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9권, 인조 26년 1648년 7월

싸라리리 2026. 1. 7. 09:25
반응형

7월 1일 갑자

평안 감사 정치화(鄭致和)가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시매(李時楳)를 아뢰어 파직시키게 했다. 시매가 변방의 고통스러움을 싫어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려고 도모하였으나 방법을 찾지 못했다. 6월 6일에 마침 큰비가 내려 압록강 물이 불어나 진선(津船) 10여 척이 떠내려갔는데, 시매가 치화에게 이를 인하여 파직되어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치화가 드디어 이런 내용으로 계문하여서 파직된 것이다.

 

7월 3일 병인

전 이조 참판        김영조(金榮祖)가 졸하였다. 영조는 안동(安東)        풍산인(豊山人)이다. 형제가 모두 아홉 사람이었는데 그 가운데 다섯 사람이 문과에 급제했으니, 과제(科第)의 성대함이 근세에 없던 것이었다. 혼조 때 정치가 혼란하여지자 영조는 향리로 물러가 살았다. 정축년 이후 삼사의 장관과 이조 참판을 두루 역임했는데, 나이 72세에 졸하였다. 평생 세상에 거스름을 받은 적이 없었으나 직절(直截)한 기풍이 적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7월 4일 정묘

왕세자가 숙령전(肅寧殿)에서 추향 대제(秋享大祭)를 거행하였다. 이어 중전에게 문안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 감사 조계원(趙啓遠)은 당초 이미 일을 잘못 알았고 또 변명하기 위해 이에 감히 소장을 올려 스스로 변해(辨解), 자신을 논한 대관을 공척하면서 전말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채 은연중 지척하여 유감을 풀려고까지 하였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7월 5일 무진

큰 장마가 들어 시냇물이 넘쳐 곡식이 침수되었다. 예조가 전례에 따라 사대문(四大門)에 영제(禜祭)014)  를 지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7월 6일 기사

이날 전라도에 태풍이 불었는데 사시(巳時)에 불기 시작해서 신시(申時)에 그쳤다. 지붕의 기와가 날아갔고 큰 나무가 부러졌으며, 곡식이 손상되었다. 부안현(扶安縣) 변산(邊山)의 소나무가 무수히 뽑혀 쓰러져 산길을 메웠으므로 사람이 다닐 수가 없었다. 노령(蘆嶺) 이상의 피해가 더욱 혹독했다. 경상도에는 오후부터 태풍이 불었는데 나무가 부러지고 기와가 날아갔으며, 밤중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인동부(仁同府) 이상이 더욱 혹심했다.

 

임전(林)을 부응교로, 유준창(柳俊昌)을 장령으로, 정유(鄭攸)를 헌납으로, 심지한(沈之漢)을 교리로, 이정영(李正英)을 수찬으로 삼았다.

 

7월 7일 경오

홍청도에 큰물이 졌다. 문의(文義)·공산(公山)·정산(定山)·청주(淸州)·은산(恩山)·온양(溫陽)·직산(稷山)·보은(報恩)·청풍(淸風)·태안(泰安)·대흥(大興)·보령(保寧)·진천(鎭川)·서천(舒川) 등 54고을에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퍼붓듯이 폭우가 쏟아져 냇물이 넘쳤고 곡식이 모두 물에 잠겨 썩었으며, 산기슭이 붕괴되어 압사한 사람이 4인이었다.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과장(科場)을 설치했을 적에 서사 서리(書寫書吏)가 난입하는 폐단을 금단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법령이 해이한 탓으로 끝내 징계되지 않고 있습니다. 본부에서 다시 신칙하여 금령을 범한 자를 무겁게 법으로 다스리겠습니다. 제사(諸司)로 하여금 또한 각기 분명히 조사하여 통렬하게 징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8일 신미

유성이 북극성(北極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또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와 대릉성(大陵星) 위로 들어갔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사습이 투박하여 요행히 식년(式年) 초시(初試)에 합격하고서 미처 경서를 공부하지 못했을 경우에, 온 집안이 여역에 걸렸다고 칭탁하면서 진시(陳試)015)  의 공문을 얻어내려고 도모하고 있으니, 일이 매우 부정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지금부터 신칙시켜 상중(喪中)에 있어 복제(服制)를 마쳐야 하거나 부자 사이에 상피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일체 허부(許赴)하지 말게 함으로써 외람되이 속이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군기시가 아뢰기를,
"본시(本寺)는 무고(武庫)를 관장하는 중요한 곳인데 난리를 겪은 뒤 기계가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파손된 수은(水銀)과 갑옷이 78개, 파손된 철주(鐵胄) 38개가 창고에 쌓여 있으니, 그 가운데 고칠 만한 것을 보수한다면 비용이 덜들고 많은 수량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주(濟州)에서 보내온 소가죽이 5백 장이나 되니 이것으로 피갑(皮甲)을 만든다면 충분히 급할 때 쓸 수가 있습니다만, 공장(工匠)들의 요포(料布)를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병조로 하여금 여정(餘丁)의 면포 30여 동을 이송(移送)시켜 급료의 지급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돈령부(敦寧府)가 아뢰기를,
"왕후의 족보가 난을 겪은 뒤 산실되었으므로 돈령부에서 치부(置簿)하여 이조로 이문할 적에는 단지 각 사람이 말한 바에만 의거하고 있습니다. 족친위(族親衛)에 이르러서는 대수(代數)를 감축시켜 외람되이 예속되기를 도모하고 있어 이미 매우 놀라운데, 군정(軍丁)도 많이 잃게 되므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우선 청(廳)을 설치하고 경외에 이문하여 돈령 단자(敦寧單子)를 일일이 수납하게 하여 그에 의거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9일 임신

경기의 가평(加平)·안산(安山)·음죽(陰竹)·고양(高陽)·김포(金浦) 등의 고을에 연일 큰비가 쏟아져 냇물이 넘쳐 제방이 무너지고 곡식이 손상되었다.

