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신유
전 강원 감사(前江原監司) 조귀하(趙龜夏)를 소견(召見)하였다.
원주 판관(原州判官) 이철연(李喆淵)에게는 표리(表裏) 1습(襲)을 사급(賜給)하고, 평해 군수(平海郡守) 이용익(李容益)에게는 가자(加資)하여 영장(營將)의 이력을 허용하며, 울진 현령(蔚珍縣令) 김봉년(金鳳年)에게는 영장의 이력을 허용하라고 명하였다. 교체되어온 도신(道臣)이 연석(筵席)에서 포계(褒啓)하였기 때문이다.
2월 2일 임술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경모궁(景慕宮)의 춘향 대제(春享大祭)에 쓸 향축(香祝)을 친전(親傳)하였다.
2월 3일 계해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남단제(南壇祭)에 쓸 향축(香祝)을 친전(親傳)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은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생신이니 도승지(都承旨)로 하여금 문안을 올리고 오게 하라."
하였다.
2월 4일 갑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통제사(統制使) 정규응(鄭圭應)의 장계(狀啓)를 보니, ‘고성(固城)을 영성(營城) 안에 옮겨 설치하는 것은 그 고을의 사세가 편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옛 읍은 요충지에 위치하여 마을과 저자가 모두 남아 있고 누각과 성도 헐리지 않았는데 이제 버려둔다면 더없이 허술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수방장(守防將) 한 자리를 설치하고 군영의 군교(軍校) 중 일찍이 변장(邊將)을 지냈거나 고을에서 이미 좌수(座首)를 지낸 사람으로서 풍력(風力)이 있고 부지런하고 재간이 있는 사람을 24개월을 임기로 하여 서로 바꾸어 임명함으로써 엄히 방비하게 하고, 따로 포수(砲手) 40명(名)을 두어 매월 윤번으로 수직(守直)을 서게 할 것입니다. 본부(本府)를 옮겨 설치한 다음에 전(錢) 1만 3,000냥(兩)을 떨어내어 요대(料代)로 마련할 방도에 대하여 책자(冊子)에 갖추어 올려 보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전 사람들이 여기에다 고을을 설치한 것은 수륙(水陸)상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고을을 옮긴 다음에 이 지역에 대한 방어가 없게 되면 매우 허술하게 될 것입니다. 수장(守將)을 세워 두고 수졸(守卒)을 따로 두어 요해지를 엄하게 보위하고 감시를 성실하게 하는 것은 실로 위급한 때에 서로 도우려는 뜻이니, 모두 장계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양산군(梁山郡)에 별포군(別砲軍) 50명(名), 흥해군(興海郡)에 별포수(別砲手) 30명, 개성부(開城府)에 포수(砲手) 240명을 설치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삼가 하교(下敎)대로 선혜청(宣惠廳)에서 옮겨 온 갑주대전(甲冑代錢) 돈 2,000냥(兩)으로 따로 조총(鳥銃) 160병(柄)을 만들었고, 또 본영(本營)에서 새로 조총 40병을 만들어 도합 200병을 별도로 마련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2월 5일 을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세호(金世鎬)의 장계(狀啓)에, 환곡(還穀)과 이자돈이 포흠(逋欠)난 것을 이무미(移貿米)로 보충하고 상채(償債)의 본전(本錢)과 환전(還錢)을 거두어들이는 여러 조항을 열읍(列邑)에 골고루 배당시키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크게 개혁하거나 크게 변통할 적에 만일 끌어댈 만한 전례가 있으면 그 전례를 끌어다 조치를 취하는 것은 형편상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영락되어 전날처럼 부유치 못한 형편에서 나라의 재정과 백성들의 걱정이 언제나 멎을 때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본전을 세우고 이렇게 장부를 청산하면 장구히 식리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분배할 즈음에 고을의 크기를 보아 되도록 고르게 하고, 거두어들일 때 도신(道臣)이 매번 살펴보고 신칙하여 폐단이 자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포흠을 범한 놈들에 대해서는 엄히 독촉하여 속히 추쇄하되 혹 오래 끌 염려가 있으면 모두 시행하라는 뜻으로 각별히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세호(金世鎬)의 장계(狀啓)에, 산에 의거하고 바다에 임해 있는 창원부(昌原府)는 원래부터 요새지로 불려온 만큼 해부(該府)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키도록 삼군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동북쪽에는 산이 둘러있고 서남쪽에는 바다가 임해 있으므로 방어상 중요하고 위급할 때 믿을 만한 곳입니다. 더구나 그 전에 병영(兵營)을 설치했던 곳이고, 사람들이 다같이 요구하는 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변방 정사를 중시하고 백성들의 소원에 순응하는 뜻에서도 그저 한낱 수령에게만 방어를 책임지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창원부를 승격시켜 방어영으로 만들고 해당 부사 윤석오(尹錫五)를 그대로 병마첨절제사 경상도 수군방어사(兵馬僉節制使慶尙道水軍防禦使)로 하비(下批)하고, 방어하고 절제하는 방도는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속히 계문(啓聞)하여 품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 6일 병인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문묘 석전제(文廟釋奠祭)에 쓸 향축(香祝)을 친전(親傳)하였다.
