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고종실록 1권 고종 1년 1864년 1월 1일~10일

싸라리리 2024. 12. 2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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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1월 1일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1권】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이 사람이 지난 시절 보살핌을 받았다는 것은 내가 잘 아는 바이다. 오늘날 내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으니 부호군(副護軍) 박규수(朴珪壽)에게 특별히 한 등급을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하였다.

 

 

특별히 발탁하여 이재원(李載元)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삼고, 특별히 제수하여 조성하(趙成夏)를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다.

 


1월 2일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이런 때에는 정승의 자리를 채우지 않아서는 안 되니 상호군(上護軍) 이경재(李景在)를 재상에 임명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에 이경재(李景在)를 제수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지금 호조(戶曹)의 보고를 보니, 몇 해 전에 신우문(神佑門)에 불이 난 뒤와 휘경원(徽慶園)을 이장한 뒤에 여러 가지 명목의 공가(貢價)를 주지 못한 것이 15만 냥(兩)이나 되고, 이번 국휼(國恤) 때 꼭 사용할 각종의 물건을 먼저 받아쓰고 꼭 주어야 할 것이 10만 냥이나 되며, 쌀을 사들이는 값으로 내줄 것도 족히 15만 냥은 된다고 합니다. 어떠한 방식인가는 논할 것 없이 40만 냥을 한도로 곧 획하(劃下)해 달라는 것입니다. 갖가지의 긴급히 필요하다는 것은 그저 그 당장을 모면해 나가는 데 불과한 것으로, 그 수량이 대단히 많은데 각도(各道)의 곡식을 탕감해 준 다음에는 사실 어느 한 포대도 손을 댈 데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 각영(各營)과 각사(各司), 함경 감영(咸鏡監營)에서 밀봉해 놓은 은자(銀子) 중에서 분수(分數)하여 구획(區劃)한 다음 가져다 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3일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우의정(右議政) 이경재(李景在)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에게는 이 벼슬 자리가 오히려 늦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사람들에게 들으니 조정이나 재야의 촉망을 받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한다. 경 자신만은 아직 몰랐는가? 내 비록 깊은 궁중에 있긴 하지만 나 역시 벌써부터 듣고 있었다.

아! 국가가 오래도록 안전하고 길이 다스려지는 것은 오직 유능한 정승을 얻는 데에 있으니, 식견은 능히 당대를 구해내고 계책은 능히 큰일을 할 만한 인재가 꼭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딴 재주를 부리지 않고 여유 있게 감당할 만한 인물을 찾는다면 오직 경만이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특별히 경을 선발한 것도 깊이 생각하고 오랫동안 궁리한 끝에 한 것이니 경은 마땅히 이러한 내 뜻을 해량하고 지체 없이 나와야 할 것이다.

내가 또 경에게 크게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에 대해서 더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경은 한번 생각해 보라. 지금이 어떤 시기인가? 만약 지나치게 사양하면서 꼭 그 전의 정승들이 하던 그대로 한다면 경에게 기대한 의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금 거상(居喪) 중에 있는 어린 임금에게 어떻게 차마 누차 번거롭게 수고를 끼치겠는가? 나 또한 수렴 안에 마지못해 앉아서 매번 내 심정을 드러내어 하유하게 되면 경의 마음도 결코 편안치 못할 것이다. 시기를 살펴서 권도(權道)를 잘 쓰는 것은 군자(君子)가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경으로서도 필경 생각이 있을 것이다. 경은 곧 일어나서 조정에 나와 국사(國事)를 수행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경재(李景在)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이번에 자전(慈殿)의 하교로 특별하게 선발하니 조정과 재야에서 서로 치하를 하고 인심이 쏠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온 나라에서 다 어질다고 하는 사람이라야 나의 정승감으로 정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경은 중앙과 지방의 벼슬을 두루 지낸 것도 이미 많고, 또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갈 것을 기대한 지도 벌써 오래되었다. 성실한 품행은 세상의 모범으로 될 만하고 담박한 지조는 사람들을 휘어잡을 만하니, 오늘날 정승을 천거한다면 경을 놔두고 누구를 천거하겠는가? 그래서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 내 마음도 든든하였다. 경은 응당 특별한 기대를 우러러 받들어 곧 일어나서 명령에 순응하라. 내 긴 말은 하지 않고 자리에 기댄 채로 기다릴 것이다."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중궁전(中宮殿)에 칭호를 올리는 문제는 조병덕(趙秉悳)의 의론대로 명령을 받아 다시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들에게 의견을 물어 보았습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은, ‘앞서 신이 헌의(獻議)한 것은 곧 기유년(1849)에 이미 시행된 전식(典式)을 따르자는 것이었는데 지금도 다른 의견은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모든 대신들의 의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재가(裁可)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기유년(1849)의 전례대로 하라."

