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3권, 고종23년 1886년 1월

싸라리리 2025. 1. 20.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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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을미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23권】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대왕대비(大王大妃)에게 축하드리는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를 올렸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80살이 되는 것과 관련하여 축하하였다. 이어서 축하를 받고 대사령을 반포했는데, 교서(敎書)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왕대비께서 큰 경사를 맞이해 해주(海籌)를 더해 올해 80살이 되시니, 지함(芝函)으로 송축함에 정월 초하루에 산호(山呼)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어찌 팔도(八道)에 알려 모든 백성들에게 두루 은덕을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효유 헌성 선경 정인 자혜 홍덕 순화 문광 원성 숙렬 명수 협천 융목 수녕 희강 현정 휘안 대왕대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大王大妃) 전하는 왕비로서의 덕과 천품을 지니셨다. 성녀(聖女)로서 성인의 배필이 되시어 가만히 우리 영고(寧考:익종(翼宗))를 도와 대리청정하셨으며, 순원 황후(純元王后)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마치 태사(太姒)가 태임(太任)의 뒤를 이은 것처럼 하셨으니, 나라가 이에 힘입어 4년간 지존의 위엄이 높아질 수 있었고 역사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 공로로 백성들은 크게 보호해 주는 교화를 입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렵게 이룩한 큰 위업을 이어받아 초기부터 비호해 주시는 은덕을 받았다. 보살펴 주고 사랑해 주는 어진 마음으로 추울세라 더울세라 건강을 돌봐주셨으며, 또한 옳게 가르쳐 주는 도리로 매번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받는 기쁨을 누리셨다. 세자(世子)는 사중(四重)의 기쁨을 받았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대비께 이미 천승(千乘)의 봉양을 다하였으나 나는 아직도 장차 그 덕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세월은 바야흐로 정월 초하루가 되어 대비의 보령이 80살이 되시니, 실로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장구히 대운수가 펴지는 것으로 마치 반달이 만월이 되고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끊임없다. 우리 혜경궁(惠慶宮)의 계유년(1813) 때의 성대한 의식에 부합되는데, 왕실 계보〔玉牒〕를 상고해보면 경사로운 술년(戌年)이 올해이며 옛날 영조(英祖) 때의 임진년(1772) 옛 예식을 생각하게 되는데, 대왕대비의 궁전을 쳐다보면 효자는 날이 가는 것을 아까워하게 된다. 이것은 실로 억만년 끝없는 경사이고 또한 구오(九五)의 수복(壽福)을 누리는 시기이다. 그래서 구구한 생각이 끝이 없는데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 두렵다. 천년의 봄과 천년의 가을토록 만수하시기를 축원하게 된다. 오늘의 아름다운 경사에 이르러 천명을 받게 된 것은 실상 하늘이 보존해 준 덕으로서 우리 집안에도 예가 있으므로 응당 왕후가 거처하는 흔정(昕庭)에서 큰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겸손하신 대왕대비의 뜻에 순종해 비록 풍정 연회(豐呈宴會)는 뒤로 미루었지만 좋은 경사가 삼양(三陽)이 회복되는 세수(歲首)에 있는데 어떻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천고에 없는 훌륭한 의식으로 백성들과 더불어 경축하고자 생각한다.  한(漢)나라에서 너그러운 명령을 내리니 초목도 모두 기뻐했으며 주(周)나라에서 큰 복을 내려주니 소나무, 잣나무도 무성하게 되었다. 천지와 같은 큰 은덕을 베풀어 모든 죄를 말끔히 씻어 주고 풀어 주도록 할 것이니, 이달 1일 새벽 이전에 범한 각종 죄 가운데서 사형죄 이하는 모두 용서해 주도록 하라. 아! 대비께 큰 복을 받아 그런 복록과 명예를 얻었으니, 자손에게 계책을 남겨주시어 더욱 융성하게 하셨다. 멀리 남산과 북두칠성에 축원해 온 나라를 즐겁게 오래 사는 지역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교시하는 것이니 다들 잘 알았으리라 여긴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윤자승(尹滋承)이 지은 것이다.】


【원본】 27책 2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2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인물(人物) /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종친(宗親)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대왕대비(大王大妃)에게 축하드리는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를 올렸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80살이 되는 것과 관련하여 축하하였다. 이어서 축하를 받고 대사령을 반포했는데, 교서(敎書)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왕대비께서 큰 경사를 맞이해 해주(海籌)를 더해 올해 80살이 되시니, 지함(芝函)으로 송축함에 정월 초하루에 산호(山呼)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어찌 팔도(八道)에 알려 모든 백성들에게 두루 은덕을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효유 헌성 선경 정인 자혜 홍덕 순화 문광 원성 숙렬 명수 협천 융목 수녕 희강 현정 휘안 대왕대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大王大妃) 전하는 왕비로서의 덕과 천품을 지니셨다. 성녀(聖女)로서 성인의 배필이 되시어 가만히 우리 영고(寧考:익종(翼宗))를 도와 대리청정하셨으며, 순원 황후(純元王后)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마치 태사(太姒)가 태임(太任)의 뒤를 이은 것처럼 하셨으니, 나라가 이에 힘입어 4년간 지존의 위엄이 높아질 수 있었고 역사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 공로로 백성들은 크게 보호해 주는 교화를 입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렵게 이룩한 큰 위업을 이어받아 초기부터 비호해 주시는 은덕을 받았다. 보살펴 주고 사랑해 주는 어진 마음으로 추울세라 더울세라 건강을 돌봐주셨으며, 또한 옳게 가르쳐 주는 도리로 매번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받는 기쁨을 누리셨다.
세자(世子)는 사중(四重)의 기쁨을 받았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대비께 이미 천승(千乘)의 봉양을 다하였으나 나는 아직도 장차 그 덕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세월은 바야흐로 정월 초하루가 되어 대비의 보령이 80살이 되시니, 실로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장구히 대운수가 펴지는 것으로 마치 반달이 만월이 되고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끊임없다.
우리 혜경궁(惠慶宮)의 계유년(1813) 때의 성대한 의식에 부합되는데, 왕실 계보〔玉牒〕를 상고해보면 경사로운 술년(戌年)이 올해이며 옛날 영조(英祖) 때의 임진년(1772) 옛 예식을 생각하게 되는데, 대왕대비의 궁전을 쳐다보면 효자는 날이 가는 것을 아까워하게 된다. 이것은 실로 억만년 끝없는 경사이고 또한 구오(九五)의 수복(壽福)을 누리는 시기이다. 그래서 구구한 생각이 끝이 없는데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 두렵다. 천년의 봄과 천년의 가을토록 만수하시기를 축원하게 된다.
오늘의 아름다운 경사에 이르러 천명을 받게 된 것은 실상 하늘이 보존해 준 덕으로서 우리 집안에도 예가 있으므로 응당 왕후가 거처하는 흔정(昕庭)에서 큰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겸손하신 대왕대비의 뜻에 순종해 비록 풍정 연회(豐呈宴會)는 뒤로 미루었지만 좋은 경사가 삼양(三陽)이 회복되는 세수(歲首)에 있는데 어떻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천고에 없는 훌륭한 의식으로 백성들과 더불어 경축하고자 생각한다.
한(漢)나라에서 너그러운 명령을 내리니 초목도 모두 기뻐했으며 주(周)나라에서 큰 복을 내려주니 소나무, 잣나무도 무성하게 되었다. 천지와 같은 큰 은덕을 베풀어 모든 죄를 말끔히 씻어 주고 풀어 주도록 할 것이니, 이달 1일 새벽 이전에 범한 각종 죄 가운데서 사형죄 이하는 모두 용서해 주도록 하라.
아! 대비께 큰 복을 받아 그런 복록과 명예를 얻었으니, 자손에게 계책을 남겨주시어 더욱 융성하게 하셨다. 멀리 남산과 북두칠성에 축원해 온 나라를 즐겁게 오래 사는 지역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교시하는 것이니 다들 잘 알았으리라 여긴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윤자승(尹滋承)이 지은 것이다.】