2월 7일 정묘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사직단(社稷壇)의 춘향 대제(春享大祭)에 쓸 향축(香祝)을 친전(親傳)하였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웅천현(熊川縣)에 별포군(別砲軍) 30명(名), 언양현(彦陽縣)에 별포군 30명, 영덕현(盈德縣)에 별포군 20명을 설치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창원 부사(昌原府使) 윤석오(尹錫五)는 방어사(防禦使)로 승급하였습니다. 밀부(密符)는 선전관(宣傳官)을 시켜 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을 가려 보내라."
하였다.
2월 8일 무진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총융청(總戎廳)에서 보고한 것을 보니, ‘본청(本廳)에는 애초에 말이 없고 다만 복마(卜馬)가 20필(匹) 있을 뿐이므로, 매번 수가(隨駕)하거나 유진(留陣)할 때면 창피하기 그지없습니다. 요즘 건장한 군사 20명(名)을 모집하여 각자 말 1필을 준비하게 하고 복마군(卜馬軍)에 소속시켰다가 50개월이 지난 다음에 원군(元軍)으로 승급시키고, 매해 요미(料米) 150석(石)은 영무미가(營貿米價)를 선혜청(宣惠廳)에 수송할 적에 전(錢) 1,200냥(兩)을 첨부하여 보내어 함께 찾아와서 지급하고, 봉족목(奉足木)은 중순 예비조(中旬豫備條) 중에서 덜어내어 배당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으려 신설하는 것과 관계되는 일이라 본부(本府)에서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보고한 내용대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 9일 기사
정운성(鄭雲星)을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신명철(申命澈)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2월 10일 경오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적전(耤田)을 친경(親耕)하였다. 기민(耆民)에게 선교(宣敎)하기를,
"공경히 기민을 위로하라."
하였다. 봉상시 정(奉常寺正)이 올곡식의 씨를 밭갈이 한 곳에 뿌리고나자 위로하는 술자리를 벌였는데,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이 입시(入侍)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일전에 대원군(大院君)이 내린 화자(鞾子)를 받들었는데, 바로 전하의 뜻이 깃든 물건이었습니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이 왕조를 세우고 이 제도를 창제하여 만대토록 끝없는 복을 전하셨습니다. 신이 준원전(濬源殿)과 경기전(慶基殿)에서 어진(御眞)을 우러러 보았는데, 곤의(袞衣)의 소매와 화자의 제도가 바로 오늘날 새로 만든 모양과 같았습니다. 아! 우리 전하께서 옛 제도를 준수하여 나라를 반석같이 다지고 거듭 빛내는 것은 실로 여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신들은 축복하는 마음 금할 수 없으며 더없이 영광스럽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옛날 제도와 관계되므로 변통시켜 만든 것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친히 제단에 제사를 지내고 존귀한 임금으로서 적전(籍田)에 나가 땅을 밟아 신을 더렵혀가며 오추례(五推禮)를 행하였습니다.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반포하여 백성들을 이끌어 직접 밭을 간 것은 또한 성인들이 때에 맞게 교화를 펴는 뜻이니 보고들은 사람치고 누군들 기뻐하며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옛날 맥구(麥邱)의 노인이 제(齊) 나라 임금에게 이야기를 올리기를 ‘원컨대 온 나라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송축을 잘한 것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농사의 상서로운 징후가 있고 화창한 바람이 음률에 어울리며, 누른 구름과 자색 기운이 상서로운 해를 감싸고 있으니 주(周) 나라의 훌륭한 정사를 다행히 이 날에 다시 보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육부(六府)를 다스리고 구곡(九穀)을 귀중히 여겨 아랫사람들을 이끌며 스스로 쉼 없이 가다듬고 힘쓰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의견이 절실하므로 마음에 새겨두겠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신도 일전에 대원군이 내린 화자를 받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전하의 뜻이 깃들어 있음을 들었는데 이것으로 법식을 반포하여 옛날의 훌륭한 전례를 회복하시니, 신은 흠앙과 찬송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남별전(南別殿)의 어진들을 우러러보았는데, 태조(太祖)와 세조(世祖)가 곤룡포 차림에 목 긴 신을 신은 모양은 모두 옛날 제도대로였습니다. 옛 제도에 의거하여 실행하며 잊지 않게 하려는 뜻은 실로 후세의 본보기가 되고 이번에 계술하신 훌륭한 일은 또한 천명을 맞이하여 이어갈 계기입니다. 