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9권, 인조 26년 1648년 3월

싸라리리 2026. 1. 6.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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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정유

햇무리가 지고 흰 무지개가 햇무리를 가로질렀다.

 

예조가 아뢰기를,
"순릉 참봉(順陵參奉)의 첩보에 의하면, 2월 30일 능위의 혼유석(魂遊石)·문무석(文武石)과 장군석(將軍石)의 코끝이 깨어져 나갔고 정자각(丁字閣)의 신문(神門)과 월랑(月廊)의 완렴(薍簾)이 부서져 파손되었으며, 익명의 언서(諺書)로 되어 있는 세 개의 목패(木牌)가 정자각 곁에 놓여져 있었다고 하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날짜를 가리지 말고 위안제를 지내고 정부와 본조로 하여금 속히 봉심하게 하소서. 그리고 입번한 참봉과 숙직한 수호군은 우선 추고하게 하고 본도로 하여금 용의자를 잡아들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왕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중전(中殿)의 문안례(問安禮)는 행해야 하는 날에 일이 있을 경우에는 일이 지난 뒤에 즉시 행해야 한다."
하고, 다음날 드디어 경덕궁(慶德宮)에 문안하였다.

 

3월 4일 기해

우의정 이행원(李行遠) 등이 순릉을 봉심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손상된 문무석·혼유석과 장군석을 그대로 두거나 개조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즉시 개조하게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모화관에서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였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접견했는데, 정명수(鄭命壽)가 대신·육경·양사의 장관을 부르기를 청하고 묻기를,
"소현(昭顯)의 세 아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속담에 아버지는 뼈이고 어머니는 공석(空石) 【 우리 나라에서는 볏짚으로 그릇을 만들어 쌀이나 좁쌀을 담는데 이를 공석이라고 한다.】  이라고 했는데, 아버지의 죄 때문에 연좌되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어머니의 죄 때문에 연좌되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하니, 김자점·이행원이 말하기를,
"강적(姜賊)은 그 어미·형제들과 함께 모역한 일이 발각되어 복주되었습니다. 세 아이의 유모 등도 모의에 참여했다고 자복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세 아이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께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섬으로 방축(放逐)시켰는데, 두 아이는 마마를 앓다가 죽었습니다."
하니, 정명수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주문(奏聞)하지 않고 처치했습니까?"
하니, 자점 등이 말하기를,
"그의 어미가 역모한 정상에 대해 이미 주문했는데, 이 때문에 다시 번거롭게 주문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연히 주문해야 될 것 같은데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하니, 명수가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매우 온당합니다. 조정 신하들은 대답을 잘못하였습니다."
하였다.

 

3월 5일 경자

이달 3일에 평양의 성 안에서 불이 나서 1천 8백 60여 가호가 불에 탔는데, 노약자 중에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감사가 아뢰자, 상이 그 도로 하여금 휼전을 행하도록 명하였다.

 

3월 6일 신축

청나라 사신이 회령(會寧)·종성(鍾城)의 군관(軍官) 등 2인을 살해하였다. 처음에 청인이 우리 나라의 회령·종성에 국경을 넘어서 사냥하는 자가 있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두 고을의 부사(府使)인 서필문(徐弼文)·김원립(金元立) 등을 잡아놓고 기다리게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청나라 사신이 필문 등과 군관 2인을 조사했는데, 필문 등이 모른다고 변명하면서 죄를 군관들에게 돌리니, 군관들이 감히 스스로를 밝히지 못하였다. 상이 그들이 죽는 것을 딱하게 여겨 승지를 보내어 통유하였으나 청나라 사신이 듣지 않고 마침내 죽인 것이다.

 

3월 7일 임인

황감을 대사간으로, 김식을 헌납으로, 최후윤(崔後胤)을 정언으로, 홍우원(洪宇遠)을 봉교로 삼았다. 상이 특명으로 부제학 이기조(李基祚)를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전 대사간 강백년(姜栢年)을 청풍 군수(淸風郡守)로 삼았다. 백년은 김남중(金南重) 등을 논박하여 체직시켰고, 기조는 또 차자를 올려 간원의 잘못을 논했는데, 상이 둘 다 그르게 여겼기 때문에 이 명이 있은 것이다.