【원본】 27책 2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2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인물(人物) /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종친(宗親)

 

전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정월 초하루이다. 도승지(都承旨)에게 운현궁(雲峴宮)에 나아가 문안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노인들에게 의복감과 음식물을 내렸다.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내렸다.

 

경범 죄인들을 방송하였다.

 

1월 2일 병신

조경묘(肇慶廟)와 경기전(慶基殿)을 수개(修改)하였을 때의 지방관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전교하기를,
"내수사(內需司)와 각 궁방(宮房), 각사(各司) 노비의 공물을 없애고 노비안(奴婢案)을 불태워버린 것은 바로 우리 순조(純祖) 임금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봐준 성대한 덕(德)과 지극한 인(仁)이었다. 그러니 누군들 그 큰 은혜에 감격하지 않았겠는가? 나도 늘 칭송하면서 그 위업을 잘 이어가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개인집을 놓고 말하면 한번 노비의 명색을 지니게 되면 종신토록 복종해 섬기게 되며, 대대로 그 역(役)을 지면서 명색을 고치지 못하기까지 하는데, 이것은 어진 정사에 흠이 될 뿐 아니라 또한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한 하나의 조건이 된다. 명분은 원래 엄한 법이 있으므로 사역(使役)은 단지 당사자 한 몸에만 그쳐야 하고 대대로 복역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한성부(漢城府)의 당상(堂上官)이 총리대신(總理大臣)과 토의해 절목을 만들어 온 나라에 반포해서 상서로운 화기를 맞이하게 하라."
하였다.

 

응자(應資)할 노인들을 하비(下批)하였다. 100살이 된 사람은 지상범(池象範) 등 4인이다.

 

1월 7일 신축

전교하기를,
"나이가 7, 80에 이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니, 노인들을 우대하는 도리로 응당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다. 상호군(上護軍) 허전(許傳)에게 특별히 정1품(正一品)을 주고 호군(護軍) 조재순(趙在淳)에게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제수하라."
하였다.

 

