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무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조병식(趙秉式)이 장계를 올려 도내 백성들의 사정이 매우 급한 정황을 진술하고, 이어 각 읍진(邑鎭)과 역참(驛站)의 창고에 보관한 별비미(別備米) 4만 7,859석(石) 남짓을 특별히 획하(劃下)하는 것을 허락하여 진자(賑資)로 만들기를 청하였으니, 특별히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돈상(李敦相)이 장계를 올려 농사와 면농(綿農)에 참혹한 흉년이 든 정상을 진술하고, 이어 각읍(各邑)의 원환(原還)을 모곡(耗穀)만 받고 본 곡은 내년 가을까지 징수를 정지하고, 훈국 포보(訓局布保)와 병조(兵曹)와 각 아문(衙門)의 번포(番布)는 모두 돈으로 대봉(代捧)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환곡(還穀)은 다만 재해가 우심(尤甚)한 고을은 절반까지 정퇴(停退)하고 훈국 포보는 5분의 1을 돈으로 바치며, 병조 각영(各營)의 번포는 3분의 1을, 각 아문에 바치는 것은 전량을 순전(純錢)으로 대납(代納)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4일 신묘
김영수(金永壽)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10월 5일 임진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0월 6일 계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방곡(防穀)에 대한 법령을 느슨하게 하는 내용으로 계품(啓稟)하고 행회(行會)한 지 이미 한 달이 지났는데도, 계속 소식이 들리는 것은 외읍(外邑)에서 계속 거절하기 때문에 멀고 가까운 지역의 장사꾼들이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하여 빈손으로 돌아오기를 면치 못한다는 소리뿐입니다. 그 즉시 거행하지 않는 여러 도신(道臣)들은 우선 엄하게 추고(推考)하고, 제멋대로 교역을 막아버린 해당 수령은 적발하여 논계(論啓)하고 조율하여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7일 갑오
우레가 치고 우박이 떨어졌다.
김원식(金元植)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봄부터 가을까지 혹심한 가뭄이 계속되어 결국 흉년의 재해를 당하게 되었으니, 나는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속으로 매우 애태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레가 울리는 이변이 또 추수하는 달에 일어났다. 재변이란 이유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연유가 있으니 첫째도 내가 부덕해서이며, 둘째도 내가 부덕해서이다. 부덕한 내가 만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고 온갖 일이 복잡하게 밀려드니 백성들이 곤궁에서 헤매도 편안하게 해주지 못했고 기강이 해이해져도 크게 진작시키지 못하였다. 횡령하는 폐습이 날로 성해지고 사치가 날마다 기승을 부리지만 징계하여 금지시키는 방도를 살피지 못하였으니 지극히 인자한 하늘이 경고하여 이끄는 것이 어찌 이처럼 간곡하지 않겠는가? 마음 가득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그칠 수 없다. 오늘부터 사흘 동안 반찬을 줄여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나타내어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겠다. 수양하고 반성하는 대책의 경우에는 위로는 임금과 아래로는 신하들이 함께 힘써 경계해야 할 일이니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연명 계사(聯名啓辭)를 올려, 【좌승지(左承旨) 심동신(沈東臣), 동부승지(同副承旨) 박용대(朴容大)이다.】 우레의 재변과 관련하여 면려(勉勵)하기를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어진 하늘의 경고가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이것은 내가 덕이 부족하고 정사를 잘못하여 하늘의 뜻에 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두려운 마음이 지극하고 계속해서 부끄럽도다. 재앙을 막을 대책에 대해서 진술한 내용이 매우 절실하니 마땅히 명심하겠다."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응교(應敎) 김흥균(金興均), 부응교(副應敎) 조용호(趙龍鎬), 교리(校理) 이명재(李命宰)와 이희원(李喜元), 부교리(副校理) 이범구(李範九), 부수찬(副修撰) 조충희(趙忠熙)이다.】 권면(勸勉)하니, 비답하기를,
