 조종립(趙宗立)과 문천 교생(文川校生) 박사립(朴士立)이 몰래 어보(御寶) 및 관인(官印)을 주조(鑄造)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형당하였다. 이 때에 인심이 선하지 못하여 교묘하게 속이는 일이 갖가지로 나타나 심지어 부새(符璽)를 몰래 주조하여 허위 문서를 만들어 남을 속이고 이익을 취하는 자가 곳곳에 있었다.
12월 19일 신묘
이행우(李行遇)를 대사간으로, 신응망(辛應望)을 장령으로 삼았다.
12월 20일 임진
사흘 동안 많은 비가 내려 한강물이 불었다.
12월 22일 갑오
역관(譯官) 이형남(李亨男)·한상국(韓相國)을 파견하여 왜사(倭使)를 따라가 대마도주(對馬島主)를 위문하게 하였다. 【 도주가 강호(江戶)에 가서 오래 머물다가 대마도로 돌아왔기 때문에 사신을 파견하여 그가 먼 길 다녀온 것을 위로하였다.】 당초 왜사가 온 것은 전적으로 치조(致吊)하기를 바라서인데, 【 도주가 새로 모상(母喪)을 당했기 때문에 이른 것이다.】 조정이 내간상(內艱喪)에는 조문한 그전의 규례가 없고 뒷날의 폐단만 있다고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귤왜(橘倭)가 일찍이 연향(宴享)을 인해서 민응협(閔應協)·임중(任重)에게 묻기를,
"달단이 벌써 북경(北京)을 차지하고 남경(南京)의 이 장군(李將軍)이 패배하였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 바로 이지성(李志誠)이다.】 그리고 병자년050) 난리에 왕자가 사로잡혔다고 하던데, 국왕과 왕자가 함께 같은 곳에 있습니까? 왕자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했습니까? 그리고 사신과 폐백의 숫자는 한결같이 명나라를 섬기던 때와 같이 합니까? 달단이 순치(順治)051) 로 기원(紀元)한다고 하는데 조선(朝鮮)에서는 지금 무슨 연호(年號)를 씁니까?"
하였는데, 민응협 등이 말하기를,
"당초 표류했던 왜인을 들여보낼 때의 우리 나라 서계(書契) 가운데 청국(淸國)에서 보낸 것이라고 말을 하였소. 회답하는 서계 가운데 달단이란 두 글자가 있어 바야흐로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번에 또 달단에 대하여 물으니, 이른바 달단이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바이며 어느 나라를 가리켜 말한 것인지 모르겠소."
하니, 귤왜가 말하기를,
"명나라를 더러 강남(江南)이라고 일컫기도 하며 조선(朝鮮)을 더러는 고려(高麗)라고 일컫기도 하니, 이것은 역시 서로 호칭(號稱)하는 말이오."
하므로, 민응협이 말하기를,
"양국(兩國)의 서계에 더러는 청국(淸國)이라고 쓰고 더러는 달단이라고 써서 크게 서로 같지 않으니, 모름지기 곧바로 고쳐 쓰는 것이 옳겠소. 그리고 우리 나라의 서계를 그대들이 늘 고쳐서 써주기를 바라면 조정이 굽혀서 따라주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런데 그대 나라의 서계는 어찌하여 두어 글자 고치는 것을 아끼시오."
하자, 귤왜가 말하기를,
"서계는 모두 도춘(道春)의 손에서 나오는데 도주(島主) 역시 한 글자도 고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어떻게 멋대로 고칠 수 있겠소. 귀국이 만약 받지 않으면 의당 가지고 돌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또 서계를 이미 전한 뒤에는 한 장의 휴지(休紙)가 되는 데 불과한데 장차 어느 곳에 보이려고 합니까?"
하고, 【 조정이 왜의 서계를 북경(北京)에 알리려고 하였기 때문에 임중(任重)이 내려 갈 때에 그로 하여금 타일러서 그 두 글자를 고치도록 하였는데 왜의 답이 이와 같았다.】 귤왜가 또 말하기를,
"우리는 처음에 달단을 청국의 총칭으로 여겼을 뿐인데, 지금 이 말을 들으니 우리도 또한 청국으로 호칭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청국이 왕자를 잡아간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하니, 민응협 등이 말하기를,
"처음에 화친을 핑계대고 왔다가 이런 뜻밖의 거사가 있었으며, 그 뒤에 왕자는 곧바로 돌아오셨고 지금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소."
