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9권, 인조 26년 1648년 윤3월

싸라리리 2026. 1. 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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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3월 1일 병인

강원도 통천(通川)·평창(平昌) 등 고을에 큰눈이 내렸다.

 

윤3월 2일 정묘

강도(江都)의 진휼청 조곡(租穀) 6백여 석을 강도와 안산(安山) 등 여덟 고을의 농민에게 종자로 쓰도록 나누어 주었다.

 

남이웅(南以雄)을 좌의정 및 세자부(世子傅)로, 박서(朴遾)를 대사간으로, 오정일(吳挺一)을 부응교로, 김중일(金重鎰)을 부교리로, 김식을 수찬으로 삼았다.

 

윤3월 3일 무진

수리 도감이 저승전의 동북쪽 섬돌과 담장을 개축하다가 옥보(玉寶) 2개를 얻어서 올렸다.

 

윤3월 4일 기사

좌상 남이웅이 차자를 올려 사면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이완(李)이 전남도 태인현(泰仁縣)에 있으면서 소장을 올려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고 인하여 시폐에 대해 진달했는데, 소장이 들어간 지 4일이 되어서야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평 이완이 피나는 정성을 다하여 진달한 소장의 내용에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성심이 말 밖에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전하께서 반드시 즐겨 들으시고 아름답게 여겨 포장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입계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한 글자의 비답도 내리지 않고 단지 그를 체직시키게 하였을 뿐입니다. 임금이 언관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로부터 한 사람도 진언하는 이가 없게 될까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의 말이 옳다."
하였다.

 

윤3월 5일 경오

전 영의정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가 졸했는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류가 병을 얻어 갈수록 위독해지자 상이 잇따라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살피게 하고 자주 약물을 내렸다. 병이 위독하게 되자 김류가 차자를 올려 사례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신이 곧 죽게 되어 다시 은혜에 보답할 것을 도모할 길이 없어 몸뚱이만 어루만지면서 슬피 우노라니,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이 지금 성상께 영결(永訣)을 고하면서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성상을 크게 저버리는 것입니다. 신은 정신이 혼란하여 인사를 살필 수가 없습니다만, 임금을 사랑하는 구구한 정성은 죽음에 이르렀어도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하늘의 노여움을 조심하여 국운이 영원하기를 빌고, 백성의 고통을 돌아보시어 나라의 근본을 공고하게 다지시며, 사의(私意)를 억제하여 충간(忠諫)을 받아들이시고, 현재(賢才)를 진용하여 명기(名器)를 중하게 하소서. 신은 여러 달 고질병에 시달려 병석에 누워 있기 때문에 끝내 다시 전하를 우러러 뵐 수 없으니, 구원(九原)의 아래에서 반드시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찮은 신의 하나의 큰 한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열람한 다음 안타까운 마음으로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살펴보고 내가 매우 놀랍고 슬펐다. 훈계한 내용은 모두가 지론이었으니, 내가 불민하지만 명심하고서 힘써 행함으로써 경의 지극한 뜻에 부합되도록 하겠다."
하였다. 또 승지를 보내어 병을 묻게 했고 세자도 궁료를 보내었으나 김류는 이미 말을 할 수 없었다. 향년은 78세였다. 장생전(長生殿)의 관판(棺板)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김류는 근엄한 마음과 굳센 의지에 기국이 있었으므로 일찍이 공보(公輔)의 기대를 지니고 있었다. 계해년에 정사원훈(靖社元勳)에 책봉되어 일대의 종신(宗臣)이 되었다. 이조 판서로서 문형을 맡았고 도체찰사를 겸했으며 다섯 번 상부(相府)에 들어갔었다. 추숭(追崇)과 강옥(姜獄)이 있을 적에는 모두 정당함을 지켜 동요하지 않아 끝내 대계(大計)를 도와 이루고 국본(國本)을 정하였으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품이 자기의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여 남의 선을 따르는 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병자년과 정축년의 난리 때에는 패자(敗子)에게 중임을 제수하여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통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윤3월 6일 신미

함경도에는 정월부터 비가 오지 않았는데 3월에까지 이르렀다.

 

영상 김자점과 우상 이행원이 이완의 소장을 인하여 차자를 올려 사면을 청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익산(益山) 사람 오진겸(吳震謙)의 노비가 내수사로 투탁(投託)하자 진겸이 부여(扶餘) 관아에 고하여 쟁송하였는데, 관에서 분명히 결단할 수 없어 드디어 속공(屬公)시켰다.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도로 내수사로 예속시키기를 계청하니, 좌승지 김휼(金霱)이 아뢰기를,
"내수사와 서로 쟁송했는데 도로 내수사에 예속시킨다면 송법(訟法)에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또 왕자의 지공무사한 도리에도 손상이 됩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윤3월 7일 임신

좌의정 남이웅(南以雄)이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다시 차자를 올려 사면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승평 부원군 김류의 녹봉을 3년을 기한으로 그대로 그의 집에 지급하게 하였다.

