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병신
전교하기를,
"한나절의 천둥과 번개가 거두어 저장하는 절기에 일어났다. 재앙이란 공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니, 어찌 이유가 없이 그런 일이 있겠는가? 내가 변변치 못하여 정사를 뜻대로 다스리지 못하여서 위로는 하늘의 뜻을 받들지 못했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안정시키지 못했으니, 이번의 경고가 어찌 이와 같이 정녕하지 않겠는가? 마음 가득 두려워서 감히 자제할 수 없으니, 오늘부터 3일간 감선(減膳)함으로써 내가 조금이나마 하늘의 뜻을 받드는 정성을 보일 것이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의계(議啓)를 올려 【우부승지(右副承旨) 한용교(韓龍敎), 동부승지(東副承旨) 권응선(權膺善)이다.】 우레가 치는 이변이 일어난 것을 이유로 권면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것을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응교(應敎) 민영환(閔泳煥), 부응교(副應敎) 김문제(金文濟), 교리(校理) 홍종운(洪鍾雲)·이범구(李範九), 부교리(副校理) 이병고(李秉皐), 수찬(修撰) 김문현(金文鉉)·박두양(朴斗陽), 부수찬(副修撰) 김원균(金元均)이다.】 우레가 치는 이변이 일어난 것을 이유로 권면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것을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김홍집(金弘集)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병조 정랑(兵曹正郞) 유원식(劉元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수신사(修信使)가 가지고 온 황준헌(黃遵憲)의 사사로운 의견이 담긴 책자를 보니, ‘예수와 천주의 학문은 우리 유교에 주희(朱熹)와 육구연(陸九淵)이 있는 것과 같다.’라는 구절에 이르러서 저도 모르게 머리털이 서고 간담이 떨리며 가슴이 서늘해지고 뼛골이 오싹하였습니다. 주부자(朱夫子)는 위로 공자(孔子)·맹자(孟子)의 계통을 잇고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의 학문을 직접 배워 도학(道學)이 천년토록 빛나고 만대의 사표가 되었으므로, 비록 오랑캐의 나라라 하더라도 대현(大賢)으로 따르고 받들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하물며 황준헌은 중국 사람으로서 반드시 주부자가 사문(斯文)의 존경받는 스승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인데, 지금 글을 쓰는 데에서 무슨 증거 될 것이 없어서 저 예수와 천주처럼 더러운 것을 제멋대로 주희와 육구연의 취향이 다르다는 것을 가지고 증명하려 하는 것입니까? 만약 사교(邪敎)에 물들지 않았다면 어찌 감히 현인을 모욕하겠습니까?
수신사로 말한다면, 임금의 명을 받들고 외국에 사신으로 간 것이 공적 임무에 관계되는 만큼 한 마디 말이나 한 자의 글이라도 비록 사사로이 물리쳐버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만약 이러한 흉악한 문구를 보았을 경우에는 마땅히 성토하고 면대하여 꾸짖음으로써 현인을 존중하고 도학을 숭상하는 뜻을 보이며 바른 것을 지키고 요사스러운 것을 배척하는 원칙을 나타내어야 하는데, 이와 같이 하지 않고 태연하게 받았습니다. 관학(館學)으로 말하자면, 지위는 남에게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처지이고 의리상으로는 현인을 숭배해야 하는데, 이런 글과 이런 문구를 마치 늘 보던 것처럼 심상하게 보면서 입을 봉하고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이 글은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말한다면, 우리나라의 사악한 무리에 아직도 남은 종자가 있어서 몰래 이단의 무리와 결탁하여 이런 문구를 만들어 내어서 인심을 소란하게 하고 사도(邪道)를 물들이려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성상의 명철한 식견으로서는 여지없이 통찰하셨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처분을 내리지 않으시니, 혹시 크게 포용하는 훌륭한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현명한 판단을 내려 잠복해 있는 흉악한 무리를 찾아내어 남김없이 섬멸하여서 사람들의 울분을 쾌히 풀어주소서.
또 삼가 생각건대, 몇 년 전에 서원(書院)을 훼철(毁撤)한 것은 비록 폐단을 줄이는 조치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학문을 숭상하는 교화에 있어서는 실로 성대(聖代)의 흠결입니다. 신은 청컨대, 특별히 서원을 복구하라는 처분을 내려 온 나라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더욱더 강송(講誦)에 힘써서 향배(向背)를 명백히 분별하게 한다면, 아마도 바른 학문을 지키고 사도를 없애는 정사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하였다.