"천재(天災)와 지이(地異)가 생기는 것은 필시 까닭이 있어서이다. 생각건대 내가 부덕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듯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에 있어서는 흉금을 터놓고 일깨워주는 것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으니 진술한 내용을 어찌 명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 우의정(右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면려(勉勵)하기를 진달하고, 이어 사임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상하 군신들이 밤낮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 서로 면려하는 것은 비록 곡식이 잘 여물고 백성들이 안정되며, 온갖 법도가 잘 거행되는 때라 하더라도 감히 단 하루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부덕하여 지금 흉년을 당하여 백성들의 근심은 날로 다급해지고 나라의 재정은 날로 어렵게 되었다. 이것을 수습하고 보완하는 대책은 오직 경들의 보필(輔弼)에 의지하는 것뿐이다. 이번의 때 아닌 우레는 면전에서 간곡하게 명령하는 듯하였는데, 오직 내가 위로는 하늘의 인자한 보살핌에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잘못을 살피는 정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밝으신 하늘의 꾸지람이 있게 된 것이다. 지금 자신을 수양하고 반성하는 방도는 오직 진심으로 하늘의 뜻에 응답하되 형식적으로 하지 않는 데 있다. 그런데 경들이 사임을 청하는 글이 들어오니 놀라고 두려운 끝에 나도 모르게 탄식하게 된다. 권면하는 진술의 경우에는 그저 재변을 막기 위한 방도만은 아니므로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니, 감히 새겨두고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들은 이 지극한 뜻을 알고 더욱 훌륭한 계책으로 권면하여 지금의 난국을 널리 구제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0월 8일 을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0월 9일 병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양주화(梁柱華)의 보고를 보니, ‘이 흉년을 당하여 각처(各處)의 둔전(屯田)이 재해를 입지 않는 데가 없으니 군교(軍校)와 군사들의 매달 급료(給料)를 나누어줄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본영(本營)에서 관할하는 좌영(左營) 별향미(別餉米)의 모곡(耗穀) 중 1,000석(石)에 한해 연례대로 획하(劃下)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남쪽 변경의 중요한 요충지에서 둔전(屯田) 농사가 흉년이 들어 군사들이 먹을 것이 없게 되었으니 이렇게 해 주는 것이 형편상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별향미(別餉米)의 모곡(耗穀)은 귀속시킬 곳이 있으니 해마다 획하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논할 것이 못 됩니다. 그 원곡(元穀) 중에서 1,000석을 특별히 가져다가 구제하는 데에 보태도록 하고 본곡(本穀)을 채우는 것과 같은 문제는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좋은 쪽으로 의논하여 내년에 가서 수량을 채워 넣은 후에 본부(本府)에 보고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김세균(金世均)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0월 10일 정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그는 무인(武人)이지만 대대로 공로를 세운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2품 반열에 있는 자이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정성은 마땅히 다른 사람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변경을 지키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 이렇게 탐욕을 거리낌 없이 부리니 조상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그 죄에 마땅히 갑절이나 되는 형률을 적용하여 장래에 일어날 일에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공신(功臣)의 집안을 단절시키지 않는 의리를 생각해서 특별히 가벼운 법을 따라 나수(拿囚)한 죄인 권용섭(權容燮)은 도배(島配)하는 법을 적용하라."
하였다.
