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2권, 고종22년 1885년 11월

싸라리리 2025. 1. 1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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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을미

전교하기를,
"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함경도(咸鏡道) 사도의 표호(漂戶)·퇴호(頹戶)와 익사한 사람들에 대하여 원래의 휼전(恤典) 외에 별도로 더 보살펴 도와주고 생전의 환포(還布)를 모두 탕감시켜 주며, 퇴호를 다시 지을 방도와 죽은 사람을 후하게 묻어 주는 일을 영읍(營邑)에서도 도와주도록 하라는 뜻으로 묘당(廟堂)에서 말을 만들어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각 해도(該道)의 도신들이 수해(水害)에 대한 장계(狀啓)를 올렸기 때문이다.

 

11월 2일 병신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을 사직하니, 비답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직(遞職)해 주었다.

 

김병덕(金炳德)을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제배하고, 심순택(沈舜澤)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이원명(李源命)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황해 감사(黃海監司) 조경하(趙敬夏), 수사(水使) 민치설(閔致卨)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옹진부(瓮津府)에 표류되어 온 중국 사람 3명이 육로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추위가 더욱 심해지니 의복 등의 물건을 전례에 비추어 만들어주고 말을 징발하여 번갈아 타게 하는 일과 음식물을 주고 보호하는 등의 일을 모두 특별히 신칙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3일 정유

【중국에서】 돌아온 세 사신을 소견(召見)하였다. 【진주 정사(陳奏正使) 민종묵(閔種默), 부사(副使) 조병식(趙秉式), 서장관(書狀官) 김세기(金世基)이다.】 하교하기를,
"해마다 진주(陳奏)하였지만 윤허를 받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뜻대로 청을 허락받았으니 내 마음이 기쁘다."
하니, 민종묵이 아뢰기를,
"성상의 효성에 감화되어 이른 것 아님이 없으니 공경하고 칭송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부사(副使)는 언제 천진(天津)에 가서 문후하였는가?"
하니, 조병식이 아뢰기를,
"올해 8월 14일 천진에 가서 대원군(大院君)에게 문안하고 봉함한 편지와 은자(銀資), 약재료를 수량대로 올렸습니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덕(金炳德)에게 하유하기를,
"경을 만나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내가 경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경이 나에게 정성스러웠다는 것을 알겠다.
돌아보건대 지금 나라와 백성들의 어려움과 근심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데, 낭묘(廊廟)는 공허하며 적체된 일은 산적해 있다. 위태롭고 급박한 상황에 대하여서는 내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경이 반드시 밤낮으로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경을 한번 번거롭게 하여 나라 일을 경륜하며 광제하도록 하지 않을 수 않겠는가? 이것은 또한 나 한 사람이 사사로이 경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실로 여러 사람들이 기다리며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생각이 간절하고 기대가 급하여 많은 말로 유시할 겨를이 없으니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오늘 당장 길을 떠나 절실히 바라는 나의 생각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성당창(聖堂倉)을 진(鎭)에 설치하는 것을 어사(御史)의 단자로 인하여 이미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세를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급하니 해당 진영(鎭營)의 첨사(僉使)를 군산(群山)에 있는 법성창(法聖倉)의 예대로 오늘 정사에서 우선 차출하여 속히 내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내무부(內務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개성 유수(開城留守) 민영환(閔泳煥)이 보고한 것을 보니, ‘본영의 군수에 쓸 것이 시급하니 강화(江華)의 포량(砲糧) 중에 3,000석을 영무례(營貿例)에 따라 획급(劃給)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병사를 뽑아 기예를 훈련시키는 것은 이미 명을 받들어 이루었으니 희료(餼料)에 충당할 것을 속히 조처하여 처리하고 보고한 말에 따라 이 수량만큼 편리한 대로 사와서 보태어 쓰도록 분부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신석년(申錫秊)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박난수(朴蘭壽)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희빈(李熙斌)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감제(柑製)를 성균관(成均館)에서 설행하였다. 표(表)에서 생원(生員) 남정필(南廷弼)과 유학(幼學) 이범승(李範升)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11월 4일 무술

충청 좌도(忠淸左道)의 암행 어사(暗行御史)        정인흥(鄭寅興)을 소견(召見)하였다.
서계(書啓)로 인하여 전 제천 현감(前堤川縣監)        이수원(李秀元)은 죄주고 전 영동 현감(前永同縣監)        홍용관(洪用觀), 전 아산 현감(前牙山縣監)        홍병도(洪秉燾)는 승서(陞敍)를 시행하였다.

 

