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정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생진시(生進詩)의 방방(放榜)을 행하였다.
8월 2일 무술
전교하기를,
"생원(生員), 진사(進士) 가운데 85살 이상 되는 사람은 모두 특별히 오위장(五衛將) 자리를 더 마련하여 단부(單付)하라."
하였다. 황종열(黃鍾烈) 등 22명에게 하비(下批)하였다.
민치상(閔致庠)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교익(李喬翼)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새로 입격한 생원(生員) 송병례(宋秉禮)는 바로 대현(大賢)의 후손이며, 이민성(李敏性)은 바로 선정(先正)의 후손이니,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8월 3일 기해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생원(生員) 박오현(朴五鉉)은 바로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이니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순천부(順天府)의 화재를 당한 집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8월 5일 신축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경모궁(景慕宮)에 추향 대제(秋享大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김상현(金尙鉉)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호준(李鎬俊)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8월 6일 임인
김병덕(金炳德)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8월 7일 계묘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김주현(金疇鉉)은 바로 원임 계방(原任桂坊)으로서 이번 과거에 참방(參榜)하였으니 매우 희귀한 일이다.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김석근(金晳根)·김필수(金弼洙)·조석구(趙晳九)·조한국(趙漢國)·정하원(鄭夏源)에게 사악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송병위(宋秉瑋)는 대현(大賢)의 후손이다. 특별히 사악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조한국(趙漢國)의 방방일(放榜日)에 정부인(貞夫人)의 사판(祠版)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8월 8일 갑진
전교하기를,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의 후손이 지금 등제(登第)하였다. 뜻을 보여주는 조처가 없을 수 없으니, 그의 사판(祠版)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서 추도기(秋到記)를 설행하였다. 강(講)에서는 유학(幼學) 성기운(成岐運), 시(詩)에서는 유학(幼學) 윤익(尹瀷)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한경원(韓敬源)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윤귀영(尹龜永)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서당보(徐堂輔)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8월 9일 을사
진전(眞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禮)를 행하였다. 이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제술(製述)로 강(講)을 대신하였다. 부(賦)에서 〖거수(居首)한〗 생원(生員) 서재후(徐載厚)를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진전(眞殿)의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의 찬례(贊禮)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찬례 김병덕(金炳德), 예방 승지(禮房承旨) 조준영(趙準永), 예모관(禮貌官) 김영철(金永哲), 상례(相禮) 심상학(沈相學)은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윤주현(尹胄鉉)은 충정공(忠貞公) 김집(金集)의 후손이니,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이중두(李中斗)는 바로 선정(先正)의 후손이니, 특별히 사악하라."
하였다.
8월 10일 병오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이훈경(李勛卿)은 바로 충숙공(忠肅公) 【이세화(李世華)】 의 후손이다.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새로 급제한 정은조(鄭誾朝)는 고(故) 영부사(領府事) 【정원용(鄭元容)】 의 손자이다. 특별히 사악하라."
하였다.
8월 11일 정미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증광 문무과(增廣文武科)의 방방(放榜)을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서재후(徐載厚)에게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새로 급제한 유진옥(兪鎭沃)·김병직(金炳稷)을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 윤주현(尹胄鉉)·조동협(趙東協)을 수찬(修撰)으로, 서재후(徐載厚)·김주현(金疇鉉)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는데, 모두 중비(中批)이다.
8월 12일 무신
특별히 새로 급제한 김석근(金晳根)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東副承旨)로 삼았다.
8월 15일 신해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8월 18일 갑인
서당보(徐堂輔)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8월 19일 을묘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방금 중국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보니, ‘본부에서 고기잡이를 금단하는 문제를 가지고 실정에 근거해서 대신 아뢰니, 신칙하기를, 「소속된 연해에 법을 만들어서 두루 조사하여 간사한 짓을 없앨 것이다. 만약 이러한 배들이 다시 본국으로 오는 경우에는 즉시 잡아서 압송함으로써 완악한 짓을 경계할 것이다.」하였다. 황제의 유시를 받들어서 이를 알려 준다.’라고 하였습니다. 회답 자문을 지어서 파발(擺撥)에 부쳐 만부(灣府)로 내려 보내어 북경(北京)에 전해 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1일 정사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서정순(徐正淳)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8월 22일 무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내금위 일번(內禁衛一番)의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다.