이른바 당요(唐堯)나 우순(虞舜)을 본받으려면 조종(祖宗)의 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기뻐서 축복하는 것도 여기에 있고 나라 운수의 영원한 성장도 여기에 있으므로 신들은 서로 바라보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옛 제도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뜻에서 어느 정도 변통시킨 것이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오늘을 경축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동료 재상들이 이미 말을 올린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100여 년이 지난 오늘 전하께서 이 예식을 거행하셨으니, 어찌 혹시라도 보기 좋게 꾸미려 하고 천하가 태평하여 풍성하고 즐거워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첫째도 백성을 위한 것이고 둘째도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농사를 중시하고 근본에 힘쓰는 훌륭함과 뜻을 잊고 일을 계승하는 아름다운 덕에 대해서는 온 나라 사람들이 매우 축복하고 있습니다. 무릇 농사일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늘 오늘의 성상의 마음을 미루시고 추위와 더위의 원망스러움에 대하여 돌보려는 마음을 더욱 간직한다면 하늘이 상서를 내려 만백성들이 창고를 높이 쌓고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다 생업에 안착하여 즐겁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지금 이에 대해서 크게 기대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절실하므로 마음에 새겨두겠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대원군이 전하의 정성을 베풀려는 뜻에서 신에게 새로운 모양의 화자를 하사하였으므로 더할 나위없는 감격과 칭송의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번의 곤룡포와 목이 긴 신은 그 제도를 약간 고친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계술할 뜻을 간직하고 능히 새로 만들어내는 방도를 체득하시어 온 나라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왕조 초기의 전형(典型)을 다시 보게 하였습니다. 신들은 훌륭한 시대를 만나 지극한 혜택을 받게 되었으므로 우러러 축복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옛 제도가 이러하였기에 법식을 반포한 것이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일찍 일어나 수레를 타고 동쪽 교외에 행차하여 땅을 밟아 신을 더럽혀가면서 적전을 간 것은 100년 내에 처음 있는 훌륭한 일이었으며, 이어서 위로하는 주연을 베풀어 임금과 백성들이 마치 한 집안의 부자간처럼 다정히 지냈으니, 반열에 있는 신하와 일반 사람들이 만수를 축원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 영조(英祖)는 직접 적전을 갈고 나서 하교하기를, ‘이제부터는 언제나 손에 쟁기를 잡은 듯한 마음을 가지겠다.’라고 하였으니 임금의 말씀은 위대하였습니다. 《모시(毛詩)》 〈칠월(七月)〉과 《상서(尙書)》의 〈무일(無逸)〉을 통해 비록 농사일을 그림을 그려서 본다지만, 농사일의 어려움으로 말하면 어찌 직접 쟁기를 잡는 것과 같겠습니까? 만약 깊은 대궐 안 호화로운 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이 성상의 하교를 생각하고 백성들을 근본으로 삼는다면 실로 나라와 백성들의 복으로 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절실하므로 마음에 새겨두겠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포의(袍衣)와 화자가 점차 변하여 옛날과 같지 않은 것이 매우 온당치 못하므로 한결같이 남별전 제1실의 포의와 화자의 법식대로 고쳤는데, 간편할 뿐 아니라 바로 왕조 초기의 옛 규식이다. 이런 식으로 화자를 만들면 수화자(水鞾子)로 통용할 수 있으니 매우 좋을 것이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새로 만든 화자가 아주 보기 좋습니다. 그리고 내년 임신년(1872)은 개국한 지 480년이 되는 해입니다. 왕조 초기 옛 제도의 신이 이때에 와서 회복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다시 변경시키지 말고 억만년을 준수할 규례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록 소매의 제도로 말하더라도 그 너비가 좀 좁은 것이 또한 옛 규례입니다. 그러나 30년을 오면서 그 제도가 점차 넓어져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논란한 지 오래입니다. 지금 이미 옛 제도를 회복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다만 30년 내의 일뿐이 아니라 갑자년(1864) 이후에도 넓어지는 폐단이 있었는데 이번에 옛 제도를 회복하였으니 마땅히 길이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번의 포의 화자의 제도로 말하면 변통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옛 법식을 회복한 것입니다. 영상(領相)이 아뢴 ‘의장(衣章)은 자주 고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매우 원칙을 지키는 정확한 주장입니다. 이번에 반포한 모양을 길이 백대의 장정(章程)으로 정하는 것이 매우 좋겠습니다."
