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고종실록13권, 고종13년 1876년 9월

싸라리리 2025. 1. 1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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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기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근래에 듣자니 지방 고을에서 걸핏하면 방곡(防穀)하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서로 도와야 하는 의리에서 볼 때 어찌 처음부터 중앙과 지방 사이에 피차 무슨 구별이 있겠습니까? 백성들을 구휼하는 정사는 마땅히 형편에 맞춰서 그 실정을 균등하게 해야 하니 빨리 편의대로 교역하여 서로 간에 유무상통(有無相通)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맡고 있는 지방의 사정이 어렵다 하여 외부에 유통하는 것을 막는 도신(道臣)들과 수령들은 특별히 논죄(論罪)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포도청(捕盜廳)에서 곡가(穀價)를 조종하는 것은 도리어 백성들의 소요를 초래할 수 있으니 일절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3일 경신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가을 전알이었다.

 

9월 4일 신유

이풍익(李豐翼)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9월 5일 임술

황해도 암행 어사(黃海道暗行御史) 김윤식(金允植)을 소견(召見)하였다. 서계(書啓)에 근거하여 전 감사(監司) 정태호(鄭泰好), 봉산 전 군수(鳳山前郡守) 윤희수(尹喜秀) 등에게 죄를 주고, 평산 부사(平山府使) 윤영하(尹永夏)에게는 새서 표리(璽書表裏)의 은전(恩典)을 시행하였다.

 

전교하기를,
"방금 황해도 암행 어사(黃海道暗行御史)의 계본(啓本)를 보니 정태호(鄭泰好)가 낭자하게 장죄(贓罪)를 범하였는데 어쩌면 이와 같이 거리낌 없는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백성을 교화시켜야 할 처지에서 이렇게 탐욕을 부리며 해독을 끼쳤으니 한 도의 피폐함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이렇게 법을 어긴 무리들은 심상히 처리할 수 없다. 찬배(竄配)한 죄인 정태호(鄭泰好)는 우선 해부(該府)에서 도로 잡아와서 특별히 엄하게 가두도록 하라."
하였다.

 

근정전(勤政殿)에서 추도기(秋到記)를 설행하였다. 강(講)에서는 유학(幼學) 박병협(朴秉協), 시(詩)에서는 유학(幼學) 윤상익(尹相翊)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남일우(南一祐)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9월 6일 계해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구일제(九日製)를 행하였다.

 

9월 7일 갑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관서(關西)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 의주 부윤(義州府尹)의 장계(狀啓)를 보니, 올해 진하사(進賀使)가 사행(使行)을 갈 때, 우리나라 사람인 황하립(黃河立)과 최천돌(崔天突)이 공패(空牌)를 얻어가지고 몰래 중국 쪽 국경으로 넘어갔다가 소흑산(小黑山)에서 그 지방 사람인 유영관(劉泳寬)을 밀쳐서 다치고 죽게 만들었으므로 중국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띄우고 압송해 보내는 조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심문하여 우선 엄하게 가두어놓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가(崔哥) 놈은 중국의 자문에서, ‘조사 후 석방했는데 끝내 행처를 알 수 없어서 지금 염탐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두 놈이 중국 땅에 잠입하여 또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쳤는데, 중국 자문 안에 교감후(絞監候 : 일단 수감하고 가을에 다시 회심하여 최종 판결을 내리는 것)란 말이 있으니, 진실로 관대한 후의(厚意)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법률로 따진다면, 국경에서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에게 경고하여야 함은 결단코 논의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자문은 문임(文任)을 시켜 말을 지어서 보내도록 하고, 회답이 오기를 기다려 죄인 황하립은 중국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군사와 백성들을 많이 모아놓고 즉시 법을 적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압록강을 건너갈 때 인부의 실제 인원수를 점검하지 못하여 나라의 금령(禁令)이 해이해지게 하고 수치를 끼친 것이 적지 않으니, 세 사신을 모두 파직시키되 복명한 뒤 전지(傳旨)를 봉입(捧入)하고, 신중하게 살피지 못한 수역(首譯)은 유사(攸司)를 시켜 법에 따라 엄하게 처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윤(灣尹)에 대해 말하자면, 진(鎭)의 변경을 엄하게 지키지 못하였지만 우선 월봉(越俸) 3등(等)에 처하는 법을 시행하고, 최가(崔哥) 놈은 도신과 수신, 해당 부윤(府尹)에게 분부하여 며칠 안으로 탐문하여 잡은 후에 장계로 보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올해의 사신 행차부터는 응당 데리고 가야 할 수원(隨員)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너무 많이 데리고 가지 말고, 중국에 갈 때에는 이름에 따라서 점검하며, 패를 줄 때에는 특히 본인 여부를 대조 확인하여 감히 종전처럼 소홀히 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아울러 널리 반포하여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8일 을축