1월 8일 임인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친히 대왕대비(大王大妃)에게 책보(冊寶), 치사 전문(致詞箋文), 표리(表裏)를 올린 다음 축하를 받고 대사령을 반포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교서(敎書)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라의 운수가 영원히 공고하여 억만년 무궁할 경사가 오늘날에 찾아와 대왕대비의 17책의 존호 위에 다시 1책을 더 놓게 되었다. 이에 대왕대비의 만수를 축원해 특별히 대사령을 내리는 바이다.
생각하건대 효유 헌성 선경 정인 자혜 홍덕 순화 문광 원성 숙렬 명수 협천 융목 수녕 희강 현정 휘안 대왕대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大王大妃) 전하는 가장 크고 높은 공덕으로 여자 가운데의 당(唐) 요(堯)와 우(禹) 순(舜)이라 하겠다. 곤원(坤元)으로서 위대한 건원(乾元)에 짝하시어 영고(寧考:익종(翼宗))를 크게 도왔으며, 어머니의 도리에다 엄한 군도(君道)를 갖추고 어린 나를 도와 모범을 보여주셨다.
마황후(馬皇后)가 굵고 거친 명주옷을 입는 것에서 검소한 덕을 밝혀 탁룡문(濯龍門)의 의규(懿規)를 잘 드러냈던 것처럼 하셨고, 〖송(宋) 나라 철종(哲宗)의 모후(母后)인〗 선인황후(宣仁皇后)가 발을 드리우고 교화를 펴서 마침내 〖수렴청정을 그만두고 정사를 철종에게 돌려준〗 의란사(儀鸞司)의 구전(舊典)이 있었던 것처럼 하셨다. 어진 마음을 미루어 화락한 혜택을 입혀 만백성들이 높이 추대할 것을 원했으니, 여사(女史)를 늘어놓고 옛날의 행실도(行實圖)를 살펴보아도 백 대에 그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늘이 반드시 보답하는 이치로 길이 장수하는 복을 누리게 한 것이다.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밑에 내린 상서로운 일에 부합되니 훌륭한 터전에 경사가 생기고, 옛날에 장수한 훌륭한 이들보다 더 뛰어나니 더더욱 오래 사시기를 축원하게 된다. 남극성의 상서로운 빛이 길이 남아 있어 나이가 점점 더 높아가는데도 대비는 청춘으로 늙지 않고 더욱 건강하시다.
아! 공자(孔子)께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라고 한 70살 나이에다 또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꿈에 문왕(文王)에게서 받았다는 9세의 나이를 보태었다. 올해에 보령이 바로 79살이 되어 100살을 사는 경사가 이르게 되었으니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겸손하게 사양하시는 대비의 마음에 순종해 풍정 연회(豐呈宴會)는 오는 가을로 연기하기로 했지만 축하하고 싶은 마음을 조금 풀기 위해 축하하는 의식을 설날에 먼저 진행하였다. 그리고 길하다고 잡힌 8일에 두 자의 존호(尊號)를 올리게 되었다. 그 덕은 해와 같고 하늘과 같아서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고, 금과 같고 옥과 같아서 옥검(玉檢)과 금니(金泥)에 물채(物采)를 갖추어 자세히 기록하여 넣었다. 그래서 이에 이해 정월 8일에 삼가 책보를 받들어 ‘흠륜(欽倫)’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이는 정성을 다하고 공경을 쌓는 수양 중에서 나온 것으로서 《서경(書經)》 〈요전(堯典)〉의 제일 앞에 실려 있으니, 비유하면 방원(方圓)이 규구(規矩)로 인해 제대로 그려지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윤리가 이로부터 닦아지게 되었다.
생각하건대 큰 덕은 반드시 알맞은 명예를 얻기 마련이니, 이것은 또한 우리 집안에 원래부터 있었던 제도이다. 예는 존호로 밝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훌륭한 덕이 이미 드러나게 되었으며, 효성에서는 부모의 나이를 아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기쁨과 두려움이 더욱 커진다. 늙도록 장수하는 것은 하늘의 복을 받은 것이니 온 방안의 정성스러운 마음은 단지 오늘과 같은 기쁨만이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이에 종묘(宗廟)에 제사지내며 사유를 고하고 흔정(昕庭)에 나아가 윤음을 반포하는 바이다. 함께 복을 받고 혜택을 널리 베풀어야 능히 하늘이 복을 내려 주는 것이니, 은덕을 넓히고 혜택을 갚게 해 나 한 사람의 경사로 인해 백성들이 혜택을 입게 해야 할 것이다. 이달 8일 새벽 이전에 범한 각종 범죄 가운데서 사형 이하는 모두 다 용서해 주도록 하라.
아! 훌륭한 세상이 다시 일어나고 장수를 상징하는 산가지가 열 칸 집안에 가득하며, 동쪽에 있는 청양궁(靑陽宮)에서 화창한 봄날의 은택을 크게 펼쳤도다. 만물이 빛을 뿌리고 채색 구름이 높이 떠있는데 하늘의 복을 받고 사방에서 찾아와 축하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교시하는 것이니 잘 알았으리라 여긴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윤자승(尹滋承)이 지은 것이다.】


【원본】 27책 23권 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2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 풍속-연회(宴會) /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종친(宗親)

 

친히 치사 전문(致詞箋文)과 표리(表裏)를 올릴 때, 진하(陳賀)할 때 책보(冊寶)를 올릴 때, 진하할 때 두 차례 대청에 앉아 축하를 받을 때 참가한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와 상호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 이하들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김종한(金宗漢), 대거 승지(對擧承旨) 박봉빈(朴鳳彬), 선교관(宣敎官) 송도순(宋道淳), 예모관(禮貌官)인 보덕(輔德) 오준영(吳俊泳), 대거 겸 보덕(對擧兼輔德) 서정순(徐正淳), 좌통례(左通禮) 홍병일(洪炳一), 우통례(右通禮) 박규찬(朴奎燦), 상례(相禮) 민경호(閔京鎬), 도청(都廳) 김종규(金宗圭)와 정인흥(鄭寅興)을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나이가 80세가 된 것을 축하하는 경과(慶科)를 이번 정시(庭試)와 합시(合試)하도록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1월 9일 계묘

오준영(吳俊泳)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홍우길(洪祐吉)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정하원(鄭夏源)을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으로, 민병숙(閔丙肅)을 겸 필선(兼弼善)으로, 신태희(申泰熙)를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특별히 서증보(徐曾輔)를 발탁해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홍병희(洪秉僖)를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삼았다.

 

