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 1647년 1월

싸라리리 2026. 1. 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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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계묘

상이 창경궁(昌慶宮)에 있었다. 망궐례 및 진하례(陳賀禮)를 정지하였다. 【 우리 나라가 사대하는 예를 정축년 이후 임시로 정지해서였다.】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293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한국고전번역원

 

비로소 백관의 관복(冠服)과 품대(品帶)의 제도를 복구하였다. 이에 앞서 김자점(金自點)이, 난리 뒤에 백관이 융복(戎服)으로 출사(出仕)하여 상하의 구분이 없으니 명년부터는 평상시의 관복을 회복하자고 청하였기 때문이다.

 

1월 3일 을사

헌부와 간원이 조후량(趙後亮)의 일을 연계(連啓)했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고 정배시키라고만 명하였다. 간원이 또 법에 따라 구오(具鏊)의 죄를 정할 것을 연계했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1월 6일 무신

악기 도감(樂器都監)이 종묘 제복 43건, 제감 서리(祭監書吏)의 청삼(靑衫) 3건, 사직단 제감 서리(社稷壇祭監書吏)의 청삼 1건, 숙녕전 제복(肅寧殿祭服) 14건, 성균관 제복 41건, 봉상시(奉常寺) 관하 11개 처의 제복 1백 1건과 제감 서리의 청삼 10건, 수복(守僕)들이 입을 홍의(紅衣) 45건, 친제시의 생초 제복[綃祭服] 11건, 합제시의 제복 1백 19건, 청삼 15건, 홍포의(紅布衣) 45건, 그리고 관대와 신 및 버선을 제작하여 춘향 대제(春享大祭)에 나누어 보냈다.

 

1월 7일 기유

유성이 묘성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지평 이성항(李性恒)이 아뢰기를,
"근래 사치가 날로 심하여 천한 하인들도 모두 비단옷을 입고 있어, 신이 이런 외람된 폐단을 조금이나마 고치고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금리(禁吏)가 두 사람을 잡아 왔는데 궁가(宮家)에 딸린 사람이라고 자칭하였습니다. 입은 옷이 한 사람은 무늬 있는 비단옷이었고 또 한 사람은 중국 명주옷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즉시 그 옷을 불태우고 그 사람들을 벌주게 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집에서 그날의 금리(禁吏) 두 사람을 잡아다 강제로 조례(皂隷)의 복색을 입힌 뒤 패(牌)를 채워 앞세우고는 소리를 치며 길거리를 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존귀한 집에서 스스로 조심하고 삼가지 않아 멋대로 국금(國禁)을 범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도리어 이러한 거조를 하는 것은 변변찮은 자가 외람되게 법부(法府)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고, 대사헌 유철(兪㯙), 집의 유심(柳淰), 장령 권집(權諿) 등이 모두 이 때문에 인피(引避)하니,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드디어 모두 정사(呈辭)하고 아뢰지 아니하여 체직되었다. 살피건대, 많은 헌부의 관원들이 이미 그 단서를 발론해 놓고서는 끝내 법에 따라 죄를 주도록 청하지도 못한 채 일시에 인피하고 들어갔으니 대각(臺閣)의 체통이 땅을 쓴듯이 없어졌다.

 

1월 11일 계축

상이 황감(黃柑)을 성균관 유생들에게 내리고 출제(出題)하여 글을 지어 바치게 했는데, 일등을 한 조사기(趙嗣基)에게 급제를 주었다. 사기는 조빈(趙贇)의 아들이다.

 

1월 12일 갑인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해에 쌀 운반선이 바람을 만나 침몰되었는데, 당시 선원들이 죽지 않은 것이 의심스러워 그 쌀을 책임지고 징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의 원망이 많을까 걱정되니, 해조로 하여금 살펴서 조처하게 하라."
하였는데, 호조가 3분의 1만 징수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래(李䅘)를 좌승지로, 남노성(南老星)을 집의로, 김진(金振)을 응교로, 이항(李杭)을 대교(待敎)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임성익(林聖翊)을 장령으로, 오정위(吳挺緯)·김시진(金始振)을 지평으로 삼았다.

 

1월 16일 무오

상이 하교하기를,
"동서의 활인서(活人署)에 있는 환자 및 사망자의 숫자를 본서에 문의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안헌징(安獻徵)이 아뢰기를,
"양서의 환자 중 완치되어 돌아간 자가 92인, 사망자가 3인, 현재 남아 있는 자가 65인이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심을 다해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7일 기미

헌부가 아뢰기를,
"판윤(判尹) 홍진도(洪振道)는 본디 어리석고 도리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으로서 훈척의 자리에 있으면서 멋대로 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의금부의 장이 되자 물의가 시끄럽게 일어났습니다. 또 행동이 상도에 벗어나고 일처리에 두서가 없으며 성질을 부려 남과 다투어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켰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처음에, 진도가 진신(搢紳)들 사이에 말을 퍼뜨리기를 "얼마 전에 익명의 투서를 얻었는데 구인후(具仁垕)·원두표(元斗杓)·이식(李植)·김익희(金益熙)·신면(申冕) 등이 폐위된 강빈(姜嬪)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몰래 왜인을 부르려고 비밀히 모의한다는 말이 있었다." 하였다. 처음에는 다섯 사람만 언급하다가 나중에는 더 보태서 당시의 명류로서 여기에 들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진도가 그 글을 은밀히 상에게 아뢰고 그들 부자가 밖에서 선동하니 사람들이 모두 진도가 만들어낸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헌부가 드디어 이것으로 논계한 것이다. 그 뒤에 또 아뢰기를,
"신들이 홍진도의 사건을 가지고 파직시켜 서용하지 말도록 논계했었는데, 지금 물의가 모두들 ‘죄는 무거운데 벌은 가볍다.’고 하니, 신들이 나약하게 처리한 잘못이 큽니다.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남중 등이 이어 삭탈 관작을 청하면서 달이 넘도록 논계를 계속하였는데, 상은 파직만 시키라고 명하고 이어 하교하였다.
"공의(公議)가 이미 시행되었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1월 25일 정묘

이후원(李厚源)을 대사간으로, 권집(權諿)을 장령으로, 이재(李梓)를 지평으로, 김시진(金始振)·임중(任重)을 정언으로, 유심(柳淰)을 부응교로, 심지한(沈之漢)을 부교리로, 김식(金鉽)을 부수찬으로, 이기조(李基祚)를 겸지경연사(兼知經筵事)로 삼고, 이시매(李時楳)를 의주 부윤으로 삼고 통정 대부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1월 27일 기사

간원이 아뢰기를,
"지금 천재(天災)가 혹심하여 백성이 극도로 피폐하였는데 국경은 시끄럽고 국내는 텅 비어 조석을 보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군(大君)의 집에 객실과 행랑을 지어 주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대체로 백성들이 넉넉하고 나라가 부유하여 종묘와 사직이 안정된다면 왕자처럼 귀한 신분으로서는 몸 용납할 장소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토목 공사를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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