10월 2일 정유
김재현(金在顯)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김상현(金尙鉉)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박홍수(朴弘壽)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의 대략에,
"지금 폐장(閉藏)하는 달에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있었으니 인애(仁愛)하는 하늘이 경고하는 바가 무엇이고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처럼 매우 변변치 못한 자들이 외람되게 섭리(燮理)하는 벼슬자리에 앉아 있으므로 기강이 날로 무너지고 풍습이 날로 변하여 나라의 살림과 백성들의 근심이 애통하게 되었으니, 모두 신들의 죄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물리치시고 어질고 덕 있는 사람으로 교체시켜서 하늘의 경고에 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감선(減膳)하고 자신을 책망한 전하의 글을 보니, 글 뜻이 간절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성상의 마음이 두려워하기를 평상시에도 천둥의 경고가 있는 듯이 하며 성상의 뜻을 분발하기를 또한 천둥이 사나운 듯이 하여, 경연(經筵)을 자주 열고 부지런히 학문을 강론한다면 재앙은 자연히 사라지고 경사는 더욱 이를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폐장하는 시절에 천둥과 번개의 경고가 있었으니, 인자한 하늘이 어찌 까닭 없이 그러했겠는가? 생각건대, 지금 나라의 살림과 백성의 일이 어지럽고 위태로워서 만회하고 구제할 방도가 아득히 없으니, 이것은 나의 책임이다. 그대들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학문 강론에 대해 권고한 것은 삼가 명심하고 잊지 않겠다. 그러나 수양해서 재변이 사라지게 하는 책임은 오직 임금과 신하가 위아래에서 함께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데 달려 있으니, 그대들은 인면(引免)하려고만 하지 말고 서로 수양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돕도록 하라. 이것이 구구하게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병조 정랑(兵曹正郞) 유원식(劉元植)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겉으로는 정도(正道)를 지킨다는 말로 핑계대고 속으로는 간사한 계책을 품고는 다른 나라 사람의 문구를 가져다가 조정을 비방하고 사림을 모욕했으니 무엄하고 거리낌 없는 것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그가 미천한 처지에서 감히 인심을 현혹시키고 세도(世道)를 문란시켰는데, 장차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또 서원(書院)을 복구하는 문제를 말단에 끌어다 첨부한 것은, 이것에 가탁하여 저것을 현혹시키려는 심보로서 더욱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패악한 버릇을 심상하게 처리할 수 없으니, 속히 먼 변방으로 찬배(竄配)하는 법률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3일 무술
이조 참의(吏曹參議) 김홍집(金弘集)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외람되게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서 사신(使臣)의 임명을 잘못 받았으니, 먼 외국에서 겪는 풍파는 어렵고 쉬운 것을 가리지 않느다 하더라도 강한 이웃 나라의 시사(時事)에 대해 어찌 그 나라의 안위(安危)를 엿볼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전하의 총령(寵靈)이 미치는 것만 믿고 회답 사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것만을 다행으로 여길 뿐입니다. 다만 객관(客館)에 머물러 있을 때 중국 공사(公使)와 자주 만나 천하의 대세를 논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능멸하고 핍박하는 것을 개탄하였는데, 손발은 서로 구원하기에 급급하였고 말은 기탄없이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정사를 닦고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는 방도에 마음을 쓰며 지키고 요사스러운 것을 배척하는 의리를 한결같이 주장하였습니다. 토론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대책을 강구하기까지 하였는데, 무릇 그 수천 마디나 되는 글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떠나기 전날에야 만나서 신에게 직접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 마음 쓰는 것이 몹시 절실하였고 계책한 것이 상세하고 주밀하였으니, 어찌 과장되고 허황된 자가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일은 영토에 관계되는 것이었고 말은 조정에서 취할 만하기에 신이 감히 사적으로 물리치지 않고 받아왔던 것입니다. 지금 병조 정랑(兵曹正郞) 유원식(劉元植)의 상소를 보니, 황준헌(黃遵憲)의 책 가운데 ‘예수와 천주의 학문은 우리 유교에 주희(朱熹)와 육구연(陸九淵)이 있는 것과 같다.’는 문구를 가지고 비유한 것이 맞지 않다고 극력 변론하였고, 또 신이 그것을 성토하거나 면대해서 꾸짖지 않고 태연히 받은 것을 규탄하였는데, 그 말이 엄격하고 그 뜻이 준열하여 신은 이 때문에 수치스러워 죽고 싶습니다. 비방과 배척이 여기까지 이르고 죄상이 비로소 드러나 마음 가득 황송할 뿐인데, 무슨 겨를에 많은 말을 하여 변명하는 것처럼 하겠습니까? 이러한 때에 뜻밖에도 이조 참의의 벼슬에 특별히 제수하셨으니, 신은 더욱 송구스럽고 떨려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여 실로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곤란한데, 하물며 이 새 벼슬자리에 어떻게 하루인들 뻔뻔스럽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벼슬은 분수에 크게 넘치고 인품은 걸맞지 않아서 신은 바야흐로 인피(引避)하기에 급급하여 더는 장황하게 진술하지 않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실정을 통찰하여 신에게 새로 제수한 벼슬을 환수하고 이어 신이 일을 그르친 죄를 다스림으로써 사람들의 말에 사죄하고 미천한 분수를 편안하게 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람들의 말이 본래 꼭 맞지는 않는 것인데, 어째서 인피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대는 사임하지 말고 직책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정시 무과 초시(庭試武科初試)의 이소(二所)에서 아뢰기를,
"본소에서 오늘 유엽전(柳葉箭)을 시취(試取)할 때 거자(擧子)들이 과장(科場) 안에 함부로 들어와서 단자(單子)를 찢어버리고 군교(軍校)와 군졸을 구타하여 시취하기 어려운 형편이므로, 부득이 파장(罷場)하였습니다. 신 등은 황공하여 죄를 기다립니다."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유원식(劉元植)을 철산부(鐵山府)에 찬배(竄配)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심이택(沈履澤)의 장계(狀啓)에,
"군산 첨사(群山僉使) 홍태섭(洪台燮)은 허류곡(虛留穀)이 7,800여 석이나 됩니다. 그런데 이미 오래된 포흠(逋欠)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응당 즉시 샅샅이 조사하여 장부를 정리하고자 했어야 하는데, 시일을 자꾸 끌면서 이처럼 축나게 만들었으니, 우선 파출(罷黜)하고 그 죄상은 유사(攸司)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 신의 벼슬이 이를 관할하는 데 있으면서도 엄하게 단속하지 못하여 막중한 상납을 축나게 만들었으니, 황공하여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훔치고 농간질하는 것을 함부로 범하여 정공(正供)을 축낸 것이 이처럼 많으니, 법과 기강이 있는 바에 매우 놀라운 일이다. 선격(船格)들을 징계하는 절차와 원래의 상납을 찾아서 채워 넣는 방도는 묘당(廟堂)에서 특별히 엄하게 신칙(申飭)하여 숫자에 맞추어서 실어 보내고, 정황은 또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즉시 보고하게 하며, 도신은 대죄(待罪)하지 말도록 회유(回諭)하라."