1월 10일 갑진

봉조하(奉朝賀) 김병국(金炳國)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병 때문에 어쩌지 못하다가 마침내 사임시켜 줄 것을 청원했는데 어진 은덕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러러 성상의 어진 은덕에 감사하여 속히 사례해야 할 것인데 앓아누워 몸을 운신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들것을 타고 갈 수도 없어서 송구한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난 달에 신의 아들 정규(貞圭)를 들어오게 해 신의 병세를 하문하셨으며, 특별히 궤장(机杖)을 하사했을 뿐 아니라 또다시 간곡하게 명령까지 했습니다.
신의 아들이 물러 나와서 명령을 전함에 신은 침상에 누워 있다가 부축을 받아 일어나서 명령을 받았는데 저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려 얼굴을 적시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신의 환갑날에는 특별히 내탕고(內帑庫)에 보관했던 것을 보내 주었으며 우리 동궁 저하(東宮邸下)도 세자궁(世子宮)의 관리를 보내 위문하고 특별히 선물을 주었습니다.
신과 같이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런 기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고금(古今)을 통해 두루 살펴보아도 신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온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 모여 앉아 칭송하였습니다. 물건을 받았을 때 가서 은덕에 대해 사례하는 것은 예의상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왕실에서 드물게 있는 경사를 만났으니, 응당 축하 조회의 반열에 참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어 마치 나무로 만든 사람처럼 아무 것도 몰랐으니 신하로서의 본분이 땅에 떨어져 신의 마음은 더욱 황송하기만 합니다.
아! 신은 지금 벼슬에서 물러났습니다. 물러나서도 임금을 근심한 사람으로는 송(宋)나라의 범 문정공(范文正公 : 范仲淹)이 있습니다. 신이 설사 감히 망녕되이 의견을 내놓지는 못하지만 성의만은 어쩔 수가 없어서 이에 속마음을 글로 써서 바치니 외람되지만 보아줄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이 변변치 못하다고 말까지 막아버리는 일이 없었으면 다행하겠습니다.
임금의 한 몸은 위로는 종묘(宗廟) 사직(社稷)의 무거운 책임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여망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몸조리를 하고 보양하는 것을 잠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는 것을 제때에 하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더욱 유익하기 때문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 잠자리에 들라는 옛사람의 좋은 훈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대개 밤에 자지 못하면 낮에 반드시 자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원기와 피가 자연히 마르고 흐려지기 때문에 하루의 휴식은 밤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역(周易)》에 ‘해가 질 때 휴식한다.’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반드시 조회가 늦어져 복잡한 정사가 지체되어 여러 일이 잘못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의 일은 아침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상서(尙書)》에는 ‘새벽에 크게 덕을 밝히셨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전하의 총명과 예지로 어찌 이것을 생각지 않으시겠습니까만 학문을 하심에 있어서 충분한 경지를 이루지 못했다 하여 혹 몸조리를 하고 보양하는 방도를 소홀히 할까 걱정됩니다.
상고해보면 우리 세종(世宗)께서 다스리던 훌륭한 때에는 하루에 세 번 강론하는 외에 또 야대(夜對)를 많이 하셨고 선조(宣祖) 때는 설사 전란이 일어난 때라고 하더라도 자주 경연(經筵)에 임하셨으며 영조(英祖) 때는 80세의 노령으로 오히려 강론을 그만두지 않으셨습니다. 또 그전에 정조 대왕(正祖大王)은 대체로 모든 생명의 근원과 나라를 다스리는 묘술을 학문에서 얻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모두 전하의 가풍으로서 지키고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나이 어릴 때부터 경서(經書)를 많이 읽어서 빛나는 경지에 이른 만큼 물론 더 권할 것이 없지만, 이미 안 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아는 데에는 날마다 접견하는 계책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세자(世子)는 영명하고 슬기로운 자질로 지식과 사려가 일찍 성취되어 학문이 날로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지금 감화시키고 본받게 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 전하께서 모범을 보여 몸소 가르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한번 자고 일어나며 몸조리를 하고 보호하는 것과 같은 것도 우리 전하께서 솔선하시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와 백성들의 곤란한 형편을 볼 때 급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근심되는 만 가지의 일 가운데서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성인들의 글을 강론하고 성인들의 도를 배우는 데 달려 있는 만큼 전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병중에 하는 신의 말이 허술히 하는 말에 가깝고 가려서 할 줄을 모르다보니 더욱 황송하기만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치사(致仕)한 뒤로 조야(朝野)의 서운함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나의 마음이 섭섭한 것으로 볼 때 경이 나를 그리워하는 그 정성을 알겠다. 올린 글을 읽어 보니, 전편에 진술하고 권고한 것이 마음속 깊은 데서 우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볼 수 있으니 실상 감탄할 만하다. 그러니 감히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경에게 권고하는 것은 봄 날씨가 점차 화창해지는데 더욱 몸조리를 잘해 빨리 회복해서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는 것이다."
하였다.

 

1월 11일 을사

박용대(朴容大)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조익영(趙翼永)을 참의(參議)로 삼았다.

 

1월 13일 정미

민응식(閔應植)을 시강원 우부빈객(侍講院右副賓客)으로, 허전(許傳)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재완(李載完)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정이섭(丁理燮)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정이섭(丁理燮)은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1월 14일 무신

전교하기를,
"경우궁(景祐宮)의 신주를 이안(移安)할 때와 성일헌(誠一軒)의 어진(御眞)을 이안할 때에 도승지(都承旨) 윤용구(尹用求)가 봉심(奉審)하고 올 것이며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과 호조 판서(戶曹判書) 심이택(沈履澤)도 함께 가서 살펴보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5일 기유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작년에 각 도의 농사 형편이 일정하지 않아 경기(京畿)는 재해로 조세를 면제한 것〔給災〕이 3,600결(結)이고, 영남(嶺南)은 자그마치 1만 800결이나 됩니다. 이전 총량을 참고해서 비율을 낮춘 전례도 있으니 올해에도 두 도의 감영(監營)과 고을에서 쓰는 비용의 각종 가격을 근래의 규례대로 비율을 낮추어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16일 경술