하고, 홍순목이 아뢰기를,
"포의 화자의 제도를 조금 고친 것은 실로 옛날 제도를 따른 것입니다. 국가의 제도가 한번 정해진 다음에는 쉽사리 고칠 수 없는 만큼 이 의식(儀式)을 영원히 만대토록 준수하는 규례로 삼는 것이 매우 좋겠습니다."
하고, 김병학이 아뢰기를,
"이 연석에서 한 이야기를 조지(朝紙)에 반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 원소(園所)의 비석을 고쳐 세우는 등의 절차를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거행할 것을 지난번에 아뢴 적이 있었습니다. 봄철이 이미 절반이 지난 만큼 곧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니 도감의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을 차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크게 벌일 것 없이 영건 도감(營建都監)으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적왕손(嫡王孫)과 왕손의 흉배 의장(胸背儀章)을 토의하여 결정하고 후일에 다시 아뢰라는 하교를 지난번에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상의 하교 중 기린(麒麟) 다음은 벽사(辟邪)만 한 것이 없고 백택(白澤) 다음은 산예(狻猊)만 한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은 대성인(大聖人)이 형상을 취해서 제도를 정하신 것이니, 신은 천만번 우러러 경모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기린을 벽사에 대비해보면 그 형상이 매우 근사하고 백택을 사자에 대비해보면 그 형상이 근사하므로 적왕손의 흉배에는 응당 벽사를 사용하여야 하고 왕손의 흉배에는 산예를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품식(品式)과 절문(節文)이 모두 예법의 뜻에 맞고 여러 신하들 의견도 또한 다른 말이 없으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흉배는 이번에 바로잡아 놓았으니 이것을 《오례편고(五禮便攷)》의 〈의장권(儀章卷)〉에 싣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관서(關西)의 유지의(襦紙衣)는 이미 대전(代錢)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습니다. 관북(關北)의 유지의도 관서의 규례대로하여 일체(一體) 대전으로 마련하고, 해도(該道)에서 서울에 상납하는 것 중에서 해마다 해당 수량을 환산하여 북병영(北兵營)에 획송(劃送)하여 관서에서 주관하게 하고, 관세청(管稅廳)에서 평안 병영(平安兵營)에 보내주는 것도 주관하게 하면 편리한 방도에 맞을 듯 합니다. 관서와 관북을 막론하고 나누어줄 때 만약 농간하는 폐단이 있을 경우 속히 군율을 적용한다는 뜻으로 엄격히 과조(科條)를 세워 꼭 실효가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 10일 경오
전교하기를,
"듣자니 친경전(親耕田)을 보통 때에는 적민(籍民)이 갈아 먹고 공상(供上)하는 율무를 세로 바친다고 한다. 친경전에서 파종하여 수확해서 공상하는 율무를 올해는 특별히 감면하라."
하였다.
2월 11일 신미
반교문(頒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궐에 있으면서 도롱이를 걸치고 고생스럽게 밭에서 일할 백성들을 생각하면 비단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마음이 편안치 못하다. 근교에서 예복을 갖추고 의례를 몸소 행하여 직접 쟁기를 잡으니, 사유(社壝)에 올라 구룡(勾龍)이 짝하고 거둥을 인도하여 꾀꼬리가 운다. 생각건대 농사는 천하의 대본으로써 실로 나라를 운영하는 데 더없이 소중하다. 자성(粢盛)은 종묘(宗廟)나 사직(社稷), 산천(山川)의 큰 제사 의례에 이바지하는 것이고, 농사는 백성들이 수고해서 심고 가꾸고 해야만 화(禾)·마(麻)·숙(菽)·맥(麥)을 거두어 들일 것이 아니겠는가.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백성에게 항산(恒産)이 있도록 다스려야 하며, 때에 맞게 씨를 뿌리고 거두어 들이려면 천시(天時)를 미리 유의하여 어기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천 두둑, 백 두둑이던 적전(籍田)에서 삼추(三推), 구추(九推)까지 갈았으니 임금이 몸소 경작하는 의절(儀節)이 매우 밝아서 농부를 거느리고 온갖 곡식을 씨 뿌렸으며, 농사지을 밭두둑의 경계는 천자부터 제후에 이르기까지 각각 한계가 있었다.