하였다.


1월 4일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지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한정교(韓正敎)의 보고를 보니, 이번에 인산(因山)과 같은 큰일을 당해서 여러 가지로 소용되는 물품들을 지금 미리 준비해놓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돈을 2만 5,000냥(兩) 한도로 먼저 획하(劃下)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제반의 공사 비용을 지금 마련해야 군색한 일이 없을 것이나 경기(京畿) 고을들의 형편으로서는 그런 준비를 결코 해내기 곤란할 것입니다. 대동미(大同米) 1,500석(石)과 결전(結錢) 3,000냥을 특별히 지방에 획급(劃給)하여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5일

 

산릉도감(山陵都監)에서 정자각(丁字閣)의 상량문 제술관(上樑文製述官)에 신석우(申錫愚)를, 서사관(書寫官)에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을 아뢰어 차임(差任)하였다.

 


1월 6일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해서(海西) 지역 각 궁결(宮結)의 잉여 도봉(都捧), 도장(導掌) 명색들을 전부 혁파하고, 그 결가(結價)는 각각 해읍(該邑)에서 종전대로 거두어들이며, 이른바 경차인(京差人)이란 자들은 모두 지경 밖으로 내쫓으라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통지하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관북(關北) 지역의 동전 주조를 철폐하라는 명은 사실 자성(慈聖)의 원대한 사려에서 나온 것이니 만만 번 흠앙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들리는 소문을 참작하고 여러 가지 형편을 헤아려보니, 중도에 철폐된 것으로 인하여 서울과 지방의 수백 호의 백성들의 재산이 탕진되어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길거리를 방황한다고 합니다. 추위나 더위로 원망을 하는 사람이 생겨도 화기를 손상시킬 수 있는데, 더군다나 이렇게 재산을 탕진하고 도로 찾을 길이 없는 무리들이 있는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미 철폐하였다가 곧 다시 하는 것은 신중치 못한 것 같기는 하나 일이 부득이할 때에는 융통성 있게 권도(權道)를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주관하는 당상관(堂上官)에게 분부하여 특별히 60일을 기한으로 주조를 허락하여 재산을 탕진했던 백성들이 어느 정도 수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7일

 

산릉도감(山陵都監)에서 아뢰기를,

"이번 인산(因山) 때 명령을 받고 나가는 높고 낮은 관리들에 대한 지대(支待)를 경기(京畿)의 고을에 분정(分定)한다면 주전(廚傳)에 따른 폐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년의 전례에 따라 명령을 받고 나가는 승지(承旨) 이외에는 각각 그 관청에서 책임지게 할 것이며, 내시(內侍)가 왕래할 때에는 규례에 따라 사복시(司僕寺)의 말을 타고 다니고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서 식량과 반찬을 갖추어 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호조(戶曹)에서, ‘대원군궁(大院君宮)의 건물에 대해서 전례대로 거행라고 명한 일에 대해, 건물 비용으로 1만 7,830냥(兩)을 지출하여 새로 건축하는 일과 수리하는 일을 순서대로 거행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월 8일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이번 사명(使命)은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다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70살 노인이 병든 몸을 끌고 먼 길을 떠나갈 일이 매우 우려된다. 주청 정사(奏請正使)의 사임을 허락하는 동시에 우의정(右議政)으로 대신하라."