하였다.
10월 4일 기해
전교하기를,
"이른바 무과(武科) 거자(擧子)들이 나라에서 시험치는 중요함을 망각하고 행패를 부린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극히 놀라워서 차라리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소란을 일으킨 거자들을 추조(秋曹)로 하여금 일일이 기한을 정해놓고 잡아서 엄하게 형장을 가하여 원악지 정배(遠惡地定配)하고, 이소(二所) 시관(試官)들은 모두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5일 경자
우레가 쳤다.
전교하기를,
"요즘 구름이 끼고 비가 오는 것은 이미 절기에 어그러진 것인데, 천둥과 번개의 재변이 또 며칠 안 되는 사이에 있었으니, 하늘의 마음에 무슨 꾸짖고 노할 것이 있기에 그러는 것인가? 보잘 것 없는 내가 덕이 없으면서 만백성의 위에 군림하여 밤낮으로 마음 놓지 못하면서 감히 안일하게 지내지는 않지만, 하늘을 섬기는 정성을 형식적으로만 하고 실제로는 하지 않으며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를 말로만 하고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아서 이 폐장(閉藏)하는 때에 있었던 것이니, 마음이 송구해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오늘부터 다시 3일간 감선(減膳)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성의를 만 분의 일이나마 보이도록 하겠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의계(議啓)를 올리고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수양에 힘쓸 것을 권고하니, 모두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겠다는 비답을 내렸다.
특별히 민태호(閔台鎬)를 발탁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고, 정범조(鄭範朝)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민치상(閔致庠)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신칙(申飭)한 하교를 받고 세곡(稅穀)을 체납시킨 곡절을 상세히 조사하여 치문(馳聞)하라는 뜻으로 각 해도(該道)에 행회(行會)하였습니다. 지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심이택(沈履澤)의 장계(狀啓)를 보니, ‘조창(漕倉)의 상납을 날마다 엄하게 독촉해서 빨리 실어 보내도록 하였으나, 근년에 지체된 것은 역시 배의 척수가 많지 않은 탓입니다. 현재 있는 조선(漕船)과 약간의 임선(賃船)이 그간에 이미 싣고 떠났는데, 그 밖의 곡물은 이 배들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려 밤을 새워 실어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옥구(沃構) 지방의 오식도(筽食島)는 호남(湖南)과 호서(湖西)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바로 본도 수참(水站)의 마지막 지경이어서 영남(嶺南)과 호남의 세선(稅船)은 이곳을 경유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제(定制)하던 초기부터 옥구 현감(沃構縣監)을 도차사원(都差使員)으로 차정하여 그로 하여금 호송하게 하였는데, 최근에 그 섬의 수참(水站)이 막혀서 매번 군산(群山)·고군산(古群山) 앞바다로부터 호서로 곧바로 향합니다. 그러므로 오식도로 가는 배가 자연히 끊어지게 되었으니, 호송하는 도차사원을 그 진(鎭)의 첨사(僉使)로 다시 정하여 거행하고 부족한 배의 척수는 별도로 대책을 강구해서 제때에 수리하게 할 것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조운(漕運)이 지체되면 으레 배의 척수가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이미 떠난 배도 제때에 도착하지 못했으며 어느덧 겨울철이 닥쳤으니, 이제 특별히 노력하여 재차 운송한다 하더라도 될 수 있겠습니까? 삼창(三倉)은 배의 부족 액수가 원래 많습니다. 다만 그동안 만들어서 보충한 것이 몇 척이나 되고 짐을 실어 나른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그 뱃길이 전과 다르니 호송하는 도차사원은 해당 진의 첨사가 거행하게 할 것입니다. 배의 척수를 숫자대로 갖추지 못한 것은 바로 물자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난번에 대책을 강구하여 의정부에 보고한 것이 있었으나 시일만 끌고 있으니, 매우 답답한 노릇입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속히 조치를 취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라 감사 심이택의 장계에 의하면, 더없이 중요한 세곡의 허류(虛留)는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연고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거의 8,000포(包)나 되도록 많다고 하니, 정공(正供)의 규정에 비추어볼 때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해당 첨사는 도신의 장계에서 이미 파면시킬 것을 청하였으니, 다시 논의할 여지가 없습니다. 비록 도신으로 말하더라도 살피는 위치에 있으면서 그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우니, 우선 엄하게 추고(推考)할 것입니다. 의정부에 보고한 성책(成冊)을 보니, 위 항목의 허류조(虛留條) 가운데 사공들의 묵은 빚을 쌀로 보상한 것이 그 수가 5,600여 석이나 됩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장차 운반할 공부(貢賦)에서 취하여 주었겠습니까? 도신으로 하여금 낱낱이 도로 징수하게 하고 조수미하조(漕需未下條)와 함께 즉시 숫자대로 주어서 채워 넣는 방도로 삼게 할 것입니다. 이른바 채전(債錢)은 본래의 액수만 계산하고 감히 비싼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특별히 엄하게 신칙할 것입니다. 포흠(逋欠)한 사공들은 경중을 분간해서 법에 비추어 심리하여서 처리한 뒤에 등문(登聞)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 장령(前掌令) 김경(金瓊)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풍문으로 듣건대, 근년에 소대(召對)하고 경연(經筵)을 여는 일이 드물다고 합니다. 