강난형(姜蘭馨)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세재(李世宰)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홍종학(洪鍾學)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9월 9일 병인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일내 금군(一內禁軍)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9월 10일 정묘

전교하기를,
"금오(金吾)의 당상(堂上)들은 패초(牌招)해서 개좌(開坐)하여 정태호(鄭泰好)가 범한 죄상에게 대해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보고한 여러 조항에 따라 문목(問目)을 만들어서 각별히 엄히 형신(刑訊)하고 공초(供招)를 받아서 들이라."
하였다.

 

김재현(金在顯)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조석우(曺錫雨)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방금 평안 전 감사(平安前監司) 조성하(趙成夏)가 아뢴 것을 보니, ‘중국 땅의 사하자(沙河子)는 바로 용천(龍川), 철산(鐵山), 의주(義州)의 접경 지역인데, 지금 저쪽에서 성을 쌓고 관청을 설치하였으며 운항이 이어지고 있는데 틀림없이 몰래 무역할 우환이 있을 것이니 북경(北京)에 자문(咨文)으로 통보하여 금지 조항을 세우고, 묘당(廟堂)에서 연변(沿邊)에 엄격히 신칙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변경에 대한 정사가 문란해졌으니 서로 교류하며 물건을 사고파는 버릇을 더욱 엄하게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임(文任)을 시켜 자문(咨文)을 잘 만들어 북경(北京)에 들여보내게 함으로써 변방을 튼튼히 지키는 방도로 삼을 것이며, 또 이런 내용을 도신(道臣)과 수신(帥臣), 만윤(灣尹)에게 공문을 띄워 신칙하여 철저히 기찰하도록 하고 적발하는 대로 변경에서 효수(梟首)하여 경고한 후에 사건의 전말을 계문(啓聞)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회정(李會正)이, ‘영흥(永興) 본궁(本宮)의 곡식을 해마다 본곡(本穀)으로 갈라서 썼는데 본곡이 이미 소진되어 제수 비용과 관원에게 배분해 주는 급료를 마련할 길이 없어 내주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함경북도(咸鏡北道)의 교제곡(交濟穀) 중에서 절미(折米) 5,000석(石)을 5년 동안 모곡(耗穀)을 제하고 꾸어주고, 상정가(詳定價)에 준하여 작전(作錢)해서 함경남도에 옮겨다가 전량을 분급하여 모곡을 받되, 그 가운데서 250석은 제수 비용으로 해마다 내어주고 그 나머지 수량은 저축해서 본곡에 넣으며, 기한이 찬 다음 미(米) 3,300석을 절가(折價)하여 전(錢) 1만 냥(兩)으로 만들어 북쪽 고을에 옮기고 교제곡 5,000석을 다시 보충해서 완비시키겠습니다.’라고 아뢰고,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달라고 장계로 청하였습니다. 제수 비용도 중요하고, 급료를 나누어 주는 것도 정지하거나 빠뜨릴 수 없으니 모두 장계의 요청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근필(李根弼)이, ‘금천(金川)에는 대흥산성(大興山城)에 바치는 향곡(餉穀)이 있는데, 고을이 피폐해진 데다가 곡식을 운반하는 곳에서 폐단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라고 하며 전례에 따라 하봉(下捧)을 허락해주어 힘을 펼 수 있게 해 달라고 장계로 청하였습니다. 산성의 향곡은 사실 갑자기 의논하여 시원스레 해결할 수 없지만, 도신(道臣)이 진술하여 청한 것은 필시 깊이 헤아려서 그런 것입니다. 해당 군의 향곡은 아직 평지의 창고에 보관해두도록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올해 농사가 처음에는 심한 가뭄을 만났는데 또다시 이른 서리를 만나서 경기(京畿)와 삼남(三南)은 피해가 가장 혹심하였으니 재해 상황을 조사하고 기민(饑民)을 뽑는 정사를 착실하게 하라는 내용으로 이미 연석(筵席)에서 전하가 신칙하시어 지방에 행회(行會)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보니 외읍(外邑)의 못된 무리들이 농사 형편이 어떤가는 따지지 않고 우선 세금을 면해주고 포(布)의 납부를 정지시켜 주라는 말로 선동하고 속여, 멀고 가까운 곳에서 소란과 근거 없는 말들이 넘쳐나게 되었으니 이들은 기강을 어지럽히는 난민입니다. 그리고는 떠도는 거지라고 하면서 때때로 무리지어 위협하여 돈과 쌀을 강제로 빼앗고 조금이라도 뜻에 거슬리면 약탈을 자행하니 이는 용서할 수 없는 도적들입니다. 이처럼 해괴한 습속을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저 죄 없는 백성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근심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그 주모자 몇 놈을 적발하여 먼저 효수(梟首)한 후에 보고하게 함으로써 일벌백계(一罰百戒)의 방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무능하고 유약하여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는 해당 수령은 전최(殿最)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즉시 파면시켜 내쫓도록 엄하게 신칙하여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평안 병영(平安兵營)은 환곡(還穀)에 대한 정사를 변통한 다음부터 병영의 저축이 텅 비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바치는 세의(歲儀)는 폐할 수 없는 정례(定例)이니 본영(本營)에서 연전(年前)에 별비곡(別備穀) 1,000석을 수신(帥臣)의 요청대로 특별히 가져다 쓰도록 허락하고, 후에 본곡을 갖추어 놓는 일은 좋은 편을 따라 조처(措處)하여 수량대로 다시 채워 넣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병비(兵批)할 때에 오위장(五衛將)은 원래 정직(正職)인데 근래에는 함부로 추천하는 일이 많으니 특별히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정해진 규정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또 두 대궐의 위장(衛將)이 비록 정직과는 차이가 있더라도 비망(備望)하여 수점(受點)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임명하였다가 저녁에 교체하니 번잡하기가 매우 심합니다. 