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을축
일식이 있었다.
5월 2일 병인
상이 번침(燔鍼)을 맞았다.
5월 3일 정묘
상이 번침을 맞았다. 영의정 김자점이 나아가 아뢰기를,
"어영 대장(御營大將)의 자리가 비어 있으나 가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래도록 의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적(罪籍)에 들어 있는 자 가운데 가합한 사람이 없는가? 사람이 모자라는 것 때문에 오래도록 이 직임을 비워서는 안 된다."
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죄적에 들어 있는 자들 가운데 쓸 만한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이 모르겠습니다. 이완(李浣)은 거상중에 있고 유정익(柳廷益)은 귀양중에 있으며 신경호(申景琥)는 크게 인심을 잃었으므로 이 직임에 제수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됨이 각박해서 그런가?"
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반드시 각박해서는 아닙니다만 그의 성품에 남을 믿지 않는 마음이 있고 또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변(事變)은 미리 알기가 어려운 것이니 일찍 직임을 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원두표(元斗杓)는 본조(本曹)에 일이 많아서 겸하여 맡기기가 어렵고, 이시방(李時昉)은 지금 수어사(守禦使)로 있으니 또한 겸하여 관장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융사(摠戎使)를 차출할 적에 내가 김응해(金應海)의 인품이 그리 잔약하지 않기 때문에 제수하였는데, 대신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응해의 나라를 위한 정성과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겠다는 의지를 난리가 났을 때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재주의 장단점은 모르겠습니다만 조정에서도 비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김익련(金益鍊) 역시 쓸 만한 인재였는데 변방 고을에서 죽었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익련에게 아들이 있는가?"
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그의 아들은 이제 겨우 6, 7세이고 또 노모가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노모가 아직도 살아 있는가? 김응하(金應河)의 아내에게는 틀림없이 이미 급료(給料)를 지급하고 있을 것이니 해조에 물어보라."
하였다. 해조가 아뢰기를,
"임술년008) 의 회계(會計)를 가져다가 상고하여 보니 쌀 10두에 콩 6두씩 매달 제급했었는데, 계해년009) 이후에는 급료를 지급했다는 문서가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더없이 중한 포휼(褒恤)에 대한 법전을 임의로 정폐했으니, 전후 관리의 나태함과 소홀함이 심했다. 이 뒤로는 매달 제급하게 하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포도 대장이 자기의 종사관과 군관들이 상을 받게 하기 위해 좀도둑 하나를 잡고는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으면서 마치 큰 도적을 잡은 것처럼 하였으니, 진실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지난번 효수(梟首)한 도둑은 그 무리가 5, 6인에 불과하였으니 이는 결단코 흉악한 큰 도둑이 아닙니다. 그가 아이를 죽인 일은 이미 취복(就服)했으니 당연히 형조에 이송해야 하는데도 사나운 도적이라고 하면서 곧바로 효시하기를 청함으로써 상을 바라는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해조에서는 또한 전례를 인용하여 진계하면서 다시 철저히 신문하여 조단(照斷)하게 해야 하는데도 단지 포도청의 계목에만 의거하여 갑자기 효시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해당 포도 대장은 파직시키고 포고인(捕告人)에게 논상하라는 명은 환수하며, 형조의 해당 당상과 낭청은 중한 쪽으로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4일 무진
장령 심택(沈澤)이 홍청 감사 조계원(趙啓遠)의 추고에 대한 함답(緘答)에 비난하는 말이 현저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정언 정언벽(丁彦璧)도 일찍이 헌부에 있으면서 그 의논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상이 아울러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처치하기를,
"양쪽이 부당할 경우에는 속공(屬公)시키는 것이 준례인데, 도로 한쪽에 예속시키는 것은 법리에 있어 근거할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억지로 합당하지 못한 율을 인용하여 말을 허비해 가면서 변명하였으니, 잘못한 것이 저쪽에 있습니다. 그때 이를 규정한 대관이야 무슨 피혐해야 할 혐의가 있겠습니까. 아울러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피혐에 대한 처치의 내용이 근거없는 것이니 어불성설이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5월 5일 기사