 

정명수를 영중추부사로 승진 제수하고 또 장계우(張繼禹)를 방산 만호(方山萬戶)로 삼았다. 계우는 명수의 조카인데 명수가 조정에 청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순릉(順陵)의 변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하니, 영의정 김자점이 아뢰기를,
"참봉이 수졸들을 침학한 탓으로 그럴 수도 있으니, 치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권도(權道)가 없지 않을 것이니 우선 버려두라."
하고, 또 이르기를,
"세 아이는 이미 죽었다고 했거니와 큰 아이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는가?"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당초에 모두 죽었다고 말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신이 저들의 이야기를 듣건대 칙사가 큰 아이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말을 하자 정 칙(鄭勅)이 ‘우선 생사를 알아 볼 뿐이다. 어떻게 갑자기 데리고 갈 수 있겠는가.’ 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에는 반드시 흉도가 사주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만일 이미 죽었다고 한다면 반드시 구실을 삼을 것이고 죽지 않았다고 한다면 화가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이니, 큰 아이도 죽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저들이 출발할 때에 말한다면 온당하지 못할 것 같다."
하니, 행원이 아뢰기를,
"신의 의견도 그러합니다."
하고, 자점은 아뢰기를,
"저들이 기필코 데리고 가려 한다면 차라리 편의에 따라 처치할지언정 데리고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누설할 사람은 역관들뿐이다. 역관들 가운데 의심스러운 자가 없는가?"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단서를 잡지 못했으니 먼저 의심부터 할 수는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역강(逆姜)이 금주(金珠)와 금기(錦綺)로 흉도들과 체결했고 또 서찰을 보냈으니, 지금의 상황으로 살펴본다면 흉도들 중에 아직도 법망에서 벗어난 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대사헌 최혜길(崔惠吉)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기조를 삼척 부사에 제배했습니다. 전에 헌부가 민형남(閔馨男)을 논박할 때 단지 그가 정청(庭請)에 참여했었다는 것을 거론했는데, 백년 등이 이에 감히 기회를 틈타 쳤기 때문에 옥당이 차자를 올려 체직시킬 것을 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기조 등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일에는 시비가 있는 것인데 시비가 분명하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 꼴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기조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강백년만 외직에 보임해야 되겠는가. 이렇게 천재가 한꺼번에 닥칠 때를 당하였으니, 대소 신료들이 힘을 합치고 마음을 같이해도 오히려 조석 사이도 보전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저들이 어떻게 감히 분당(分黨)하여 서로 원수가 되어 사적인 원수에게 보복하듯이 급급히 차자를 올릴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혜길이 아뢰기를,
"이는 당론(黨論)이 아니라 그에 대한 시비를 밝히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3월 8일 계묘

함경도에 여역이 크게 치성하여 사망한 백성이 매우 많았다. 감사가 아뢰니, 상이 본도로 하여금 특별히 구호하여 미염(米鹽)으로 구제하게 하였다.

 

왕세자가 관소(館所)에 나아가 청나라 사신을 만나보고 연회를 베풀었다.

 