조재순(趙在淳)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조강하(趙康夏)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윤자덕(尹滋悳)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민응식(閔應植)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민경호(閔京鎬)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덕(金炳德)이 상소하여 휴치(休致)시켜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호군(護軍) 이돈하(李敦夏)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임금이 정사를 잘하는 요령은 당(唐) 요(堯)와 우(禹) 순(舜)을 본받는 것에 불과하며, 요 순을 본받는 방도는 바로 선대 임금들을 본받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전하께서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는 선대 임금들을 제외하고 누가 있겠습니까?
다스리는 방도에는 여덟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임금의 학문을 밝히는 것, 세자(世子)를 가르치는 것, 인재를 등용하는 것, 정령(政令)을 세우는 것, 유학(儒學)의 교화(敎化)를 장려하는 것, 곤궁한 백성들을 돌봐주는 것, 군사에 관한 일을 잘 정비하는 것, 검약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임금의 학문을 밝힌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우리 태종 대왕(太宗大王)은 늘 시독관(侍讀官)에게 ‘정(精)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도를 취하라.’라고 했으니, 제왕의 학문이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임금이란 만백성의 위에 군림해 깊은 대궐 안에 거처하고 있으므로 마음의 자그마한 싹을 외부에서 알 수 없지만, 만약에 외부에 나타나는 경우에는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 시종 태만하지 마소서.
세자를 가르친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은 늘 세자궁(世子宮)의 관리들에게 ‘내가 평소에 감히 과오를 범하지 않는 것은 세자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전하의 일거일동, 말과 행동을 세자가 본받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우(夏禹)가 스스로 만족하거나 높이지 않고 위(衛)의 무공(武公)이 나이 90살에 자신을 경계하는 시를 지어 외운 것은 실상 전하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바입니다. 바라건대 더욱 경계하고 가다듬어 세자궁의 관리를 신중하게 선발하소서.
인재를 등용한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우리 세종 대왕은 우리나라의 훌륭한 임금입니다. 그 인재를 등용한 규례를 보면 오직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이면 그 계급을 따지지 않았으며, 일단 임용하여서는 전적으로 맡겨 하루아침에 발탁하고 품계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전하는 명철한 예지를 지니고 계시며 임어(臨御)하신 지도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니 만약에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을 일정하게 하지 않아서 관직 자리가 날로 천해지거나,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아서 인재가 날로 없어지게 되면,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는 전하의 마음이 혹 바름을 얻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전하께서는 관직을 위해서 인재를 선발하는 원칙에 유의해 의견이 같거나 다른 것으로 쓰고 버리거나,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으로 등용하고 해임하는 일을 하지 말며, 오직 인재만을 천거하고 어진 사람만을 등용하소서. 이렇게 하고도 참다운 인재가 나오지 않고 관방(官方)이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면 신은 믿지 못하겠습니다.
정령을 세운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일찍이 기강이 진작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한탄하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나라에 있어서 기강은 몸 안에 있는 호연한 기운과 같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만 가지 일의 근원은 모두 전하의 공정한 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의리로 키우고 씩씩하고 공경스러움으로 견지해 정령 하나하나를 시행하되 법도에 적중하도록 철저히 살펴야 합니다.
유학의 교화를 장려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이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가 유신(儒臣)들을 접견하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과 같은 이는 포의(布衣)의 선비로 출신하여 경연에 참가해 임금을 도왔고 선류(善類)를 이끌어 나오게 해서 조정(朝廷)의 반열에 배치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500년간 지탱하고 유지해 온 것인데 오늘에 와서 점점 명절(名節)이 없어지고 원기가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문교(文敎)만을 전적으로 숭상하며 바른 것을 보위하고 간사한 것을 배척해야 할 것입니다.
곤궁한 백성들을 돌봐준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우리 영조 대왕(英祖大王)이 세손(世孫)에게 하교하기를,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부유하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무익한 일로 백성들의 농사철을 빼앗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생각하건대 지금 형편은 마치 오랫동안 병으로 쇠약해진 사람과 같은 만큼 다시 상하게 하면 원기가 필경 소진되고 말 것입니다. 바라건대 먼저 은전을 베풀어 백성들을 양육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데 힘쓰소서.
군사에 관한 일을 잘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우리나라의 군사제도는 효종(孝宗) 때에 이르러 조금 면모를 갖추게 되었는데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기강이 해이해져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래 삼군(三軍)을 혁파하고 오영(五營)을 세웠으나 그래도 아직 법도에 적중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신설된 병정들이 정예한 것 같기는 하지만 오합지졸과 다름없어 얼굴은 창백하고 허리는 가늘며 의복과 버선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모양을 내는 것이 마치 기생집에 드나드는 난봉꾼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나라의 대군(大軍)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군사를 바로잡는 자는 체계를 세우고 근본을 튼튼하게 하며 후하고 박한 차별을 두지 말아야 하며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산과 강이 견고하고 무술에 능한 인재가 많으니 만약에 천성을 살리고 무예를 배양한다면 한마음으로 호응해 세상에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빨리 군사를 정비하고 군사들의 마음을 얻기에 힘써서 안팎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검약하는 것을 숭상한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우리 익종 대왕(翼宗大王)께서는 일찍이 자신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백성은 바로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한 알의 쌀, 한 올의 실인들 백성이 아니라면 어디서 생기겠는가?’라고 했으며, 집에 ‘근본에 힘쓴다〔務本〕’는 현판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정심실(靜心室)을 한가할 때 책을 읽는 장소로 삼았는데 규모가 겨우 5칸이고 입는 옷은 언제나 명주 등속이었으며 윗옷이 아니고는 비단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아! 임금의 한 마음은 만 가지를 교화시키는 근본이며 정사는 옛것을 본받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일은 사실에 힘쓰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신은 감히 특이한 계책을 새로 만들어 자랑하지 않고 바로 옛날의 훈계를 모아 거울로 삼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는 옛날의 정사를 따라서 유신(維新)하는 운수를 다시 열고 선대 임금들의 위업을 잘 이어나갈 것을 깊이 명심해 후대에 물려줄 것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옛것을 끌어다가 오늘날을 증명했는데, 진술한 것에 절실한 것이 많다. 유의하겠다."
하였다.

 

직강(直講) 박기종(朴淇鍾)이 상소를 올려 시무(時務)에 대해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실로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고 시기적절한 조치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1월 18일 임자

이병문(李秉文)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월 19일 계축

충청 감사(忠淸監司) 심상훈(沈相薰)이, ‘역적의 시체를 감춘 최학길(崔學吉)을 효수(梟首)하여 경계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월 20일 갑인

민영준(閔榮駿)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1월 21일 을묘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방금 중국에서 온 자문(咨文)을 보니, ‘사신이 가지고 오는 인삼에 대해서는 모두 장정(章程)을 살펴 헤아려 세를 면제해 줌으로써 돌봐주는 뜻을 보인다.’라고 하였습니다. 세를 감면해 주는 것은 특례(特例)에 관계되는 만큼 의당 사례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니, 회답 자문을 지어서 들여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22일 병진

죽산(竹山)의 주필헌(駐蹕軒)과 강화(江華)의 사각(社閣), 해방 아문(海防衙門)을 수개(修改)할 때 감동(監董)한 도청(都廳) 이하에게 모두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1월 23일 정사