대사헌 박서(朴遾), 장령 권령(權坽), 지평 곽지흠(郭之欽)·임중(任重) 등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오진겸(吳震謙)이 내수사와 서로 송사를 벌였는데 그 노비에 대해 이미 양쪽이 부당하다고 했다면 당연히 다른 관사로 속공시켜야 합니다. 그런데도 조계원(趙啓遠)이 이에 속공시킨다고 하면서 아울러 모두 도로 내사에 예속시키려 했으니, 법리에 의거하여 헤아려 보더라도 결단코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심택(沈澤)이 인피하는 계사에서 이미 이런 내용에 대해 대략 말했기 때문에 단지 개괄적인 것만을 거론하여 내용을 구성해서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내용이 근거없는 것이어서 어불성설이라고 하교하였습니다. 이는 모두가 신들의 식견이 밝지 못하여 글의 내용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소치이니, 어떻게 감히 뻔뻔스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장령 심택이 또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동료들이 피혐하는 것은 실로 신에게 연유된 것인데 어떻게 감히 스스로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집의 김응조(金應祖), 정언 정언벽 또한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아울러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5월 6일 경오
간원이 아뢰기를,
"처치의 내용은 단지 시비만을 구별할 뿐입니다. 말을 이어가는 즈음에 혹 빠진 것이 있다 하더라도 허물이 될 것은 없습니다. 동료들의 피혐이 실로 자신에게서 연유된 것이라면 처치에 동참하는 것은 과연 곤란하고 미편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추함(推緘)에 대해 조감(照勘)할 적에는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심택(沈澤)의 출사를 청하는 의논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면 여러 관원들의 처치에 대해 별로 인혐할 것이 없는데도 말을 허비해 가면서 억지로 피혐하는 것은 구차스러운 듯합니다. 또 당초 발론할 적에 이미 함께 참여했다면 감히 처치할 수 없는 것은 사세상 참으로 그러합니다. 대사헌 박서, 장령 권령·심택, 지평 곽지흠·임중, 정언 정언벽은 출사하게 하고 집의 김응조는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홍청 감사 조계원의 추함 내용을 살펴보건대, 《속록(續錄)》을 인용하여 증거하였는데 비의(比擬)가 마땅치 않고 발론한 대관을 드러내놓고 비난하여 배척했으니, 이는 식견이 분명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집요함이 너무 심한 것입니다. 그가 조정을 경시하고 대관을 모독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5월 11일 을해
대사간 심지원(沈之源), 헌납 이해창(李海昌), 정언 정언벽(丁彦璧)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삼가 재이의 참담함을 살펴보건대, 근년보다 더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큰 가뭄 끝에 홍수가 잇따라서 팔도에 기근이 들어 들판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 있으며, 별이 낮에 나타나고 천둥이 섣달에 치고 서리가 늦은 봄에 내리고 우박이 초여름에 내렸습니다. 평양(平壤)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여 민가가 모두 불탔고 함경도에서는 바람이 불어 밭에 남아난 곡식 종자가 없으며, 발이 네 개가 달린 닭이 영남에서 생겨났고 머리가 둘인 송아지가 호남에서 생겨나는 등 괴이하고 경악스러운 것이 하나 둘로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서는 군신 상하가 공구 수성하여 황황 급급하게 하늘의 노여움에 대응하는 실상을 극진히 하더라도 오히려 난망(亂亡)을 면치 못할까 두려운데, 태연한 마음으로 즐기는 것이 태평스러운 때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대내의 수리를 막 끝내자 궁가의 영선을 또 몇 군데에다 일으키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전에 없던 변을 당하였으므로 오랫동안 불결한 곳에 계시는 것이 불가하였으니, 전일의 역사(役事)는 진실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궁가를 짓는 것은 이런 때에 해야 할 역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울러 오늘날 거행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삼가 듣건대 내간(內間)에 또 따로 집을 짓는 역사가 있다고 합니다. 길거리에 떠도는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다면 이것이 어찌 신들이 성상께 기대하던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임어하시는 정전이 넓지 않은 것이 아닌데 어찌 다시 따로 집을 지어 청명한 성덕을 더럽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은 바로 전하께서 통렬히 자책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해야 할 때인데도 토목 공사의 역사가 아직도 잇따르고 있어서 경홀히 여기는 데로 귀착됨을 면할 수 없으니, 신들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살펴 알았다. 그대들의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차자의 내용은 모두가 격언이요 지론이니, 내가 감히 조심하여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진달한 바 영선에 대한 일은 필시 지난해에 역사를 끝내지 못한 대군의 집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그 역사가 작은 것이기는 하지만 정지시키게 하겠다."