8월 23일 기미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8월 24일 경신
이호준(李鎬俊)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심순택(沈舜澤)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김상현(金尙鉉)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8월 26일 임술
송근수(宋近洙)를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이풍익(李豐翼)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8월 27일 계해
경모궁(景慕宮)과 경우궁(景祐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은신군(恩信君)과 남연군(南延君)의 사우에 차례로 전배하고, 이어 운현궁(雲峴宮)을 찾아보았다.
8월 28일 갑자
돌아온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세금을 정하는 일을 아직 바르게 귀결짓지 못하고 돌아왔는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별단(別單)에서 이미 대략 진달하였지만 그 나라에서 한창 조약을 수정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갑자기 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개항 등에 관한 일을 다시 먼저 말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한 번 사적으로 묻기에 조정의 의견은 전과 다름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더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러시아[俄羅斯]가 두만강에서부터 곧바로 산동(山東)으로 향해 간다고 하는데, 만일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면 응당 멀지 않은 듯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나 여러 청나라 사신에게 물어보니, 중국의 일은 잘 마무리될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 하기를,
"그렇다면 응당 무사할 것이라고 말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숭후(崇厚)를 이미 석방하고 죄를 주지 않았다고 들었으므로 이리(伊犁) 지방을 끝내 러시아에게 허락하고서야 끝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숭후를 어째서 죄주지 않았는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숭후가 제멋대로 땅을 떼 줄 것을 허락한 것은 참으로 그의 죄입니다. 중국이 이미 그에게 전권을 위임해놓고 그가 허락한 것을 뒤따라 어긴다면, 이것은 이웃 나라에 신의를 잃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우리나라가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혹시 우리를 꼬이고 놀래키려는 단서가 아닌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저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조선을 위해서 대신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나라를 위하여 그러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스스로 저희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면 그 말이 혹 그럴 듯하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청나라 사신에게 물어보니, 또한 그 실정이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본에서 각국의 말을 배우는 학교를 널리 설치하여 가르친다고 하는데, 그 학교의 규모는 어떻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그곳에 가보지는 못하였지만 각국의 언어를 모두 학교를 설치하여 가르친다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우리나라의 역학(譯學)과 같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그 나라 조사(朝士)의 자제들은 모두 취학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사람을 파견하여 외국말을 배우는 것을 돌아가서 조정에 보고하라고 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이 일은 대체로 우리나라를 위해서 하는 말이었고, 시행 여부는 오직 우리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으므로 돌아가서 보고하겠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남쪽 섬에서 검은 연기가 난다고 하는데, 그런가 안 그런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그 지역에 화산이 있기 때문에 항상 지진이 많다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진이 과연 잦고 크게 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몇 달 간격으로 문득 지진이 일어나며, 10여 년쯤 사이를 두고 큰 지진이 나 집과 사람과 물건들이 손상을 많이 입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몇 해 전에 사쓰마[薩摩州] 사람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는 것을 그 대신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막아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 일이 사실인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이 말은 진실로 확실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청나라 사신에게 물어보았으면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비록 여러 청나라 사신에게는 미처 물어보지 못했지만 이와쿠라 