상고 시대에는 신농씨(神農氏)의 말에 따라 뭇 백성들이 의지하여 살아왔거니와 역대로 내려오면서 후직(后稷)을 높이는 제사를 지냈는바 모든 임금이 공경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우리 왕조에서도 백성들을 끔찍이 보살펴주어 열성조(列聖朝)에서 여러 번 이 의식을 거행해왔으니, 남묘(南畝)로 나가기 시작한 것은 성종(成宗) 원년이고 이른 아침에 동교(東郊)로 거둥한 것은 영조(英祖) 고사(故事)에 있다. 어리석은 나도 항상 농사일에 힘쓰고 굶주린 백성을 먹이는 데에 늘 근심이 절실하나, 관북(關北)의 기근을 미처 다 구제하지 못한 채로 기근 구제를 위한 곡식을 실어 나르는 일이 벌써 어렵게 되고, 경기의 백성들을 지금 구제해 주자고 하나 작은 혜택은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구제하는 데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 아직도 놀고먹는 자들이 많으니 어떻게 이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겠는가? 모든 사람들을 서로 권면시키자면 나부터 친히 하는 것만 함이 없다. 이에 길일(吉日)을 가려 선농(先農)에 제사부터 올린다.
전사(甸師)가 청도(淸道)하고 장사(掌舍)가 울짱을 설치하는 것은 중국의 삼대 때부터 시행해오던 규례라고 하지만 종백(宗伯)이 홀을 잡고 사도(司徒)가 제단을 청소하는 것은 100년 동안이나 실시해보지 못한 절차이다. 백성들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기고 있으니 임금된 나 자신이 직접 적전을 가는 것도 응당할 일이다. 그대들은 무리 지어 나가서 김매기에 종사하라. 농사를 짓지 않으면 어떻게 많은 곡식을 얻겠는가? 습지에 가고 밭두둑에 나아가니 창포잎이 나고 살구꽃이 피어 농부가 바삐 서둘러야 할 철이고, 쟁기를 단 검푸른 수레 채와 짙푸른 임금의 수레가 거둥하니 춘관(春官)이 적전에서 시위하며, 누런 갓은 쓴 농부가 앞에 있어서 빈(豳) 나라 들판에서 토우(土牛)를 꾸미고, 흰 예복을 입은 임금이 굽어보는데 요(堯) 임금의 섬돌에서 성조(星鳥)를 점치니, 오늘 흙 한 덩이를 간 노고가 올 가을의 일만 창고에 가득 채울 경사가 될 것이다.
특별한 덕으로써 인정을 심어놓는 것이 곧 성왕(聖王)의 논밭이요, 거친 옷을 입고 백성을 편안하게 잘 다스리면 풍년이 들어 국가의 상서가 될 것이다. 나는 밤낮으로 조심하고 경계하면서 몸소 솔선(率先)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니 그대 백성들은 추위와 더위를 탓하며 어찌 편안히 지내면서 농사를 게을리 할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노주(勞酒)의 잔치를 치렀으니, 즐겁게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 권농관이 이르자 백성들이 따르는구나. 농사일이 잘 되어간다고 사관(史官)의 보고도 올라왔다. 기자(箕子)가 정(井)자로 만들어 놓은 제도를 따르는 것은 상서(庠序)·학교(學校)의 뜻이 반드시 여기에 있고, 선왕이 농사를 보살핀 아름다움을 추모하는 것은 백성의 일에 부지런히 힘쓰고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것이 여기에 근본하기 때문이다.
온 나라의 백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을 어찌 몇 마디의 윤음(綸音)을 크게 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교시하니, 잘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삼현(李參鉉)이 지었다.】
【원본】 12책 8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55면
【분류】농업-권농(勸農)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2월 12일 임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이승보(李承輔)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2월 13일 계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2월 14일 갑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숭덕전(崇德殿)과 여러 능침(陵寢)의 공사가 끝났으니 도신(道臣)에게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세호(金世鎬)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고, 감동(監董)한 관리들은 차등 있게 시상하며, 경주 부윤(慶州府尹) 조기영(趙耆永)에게 가자하라."
하였다.
조병창(趙秉昌)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덕희(李德熙)를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한치림(韓致林)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2월 15일 을해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2월 16일 병자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2월 17일 정축
편전(便殿)에 나아가 장릉(長陵)과 영릉(寧陵)의 제사에 쓸 축문에 친압(親押)하였다.
남원부(南原府)의 소호(燒戶)와 화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지급하였다.
2월 18일 무인
장릉(長陵)에 행행(幸行)하였다. 파주 행궁(坡州行宮)에 나아가 경숙(經宿)하였다.