 

7월 11일 갑술

지평 이완(李)이 아뢰기를,
"의주(義州)가 오늘날 사람들이 싫어하여 피하는 곳이 되어 있는데, 감사 정치화(鄭致和)가 진선(津船)을 떠내려 보낸 것을 인하여 부윤을 파출시켰습니다. 금년의 수재는 전고에 없던 것이어서 사람이 물에 빠져 죽고 집이 떠내려가도 구제할 수가 없었으니 진선이 떠내려간 것은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윤과 감사는 사심을 따른 자취가 현저했기 때문에 신이 논계하기 위하여 간통(簡通)을 왕복시켰으나 끝내 의견이 귀일되지 않았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장령 유준창(柳俊昌)은 아뢰기를,
"아침에 이완이, 평안 감사가 의주 부윤을 파출시킨 일은 사심을 따른 데에 관계가 되고 이시매(李時楳) 또한 사면을 도모한 자취가 있다는 것을 이유로 동료들에게 간통을 발송하였으나 의견이 귀일되지 않았습니다. 최후에 신이 내일 좌기(坐起)할 때에 면대해 의논해서 진계하자는 것으로 답을 했습니다만, 이완이 다시 통시(通示)하지 않은 채 지레 먼저 인피했으니, 크게 무시당하였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대사헌 박서는 아뢰기를,
"엊그제 좌기 때 지평 이완이, 정치화가 이시매를 파출시킨 것은 사심을 따른 것이니 논계하려 한다고 하기에, 신이 원장(元狀)을 살펴보고 나서 조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답했습니다. 그랬는데 아침에 간통(簡通)을 보니 ‘금년의 큰 홍수는 전고에 없었던 것인데 빗물로 생긴 재해를 이유로 파출시키는 죄안을 삼은 것은 사심을 따른 흔적이 현저하다.’ 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장계에 「평상시 관사를 태만히 하여 잘 검칙하지 못한 정상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다.」고 한 등등의 말을 살펴보건대 사심을 따랐다고 의심하는 것은 불가한 것 같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완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인피하였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자신의 의견을 스스로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집의 양만용(梁曼容)은 아뢰기를,
"신이 장계의 전문을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평상시 관사를 태만히 하여 잘 검칙하지 못한 정상이 여기에서 더욱 드러났다고 한 등의 말을 살펴보건대 사심을 따른 뜻이 없는 것 같았으며, 진선 10척이 일시에 떠내려갔다면 부윤이 정외(情外)의 말을 피하기 위해 끝내 도주(道主)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소견은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합니다. 이완이 지금 인피하였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스스로 옳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모두에게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조 참판 한흥일(韓興一)이 체직되었다. 흥일이 사장(辭狀)을 올린 뒤에 소장을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비니, 상이 허락한 것이다.

 

이조 참판 한흥일(韓興一)이 체직되었다. 흥일이 사장(辭狀)을 올린 뒤에 소장을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비니, 상이 허락한 것이다.

 

최혜길(崔惠吉)을 이조 참판으로, 김홍욱(金弘郁)을 이조 정랑으로, 이행우(李行遇)를 부제학으로, 김소(金素)를 홍청 감사로 삼았다. 상이 이조에 하교하기를,
"이번 정사(政事)에서 찬성(贊成)을 차출하라."
하였다. 이에 민형남(閔馨男)을 차출했다.

 

7월 12일 을해

지평 정언벽(丁彦璧)이 아뢰기를,
"지평 이완이 평안 감사와 의주 부윤을 논하려 했는데 장관(長官)이 ‘원장의 내용을 살펴보고 나서 조처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다.’ 했는데, 신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어제는 휴가중이어서 집에 있었으므로 간통(簡通)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당초에 석상(席上)의 가부에 참여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주(全州)는 지역이 크고 인물이 많은 곳이며 또 저축되어 있는 곡식도 많습니다. 그런데 전후 관직에 있었던 자 중에 비록 남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회록(會錄)하여 상을 받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판관(判官) 이복길(李復吉)이 본디 저축되어 있던 것을 다 회록하여 마치 자신이 비축한 것인 양 조정을 속여 외람되이 은전을 받았습니다. 부윤이 첩보한 일과 감사가 인구(引咎)한 내용을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시고 계시니, 지금 스스로 발명(發明)한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복길의 전후 가자를 속히 개정하라고 명하소서."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사헌 이하 모두가 아울러 인혐하고서 물러갔습니다. 근래 의주 부윤 자리를 모두 싫어하여 피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진선이 떠내려간 것은 본디 대단한 죄가 아닌데도 경솔하게 아뢰어 파직시켰으니, 물의가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발론하여 규핵하는 것은 풍채가 숭상할 만한 일입니다. 대각에서 일을 논함에 있어서는 익히 강론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법으로, 뒤에 좌기하여 면대해서 의논하자는 것은 그 의도가 신중을 기하자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원장을 살펴보고 조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실로 상의하는 도리이나, 긴요하지 않은 말을 가지고 고집하여 근거로 삼는 것은 구차스런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감사가 잘못한 일을 사심을 따른 뜻이 없다고 하고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을 가리켜 실정 밖의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초에 석상의 의논에 참여했다면 감히 처치할 수 없는 것은 사세가 진실로 그러한 것입니다. 대사헌 박서, 집의 양만용은 체차시키고 장령 유준창, 지평 이완·정언벽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공의를 무시하고 사심을 따르는 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감사 정치화가 의주에서 진선이 떠내려간 것을 인하여 부윤을 파출시켰으니, 사심을 따른 자취가 현저하게 드러났습니다. 추고하소서. 의주는 오늘날 사람들이 싫어하여 피하는 곳인데 부윤 이시매는 초탁(超擢)하는 은총을 생각하지 않은 채 싫어하여 피하려는 마음만 품고서 진선이 떠내려간 것을 인하여 갑자기 파면되기를 도모하였습니다. 모피법(謀避法)으로 다스려서 다른 사람들을 경계시키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드디어 이시매를 정주(定州)에 유배하였다.