도모미를 만나 이 일을 언급하니, 스스로 사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저 사람들이 모두 근실하고 게으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그 일은 이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저 나라의 66개 주(州)를 지금 모두 통합하였다고 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66개 주를 폐지하고 나누어 36개 현(縣)으로 만들었으며, 현에는 합(合)을 둔 것이 마치 우리나라의 감사(監司) 제도와 같았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각 주를 세습(世襲)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지위를 상실했는데, 원망하는 뜻이 없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그들이 마음속으로는 좋아하지 않는 듯하나, 모두 녹봉(祿俸)을 후하게 받으면서 도성 아래에서 산다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부세(賦稅)를 많이 견감했다고 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참으로 그렇습니다. 무릇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정사는 반드시 들어서 행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육군을 조련(調練)하는 것은 그 방법이 어떻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모든 동작이 자못 군사 규범에 맞았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저 나라는 과연 러시아를 몹시 두려워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온 나라에 그것을 위급하고 절박한 걱정거리로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저들이 통상하는 것이 17개국이라고 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전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저들의 무기가 지금 서양 각국을 대적할 수 있다고 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저들이 배운 것이 서양의 병법(兵法)이므로 스스로 서양에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 병법에는 마땅히 다시 네덜란드[阿蘭陀]를 따라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어떤 나라인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네덜란드는 서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로서 면적이 우리나라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나라는 이처럼 작은데 무슨 방법으로 능히 이와 같은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나라가 크건 작건 관계없이 무기가 정예한 것은 또한 스스로 강하게 하고 실제에 힘쓰는 것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순사들이 거리를 단속하는 것이 자못 엄숙하다고 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저 나라에서는 각기 그 재주에 따라서 사람을 가르치기 때문에 비록 부녀자와 어린아이라도 모두 공부시키니, 그렇다면 한 사람도 버릴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도 놀고 먹는 백성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건축 제도가 달라진 것이 많이 있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지붕은 간혹 서양식 제도를 쫓은 것이 있기도 했으나 역시 옛날 제도대로 지은 것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더러는 아직도 옛날식 옷을 입고 그 풍속을 고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 중에는 틀림없이 볼 만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그 가운데에는 문사(文士)들이 많았으니, 자못 숭상할 만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다른 나라로 나가서 머무는 전권공사(全權公使)와 영사관(領事官)은 그 숫자가 일정하지 않다고 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상세히 듣지는 못하였지만 간혹 해당 나라에 대한 사무가 많고 적음으로 인하여 그런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조선에만 유독 변리공사(辦理公使)를 두고 하나부사 요시모토를 변리(辦理)로 승진시켜 임명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이것은 품계를 올리려고 그런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우리나라와 상의하지도 않고 한 것은 그 뜻이 국서(國書)를 보내려고 그러는 것인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변리공사는 응당 국서를 가지고 간다고 들었기 때문에 신이 하나부사 요시모토에게 묻기를, ‘병자년(1876)에 국서를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을 약속했는데, 지금 어째서 우리나라와 상의하지도 않고 갑자기 시행하는가? 