내의원 도제조(內醫院都提調) 김홍집(金弘集)이 아뢰기를,
"방금 삼가 듣건대,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이 드실 탕제(湯劑)에 들어간 녹용의 맛이 변하여 수고롭게 하교를 내리게 하였다고 하니 지극히 놀랍고 황송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드시는 약재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감봉(監捧)하고 감제(監製)할 즈음에 진실로 철저하게 조심하여 하나하나 정밀하게 골랐다면 어찌 이렇게 맛이 변하는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탕제를 도로 내려 보내어 비록 다시 택하여 달여서 들여보내기는 하였으나 일의 체모로 헤아려보면 지극히 편안하지 못합니다."
녹용을 감봉하고 감제한 본 내의원(內醫院)의 제조(提調)는 현고(現告)를 받아 엄중하게 추고하고, 그 당시의 수의장무관(首醫掌務官)과 상번(上番) 의관(醫官)은 모두 본직에서 우선 해임시키며, 감봉한 도신 함경 감사(咸鏡監司) 정기회(鄭基會)는 벼슬에서 파직시키는 형전을 시행하며, 약을 검열한 사람은 해당 관청에서 관리 대장에 있는 이름을 삭제한 뒤에 유사(攸司)로 하여금 엄중하게 죄를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임병두(林秉斗)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도적을 막는 대책에는 7가지 조목이 있고, 화폐를 고르게 하는 방법에는 5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도적의 발생이 그치지 않는 것은 책임이 수령(守令)에게 있고, 수령이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책임이 감사(監司)에게 있습니다. 감사가 법을 세우지 못하여 이웃 고을이 일제히 호응하지 않고 형세가 고립되어 각자가 두려워하면서 서로 해이하게 되고 심지어 지면이 있다고 체포하지 않고 체포는 하였다가 바로 놓아주는 사람이 있게 되니, 도적 무리가 활개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감사가 법을 세우고 수령이 일제히 호응한다면 도적은 발을 붙일 곳이 없게 되어 자연히 귀화하게 됩니다. 명령을 내린 뒤에 한 사람의 도적이라도 나타나는 곳이 있으면 지방관이 그 한 사람을 징계하여 모든 사람을 면려하는 것은 오직 감사가 조종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첫째 조목입니다.
도적은 모두 나라 안의 사람들입니다. 도(道)에서 읍(邑)에 공문을 띄우고 읍에서 리(里)에 명하여 10일 간격으로 어떤 사람의 행동거지가 수상하고 어떤 사람이 며칠을 다른 곳에 나가 있었다는 것을 보고하게 하여 뒷날 상고할 근거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혹 사정(私情)에 구애되어 숨기는 경우에는 따로 염탐하여 징계하는 것은 오직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둘째 조목입니다.
도적은 생식을 하는 무리가 아닙니다. 외진 마을과 외딴 점(店)에 반드시 도적의 소굴이 있을 것이니 각 리에서 윤번으로 외진 마을과 외딴 점에서 수직(守直)하면서 밤낮으로 적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명령이 집행되고 해이하지 않는 것은 오직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셋째 조목입니다.
10리마다 한 개의 막을 짓고 또 각기 그 면에서 윤번으로 수직을 서면서 길에 수상한 사람이 지나가면 짐을 졌든 안 졌든 막론하고 수색하고 검열해야 합니다. 그러나 폐단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오직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넷째 조목입니다.
매 장날마다 또한 각 리에서 어두울 때에 저자 길의 요충지에서 수직을 서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다섯째 조목입니다.
이웃 마을에서 태만하고 준비를 엄하게 하지 않거나 단속을 잘 하지 않으면 서로 관청에 고발하게 하여 각자 스스로 조심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섯째 조목입니다.
마을사람 중 화적(火賊)을 만난 사람은 해당 면(面)에서 변상해 주고 화적을 만난 행상(行商)은 지방 관청에서 변상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변상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일곱째 조목입니다.
엽전(葉錢)과 당백전(當百錢)이 균등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수령이 공적인 것을 뜯어다 사욕을 채운 것으로 말미암아 나라와 백성들이 곤궁한 생활에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의 당오전(當五錢)은 장사치들을 통해서 시골에서 매매되고 시골의 엽전은 부세(賦稅)로 서울에 곧장 실어오니 유통이 고르게 되고 서로 가로막지 않게 하는 것 또한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첫째 조목입니다.
모든 물건은 원래 시가(時價)가 있는 것입니다. 엽전 5푼 값의 물건은 당오전 1원(圓)으로 살 수 있으니 엽전은 싸고 당오전은 비싸다는 생각을 없애어서 백성들에게 엽전과 당오전이 귀하고 천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도 수령에게 달려 있으니, 이것이 둘째 조목입니다.
백성들은 당오전으로 물건을 팔고 관청에서는 엽전으로 부세를 거두면 백성들은 필경 의심할 것이나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엽전과 당오전을 균등하게 배포되지 못할 것입니다. 겨우 1년만 지나면 서울과 지방에 귀하고 천한 것 없이 유통될 것이니 물건을 팔거나 부세를 거둘 때 어찌 엽전과 당오전을 가리겠습니까? 백성들에게 믿음을 보이는 것도 수령에게 달려 있으니, 이것이 셋째 조목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혹 말하기를, ‘맞돈으로 상납할 때 엽전은 무겁고 당오전은 가볍기 때문에 형편상 반드시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취하게 되어 결국 서울에서는 자연히 당오전을 쓰고 지방에서는 자연히 엽전을 쓰게 된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엽전을 맞돈으로 실어가는 것은 다만 1년 동안의 일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다음해가 지나면 엽전과 당오전이 서울과 지방에 균등하게 분포되어 돈을 바꾸는 장사치들이 이전대로 왕래가 끊임없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해마다 맞돈으로 실어갈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을 깨우쳐 주는 것도 수령에게 달렸으니, 이것이 넷째 조목입니다.
촌락에서 매매할 때 만약 혹 엽전은 귀하게 여기고 당오전은 천하게 여기면 중한 죄로 논해야 합니다. 이것도 수령에게 달렸으니, 이것이 다섯째 조목입니다.
이런 명령을 반포한 것이 한두 번만이 아닌데 감사와 수령들이 형식적인 문서로 여기다보니 민간에서는 무슨 일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명령이 집행되는 근태(勤怠) 정형(情形)을 가지고 수령의 출척(黜陟)을 보이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런 법을 세우고 금석처럼 굳게 지키며 이 명령을 실행하는 것을 네 계절이 오는 것처럼 미덥게 한다면 어찌 도적질을 그치게 하는 것을 근심하며 어찌 화폐를 고르게 하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여러 신하들에게 널리 자문하고 속히 행회(行會)하게 하여 한편으로는 거의 무너져가는 기강을 진작시키고 한편으로는 뜻밖의 환란에 대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여러 조목들은 다 긴요한 일에 관계되는 것이니,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5일 기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6일 경자

전교하기를,
"출강 사신(出彊使臣)의 노문(路文)을 내무부(內務府)에게 적당히 마련(磨鍊)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호준(李鎬俊)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교익(李喬翼)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유치익(兪致益)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민병숙(閔丙肅)을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삼았다.

 