전교하기를,
"고려 공양왕(恭讓王)의 묘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2월 19일 기묘
장릉(長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파주 행궁(坡州行宮)에 환어(還御)하여 경숙(經宿)하였다.
전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묘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묘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화평 옹주(和平翁主) 내외의 묘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라."
하였다.
장릉(長陵) 친제(親祭) 때의 종헌관(終獻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현익(李玄翼)과 장악원 정(掌樂院正) 정관섭(丁觀燮), 우통례(右通禮) 서석보(徐奭輔)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전교하기를,
"연로(輦路)의 세 읍(邑)은 설진(設賑)한 가운데서도 더욱 심한 곳이다. 진휼이 막 지나자 또 납포(納布)할 때가 되었으니, 그 황급한 상황은 보지 않아도 상상할 만하다. 세 읍의 굶주리는 백성들이 바친 군포(軍布)에 대해서 올해에는 특별히 탕감(蕩減)하고, 각 관청에서 받아들이는 수량은 갑주전(甲冑錢) 중에서 급대(給代)하여, 세 읍의 굶주린 백성들로 하여금 숨을 돌리게 하라.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 만큼 굶주리는 백성들의 군포를 철저히 뽑아낼 것이며 각영(各營)과 고을에서 구체적으로 시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문책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 내용을 경기 감영(京畿監營)과 선혜청(宣惠廳)에 분부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환위(環衛)하는 장졸(將卒)에게 친림하여 위로하겠다."
하였다.
이민수(李敏樹)를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양주태(梁柱台)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2월 20일 경진
환궁(還宮)할 때, 고양(高陽)의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소차(小次)에 나아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는 각무(各務) 차사원(差使員)들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 행행(幸行) 때에는 민폐가 별로 없었는가?"
하니,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별하전(別下錢) 3,000냥(兩)은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덜었습니다. 그리고 대원군(大院君)의 별칙(別飭)을 받고 본영(本營)에서 교리(校吏)를 파견하여 결소(結所)들을 살펴보았으나 모두 폐단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연로(輦路)의 백성들의 형편이 매우 황급하기에 어제 전교하였는데, 과연 보았는가?"
하니, 박영보가 아뢰기를,
"삼가 읽어 보았습니다. 각읍(各邑)의 진정(賑政)이 이제 다섯 차례를 돌게 됩니다. 그리하여 굶주린 백성들은 여기에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작년 가을에 이산(離散)했던 백성들이 이 소문을 듣고 다시 모여들어 기호(饑戶)에 추가 등록하여 바야흐로 이로 말미암아 전하의 덕에 대해 감격하며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세 읍의 굶주리는 백성들에 대해 군전(軍錢)을 면제하신 것은 아주 격외(格外)의 조치이므로 백성들이 기뻐하며 춤추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만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기필코 실효가 있게 하라."
하니, 박영보가 아뢰기를,
"삼가 해당 수령들과 철저히 살펴 덕의(德意)를 선양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올 때 길가에서 민가들이 불 탄 곳을 보았는데 다섯 집도 되지 않는다 해서 계문(啓聞)하지 않은 듯하다. 살 곳을 꾸리고 안착시킬 방도에 대하여 감영과 고을에서 충분히 의논하여 조처하라."
하니, 박영보가 아뢰기를,
"민가가 화재를 당한 것은 듣기만 해도 매우 불쌍한 일이지만, 실로 규정에 구애되어 수계(修啓)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그 수령과 상의하여 조처해서 안주하게 하겠습니다. 은혜로운 하교가 이처럼 지극하니 백성들은 감읍(感泣)하여 재난 당한 것도 잊어버릴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숙소로 삼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교(特敎)는 내린다."
하였다. 이어서 파주 목사(坡州牧使) 신석희(申奭熙)를 앞으로 나아오라고 명하였다. 하고, 하교하기를,
"도신(道臣)에게 하교한 바 있지만 파주목에 대해서도 상의하여 조처하라."
하니, 신석희가 아뢰기를,
"삼가 마음을 다하여 봉행(奉行)하겠습니다."
하였다. 박영보가 아뢰기를,
"이번에 내린 여러 하교는 모두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 전하의 덕의가 확연합니다. 오늘의 연설(筵設)을 조지(朝紙)에 반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다같이 알게 하고 또한 봉행하는 처지에서도 힘을 합쳐 전하의 덕을 빛내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다. 오늘의 연설을 조지에 반포하라."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특별히 이배(吏輩)들에게 신칙하여 기어이 실효가 있게 하라."
하니, 박영보가 아뢰기를,
"삼가 마음을 다하여 명을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하였다.