비록 전하의 학문이 고매하여 더 강명(講明)할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지금 동궁저하(東宮邸下)의 나이가 아직 어려서 그 선입견을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청컨대, 오늘부터 경연을 열고 곁들여 서연(書筵)도 열어서 동궁으로 하여금 성현(聖賢)들의 제도와 국가의 규모를 날마다 들어서 습관과 지혜가 자라고 교화와 마음이 성취되도록 한다면, 어찌 훗날 나라 일을 계승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이 권면을 아뢰는 글에서 감히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겠습니다만, 북도(北道)의 성쇠(盛衰)는 비단 나라의 안위(安危)에만 관계될 뿐 아니라 또한 신의 가문의 흥망이 달려 있기도 합니다. 한 번 외국인에게 개항(開港)한 다음부터 백성들의 마음이 의구심을 품고 동요하여, 중앙과 지방의 무뢰배들이 공문(公文)을 제멋대로 받아내어 가지고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함부로 징수하고 강제로 거둬들이는 것은, 신이 보고 들은 바입니다. 신의 집은 안변부(安邊府)에 있는데, 안변은 아주 작은 고을입니다. 근래에 혹은 저채(邸債)라고 하고 혹은 향채(鄕債)라고 하면서 명목도 없이 돈을 징수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어서, 10년 동안에 민간에서 전후하여 함부로 징수한 것이 수십 만 냥이나 됩니다. 고을의 폐단은 점점 불어나고 백성들의 생업은 파산하였는데, 이번에 서울 사람 팽계순(彭啓淳), 함흥 저리(咸興邸吏) 김규진(金奎鎭)과 이름을 모르는 경가(慶哥) 등이 돈을 징수한 일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소위 이 세 사람은 잡된 부류들과 부동하여 경사(京師)에 거짓으로 보고하고 관문(關文)을 빙자해서 영읍(營邑)을 위협하니, 영읍에서는 그들과 시비를 가리기 어려워 서둘러 집행한 결과 세 사람이 징수한 돈이 7만여 냥이나 됩니다. 고을의 능력으로는 갑자기 마련하기 곤란한데 더구나 명목도 없는 것을 함부로 징수하니, 어떻게 내겠습니까? 통곡 소리가 길에 넘쳐나고 원망의 기운이 천지에 사무칩니다. 만약 속히 금지하고 백성들을 안정시키지 않는다면, 신의 생각에는, 이산하는 백성들이 그 형편상 반드시 도적과 함께 일어나게 될 것이며 또한 다른 나라로 도망쳐 들어갈 우려도 없지 않을 것이니, 나라 일에 어찌 작은 문제가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이 놈들을 엄히 금지시켜 한 지방의 백성들이 성상의 은택을 두터이 입게 하시고 이어 신의 망령된 죄를 다스려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백성들의 폐단에 대하여 잘 말하였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그리고 서울 사람의 문제는 도신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뜻으로 묘당(廟堂)에서 행회(行會)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0월 6일 신축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천둥의 재변이 거듭 생긴 것을 가지고 연명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수양에 힘쓸 것을 권고하고 이어서 사임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가상하게 받아들이고 사직은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정시 무과 초시(庭試武科初試) 일소(一所)에서, ‘오늘 두 가지 재주로 입격(入格)한 거자(擧子)가 91명으로서 지금 막 개강(開講)했는데 한 사람도 강에 들어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과거(科擧) 규정에는 세 가지 재주가 있어야만 입격시키고 원래 두 가지 재주로 입격시켜 출방(出榜)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종전의 이러한 때에는 간혹 없다고 입계(入啓)하였기 때문에 이제 장차 부득이 과장을 철수하려고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10월 7일 임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정시 무과 초시(庭試武科初試) 일소(所)에서는 두 가지 재주로 입격(入格)한 거자(擧子)가 한 명도 강(講)에 응시하지 않아서 과장(科場)을 철수하게 되었고, 이소(二所)에서는 패악한 무리들이 소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지금 막 과장(科場)을 파했습니다. 과거 시험은 원래 소중한 것이어서 단지 지방에서 뽑는 인원수만 가지고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해조(該曹)에서 다시 날짜를 선택하여 총융사(總戎使)로 하여금 훈련원(訓練院)에서 합쳐서 설행하여 시취(試取)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찬선(贊善) 송병선(宋秉璿)이 상소하여 직책을 사임하니, 돈면(敦勉)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10월 8일 계묘
서당보(徐堂輔)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0월 9일 갑진
관북(關北) 십진(十鎭)의 백성들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아! 너희 관북 십진의 백성들아, 나 한 사람의 가르침을 분명히 들어라. 이 관북 일로(一路)는 우리 왕업이 기초한 곳이니, 이는 주(周) 나라의 빈기(豳岐)와 한(漢) 나라의 풍패(豐沛)와도 같지 아니한가? 더구나 연변(沿邊)의 십진은 바로 이웃 나라와 접경하고 있으므로 진실로 근본을 중히 하고 변경을 튼튼히 하려 한다면, 이는 오로지 우리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우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달려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이 도성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우리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신음해도 쉽게 들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열성조(列聖朝)에서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듯한 마음과 백성을 보기를 다칠 듯이 여기는 마음으로 언제나 북쪽을 먼저 생각하면서 마음 놓지 못하였던 것이다. 