3월 9일 갑진

대사헌 최혜길이 아뢰기를,
"무릇 신계(新啓)할 것이 있으면 제좌(齊坐)하기도 하고 간통(簡通)하기도 하여 상의해서 아뢰는 법이며 만일 입시할 때를 만나 통의(通議)할 겨를이 없으면 일에 따라 논열하는 것이 준례인 것입니다. 전계(前啓)의 경우에는 간통만 하고 연계(連啓)하는 것이 또한 준례인 것입니다. 신은 이기조와 강백년을 외임에 보직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들었는데, 신의 생각에는, 범연하게 사체를 가지고 논한다면 옥당과 미원(薇垣)의 신하를 특명으로 외직에 보임시킨 것은 모두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만, 이번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일을 논한 것이 시비가 현격한데도 시비를 분변하지 않고 뒤섞어 죄벌을 가했으니, 이는 호오(好惡)의 구별이 없는 것으로 공론이 행해지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백년은 이미 간원에서 체직되었는데 반하여 기조는 바야흐로 경악에 있는데, 갑자기 먼 외방으로 좌천시킨다는 것은 사체상 더욱 같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때문에 신이 기조의 일만을 가지고 환수할 것을 청한 것이며 물러나온 뒤에 즉시 동료들에게 알렸습니다. 어제 전례에 따라 연계할 뜻으로 간통을 보내었더니 동료들이 이에 제좌(齊坐)하여 상의할 것으로 말을 했기 때문에 결국은 궐계(闕啓)하고 말았습니다. 대관의 구규가 여기에 이르러 추락되었는데, 이는 실로 신이 경시당한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납 김식이 아뢰기를,
"신이 옥당에 있을 적에 이기조와 함께 의논하여 차자를 올렸는데도 견책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에 도리어 언관이 되었으니, 신은 참으로 황송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과 기조는 시종 다른 것이 없으니, 엄한 비답 아래 결단코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집의 성이성(成以性)이 아뢰기를,
"간원이 망령되이 논한 것에 대한 잘못을 옥당이 규계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기조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에 대해 장관(長官)이 환수할 것을 청한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대각의 논계는 반드시 동료들과 의논해 정해야 하는데, 만일 등대(登對)할 시기가 급하여 회답이 오기를 기다릴 겨를이 없으면 한편으로 서간(書簡)을 보내어 알리는 것도 본래의 규례이니, 물러나온 뒤에 의계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장관이 탑전에서 먼저 발론한 뒤에 간통했으니, 이는 상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만, 신이 시끄러운 단서를 야기시키고 싶지 않아서 상의하여 의계하자는 것으로 회답하여 보냈습니다. 장관이 이미 이것을 이유로 인피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3월 10일 을사

인경궁(仁慶宮)의 재목과 기와를 철거해다가 홍제원(弘濟院)을 짓게 하였다.

 

3월 11일 병오

선전관(宣傳官) 김원위(金元瑋)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이에 경성익(景星翼)·정신경(鄭信卿)의 수금(囚禁)을 풀어 주었다. 이에 앞서 정명수가 나왔을 적에 성익 등을 금부에 가두어 두고 표류된 한인(漢人)의 물화가(物貨價)로 은 3만 냥을 징수하려고 했었는데, 비국에서 아뢰어 김원위를 보내어 자문(咨文)을 가지고 청나라에 가서 요청하게 하였던 바, 청국에서 모두 풀어주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이조 판서 민형남(閔馨男)이 소장을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살펴보고 나서야 비로소 경이 이의를 제기한 것이 이와 같이 단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저들이 사심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의논에 대해서는 개의할 것도 없다. 굳이 사직하지 말고 속히 출사하여 행공하도록 하라."
하였다. 소장이 세 번이나 이르러서야 이에 허락하였다.

 

3월 12일 정미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왕세자가 모화관에 나아가서 전송하였다.

 

강릉 부사(江陵府使) 이회(李禬)에게 표리(表裏) 1습을 하사하였다. 이회는 인품이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어서 주군을 두루 맡으면서 모두 유능하다는 이름을 얻었는데, 강릉에 있은 지 수년에 부중(府中)이 잘 다스려졌다. 암행 어사가 그의 치적이 최고라고 아뢰었으므로 상이 포상하라고 명한 것이다.

 

3월 14일 기유

심액(沈詻)을 대사헌으로, 정태화(鄭太和)를 예조 판서로, 조형(趙珩)을 집의로, 곽성귀(郭聖龜)·심택(沈澤)을 장령으로, 성이성(成以性)을 응교로, 정언벽(丁彦璧)을 정언으로, 이정영(李正英)을 수찬으로, 이상진(李尙眞)을 검열로, 정언황(丁彦璜)을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삼았다. 처음 세 아이를 제주(濟州)로 정배(定配)할 적에 상이 마침 구언하는 하교를 내렸으므로 언황이 소장을 올렸는데, 제일 첫머리에 세 아이는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니 의당 동궁(東宮)으로 하여금 길러서 보전시켜야 된다고 했고, 그뒤 이완(李)도 말하였다. 그랬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세 아이의 일로 힐문하게 되자, 김자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사대부들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더구나 청나라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이들을 청로(淸路)에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하니, 언황이 드디어 외직으로 나갈 것을 청한 것이다.