2월 21일 신사
전교하기를,
"은언군(恩彦君)은 왕실의 가까운 친족이다. 증시(贈諡)의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세 때문에, 중간에는 겨를이 없어서 못하였으니 모두 까닭이 있었으나, 선대왕(先大王)의 성충을 우러러 체득하고 있는 만큼 의당 숭보(崇報)의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이다.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고, 은전군(恩全君)에게 증시하는 은전도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일체(一體) 시호를 의정하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한계원(韓啓源)과 의주 부윤(義州府尹) 송희정(宋熙正)의 장계(狀啓)를 보니, 미국 사신(美國使臣)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중국 예부(中國禮部)의 자문(咨文)과 그 나라의 봉함(封函)을 함께 올려보낸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이 사전에 자문을 보낸 데 대해서 회답을 하지 않을 수 없으나, 미국의 신함(信函)이라는 것은 한번 회답하면 왕복하는 것이 될 것이니 사체(事體)로 볼 때 결코 논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말을 만들어 자문을 지어 북경(北京)에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미국 사신의 서신을 보내온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 예부에 회답한 자문의 대략에,
"미국 사신이 보낸 서신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순전히 병인년(1866)에 그 나라의 상선(商船) 2척(隻)이 우리나라의 경내에 들어왔다가 1척은 풍랑을 만났다 구원되었으나 1척은 사람도 죽고 화물도 없어졌는데, 이처럼 서로 판이하게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피해를 당한 까닭을 알 수 없으니 그 원인을 알고 싶으며, 뒷날 그 나라의 상선이 혹시 우리나라 영해에서 조난당할 경우 원칙에 입각하여 구해주고 화목하게 서로 대우하자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 있는데 조난당하여 와서 정박하는 다른 나라의 여객선의 경우에는 혹 양식을 원조하고 필수품을 대준 뒤에 순풍을 기다려 돌려보내기도 하고, 혹 배가 파손되어 완전치 못하면 육로로 호송하여 각각 그들의 소원대로 해 주고 아울러 지장이 없게 해 주었습니다.
미국 조난민들을 구원하여 호송한 말하면 함풍(咸豐) 5년, 동치(同治) 4년과 5년을 전후하여 세 차례에 걸쳐 호송하여 보내었는데, 이 일은 오랜 일도 아닌 만큼 그 나라의 사람들도 직접 보았거나 들었을 것입니다. 먼 나라의 사람들이 풍랑을 헤치며 어렵고 위험한 고비에서 헤매는 것에 대해서는 응당 불쌍히 여기며 돌보아 주어야 할 것인데 어찌 잔인하게 굴며 해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경내에서 피해를 입어 사람들이 죽고 물건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병인년 가을쯤에 평양(平壤)의 강에서 있었던 일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동치 5년 8월 22일에 보낸 이자(移咨)에서 자세히 전부 진술하였으므로 이제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 미국 사신의 편지에서 한 척은 구원되고 한 척은 해를 입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들의 이른바 ‘돌봐 주어야 할 처지로 볼 때 상인과 선원들은 그렇게 심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나라에서 마음껏 멸시하고 학대하였다.’고 한 것은 실로 사해(四海)의 모든 나라들이 똑같이 그렇게 여길 것입니다. 그 나라가 남의 멸시를 받고 싶지 않은 것이나 본국(本國)이 남의 멸시를 받고 싶지 않은 것이나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실로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평양의 강에서 배가 사라진 것으로 말하면 변론을 기다릴 것 없이 그 까닭을 똑똑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 상선이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을 멸시하고 학대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어찌 남에게 먼저 손을 대려고 하였겠습니까?
이번에 온 편지에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자고 희망하였는데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로서 호의를 가지고 서로 관계를 맺자면 접대해서 보내는 도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이 의논해서 판명하고 교섭하자고 하는데 의논하여 판명할 것이 무슨 일이고 교섭하자는 것은 어떤 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조난 당한 객선이 있으면 돌보아 주고 호송해 보내는 문제는 의논하여 판명하지 않아도 의심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장합니다. 혹시 호의를 품지 않고 와서 함부로 멸시하고 학대한다면 방어하고 소멸해버릴 것이니 미국 관리와 통역들은 그저 저희 백성들이나 통제하고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인데 교섭여부에 대해서야 다시 더 논할 여지가 있습니까?