재앙을 당하면 구제하고 기근이 들면 먹이되 근기(近畿) 지역이나 충청도(忠淸道), 황해도(黃海道)의 변경보다도 언제나 더하였으니, 비유하면 마치 자기 집과 떨어진 곳에 젖먹이 아이를 두고서 이 아이가 울면 젖 주고 병나면 치료하기를 품안에 안고 있는 아이보다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부덕하고 어리석은 내가 이 큰 왕업을 이어받고서 항상 옛날의 명철한 임금들이 백성들을 생각한 훈계와 우리 성조(聖朝)께서 백성들을 돌봐준 사랑을 밤낮으로 마음속에 명심하여, 어찌 일찍이 하루라도 북쪽 백성들을 잊은 적이 있었겠는가? 아! 너희 북쪽 백성들도 우리 열성조의 인애와 은혜가 깊었다는 것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근래에는 피폐한 백성들과 교활한 백성으로서 도망한 부류들이 몰래 이웃 나라로 넘어가고 한 해 두 해 서로 유인해간 것이 거의 셀 수 없이 많아졌다고 하는가? 아! 방백(方伯)과 수령들이 미리 기찰해서 금지하지 않고 또 즉시 등문(登聞)하지도 않은 것은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변경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간 죄를 논하자면 《대전(大典)》의 법이 더없이 엄하고 나라를 배반한 죄가 지극히 중하니, 낱낱이 체포하여 죽여 없애지 않으면 어찌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어리석은 내가 생각해봐도 저 백성들이 제 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간 것이 어찌 다 좋아서 한 것이겠는가? 진실로 탐관오리와 교활한 서리(胥吏), 간사한 토호(土豪)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끝없고 갖가지로 침탈하며, 공공연한 뇌물질, 공정하지 못한 송사처결, 고통스런 고문, 악독한 처형을 모면할 방도가 없으며, 여기에다 또 해마다 흉년이 들어 베틀이 모두 비었는데 탐학은 더욱 심해져 고통스럽지만 하소연할 데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근심과 원망을 견디지 못하고 원망하고 비방하다 못해 혹은 분통을 터뜨려 죄를 초래하기도 하고 혹은 패악한 짓을 하다가 법에 저촉되기도 하므로, 칼을 쓰거나 족쇄를 차고서 고통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 낫고 처자를 팔아서 가렴주구에 대응하기보다는 차라리 처자를 이끌고 떠나는 것이 나아서 이렇게 고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된 것이니, 이는 우리 백성을 내몰아 쫓아낸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 한 번 생각해 보라. 불쌍한 저 도망친 무리들도 원래 부득이한 사정에서 떠난 것이지만 그들의 분묘(墳墓)가 여기에 있고 친척이 여기에 있으며 나서 자란 마을이 여기에 있다. 월(越) 나라 새는 고향이 그리워 남쪽 가지에 둥지를 틀고 대(代) 땅의 말은 고향이 그리워 북풍에 울부짖는다. 새나 짐승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백성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설령 저들이 스스로 살 곳을 얻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제 고장을 생각하고 그리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기 때문에 듣건대 그들의 의복은 아직도 본국(本國)의 제도를 변경하지 않았다고 하니, 우리나라로 돌아오려는 생각을 어찌 잠시라도 잊겠는가? 그러나 죄를 범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어서 마치 발이 묶인 듯하여 오도 가도 못하는 정상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으니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옛말에 이르기를, ‘어진 사람이 정사를 하면 도적과 오랑캐도 우리 백성으로 만들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본래 우리 백성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또 말하기를, ‘정상을 참작해서 법을 논함에 법도 때로 굽힐 때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저 가엾은 백성들에게 법을 굽히지 않는다면 이는 갓난아이가 우물에 기어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무지하다고 책망만 하면서 구원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어찌 차마 할 일인가?
이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할 수 없는 정사를 시행하고자 특별히 저들의 혼미한 죄를 용서해서 스스로 새로워질 길을 열어주려 하니, 만약 모두 마음을 고쳐먹고 자신을 반성하면서 서로 이끌고 귀국하여 살던 곳에 안착한다면 허물을 고쳐 새롭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옛날의 죄를 씻어주겠다. 《시경(詩經)》에 ‘끝내는 편안한 집을 얻을 것이다.’ 하였고, 《서경(書經)》에 ‘길이 힘써 너희 토지를 경작하라.’고 하였으니, 어찌 옛 임금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게 하겠는가? 아! 너희 진민(鎭民) 중에 소식을 접한 자는 반드시 이 내용을 서로 알려주고 타일러서 그들로 하여금 악(惡)을 버리고 선(善)을 따라 다시 우리 선조(先朝)가 인애로 교화하고 은혜로 길러준 백성이 되게 할지니, 그렇게 된다면 어찌 백성과 나라에 모두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방백과 수령도 깨끗한 마음으로 나의 뜻을 잘 받들어서 위로하여 따라오게 하기에 힘쓰고 탐오를 경계하여, 그늘진 곳에도 양춘(陽春)이 돌아오게 하고 북쪽 관문을 더욱 튼튼히 잠그는 것이 또 내가 몹시 기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국법(國法)을 굽혀 교서(敎書)를 내리고 말로써 형벌을 대신하니, 아! 너희 무리는 잘 체득하길 바란다."