단지 외무성의 서계(書契)만 가지고 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니, 그의 대답도 자못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저 곳에 연로(沿路)의 시장과 백성들의 거주지가 과연 어떻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보이는 것이 자못 번화하고 풍성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저들도 농사에 힘써서 올 가을에 큰 풍년이 들었다는데, 과연 무슨 곡식을 중하게 여기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그들도 쌀을 중히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러시아가 중국을 침략하려고 하는데, 어느 길을 경유할 것이라고 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저 나라에서 들은 바로는 대체로 우리나라의 동남 바닷길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 들어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들의 동정을 살피건대, 저 나라는 우리나라에 대하여 과연 악의가 없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지금 본 바로는 우선 가까운 시일 안으로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이 일에 대해서 청나라 사신에게 물어보니, 또한 실정은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렇다면 영원히 별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이 일은 신이 감히 확정지어 대답할 수 없지만 향후에 우리가 그들을 응접하는 것에 옳은 방도를 얻는 데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이 때문에 청나라 사신도 스스로 힘쓰라는 말로 권면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스스로 힘쓴다는 것은 바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 것인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만 스스로 힘쓰는 것으로 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정사와 교화를 잘 닦아서 우리의 백성과 나라를 보호함으로써 외국과의 관계에서 불화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실로 스스로 힘쓰는 데에 제일 급선무인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청나라 사신도 또한 러시아 때문에 근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일을 많이 도와줄 의향이 있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신이 청나라 사신을 몇 차례 만났는데, 말한 것이 다 이 일이었으며 우리나라를 위한 정성이 대단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저 사람들이 비록 우리나라와 한마음으로 힘을 합치고자 하나, 이것이 어찌 깊이 믿을 만한 것이겠는가? 요컨대, 우리도 또한 부강해질 방도를 시행해야 할 뿐이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저들의 마음을 참으로 깊이 믿을 수는 없지만, 오직 우리나라가 바깥 일을 모르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유구국(琉球國)은 그 동안에 나라를 회복하였다고 하던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이 일은 혐의가 있어서 일찍이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는 못하였으나, 전하는 말로는 벌써 그 나라를 폐하고 현(縣)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국(金炳國)을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으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이 벼슬을 그만둔 뒤로 내 마음은 마치 무엇을 잃은 것처럼 허전하였다. 이것이 어찌 경을 사적으로 좋아해서 그렇겠는가? 진실로 나라의 계책이 위태롭고 백성들의 근심이 계속되니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 수습하는 데에서 경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지금 넉넉히 몸조리를 하였으니 건강이 저절로 회복되었을 것이다. 나라의 계책과 백성들의 근심이 위태롭고 계속되는 것이 점점 심해지지만 선뜻 나서서 감당해낼 만한 사람이 없다. 경의 덕과 도량, 경의 훌륭한 재주로 어찌 차마 팔짱끼고 앉아서 방관하며 나를 돕지 않겠는가? 내가 다시 나라의 큰일을 맡기는 마음이 절실하고 경이 맡아 돌보는 데 대해 기대가 크니, 절대로 벼슬을 사양하고 받는 일에 구애되지 말고 즉시 일어나 명령을 받들어서 나라와 백성들을 다행하게 하라."
하였다.
특별히 송병선(宋秉璿)을 이조참의 겸 성균관좨주 시강원찬선(吏曹參議兼成均館祭酒侍講院贊善)으로 삼았다. 김유연(金有淵)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원성(金元性)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의익(李宜翼)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삼았다.
찬선(贊善) 송병선(宋秉璿)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동궁(東宮)의 상견례(相見禮)는 이미 날짜를 정해놓았고 서연(書筵)도 역시 차례로 행해야 할 것이다. 경은 어찌하여 한 번 가서 사양하고 시골을 고수하면서 마음을 돌려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지금 보건대, 원로(元老)와 숙유(宿儒)들은 죽어 사라지고 글공부한 선비의 부류는 마치 한 가닥 실오라기처럼 겨우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내가 의지하고 믿으면서 이루려는 것은 진실로 유현(儒賢)을 예우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이르러 보좌하여 인도하는 책임을 그대가 아니면 누구에게 지우겠는가? 특지(特旨)로 품계를 올려준 것도 어진 선비를 좋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내가 진심으로 타이르는 뜻을 체득하여 즉시 조정에 나오도록 하라. 또 시골에서 덕망이 있으면서 재주를 감추고 숨어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많을 것인데, 널리 모아 등용하여 나라와 백성의 일을 맡기는 것이 바로 당장의 급선무이니, 역시 뽑아 임명함으로써 다 나와서 함께 나아가는 아름다움이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큰 기대이다."
하였다.