 

7월 13일 병자

기청제(祈晴祭)의 헌관(獻官) 이시재(李時材) 등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처음에 예조 판서 이명한(李明漢)이 탑전에서 "해마다 가을에 명관(命官)을 시켜 정시(庭試)를 행하게 함으로써 인재를 배양하는 방도로 삼으소서."라고 아뢰어 드디어 신사년016)  ·임오년017)   가을에 정시를 설행했는데, 그뒤 폐하고 행하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예조가 아뢰기를,
"근일 국가에 일이 많아서 과거가 매우 드물었으므로 선비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대비과(大比科)018)  가 있어 중외의 유생들이 상당히 많이 모여 있으니, 이런 때에 정시를 설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4일 정축

조경을 대사헌으로, 심지원(沈之源)을 대사간으로, 유경창(柳慶昌)을 집의로, 이천기(李天基)를 수찬으로, 양만용(梁曼容)을 교리로, 구인기(具仁墍)를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성이 맹(孟)인 한인(漢人)이 있었는데 그림을 잘 그렸다. 지난해 인평 대군(麟坪大君)을 따라 북경에서 왔는데, 상이 늘 금중(禁中)에 두고서 날마다 그림을 그리게 하였었다. 이 때에 이르러 지응 중사(持鷹中使)와 함께 돌아가기를 원하니, 상이 모의(毛衣)와 노비(路費)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7월 15일 무인

왕세자가 경덕궁(慶德宮)에 나아가 중전에게 문안하였다.

 

7월 16일 기묘

평안도 순안(順安)·정주(定州)·중화(中和)·평양(平壤)·성천(成川)·삼등(三登)·상원(祥原)·강동(江東) 등 고을에 큰물이 져서 밭이 잠겼는데, 감사가 아뢰었다.

 

7월 17일 경진

황해도 신천(信川)·안악(安岳)·재령(載寧)·문화(文化)·봉산(鳳山)·장련(長連)·황주(黃州)·장연(長淵)·송화(松禾)·우봉(牛峯)·강음(江陰)·은률(殷栗)·옹진(瓮津)·평산(平山)·풍천(豊川)·서흥(瑞興)·수안(遂安)·해주(海州) 등 고을에 태풍이 불고 큰비가 내려 산기슭이 무너지고 제방이 터지고 집이 물에 잠기고 사람과 가축이 익사한 것이 매우 많았다.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하게 하였다.

 

7월 18일 신사

우의정 남이웅(南以雄)이 졸하였다. 이웅은 젊어서부터 기절이 있었으며 재물에는 소홀했고 의를 좋아했다. 정승의 지위에 올라서는 아무 것도 건백한 것이 없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였다.

 

이에 앞서 남한 산성에 호종한 공 때문에 과거를 설행하여 사람을 뽑았는데, 훈련 도감의 포수 가운데 참방(參榜)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에 이를 7국(局)으로 나누고 각국에 국장(局將)을 두어 거느리게 하고서 이를 국출신(局出身)이라고 호칭하였다. 이들을 번(番)을 나누어 궐내에 입직하게 했는데 국출신들이 드디어 민간을 공격하고 겁략하는가 하면 도시(都市)로 무리지어 다니면서 사대부들을 구타하고 모욕을 주기도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또 금직(禁直)을 궐했으므로 식자들이 걱정하였다.

 

7월 19일 임오

처음 예조가 사관(史官) 홍우원(洪宇遠)을 태백산(太白山)과 오대산(五臺山) 두 사각(史閣)에 보내어 왕세손 책봉시의 복색에 대해 조사하여 오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전거할 만한 글을 얻지 못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복색에 대한 한 조항은 실록(實錄)의 의궤(儀軌)에 이미 드러난 글이 없고, 또 전일 유신들이 널리 고증하였으나 또한 명백하지 않아 다시 고증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신들이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재된 황태손의 관복(冠服) 등에 대한 일을 살펴보건대, 자못 전거할 만한 단서가 있었습니다. 다시 대신들과 의논하여 참작, 상의하여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8세에 관례(冠禮)를 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 관례를 하기 전에 행례(行禮)하는 법은 전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다시 1, 2년을 기다렸다가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상이 정초군(精抄軍)을 나누어 대내와 동궁(東宮)에 예속시켜 숙위하게 하고 입직한 중관(中官) 사약(司鑰)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훈련시키도록 명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간원이 중관에게 군대를 맡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도로 본병(本兵)에 예속시킬 것을 계청하였다. 누차 아뢰자 이에 따랐다. 병조가 아뢰기를,
"정초군이 1천 1백여 명이나 된다고는 하지만 윤직(輪直)하는 숫자는 단지 1백 48인이니, 단지 그 소(所)의 위장(衛將)으로 하여금 전대로 단속하면서 기예를 익히게 할 것이요, 따로 장관(將官)을 차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군대에 통솔자가 없으면 급할 때에 힘을 얻기가 어렵다. 파총(把摠)과 초관(哨官)을 각 1 원씩 차출하여 그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고 건양문(建陽門) 밖에 돌려가면서 입직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함경도 고원(高原)·함흥(咸興)·홍원(洪原)·단천(端川)·명천(明川) 등의 고을에 태풍이 불고 큰비가 내려 시냇물이 넘쳤으며 집이 떠내려 갔고 익사자가 있었는데, 감사가 아뢰었다.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하게 하였다.