이제부터는 원 삭수(朔數) 전에는 일절 개차(改差)하지 말도록 아울러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나라에서 제일 급한 것은 재정입니다. 땅에서 나고 하늘이 만들어주며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하늘과 땅에서는 해마다 만들어 주는데 사람은 해마다 쓰고 있으니 그 쓰는 것을 절약하지 않는다면 형세상 반드시 백성들을 곤궁하게 만들고 병들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사랑하는 정사에서는 비용을 절약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만대의 지극한 훈계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크나큰 공덕과 높은 업적이 방책(方策)에 펼쳐 있는데, 그 요점은 다만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대체로 《주역(周易)》과 《논어(論語)》의 뜻을 깊이 체득한 것이니 실제로 우리나라의 법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인들의 가르침을 명심하고 선대의 법을 본받아 낭비를 없애고 비용을 절약하는 것을 오늘날의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크고 작은 거처(去處)를 막론하고 급하지 않고 긴요하지 않은 비용은 쓰는 데마다 유념하여 일체 줄인다면, 목전(目前)의 지출에 대해 점차 두서를 잡게 될 뿐 아니라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들을 풍족하게 하는 것도 여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신은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재정을 넉넉하게 하는 방도는 비용을 절약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경의 말이 절실할 뿐만 아니라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으니 감히 명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치상(閔致庠)이 아뢰기를,
"방금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보고를 보니, ‘왜관(倭館)에서 공무역(公貿易)하는 생동(生銅)을 여러 해 동안 바치지 못한 분량의 도합 5만 5,390여 근(斤) 안에서 2만 5,390여 근은 생동으로 가져다 바쳤고, 나머지 3만 근은 생동으로 수량을 채울 수 없어서 훈도(訓導)에게 지정한 규례대로 생동 2근을 숙동(熟銅) 1근으로 합산해서 준절(準折)해서 도합 숙동 1만 5,000근을 바치겠다고 계속해서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변통하는 일과 관계되므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본조에서 대납(代納)을 허락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훈도(訓導)에게 물품의 양을 정해 줄 때에는 이런 전례가 많은데, 바치지 못한 몫은 지금 전량을 마감지어야 하니 그들의 소원대로 특별히 시행하는 것의 여부는 처분을 기다려서 통지하겠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것은 일본 사람들의 요청인가?"
하니, 민치상이 아뢰기를,
"관수(館守)들이 이처럼 청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것은 곧 마감지어야 할 것이니, 그들의 소원대로 숙동을 대봉(代捧)하게 하라."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각 궁방(宮房)의 면세결(免稅田結)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니, 민치상이 아뢰기를,
"당초에 망정(望定)할 때 가령 800결(結)이라면 400결은 미(米)로 바치는 것으로 각 고을에 획송(劃送)하고, 400결은 전(錢)으로 바치는 것으로 각 마을에 획송하되, 각 고을에서 해당 궁방에 직접 바치게 하였는데, 돈으로 계산하면 1결에서 받는 것이 7냥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제부터는 호조(戶曹)에서 원결(元結)의 예(例)를 따라 거두어서 각 궁방(宮房)에 나누어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니, 민치상이 아뢰기를,
"돈으로 바치는 전결(田結)은 모두 1만 700여 결인데, 그 가운데서 7,000여 결은 경기(京畿)의 각 고을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삼남(三南)에서 경기의 각 고을로 차례로 획급해 준 것으로 편중된 것이 많으니 다시 삼남의 각 고을에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호조에서 적당히 헤아려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9월 11일 무진