 

3월 16일 신해

정창주(鄭昌胄)를 동래(東萊)로 보내어 차왜(差倭) 평성춘(平成春)을 접대하게 하였다.

 

전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만영(李晩榮)을 함안군(咸安郡) 춘곡역(春谷驛)으로 장배(杖配)하였다.

 

집의 조형(趙珩)이, 최혜길(崔惠吉)이 탑전에서 논한 것 때문에 연계하기를,
"자신이 하자를 지니고 있으니 전장(銓長)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는 없을 수 없는 정론(正論)인 것인 바, 탄핵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강백년 등은 공의를 무시하고 앞장 서서 언관을 친 사람을 신구하고 있으니, 성상께서도 반드시 그 정적(情迹)을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체직시킬 것을 논한 것은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갑자기 이를 당여를 비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특별히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물정이 탄식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일에는 시비가 있고 정에는 곡직이 있는 법으로, 시비가 분명하지 않으면 호오가 올바르게 될 수 없는 것이고, 곡직을 분변하지 않으면 공론이 무엇을 통하여 행해지겠습니까. 천하에는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이치는 없는 것입니다. 이기조의 일을 어떻게 강백년의 일과 견주어 같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기조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18일 계축

태풍이 불었다.

 

3월 19일 갑인

태백이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서관(西關)의 절도(節度)는 그 임무가 매우 중하여서 다른 곤수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김일(金逸)은 제배한 처음에 이미 물의가 많았는데 부임한 뒤에도 사사로이 영기(營妓)와 간통하여 칙사에게 모욕을 당했으니, 국가를 욕되게 한 것이 심합니다.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록 논하자 비로소 체직을 명하였다.

 

관상감의 점후관(占候官) 윤성신(尹省身) 등을 잡아다가 치죄하라고 명하였다. 18일 밤 유성(流星)의 크기가 항아리만하여 그 빛이 땅을 비추었으므로 그것을 본 사람이 많았는데도 관상감에서 점후하지 못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본감에서 성변(星變)이 있었는데도 아뢰지 않았으니, 해당 관원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잡아다가 추고하라고 명한 것이다.

 

전 삼척 부사(三陟府使) 장자호(張自好)가 죄를 졌으므로 흥해(興海)에 장배(杖配)하였다. 자호는 처음에 이이첨(李爾瞻)에게 빌붙어 청화직(淸華職)을 두루 역임했었는데, 반정이 일어나자 여러 해 동안 유배되었다가 곧 사유(赦宥)를 받았고 이어 큰 고을을 두루 맡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삼척 부사로 있다가 암행 어사 이정영(李正英)의 탄핵을 받았다. 상이, 자호가 범한 것이 이만영(李晩榮)에 비해 중한 것 같다는 것으로 햇수를 정하지 말고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태안 군수(泰安郡守) 신량(申湸), 덕산 현감(德山縣監) 이수창(李壽昌), 의흥 현감(義興縣監) 남두추(南斗樞)도 어사의 장계에 의하여 결장(決杖)하고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천문학 정(天文學正) 송인룡(宋仁龍)을 파견하여 청나라에 가서 서양의 역법(曆法)을 배우게 하였다.

 

이시방(李時昉)을 공조 판서로, 남선(南銑)을 도승지로, 임련(林堜)을 우승지로, 정유(鄭攸)를 헌납으로, 양만용(梁曼容)을 교리로 삼았다.

 

3월 20일 을묘

간원이 아뢰기를,
"해운 판관(海運判官) 홍석기(洪錫箕)는 직무의 봉행을 삼가지 않아서 여러 고을에 폐단을 끼쳤고 홍청 도사(洪淸都事) 이교(李郊)는 술에 젖어 여색을 탐하고 형장을 함부로 썼으니,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2일 정사

경상도 인동(仁同)·경산(慶山) 등지에 3일 동안 눈이 내렸다.