이풍익(李豐翼)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0월 11일 무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재현(金在顯)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10월 12일 기해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동래(東萊)의 왜관(倭館)에 지급하던 공작미(公作米)와 공작목(公作木)은 이미 혁파되었으니 내년부터는 수량대로 상납해야 합니다. 동래부(東萊府)는 변경의 중요한 곳이니 종전에 있던 수 많은 명목을 지금 전부 없애버린다면 쇠잔해져서 지탱하기 어려울 것은 형세상 반드시 그러한 바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둘 것과 없애버릴 것을 구별하여 보고하게 했던 것입니다. 감영(監營)과 동래부(東萊府)에서 마련하여 작성한 문서가 지금 올라왔는데 ‘첨부하여 이익을 얻는다.’고 한 것은 지금은 의논하기에 적절하지 않고, 보축조(補縮條)와 같은 것은 모두 삭감해 버리며, 내년부터 공작미 중에서 4,000석(石)은 해마다 매겨서 오래도록 획하(劃下)하고, 5,000석은 상정가로 대납(代納)하도록 허락하며, 환미(還米) 2,000석은 순영(巡營)에서 종전대로 획급해서 보내어 해당 부사(府使)로 하여금 참작하여 균등하게 배분시키고 절목을 만들어 본부에 올려 보내게 하여 반첩(反貼)하고 그것을 준행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앞으로의 공무에서 예비비가 없어서는 안 되니 미(米) 500석은 해마다 항상 본읍(本邑)에 보관해 두었다가 수요대로 보고하여 결정하고, 하납(下納)한 미와 태(太) 가운데 각 읍에서 미처 거두지 못한 것, 가을에 가서 환납(還納)하는 것, 배년(排年)하여 미리 내려준 것, 각년(各年)에 입급(入給)하지 못한 것 등 이상의 여러 항목은 지금 제도가 없어지는 날에 와서 지연시키거나 내버려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두 장부에 따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장부를 정리하도록 본도(本道)의 도신(道臣)과 해당 부사(府使)에게 일체 관문(關文)으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해당 고을과 곤진(梱鎭)의 공적인 비용과 폐단을 수습하는 데 지출하려고 영원히 획급(劃給)하여 항상 보관하게 한 비용 외의 제반 납부할 것과 이번에 상정가(詳定價)로 대납을 허락한 것은 이제부터 모두 무위소(武衛所)에 넘겨주고 본 도로 하여금 전례대로 상납하게 하라. 또한 전후로 보관해두고 있는 것과 미처 거두지 못한 여러 가지 조항도 일체 기준대로 납부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평안 감사(監司) 김상현(金尙鉉)은, ‘삼화 부사(三和府使) 김병일(金炳一)이 오로지 횡령을 일삼아 전후로 빼앗은 것이 2, 3만 냥(兩)에 달하여 온 고을 경내에서 원성이 높으니 우선 파출(罷黜)하고, 이어 유사(攸司)에게 품처(稟處)하게 해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탐관오리를 징벌하는 일을 얼마나 특별히 엄하게 명하였습니까? 그런데도 가렴주구한 정사가 이처럼 낭자하니 법도로 보건대 참으로 놀랍고 분한 일입니다. 해부(該部)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처벌하고 횡령한 수많은 물건들은 도신(道臣)이 하나하나 사핵(査覈)하여 보고한 후에 형조(刑曹)에서 독촉하여 받아서 내려 보내게 하고, 향리로서 앞잡이 노릇을 하여 같이 악행을 저지른 자도 본 도로 하여금 조율하여 형배(刑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렇게 법을 어긴 무리들을 심상하게 처리할 수 없다. 그 죄상과 횡령한 재물의 수량을 본 도로 하여금 다시 일일이 전부 조사하여 성화같이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4일 신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돈상(李敦相)이 본도(本道)의 농사가 흉년 든 형편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사창(社倉)의 별비미(別備米)로 창고에 보관해둔 양 중에서 4만 석(石)을 진자(賑資)에 보태 쓰고, 그 나머지 1만 1,600여 석은 팔아서 집전(執錢)하여 모두 진자(賑資)와 함께 내년 가을에 가서 본 곡을 채울 것을 묘당(廟堂)에게 품처(稟處)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목전(目前)의 진자(賑資)와 앞으로의 예비 물자를 도신(道臣)이 진술한 것은 원래 참작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니 모두 장계 내용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조정에서 남쪽 지방을 걱정하는 뜻에 부합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19일 병오
김원식(金元植)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유세환(兪世煥)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10월 20일 정미
전교하기를,
"죽은 판종정경(判宗正卿) 이도중(李䆃重)의 시호(諡號)를 다시 의논하라."