하였다. 등왜(藤倭)가 또 편지를 보냈는데 작은 종이에 쓰기를,
"도주(島主)가 강호(江戶)에 있을 때에 대군(大君)이 도주에게 묻기를 ‘주 황제(朱皇帝)가 복주(福州)에서 피난하여 우리 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남경과 북경이 모두 달단이 차지하는 바가 되었는데도 조정이 일찍이 그대에게 언급하지 않던가?’ 하니, 도주가 답하기를 ‘북경이 함락당했다는 것은 이미 들었지만 남경에서 패배당한 것은 일찍이 듣지 못한 바입니다.’ 하였더니, 대군(大君)·숙부(叔父) 두 사람이 말하기를 ‘조선에 길을 빌어 구원병을 보내는 것이 적당하다.’ 하니, 도주가 말하기를 ‘조선은 전쟁을 겪은 뒤에 해마다 기근이 들었으며, 도로가 험하고 멀어 군사들이 행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고 하니, 대군이 말하기를 ‘군량은 조선에 의뢰할 필요가 없고 우리 나라에서 배로 운반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며, 이웃나라의 도리로 어찌 길 빌려주기를 꺼리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또 등왜(藤倭)가 치조(致吊)하는 일을 민응협 등에게 간절히 바라면서 더러는 역배(譯輩)를 시키거나 더러는 서찰(書札)로 여러 차례 주고받은 것이 몇 번인지 모를 정도였지만, 민응협 등이 처음부터 끝까지 막았다. 이형남(李亨男) 등이 서계(書契)를 가지고 내려감에 이르러서는 등왜에게 말하기를,
"치조(致吊)는 전례(前例)가 없으니 지금 처음으로 시작할 수 없으며 단지 위문하려고 왔을 뿐이오."
하니, 등왜가 말하기를,
"단지 위문하는 것으로만 일컫는다면 가지 않는 것이 나으니 빨리 조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적당하겠소. 우리들이 일본의 사정을 숨김없이 모두 진달하였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듣고서 위협하는 말로 여기니, 앞으로 만약 조처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면 귀국을 위한 우리의 정성을 알게 될 것이오."
하고, 또 나온 뜻이 마침내 헛된 데로 돌아갔으니 죽고 싶을 뿐이라고 하면서 곧 작은 배를 보내어 본도(本島)에 알리고 도주(島主)의 분부를 기다려 떠나거나 머물 것을 결정하겠다고 말하므로, 민응협이 이 뜻을 치계하여 아뢰었다. 영의정 김자점, 우의정 남이웅 등이 아뢰기를,
"등차(藤差)가 나온 뜻은 전적으로 치조(致吊)하는 한 건에 있었는데, 이전부터 이런 상사(喪事)에는 본래 서로 위문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만약 위문한다면 또 전에 없던 예(例)를 열게 되며, 틀림없이 특송선(特送船)을 요청하는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허락하지 못합니다. 이 장계를 보건대, 왜차(倭差) 등이 치조 서계(致吊書契)가 없을 것 같으면 역관(譯官)도 들여보내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언사가 아주 불손하니 반드시 그 계교를 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희로(喜怒)는 염려할 것이 없겠으나 다만 도주(島主)가 일본을 빙자하여 일마다 억지를 부리면 그 형세가 처음부터 끝까지 굳게 거절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갈망하는 때를 인해서 그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 낫겠습니다만, 일이 중대한 데 관계되기 때문에 일제히 모여 깊이 강구하였습니다. 이시백(李時白)·정태화(鄭太和)·이행원(李行遠)·이시방은 이미 치조한 뒤에는 틀림없이 특송선을 지급해야 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경솔하게 허락하기는 어려울 듯하나 지금 한 척의 배 때문에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리를 크게 잃는다면 그것도 훌륭한 계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원두표(元斗杓)·민성휘(閔聖徽)·이기조(李基祚)는 저들이 실제로 일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도주는 그 사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듯하며, 다만 도주가 우리 나라의 조위(吊慰)를 받으려고 요구하는 것은 배를 보내려고 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도중(島衆)에게 과시하려는 것인데,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마음에 매우 서운하게 여기며 분(憤)을 품고 억지를 부릴 것이라는 근심이 기필코 없으리라는 것은 보장하기 어려우니, 따로 치조 서계(致吊書契)를 짓고 약간의 물품을 갖추어 보내어 그의 상사(喪事)를 돕게 하고 역관(譯官)을 시켜 만송원(萬松院)에서 특송선을 보내는 일은 우리 나라가 난감(難堪)하게 여기는 일이라고 하면서 특송선을 요청하는 한 건은 일체 발설하지 말도록 하는 뜻으로 내용을 잘 꾸며 말하게 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거없는 조위(吊慰)를 이미 거절할 수 없다면 전례가 있는 특송선을 어떻게 막겠는가? 길이 열린 뒤에는 대대로 특송선을 요청할 터이니 우리 나라의 민력(民力)이 결단코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헤아려보니 옛날의 규정을 굳게 지키는 것이 온편하고 낫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왜차(倭差)가 이미 사람을 보내어 위문할 것을 요청하였고 만족스럽지 못한 데 화를 내었으며 또 그 행동이 지저분하여 국가가 업신여김을 당한 것이 극도에 이르렀다. 내려보낸 역관을 오래도록 동래(東萊)에 머물게 하는 것은 너무나 부당하니 즉시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김자점 등이 아뢰기를,