전교하기를,
"정태호(鄭泰好)의 허다한 죄상은 말하면 통분스럽다. 한 도를 맡은 중책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감히 무엄하게 끝없는 탐욕을 부려 결국 도탄에 빠지게 하였고 공용(公用)을 농간질하고, 나라의 시험을 어지럽힌 것이 극도에 달하였다. 임금을 잊어버리고 나라를 저버린 것도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죄인데, 더구나 또 방술(方術)과 사술(邪術)로써 기꺼이 수용(需用)의 자금을 만드는 것은 무지하고 천한 사람들도 하지 못할 짓이다. 그런데 그는 세신(世臣)의 후손으로 높은 반열에 있으면서 이 일은 남들이 침뱉으며 욕하는 짓이라는 것을 몰랐으니 탐욕을 부리고 학대하는 짓을 무엇이든 하지 않았겠는가? 좌도(左道)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해당되는 법이 있으니, 이와 같이 불법을 저지르는 염치없는 무리에게는 단연코 전형(典刑)을 명백히 보여주어서 해서(海西) 백성들의 고통에 대하여 사과하고 조정 반열을 욕되게 한 죄를 씻어야 할 것이다. 죄인 정태호는 제주목(濟州牧)에다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되 하루에 사흘 길의 노정(路程)으로 압송하고, 그가 횡령한 모든 조목은 형조(刑曹)에서 기한을 정하여 받아내서 본도(本道)의 감영(監營)에 내려 보내서 보충하여 백성들에게 돌려주는 방도를 적절하게 조처하라. 수계(繡啓) 지적한, 이른바 막하의 비장(裨將)들은 지위가 낮다고 하여 신문하지 않을 수 없으니, 또한 형조로 하여금 모두 잡아오게 하라. 정중우(鄭重愚)는 한 차례 엄히 형신(刑訊)하여 멀고 원악지에 충군(充軍)하고, 홍봉화(洪鳳華)는 원지에 충군(充軍)하라."
하였다.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정할 때의 교정 당상(校正堂上)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고, 종정경(宗正卿) 이명응(李明應)과 이규영(李珪永), 종친부 정(宗親府正) 이재순(李載純)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9월 12일 기사