11월 7일 신축

세 사신을 소견(召見)하였다.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 정해륜(鄭海崙), 부사(副使) 서상우(徐相雨), 서장관(書狀官) 이훈경(李勛卿)이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좌의정(左議政) 김병덕(金炳德)을 인견(引見)하였다. 김병덕이 아뢰기를,
"신이 명을 듣고 곧 길을 떠나 외람되게 연석(筵席)에 나왔습니다. 감히 현직으로 자처하지 않고 다만 은혜로운 명령에 한 번 숙배하여 의리와 분수를 대강 펴니 곧 고맙게 양해하여 주시고 염치와 예절을 보존하게 하여 주시기를 바랄뿐입니다.
신은 자질과 성품이 좁고 융통성이 없으며 지혜가 얕고 짧아 시무(時務)에 무식하여 벼슬을 감당할 수 없음을 이미 전하가 환히 꿰뚫고 있으니 구태여 진술할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나이가 이미 70을 바라보고 병이 깊어서 겨우 실날같이 부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비록 집안의 보통 일이라 하더라도 살펴볼 경황이 못되는데 나라의 사무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벼슬을 그만두는 한 가지 일로 위로 전하의 교화를 돕고 아래로 집안의 명성을 이어나가려는 것입니다. 요컨대 임금에게 올릴 수 없는 보고를 올리고 전후하여 한두 번 애타게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문득 간절한 계(啓)를 올린 지 며칠이 못되어 곧 정승으로 선정하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태연하게 일을 어긋나게 하면서 그 자리에 다시 앉아 아무 일이 없는 사람으로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만약 어제 사임하고 오늘 정승의 자리에 있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입으로는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면서 몸은 영예로운 총애를 도모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심지어 하늘까지 속이는 것이 되니 죄가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놀라고 의혹을 가지며 하인들이 비웃고 욕을 해도 이해시킬 말이 없습니다. 비록 얼굴을 들고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높은 벼슬자리에서 유독 마음이 괴롭지 않을 것이며, 조정을 욕되게 하고 세상에 수치를 끼치는 것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신이 물러가기를 급급하게 하는 까닭이니 미처 격식을 갖추지 못하고 사양하면서 서둘러 조정에 나와 면전에서 간청하는 것입니다.
신의 거취는 이에 결정되었으니 속히 배척하여 물러가도록 명령하고 어질고 덕있는 사람으로 개복(改卜)한다면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다행한 일이니 천만 번 간절히 축원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을 기다린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연석에 나왔으니 기쁘고 다행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어렵고 근심스러우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니, 김병덕이 아뢰기를,
"신은 다만 재주가 부족할 뿐 아니라 나이가 이미 많고 병도 점점 심해 가는데 이제 어떻게 더없이 중대한 임무를 다시 맡아서 나라와 백성의 일을 다시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비록 정세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이렇게까지 되었겠는가?"
하니, 김병덕이 아뢰기를,
"지금 물러갈 것에 대한 윤허를 받게 되면 나랏일이 다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연석에서 허락한 전례가 있어서 훌륭한 일로 전해질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감히 옛날에 대신을 예의로 대우한 훌륭한 일에 견줄 수는 없지만 전하가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는 덕을 앙망(仰望)합니다."
하고, 이어서 명소패(命召牌)를 바쳤다. 하교하기를,
"병은 응당 점차 차도가 있게 될 것이니 대청에 누워서 나라의 정사를 의논하는 것은 근력을 들여 뛰어다니는 일이 아닌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명소패를 도로 전하여 줄 것을 명하니 김병덕이 곧 일어났다가 엎드리고 받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경이 비록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단지 예의로만 대우할 것이다."
하였다. 김병덕이 아뢰기를,
"예의로 대우한다는 것은 간곡히 용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실제 사정을 양해하여 청렴한 마음을 펴게 해서 전도(顚倒)되고 창피한 데 이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옛날에도 이미 치사(致仕)를 하였다가 다시 정승으로 임명된 전례가 있으며 근래 이 봉조하(李奉朝賀)도 쉬게 하여 줄 것을 청한 기간에도 정승의 직책을 수행하였으니 경은 이 때문에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김병덕이 아뢰기를,
"그런 전례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적임자가 아니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니 그 당시에 있어서 면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자라서 본래 일례로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물며 사람의 사정이란 각기 다르지 않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경은 노성하고 숙덕(宿德)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하였다. 김병덕이 아뢰기를,
"전하의 하교가 이러하니 더욱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숙덕을 가진 사람과 새로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 신보다 나은 사람이 매우 많으니 속히 신을 배척하여 물리치고 어질고 덕망 있는 사람을 개복하기를 지성으로 축원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은 어째서 경의 선대가 나라를 위하여 일한 그 마음으로 오늘날 보답할 것을 도모하지 않는가?"
하였다. 김병덕이 아뢰기를,
"신이 어떻게 감히 선대의 사적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번에 물러가려고 하는 것은 어진 사람이 나오는 길을 막지 않음을 기약하는 것이고 나라를 위하여 보답하자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이 만약 내 뜻을 받아준다면 나 역시 마땅히 경이 애써 간청하는 것을 들어줄 때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병덕이 아뢰기를,
"전하의 하교가 황송하고 감동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어떻게 뒷날에 은덕을 내려줄 것을 바라고 억지로 오늘 감히 할 수 없는 직임을 무릅쓸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내가 열성조(列聖朝)의 훌륭한 덕을 이어받아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애쓰고 있으니, 경도 선대의 사적을 가지고 나라와 백성의 일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김병덕이 아뢰기를,
"신이 뒤늦게 와서 한 번 숙배한 것은 본분과 의리를 위해서이고 어리석은 것을 무릅쓰고 여러 번 간청하는 것은 염치와 예의를 위한 것이니 차라리 엄한 처단을 당할지언정 감히 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명소패를 도로 바쳤다.

 

좌의정(左議政) 김병덕(金炳德)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조금전 전석(前席)에서 마음을 터놓은 유시를 남김없이 모두 말했으니 독실하게 나라 일에 충직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경으로서는 마땅히 이해하였을 것인데 줄곧 면면하게 결연히 버리고 떠나갈 것처럼 하고 있으니 크게 기대하던 나머지 나도 모르게 아연실색하게 된다. 명소패(命召牌)를 잠시 받아둔 것은 바로 예로 공경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고 이번에 도로 주는 것도 일이 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다. 만약 또다시 사양한다면 아마도 진심으로 서로 믿는 뜻이 아닌 것 같으니 즉시 받아서 애타게 기다리는 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도로 명소패를 전달하였다.

 

방외 유생(方外儒生) 김건수(金健秀) 등이 올린 상소에,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과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을 문묘(文廟)에 배향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전에 이미 비답에서 유시하였으니 그대들도 일의 체모가 지극히 중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인데 또 어찌 번거롭게 하는가? 이해하고 물러가라."
하였다.