부사과(副司果) 권봉희(權鳳熙)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거주하고 있는 도(道)와 살고 있는 고을에 닥친 당장 시급한 문제로 절실하고도 화급한 큰 폐단에 대해 감히 전하께 아뢰니, 성명(聖明)께서는 굽어 살펴주소서.
본도의 지역으로 말하면, 서쪽은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에 접해 있고, 동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에 접해 있습니다. 토지가 비옥해 농사가 잘 되며 백성들은 순박하고 풍속은 순후하여 여러 지역 가운데 가장 다스리기 쉬운 곳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 기근이 거듭 들고 탐오 행위로 원망을 사게 된 결과 백성들은 사나운 짐승으로 변하고 이곳은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불러 모은 도적떼가 득실거리고 배를 대는 곳에서는 노략질이 성행하여 여염(閭閻)에는 물건을 쌓아둘 가망이 끊어지고 행상들은 편히 거처할 곳을 잃게 되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편인데, 그 중에서도 더욱 못되고 참으로 흉악하여 이 세상에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자들은 무덤을 도굴하는 자들입니다.
옛날에는 장사를 지낼 때에 금과 구슬을 입에 물리고 보물과 돈을 넣어주어 비단과 진귀한 물건들이 무덤 속에 가득하였는데, 이것을 훔쳐내는 것은 대개 이것을 탐낸 것이지 일부러 마른 해골과 원한을 맺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순전히 문공(文公)의 《가례(家禮)》를 써서 장사를 검소하게 지내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다 같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방자하게 무덤을 파헤쳐 유골과 잔해들이 풀숲에 여기저기 흩어지게 했으며 두개골을 잘라 자루에 담아 가지고는 많은 재물을 요구하는 기화(奇貨)로 여기고 있으니, 효성스러운 자식과 자애로운 후손들이 어찌 원수의 배에 칼을 찔러 그 분노를 씻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울부짖으며 통곡하면서도 그들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진실로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돈과 재물이 말만 떨어지면 손에 들어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배불리 먹어 아무런 근심이 없으니, 이것은 진실로 어느 나라 역사에도 없는 변괴입니다.
위에서 신칙하는 하교가 여러 차례 내려지고 말씀이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주현(州縣)과 도(道)에서는 옛 습관에 물들어 그럭저럭 지내면서 대강 과조(科條)를 세우다 보니 결국 실효가 없습니다. 간혹 마음이 좀 강직한 사람이 있어 마음을 잡고 소탕하여 체포하게 되면 도적들은 반드시 산으로 올라가 부르짖기를, ‘네가 지금 우리를 해쳤으니, 우리도 반드시 너에게 화를 주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넋이 나가고 간담이 떨려 우러러보고 굽어보며 관망하면서 맥을 놓게 되니, 바로 이 때문에 도적 무리가 날로 더하고 달로 성해져도 감히 붙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군지(軍誌)에, ‘작은 불꽃을 끄지 않으면 불길이 번지는 것을 어쩌지 못하며, 졸졸 흐르는 물을 막지 않으면 장차 강을 이룬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황소(黃巢)와 이자성(李自成)의 무리가 숨어서 와주(窩主)가 되고 떠도는 혼이 곁눈질하듯 기회를 엿보고 틈을 타서 하늘에 닿을 큰 세력을 만들어낼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난번에 진해 수령(鎭海守令)이 인부(印符)를 빼앗겼으니, 이것이 그 조짐입니다. 요즘 듣건대, 양호(兩湖)와 관동(關東)도 모두 본도와 다름이 없다고 하니, 이것을 막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서한(西漢)의 고사(故事)대로 범곤(范昆)·포승지(暴勝之) 같은 사람들을 선발해 직지사(直指使)로 나누어 보내어 〖권리의 표적이 되는〗 도끼를 가지고 남쪽으로 내려가 규모가 큰 도적은 군사를 동원해 소멸하고 규모가 작은 도적은 뒤를 밟아 체포하여 모두 죽여 없애어 종자가 번지지 않게 하고, 나약해서 위축되거나 긴장이 풀리고 해이해진 수령들은 중한 법률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빨리 달려가 번개같이 치고 우레같이 사납게 몰아친다면 아마 베어 없애는 성과를 거두어 마침내는 어진 은덕으로 구제하고 교화로 어루만져 도탄 속에서 건져내 편안하게 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조정에서 잘 처리하기에 달려 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살고 있는 의령현(宜寧縣)은 바로 경상도 내륙 고을로서 삼가(三嘉)·합천(陜川)·초계(草溪) 지경에 끼어 있는데, 이 세 고을의 조세는 면포(綿布)로 바치지만 의령은 유독 조운(漕運)하니, 이것은 대개 영강(濚江)의 물이 진주(晉州) 지리산(智異山) 남쪽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돌아 의령 남쪽 경계를 지나 낙동강(洛東江)에 합류하는 관계로 의령의 조세를 영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서쪽으로 진주의 조창(漕倉)에 이르게 하면 매우 편리하고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세 이래로 물길이 막혀 배가 통하지 않게 되어 육로로 창원(昌原)과 마산(馬山)의 조창에 운반하는데, 가까운 곳이 100여 리이고 먼 곳은 200여 리가 됩니다. 이 길을 허리를 굽히고 등에 지고 나르자면 걸핏하면 열흘이나 달포가 걸려 1섬을 운반하는 데 드는 품삯만 해도 엄청납니다. 백성들이 괴로워 신음하고 한탄하는 것이 이미 말할 수 없는데, 게다가 근래에는 바다 근처의 산들이 민둥산이 되어 배를 만들 재목도 없습니다. 