정건조(鄭健朝)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서승보(徐承輔)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위리안치 죄인(圍籬按治罪人) 정태호(鄭泰好)는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있을 때 허다하게 횡령한 사실이 여지없이 드러나 이미 엄한 처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술년(1874)과 을해년(1875) 두 해 동안 여러 과거에서 뇌물을 주고 부당하게 참가한 사람이 40여 명이나 되니 선비들의 기풍으로 따져볼 때 참으로 해괴한 일입니다. 기강의 측면에서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수계(繡啓) 중에 이른바 불법으로 참가한 사람들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하여 찾아내어 모두 즉시 충군(充軍)시킨 다음 계문(啓聞)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대사헌 강난형(姜蘭馨), 집의(執義) 권종록(權鍾祿), 사간(司諫) 김영철(金永哲), 장령(掌令) 조동필(趙東弼), 지평(持平) 임규상(任圭常), 헌납(獻納) 이명재(李命宰)이다.】 "정태호(鄭泰好)에게 서둘러 형률(刑律)을 추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와 같이 잡된 무리를 대각(臺閣)에서 일찍 탄핵하여 내쳤더라면 어찌 오늘날 횡령죄를 지었을 리가 있었겠는가? 지금 처분한 뒤에야 시끄러운 것이 합당한지 모르겠다.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는 것이 가벼운 처벌은 아니니 번거롭게 떠들지 말라." 하였다.


【원본】 17책 13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36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정태호(鄭泰好)에게 서둘러 형률(刑律)을 추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와 같이 잡된 무리를 대각(臺閣)에서 일찍 탄핵하여 내쳤더라면 어찌 오늘날 횡령죄를 지었을 리가 있었겠는가? 지금 처분한 뒤에야 시끄러운 것이 합당한지 모르겠다.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는 것이 가벼운 처벌은 아니니 번거롭게 떠들지 말라."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응교(應敎) 김흥균(金興均), 부응교(副應敎) 조용호(趙龍鎬), 교리(校理) 홍우기(洪祐冀)와 신석연(申錫淵), 부교리(副校理) 이국응(李國應)과 이범구(李範九), 수찬(修撰) 강기(姜𨪌)와 조만식(趙晩植), 부수찬(副修撰) 조동만(趙東萬)과 조용구(趙龍九)이다.】 "정태호(鄭泰好)에게 서둘러 형률(刑律)을 추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간(臺諫)들에게 주는 비답(批答)에서 이미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원본】 17책 13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36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정태호(鄭泰好)에게 서둘러 형률(刑律)을 추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간(臺諫)들에게 주는 비답(批答)에서 이미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9월 14일 신미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거행하였는데 제술(製述)로써 강(講)을 대신하였다. 명(銘)에서는 유학(幼學) 신기선(申箕善)을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각부(各部)에서 20냥(兩) 이상의 송사(訟事)에 대해서는 들어주지 않기로 본래 정식(定式)이 있습니다. 듣자니 서부(西部)에서 지금 수백 냥의 채전(債錢)에 관한 사건을 가지고 소란스럽게 하니 소문이 자자하다고 하는데, 법으로 따져볼 때,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해부(該部)의 관리 조경승(曺慶承)을 해부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조처하게 하고, 평상시 잘 신칙하지 못한 한성부 당상(漢城府堂上)도 모두 엄하게 추고(推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16일 계유

규장각(奎章閣)에 나아가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의 두 본궁(本宮)에 제사지낼 때 쓸 옷과 향, 초를 친히 전하였다.

 

9월 17일 갑술

이원명(李源命)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9월 18일 을해

의정부(議政府)에서 암행 어사(暗行御史)로 적합한 사람을 하교(下敎)에 따라 더 뽑아 들여보낸다고 아뢰었는데, 대상자는 조동필(趙東弼), 정인성(鄭寅性), 이명재(李命宰), 이정래(李正來), 조충희(趙忠熙)였다.

 

9월 19일 병자

전교하기를,
"돌아온 사신에게 며칠 전에 처분을 내린 것은 사체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달 외국에서 많은 수고를 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면시켰던 세 사신에 대해서는 모두 특별히 용서하고, 수역(首譯)에 대한 처벌도 잠시 보류하라."
하였다.