 

남한 산성의 쌀 4백 석을 방출하여 역부(役夫)들을 고용해서 성첩(城堞)을 수축했다.

 

예조가 아뢰기를,
"병자년 이후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서(曆書)가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유독 금년에만 윤법(閏法)이 서로 어긋났으니, 이는 틀림없이 일관(日官)이 추산(推算)한 것에 착오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윤달이 4월에 드는 것이 옳다면 이달의 제향(祭享)과 국기(國忌)는 모두 시일을 어긴 것이 되어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일관을 추고하여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영상 김자점, 우상 이행원이 아뢰기를,
"청나라에서는 지금 탕약망(湯若望)의 신법(新法)을 쓰고 있습니다만 우리 나라는 그대로 구법을 쓰고 있습니다. 이제 일식과 월식을 가지고 증험하여 보더라도 어긋나는 점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산법(算法)을 완전히 착오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축년005)  의 역서를 가져다가 상고해 보면 이것은 바로 명나라에서 반사한 것을 병자년에 인출한 것인데, 그 역법이 우리 나라의 역법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청나라가 심양에 있을 적에 보낸 역일(曆日)은 대체로 서로 같았는데, 북경으로 들어간 뒤 비로소 서양의 신법에 의거하여 인조(印造)해서 천하에 반행(頒行)하는 역법으로 만들었으니, 이는 명나라 때에는 있지 않던 법으로, 우리 나라의 일관은 아직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명나라의 《시용통서(時用通書)》와 《삼태력법(三台曆法)》을 고찰해 보건대 《통서》에는 금년의 윤달이 3월에 들어 있는 것이 모두 분명히 기재되어 있으니, 3월이 윤달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이때 이조 판서 한흥일(韓興一)이 혼자서 청력(淸曆)이 옳다고 하면서 집안의 제삿날을 모두 청력에 의거하여 했는데, 사람들이 모두 무식한 것을 딱하게 여겼다.
사신은 논한다. 흥일은 본디 천문(天文)에 달통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청력이 과연 옳다는 것을 알아서 결단을 내려 사용한단 말인가. 이는 진함(陳咸)이 한(漢)나라의 조랍(祖臘)을 썼던 것006)  과는 다르니, 몹시도 형편없다.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21면
【분류】과학-역법(曆法) /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註 005] 정축년 : 1637 인조 15년.[註 006] 진함(陳咸)이 한(漢)나라의 조랍(祖臘)을 썼던 것 : 진함은 후한(後漢) 성제(成帝)·애제(哀帝) 때 상서(尙書)를 지냈는데, 왕망이 집권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뒤 일체 출입을 않고 있으면서 한나라의 조랍(祖臘)을 사용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권46.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흥일은 본디 천문(天文)에 달통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청력이 과연 옳다는 것을 알아서 결단을 내려 사용한단 말인가. 이는 진함(陳咸)이 한(漢)나라의 조랍(祖臘)을 썼던 것006)  과는 다르니, 몹시도 형편없다.

 

윤3월 8일 계유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구진성(鉤陳星) 위로 들어갔다.

 

도승지 남선(南銑)을 보내어 김류의 상사(喪事)에 조문하게 하였다. 세자도 궁관(宮官)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윤3월 10일 을해

헌부가 아뢰기를,
"홍청 감사의 계본에 ‘오진겸(吳震謙)이라는 자가 내사(內司)와 더불어 쟁송한 노비를 양쪽 다 부당하다는 이유로 속공(屬公)시켰는데, 다른 관사로 예속시키지 말고 도로 내수사로 예속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내수사가 공사(公司)이기는 하지만 이곳도 부당한 쪽인데 쟁송하던 노비를 그대로 예속시킨다는 것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관가에서 법을 적용하는 것을 이렇게 한다면 장차 어떻게 백성에게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감사 조계원(趙啓遠)은 뒤폐단을 생각하지 않고 이런 계청을 하였으니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고 그 노비는 다른 관사에 예속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누차 아뢰니, 이에 따랐다.