하였다.
전 해운 판관(海運判官) 홍석기(洪錫箕)를 죄가 있어 금부에 내렸다. 조운할 때에 첩의 형인 장후(蔣詡)에게 조운선을 압령(押領)하게 했다는 이유로 대간이 사심을 따른 죄를 지적한 것이다.
5월 12일 병자
특별히 석공(石工) 조말룡(曺末龍)에게 영직(影職)과 통정(通政) 품계를 제수하게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공장이에게는 시행할 수 있는 상이 따로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능침(陵寢)의 역사가 중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법 밖의 은명을 내리셨습니다. 응당 시행해야 할 상을 주도록 고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5월 13일 정축
이경석(李景奭)을 좌의정으로, 조경을 대사헌으로, 이유석(李惟碩)을 정언으로 삼았다.
5월 14일 무인
간원이 아뢰기를,
"통정의 품계에 영직을 제수하라는 명을 석공에게 내렸는데, 그가 공교한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미포(米布)로 상을 주면 충분한 것입니다. 어떻게 중한 가자를 천인에게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환수하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어제 큰비가 내렸는데 수표 단자(水標單子)를 아직도 입계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하여 이처럼 태만하단 말인가."
5월 15일 기묘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차자를 올려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부드러운 말로 효유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9일 계미
유성이 사보성(四輔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임전(林)을 집의로, 김식(金鉽)을 이조 좌랑으로, 박서(朴遾)를 대사헌으로, 심지한(沈之漢)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전주 부윤(全州府尹) 박황(朴潢)이 졸하였다. 박황은 인품이 기개가 있고 뜻이 컸는데 자신의 재기(才氣)만을 믿고 주색에 빠지는 잘못이 있었다. 반정한 뒤에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여 대사헌에 이르렀는데, 갑신년010) 봄에 심기원(沈器遠)과 서로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김해(金海)로 귀양갔다가 수년 만에 석방되었다. 전주 부윤으로 나갔다가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5월 21일 을유
형조가 수도 단자(囚徒單子)를 올리니, 상이 하교하였다.
"자주 개좌(開坐)하여 옥사가 지체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5월 22일 병술
왕세자의 탄일(誕日)이었으므로 백관들이 문안례(問安禮)를 행하였다.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간으로, 임성익(林聖翊)을 장령으로, 엄정구(嚴鼎耉)를 부수찬으로, 양만용(梁曼容)을 수찬으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침을 맞을 때의 제조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5월 23일 정해
건원릉(健元陵)의 제기(祭器)를 도둑맞았으므로 예조 낭관과 중사(中使)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5월 25일 기축
진휼청이 진휼하고 남은 미조(米租)의 숫자를 서계하니, 상이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미 진휼을 파한 뒤인데 청호(廳號)를 그대로 두는 것은 미편한 듯합니다. 상평청(常平廳)이라고 일컫고서 쓰고 남은 미포는 수시로 전환하여 한편으로는 지금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데 쓰고 한편으로는 뒷날 구황할 때 쓰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관원은 선혜청의 당상과 낭청이 겸하여 관장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7일 신묘
유성이 짙은 구름 속에서 나와서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경상도에 큰 홍수가 졌는데 수재의 참혹함이 을사년011) 때보다 더 심했다. 인가가 표몰되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많았다. 상이 본도에 명하여 휼전을 행하게 하고 제방과 전지가 파괴된 것도 수리하게 하였다.