하였다. 【조두순(趙斗淳)의 사임을 허락하고 이경재(李景在)를 대신하였다.】

 


1월 10일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공제(公除) 기간이 끝난 이튿날에 문안을 드렸기 때문이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하늘에서 우리 전하께 복을 내리고 지혜를 내리고 오랜 연대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오늘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요(唐堯)나 우순(虞舜)과 같은 훌륭한 덕이라든가 태산 반석과 같은 나라의 튼튼한 터전은 다 전하 스스로 닦으셔서 이룩하게 될 것입니다. 임금의 일체 행동은 하늘이 굽어보고 있으니 항상 하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나라의 법과 규례란 것은 선대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이니 언제나 선대를 본받으려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종묘(宗廟)와 궁(宮)의 제사를 잘 받들되 항상 정성과 공경을 우선으로 하며, 자전(慈殿)을 깊이 사모하면서 언제나 뜻을 받드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검소하게 생활하여 재정을 넉넉하게 하고 바른 말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 놓아 부족한 것을 보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강학(講學)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덕을 닦는 토대가 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이 근본을 튼튼히 하는 도리가 됩니다. 오직 전일한 마음으로 잠시라도 이런 생각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덕이 날로 높아지고 정사도 날로 잘 되어갈 것입니다. 하늘도 기뻐서 복록(福祿)을 내려 주기 때문에 자손을 많이 두는 경사와 나라의 사적이 억만대 이어지는 상서로움이 반드시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신은 저으기 마음속으로 축원하는 바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힘쓰고 또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것이 지극히 합당하니, 심히 좋도다. 꼭 명심하겠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흥근(金興根)이 아뢰기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아뢴 것이 심히 좋으니 삼가 바라건대 그 말을 명심하소서. 그리고 인군(人君)은 자기의 목표를 제1등급의 정사에 두어야 하니, 바로 당요, 우순, 하우(夏禹), 은탕(殷湯),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나 무왕(武王) 같은 임금들의 정사입니다. 신하들이 임금을 섬기러 나서는 이상에는 누구나 자기 임금이 한(漢) 나라 당(唐) 나라의 중간쯤 되는 그런 임금으로 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 것이 고금의 통례입니다.

지난번 즉위하시던 당일에도 등대(登對)하는 자리에서 변변치 못한 말씀을 몇 마디 올린 적이 있지만, 대저 당요나 우순으로 되는 것도 애초에 고원(高遠)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옳은 길로 인도하는 자성(慈聖)의 가르침을 따르고 충성으로 올리는 여러 신하들의 말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는 동일한 명령을 내리게 되는 것이 언제나 법과 규례에 들어맞게 되어 훈계와 충고 같은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는데, 그 요점은 학문을 힘써하는데 있습니다.