하였다.
정건조(鄭健朝)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지금 각도(各道)의 흉년에 대한 보고를 보니 백성들이 곤궁하고 죽어서 구렁에 빠지는 상황이 급박하게 닥쳤습니다. 삼화(三和)의 전 수령(守令)의 사안을 놓고 말하면 참으로 놀랍고 원통합니다. 말처럼 조그마한 고을에서 횡령한 수량이 수만 냥으로 계산되니 이에 도신(道臣)들이 논계하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미루어볼 때 다른 도에도 이런 폐단이 없다고 보장하는 것을 감히 믿을 수 없습니다. 백성들을 구제하는 급선무로는 탐학한 수령을 시급히 제거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각 도의 도신들에게 엄하게 신칙하여 재물을 횡령하고 법을 어기는 자들을 적발해서 즉시 계청(啓請)하여 파면하는 처벌을 내리도록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횡령하는 폐습이 요즘보다 심한 적은 없었다. 풍년이 든 해라 하여도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는 판인데 더구나 지금 흉년이든 때인데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것은 전적으로 도신이 살펴서 신칙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지난번에 경상도 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의 보고를 보면, 도신이라는 사람들이 살펴서 신칙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수령보다 백 배나 포악하였으니 어떻게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있단 말인가? 삼화의 전 수령은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기를 기다렸다가 반드시 곱절 엄중한 법률을 적용한 후에야 훗날 사람들을 징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무리를 반드시 남김없이 적발하라는 내용으로 아뢴 대로 각 도의 도신들에게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여러 도에서 재결(災結)로 잡아 면세(免稅)해 주는 것은 지금 이미 순서대로 획급(劃給)해 주었습니다. 눈앞의 농사가 흉년이 들어 삶을 이어가기 어려운 와중에 이렇듯 수만 결의 토지에서 세금을 면제해 주는 처분이 있게 되었으니 조정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베푼 크나큰 은혜에 누군들 우러러 칭송하면서 감격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금을 덜어줄 때 간사한 행동을 살피고 거짓을 막지 못한다면 아전(衙前)들이 중간에서 속이고 은폐하여 빈궁한 백성들이 실지 혜택을 입지 못하게 되는 것을 실로 형편상 면하기 어렵습니다. 또 탈결(頉結)이 아닌데도 탈결로 인정해 주거나, 표재(俵災) 대상이 아닌데도 표재로 뒤섞여 있다면, 백성들과 나라가 모두 병들게 되는 우환을 어떠하겠습니까? 수령 가운데서 직무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있으면, 도신에게 전최(殿最)를 기다리지 말고 우선 파직시키도록 함으로써 때를 놓쳐서 일을 그르쳤다는 한탄이 없도록 하라고 아울러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재결에 세금을 면제해서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오로지 어떻게 정밀하게 조사하고 균등하게 나눠주느냐에 달려있다. 그렇지 않으면 조정에서 돌봐주는 본의가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니, 도신들이 나의 뜻을 받들어 거행하는 책임이 또한 어디에 있겠는가? 대궐이 비록 깊기는 하지만, 원래 보고가 들어오는 길이 있으니 아뢴 대로 우선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작년에 결가(結價)가 너무 많다는 것을 가지고 여러 번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행회(行會)하였으며, 각 읍의 쓸데없는 비용은 모두 삭감하고, 이어 도신에게 참작하여 정해준 다음에 해마다 성책(成冊)하여 부(府)에 보고하라는 뜻으로 각 도에 신칙하였습니다. 비록 풍년 든 때에도 백성들이 숨을 돌리는가 쪼들리는가 하는 것이 전적으로 여기에 달려 있는데, 하물며 지금 같이 흉년 든 해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껑충 뛴 물가를 기준으로 백성들의 결수에 분배하여 거두어들인다면 그들의 다급하고 지탱하기 곤란한 형편은 보지 않아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도신과 수령은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펴서 농간을 부려 추가로 징수하는 폐습을 일체 없애버리고, 형편을 고려하고 참작해서 결가(結價)를 작정하고 속히 본부(本府)에 보고함으로써 근거로 삼아 처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정해진 결가를 어기는 경우에는 감영(監營)과 고을의 신하는 곱절 엄중한 형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으로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행회하였으니 도신과 수령들이 응당 명심하겠지만, 지금 흉년을 당하여 다시 엄하게 신칙하지 않을 수 없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크고 작은 사행(使行)에서 기마(騎馬)와 짐말의 수량은 원래 정해놓은 수가 있지만, 역관(譯官)과 수행하는 무리들이 법은 생각지 않고 함부로 말을 타기 때문에 한 번 사행을 겪고 나면 백성과 