 

경상도 금산(金山) 등지에 도적이 많았는데 본토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피해를 당할까 두려워 감히 발고(發告)하지 못하였다. 박안형(朴安亨)이란 자가 청주(淸州)에 살고 있는데 일찍이 일 때문에 금산을 왕래하였다. 그런데 금산의 어떤 무뢰한 하나가 쪽지를 안형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종이에 쓴 사람은 대도(大盜)이다."
하였는데, 거기에는 자기와 평소 혐원(嫌怨)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기록했으며 또한 향소(鄕所)의 생원·진사도 들어 있었다. 안형이 크게 기뻐하여 이석룡(李碩龍)처럼 부귀를 얻기를 기대하고 드디어 그 사람을 데리고서 자기의 종이라고 거짓말을 하고는 서울로 들어가 연양군(延陽君) 이시백(李時白), 병조 판서 구인후(具仁垕) 등에게 밀고하였다. 이때 이급(李圾)이 새로 경상 우병사에 제수되어 장차 부임하려 했는데, 시백과 인후가 안형이 준 쪽지를 이급에게 주면서 그로 하여금 은밀히 체포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이급이 상주(尙州)에 이르러 58인을 체포하였는데 거의가 양민이었고 그 가운데 의심스러운 자는 두어 사람뿐이었다. 엄한 형장을 가하여 고문했는데 처음에 발고한 자와 면질(面質)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원통하다고 하면서 자복하지 않았고, 또한 형장을 맞다가 죽은 자도 있었다. 이급이 단서를 잡을 수 없자 그 일을 상주 목사 권훈(權勛)에게 맡겼다. 권훈이 감사 이만(李曼)에게 첩보(牒報)하기를,
"옥사를 다스리는 방도는 반드시 증거로 삼을 만한 단서가 있은 다음에야 반복해서 구문(鉤問)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 반드시 발고한 사람이 있은 다음에야 사안에 따라 서로 대질시킴으로써 죄인으로 하여금 말을 꾸밀 수 없게 만들어 마침내 실상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허다한 죄인들이 거의 반이나 고문을 받았는데도 한 사람도 실토하는 사람이 없으며, 또 발고한 사람을 데려다 대질시키지도 않은 채 죽도록 형추하는 것은 실로 옥사를 다스리는 체모가 아닙니다."
하니, 이만이 이에 의거하여 치계하기를,
"다시 박안형을 불러다가 죄인과 같은 곳에서 대변(對辨)하게 한 다음 엄명하게 추핵함으로써 횡액이 걸려 옥에 갇히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그리고 병사(兵使)에 대해서는 발고한 사람을 면질시키지 않고 곧장 형신을 가했다는 이유로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그뒤 안형이 소장을 올려 그들이 대도적임을 밝히고 또 이급이 옥사를 완만하게 다스렸고 권훈이 도적을 체포하는 일을 회피하였다고 했기 때문에 이급·권훈·박안형을 잡아다가 아울러 죄주게 하였다.

 

처음에 호위청(扈衛廳)에 대장 둘과 당상 둘이 있었는데, 김류·이귀가 두 대장이었고 김자점·구인후가 두 당상이었다. 대장은 각기 군관 1백 40인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관에서 급료를 주는 사람은 60인이었으며, 당상은 각기 80인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관에서 급료를 주는 사람은 30인이었다. 이귀가 졸하자 상이 그의 아들인 이시백(李時白)에게 대신 거느리게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류가 또 졸했으므로 상이 그 반을 뽑아서 구인후에게 예속시키게 하고 그 나머지는 파하여 보내라고 명하였다.

 

윤3월 11일 병자

정언벽(丁彦璧)을 지평으로, 김응조(金應祖)를 교리로, 김중일(金重鎰)을 수찬으로, 오정일(吳挺一)을 사간으로 삼았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김여수(金汝水)가 치계하기를,
"본주는 아득한 큰 바다 밖에 위치해 있으므로 위급한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믿을 수 있는 것이 속오병뿐입니다. 그런데 본주와 정의(旌義), 대정(大靜) 세 고을의 속오병은 단지 3 사(司)뿐이어서 1영(營)에도 차지 않는데다가 노약자들로 구차스럽게 충차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신이 세 고을을 돌면서 도내(島內)의 군민을 조사해 그 중 가합한 자를 가려서 액수에 맞게 충정하고 2사를 더 증설하여 1영을 만들겠습니다. 또 주군(州軍) 가운데 건장하고 무예가 있는 사람 2백여 인을 선발하여 아병(牙兵)과 별초(別哨)를 만들어 뜻밖의 변에 대비하게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병조에 내렸다. 병조가 회계하기를,
"제주의 방비책은 육지에 비해 더욱 중요합니다. 평시에는 육군(陸軍)이 첨방(添防)하는 법규가 있었는데 난을 겪은 뒤 정폐한 지 이미 오랩니다. 장건한 사람을 더 뽑아서 부오(部伍)를 만든다면 군정에 유익할 것이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윤3월 12일 정축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으로 들어갔다.

 

상이 경기 감사에게 하교하여 김류의 묘산(墓山)에 제막(祭幕)을 만들어 주게 하였다.