 

7월 20일 계미

대사간 심지원(沈之源)을 체직시켰다. 지원이 전에 간장(諫長)으로 있을 적에 조계원(趙啓遠)을 논핵했다가 그에게 비방을 당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정사(呈辭)하여 체차된 것이다.

 

사복시가 내년에 다시 평안도 신미도(身彌島) 등의 섬에 목장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7월 21일 갑신

도승지 김남중(金南重)을 보내어 우의정 남이웅의 상사에 조문하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본(國本)을 바르게 해 왔고 또 대대로 맏이로 한 것은 종통을 중시하고 인심이 매일 데가 있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일찍 위호(位號)를 정하고 요속을 선발하여 둠으로써 덕성을 보양하는 것은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전대의 제왕들은 10세 전일지라도 관례(冠禮)와 책례(冊禮)를 행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 이르러서도 세종 대왕이 원손을 책봉하는 교서에 ‘원손이 나이 이미 8세이다.’라는 말이 실록에 기재되어 있고, 인묘(仁廟)께서도 8세에 또한 관례와 책례를 거행하여 조종조에서 이미 시행한 전의 규례가 분명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원손께서는 뛰어나게 숙성하시다는 말이 외간(外間)에 전파되어 있습니다. 본조에서 이미 책봉을 청하여 윤허를 받아 성명(成命)이 막 내려서 바야흐로 좋은 날을 가려 거행하려 하고 있는데, 미처 강정하지 못한 것은 단지 복색(服色)에 대한 한 조항뿐입니다. 그러나 8세에 관례한 것은 인묘조의 고사가 있으니, 어찌 관례가 너무 이르다는 이유로 책례까지 아울러 정지시켜 다시 더 몇 해 동안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속히 결정하여 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유시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7월 22일 을유

크게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내렸다.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북극성(北極星) 위로 들어갔다.

 

대마도(對馬島)가 정관(正官) 평성륜(平成倫)·등성차(藤成次)를 부산(釜山)에 파견하였다. 이에 앞서 왜서에 모두 정보(正保)라는 연호를 썼는데 이번 글에 이르러서는 경안(慶安) 원년 정월이라고 써 있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였다.
"일본의 국속(國俗)은 전위(傳位)하지 않았어도 개원하는 전례가 있습니다. 경안이란 연호는 금년부터 고친 것입니다. 제가 금년에 처음으로 차견된 사람인데 마침 일이 있었던 관계로 이제야 비로소 나오게 되었기 때문에 경안이란 연호는 저의 사행(使行)에서부터 비로소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시방(李時昉)을 형조 판서로, 한흥일(韓興一)을 공조 판서로,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간으로, 양만용(梁曼容)을 사간으로, 원진명(元振溟)을 장령으로, 이행진(李行進)을 교리로 삼았다. 이조에서 처음 정2품으로 공조 판서에 의망했었는데 상이 종2품 가운데에서 다시 의망하라고 명했기 때문에 이조에서 한흥일과 김남중(金南重)·여이징(呂爾徵)을 의망하여 올렸다. 이에 드디어 흥일이 초배(超拜)된 것이다.

 