대저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민간에서 경서나 외우고 글자나 익히는 사람들이 옛 기록을 뒤지는 그런 것을 이름이 아닙니다. 직접 경험을 쌓고 몸소 시행함으로써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사양함은 당요를 목표로 삼고, 지혜가 깊고 밝은 것은 우순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 의 검소, 은 의 공경, 주 문왕의 순수, 주 무왕의 의열(義烈)도 모두 성명(聖明)께서 스스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자전의 마음을 전하의 마음으로 삼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입지(立志)이니, 뜻이 나름대로 세워진 연후에야 만사가 순조롭게 되어 왼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근본으로 가게 되는 묘책을 얻게 됩니다. 천 번 만 번 비는 바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것이 모두 충성심에서 나온 말로서 지극히 합당하다. 꼭 명심하겠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공제 기간이 어느덧 지나고 보니 전하의 마음이 더욱 황황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공제 기간의 의의는 달수를 날짜로 대신 계산하여 공무를 보면서 거상 기간을 제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루에도 만 가지의 일이 제기되는 것을 너무 오랫동안 돌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바로 전하께서 정사를 보는 첫날이 됩니다. 임금의 모든 행동은 만 가지 일의 출발점인 동시에 수많은 백성들이 쳐다보는 것이니 어찌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유(先儒)의 말에, 당요나 우순을 본받으려거든 응당 선대를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선대 임금들께서 전수하신 가법(家法)은 공경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능히 공경해서 하늘을 섬기고, 늘 학문에 전념하며, 검소함으로써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해 준다면 종묘 사직(宗廟社稷)의 무궁한 복은 실로 여기에 근본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런 것을 유념하시어 행여나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공경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하다는 세 마디의 말이 좋다. 꼭 명심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연군(南延君)은 덕이 높고 모범이 되어 실로 종친(宗親) 중에서도 특출한 분이었습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한 덕에 경사를 맞이하는 것이 오늘에 이르러 더욱 빛나게 되었습니다. 조상에 대하여 벼슬을 추증하는 일도 일반적인 전례만을 따라서 할 것이 아니니, 대원군(大院君)의 생가의 증조부와 조부에게도 특별히 벼슬을 추증하는 은전을 베풀고, 외가에도 또한 3대까지 벼슬을 추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하니,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윤허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동료 정승들의 진술이 모두 정당한 내용이고 좋은 계책이니 만약 전하께서 하나하나 실천해 나간다면 훌륭한 제왕이나 명철한 임금도 결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다른 말씀을 올릴 것은 없습니다. 단지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마땅히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라고 함은, 만 가지의 조화가 그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지혜를 내리고 복을 내리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고, 올바른 기준과 복된 것을 세우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이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것과 서로 안팎을 이룹니다. 대체로 나면서부터 알고 있다는 성인도 물어서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묻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야 여유가 있다.’고들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궁중에서 옛 규례대로 해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그런 것은 자성께 반드시 여쭙고, 조정에서 똑똑하게 익혀두어야 할 의식이나 절차가 제기되면 그런 것은 신하들에게 하문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오늘 한 가지 일을 이해하게 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알게 되면 가는 곳마다 배우고 묻는 것의 도움을 받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것만을 아뢰는 바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물어서 시행하라는 것이 아주 좋은 말이다. 미처 묻지 못하더라도 경 등이 일깨워주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경재(李景在)가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이 자리에 앉아 아직까지 황송하여 저도 모르게 땀이 등골을 적십니다. 어찌 감히 식견이 있음을 자처하면서 초연(初筵)에서 있었던 옛일을 흉내 내어 망녕된 말을 늘어 놓겠습니까마는, 조그마한 성의로나마 입을 다물고 앉아있을 수도 없습니다.

오늘은 우리 성상께서 정사를 시작하시는 첫날입니다. 새 봄이 돌아오고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에 당요 시대의 하늘에서 우순 시대의 해가 환히 다시 밝으니, 뭇 백성들 모두 목을 길게 늘이고 손을 모아 성덕(聖德)이 날로 높아가고 성화(聖化)가 날로 새로워질 것만 바라고 또 빌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인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어린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으시고 어려운 시기이니 만큼 위로는 종묘 사직의 중책과 아래로는 온 나라 백성들의 기대가 오직 전하의 한 몸에 실려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성덕을 높이고 성화를 새롭게 하는 근본은 또한 성학(聖學)을 힘쓰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왕위를 이어받기 이전에 어떤 스승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공부를 하셨는지 신은 감히 알지 못하지만, 대개 공부를 하는 것은 바로 성인이 되는 기초이며 정사를 하는 도구입니다.

천하의 사리(事理)가 끝이 없다고는 하지만, 안위 득실(安危得失)의 계기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리가 다 경서(經書)와 역사책 안에 들어 있습니다. 반드시 마음속으로 분석하고 몸으로 체득한 후에는 과거 이미 그렇게 된 경험과 앞으로 반드시 그렇게 될 이치가 모두 머리 속에 환히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배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배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세히 이해해서 마음과 이치가 하나로 되면, 일상적으로 사물을 접할 때 자연히 공정한 하늘의 이치를 따라서 나가게 됩니다.

예악 형정(禮樂刑政)이 이로부터 나오고 전장 문물(典章文物)이 이로부터 드러나게 된다면, 천하가 아무리 넓고 임금의 정사가 아무리 번거롭다고 하더라도 대처하는 데 방법이 있어서 어느 한 가지 일에서도 중용(中庸)을 얻지 않음이 없고 어느 한 가지 물건도 바르게 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의 마음만 바르게 되면 조정도 바르게 되고 온 나라도 바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인들이 모두 서로 이어 내려오는 공부이고 당우(唐虞) 삼대(三代)가 평화로운 시대를 이룩하게 된 비결입니다.