그래서 임시로 배를 세내어 기한에 맞추어 실어 보내자니 사람들은 배를 부리는 데 익숙하지 못하고 바다에는 늘 세찬 바람이 부는 때가 많기 때문에 산골 백성들은 사공 노릇 하는 것을 마치 죽으러 가는 것처럼 회피합니다. 이에 살림을 챙겨 도망쳐 한 사람도 응하는 사람이 없으니 결국은 뇌물을 쓰게 되고, 자원하는 자는 모두 이전부터 포리(逋吏)들입니다. 바닷길이 험하고 먼 데다가 인재(人災)까지 함께 겹치다 보니 해마다 취재(臭載)되어 흠포(欠逋)된 것이 산처럼 쌓입니다. 지금 어사가 독촉하여 거두자 온 집이 거덜나고 온 경내가 텅 빈 데다가 농사가 또 기근이 겹치고 보니, 백성들은 입에 풀칠하고 주린 배를 채울 정도의 곡식조차 없습니다. 이미 해를 넘길 계책이 없는데 가죽을 벗기고 골수를 짜낸다고 한들 어찌 조세를 모두 바칠 가망이 있겠습니까? 요행히 조세를 다 바쳤다고 하더라도 다시 거두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쓰러지고 사방으로 흩어져 거리와 마을이 쓸쓸하니, 불쌍한 이 의령의 백성들만이 유독 우리 성상의 은혜 안에서 자라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까? 만약에 〖송(宋)나라 때〗 정협(鄭俠)으로 하여금 체발도(遞發途)를 그려서 올리게 한다면,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잠자리도 편치 못하고 음식도 달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깊이 살펴 반드시 변통하여 온전하고 편안하게 할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삼가 나라의 법전을 상고해 보니, 토지에서 세를 거두는 것으로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쌀, 포(布), 돈입니다. 바닷길이 멀고 가까운 것을 헤아려서 기준을 삼은 것은 대개 《서경(書經)》 〈우공(禹貢)〉의 ‘100리는 뿌리까지 온전한 볏단 채로 바치고, 200리는 낫으로 자른 윗부분의 절반을 바치며, 300리는 이삭이 달린 볏짚만 추려서 바친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한번 정해진 뒤라도 만약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특교(特敎)로 고쳐야 하니, 예컨대 죽령(竹嶺) 아래 5개 고을의 조세를 조령(鳥嶺) 밑의 7개 고을에 작전(作錢)해 준 예대로 추후에 감면해 준 것과 같은 것이 이것입니다. 요즘 함양(咸陽)은 무명을 바꾸어 돈으로 바치고, 용담(龍潭)은 쌀 대신 돈으로 바쳐서 그 덕에 목숨을 온전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본읍(本邑)의 형편을 놓고 말한다면, 이웃 고을이나 인접한 지역과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첫째이고, 먼 길을 가느라 발이 부르트고 무거운 짐을 져 나르느라 발이 지치는 것이 둘째이며, 사람들이 물길에 익숙하지 못해 연이어 침몰당하는 것이 셋째이고, 배 때문에 조운(漕運)하다 축난 것을 여러 차례 물려 백성들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는 것이 넷째입니다. 어사의 보고에서 이른바 ‘세미를 운반하는 길이 이처럼 매우 멀고 조운하는 폐단이 또 이렇게 거듭 생기니 돈과 무명으로 대납(代納)하는 것에 대해 유념하소서.’라고 한 것과 도신(道臣)의 보고에서 이른바 ‘백성들의 고통에 크게 관계되는 만큼 응당 경장(更張)해야 합니다.’라고 한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쌀로 바치면 백성들은 괴롭지만 위에는 이롭다.’고 하는데, 이것은 알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쌀값이 지금은 비록 뛰어오르고 있지만 풍년이 들면 썩은 흙처럼 천해질 것이니, 어찌 돈과 무명이 고정되어 변동하지 않아 늘었다 줄었다 하는 근심이 없는 것만 하겠습니까? 또 상선(商船)을 빌려 짐을 싣게 되면 애초에 키잡이가 없다 보니 배가 파괴되는 것이 연달아 일어나 절반 이상이 축나니, 어떻게 이익이 위로 돌아가겠습니까? 《주역(周易)》에서는 ‘위에서 덜어내어 아래에 보태주는 것을 이익이라고 하고, 아래의 것을 떼내어 위에 보태주는 것을 손해라고 한다.’ 하였고, 유약(有若)은 이르기를,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부족할 것이며, 백성이 부족하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풍족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가령 이익이 있더라도 해서는 안 되거니와, 더구나 애초에 이익이 있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어사와 도신이 이미 그 폐단에 대해 크게 걱정하고 개혁할 것을 생각하고 있으니, 폐단을 바로잡기를 공손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환곡을 받아들일 달이 다가오고, 세미 운반 기한이 다 된 만큼 장계를 올려 보고하는 것이 걸핏하면 시일을 끌다 보니 불쌍한 이 피폐한 백성들은 이미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지방관의 소임을 맡아 백성들의 딱한 정상에 대해 죽음을 무릅쓰고 천지의 부모인 전하에게 모두 진달했으니,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나라의 법과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빨리 명령을 내려 의령현의 조세를 돈과 무명에서 대납하게 하는 것을 영원한 과조로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소생할 희망을 갖게 하고, 조세가 축나는 근심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공사 간에 그 덕을 보고 나라와 백성들이 다 같이 편리하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도적을 없애는 계책과 세미를 조운하여 바치는 장단점에 대해서는 응당 영읍(營邑)에서 강구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4일 무오