대사헌 조경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에 경계를 보인 것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식·월식과 별의 변고와 천둥 번개치는 괴이함은 늘상 있는 것이어서 말할 것이 없습니다만, 지난해의 한재와 수재는 전고에 드물었던 것인데, 유독 양남(兩南)만은 그리 혹심한 피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이르러서는 온갖 곡식이 한창 자라날 때를 당하여 양남의 수재에 대한 보고가 잇따라 이르고 있고 영동(嶺東)·함경(咸鏡)·관서(關西)·홍청(洪淸)에서도 모두 보고가 있더니 결국에는 황해도에서도 큰 홍수가 졌다는 보고가 또 이르렀는데, 홍수의 범람으로 인한 피해가 지난해보다 더하다고 합니다. 어찌하여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 것이 갈수록 더욱 심하단 말입니까. 아마도 전하께서 재해를 만나 공구 수성하는 도리에 미진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삼가 밖으로 발현된 정령(政令)의 시행을 가지고 말하여 보겠습니다. 지난해 법궁(法宮)을 영조한 것은, 그것이 적당한 시기가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모두 성상께서 부득이하여 한 일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두 곳의 궁가(宮家)를 이런 때에 영조하는 것은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까.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것을 본떠 자기의 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법제를 무시하는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목수들에게 나무를 깎게 하는 습관이 누적되어 온 성중에 토목 공사가 있었던 것이 폐조가 망하게 된 이유입니다. 은감(殷鑑)이 어찌 멀리 있겠습니까. 사치하고 화려한 것은 성상께서 싫어하고 배척하던 것이었는데, 근래 상방(尙方)에서 비단을 짜면서는 오로지 사치하고 화려하게 하고만 있으니, 위 문공(衛文公)이 대포(大布)로 만든 옷과 대백(大帛)으로 만든 관을 썼던 것과는 너무도 차이가 납니다.
사치의 화가 물이나 불보다 더하다는 것은 선유들의 말입니다. 우리 나라는 본디 가난한 나라로 일컬어졌고 재화도 미포(米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모두 옷을 아름답게 하고 음식을 풍성하게 하려고 한다면 그 폐해가 외방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미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잗단 즐거움에 빠져 큰 걱정을 도모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한나라 가의(賈誼)의 말입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성이 맹(孟)인 한인(漢人)이 그림에 능한 것을 기화로 궐내에 가까이 있으면서 이징(李澄) 등의 무리 몇몇 사람과 함께 날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일삼고 있다고 합니다. 오락에 빠져 뜻을 잃게 됨이 이보다 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 현종(唐玄宗)과 송 휘종(宋徽宗)이 국가를 난망에 빠지게 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서화(書畵)를 너무 좋아하는 것이 먼저 마음을 방탕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 두 임금을 경계로 삼지 않으시고 달가운 마음으로 그들을 본받으신단 말입니까.
언로가 막히고 열림에 국가의 흥망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신들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 언로가 열렸습니까, 막혔습니까? 진언한 사람이 한 사람도 벌받은 사람이 없었음은 물론 간혹 추켜주는 비답을 받은 사람도 있었으니, 언로가 막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끝내 한마디도 일에 시행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수천 수백 명으로 하여금 날마다 충언을 진달하게 한들 국가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신생(辛生)의 일에 이르러서는, 《맹자(孟子)》에 이른바, 나라 사람이 모두 죽여야 된다고 한 그런 자입니다. 전하께서는 이 역적에 대해 고려할 것이 뭐가 있기에 온 나라의 공론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그저 구구하게 작은 신의만을 지키려고 하십니까. 진실로 천하 후세에 알릴 수 없는 일입니다. 예로부터 아래에서 국가의 형정과 인사가 잘못되었을 경우에 그것이 위로 하늘에 응하여 재앙이 되고 변이가 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신들은 오늘날의 재변이 이유가 없지 않다고 여깁니다. 더구나 사치에 대한 훈계와 편안하게 즐기는 것이 짐독(鴆毒)이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서 일국의 기상(氣象)으로 하여금 자연히 태만하고 나약한 데로 흘러 들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초(楚)나라가 철인(鐵釰)은 예리하고 창우(倡優)에는 서툴다019)  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태로운 것을 편안하게 여기고 망하는 것을 즐겁게 여긴다고 말하더라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옛날 초나라는 소(簫)나라를 탐했다가 패배당했고 제(齊)나라는 진(秦)나라를 섬겼다가 사로잡혔으며, 조(曹)나라와 정(鄭)나라는 진(晋)나라와 초(楚)나라를 도와 친하게 지냈다가 끝내 병탄당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자국의 힘을 믿어서도 안 되고 타국의 힘을 믿어서도 안 되며, 나라가 약하다고 해서 스스로 비하해서도 안 되고 나라가 크다고 해서 스스로 과장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내가 당연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면서 나의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나의 방본(邦本)을 공고하게 함으로써 조심하고 면려하고 나태하거나 일락에 빠짐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고 혼란함을 잘 다스려지게 할 수 있습니다. 미리 대비하는 것을 까맣게 잊은 탓으로 양서(兩西)의 성지가 거의 다 무너져 폐기되었고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에는 그저 부질없이 군량만 저축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 후주(後周)의 세종(世宗)같은 사람이 다시 나와서 중국의 주인이 된다면 성곽을 완전히 수축하고 갑병을 잘 수선하고 요해처를 잘 지켜 후손을 위한 계책을 세우라는 것으로 우리 나라에 충고하지 않겠습니까. 대저 우리 나라가 보장(保障)으로 삼고 있는 것은 단지 강도와 남한 산성인데, 남한 산성의 경우는 바깥에서의 응원이 쉽게 끊길 지역이며, 강도의 경우는 배를 타면 삼남(三南) 어디든지 모두 통하는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진로(津路)도 험고하니, 참으로 이른바 천참(天塹)입니다. 병자년에 함몰되었던 것은 지형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계획이 좋지 못했던 탓인데, 어떻게 한번 목구멍이 메었다고 하여 밥을 먹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은 바로 앞서의 일을 징계하고 뒤에 있을 일을 걱정하여 오로지 진양(晋陽)020)  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갑병을 전보다 더 준비해 두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전선(戰船)을 전보다 더 만들어 두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화포와 궁시를 잘 정돈하고 군졸을 선발하여 훈련시켰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며, 요해처의 방비도 전혀 고려 말기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고도 보장이라고 일컫는다면 또한 공허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송 효종(宋孝宗)이 주규(周葵)에게 묻기를 ‘지금 전쟁을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지키기에는 여유가 있지 않은가?’ 하니, 주규가 대답하기를 ‘만일 조처가 제대로 되지 않고 병기가 부족하면 지키기도 어렵습니다.’ 했습니다. 강도(江都)가 반드시 지킬 수 있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조처와 병기가 이와 같으니, 긴급한 일이 발생할 경우 사직과 종묘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말하자니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이번의 이 수재는 아주 큰 것이고 하늘의 견책도 아주 심한 것인데 1년 사이에 여러 차례나 닥치고 있으니,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정사가 잘못되어서 일어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잠시 동안 공구 수성하거나 소소하게 하는 일과 같은 형식적인 일로 이 재해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신들의 말을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고 조금이나마 성의(誠意)를 더하여 번연히 깨닫는다면, 크게는 하늘의 노여움을 돌릴 수 있을 것이고 작게는 인심을 열복시킬 수 있어서 화란을 방지할 수 있고, 연안(燕安)을 종식시켜 사치를 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을 살펴보고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진달한 일은 모두가 지론이니, 내가 마땅히 조심하고 유념하여 채택해 시행하겠다."
하였다.