 

윤3월 13일 무인

상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들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비국에서 일찍이 순릉(順陵)의 석물을 개수하는 일 때문에 면대하여 정하기를 청했는데, 이날에 이르러서야 인견한 것이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순릉의 석물에 대해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새것으로 바꾼다면 공역이 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능 위의 섬돌과 사초(莎草)도 걷어내야 한다. 약간만 깎아내고서 전의 것을 그대로 쓰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순릉의 문무석(文武石)을 건원릉(健元陵)의 문무석에 비교해 보면 그 몸체가 조금 크니, 전의 것을 그대로 둔 채 깎아내고 쓰더라도 건원릉의 것만 못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좌상 남이웅(南以雄)에게 하문하자, 이웅이 대답하기를,
"선묘조 때에도 선릉(宣陵)의 석물을 깨진 데만 보완하여 그대로 쓴 고사가 있으니, 지금도 깎아내고 그대로 쓰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재신들에게 하문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참으로 대신의 말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부덕한 탓으로 선릉(先陵)에 욕을 끼쳤으니, 개조하지 않으면 예에 있어 부당할 것 같다. 다시 공조와 예조의 당상을 보내어 건원릉(健元陵), 경릉(敬陵), 선릉(宣陵), 정릉(靖陵)의 석물의 크기와 두께를 살펴 척량(尺量)하게 한 다음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금년의 양맥(兩麥)이 어떠한가? 비가 조금 내리다가 곧 개었으니 가뭄의 조짐이 우려스럽다."
하니, 도승지 남선(南銑)이 대답하기를,
"듣건대 삼남(三南)에는 비가 흡족히 내려 양맥이 무성하나, 경기와 양서에는 가뭄이 심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윤3월 14일 기묘

공조 판서 이시방(李時昉), 예조 참의 이성신(李省身)을 보내어 여러 능의 석물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시방 등이 돌아와서 별단(別單)으로 서계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대신이 회계하기를,
"지금 봉심한 별단을 살펴보니, 각릉의 석물의 길이와 두께가 서로 같지 않습니다. 순릉의 혼유석(魂遊石)은 건원릉의 혼유석에 비해 길이는 1척 1촌이 작고 두께는 3촌이 더하니, 두꺼운 데에서 깎아내도 오히려 건원릉의 제도보다 못하지 않겠습니다. 문무석의 몸체도 조금 커서 깎아내더라도 건원릉만 못지 않겠습니다. 더구나 선릉·정릉은 그대로 두고 수보한 고사가 있으니, 전에 탑전에서 결정한 대로 시행하여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의논한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윤3월 16일 신사

서리가 내렸다.

 

윤3월 17일 임오

서리가 내렸다.

 

상이 하교하기를,
"이경여(李敬輿) 등을 남쪽 지방에 둔 것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불편한 듯하니 모두 북쪽 변방으로 이배(移配)시키라."
하니, 의금부가 아뢰기를,
"경여는 회령(會寧)에, 홍무적(洪茂績)은 종성(鐘城)에, 심노(沈𢋡)는 부령(富寧)에 안치시키소서."
하였다. 상이 이에 경여는 삼수(三水)에, 무적은 갑산(甲山)에 안치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때 소현 세자의 세 아이가 제주에 있었는데 상이 경여 등을 의심하여 드디어 옮긴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뜻밖의 변이 지친 사이에서 발생했으니, 그에 대한 실상이 밝혀지지 않았을 적에는 진실로 용이하게 처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경여 등이 그 사이에 어찌 다른 뜻을 품었겠는가. 그런데도 이제 깊이 미워하고 크게 의심하여 극변의 험악한 곳으로 옮겨 기필코 죽이고야 말려고 하니, 아, 어찌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22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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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뜻밖의 변이 지친 사이에서 발생했으니, 그에 대한 실상이 밝혀지지 않았을 적에는 진실로 용이하게 처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경여 등이 그 사이에 어찌 다른 뜻을 품었겠는가. 그런데도 이제 깊이 미워하고 크게 의심하여 극변의 험악한 곳으로 옮겨 기필코 죽이고야 말려고 하니, 아, 어찌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내시(內侍) 이봉정(李奉貞)의 아들 이물(李岉)이 선묘(宣廟)의 어제(御製)·어필(御筆)을 진헌하니, 이물에게 6품의 실직을 제수하게 하였다.
이봉정은 선묘조 의 총신(寵臣)이었는데 임진 왜란 때 왕자와 제궁(諸宮)을 모시고 해주(海州)에 머물러 있었다. 경자년 가을 의인 왕후(懿仁王后)가 서거하자 봉정이 분곡(奔哭)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가 다시 해주로 돌아갈 적에 선묘께서 직접 칠언 사운의 율시(律詩)를 지어 어필로 당선(唐扇)에 써서 하사하였는데, 그 시는,
네가 멀리 해주에서 온 것이 그지없이 기쁘거니
금대에서 꿈길을 헤매인지 그 몇 해이던가
봄 맞아 흔들리는 버들가지 수심을 돋구니
옛 동산에 핀 찬 매화꽃 차마 못 볼레라
구름에 잠긴 교산엔 숲 그림자 끊겼고
달은 장신궁에 밝은데 기러기 소리 애절하네
간곡히 이르노니 직무에 부지런하여
나의 말 저버리지 말고 몸받을진져
하였다. 그 끝에는 ‘이상은 이봉정이 해주로 돌아갈 적에 증정한 것이다.[右贈李奉貞還海州]’라는 여덟 자의 작은 글씨가 있었는데, 어필이었다. 이에 앞서 정광후(鄭光後)란 자가 선묘의 어필을 바치고 6품의 실직을 제수받았었는데, 봉정의 양아들 이물이 드디어 요행을 바라는 계책을 내어 그 부채를 바치니, 상이 직을 제수하라고 명한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내시의 양아들에게 갑자기 6품의 정직을 제수하였으니, 명기를 욕되게 함이 심하다.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22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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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내시의 양아들에게 갑자기 6품의 정직을 제수하였으니, 명기를 욕되게 함이 심하다.