하였다.
홍우길(洪祐吉)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서형순(徐衡淳)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병문(李秉文)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이주흥(李周興)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이교응(李敎應)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서연관(書筵官) 이상수(李象秀)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부주(附奏)를 보았는데, 이미 돈소(敦召)의 뜻에 어긋난 데다가 사양하는 편지가 또 왔으며 한결같이 물러나려고만 하므로 망연자실하여 몹시 슬프기만 하다. 대저 선비가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은 자신을 수양하고 집을 경영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임금과 백성을 돕는 것은 원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지금 세자(世子)가 강독(講讀)하려고 하루 건너 서연(書筵)을 여니, 바로 독실하고 해박한 선비가 책임지고 덕성을 도와서 인도해야 하는데, 그대는 이와 같은 포부를 가지고 어찌하여 굳이 시골을 지키면서 자신만 좋게 하려 하고 선뜻 마음 돌려 계획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가? 더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즉시 조정에 나오라."
하였다.
10월 10일 을사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심이택(沈履澤)이 보고한 내용을 보니, 고부(古阜), 김제(金堤) 두 읍(邑)이 흉년이 든 나머지 백성들이 조세를 마련하기 곤란한 형편을 자세히 진술하고, 이어 고부군의 무인년(1878) 조(條) 가운데 아직 실어 보내지 못한 쌀 1,110석(石) 남짓과 김제군의 무인년 조 가운데 아직 실어 보내지 못한 쌀 1,536석 남짓을 병자년(1876)과 정축년(1877)의 전례에 따라 상정가(詳定價)로 쳐서 대납(代納)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병자년과 정축년 조를 모두 상정가로 쳐서 대납하게 한 것이 이미 거의 없었던 은전(恩典)이니, 설령 큰 흉년이 든 뒤라고는 하지만 백성들의 형편과 고을의 일이 얼마간은 펴기에 충분한데도 지금 이렇게 거듭 진달한 것은 또한 이어가기 곤란한 정사 때문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호구(戶口)들이 흩어졌는데 아직도 모이지 못하였고 토지는 묵었는데 또한 다시 일구지 못한 것은 실로 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니, 특별히 보고한 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대전조(代錢條)는 반드시 세전(歲前)에 마감 짓도록 할 것이며 만약 지체시킬 경우에는 도신(道臣)과 수령이 별도의 논책(論責)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모두 이러한 내용으로 엄하게 신칙(申飭)해서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여름철에 포흠(逋欠)을 낸 선주(船主)에게 형률을 적용할 것을 진달하였는데 비지(批旨)를 받드니, 죄를 범한 놈들을 일일이 적발하여 해당 형률을 시행하되 또한 하루바삐 거행하도록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지금 반년이 되었으나 아무런 말도 들리는 것이 없으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모르기는 해도 그 사이 포흠되었던 수량이 과연 모두 장부에서 청산되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법과 기강의 사체(事體)가 어떤 지경으로 돌아가겠습니까? 몹시 개탄스러워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거듭 경계시킨다는 의리에 붙여 다시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 및 각 영문(營門)을 시켜 각 선주(船主)의 이름 밑에 포흠한 숫자를 낱낱이 적출(摘出)하게 하여 그 가운데서 가장 많은 놈은 속히 효수(梟首)하여 경계를 보이는 형률을 시행하고, 그 다음 놈은 기한을 정하여 독촉해서 받아내되 만약 기한을 넘기면 또한 사형(死刑)을 적용하여 결단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어 생각건대, 무릇 지금 세곡(稅穀)이 지체되고 포흠을 낸 원인은 대부분 조운(漕運)의 폐단이 보다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데도 오래도록 내버려둔다면 그 폐단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의정부 당상 가운데서 일찍이 삼남(三南)의 도백(道伯)을 지낸 정기세(鄭基世), 민치상(閔致庠), 홍우길(洪祐吉)에게 위임시켜 바로잡아야 할 것을 속히 대책을 강구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포흠이 가장 많은 선주에게 형률을 적용하는 일을 어찌하여 이처럼 지연시키는가? 호조, 선혜청 및 각 영문에 신칙하여 즉시 거행하게 하라. 조운법(漕運法)으로 말하면 실로 매우 민망하니, 아뢴 대로 차정(差定)하여 바로잡는 것과 관계된 모든 것을 낱낱이 조사하여 조속히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각 궁방(宮房)의 면세미(免稅米)는 매번 양세(兩稅)를 붙여서 함께 실어오면 탁지(度支)에서 숫자를 대조해서 나누어 보내는 것이 바로 유래되어 온 정식(定式)입니다. 그러나 근년에는 세선(稅船)이 도착한 처음에 해조(該曹)에서 점검하기도 전에 각 해당 궁방의 하인들이 미리 알고 급히 가서 제멋대로 먼저 가져가면서 조금도 꺼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때에 원납(元納)이 비록 많이 흠축(欠縮)나더라도 곁꾼〔格軍〕들은 감히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합니다. 대체로 면세미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찌 정공(正供)보다 더 중할 리가 있겠습니까? 