 

신응조(申應朝)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9월 20일 정축

남정룡(南廷龍)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9월 21일 무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박제인(朴齊寅)이 장계(狀啓)를 올려 참혹한 농사 형편을 진술하고, 이어서 뒤에 기록한 여러 조항에 대하여 모두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사환미(社還米)로써 창고에 남아 있는 양이 8만 4,974석(石)인데, 현재 진자(賑資)로 획부(劃付)해서, 하납(下納)하여 유치한 몫에서 3만 석은 시가(時價)대로 팔고 특히 재해가 우심(尤甚)한 고을의 신환(新還)은 상정가(詳定價)로 대봉(代捧)하고, 내년 가을에 도로 본색(本色)으로 받겠습니다. 대동포(大同布)는 3분의 1에 한해서 돈으로 대납(代納)하고, 각영(各營)과 각 아문(衙門)에 상납하는 군포(軍布)와 악공 보포(樂工保布)는 분등(分等)하여 돈으로 상납하되, 특히 재해가 우심한 고을에서 대전(代錢)하는 몫은 절반에 한해 기한을 물려주고, 조운선(漕運船)으로 운반하는 각 고을의 궁방 세미(宮房稅米)와 악공 보포는 모두 매 석에 5냥(兩)씩 쳐서 대봉하고, 성향곡(城餉穀)은 절반에 한해 평지의 창고에서 받아서 저장해 두고, 내년 가을에 가서 본소(本所)에 다시 바치도록 할 것입니다. 각년(各年)의 증렬미(拯劣米)는 단지 특히 재해가 우심한 고을에만 기한을 물려주고, 바닷가 연안 고을의 어세(漁稅)·염세(鹽稅)·선세(船稅)는 절반에 한해 기한을 물렸다가 내년 가을에 가서 수량대로 바치게 해 달라는 내용에 대해 모두 장계의 요청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2일 기묘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올해의 혹심한 가뭄은 근래에는 드문 것인데다 된서리까지 일찍 내려 늦곡식까지도 수확할 가망이 없게 되어 궁벽한 마을에서는 현경지탄(懸磬之歎)001)  이 배나 더하게 되었다. 경기(京畿)와 삼남(三南)이 특히 흉년들었다는 보고가 많으니 연분(年分)에 대한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나라가 믿고 헤아리는 것은 오직 백성이고 백성들이 믿고 목숨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곡식이다. 설사 대풍년이 든 해라도 저 여름철에 김매는 농군의 수고를 생각하면 오히려 풍년에도 괴로움이 있는데, 지금은 흉년이 들고 어느새 추위가 닥치고 농사가 끝나 마당 쓸기도 거의 끝나게 되었는데 마을이 적막하고 수만 명의 백성들이 부황이 들고 사정이 다급해진 것이 아무래도 수확 전보다 몇 곱절 더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한밤중에도 잠 못 들고 근심과 한탄 소리는 한밤중 베갯머리 곁에서 들리는 듯하다. 아! 백성들은 바로 나의 적자(赤子)이다. 적자가 기근과 추위에 울부짖는데 부모의 마음으로 과연 밥을 달게 먹고 편안히 잘 수 있겠는가? 하물며 삼남(三南) 지방은 나라에서 크게 의지하는 곳이니 하늘이 부여한 곡창이며, 경기(京畿)는 바로 서울의 근간이 되는 땅이다. 대체로 구휼(救恤)과 주진(賙賑)의 방도에 대해서는 응당 도신(道臣)의 보고를 참작하고 묘당(廟堂)에서 의논하여 강구하는 것이 있겠지만, 나로서는 나의 아픔 같은 생각이 드니 참으로 지연시킬 수 없다. 특별히 내탕전(內帑錢)을 경기(京畿), 호서(湖西), 영남(嶺南), 호남(湖南)에 각각 1만 냥씩 내려 보내라. 이것은 구제에 약간의 보탬이 되기에도 부족하겠지만 도신이 진자(賑資)에 적당히 배분하여 보태 쓰라. 특히 재해가 극심한 고을에서는 삭선(朔膳)과 명절에 바치는 방물 물선(方物物膳)을 내년 가을까지는 바치지 말고, 각전(各殿)과 각궁(各宮)에 초하루와 명절에 올리는 물선(物膳)은 이미 자전의 하교를 받았으니 일절 바치는 것을 중지하며, 단오 부채를 진상(進上)하는 것도 면제하라. 그리하여 앞으로 진휼의 재원에 보태서 곤궁하여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에게 실효가 있게 해서 조정에서 관심을 가지고 구제한다는 것을 모두 알게 하는 것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묘당(廟堂)에서 사도(道)의 도신들에게 행회(行會)하라."
하였다.