 

박서(朴遾)를 대사헌으로, 이행우(李行遇)를 대사간으로, 유준창(柳俊昌)을 장령으로, 양만용(梁曼容)을 응교로, 이해창(李海昌)을 교리로, 정유(鄭攸)를 수찬으로, 유경창(柳慶昌)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윤3월 20일 을유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도승지 남선(南銑), 좌승지 김휼(金霱), 우부승지 유황(兪榥), 동부승지 심지원(沈之源)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보건대, 근래 천재가 매우 참혹하고 시사가 점점 어려워져 백성들의 곤궁이 극도에 다다랐고 여러 사람들의 답답해 하는 마음이 극심하여, 위급한 사세가 조석도 보전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신들은 국가가 끝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근래 옥후가 여러 해 동안 미령하여 임금과 신하 사이가 천리처럼 멀어짐에 따라 상하의 마음이 막혀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기상이란 말입니까. 비록 날마다 평상시처럼 경연을 열지는 못하더라도 위에서 편전에 기거하시면서 신료들을 불러들여 인접하면서 세무(世務)에 대해 논란하고 치도를 강구한다면, 시정(時政)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방도와 성상께서 조섭하는 방도에 있어 또한 조금이나마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번 박길응(朴吉應)이 진달한 내용은 실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는 이에 ‘임금이 병을 앓고 있는데도 경연을 열 것을 억지로 청한 전례가 있는가?’라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완(李)의 소장은 현재의 병통에 절실한 것으로, 전하께서 의당 가납하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날 동안 내리지 않고 있다가 끝내 계자(啓字)를 찍음으로써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어 충간(忠諫)의 길을 막았습니다. 신들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신생(辛生)의 일에 이르러서는,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누군들 그의 살점을 먹고 가죽을 깔고 자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삼사가 극력 간쟁했는데도 오랫동안 유음을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신들은 진실로 성상의 생각을 알고 있습니다만, 나라 사람들의 공론에 대해서 또한 이와 같이 굳게 거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들이 듣건대, 전하께서 이어(移御)하신 뒤 특별히 침전 곁에다 당(堂)을 하나 지었다고 하는데, 전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 좁다고는 하지만 순임금이 거처하였던 삼등(三等)의 흙 계단과 처마끝의 띠풀을 자르지 않은 집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공산(公山)과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에서 곤액을 당하신 일이 있으셨는데, 당시에 거처하던 곳의 누추함이 어떠했습니까.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에 환난에 처하였던 때의 어려움을 잊으셨단 말입니까. 신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자질로 가까운 곳에서 모시고 있기 때문에 구구한 소회를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이 논한 것이 모두 나의 잘못에 적중되는 것이었다. 그 훌륭한 말을 거듭 읽으면서 거듭 아름답게 여겨 찬탄했다. 그러나 끝에 진달한 것은 진실로 사실이 아니니, 이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바이다."
하였다. 계사는 유황이 초안한 것이다.

 

간원이 아뢰기를,
"사국(史局)의 하번(下番)은 질병이나 복제(服制)가 있어도 감히 지방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겸춘추(兼春秋)에게 대신 일을 보게 하고서 상번·하번이 함께 없을 때도 있음은 물론, 소명을 받고도 달이 지나도록 제때에 나오지 않은 채 서로 비난하는 의논만 하면서 새로 천거하지 않고 있으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주서(注書)에 이르러서는 가관(假官)을 차임하여 이미 천망한 사람이 있는데도 중지한 채 미루고 있으니, 더욱 놀랍습니다. 해당 한림(翰林)·주서를 아울러 무겁게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주서 성진병(成震丙), 봉교 홍우원(洪宇遠), 대교 이상진(李尙眞)이 모두 추고당했는데, 이는 곧 사간 오정일(吳挺一)이 발론한 것이었다.