우의정 남이웅(南以雄)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당(唐)나라의 신하 위징(魏徵)이 태종(太宗)에게 올린 십사소(十思疏)가 진실로 오늘날 전하를 위한 약석(藥石)에 합치된다고 여겨집니다. 이에 재주도 없으면서 많은 영걸들 틈에 끼어 있는 혐의도 피하지 않고 삼가 기록하여 올립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살펴주소서.
위징의 소장에 ‘인주(人主)가 시작은 잘하는 경우가 많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경우는 드무니, 어찌 취하기는 쉽지만 지키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했는데, 이것은 깊은 걱정을 하게 되면 정성을 다하여 아랫사람에게 극진히 하고, 안일에 빠지면 교만 방자하여 상대를 경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랫사람에게 극진히 하게 되면 서로 먼 사이라도 마음이 합쳐지게 되고 상대를 경시하면 육친(六親)도 떠나게 되는 것이니, 비록 위세로 위협하더라도 모두 겉으로만 따를 뿐 마음으로 열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주로서 진실로 하고 싶은 것을 보게 되면 만족할 줄 아는 것을 생각하고 장차 영선(營繕)을 일으키려 할 적에는 중지할 줄 아는 것을 생각하고, 고명(高明)한 위치에 있게 되면 겸손하여 낮출 것을 생각하고 가득 찬 데 임하면 줄어들 것을 생각하고, 즐거움을 만나면 절약할 것을 생각하고 편안한 상태에서는 뒷걱정을 생각하고, 언로가 막히는 것을 방지하려면 받아들일 것을 생각하고, 참소와 간사를 미워한다면 자신의 행동을 올바르게 할 것을 생각하고, 작상을 베풀 적에는 기뻐하는 것을 인하여 참람하게 될 것을 생각하고, 형벌을 시행할 적에는 노여움을 인해서 지나치게 될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상의 열 가지 생각을 겸하여 어진이를 선발하고 능한 이를 임용한다면 하는 일이 없어도 잘 다스려지게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반복하여 생각해 보건대 전하의 오늘날 잘못은 모두 이 열 가지 생각해야 할 것 속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설사 위징이 다시 태어나 전하를 위하여 계책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아, 처음 시작을 잘한 것은 전하와 같은 이가 없으니,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큰 걱정은 남한 산성에 있을 때와 같은 경우가 없었으니, 정성을 다하여 아랫사람에게 극진히 해야 하는 도리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 아랫사람을 인접하실 적에 성의가 미덥지 못하여 의혹스러움을 먼저 드러내시고, 직언을 겉으로만 아름답게 여긴 채 시행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즐거움에 대해 경계는 하지만 사치스러움을 배척하지 않고 작상이 지나치게 외람되고 형벌이 중도에 어긋나며 법을 집행하는 신하와 어사(御史)의 말도 모두 믿지 않으십니다. 신은 십사(十思) 가운데 이른바 언로가 막히는 것을 방지하려면 받아들일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 더욱 오늘날 거울로 삼기에 절실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을 살펴보고 내가 매우 기뻤다. 진달한 바의 아름다운 말은 모두가 약석(藥石)이니, 내가 불민하지만 마땅히 유념하여 힘써 행하겠다."
하였다.
5월 29일 계사
김남중(金南重)을 도승지로, 심택(沈澤)을 장령으로, 최후윤(崔後胤)을 정언으로, 김응조(金應祖)를 사간으로, 심지원(沈之源)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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