 

9월 23일 경진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내리신 전교(傳敎)를 읽었는데, 재해 입은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이 글에 넘쳐났습니다. 특별히 내탕전(內帑錢)을 분획(分劃)하고, 계속해서 방물(方物)과 물선(物膳), 명절에 바치는 부채를 면제하라고 하셨는데 아주 훌륭한 조치이며 큰 은혜입니다. 진헌(進獻)하는 물건은 이미 면제하도록 명령하였으니 조정에 관례로 바치는 부채도 형편상 정지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거기에 드는 물력(物力)을 모두 진자(賑資)에 쓰도록 해당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회정(李會正)의 장계(狀啓)에, 단천(端川), 명천(明川), 경성(鏡城)에서 포락(浦落)된 재결(災結) 95결(結) 14부(負) 9속(束)은 특별히 조세를 정지하도록 허락하여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토지를 개간하여 원래의 조세 총량을 회복하는 내용으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세 고을의 재해 형편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를 올렸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독촉하여 백징(白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특별히 허락하여 3년간 조세를 정지시키는 것을 허락하고, 기한이 되면 원래의 조세 총량을 바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그전에 외도(外道)에서 진휼할 때 역참(驛站), 목장(牧場), 진(鎭), 보(堡)의 백성들은 매번 고을의 백성들과는 구별되어 제외되었으니, 이들도 다 같이 임금의 땅이고 임금의 백성이거늘 함께 똑같이 취급하여 진휼의 대상으로 뽑지 않는 것이 어찌 차별 없이 베푸는 정사이겠습니까? 세전(歲前)과 세후(歲後)를 막론하고 구제소(救濟所)를 두루 설치하여 모두 구제하여 한 사람도 은혜를 입지 못하였다는 한탄이 없도록 흉년이 든 모든 도(道)에 관문으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시골 백성들이 본부(本府)에 와서 송사(訟事)한 것을 보니, 그중에 종종 경사(京司)에서 공문(公文)으로 빚을 징수하는 사안이 있었습니다. 빚을 징수하는 문제가 일찍이 각 아문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렇게 법에 어긋나는 짓을 한단 말입니까? 협잡하는 모리배들이 갖가지로 농간을 부리고 청탁질을 일삼아 간혹 몰래 공금을 쓰고는 강제로 받아내는 자가 있으며, 혹은 공물이라고 거짓으로 핑계대고 마구 빼앗아가는 자도 있습니다. 심지어 사채(私債)를 뒤섞어놓고 마구 괴롭히고 독촉하는 폐단도 적지 않습니다. 하물며 지금 흉년이 든 때에 백성들이 삶을 지탱하는 방도를 다른 때보다 곱절 잘 세워야 하는데, 중앙과 지방에서 직임을 수행하는 신하들이 엄하게 배척하지 않고 도리어 안면에 구애되어 생색내는 수단으로 삼아 법도가 날로 무너지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다만 듣는 바대로 우러러 아뢰어야 하며 이와 같은 폐습(弊習)이 다시 나타나면 해당 아문의 당상(堂上) 및 도신(道臣)과 수령은 모두 엄하게 처벌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며, 간사한 무리들은 엄히 형신(刑訊)하여 도배(島配)하겠다는 내용으로 우선 각도(各道)에 반포하여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위리안치 죄인(圍籬安置罪人) 정태호(鄭泰好)가 전에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있을 때 횡령한 물건은 형조(刑曹)에게 징수하여 내려 보내라는 내용으로 이미 처분하였습니다. 탐학을 징계하고 백성들을 돌봐주는 전하의 뜻은 만 번 우러러 칭송하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암행 어사(暗行御史)의 보고에서 횡령한 양을 계산하여 열거한 것이 있으면 그 수량이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형조(刑曹)로 하여금 그 가동(家僮)을 가두고 일일이 징수해서 공물(公物)은 관청 창고에 다시 채워 넣고 백성들의 재산은 백성들에게 돌려주도록 정식(定式)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는 문제는 혹심하게 흉년이 든 해에 그만둘 수 없는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금령(禁令)은 있으나 금령의 실효가 나타나지 않으니 어찌 금지하는 본의가 있겠습니까? 요즘 듣자니 궁가(宮家)와 양반집들에서는 간혹 술을 많이 빚어 이익을 독차지하는 폐해가 있지만, 누구도 감히 따지지 못하고 내버려두고 있으니 기강으로 볼 때 참으로 해괴한 일입니다. 법사(法司)의 당상(堂上)과 좌우포장(左右捕將)을 무거운 쪽으로 추고(推考)하고, 궁가(宮家)와 양반집을 막론하고 철저히 조사하여 큰 일이면 초기(草記)를 올리고 작은 일이면 자체로 판단하여 법으로 처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듣자니 외도(外道)의 읍촌(邑村) 중에는 영락된 곳이 많다고 하는데 도신이나 수령이 조정의 명령을 두려워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적발해서 논죄하는 조치가 있어야 하니 우선 이런 내용으로 각도(各道)에 관문(關文)을 내어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4일 신사