찬선(贊善) 송병선(宋秉璿)과 서연관(書筵官)인 김낙현(金洛鉉)·박성양(朴性陽)에게 유소(諭召)하였으나, 모두 오지 않았다.

 

조병호(趙秉鎬)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1월 25일 기미

전교하기를,
"전(錢) 5만 냥을 내하(內下)할 것이니, 경우궁(景祐宮)을 이건(移建)하는 공사에 보용(補用)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이원명(李源命)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월 26일 경신

전교하기를,
"대체로 복식(服飾)은 원래 정해진 규식이 있으니, 귀천을 구별하고 재용(財用)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치를 부리는 습성이 전혀 끝이 없어서 일반 사람들과 하인배까지 외람되게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고 서로 앞을 다투어 명주옷을 입는 통에 귀천의 구분이 없어지고 법과 기강이 무너지게 되었다. 옷 한 벌의 값이 걸핏하면 일반 백성들의 한 집안의 재산보다 많으니, 이러고서야 재용이 어찌 군색하지 않을 수 있으며, 민생(民生)이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정의 벼슬아치로부터 일체 의복제도를 그 등급에 따르고 감히 뛰어넘지 말도록 하라. 이것이 옛 제도를 따르고 거듭 밝히는 뜻이니, 묘당(廟堂)에서 정식을 참고해서 과조(科條)를 엄히 세우고 절목(節目)을 작성해 들이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일반 관리를 신중히 가려야 하는데 어느 때는 그렇지 못하다. 더구나 지금은 아주 곤란한 때를 당했으니 관직을 위한 사람을 선택하는 데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수령은 백성들을 다스리며 〖임금을 대신해〗 근심을 나누는 사람이다. 초사(初仕)는 바로 수령의 품계인데, 만약 수령이 적임자가 아닌 경우에는 백성과 나라가 모두 그 피해를 받게 되니 이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 권문세가에 문란하게 드나드는 습성을 철저히 없애고 분발하여 널리 퍼지도록 힘쓰게 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관리 임명에 달려 있다. 여론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 하는 것은 원래 엄폐할 수 없는 공론이 있다. 경찰(京察)이 멀지 않아서 우선 이를 신칙하는 것이니, 각기 두려워하고 삼가하여 청백하게 대양(對揚)함으로써 내가 위임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양전(兩銓)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기순(徐夔淳)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1월 27일 신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옛날에 우리 성종(成宗)은 존경각(尊經閣)을 세우고 사서(四書) 오경(五經)과 팔도(八道)의 서판(書板)을 하사하여 함께 찍어 보관하게 한 결과 경서와 사서(史書), 백가(百家)의 책이 수 만 권이나 되었습니다. 우리 정종 대왕(正宗大王)은 성균관 관원에게 명령하여 내고 들이는 것을 관장하게 하고 이어서 재임(齋任)을 엄격히 선발하여 전수(典守)를 엄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전수한 지가 오래되면서 해이해지는 통에 유실된 것이 많으니, 반장(泮長)에게 명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가 고금의 서적을 널리 상고해 보완해서 갖추게 하고 서적을 내고 들이는 문제는 옛 규례를 거듭 밝히며 전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새로운 규정을 세운다면, 실로 두 임금이 선비들을 육성한 방도를 잘 이어나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많은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이 기숙하고 있으면서 그래 무엇을 가지고 강독하며, 무엇을 가지고 학문을 닦는단 말인가? 듣기에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다. 우선 조사하여 빠져서 없어진 것을 보충하게 하고 전수를 엄격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음사(蔭仕)인 사과(司果)가 〖벼슬이 올라가지 못하고〗 적체되는 것이 요즘 같은 때가 없습니다. 만약 소통시키는 길을 열고자 한다면 응당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조경묘(肇慶廟), 목릉(穆陵), 원릉(元陵)의 별검(別檢)은 모두 참하 문신(參下文臣)으로 근무 일수를 계산해서 승륙(陞六)하는 자리입니다. 현재 별검 벼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승륙하였으니, 이 세 자리를 전례대로 음령(蔭令)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추이(推移)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성균관        전적(典籍) 세 자리도 임시로 참하로 만들었다가 15개월의 임기가 차게 되면 승륙한다는 것을 영원히 규례로 삼게 하소서.
상서원(尙瑞院)은 단지 주부(主簿)와 별제(別提) 2원(員) 밖에 없어 해원(該院)의 사세가 구차하고 곤란한 것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만약 주부와 별제 두 자리를 더 늘려 원외랑(院外郞)으로 차의(差擬)한다면 쓸데없는 인원은 저절로 줄어들고 실무는 비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관방(官方)에 관계되는 일인 만큼 이조 판서에게 하문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전관(銓官)의 의견은 어떤가?"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수현(金壽鉉)이 아뢰기를,
"대신이 아뢴 말이 매우 합당합니다. 신은 다시 더 아뢸 말이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전관의 의견이 이러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삼가 특교(特敎)를 내린 것을 보건대, 초사(初仕)로 나가는 수령을 신중히 선발하라는 데 대해 말씀이 자상하고 간곡하셨으니, 무릇 이 전교를 보고들은 자치고 그 누가 흠모하고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대정(大政)이 임박하여 양전(兩銓)의 신하가 지금 이미 연석(筵席)에 나왔으니 특별히 더 신칙하소서."
하였다. 하교하기를,
"특별히 더 신칙하니 이조와 병조에서는 명심하고 받들어 나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심순택이 아뢰기를,
"구임(久任)한 차례대로 발탁하는 것이 이미 옛 규례이기는 하지만 자질과 경력, 명망이 쌓인 사람은 품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 호군(行護軍)        김창희(金昌熙)·한장석(韓章錫), 협판 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조병식(趙秉式)을 모두 정경(正卿)으로 품계를 올려 발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윤영신(尹榮信)이 보고한 것을 보니, ‘무안(務安)과 전주(全州)의 진결(陳結)에 대한 조세 감면 기한이 지금 이미 찼는데, 작년 여름에 또 재해를 입어 전처럼 황무지가 되어 버렸고, 남원(南原)과 태인(泰仁)의 재해 상황도 매우 참혹하여 민정(民情)이 굶주려 부황이 들었습니다. 이상 네 고을의 진결 도합 1,805결(結) 26부(負)에 대해서 특별히 5년 동안 조세를 감면하도록 허락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정해진 기한을 다시 연장하고 감면했던 조세를 회복하지 않는 것은 토양을 분별하여 부세를 정하는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 그렇지만 재해가 이미 극도에 이른데다가 토지가 아직 개간되지 못하여, 도첩(道牒)이 백성들을 위해 실로 백징(白徵)하기 어렵다고 하니, 무안의 진결 230결 10부에 대해서 특별히 3년 동안 조세를 감면시켜주고 기한에 맞춰 총량을 회복하도록 하여 번거롭게 다시 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준천(濬川)은 바로 나라의 법전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옛날 영묘조(英廟朝)에 5칸 수문(水門)과 영도교(永渡橋)의 돌에 모두 땅을 파내는 한도를 새기고 또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겨 뒷날에 개천을 쳐내어 물을 띄우는 기준을 표시했습니다. 이 훌륭한 공적으로 만세토록 영원히 그 덕을 입게 되었는데, 근년에 와서 강바닥을 자주 쳐내지 않은 관계로 모래와 진흙이 쌓였으니, 장마가 지면 물이 범람하여 백성이 입는 피해가 해마다 더욱 심해지고 있고 침수될 위험이 또한 가까워왔다고 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경비가 매우 부족해서 큰 공사를 벌이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백성들의 고통과 관련되는 일인 만큼 그만둘 수 없습니다. 경조윤(京兆尹)과 별영사(別營使)로 하여금 전적으로 맡아서 거행하여 빨리 공사를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깊이 더 쳐내서 기어이 실효가 있게 하라."
하였다.

 

특별히 민영소(閔泳韶)를 발탁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삼았다.

 

1월 28일 임술

특별히 박제순(朴齊純)을 제수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김창희(金昌熙)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홍순형(洪淳馨)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호준(李鎬俊)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정낙용(鄭洛鎔)을 전환국 총판(典圜局總辦)으로, 조강하(趙康夏)와 박봉빈(朴鳳彬)을 협판 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 민종식(閔宗植)을 시강원 겸 사서(侍講院兼司書)로 삼았다.

 

1월 29일 계해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한 뒤에 이어서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봄철 전알을 한 것이다.

 

박제순(朴齊純)을 주진 대원(駐津大員)으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내무부(內務府)에서 계청(啓請)하였기 때문이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근수(宋近洙)가 상소하여 휴치(休致)시켜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1월 30일 갑자

특별히 이응신(李應辰)을 발탁해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이헌영(李𨯶永)을 참의 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로, 이규안(李奎顔)을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일본(日本)과 수호를 맺은 지 이미 오래되어 교제상의 온갖 사무가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 참의 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이헌영(李𨯶永)을 특별히 판리대신(辦理大臣)으로 차임하여 일본 동경(東京)에 주재하면서 일을 헤아려 적절히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이순익(李淳翼)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홍재정(洪在正)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송세헌(宋世憲)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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