 

윤3월에 백관들의 하등(夏等) 녹봉(祿俸)을 반급하게 하였다. 이때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국용이 부족하였으므로 백관의 녹봉을 감하였었는데, 대신이 아뢰기를,
"사대부들이 모두 궁핍에 시달리고 있고 또 윤달을 만났으니, 하과(夏科) 녹봉을 윤3월에 반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리고 윤달을 계산하여 더 반급하게 하였다.

 

3월 25일 경신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의 미곡을 방출하여 경기의 기민을 구제하게 하였다.

 

심액을 예조 판서로, 정태화(鄭太和)를 대사헌으로, 이행우(李行遇)를 대사간으로, 임전(林)을 사간으로, 이천기(李天基)를 교리로, 심지한(沈之漢)을 부교리로, 목겸선(睦兼善)·이홍연(李弘淵)을 정언으로 삼았다.

 

수리 도감(修理都監)이 저승전(儲承殿) 외랑(外廊)의 서쪽 처마 아래의 섬돌 안쪽 땅 한 자 반쯤의 깊이에서 썩은 뼈 두어 줌을 파내었다. 드디어 행랑의 섬돌 안쪽을 두루 파헤쳐 썩은 뼈, 까치, 옷을 태운 재 등의 물건을 많이 얻었다. 도감이 이런 내용으로 아뢰고 인하여 신생(辛生)을 불러 물으니, 신생이 묻은 곳을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역강(逆姜)의 소행입니다. 강(姜)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지 않아 이 궁을 떠나야 하니, 이것을 묻어 뒤에 이 궁에 와서 거처하는 자를 해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도감이 아뢰기를,
"흉칙하고 더러운 물건이 이토록 낭자하니, 전의 행랑을 모두 철거하고 구토(舊土)를 파내어 버린 다음 새 흙을 가져다가 개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헐어내지 말고 단지 그 흙만 파내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지금 이 저승전에 흉한 물건을 묻은 것은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자기가 현재 거처하고 있는 궁실에다 스스로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묻어 뒤에 이 궁실에 거처하는 사람을 해치게 하려고 했다 하는데 흉하고 더러운 것을 묻고 나서 강(姜)이 즉시 떠나지 않았으니, 그 사특한 빌미가 반드시 뒤에 거처하는 사람만 해치고 현재 거처하고 있는 사람은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알겠는가. 간악한 자의 소위는 반드시 이와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의심스러운 일이다. 강(姜)이 병술년004)  에 죽었는데 어찌하여 그가 살았을 적에 묻은 마른 까치가 땅속에서 두어 해나 지났는데도 형체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는 채 부패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것이 두 번째 의심스러운 일이다. 신생은 강과 함께 악한 짓을 한 사람으로서 이미 스스로 살길을 도모해 강의 악역(惡逆)에 대한 정상을 다 토로하였으며, 대내(大內)에 묻은 흉물(凶物)들도 일일이 발굴해 내었다. 그런데 또 강에 대해 무슨 애석하게 여겨 돌아볼 것이 있어서 저승전에 묻은 흉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가 이제 도감에서 발굴한 뒤에야 그곳을 가리켜 말한단 말인가. 이것이 세 번째 의심스러운 일이다. 아, 신생을 잡아다가 외정(外廷)에 맡기고 이러한 의심스러운 단서를 가지고 엄히 국문하고 분명히 신문한다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지 않으니,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없다.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20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註 004] 병술년 : 1646 인조 24년.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지금 이 저승전에 흉한 물건을 묻은 것은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자기가 현재 거처하고 있는 궁실에다 스스로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묻어 뒤에 이 궁실에 거처하는 사람을 해치게 하려고 했다 하는데 흉하고 더러운 것을 묻고 나서 강(姜)이 즉시 떠나지 않았으니, 그 사특한 빌미가 반드시 뒤에 거처하는 사람만 해치고 현재 거처하고 있는 사람은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알겠는가. 간악한 자의 소위는 반드시 이와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의심스러운 일이다. 강(姜)이 병술년004)  에 죽었는데 어찌하여 그가 살았을 적에 묻은 마른 까치가 땅속에서 두어 해나 지났는데도 형체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는 채 부패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것이 두 번째 의심스러운 일이다. 신생은 강과 함께 악한 짓을 한 사람으로서 이미 스스로 살길을 도모해 강의 악역(惡逆)에 대한 정상을 다 토로하였으며, 대내(大內)에 묻은 흉물(凶物)들도 일일이 발굴해 내었다. 그런데 또 강에 대해 무슨 애석하게 여겨 돌아볼 것이 있어서 저승전에 묻은 흉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가 이제 도감에서 발굴한 뒤에야 그곳을 가리켜 말한단 말인가. 이것이 세 번째 의심스러운 일이다. 아, 신생을 잡아다가 외정(外廷)에 맡기고 이러한 의심스러운 단서를 가지고 엄히 국문하고 분명히 신문한다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지 않으니,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없다.