8월 29일 을축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경과 정시 문무과(慶科庭試文武科)의 방방(放榜)을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보현(金輔鉉)의 장계(狀啓)를 보니, ‘본도에는 이미 선무 군관 도시(選武軍官都試)와 화포과(火砲科)를 합쳐서 설행하여 시취(試取)한 전례가 있었으나, 본영(本營)의 장관(將官), 장교(將校)와 군졸들이 본래 연습하지 않아서 끝내 격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장관과 장교는 선무 군관 도시에 응시시키고 군졸은 화포 도시(火砲都試)에 응시시키되 아직 급제하지 못한 사람이건 이미 급제한 사람이건 모두 맞춘 사람을 뽑아서 특별히 은전(恩典)을 베풀 것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해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장관이 있고 군교(軍校)와 군졸이 있어서 아무리 그들이 재주를 익히고 기술을 연마하려고 하더라도 만약 상을 주어 권장하는 것이 없으면 어찌 흥기(興起)시키고 권면(勸勉)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기보(畿輔)는 중요한 곳인 만큼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계에서 청한 대로 규정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병지(金炳地)의 계본(啓本)을 보니, ‘북관(北關)의 시소(試所)에서 소란을 일으킨 죄인들을 엄히 신문하여 공초를 받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시취한 뒤에 그것이 공정한가 사사로운가 하는 것은 자연히 밝혀져 숨길 수 없는 것인데 지금 이 소란을 일으켰으니, 과연 그것이 공정하지 않고 사사로운 것이라고 미리 예측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먼 지방의 습속이 비록 지극히 완악하다 하지만 이와 같이 문란한 부류는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정주한(鄭周翰)이 사전에 위협하면서 꾸짖었고, 이면규(李勉奎)·오병한(吳丙翰)이 이름을 숨기고 통문(通文)을 돌린 것은 여러 죄수들의 공초가 엄연히 있어서 세 놈이 수창(首倡)한 것을 알 수 있으니, 진실로 응당 극률(極律)을 시행해야 하겠으나 도망쳐서 체포하지 못했으므로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특별히 각 진영(鎭營)에 신칙(申飭)하여 기일을 정해서 체포할 것입니다. 김환갑(金煥甲)으로 말하면, 그는 수레를 끄는 천한 놈으로서 과거장의 소요에 깊은 관계가 있는데 잠복(簪服)을 몰래 훔쳐 감춘 것이 탄로 나자 공당(公堂)을 쳐부수었으니 행동거지가 흉패(凶悖)합니다. 이병구(李丙九)는 관장(官長)을 모욕했고 관청 건물에 손을 댄 것을 목격한 증인이 이미 많은 만큼 형적을 숨기기 어렵습니다. 김태욱(金泰郁)은 현재 무교(武校)의 직책을 띠고 있으면서 외람되게 선비의 복장을 하고 섬돌 위를 돌아다니면서 무슨 의도를 실현하려던 나머지 과장(科場)에 뛰어들어 마침내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김이관(金利貫)은 시소의 쇳덩이를 훔쳐서는 문득 거리에서 주웠다고 핑계대고 남을 시켜 돌려보냈으니, 심보가 매우 거짓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상 네 놈은 모두 엄형을 가하여 원악지 정배(遠惡地定配)하고, 그 밖의 여러 죄수들은 본도로 하여금 경중을 구분해서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금 동래 부사(東萊府使) 심동신(沈東臣)이 보고한 바를 보니, ‘대마도(對馬島)에서 연례로 보내는 사신(使臣)이 나올 때에는 임금에게 숙명(肅命)하는 예가 있기 때문에 객사(客舍)를 초량리(草梁里)에 봉안(奉安)하였는데, 병자년(1876)에 변경(邊境)에 관한 규정이 한 번 변경된 뒤부터는 판찰관(辦察官)이 비록 매달 봉심(奉審)하였지만 텅 비어 있는 땅에 봉안하였으니, 과연 사체(事體)에 타당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두모관(豆毛關)에 옮겨 짓는다면 봉안하고 보호하는 절차도 더욱 엄숙하게 될 것이고 토목 공사의 비용도 거창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종전의 변경 규정은 이미 변경이 되었으니, 객사를 옮겨 짓는 것은 사체로 보아 당연합니다. 보고한 바대로 좋은 날을 받아서 거행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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