고을에서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올해 사행부터는 혹시 이와 같은 폐단이 있으면, 신칙하지 못한 세 사신을 엄하게 따져서 감처(勘處)하고, 역관(譯官)들을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원배(遠配)하겠다는 내용으로 미리 글을 지어 신칙하고, 경기(京畿)와 양서(兩西)의 도신에게 일체 관문(關文)을 보내어 지나치게 법 규정 이상의 역마를 타는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낱낱이 치보(馳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사신이 연이어 다니는 길은 규정 외에 책응(策應)하는 일이 없다고 해도 고을과 역참(驛站)에서 받는 고통과 살림이 피폐해지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하물며 이렇게 법을 어기는 짓이 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철저히 신칙하여 실효를 거두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임금의 장인인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에게 지난날 시호(諡號)를 내린 일에서 은혜가 두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평소 행실이 독실하고 학문에 부지런한 것을 놓고 말하면 다시 좋은 시호를 정해주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처럼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1일 무신
전교하기를,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이섭원(李燮遠), 전 감목관(監牧官) 이만소(李萬沼)는 본래 협잡배로서 서울과 시골의 무뢰배(無賴輩)들과 결탁하여 행동거지가 도리에 어긋난다는 소문이 많으니 모두 절도 정배(絶島定配)하라."
하였다.
10월 22일 기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일본 관리관(管理官)이 온 것은 전적으로 통상 문제를 위해서인데 해당 부사(府使)가 면접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앞으로의 번거로운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따로 관청을 설치하고 사람을 뽑아 맡아 처리하도록 한 연후에야 피차간에 규정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개운(開雲)과 두모(豆毛) 두 진(鎭)이 모두 다 왜관(倭館)과 10리(里)도 안 되는 거리에 있으며, 또 두 진이 서로 지척도 안 되는 곳에 마주하고 있는데, 두모진이 더욱 가까워서 초량진(草梁鎭)의 업무에 지장이 많습니다. 두모진은 혁파하고, 해당 진의 일은 개운 만호(開雲萬戶)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하며 그 관사와 종들은 담당하는 곳에 소속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일을 시작한 초기에는 생소한 사람의 손에 맡기기 어려우니 부산 훈도(釜山訓導)를 판찰관(辦察官)으로 고쳐 불러 병조(兵曹)로 하여금 하비(下批)하도록 하고, 인신(印信)은 예조(禮曹)에서 주조하여 지급해서 신뢰의 바탕으로 삼게 하며, 본 진 관리들의 늠황(廩況)도 이획(移劃)하여야 할 것입니다. 별차(別差)는 역학(譯學)이라고 고쳐서 임소(任所)에 그대로 두고, 관수차비(館守差備)의 명색은 이제부터 없애도록 본도(本道)의 도신(道臣)과 본 부사(府使)에게 아울러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부산 훈도(釜山訓導)를 이번에 판찰관(辦察官)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비하였습니다. 훈도(訓導) 현석운(玄昔運)을 잉임(仍任)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시호(諡號)를 의논할 때, 지방에 시장(諡狀)이 적체된 자들도 일체 시행할 것을 이미 연석(筵席)에서 하교를 받았습니다. 홍문관(弘文館)에서 모두 즉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김세균(金世均)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서당보(徐堂輔)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한돈원(韓敦源)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대근(金大根)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이희준(李熙準)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10월 23일 경술
초계군(草溪郡)의 소호(燒戶)와 화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10월 26일 계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상도 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 홍대중(洪大重)의 별단(別單)을 보니, 첫째, 통영(統營)에서 관할하는 21개 진(鎭) 수졸(戍卒)의 급대(給代)는 각 고을의 이무 환곡(移貿還穀)과 결전(結錢) 중에서 획하(劃下)해야 하나, 획하할 고을들에서 즉시 내주지 않아 장수와 군사들이 먹을 것이 없어 방어가 허술해지고 있습니다. 적량(赤梁)과 구소비(舊所非) 두 진은 통영의 거제 순영(巨濟巡營)에 바치는 돈 가운데서 4,000냥(兩)을 정식으로 획급(劃給)하고, 그 나머지 19개 진의 급대도 역시 부근 고을과 진영(鎭營) 몫에서 편의에 따라 바꾸어 획급하는 내용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도신(道臣)에게 특별히 신칙하도록 하는 문제입니다.