 

홍명일(洪命一)을 우승지로, 유황(兪榥)을 좌부승지로, 김진(金振)을 우부승지로, 김경여(金慶餘)를 부응교로, 권령(權坽)을 장령으로, 이정영(李正英)을 수찬으로, 심지명(沈之溟)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윤3월 21일 병술

상이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慶春殿)에 행행하여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을 위하여 처녀를 간택했는데, 조 소의(趙昭儀)가 따라갔다.

 

윤3월 23일 무자

왕세자가 고 영의정 김류의 집에 나아가 조제(吊祭)했는데, 일찍이 세자 사(世子師)를 지냈기 때문이었다.

 

암행 어사로 이조 정랑 유경창(柳慶昌)과 부사과(副司果) 이행원(李行源)을 파견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북경에 보내는 사신을 매양 대신으로 차견하고 있는데, 이는 대신이 견디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에도 지탱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이번 우상의 사행(使行)에서 기필코 곡진히 말해서 명나라 때처럼 가함으로 들여보낼 수 있게 했으면 다행이겠다."
하니, 영의정 김자점이 아뢰기를,
"선묘조 때 처음엔 노성한 사람을 육경으로 삼았었으나, 난 후에 연소자들을 발탁 기용한 것은, 그들의 근력이 바야흐로 강건하여 왕명의 수행을 위해 달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성상께서 연소하고 재덕이 있는 자를 간택하여 경재(卿宰)의 품계에 승진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우의정 이행원이 아뢰기를,
"저들이 남쪽의 소식에 대해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물으면 경이 사실대로 말하여 주라."
하였다. 행원이 아뢰기를,
"저들이 다시 세 아이에 대해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큰 아이는 죽었다고 말해야 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역관들 가운데 역강(逆姜)과 친했던 자들은 버려두고 묻지 않을 수 없는데, 지난번에 대신들이 서서히 국문해야 된다고 말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다. 언제 국문해야 되겠는가?"
하니, 자점과 행원이 합사(合辭)하여 아뢰기를,
"현저히 드러난 정상이 없는데 갑자기 국문하는 것이 사체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서로 절친한지의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생(辛生)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생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당시에 심양에 가서 배종했던 관원들은 반드시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하니, 이조 판서 한흥일(韓興一), 대사헌 박서가 아뢰기를,
"역관들은 강관(講官)들과 거처가 동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그들이 하는 짓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땅에 묻은 흉물 가운데 해초(海草) 같은 것은 필시 역관들이 찾아다가 준 것이 틀림없다. 은밀히 역위(易位)를 도모할 적에 역관이 아니면 서로 말을 통할 수 없었을 것이니, 그와 서로 친한 사람은 곧 함께 모의한 자인 것이다. 의심스런 단서가 있는데도 묻지 않는다면 장차 징계되어 금지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하니, 박서가 아뢰기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대사간 이행우(李行遇)가 아뢰기를,
"은밀히 역위를 도모한 일을 국문한다면 나머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역강이 심양에서 돌아올 적에 사찰의 금부처를 가지고 왔는데, 점장이가 불길하다고 하자, 따로 사사로이 역관을 보내 도로 봉황성(鳳凰城)에다 가져다 두었다. 어찌 감히 조정에 품달하지도 않고 사사로이 다른 나라를 왕래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모두들 아뢰기를,
"외신(外臣)들은 전혀 이 일을 몰랐는데 위에서 이미 통촉하고 계시니, 적발하여 엄히 국문해야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역관들 가운데 서상현(徐尙賢)이 가장 친해 심양에 있을 적에 역강이 그를 창밖에 앉히고 밥을 먹이면서 말을 물었다고 한다."
하니, 흥일이 아뢰기를,
"신도 일찍이 소현(昭顯)이 길을 가면서 묻자 상현이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고, 행우는 아뢰기를,
"상현이 친했다는 이야기는 마을에서도 들었습니다."
하였다. 박서와 이행우가 이어 나아가 아뢰기를,
"서상현을 잡아다가 국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이르기를,
"금부처를 가지고 간 사람에 대해서는 다시 내관에게 물어보고 이르겠다."
하였다. 우참찬 조경이 아뢰기를,
"과거에 이식(李植)이 사초(史草)를 찬수하다가 끝내지 못한 채 죄를 얻었고, 지난번에는 또 재황(災荒) 때문에 중지했습니다. 지금 사국을 열지는 않더라도 총재관(摠裁官)은 반드시 미리 뽑아 김류를 대신하게 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마땅히 해야 한다."
하자, 자점이 아뢰기를,
"고사에는 반드시 문관에게 이 직임을 맡겼습니다. 신은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조경이 아뢰기를,
"정온(鄭蘊)이 정축년 변란 때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 의리라는 것으로 스스로 자기의 배를 찔렀습니다. 비록 자결하려던 처음의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절개는 충분히 숭상할 만합니다. 그 뒤에는 감히 처자의 봉공(奉供)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을 수 없어 산속으로 물러가 은거하면서 일생 동안 고생스럽게 지냈으니, 이 사람에게 의당 포상하여 장려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관직을 내려주지도 않았고 아직껏 증시(贈諡)도 없었으니, 실로 흠전(欠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초막을 짓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예문에 있는 것인가?"
하자, 조경이 아뢰기를,
"옛사람 가운데는 수레 위에서 일생을 마친 사람도 있었는데, 이는 자신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여 뼈아픈 통분을 잊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이 기필코 한번 죽으려 했다면 곧 자결했어야 할 것이요, 만일 죽는 것이 싫었다면 거짓으로 죽으려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이 아직도 살아 자리에 있으니 잘 도와서 종사를 보존시켰어야 했다. 그런데 남쪽으로 물러가 은거한 것은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 국가의 체모에 있어서 어떻게 정표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박서와 이행우가 신생(辛生)의 일을 합계하니, 상이 이르기를,
"현재 궐내에서 흉물을 찾아내게 하고 있다. 다 찾아낸 뒤에 조처하겠다."
하였다.