신이 선대의 고사를 들으니 경연(經筵)을 중히 여기고 유신(儒臣)들을 가까이 하여, 아무리 거상(居喪) 기간이라 하더라도 아직 그만둔 예가 없었으며, 글을 강론(講論)하다가 의심이 생기면 불러서 묻고 일을 처결하다가 막히는 곳이 있으면 불러서 의논하였다고 합니다. 비단 글 뜻을 밝히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체험할 수 있는 실제를 생각하며, 종이 위의 빈 말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정사에 베풀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덕이 날로 높아지고 교화가 날로 새로워지는 아름다움이 있었으니, 이야말로 후대의 임금들이 꼭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전하에게 있어서 덕을 높이고 교화를 새롭게 할 요점은 오직 학문에 있으니, 오늘의 급선무가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을 듯합니다. 바라건대, 이미 성립된 규례를 거울삼고 공부에 더욱 힘써, 반드시 당요와 우순을 목표로 삼으며 선대를 본받아서 꾸준히 노력하기를 그치지 않아서 광명이 넘치는 나라를 이룩하고 만년토록 태평한 토대를 다지소서. 이것이 바로 신의 지극한 축원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것이 매우 좋다. 꼭 그대로 하도록 노력하겠다."

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이번 15일의 차대(次對)를 13일로 앞당겨 거행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번의 차대는 곧 주상이 정사를 시작한 후에 첫 번째로 하는 것이다. 원임 대신들까지 함께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방축향리(放逐鄕里)한 죄인 김시연(金始淵)의 죄는 실로 용서해 줄 여지가 없기는 하지만, 대행(大行)의 조정에서 처분이 있었을 뿐 아니라 옛 관계도 고려해야 할 것이니, 특별히 목숨만은 살려주어 제주목(濟州牧)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김시연은 바로 김로(金鏴)의 아들이다. 김로가 익종(翼宗) 당시에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가? 그런 아버지의 아들로서 몇해 전에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내려가 탐욕스럽고 포학한 소행을 자행한 까닭에, 깊은 대궐에 있는 내 귀에까지 다 들렸다. 내가 마음속으로 놀란 것이 다른 이들의 곱절이나 되기 때문에 이런 하교를 내린 것이다."

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아! 우리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는 하늘을 본받아 무위(無爲)로 다스리셨고 선을 좇음이 물 흐르듯 하여, 정사에 해로운 것은 한 번도 생각하신 적이 없고 백성들에게 이로운 것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망설이신 적이 없다. 안으로는 옷과 타는 것, 기호품과 같은 것을 사치하게 하지 않으셨고, 밖으로는 궁실이나 후원을 꾸미기 위해서 공사를 벌이지 않으셨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부지런히 보살피시니 그 덕에 귀신들도 감동되어, 재위(在位)하셨던 14년 동안은 바람이 고르고 비가 순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니, 응당 창고마다 차고 넘치는 저축이 있었고 백성들도 곤궁한 걱정을 몰랐으며 인구도 늘고 물산까지 풍부해지는 효과를 거의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라의 재정은 고갈되고 백성들은 곤궁해지며, 기강이 해이해지고 풍속이 무너짐이 날로 더욱 악화되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근심과 원한을 참지 못해 윤리를 어그러뜨리는 무리가 나오고 고혈을 짜내는 것을 견디지 못해 명분과 절차를 번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은택이 아래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가슴속에 늘 간절하고,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탄식이 깊은 밤에도 항상 우러나와, 근년 이래로 밤낮없이 고심하고 노력하는 것을 밖에서야 어떻게 알겠는가? 슬프도다, 슬프도다! 차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 감사(監司)나 병사(兵使)와 수사(水使), 그 이외의 모든 관리들이 나라를 위해서 애를 쓴 일은 무엇이고, 임금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일은 무엇인가? 지금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은 초기에 호오(好惡)를 명시(明示)하여 기강을 바로잡아서 억만년을 뻗어 내려갈 우리의 크나큰 터전을 튼튼히 다지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또 내가 애써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뜻이겠는가?