 

7월 23일 병술

유성이 천창성(天倉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영의정 김자점, 좌의정 이경석이 아뢰기를,
"원손(元孫)의 책봉은 국가의 더없는 경사인데 이제 1, 2년을 더 기다려서 거행하라는 전교가 있었고, 예관이 거듭 청하였는데도 즉시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저 역대의 제왕이 어린 나이에 행례(行禮)한 일을 분명히 고증할 수 있는데 신들은 먼 옛일을 인용할 것 없이 우리 조종조에서 이미 행한 예법을 오늘날 당연히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세종 대왕께서 원손을 책봉한 것이 바로 8세 때였고 인묘께서 관례와 책례를 한 것도 8세였는데, 어찌하여 유독 지금에만 너무 이르다 하여 다시 1, 2년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책봉은 더없이 중한 전례인 것이고 복색(服色)은 도수(度數) 사이의 절목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전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고 하더라도 유사가 전대의 주의(奏議)와 《대명회전》을 가져다 고증하여 올리고 내림을 참작한 다음 품정해서 행한다면, 이 또한 일대의 법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찌 의장(儀章)과 도수 사이에 조금 과불급의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중도에서 성명을 중지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팔도의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도로 정지하라는 거조가 있으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의당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시사(時事)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오늘날의 일은 평소의 일과 달라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예관으로 하여금 빨리 거행하게 함으로써 중외의 기대에 부응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년에 거행해도 불가할 것이 없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수령과 변장들이 거의가 은택 입기를 바라서 군량과 군기를 곳곳에서 마련해 놓고 있는데, 그 실상을 보면 헛된 장부상으로만 있을 뿐 실제로 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또 군정을 내버려둠이 지금 같은 때가 없어서 성지와 기계가 폐기되고 파손되어 연변(沿邊)의 여러 진보(鎭堡) 가운데 믿을 만한 데가 하나도 없습니다. 어사를 가려 보내어 제도의 성지를 두루 돌면서 조사하게 하고 이어 더러 고을에서 특별히 비축해 둔 물품을 검열하여 진위를 조사하게 한 다음 출척(黜陟)을 엄명하게 함으로써 긴급할 적에 실제로 쓸 수 있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그뒤 대신이 가을걷이가 끝난 다음 어사를 보내어 순찰하면서 조사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나, 상이 적격자를 얻지 못하면 해만 있고 이익은 없다는 이유로 드디어 파견하지 않았다.

 

7월 25일 무자

유성이 북극성 위에서 나와 직녀성(織女星) 아래로 들어 갔다. 또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훈련 도감이 8월이 지난 뒤에 다시 군기(軍器)를 제조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지난해 비국에서 수재와 한재 때문에 군기를 제조하는 역사를 중지할 것을 청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도감에서 다시 청한 것이다.

 

병조가 가을걷이가 끝난 뒤 제색(諸色) 군병의 부족한 숫자를 충정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7월 26일 기축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지난번 삼가 듣건대 원손의 관례와 책례를 거행할 것을 준허했다고 하였으므로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서로들 이야기하기를 ‘종사의 경사와 신민의 복록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 했습니다. 이어 삼가 생각하건대, 옛날의 제왕들 가운데 국본을 정하고 나서 또 세손을 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니, 오늘날의 전례는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일이어서 일각이라도 늦출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근래 예관이 복색의 절목을 정하지 못하여서 지금까지 미루고 있으니, 이는 너무도 미안스러운 일입니다.
삼가 지금 예관에게 내린 하교와 대신에게 비답한 것을 살펴보건대 신들은 서운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전대의 역사를 고찰해 보건대, 역대 제왕의 황태자는 나이가 어려서 원복(元服)을 입을 수 없었으나 행례할 때에는 모두 쌍동계(雙童髻)·쌍옥도(雙玉導)·공정책(空頂幘)을 예복으로 하였고 교사(郊祀)와 봉선(封禪)하는 큰일에 있어서도 이런 복색으로 참여했습니다. 오늘날의 예도 이에 의거하여 행한다면 진실로 합당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조종조에서도 이미 행한 전례가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절충하고 참고해서 결정하여 전에 내린 성명대로 하고 물려서 거행하지 않으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의당 의논하여 조처하겠다."
하고, 그 차자를 예조에 내렸다.

 

대사헌 조경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국가에 세손이 있는 것은 종사의 경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손의 나이가 책봉할 시기에 이른 것은 경사 가운데 더욱 큰 경사입니다. 전하께서 처음 성명을 내렸을 때에는 온 나라의 신민들이 누군들 목을 길게 빼고 발꿈치를 들고서 전대에 없던 성대한 전례를 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 내년에 거행하라는 것으로 빈청의 계사에 답하셨으니, 어찌 도하에서만 보고 듣기에 석연치 못한 점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사방의 백성들이 정확한 이유를 몰라서 대부분 마음이 즐겁지 못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나서 8세가 되면 서인의 자제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소학에 입학시켜 가르쳤습니다. 더구나 원손께서는 남달리 뛰어나게 숙성하고 훌륭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으니, 보통 사람의 8세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게 소학에 입학시키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 책례를 늦출 수 있겠습니까. 태종 대왕의 교서에 ‘세자의 아들에 대해 명위(名位)를 정하여 인심을 귀일시켜야 한다.’고 하였는데, 헌묘(獻廟)021)  의 세대를 당하여서도 오히려 세손을 책봉하는 것으로 인심을 귀일시키는 제일의 의리로 삼았습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오늘날의 인심을 살펴볼 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귀일시키려면 일찍 세손을 정하는 것 이외에 무슨 다른 일이 있겠습니까. 만일 복색과 관면(冠冕)의 절목이 실록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으로 말을 한다면, 문효공(文孝公) 윤효손(尹孝孫)이 성묘조 때 처음 건의하기를 ‘세자의 장복(章服)에 등급이 없어서 신료들과 같으니 귀한 이를 귀히 여긴다는 의리에 어긋난다.’ 하고, 드디어 칠량(七梁)과 원유(遠遊)의 제도를 정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태평한 세대 화락한 조정에서도 말단적인 장복(章服)의 일에는 겨를이 없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자에 대해서도 이와 같았으니 세손의 장복에 미칠 수 없었던 것은 참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명회전》에 황태손의 관포(冠袍)에 대한 제도가 있으니 오늘날 이를 참작하여 더하거나 뺀 다음 모방해서 행하는 것은 유사의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구애되어 이미 내린 성명을 물려서 거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금년 가을과 내년 봄은 그 사이의 기간이 그리 먼 것이 아니나, 조종들께서 이미 행한 성대한 전례를 어기고 온 나라 사람들을 실망시킴은 작지 않습니다. 조속히 예관에게 명하여 제때에 거행하게 함으로써 종사의 경사를 크게 한다면 신민들의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대사간 채유후(蔡𥙿後) 등도 차자를 올려 청하니, 아울러 답하기를,
"옥당의 차자를 인하여 이미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했다."
하였다.