 

3월 26일 신유

무주(茂朱)·용담(龍潭)·금산(錦山) 등 고을의 내년 전세(田稅)를 적상 산성(赤裳山城)에 실어다 두어 긴급한 때의 쓰임에 대비하게 했는데, 이는 감사 이시해(李時楷)의 청에 따른 것이다.

 

비국이, 통영(統營)의 조세(租稅) 8천여 석을 나누어 양서(兩西)를 구제하게 하고 가을이 된 뒤에 환상(還償)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3월 27일 임술

경기 감사 유철(兪㯙)이, 삼남(三南)의 진휼곡을 옮겨다가 경기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구제하게 할 것을 청하니,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아뢰기를,
"우선 통영의 조곡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상이 여러 해 동안 미령한 탓으로 오랫동안 조정에 나아가 시사(視事)하지 않았다. 원중(苑中)에 대사(臺榭)·지관(池館)을 꾸미는 일이 많았고 늘 소여(小輿)를 타고 다녔는데, 궁녀들에게 끌고 가게 하였다. 빈어(嬪御)와 세자(世子)가 수종하여 놀았는데, 늘 이렇게 하였으나 외인은 아무도 몰랐다.

 

3월 28일 계해

수리 도감이 또 저승전 외랑(外廊)의 서남쪽 모퉁이에서 흉칙하고 더러운 물건을 파내었다. 신생에게 물으니, 신생이 말하기를,
"이 뼈는 대부분 심양(瀋陽)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담장 위와 기와 사이 및 시민당(時敏堂) 처마 아래의 섬돌에서도 더욱 많은 사람의 뼈를 파내었다. 도감이 아뢰기를,
"신생은 더없이 흉악한 사람으로 그가 실상을 다 실토한다는 것은 진실로 기필하기 어려우니, 북쪽 담장을 철거하고 개축하소서. 그리고 시민당·진수당(進修堂)과 장경각(藏經閣) 등처는 아울러 벽의 묵은 흙을 제거하고 새흙을 다시 바르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담장은 헐지 말고 기와만 고치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수리 도감의 계사를 살펴보건대, 저승전의 월랑(月廊)과 시민당 등처에 흉물을 묻은 것이 낭자했다고 했습니다. 신생은 본디 역강(逆姜)의 심복으로 그의 지휘에 따랐으니, 처음부터 그의 죄악은 털끝만큼도 용서해야 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국청에서 국문하기를 청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양사에서 잇따라 소장을 올려 논집한 지도 오래 되었는데, 전하께서는 여론을 따르지 않고 흉악한 자를 곡진히 비호하면서 그가 자수한 일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드러난 곳은 모두 전일 발고한 곳이 아니니, 이 밖에 숨기고 있는 곳이 또 얼마인지 모릅니다. 속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여 나라의 법을 바루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신생의 정상이 흉사스럽기는 하지만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
하였다. 이는 상이 신생에게 자수하면 죽이지 않겠다고 허락하여 신생이 자수했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양사가 합계하고 옥당도 차자를 올려 간쟁하였다. 9개월이 지나도록 논쟁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고 단지 정배하라고만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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