법례(法例)로 헤아려 볼 때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이제부터 다시 이와 같은 폐단이 있으면 하속(下屬)은 법사(法司)로 옮겨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원배(遠配)하고 차지(次知)와 중관(中官)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하게 감처(勘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궁방의 면세미도 상납(上納)인데, 거두어들일 때 하인들을 풀어서 빼앗아가는 것은 이미 사체에 어긋나는 것이다. 더구나 이로 인하여 정공을 축내서야 되겠는가? 아뢴 대로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이번에 중앙과 지방에서 천거한 학행이 순수하고 독실한 사람들은 해조를 시켜 각별히 조용(調用)하여 권장해서 나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증 판돈녕부사(贈判敦寧府事) 무숙공(武肅公) 박진영(朴震英)은 명(明) 나라 천계(天啓) 연간에 진강 운향사(鎭江運餉使)로서 군사와 말에 대한 공급을 정성을 다해 마련하였고 또 빌어먹는 중국 사람 수만 명을 살렸으므로 명나라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포장(褒獎)하여 자급(資級)을 올리고 진강부 유격장(鎭江府游擊將)으로 승임(陞任)하고 그 뜻으로 먼저 패문(牌文)을 보내어 알려주었습니다. 패문이 지금까지 그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데 주묵(朱墨)의 진적(眞跡)이 어제 쓴 것처럼 완연합니다. 조정의 은혜로운 포장은 진실로 이미 실시되었습니다만, 그 후손이 아직도 황단(皇壇)의 제사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억울한 한탄이 있습니다. 추후(追後)로 명하여 반열에 들어와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예조(禮曹)에서 보고한 것을 보니, 대구(大邱) 동화사(桐華寺)는 수릉(綏陵)에서 쓰는 향과 탄(炭) 및 두부를 만들어 바치는 절인데, 두 번이나 화재를 당하여 모조리 타버렸으므로 공명첩(空名帖)을 1,000장(張)에 한하여 내려 보내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절은 신라 때 지은 유명한 절일뿐만 아니라 또 향과 두부를 만들어 바치는 것도 중요하니, 조정에서 마땅히 특례로 곡진히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공명첩 500장을 만들어 주어서 수리하여 안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박제인(朴齊寅)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0월 11일 병오
이원명(李源命)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비록 부주(附奏)를 보기는 하였으나 은거하려는 마음을 돌리기를 나는 기대하였는데, 지금 온 편지를 보니 또 다시 사양하였으니 실망을 누를 수 없다. 나는 꼭 오게 하려는 마음이 있으나 성의가 부족하여 믿음을 받지 못하였고 그대는 반드시 사양할 의리가 없는데도 뜻을 높이하기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경(詩經)》에 ‘현자(賢者)를 좋아하기를 〈치의(緇衣)〉와 같이 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선비는 자리 위의 보배로 초빙(招聘)을 기다린다.’ 한 것은 과연 오늘날에는 실현하기 어렵단 말인가?
대저 선비가 글을 읽으면 반드시 쓸 곳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덕행(德行)과 정사(政事)를 사과(四科)에 병렬하여 놓았던 것이다. 그대는 이 의리에 대해 반드시 깊이 음미하고 익숙하게 연구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 세자(世子)가 서연(書筵)을 자주 열고 있으므로 모쪼록 노성(老成)한 사람과 학식 있는 사람이 덕성을 길러주어야 할 것이다. 그대는 선뜻 마음을 바꾸고 즉시 조정에 나와 이토록 간절한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진선(進善) 김낙현(金洛鉉)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부주(附奏)를 보니 사양하여 마지않았는데, 사양하는 편지가 또 왔다. 한결같이 떠나려고만 하는 것은 실로 부덕하고 어리석은 나의 정성이 부족하고 말이 졸렬하여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을 불러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순수한 학문과 독실한 덕행을 가지고도 어찌하여 임금과 백성의 소원을 무시하고 다만 하나의 작은 고을에서 명성과 업적을 쌓는 것으로 그치려 하는가? 지금 세자(世子)가 하루건너 서연(書筵)을 열어 지려(志慮)가 숙성(夙成)하니 보도(輔導)하고 훈적(訓迪)하는 책임을 그대를 버려두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더구나 도성 부근에 살고 있어 서로 거리도 멀지 않으므로 나로 하여금 더욱 《시경(詩經)》 〈겸가(蒹葭)〉에서와 같은 가까이 있어도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그대는 선뜻 마음을 바꾸고 즉시 조정에 나와 간절히 기다리는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10월 12일 정미
김재현(金在顯)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함흥부(咸興府)에서 압사(壓死)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10월 16일 신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한학 문신(漢學文臣)의 전강(殿講)과 일차 유생 (日次儒生)의 전강을 행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원(李裕元)이 상소하여 사직할 것을 청하니, 윤허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10월 18일 계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심이택(沈履澤)의 장계(狀啓)를 보니,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건구(李建九)의 첩정(牒呈)을 낱낱이 거론하여 말하기를, ‘본현(本縣)의 무인년(1878) 조(條) 대동미(大同米)를 경선주(京船主) 편치운(片致云)과 연문성(延文成)에게 나누어 실어 보냈는데 이미 반년이 지나도록 자문〔尺文〕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연해 각 곳을 염탐하여 두 놈을 청산도(靑山島)에서 잡아다가 공초(供招)를 받아보니, 여러 섬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사사로이 매매한 정상을 구구절절이 자복하였습니다. 