 

《주례(周禮)》 80건(件)을 여러 신하들에게 반사하였다. 이때 당하관으로서 산직(散職)에 있는 사람들과 수령들은 모두 참여되지 못했는데, 오직 부사직(副司直) 기진흥(奇震興), 성산 현감(星山縣監) 홍중보(洪重普)만이 특별히 은사를 받았다. 이는 대개 진흥의 아버지 기협(奇協)은 선천 부사(宣川府使)로서 정묘년의 난리에 죽었고 중보의 아버지 명구(命耉)는 평안 감사로서 병자년의 변란에 죽었기 때문에 상이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두 사람을 위무한 것이 특별히 후해서였다.

 

7월 27일 경인

유성이 짙은 구름 속에서 나와서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오정일(吳挺一)을 동부승지로, 김시국(金蓍國)을 대사성으로, 김식(金鉽)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좌의정 이경석이 한 문제·당 태종의 일과 《서경》 모훈(謨訓)의 여러 편을 초록하여 《연한요람(燕閑要覽)》이라고 명명하고 차자를 올려 진헌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삼가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건대, 당 태종이 사치를 배척하고 비용을 줄인 것과 선한 말을 따르고 간언을 요구한 것과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정사 가운데 후세에서 본받을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짓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책이 지금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로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한 문제가 절검을 숭상하고 백성을 사랑한 것과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남의 말을 받아들인 것은 진실로 삼대 이후의 영주(令主)라고 하겠습니다. 《서경》 한 책에 이르러서는 모훈(謨訓)과 정사(政事)의 자취가 갖추 기재되어 있으니, 실로 만세 임금들의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고금의 사의(事宜)가 다른 점이 없지 않고 또한 간편(簡編)이 산만한 점도 있습니다.
신이 자신의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삼가 《강목(綱目)》의 한 문제와 당 태종 두 임금의 본기(本紀)에 의거하여 요점이 되는 말들을 초록하여 모았는데, 한 문제의 일에 대해서는 《대학연의(大學衍義)》의 글을 붙였고, 당 태종의 일에 대해서는 약간 누락된 말을 추가로 보충하였습니다. 《서경》은 모두가 본받아야 될 것들이니 요전(堯典)·순전(舜典)을 어떻게 선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지금 세상에 마땅하여 행할 수 있는 것과 일에 나타나 환히 드러난 것만을 취하였으며, 순전에서 시작하여 무일편(無逸篇)에서 끝맺었습니다. 첫머리에 ‘사악(四岳)에게 자문을 구하여 사문(四門)을 활짝 열었다.’ 하는 한 장을 둔 것은, 순임금이 대지(大智)가 된 이유가 바로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않고 남의 의견을 따른 데 있기 때문입니다. 무일편을 전부 기재한 것은, 옛사람이 이것만을 거론하여 그림을 그려 진달한 뜻에 의한 것입니다.
아, 책을 읽으면 유익한 것은 일개 선비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지존인 제왕이겠습니까. 학문을 강론하지 않는 것이 성인(聖人)의 걱정이었는데, 열명편(說命篇)에 이른바 ‘시종 학문의 연구에 뜻을 두라.’고 한 것이 바로 이 한 편의 강령이고, 대우모(大禹謨)에 이른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한 것이니 정밀히 살피고 순일하게 지켜 진실로 중도를 실행하라.’고 한 것은, 곧 성왕(聖王)이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인 것으로, 학문하는 방법은 여기에 이르러 더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총명과 예지가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시어 공업은 한 문제도 하지 못했던 것이고 덕행은 당 태종에게 견줄 바가 아니며 일찍이 학문을 강론하시어 이미 고명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더 나아가 요·순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단지 힘써 행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 경사(經史)를 초록한 것을 가지고 성학의 극치에 참여하여 논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정치하는 방도에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니, 궤안(几案)에 두고 수시로 다시 펼쳐 보소서. 그리하여 군신간에 서로 문답하면서 토론하는 아름다움을 보고는, 사람을 임용하는 것을 삼가고 어렵게 여길 뿐만 아니라 반드시 온 조정에 화평한 기운이 흘러넘치고 서로 정의가 도타운 것을 상상하시어 그와 같게 할 것을 생각하소서. 그리고 전모(典謨)의 훈계가 절실한 것을 보고는, 자신에게 반성하여 찾아보고 반드시 치란과 흥망이 나뉘는 이유를 살펴서 그렇게 될까 삼가하시며, 자기의 의견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르고 허물을 들으면 즉시 고치는 것을 보고는, 오늘날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초연히 깨달아서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시며,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박하게 하고 절검을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한 것을 보고는, 오늘날의 시조(施措)를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여 단연코 행하시어 잗단 오락을 통렬히 근절하고 무익한 일을 하지 마소서. 그리하여 말마다 그 원인을 살펴 따져보고 일마다 행동으로 증험하여 항상 생각을 여기에 두고 날마다 새롭게 또 새롭게 하소서. 그러면 학문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치도 여기에 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심의 위태로움과 도심의 은미한 기미를 살펴 정밀하게 하고 순일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도 성상께서 뜻을 두는 데 달려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왕의 학문은 일반 백성들의 학문과는 다른 것인데, 어찌 구구하게 장구(章句) 사이에 얽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혹 날씨가 맑고 옥후가 조금 차도가 있을 때에는 유신들을 불러 그들에게 경사(經史)를 읽게 하여 듣기도 하고 글의 뜻에 대해 논란하기도 하며, 정사에 대해 상의하기도 하소서. 그리고 대소 신료들을 교대로 진현하게 하여 혹 백성의 고통에 대해 묻기도 하고, 군무에 대해 묻기도 하고, 성상의 잘못에 대해 솔직히 진달하게도 하고, 시폐를 두루 지적하게도 하여, 비근한 말일지라도 반드시 살펴 모든 계책이 다 거행되게 하소서. 그러면 나약한 기습이 진작될 것이고 재앙이 발생하는 것도 소멸될 것입니다. 정명도(程明道)의 말에 ‘학문을 논함에 있어서는 이치를 분명히 하는 것이 요구되고 정치를 논함에 있어서는 대체를 아는 것이 요구된다. 언로를 열고 하정(下情)을 통하게 하는 것이 또 치체(治體) 가운데 중대한 것이다.’ 했는데, 신은 감히 이 말을 앙달하는 바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이 올린 차자를 살펴보니 매우 가상하고 기쁘다. 진헌한 글은 마땅히 차자에서 진달한 것과 같게 해서 경의 뜻을 저버리지 않겠다."
하였다.