잔폐(殘廢)한 진의 지방(支放)은 전적으로 여기에 의거하고 있는데 매번 공급이 정지되니 변방 군사들이 흩어지는 것은 형편상 당연한 일입니다. 어사의 단자(單子)에 진술한 대로 도신에게 관문을 내어 신칙하게 하소서. 둘째, 통영의 신보향미(新補餉米)를 매년 700석(石)씩 연해 고을에 배당해서 나눠주고 곧바로 지방 급대의 비용으로 삼았으나, 근래에 와서는 정한 수량 외에 해마다 더 받아내고, 상정가(詳定價)으로 나누어주고는 시가(時價)로 독촉하여 받아내니 백성들이 장차 파산하고야말 형편입니다. 이제부터 700석 외에 다시는 지방으로 더 나누어줄 수 없게 하며 부족한 몫은 해당 수신(帥臣)이 적당히 조처하도록 하는 문제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수량 외에 더 나누어줄 수 없으며, 부족한 것은 해당 수사가 좋은 쪽으로 보충하라고 수신(帥臣)에게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황해도 암행어사(黃海道暗行御史) 김윤식(金允植)의 별단(別單)을 보니, 첫째, 경저리(京邸吏)·영저리(營邸吏)들이 사채를 놓고는 족징(族徵)하는 것을 엄격히 막는 문제입니다.
저리(邸吏)들의 족징을 금지하는 것은 지금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에 따라 엄히 관문으로 신칙하여 철저히 혁파하는 실효가 있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본 도의 지참(支站)은 아직 정해진 규정이 없어서 매번 사신이 행차할 때마다 각 고을의 출참(出站)에 낭비가 매우 심하므로 몇 해 전 도신이 사신이 바로 지나는 길의 고을에 건가(乾價)로 대신 보냈습니다. 지난겨울부터 다시 출참하여 여러 고을들이 모두 괴로워하고 있으니, 묘당에서 도신에게 관문을 내어 신칙하고 편부(便否)를 참작하여 영원히 하나의 규례로 정해야 합니다. 봉산(鳳山)의 검수(劍水)와 평산(平山)의 총수(葱秀)는 모두 교외에 있는 역참(驛站)으로써 설사 건가를 준다 하더라도 역참의 백성들은 원하지 않으니 이는 따로 폐단을 수습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도신에게 상호 참작하고 충분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10월 27일 갑인
동지 삼사(冬至三使)를 소견(召見)하였다. 【정사(正使) 심승택(沈承澤), 부사(副使) 이용학(李容學), 서장관(書狀官) 윤승구(尹升求)이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
"홍훈(洪坃)이 허다하게 탐오를 범한 것이 어찌 평범히 처리할 문제이겠는가?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법과 기강이 있고 염치가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조정에서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 수치를 모르고 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나라 구실을 하겠는가? 하물며 이름난 집안의 자손으로서 품계가 2품에 이르고 관찰사의 직책에 있으니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돌아볼 때, 탐오할 생각이 과연 차마 마음에 싹틀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더욱 더 통분하여 개탄하게 된다. 단연코 중한 법을 적용하여 나라에 떳떳한 형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야 하겠으나, 조상이 기풍을 세우고 뛰어난 절조를 지킨 것을 생각함에 마침 이 해가 되고 보니 옛날의 감흥이 되살아나 10대를 용서해주는 의리가 없을 수 없다. 형신(刑訊)을 시행하지 않는 것은 나의 생각이 있어서이다.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은 즉시 좌기(坐起)를 열고, 어사가 올린 서계(書啓)의 여러 조항들로 문목(問目)을 만들어 공초(供招)를 받아들여 오라."