 

11월 8일 임인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친군 전영(親軍前營)과 좌영(左營) 병정들의 연조(鍊操)를 행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좌의정(左議政) 김병덕(金炳德)이 녹사(錄事)로 하여금 명소패(命召牌)를 가지고 와서 바치게 하였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안심하고 집에 돌아가도록 사관(史官)을 보내어 다시 전유(傳諭)하라."
하고, 이어서 명소패를 내주었다. 또 ‘좌의정 김병덕이 엄한 명에 여러 차례 맞서 스스로 중한 죄를 받기를 재촉하였고, 의금부(義禁府) 문 밖에서 처분을 기다리면서 이어 명소패를 바쳤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좌의정(左議政) 김병덕(金炳德)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어제 저녁의 유시(諭示)에서 간곡하게 타이른 것이 정성스럽고 진지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경이 나의 고충을 모두 이해하고 다시는 사양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번에 이렇게 명소패(命召牌)를 도로 바치고 의금부(義禁府)에서 처분을 기다린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라서 지극히 놀랍고 한탄스러우며 부끄러운 일이다. 군신(君臣) 간에는 서로 마음이 통하여 잘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이와 같이 장황하게 하는 것은 공연히 일의 체모만 손상시키고 도리어 상하 간에 서로 성의를 다하는 의리가 아니니 곧 집으로 돌아가서 나의 마음을 안심시키기 바란다."
하였다.

 

민영익(閔泳翊)과 조병식(趙秉式)을 협판 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으로, 조정희(趙定熙)와 민병석(閔丙奭)을 협판 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로, 이용직(李容稙)을 참의 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로 삼았다.

 

11월 9일 계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심순택(沈舜澤)을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이번에 거듭 정승으로 선정한 것은 의도가 우연한 것이 아니니 번연히 마음을 돌려 조정에 나오는 것이 아주 기대에 맞는 것이다. 그런데 연석(筵席)에 나온 처음에 즉시 명소패(命召牌)를 바치고 물러갔다. 그래서 여러 번 돌려주고 나의 간절한 마음을 말해주었다. 전후로 거듭하여 말한 것이 곡진할 뿐만이 아니었는데 줄곧 버티면서 마치 극력 항거하는 것 같았다. 비록 스스로 꾀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옛날의 대신들이 궂은 일 마른 일을 가리지 않고 애쓴 것에 비하면 어찌 얼마나 그렇게 다른가?
예의로 대우하면 예의로 대우하는 대로 있고 분수와 의리는 분수와 의리대로 있으니 내가 또한 어찌 처리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좌의정(左議政) 김병덕(金炳德)에게 간삭(刊削)하는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정하원(鄭夏源)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서경순(徐璟淳)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인명(李寅命)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1월 10일 갑진

융무당(隆武堂)에서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친군 우영(親軍右營)과 후영(後營)의 병정들의 연조(鍊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이 정승직에서 해임된 뒤로 다만 내 마음이 허전하여 의지하고 믿을 사람이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의 실망이 또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나라에는 단 하루도 정승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지금처럼 어려운 때에 여러 가지 일이 잘 안 되고 걱정거리가 끝없이 많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난번 사임을 허락한 것이 내가 어찌 잠시나마 버리려고 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경이 오랫동안 수고하고 여러 번 간청한 것을 생각할 때 예의로 공경해야 하는 처지에서 그냥 머뭇거리며 윤허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 된 일이기 때문에 다만 경이 한 번 교체되려고 애쓴 마음을 풀어준 것뿐이다.
낭묘(廊廟)가 빈 것이 이제 며칠이 되어 적체된 사무가 어지럽게 뒤엉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위급한 형편이 어찌할 수 없게 된 것은 내가 장황하게 말을 하지 않아도 경은 반드시 이해하고 깊이 우려하는 것이리라. 만약 나랏일, 공적인 일에 정성을 다하여 쉬운 일과 어려운 일, 궂은 일과 마른 일을 가리지 않고 보좌하고 수습할 마음을 가진 경이 아니라면 그 누가 외로운 나 한 사람을 딱하게 여겨 서로 도와서 다스리며 함께 바로잡아 나가겠는가? 나는 전적으로 신임하고 일을 맡겨서 성과를 거두게 하려고 하니, 경은 반드시 내가 지극히 신임하는 극진한 뜻을 이해하고 당장 조정에 나와 애타게 기다리는 바람을 위로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근수(宋近洙)가 상소하여 거듭 휴치(休致)시켜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민종묵(閔種默)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성대영(成大永)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11월 11일 을사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서영(西營)과 기보중영(畿輔中營) 병정들의 연조(鍊操)를 행하였다.

 

민영준(閔泳駿)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11월 12일 병오

전교하기를,
"조정 관리들이 근수(跟隨)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신칙한 것이 분명하고 엄할 뿐만이 아니었으나, 근래에 듣건대 규정 인원 이외에 거리낌 없이 함부로 마구 데리고 다닌다고 하니, 어찌 이런 도리를 허여할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 이후로는 한결같이 규정을 따라 감히 함부로 데리고 다니지 않도록 하라고 이제 칙교(勅敎)를 내렸다. 만약 다시 규정을 위반하면 신칙하지 않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도승지(都承旨)를 엄하게 처벌할 것이니, 승정원(承政院)에서는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을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11월 13일 정미

두 번째로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비답과 유시(諭示)를 통해서 나의 속마음을 남김없이 모두 말하였으니 경도 다시 머뭇거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백성들과 나라의 형편이 매우 곤란하고 위태로운 것은 경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니 내가 말을 많이 할 겨를이 없다. 조정의 사무가 쌓여 있는데 어떻게 자리를 비울 수 있으며 여론이 크게 기대하고 있는데 또한 어떻게 저버릴 수 있겠는가? 내가 정중하게 부탁하면 정성스럽게 지키려는 것은 경과 같은 노성한 사람이고 경이 지극한 정성을 지니고 독실한 것은 내가 근심하고 애쓰는 것을 생각해서일 것이다. 매번 경과 시사(時事)를 논할 때마다 흉금을 털어놓고 어느 것이고 남김없이 모두 말하였으니 임금과 신하 간에 또한 서로 아주 가깝고 뜻이 잘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서로 협력하고 공경하며 분발하고 가다듬는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며 무슨 공인들 이룩하지 못하겠는가? 바로 이것이 내가 경에게 깊이 바라고 경을 간절히 구하는 이유이다. 그러니 사양하지 말고 번연히 마음을 돌려 안절부절하며 안타깝게 기다리는 나의 마음에 부응하라."
하였다.

 

11월 14일 무신

전교하기를,
"일전에 내린 처분은 실로 일의 체모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예의로 대우하는 도의에 있어서 참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전 좌의정(前左議政) 김병덕(金炳德)을 서용하라."
하였다.