모두 엄히 가두었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완악하다 하지만 더없이 중한 정공(正供)을 함부로 쓰면서 제멋대로 이익을 취한 것이 혹은 1,000포(包)에 가깝고 혹은 1,000포를 넘기도 합니다. 유인해 보낸 감색(監色)과 한패가 된 사격(沙格)을 한 번 조사해서 다 자복하였으니 만 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 죄인 편치운, 연문성을 병영(兵營)으로 압송해서 효수(梟首)하여 뭇 사람을 경계시키고, 사격이 기미를 알고 달아난 것은 더욱 통분스러우니 체포하여 처단한 뒤에 상황을 치문(馳聞)하게 하소서. 감색으로 말하더라도 각 배에 나누어 타고 일제히 출발하도록 조종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검찰할 일인데 지레 먼저 혼자 싣고 떠나가서 이처럼 훔쳐 파는 일이 있게 하였으니, 모두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원배(遠配)하소서. 대체로 포흠(逋欠)한 놈들을 죽이기만 하고 징수하지 않는 것은 이미 법전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패악스러운 부류가 목숨을 경시하면서 공납(公納)을 훔쳤는데 이런데도 특별히 신칙(申飭)하지 않으면 뒷날의 폐단이 그치지 않을 것이니, 먼저 이번에 다스릴 두 놈부터 훔친 수량은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낱낱이 도로 징수하게 하고, 앞으로는 서울과 지방의 선격(船格)과 이례(吏隸)를 막론하고 만약 포흠한 자가 있으면 형률을 적용하고 포흠한 것을 징수하는 일을 이대로 시행하도록 각 아문(衙門) 및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19일 갑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명응(李明應)의 장계(狀啓)를 보니, ‘비인현(庇仁縣)의 도둔포(都屯浦)와 마량진(馬梁鎭)에 표류되어 온 이국인(異國人)에게 문정(問情)하니, 9명은 청(淸) 나라 광동성(廣東省) 사람이고 18명은 태국[暹羅國]사람인데, 모두 행상(行商)을 하다가 표류되어 온 자들이었습니다. 전례대로 즉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신중히 생각할 일이므로 처분을 기다려서 거행하려고 합니다. 지방관이 육로로 돌아갈 것이라고 먼저 말한 것은 비록 경솔하기는 하였지만 배가 파손되어 육로로 되돌려 보내야 할 형편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 문정한 것이 상세하지 못한 듯합니다. 어떤 길로 돌려보낼 것인지와 역관을 내려 보내는 일을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비록 두 지방에서 표류되어 왔지만 사실은 한 배를 같이 타고 온 자들이고, 이미 그들의 거주지와 사정을 알았으니 역관(譯官)을 내려 보내는 문제는 그만두소서. 배가 이미 파손되었기에 저들이 육로로 돌아가기를 원하니 그들의 말대로 육로로 보내되, 옷을 만들어 주고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전례대로 하고, 가지고 있는 집물(什物)은 모두 쇄마(刷馬)로 번갈아 운반해주며, 연로(沿路)에서 호송하고 잡인(雜人)을 금지하는 등의 일은 지나갈 제도(諸道)에 각별히 신칙하고, 별도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차례로 인계해 가면서 서울로 올려 보내서 서울에서 의주(義州)에 넘겨주어 북경(北京)으로 들여보내게 할 것입니다. 절사(節使)가 행차할 기일이 머지않으니 별도로 자관(咨官)을 정할 필요 없이 사행(使行) 편에 가지고 가게 하되 자문(咨文)은 괴원(槐阮)에서 지어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1일 병진
이경우(李景宇)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0월 22일 정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근자에 듣건대, 탁지(度支)의 수용(需用)이 매우 황급하다고 하므로 그 미수 문부(未收文簿)를 가져다 보니, 각도(各道) 영읍(營邑)에서 바쳐야 할 것을 지체한 것이 그 수가 많았습니다. 만약 제 기한에 맞추었다면 아마도 이처럼 군색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각영(各營)과 각사(各司)의 사세(事勢)가 똑같이 급박하게 된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동안 관문(關文)을 보내어 신칙(申飭)하기를 거듭 엄하게 하였을 뿐만이 아닌데 끝내 경동(警動)함이 없이 줄곧 헛되이 보내고 있으니, 과연 모두 민간에서 거두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아래에서 포흠하지 않았다면 바로 중간에서 농간하였을 것이니 놀라운 일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지금 겨울이 이미 되었는데 점차 시일을 끌다가 또 장차 한 해를 늦추고 말 것이니 어찌 이런 법과 기강이 있겠습니까? 특별히 12월 10일 전으로 기한을 정하여 남김없이 장부에서 청산하되 다시 혹시라도 지체시켜 마감 짓지 못하는 폐단이 있으면 도신(道臣)은 중한 쪽으로 거론하여 경계하고 수령은 먼저 파면시킨 뒤에 나문(拿問)하겠다는 뜻으로 각사와 각영을 시켜 미납한 것을 조목별로 열거하여 기록하고 말을 잘 만들어 통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4일 기미
신헌(申櫶)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0월 27일 임술
홍우길(洪祐吉)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0월 28일 계해
서당보(徐堂輔)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0월 29일 갑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정시(庭試)를 행하여, 문과(文科)에서는 위익원(魏翼源) 등 3인(人)을 뽑고, 무과(武科)에서는 구범서(具範書) 등 471인을 뽑았다. 이어 방방(放榜)하였다.
김병시(金炳始)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김재현(金在顯)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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