〖청(淸) 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세 사신을 소견(召見)하였다. 【정사(正使) 한돈원(韓敦源), 부사(副使) 임한수(林翰洙), 서장관(書狀官) 민종묵(閔種默)이다.】


【원본】 17책 13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37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청(淸)

 

김병지(金炳地)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조석우(曺錫雨)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9월 29일 병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재원(李載元)의 장계를 보니, ‘여러 고을의 빈궁한 백성들의 상황은 부황이 들어 한 해를 넘길 가망도 없으니 환곡(還穀)의 쌀을 독촉하여 받아내는 일은 실행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응당 받아야 할 환미 원곡(原穀)과 사환미(社還米) 원곡은 재해가 가장 심한 19개 읍진(邑鎭)에 대해서는 전량을, 그 다음으로 심한 16개 고을은 3분의 2를 기한을 물려서 내년 가을에 가서 본색(本色)을 거두고 아울러 모곡(耗穀)도 본색으로 받아들여서 관례적으로 지출하는 비용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며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주기를 청하였습니다. 나라의 근간이 되는 경기(京畿)를 염려하여 지난 번에 은혜로운 명령을 내린 것은 크나큰 은전에서 나온 것이니 전하의 덕화를 우러러 체득하는 도리에서 응당 전례를 따라 극진히 돌봐주는 정사가 있어야 하는데, 연분(年分)을 수계(修啓)한 뒤에 도신이 또다시 이렇게 진술하고 청하니 백성들의 황급한 형편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재해가 가장 심한 고을인가 그 다음으로 심한 고을인가를 막론하고 환곡의 정해진 수를 물리는 것을 특별히 장계의 내용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여 가난한 마을의 백성들이 힘을 펴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30일 정해

경상도 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 홍대중(洪大重)을 소견(召見)하였다. 서계(書啓)와 관련하여 전 감사(監司) 홍훈(洪坃), 전 통제사(統制使) 권용섭(權容燮), 전 우병사(右兵使) 서상악(徐相岳), 전 진주 영장(晋州營將) 전 어병수(魚秉琇), 통우후(統虞候) 전 이문용(李文容) 등에게 죄를 주었다.

 

전교하기를,
"정태호(鄭泰好)는 벌써 처분을 내렸지만 아직도 통분스러운 것이 있다. 방금 경상도 암행 어사(慶尙道暗行御史)의 보고를 보니, 이전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들이 낭자하게 장죄(贓罪)를 저질렀으니 어찌 이리도 탐관오리들이 많단 말이냐? 임금의 교화를 펴고 여러모로 방책을 운용하는 자리를 다만 토색질하고 학대하는 소굴로 만들었으니, 나라에서 번진(藩鎭)을 설치한 것이 결국 이 무리들의 손에서 손상되었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저도 모르게 한심한 생각이 든다. 수신에게는 원래 감처(勘處)하는 법이 있지만, 홍훈(洪坃)처럼 횡령한 자는 그 전에 없었으니 그 나라를 저버린 죄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것을 심상하게 처리할 수 없으니 도배(島配)한 죄인 홍훈(洪坃)을 우선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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