 

김병덕(金炳德)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이인응(李寅應)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홍우길(洪祐吉)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11월 15일 기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덕(金炳德)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내가 기어코 경을 불러오게 하려고 하는 고심은 거의 천지 신령을 감동시키고 쇠나 돌도 꿰뚫을 수 있는데 경은 고집을 돌리지 않고 장차 나를 멀리 하려고 하는 것처럼 하니 어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이렇게 심한가? 일전의 처분이 비록 사체를 보존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지만 내가 크게 신임하고 의지하고 믿고 있으니 어찌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없겠는가?
돌아보건대 지금 어려운 일이 가득하고 나라의 계책이 망연하며 게다가 경사로운 예식이 앞에 닥쳐 축하하는 의식도 장차 거행해야 하니 이러한 때 경을 생각하는 것이 갈증이 나는 정도가 아니다. 경은 대대로 독실한 충성과 곧은 의리로써 고락을 함께 하였으니 반드시 벼슬자리에 있거나 떠나 있거나 상관없이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즉시 도성(都城)에 들어와 좋은 계책을 내서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6일 경술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근래 외아문(外衙門)의 문적(文蹟)을 보니 중국에서 일본에 공문을 보내어 역적 김옥균(金玉均)을 그 사이에 이미 체포하였다고 하니 실로 천만다행한 일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하늘의 이치가 환히 밝아서 죄인을 체포하였으니 온 나라 신민(臣民)이 누군들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가득찬 큰 죄가 어떻게 감히 형벌을 받는 것을 끝내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홍철주(洪澈周)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순익(李淳翼)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오는 병술년(1886)의 문과(文科)와 무과(武科)의 중시(重試)와 대거별시(對擧別試)를 각 전(殿)과 궁(宮)이 대궐로 다시 돌아온 한 돌을 경축하는 경과 정시(慶科庭試)와 합설(合設)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계청(啓請)하였기 때문이다.

 

부산항(釜山港)에 해저 전선(電線)을 놓을 것에 대한 조약(條約)의 속약(續約)이 체결되었다.
〈해저 전선 조관 속약(海底電線條款續約)〉
이번에 조선 정부에서는 인천(仁川)으로부터 서울을 거쳐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전선(電線)을 가설하여 연결시켜서 모든 해외 전신(電信)을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것이 이미 체결된 부산항(釜山港)에 해저 전선을 늘릴 것에 대한 조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며, 조선 정부도 마침내 일본 정부의 생각이 무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두 나라 정부는 서로 균등하게 교의(交誼)가 된다고 보아 조선측은 교섭통상사무아문(交涉通商事務衙門)의 독판(督辦) 김윤식(金允植)을 파견하고 일본측은 대리공사(代理公使) 다카히라 고고로〔高平小五郞〕를 파견하여 협의하고 토의된 내용을 아래의 각 관에 밝혀 증명한다.
제1관
조선 정부는 인천과 의주 사이의 전선을 부산항(釜山港)의 일본 전신국(電信局)에 연결시킨다. 다만 조선 정부는 해당국의 부근에 별도로 한 국(局)을 설치하고 해당국을 경유하여 해외 전신을 발송하고 접수하는 것을 또한 임의로 할 수 있다.
제2관
해당 전선을 연결하는 공사는 지금부터 6개월 안에 일을 시작하여 2개월 안에 준공한다.
제3관
인천과 부산 사이에 전선가설을 준공한 뒤 부산선로를 경유하는 해외 전신 요금은 마땅히 의주선로를 통한 해외 전신 요금에 준하여 일률적으로 동일하게 값을 정하며 그 액수 이외의 요금은 징수할 수 없다.
제4관
부산(釜山)으로부터 규슈〔九州〕 서북 해안까지의 해저 전선에 대해서 이미 조선 정부의 관보(官報)에 25년을 기한으로 절반 값으로 할 것에 대한 조약이 실려 있기 때문에 인천과 부산사이의 전선 가설이 준공된 뒤에 이 전선을 경과하는 것은 일본정부의 관보에도 응당 25년을 기한으로 절반 값으로 한다.
이상 각 관은 쌍방이 서명하고 도장을 찍어 성실히 준수할 것을 표명한다.
대조선국(大朝鮮國) 을유년(1885) 11월 16일
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交涉通商事務衙門督辦) 김윤식(金允植)         대일본국(大日本國)        명치(明治) 18년 12월 21일 임시 대리공사(代理公使) 다카히라 쇼고로〔高平小五郞〕


【원본】 26책 22권 63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18면
【분류】외교-일본(日本) / 무역(貿易) / 건설-토목(土木) / 군사-통신(通信) / 물가-수수료(手數料) / 어문학-문학(文學)
대일본국(大日本國)        명치(明治) 18년 12월 21일
임시 대리공사(代理公使) 다카히라 쇼고로〔高平小五郞〕


【원본】 26책 22권 63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18면
【분류】외교-일본(日本) / 무역(貿易) / 건설-토목(土木) / 군사-통신(通信) / 물가-수수료(手數料) / 어문학-문학(文學)

 