"등왜(藤倭)의 정태(情態)는 미워할 만하니 하교하신 대로 즉시 올라오도록 하는 것이 적합할 듯하기는 합니다만, 왜인이 아무리 조종(操縱)하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인해서 앞질러 먼저 되돌아오도록 부른다면 우리가 처치(處置)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조용히 하는데 부족한 듯합니다. 동래 부사로 하여금 다시 그들의 사색(辭色)을 관찰하게 하여 실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만족스럽지 않은 뜻이 있으면 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역관들이 먼저 올라오게 하여 업신여김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며, 저들이 만약 그대로 들여보내려고 하면 애당초 정탈(定奪)한 대로 시행하는 것이 온편하고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등왜가 동래부에 40여 일 동안 머물면서 끝내 그의 소망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마음에 대단한 불만을 품고 귤왜(橘倭) 및 문위 역관(問慰譯官) 등과 동시에 바다를 건너 떠났다. 이튿날 왜차(倭差) 등원(藤原) 등이 또 대마도에서 와서 말하기를,
"도중(島中)의 봉행(奉行) 등이 차역(差譯)이 들어온다는 기별을 듣고 치조(致吊)하는 일행을 즉시 강호(江戶)로 도달하게 하여 자랑하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지승(智繩)의 편지를 보니 조정이 끝내 받아들여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빠른 배를 타고 나와 지승을 시켜 오래 머물더라도 꼭 소망을 이루도록 기약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승이 벌써 되돌아가버렸으니 이 일은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할 듯하며, 도주(島主)가 속여서 보고한 죄로 형세가 틀림없이 바뀔 것이고 지승도 앞질러 먼저 되돌아간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는데, 민응협이 이것을 계문하였으나,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3일 을미
날씨가 매우 춥다고 하여 전옥(典獄)의 경범 죄수를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5일 정유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호조가 아뢰기를,
"내년 1월 초부터 처음으로 관대(冠帶)를 회복시킨다는 의논을 이미 계하하셨으니, 여러 상사(上司)의 인로(引路)와 조례(皂隷) 역시 다시 마련하여 고립(雇立)하도록 해야 하는데, 고립하는 값을 달리 장만해 낼 방법이 없습니다. 금년 기전(畿甸)의 전결(田結)이 갑술년052) ·을해년 두 해보다 조금 넉넉하며 응용 여미(應用餘米)가 거의 1천여 석에 이릅니다. 그리고 병조의 여정 가포(餘丁價布) 역시 1백 50여 동이 있는데 군포(軍布)와는 차이가 있으니, 이 쌀과 면포를 조금 덜어내어 내년 조례의 값으로 헤아려 지급하고, 다시 농사의 정도를 관찰하여 편리한 대로 처치하는 것이 적당하겠으며, 꼭 지급해야 할 조례의 수가 80여 인에 불과하니 1년의 값으로 쌀 7, 8백 석과 면포 20동이면 잇달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례에 관한 일은 본래 병조에 관계되니, 해조로 하여금 구례(舊例)대로 마련하여 계하한 연후에 지급할 쌀과 면포를 함께 의논해서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난해 양전(量田)한 뒤에 조례의 가포(價布)를 모두 이미 참작하여 결정하였으니, 한결같이 난리 이전의 규례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자 이징(李澂)을 숭선군(崇善君)으로 삼았는데, 징은 조 소의(趙昭儀)가 낳았다. 세자의 1녀(女)를 숙안 군주(淑安郡主)로 삼고, 모두 내지(內旨)이다. 오정위(吳挺緯)를 정언으로, 이천기(李天基)를 수찬으로 삼았다.
12월 26일 무술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김시국을 홍문관 제학으로, 이시만(李時萬)을 교리로, 채유후(蔡𥙿後)를 동부승지로, 오정일(吳挺一)을 사간으로 삼았다.
12월 29일 신축
헌납 김중일(金重鎰)이 체임되었다. 김중일이 길에서 인평 대군(麟坪大君)을 만나 미처 말에서 내리지 못하자 대군이 크게 노여워하여 김중일의 하인을 가두었는데, 김중일이 이 때문에 인혐하여 체임되었으며, 뒤에는 마침내 이것으로 연좌되어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헌납 김중일(金重鎰)이 체임되었다. 김중일이 길에서 인평 대군(麟坪大君)을 만나 미처 말에서 내리지 못하자 대군이 크게 노여워하여 김중일의 하인을 가두었는데, 김중일이 이 때문에 인혐하여 체임되었으며, 뒤에는 마침내 이것으로 연좌되어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12월 30일 임인
엄정구(嚴鼎耉)를 헌납으로, 남중회(南重晦)·한진(韓縝)을 정언으로 삼았다.
엄정구(嚴鼎耉)를 헌납으로, 남중회(南重晦)·한진(韓縝)을 정언으로 삼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 1647년 2월 (1) | 2026.01.06 |
|---|---|
|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 1647년 1월 (0) | 2026.01.06 |
|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11월 (0) | 2026.01.06 |
|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10월 (0) | 2026.01.06 |
| 인조실록47권, 인조 24년 1646년 9월 (0) | 2026.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