종전에 다른 나라들이 조선의 풍토와 물산을 알지 못하고 매번 통상 문제를 가지고 여러 차례 교섭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며 외국 장사치들도 이득을 볼 것이 없을 것이라는데 대해서는 이미 동치 5년의 공문에서 진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바닷가의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나라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백성들은 가난하고 물산은 변변치 못하며 금은(金銀)·주옥(珠玉)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것이고 미속(米粟)과 포백(布帛)은 넉넉했던 적이 없으니,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국내의 소비도 감당할 수 없는데 만약 다시 다른 나라와 유통하여 나라 안을 고갈시킨다면 이 조그만한 강토는 틀림없이 위기에 빠져 보존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라의 풍속이 검박하고 기술이 조잡하여 한 가지 물건도 다른 나라와 교역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절대로 교역할 수 없음이 이와 같고 외국 장사치들이 이득 볼 것이 없음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매번 통상할 의사를 가지는 것은 대체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똑똑히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번 미국 사신의 편지에서 아직 문제를 끄집어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관리들과 의논하여 판명하고 교섭하자고 요청한 것도 혹시 이러한 일들을 하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난 당한 객선은 전례에 따라 구호할 것이니 다시 번거롭게 의논할 필요가 없으며 기타 문제도 따로 토의하여 판명할 것이 없으니 오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러한 내용으로 그 나라 사신을 잘 타일러서 의혹을 풀어줌으로써 각각 편안하고 무사하게 지내게 한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2월 22일 임오
임한수(林翰洙)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2월 25일 을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시호(諡號)는 행적에 대한 자취이니, 그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어야 받은 사람으로도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이번 시호에 대한 의논이 과연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으나, 만일 조금이라도 지나치게 찬양한다면 이것이 어찌 옛 법이겠는가? 안면에 구애되지 말고 청탁에 관계없이 전적으로 실제 행실과 업적에 따라 정함으로써 옛날의 규례를 회복하도록 홍문관(弘文館)에 분부하라."
하였다.
2월 26일 병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상도 좌병사(慶尙道左兵使) 윤선응(尹善應)이 보고한 것을 보니, ‘본영(本營)의 별포 의무사(別砲義武士) 100인(人)은 이번에 창설하였고, 본부(本府)의 신흥사(新興寺)에 보루를 쌓자는 의견은 전에 이미 올렸으나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 형편을 살펴보면 산세가 험하여 진(鎭)을 설치할 만합니다. 지금 시방(試放) 성적이 우수한 무사를 천전(遷轉)시킬 자리를 영구히 만들어 신흥 별장(新興別將)이라고 칭하고 망단자(望單子)를 보고하여 차출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鎭)과 보(堡)의 형편에 대하여 이미 이와 같이 알고 있고, 기예를 장려하는 데에도 이보다 더 좋은 방도는 없는 만큼 보고한 내용대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 27일 정해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2월 28일 무자
전교하기를,
"삼가 자전(慈殿)의 하교를 받들고 보니, ‘임금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 은신군(恩信君)이 덕을 키워 발양하였으니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주어 그 공적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셨다. 시호를 충헌공(忠獻公)이라고 고치도록 의논하여 정하였으니, 시좌(諡坐) 때 그대로 시행하도록 홍문관(弘文館)에 분부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일전에 시호를 정하는 문제를 가지고 하교한 일이 있지만, 옛날부터 시호를 정하는 규례에 있어서는 포시(褒諡)가 있는가 하면 폄시(貶諡)도 있으니, 이것은 착한 것은 칭찬하고 나쁜 것은 징계하기 위한 본의인데, 근자에는 그렇지 않다. 지위가 판서급에만 들어가면 덮어놓고 시호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그저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엮어 대서 훌륭한 시호를 얻으려고 꾀하고 있는데, 또한 나라의 법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실로 공평한 원칙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왕실의 가까운 일가로서 실제 행적이 있는 사람과 조신(朝臣)으로서 도학을 했거나 충성과 절개가 있고 글재간이 있는 자와 벼슬살이를 하면서 남달리 뛰어나게 업적을 낸 자로서 공론에 부합되는 사람 외에는 절대로 시호를 의논하지 말도록 옛 규례를 거듭 밝힐 것이며, 또한 많은 수를 거론하지 말라고 홍문관에 분부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동문휘고(同文彙考)》를 계속해서 간행하지 않은 지 오래됩니다. 정해진 규례로 보아 맡길 사람이 문제입니다. 행 대호군(行大護軍) 박규수(朴珪壽)를 교정 당상(校正堂上官)에 차하(差下)하여 검칙(檢飭)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삼군부(三軍府)에서, ‘밀양부(密陽府)에 별포군(別砲軍) 40명(名), 거제부(巨濟府)에 별포군 30명, 안의현(安義縣)에 포수(砲手) 21명을 설치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2월 29일 기축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2월 30일 경인
영소묘(永昭廟)·문희묘(文禧廟)·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이어 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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