11월 17일 신해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김병시(金炳始),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철주(洪澈周), 참판(參判) 김덕규(金德圭), 참의(參議) 김재용(金在容)이다.】  하교하기를,
"오늘 경 등을 소견(召見)하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고 내년은 바로 우리 자성(慈聖)의 보령(寶齡)이 팔순이 되는 해이니 실로 우리 왕가에 드물게 있는 큰 경사이다. 나 소자(小子)의 기뻐하며 하례하는 마음을 무엇으로 형용하여 비유하겠는가? 그리고 또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다같이 축하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현책(顯冊)을 높이 받들고 휘음(徽音)을 드러내 밝혀서 널리 퍼뜨리는 것은 이전(彝典)이 본래 있으니 하찮은 성의나마 펼 수 있어서 그 사이 안에서 앙청하였는데 우리 자성께서 겸손하게 사양하며 거절하였으나 여러 번 간곡히 청하여 겨우 윤허를 받았다. 존호를 올리는 성대한 의식을 장차 거행해야 하겠으므로 경 등을 부른 것이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고 보니 경사를 축하하는 전하의 마음을 더욱 우러러 칭송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臣) 등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정성은 더욱 형언하여 아뢸 길이 없습니다. 우리 동조(東朝) 전하는 도산(塗山), 유신(有莘), 태임(太姙), 태사(太姒)의 덕을 지니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복을 받아 내년에 보령이 팔순이 되니 이것은 진실로 우리 왕조 500년에 처음 있는 경사입니다. 우리 전하가 대왕대비(大王大妃)의 나이를 알고 오랫동안 모시고자 하는 극진한 정성으로 무릇 기쁨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이라면 응당 거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보책(寶冊)을 올리고 휘음을 널리 퍼뜨리는 것은 이전(彝典)이 있습니다. 뜰에 가득한 백관들과 온 나라의 만백성이 다 같이 손뼉치며 칭송하고 송축하는 곳에서 기뻐하고 춤을 추면서 손꼽아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성명(成命)을 내려 날을 받아서 거행하기 바랍니다."
하고, 김홍집이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동조 전하는 보령이 아주 많지만 큰 복이 무궁하니 이것은 참으로 나라에 드물게 있는 큰 행사입니다. 이에 기쁨을 크게 하려는 효성으로 애써 사양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돌려 이전을 거행하여 장차 큰 존호(尊號)를 드리게 되었으니 신들은 몸소 성대(盛代)를 만나 더없이 기뻐서 손뼉치며 경축하는 즐거움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하고, 김병시가 아뢰기를,
"내년은 바로 우리 자성 전하의 보령이 팔순이 되는 해이니 이것은 진실로 우리 왕조에 드물게 있는 큰 경사입니다. 크게 현책을 진헌하고 휘음을 널리 퍼뜨리는 것은 실로 이전에 있으니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고 전하의 효성이 더욱 빛날 일이니 신들이 경축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제 대신의 의견이 모두 같고 경축하는 마음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다 같으니 나 소자는 더욱 기쁘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봄에 김옥균(金玉均)이 이재원(李載元)에게 편지하여 일부러 나오라고 요구하였는데 거의 나오게 되었을 즈음에 일본에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체포한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그래도 통분할 노릇이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김옥균이 또 일본에서 변란을 일으켰으니 또한 그 나라에서도 미워할 것이지만 이치상 마땅히 우리나라에 넘겨주어 귀신과 사람들의 분을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박영효(朴泳孝)와 서광범(徐光範)과 서재필(徐載弼)이 이전에 나에게 글을 올렸는데, 어떻게 이와 같은 변란을 일으킬 수 있는가? 그의 심사(心事)가 몹시 불측한 것을 더욱 알 수 있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바로 문자(文字)로 주달(奏達)한 것이 더욱 분통스럽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내년은 바로 우리 자성(慈聖)의 보령이 팔순이 되는 해이다. 비단 우리 왕가에 드물게 있는 경사일 뿐 아니라 실로 천 년 동안에 드물게 보는 시기이다. 나 소자가 장수를 축원하는 정성에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오직 우리 자성의 어짐과 덕이 금과 옥에 새겨서 큰 존호(尊號)를 올리더라도 어찌 만분의 일이나마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전(彝典)에 의당 먼저 해야 하고 정리를 펴야 할 것이므로 그동안 여러 번 애써 간청하여 사양하는 마음을 돌려 겨우 윤허를 받았다. 이에 동지(冬至) 날에 대신과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을 소견(召見)하여 의견을 물어보았더니 모두 같았다.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 존호를 더 올리는 일은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진행해야 할 것이니 정관(政官)을 패초(牌招)하여 도목 정사(都目政事) 사업을 거행하고 도감 당상(都監堂上)과 낭관(郞官)을 차출(差出)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자성의 존호를 올리는 절차는 막 성명(成命)이 있었으니 기뻐하고 축원하는 정성이 더욱 절실해진다. 정월 초하룻날 경사를 축하하는 것은 원래 이미 행하는 예식이니 내년 정월 초하룻날에 친히 안팎 옷감과 축하문, 전문(箋文)을 대왕대비에게 올릴 것이다. 위에 고하고 아래에 반포하는 절차는 예조(禮曹)로 하여금 전례대로 준비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대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리고 경사를 축하하는 절차는 막 성명이 있었다. 나 소자의 기뻐하고 축원하는 정성을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봄에 가서 경사를 축하하는 의식을 진행하기로 마음먹고 그동안 이 문제를 궁 안에서 청한 것이 여러 번 있었는데 우리 자성께서 겸손한 마음과 백성을 구휼하는 생각으로 농사가 흉년들고 나라의 비용이 고갈될 지경에 성대한 잔치를 차리는 것은 결코 행할 수 없다고 하교하였다. 극진히 생각하고 측은해하는 뜻이 하교 내용에 넘치고 있었으므로 아랫사람의 심정으로는 비록 매우 섭섭하였지만 봉양하는 도리상 마땅히 하교를 받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진찬(進饌)의 절차는 부득이 내년 가을쯤에 마련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제반 의식 절차를 해당 각 관청으로 하여금 미리 준비하게 하라."
하였다.

 