아! 오늘날의 대부(大夫), 경사(卿士), 백료(百僚), 서윤(庶尹) 가운데 대대로 벼슬을 살아오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할 처지에 있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 그 조상 때부터 모두가 명분과 절의를 지키고 염치를 차려 우리의 선대 임금들을 도왔는데, 명분과 절의가 완전히 무너지고 염치가 송두리째 없어진 것이 오늘보다 더 심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나라가 이렇게 위태롭게 된 책임을 누가 져야 하겠는가?

옛사람들이 명분과 절의라고 하던 것을 지금 사람들은 중히 여기지 않고, 옛사람들이 수치로 여겼던 것을 지금 사람들은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탓에, 염치와 예의는 자취를 감추고 개인의 탐욕만 늘어나 이리저리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자들은 모두 잇속만을 구할 뿐이다. 금석(金石)처럼 굳게 지켜야 할 법조문은 빈 문서로 여기고 작고 큰 뇌물 뭉치를 받아먹는 것을 좋은 일로 여기니, 대각(臺閣)에서는 강직하게 간쟁하는 말이 들리지 않고 전형(銓衡)에서는 공평한 정사를 보지 못한 지 오래다. 비위 좋게 아첨하는 것을 비루하다고 하지 않고 남들과 어울려 비웃거나 꾸짖거나 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습속(習俗)이 날로 그릇되고 세도(世道)가 날로 저속해지면서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과 나라의 애통스러운 형편은 더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말이 이것에까지 미치니 어떻게 가슴이 쓰리고 머리가 아프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경하게 여기든 중하게 여기든 나라의 법과 규율은 엄연히 존재하니, 우레나 번개와 같이 엄한 형벌을 가해서 도끼나 작두로써 다스릴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선 모두 함께 고쳐나가자는 뜻에서 이렇게 마음을 털어 놓고 자세히 타이르는 것이니, 벼슬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노력하여 담당한 일이 있는 자는 담당한 일에 힘을 다할 것이고, 바른말을 할 책임이 있는 자는 그 책임에 힘을 다할 것이며, 지방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도 모두 자기들의 직책에 힘을 다하여 임금의 은혜와 조상의 기대를 저버리는 죄를 스스로 저지르지 않도록 하라.

끝내 방자하게 굴면서 두려운 줄을 알지 못하는 자는, 훗날 죄를 뉘우쳐야 하는 때를 당하더라도 혹 내가 미리 타일러 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장차 이 별유(別諭)를 중외(中外)에 널리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봉영 대신(奉迎大臣)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도승지(都承旨) 민치상(閔致庠)에게 가자(加資)하였다.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를 영구히 혁파(革罷)하라고 명하였다.

 

 

특별히 이도중(李䆃重)을 제수하여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이휘중(李彙重)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전 도정(前都正) 정문승(鄭文升)은 곧 익종(翼宗) 때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있던 사람이다.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노인과 유현(儒賢)에게 세찬(歲饌)을 하사하였다.

 

 

조정의 관리로서 나이가 90세 이상 된 사람들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 가자(加資)하고, 자궁(資窮)이 된 자는 지사(知事)를 더 설치하여 단부(單付)하라고 명하였다.

 

 

김경진(金敬鎭)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조성하(趙成夏)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강시영(姜時永)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이유응(李裕膺)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정유(鄭鎏)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조재응(趙在應)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았다.

 

 

부호군(副護軍) 신직모(申直模)가 상소를 올려 아홉 가지 조목을 진달하였는데, 효성을 돈독히 하라는 것, 성학(聖學)을 힘쓰라는 것, 검소한 덕을 숭상하라는 것, 대신들을 존경하라는 것, 비용을 아껴 쓰라는 것, 기강을 세우라는 것, 언로(言路)를 열어 놓으라는 것, 수령(守令)들을 좋은 사람으로 선발해 보내라는 것, 어진 인재를 불러들여 쓰라는 것이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것을 유념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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