 

7월 28일 신묘

상이 번침(燔鍼)을 맞았다. 아침에 상이 방문을 닫고 실내에 앉아서 어의(御醫) 최득룡(崔得龍)·이형익(李馨益)·유후성(柳後聖) 등의 진찰을 받았다. 득룡 등이 아뢰기를,
"육맥(六脉)의 부삭(浮數)을 촉감으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고, 형익은 아뢰기를,
"맥박이 부삭하면서 열이 안으로 움츠러들고 있으니, 이는 전일의 증세가 재발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안혈(腰眼穴)에 뜸을 뜨고 난 뒤에도 별로 차도가 없으니, 아직 딱지가 떨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였다. 조경이 아뢰기를,
"지난번 요안혈에 뜸을 뜬 일은 뜻밖에 나온 일이어서 신들이 창졸한 가운데 계청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 뒤 여러 의서(醫書)를 상고하여 보니, 요안혈에 뜸을 뜨는 것이 실로 치료를 주관하고 있기는 하였습니다만, 상의 병환에는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형익이 망령되이 시행한 죄를 추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딱지가 아직 떨어지지 않았으니 우선 기다리라."
하였다. 조경이 다시 청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에 형익은 번침을 잡고 13개의 혈에 침을 놓았다. 조경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이형익을 추고할 것을 청하였는데도 위에서 아무런 결정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효험이 없는가를 서서히 살펴서 해도 된다."
하였다. 조경이 아뢰기를,
"위에서 뜸을 뜬 지 한 달이나 되었는데도 지금껏 효험이 없으니, 망령되이 시행한 불경스런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좀 안정하라."
하였다. 조경이 아뢰기를,
"위에서 매번 번침을 맞으셨어도 아직도 효험이 없기 때문에 신하들이 걱정스럽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평순(平順)한 약을 드시어 효험이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약에 대해 의논하는 것도 옳다."
하였다. 조경 등이 이에 나갔다.

 

7월 29일 임진

왕세자가 내일 경덕궁에 가서 중전에게 문안하려 하였는데, 상이 가지 말라고 명하였다.

 

상이 번침을 맞았다.

 

북교(北郊)에서 문묘(文廟)의 제기(祭器)를 만들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금호문(金虎門) 밖에 기둥과 주춧돌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역부(役夫)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도총부에서 막 영조(營造)를 벌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이 어떠한 때인데 이런 공사를 일으킨단 말입니까. 이는 신들이 지난번의 상차에서 말한 상하가 공구 수성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하자는 뜻과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도총부의 여러 신하들이 어떻게 때 아닌 때에 공사를 일으킨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유사 당상을 추고하고, 즉시 그 역사를 정파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도총부에는 들어가 있을 곳이 없다. 따라서 이번에 옮겨 짓는 것은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조처이다."
하였다. 뒤에 헌부가 기를 쓰고 간쟁하니, 상이 내년 봄에 조성하도록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원손을 책봉하는 것은 바로 국가의 막대한 성전(盛典)인데, 갑자기 물려서 거행하라는 하교를 받들었으므로, 사람들이 너무도 서운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깊이 생각하시어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허락하셨으니, 신들은 더욱 기쁘고 다행스럽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관례를 하지 않고 책봉한 고사가 있기는 하지만 동관(童丱)으로 행례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방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8세에 관례를 한 것은 조종조에서 이미 행한 전례이니, 오늘날 당연히 준수해야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고사에 의거하여 관례를 하지 말고 봉작(封爵)하라."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