심순택(沈舜澤)을 가상존호도감 도제조(加上尊號都監都提調)로, 심이택(沈履澤)·홍철주(洪澈周)·이순익(李淳翼)을 제조(提調)로, 이재완(李載完)을 협판 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 김영수(金永壽)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신석년(申錫秊)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유지영(柳芝榮)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최치영(崔致永)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11월 18일 임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전라 좌우도(全羅左右道) 어사(御史)의 장계(狀啓)에 따르면 전 감사(前監司) 김성근(金聲根)이 논한 여러 조목이 모두 규례에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도신(道臣)은 체모가 중하므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도록 명하(命下)하였습니다. 재신(宰臣)이 변방을 다스리는 것은 일의 체모가 자별한데 두 어사(御史)가 이와 같이 낭자하게 나열하였으니 응당 조사하고 신문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남일우(南一祐)가 다시 목화농사가 흉년든 정상에 대하여 진술하고 이어서 각 영(營)과 각 아문(衙門)에 상납하는 군포(軍布)와 악공(樂工)의 보포(保布)는 모두 순전히 돈으로 납부하고, 친군영(親軍營)의 포보포(砲保布)는 5분의 4를 한정해서 대납하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도신이 거듭하여 이처럼 간절하게 진술하였으니 병조(兵曹)와 각 영에 대해서는 3분의 1을 한정해서 대납하고, 포보(砲保)는 함께 논의할 수 없으므로 종전대로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19일 계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정기회(鄭基會)와 통어사(統禦使) 조재관(趙載觀)의 장계(狀啓)를 보니, ‘국경을 넘어간 죄인 7명을 통화현(通化縣)에서 압송해 왔기 때문에 엄하게 조사하고 신문해서 공술을 받은 뒤에 격식대로 옥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처결하는 문제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두 나라의 백성들이 서로 국경을 넘나들며 종종 소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듣기에 아주 놀랍고 한탄할 일입니다. 저들 비적(匪賊) 10명을 관병(官兵)이 이미 잡아갔으니 우리 백성 7명도 진실로 마땅히 법조문에 따라 처결하여 변방의 금령(禁令)을 엄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혹 농사를 짓기 위하여 국경을 넘어갔거나 삯일을 하기 위하여 몰래 넘어간 것은 그 정상을 따져보면 참으로 불쌍하고 가긍하니 모두 다 엄하게 형장을 쳐서 멀고 험악한 곳으로 귀양 보내도록 도신(道臣)에게 분부하고 이어서 이런 내용으로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자문(咨文)을 짓게 하여 들여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남정철(南廷哲)의 장계(狀啓)를 보니, ‘본 도의 승보(陞補)들 가운데 산군(山郡)의 네 읍(邑)은 길이 멀어서 과거에 응시하러 가기 곤란하니 강변 고을의 예대로 두 자리를 중산(中山)의 네 읍에 창설(創設)해 주고, 이 네 읍 중에 품계가 높은 문관(文官)이나 음관(蔭官) 수령(守令)이 다스리는 읍은 윤번(輪番)으로 시취(試取)하게 하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중산의 네 읍은 길이 이미 멀어서 가서 응시하기가 필시 곤란할 것이니 특별히 두 자리를 마련하여 품계가 높은 수령이 윤번으로 시취하라는 뜻으로 해조(該曹)와 해도(該道)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또 평안 감사 남정철의 장계를 보니, ‘전선(電線)을 설치하는 공사 비용으로 각종 공화(公貨)를 취해서 썼는데 전무 대원(電務大員)이 산정(刪正)한 것이 3만여 냥이고, 본영(本營)과 벌목하는 여러 곳에서 소비한 것도 3만 냥을 밑돌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다 기한 안에 상납하고 시급히 지방(支放)에 쓰일 비용이니 지금 조치하여 떼어 주어야 말썽이 일어나는 것을 면할 수 있습니다. 순병(巡兵)과 변병(弁兵)의 녹봉(祿俸)과 공사비용을 대신 충당할 방도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전선을 늘리는 것은 큰 공사이니 비용도 그에 따라서 많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유독 본 도(道)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경기(京畿)와 황해(黃海) 두 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지금 축적되어 있던 것이 도처에서 바닥이 난 것은 변방을 다스리는 신하가 스스로 자세히 알고 있는 만큼 감영(監營)과 고을에서 좋은 쪽으로 대책을 강구해서 충당하여 갖추라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병식(趙秉式)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조동면(趙東冕)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삼았다.

 

11월 20일 갑인

빈청(賓廳)에서,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 가상(加上)할 존호(尊號)의 안(案)을 ‘흠륜(欽倫)’으로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서 친히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께 가상(加上)해 올린 존호 의호 단자(尊號議號單子)를 받고 이어서 친히 전문(箋文)을 올렸다. 왕세자(王世子)가 배참(陪參)하였다.

 

11월 21일 을묘

가상존호 도감(加上尊號都監)에서 아뢰기를,
"옥책문 제술관(玉冊文製述官)에 김상현(金尙鉉), 서사관(書寫官)에 이재완(李載完),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에 이원명(李源命), 옥보 전문 서사관(玉寶箋文書寫官)에 김홍집(金弘集)을 차하(差下)하였습니다."
하였다.

 

11월 22일 병진

친군 좌영(親軍左營), 친군 우영(親軍右營), 친군 전영(親軍前營), 친군 후영(親軍後營)과 서영(西營) 기보 중영(畿輔中營) 병졸들을 훈련하였을 때의 장관(將官) 이하의 사람들에 대하여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병방(兵房)인 이규안(李奎顔)·백남익(白南益)·조희승(趙羲升)·이원희(李源憙), 영장(領將) 박희방(朴熙房), 군사마(軍司馬) 김천수(金天洙)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친군 우영(親軍右營), 별초 신영(別抄新營)과 관왕묘(關王廟)의 공사를 끝내는 것을 감독한 우영사(右營使) 이하에 대하여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남일우(南一祐)가, ‘진해 현감(鎭海縣監) 장용환(張龍煥)이 감영(監營)에 왔다가 임소로 돌아가는 길에 영산(靈山)에 이르러 갑자기 화적(火賊)을 만나 인장과 병부(兵符)를 빼앗겼으니 우선 파면시켜 내쫓고 그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며, 영산 현감(靈山縣監) 윤성구(尹成求)는 그가 관할하는 경내에서 적도(賊徒)가 변란을 일으켰으니 마땅히 죄를 논하여 경계시켜야 할 것이나 어떤 일로 인하여 이미 파면하여 내쫓았으므로 해당 현(縣)의 우두머리 아전(衙前)과 향임(鄕任)을 중한 죄로 다스릴 것입니다. 신이 관할하는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도적질을 금지시키지 못하였으니 황공하여 처분을 기다립니다.’ 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런 경우를 안 일어나는 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다. 각 고을과 진영(鎭營)에 엄하게 신칙하여 기한을 정해서 수색하여 체포하고 인장과 병부를 찾도록 하라. 두 읍의 수령(守令)들은 비록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으나 일이 뜻밖에 일어났으니 정상으로 보아 혹 용서할 만도 하다.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곧 의정부(議政府)에서 복계(覆啓)한 것으로 인하여 전교하기를,
"두 수령을 특별히 용서하여 주되 우선은 죄를 진 채로 직무를 수행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23일 정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죽산부(竹山府)에서 세운 주필헌(駐蹕軒)을 수개(修改)한 감독(監督) 관리 이하들을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서상조(徐相祖)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11월 25일 기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 도사(前道事) 최성환(崔瑆煥)이 상소하여 시무(時務)를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가지 폐단에 대하여 조목별로 진술하고 바로잡을 것을 아뢰었는데 자못 취할 만한 것이 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26일 경신