하였다.
10월 28일 을묘
전교하기를,
"홍훈(洪坃)의 일은 그 앞뒤 죄상을 따져보면 어떻게 그저 장물죄로만 논하겠는가? 이 해가 병자년(1876)이기 때문에 사실 10대를 용서해주는 의리에서 처분하는 것이다. 도배(島配)에서 잡아온 죄인 홍훈은 특별히 배소(配所)로 돌려보내어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
하였다.
10월 29일 병진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 박제인(朴齊寅)의 보고를 보니, ‘도내 백성들의 정상이 더더욱 급해져 올해 절반만 나눠주도록 된 별비 환곡(別備還穀)은 이미 본미(本米)를 마련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대신할 각종 곡식도 없습니다. 환정(還政)을 헤아려볼 때 참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도신(道臣)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우십면(尤甚面)은 새 환곡(還穀)을 상정(詳定)으로 대납(代納)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이번에 감사가 또 진청(陳請)한 데서 그곳 백성들의 형편이 곤란하다는 것을 더욱 볼 수 있습니다. 응당 바쳐야 할 사환곡(社還穀) 가운데서 다만 우심읍으로 하여금 절반에 한해 내년 가을까지 정퇴(停退)하게 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30일 정사
김세균(金世均)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양사(兩司)에서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대사헌 김원식(金元植), 대사간(大司諫) 이희준(李熙準), 집의(執義) 기우현(奇禹鉉), 지평(持平) 심동헌(沈東獻), 헌납(獻納) 이헌영(李𨯶永), 정언(正言) 조익영(趙翼永)·이병고(李秉皐)이다.】 "홍훈(洪坃)에게 빨리 해당 형률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탐오하여 마음을 더럽히고 이처럼 법을 어긴 자를 어찌 조금이라도 아껴서 이런 처분이 있었겠는가?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는 것도 가벼운 처벌이 아니니 대간(臺諫)들의 논의가 이렇게까지 분운(紛紜)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원본】 17책 13권 5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539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홍훈(洪坃)에게 빨리 해당 형률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탐오하여 마음을 더럽히고 이처럼 법을 어긴 자를 어찌 조금이라도 아껴서 이런 처분이 있었겠는가?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는 것도 가벼운 처벌이 아니니 대간(臺諫)들의 논의가 이렇게까지 분운(紛紜)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부응교(副應敎) 조용호(趙龍鎬), 교리(校理) 김종한(金宗漢)·홍대중(洪大重), 부교리(副校理) 이호철(李鎬喆)·이범구(李範九), 수찬(修撰) 이희원(李喜元)·박로삼(朴魯參), 부수찬(副修撰) 조충희(趙忠熙)·목승석(睦承錫)이다.】 "홍훈(洪坃)에게 형률을 더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간(臺諫)들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批答)을 보지 못하였는가? 이것은 그렇게까지 시끄럽게 굴 문제가 아니다." 하였다.
【원본】 17책 13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40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사법-법제(法制)
"홍훈(洪坃)에게 형률을 더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간(臺諫)들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批答)을 보지 못하였는가? 이것은 그렇게까지 시끄럽게 굴 문제가 아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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