 

역관 서상현(徐尙賢)과 이신검(李信儉)을 잡아다 국문하였다. 신검은 금부처를 가지고 봉황성으로 간 일 때문이었다. 상현이 공초하기를,
"역강이 심양에 있을 적에 가은(價銀)을 주면서 해초를 사오게 했는데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는 몰랐습니다."
하고, 신검은 공초하기를,
"역강이 과연 금부처 등의 물건을 짐바리에 실어 가지고 되돌아가게 했는데, 그 이유는 몰랐습니다."
하였다. 엄한 형신을 가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은 채 모두 형장을 맞다가 죽었다.

 

윤3월 24일 기축

강원도 평해(平海)·울진(蔚珍)에 홍수가 졌고 고성(高城)에는 눈이 내렸으며, 철원(鐵原)·홍천(洪川)·원주(原州)에는 서리가 내렸다.

 

정태화(鄭太和)를 형조 판서로, 김경여(金慶餘)를 동부승지로, 이완(李)을 지평으로, 성이성(成以性)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경여는 인품이 질박하고 강직하여 진퇴에 구차스러움이 없었다. 물러가서 향리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벼슬길에 뜻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특명으로 자급을 올려 승지에 제수하고 세 번이나 불렀으나 오지 않자, 상이 신하의 분의가 없다는 이유로 파직시켰다.

 

지평 정언벽(丁彦璧)이 소장을 올리기를,
"언로가 막히느냐 트이느냐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이완의 소장 내용은 모두가 절실한 말들이었는데도 끝내 한 글자의 비답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신생(辛生)의 죄는 신인(神人)이 다같이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고 삼사가 교대로 소장을 올려 달을 넘겨 가면서 논쟁하며 고집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곡진히 용서하여 주시니, 실로 성상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벼슬을 탐하는 더러운 관리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자신을 살찌우는 무리들을 대간이 혹 탄핵하여 논박하여도 천청(天聽)은 아득하기만 한 채 윤허하지 않으십니다. 저 탄핵을 참고 떠나지 않으면서 벼슬을 잃을까만 두려워하는 자들은 모두가 비열하고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인데, 전하께서는 이들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혹 경망한 선비가 사실도 잘 모르면서 망령되이 말하였을 경우, 그 말의 광망한 것은 진실로 성상의 덕에 손상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쓸 만한 말이면 쓰고 쓸 수 없는 것이면 버려둘 뿐입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노여움을 진동시키고 한 해가 지나도록 귀양보내셨으니, 이는 실로 성세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말을 들을 즈음에 공평한 마음으로 사리를 살펴 매양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임으로써 사기를 진작시키고 저상되는 일이 없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실로 세도(世道)를 만회시키는 급선무인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지난번 탑전에서 이조의 장관을 오래 비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말한 사람이 있었는데, 전하께서 요즘 사람들의 뜻에 합당한 자를 모르겠다는 것으로 하교하셨다고 합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넓지 못함을 보이십니까. 붕당의 폐해는 예로부터 있어 왔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여러 신하들 가운데에서 어진 사람을 보면 기용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제거하여 출척(黜陟)과 용사(用捨)가 한결같이 공적인 데에서 나오게 한다면, 인물의 권형을 맡은 사람이 또한 어떻게 감히 자신의 사심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구중 궁궐에 깊숙이 거처하면서 신하들을 자주 안 만나면 사람들의 사정(邪正)에 대해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편전이나 와내(臥內)에서 항상 인접하여 치란의 도리에 대해 강론하고 정사의 득실에 대해 묻기도 하면서 말을 잘 들어보고 안색을 잘 살펴 그 사람의 사정을 증험하여 보지 않으십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본원(本源)을 맑게 하여 정대한 대체(大體)를 보존하도록 힘쓰시고 자주 신하들을 인접하여 치도에 대해 강론하게 하되 편사(偏私)한 마음에 먼저 얽매이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장의 내용을 살펴보고 임금을 사랑하는 그대의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소장의 내용은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윤3월 25일 경인