전교하기를,
"도적을 없애는 일로 전후하여 신칙한 것이 준절하고 엄하였을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근래 또 서울과 지방에서 도적질이 공공연히 횡행하여 마을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길을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막혔으며 해괴하고 고약한 일이 곳곳에서 일어나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데 체포하여 소멸하였다는 보고가 전혀 없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조정의 명령을 가볍게 여겨 애당초 두려워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꺼리는 것이 있어서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것인가? 법과 기강으로 헤아려볼 때 참으로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또 이것은 캄캄한 밤에 담을 뚫거나 넘어가서 도적질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대낮에 약탈하는 것이니 소굴과 종적을 필경 귀로 듣고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들추어내어 고발하기를 두려워하고 아전(衙前)들은 태연하게 보통일처럼 여겨 점점 제 마음대로 날뛰게 만들었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다만 도적을 잡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한테만 미룰 수 없으니 감영(監營), 병영(兵營), 고을, 진영(鎭營)을 막론하고 각기 힘을 내고 법을 써서 그 도당을 섬멸하도록 하라. 만약에 혹 이전처럼 장난질하거나 마을과 점사(店舍)에 숨겨두고 비호하면서 즉시 고발하지 않는 자는 불고율(不告律)로 처결하라. 사건이 경내에서 벌어졌는데도 어리석게 태연히 팔짱만 끼고 앉아서 구경만 한다면 이와 같이 하고서 장차 어떻게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해읍(該邑) 수령(守令)을 즉시 아뢰어 파면시키고 이어서 잡아다가 조처하며 도신(道臣)과 수신(帥臣)도 모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 또한 마땅히 엄하게 논하여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시 이러한 내용으로 묘당(廟堂)에서 특별히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조처하여 신칙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백성들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전적으로 수령이 잘하고 못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잘못하는 자는 벼슬을 떼고 잘하는 자는 벼슬을 올려주는 것이 도신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지금 흉년으로 근심이 크고 도적질이 많아서 안타깝기 그지없으니 한밤중에 잠자리에 들어도 어찌 편하겠는가? 위로하고 돌봐주는 방도와 정탐하여 없앨 수 있는 계책을 세우고 과연 모두가 마음을 다하여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가? 만약 혹 어리석어서 살피지 못하고 탐관오리(貪官汚吏)가 하는 짓만을 일삼는다면 불쌍한 저 백성들이 더욱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안렴(按廉)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마땅히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매번 전최(殿最)한 것을 보면 곧 형식만 구비하는 것과 같아서 구역질이 나는 것을 면할 수 없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의 뜻을 받들고 밝히는 의리이겠는가? 이에 또 유시하니, 각기 두려워하고 조심하면서 사실대로 논평하여 백성들을 위해서 애쓰는 나의 마음을 저버리지 말도록 묘당에서 미리 해당 각 도(道)에 조처하여 신칙하라."
하였다.

 

11월 27일 신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도적을 없애는 일을 막 신칙하였지만 서울에 도적이 나타나는 것이 이처럼 낭자(狼藉)한데 법사(法司)와 포도청(捕盜廳)만은 유독 듣지 못하였는가? 진실로 규정을 세우고 정탐하여 체포하려고 했다면 어찌 방도가 없겠는가?
그리고 각 부(部)에서 특별히 조목을 만들어 엄하게 단속하여 마을에서 경계할 일이 없고 고약한 무리들이 자취를 감추게 하는 것이 당장 급한 일이다. 내무 당상(內務堂上)이 경조 당상(京兆堂上)으로 하여금 총리대신(總理大臣)에게 가서 방략과 규정을 충분히 토의하고 확정해서 절목을 만들어 들여보내도록 하라. 이것은 마땅히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없으니 똑같이 각 도(道)에 반포해서 잘 지키고 위반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작년의 변란 때에 각 영사(營使)들이 패용하는 호부(虎符)와 전령패(傳令牌)가 많이 손상되었으니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만들어서 패초(牌招)하여 전하게 하라."
하였다.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한번 대통력(大統曆)을 시헌력(時憲曆)으로 변경시킨 뒤에 낡은 대통구력(大統舊曆)을 반포하여 쓰지 않지만 그 법은 아직도 남아 있어서 추산하여 역서(曆書)를 만들어서 매년 동지(冬至)에 한 본(本)을 필사하여 시헌력과 함께 진상하였습니다. 이번 병술년(1886) 대통력(大統曆)에는 입춘(立春)이 바로 정월 초사흘로 되었는데 역서 주석(曆書註釋)에는 초이틀로 잘못 쓰여 있습니다. 역서(曆書)를 맡은 관리가 제대로 추산하지 못하여 이렇게 착오를 냈으니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대통력은 이제 고쳐서 들여보낼 것이지만 해당 관리는 유사(攸司)로 하여금 엄하게 죄를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8일 임술

윤자승(尹滋承)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민정식(閔正植)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11월 29일 계해

한광수(韓光洙)를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삼았다.

 

11월 30일 갑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윤영신(尹榮信)의 장계(狀啓)를 보니, ‘옥구(沃構) 뒷바다에서 파선(破船)된 배의 김해부(金海府)의 조세와 대동미(大同米)를 도둑질하고 농간질한 사공들을 엄하게 신문하여 공술을 받았습니다. 이들에게 만약 극률(極律)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을 면려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해당 사공(沙工) 최군약(崔君若)을 법조문에 따라 처결하는 문제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원래 사공(沙工)인 최주학(崔周鶴)은 막중한 조세를 전부 중간에서 조종하였으므로 마땅히 먼저 주벌을 시행해야 하나 이미 해부(該府)에서 멋대로 도망쳐 지금 영남 감영(嶺南監營)에 공문을 띄워 체포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사공들이 잘못을 저질러 관청 곡식을 축낸 것이 이미 아주 놀라운 일이고 일찍이 배에 실었던 변질된 쌀을 가지고 농간을 부린 정상이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었던 일은 없었습니다. 돈과 쌀을 막론하고 애초에 조종을 한 자는 바로 최주학이고 남의 이름을 빌어서 대신 배를 타고 낭자하게 도적질하고 농간을 부린 것은 바로 최군약입니다. 그 범한 죄상을 따진다면 최주학이 괴수가 되니 최주학을 체포하기 전에 최군약을 갑자기 사형(死刑)에 처하는 것은 아마도 자세히 실상을 조사하는 뜻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니 도망중에 있는 놈을 기일을 정하여 체포해다가 사실에 따라 대질시킨 뒤에 법조문에 따라 처리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석여(曺錫輿)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강윤(姜潤)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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