헌부가 아뢰기를,
"옥사를 다스리는 법규는 반드시 발고자와 대변(對辨)하게 한 다음에 비로소 형신을 가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경상 병사 이급(李圾)은 적도(賊徒)들을 다스릴 즈음에 당초의 발고자인 박안형(朴安亨)의 종과 대질하여 핵실하지 않았으니, 증험을 상고할 데가 없어 허실을 분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도 의심스럽다고 하면서 갑자기 형신을 가하여 형장을 맞다가 목숨을 잃은 자가 있게까지 하였으므로, 온 도내의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윤3월 26일 신묘

헌부가 아뢰기를,
"의주(義州)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것을 금하는 국법이 매우 엄한데도 연전에 이신검(李信儉)이, 역강(逆姜)이 보내는 물품을 가지고 사사로이 넘어가서는 오래도록 다른 나라의 경내에 머물러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곳을 지키는 관원의 직무가 무슨 일인데 잘 금단시키지 못하고 마음대로 왕래하게 한단 말입니까. 그때의 부윤을 잡아다가 추고하소서."
하고, 간원도 이런 내용으로 논계하니, 상이 따랐다. 【 그때의 부윤은 홍전(洪瑑)이다.】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23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외교-야(野)

ⓒ 한국고전번역원

 

유학(幼學) 허류(許塯)가 소장을 올리고 선묘(宣廟)의 어필 일곱 폭을 진헌하니, 상이 정광후(鄭光後)의 전례에 의거해 관직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윤3월 27일 임진

정원이 아뢰기를,
"근래 정광후·이물(李岉)·허류 등이 선왕의 어필을 진헌하기도 하고 어시(御詩)를 진헌하기도 하고 어화(御畵)를 진헌하기도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추모하시는 정성에 있어 선왕의 손길이 미친 물건을 구하여 보심에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절로 우러나올 것이라는 것을 신들이 참으로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국가에서 관직을 설치함에는 등급에 존비(尊卑)의 구별이 있는 것으로, 문무(文武)의 출신자(出身者)라 할지라도 모두 순서에 따라서 승진하는 법이며, 은거해 있는 훌륭한 덕을 지닌 선비에 이르러서도 처음 제수하는 관직은 참봉(參奉)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들을 곧바로 6품의 관직에 제배한 것은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명기를 아끼시어 다른 것으로 상을 내리소서.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관직을 제수했으니 지금 다시 고치기는 어렵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선조(先朝)의 어필은 실로 오늘날에 있어 지극한 보배인 것인데 난리를 겪은 뒤에 여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신하로서 감히 사사로이 보관하지 못하고 소장을 올려 진헌하는 것은 진실로 분의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이를 진귀한 보물로 여기는 것은 실로 선왕을 추모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가상하게 여겨 상을 줌에 있어 어찌 다른 방도가 없기에 번번이 주어서는 안 되는 자에게 6품의 직을 가벼이 주어 명기를 혼란시킨단 말입니까. 이물·허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라는 명을 환수하시고, 이미 관직을 제수한 자에 대해서도 또한 개정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간원이 또 이런 내용으로 논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윤3월 28일 계사

이이존(李以存)을 사간으로, 오정일(吳挺一)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연천(漣川)에 사는 15세 된 아이가 몰래 압록강을 건너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러서 정명수(鄭命壽)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고자 하였는데, 명수가 체포하여 우리 나라로 돌려보냈었다. 목베었다.

 

윤3월 29일 갑오

정원이 아뢰기를,
"어제 전계(傳啓)가 있은 뒤 승전색(承傳色)이 본원의 하인을 잡아다가 승지와 사관이 실례하였다고 말하면서 마치 상사(上司)처럼 공공연히 꾸짖었습니다. 이는 근고에 없었던 일이니, 해당 승전색을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림으로써 교만 방자한 습성을 징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보다 하루 전에 내관 주희성(朱希聖)이 전계(傳啓)를 가지고 정원에 도착했을 적에 승지와 사관이 우연히 배읍(拜揖)에 실례를 범하였었는데, 희성이 갑자기 노여움을 발하여 원리(院吏)에게 질책과 욕설을 퍼부었으므로 이를 들은 사람들이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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