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3권, 고종23년 1886년 7월

싸라리리 2025. 1. 20.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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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 병신

민영익(閔泳翊)을 전환국(典圜局) 관리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명진(金明鎭)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전염병 기운이 아직 없어지지 않고 성행하여 각 고을에서 사망자가 났다는 보고가 종종 오고 있습니다. 각별히 여제(厲祭)를 지내게 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전염병 기운이 성하여 가는 곳마다 놀라운 소문이 들리니 향(香)과 축문(祝文)을 빨리 내려 보내 각별히 여제(厲祭)를 정성껏 지내게 하도록 예조(禮曹)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6일 정유

특별히 민관식(閔觀植)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제수하고 조석여(曺錫輿)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7월 10일 신축

홍종대(洪鍾大)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7월 11일 임인

전교하기를,
"육영 공원(育英公院) 어학(語學)을 이제 시작하여 사람을 수용해야 하겠으니, 학도들을 내외 아문의 당상(堂上官)과 낭청(郎廳)의 아들·사위·아우·조카·친척 가운데서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발하여 추천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7월 14일 을사

특별히 홍종영(洪鍾永)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제수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지금 관북 육로 통상 사무 감리(關北陸路通商事務監理) 김재용(金在容)의 서면 보고를 보니, ‘화룡곡(和龍峪) 진독리(秦督理)가 공문을 보낸 데 근거하여 광제곡 분잡 위원(光霽峪分卡委員) 해봉휘(奚鳳輝)가 담잡(談卡)의 사무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광제곡(光霽峪) 대안(對岸)인 종성부(鍾城府)에 분국(分局)을 더 설치하여 상무를 처리하게 하는 것이 시행해야 할 사항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경원(慶源) 지방에 이미 분국을 설치하였고, 이제 이 종성 지방에 분국 설치를 청하니, 다르게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보고 내용대로 설치하도록 허락하되 모든 절목을 일체 경원부(慶源府)에서 이미 정한 규례대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15일 병오

내무부(內務府)에서 아뢰기를,
"본 내무부(內務府)의 공작사(工作司)에서 사온 윤선(輪船)이 지금 이미 인천항(仁川港)에 와서 정박하고 있습니다. 각도(各道)의 공부(貢賦)는 그것으로 운반하게 되는데 구관(句管)하는 관리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관직명은 총무관(總務官)으로 하고 당상(堂上官)중에서 의망(擬望)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홍종영(洪鍾永)을 차하(差下)하고 그대로 전운 어사(轉運御史)를 겸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각 도와 각읍(各邑)의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과 사세가 어렵고 쉬운 것을 헤아려서 일체 시행해야 할 것은 되도록 편리한 대로 미리 통지하여 배에 실어 운반할 때에 민읍(民邑)에 폐단을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가을철이 이미 다가온 만큼 그저 세월을 보내면서 지체시켜서는 안 될 것이니 빨리 배를 출발시키게 하되 먼저 이런 내용으로 각도의 도신(道臣)들에게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백성들에게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는 것은 나라의 큰 정사인데, 연전에 과장(科場)(試驗場)을 창설한 후 아직까지 구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농무사(農務司)에 소속시키고 해당 당상이 전적으로 관할하게 하되, 종목국(種牧局)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7월 17일 무신

전교하기를,
"죽산 부사(竹山府使) 조존두(趙存斗), 내무 주사(內務主事) 김가진(金嘉鎭)·김학우(金鶴羽)·전양묵(全良默) 등의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심상하게 처리할 수 없다. 모두 원악지 정배(遠惡地定配)하라."
하였다.

 

7월 18일 기유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박선양(朴善陽)을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이정규(李廷珪)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전 정언(前正言) 권봉희(權鳳熙)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협판내무부사(內務府協辦) 신(臣) 조정희(趙定熙)는 대대로 벼슬하는 큰 집안의 사람으로서 일찍이 우대하는 은전을 입어 두루 수령을 지내고 외람되게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니 마땅히 충직한 마음으로 그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타고난 성질이 음흉하고 행실이 이미 패덕합니다. 탐욕스러운 기풍이 대대로 내려오며 악한 짓을 한 데 대해서는 물론 알고 있지만, 집안의 행실을 두고 사람들이 추하다고 말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우(士友)들이 배척하고 하인들이 더럽다고 침을 뱉으며 욕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습(舊習)을 고치지 못하고 못된 짓만 더욱 자라서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내고, 남의 혈육을 이간시키기를 좋아하며 나타나지 않는 흔적을 꾸며대고 나라에 난리가 나는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해괴한 기미가 예상치 않은 곳에 잠복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찌 훌륭한 시대에 이런 귀신이나 물여우같은 것들이 있을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처럼 법을 지키지 않는 부류들을 결코 조신(朝紳)의 반열에 끼워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에 살려둘 수 없으니 굽어살펴서 빨리 엄한 명령을 내려 왕법(王法)을 시원히 시행하여 세상의 교화를 유지하고 여론을 진정시키는 큰 계책으로 삼아주소서."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7월 20일 신해

이교익(李喬翼)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김철희(金喆熙)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내무부(內務府)에서 아뢰기를,
"천진주재 통상 사무 독리(天津駐在通商事務督理)의 후임을 임명해야 하겠는데 대체로 이 직무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맡기기 곤란하니, 전 승지(前承旨) 박제순(朴齊純)은 우선 잉임(仍任) 하고 며칠 안으로 등정(登程)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2일 계축

윤자덕(尹滋悳)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민병승(閔丙承)을 시강원 겸 문학(侍講院兼文學)으로, 김병일(金炳一)을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내무부(內務府)에서 아뢰기를,
"군량이 지금 거덜이 나서 사세가 매우 딱하게 되었는데 다른 곳에서 추이(推移)해서 배비(排比)할 방도가 없습니다. 해서(海西)의 환미(還米) 2만 석(石)을 미리 통지하여 배로 실어오게 해서 봉급을 주는 데 보충하도록 친군영(親軍營)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3일 갑인

전교하기를,
"광주 유수(廣州留守) 김윤식(金允植)과 좌승지(左承旨) 어윤중(魚允中)은 처지가 딱하다고 핑계대고 여러 차례 엄하게 신칙하는 명령이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명령을 받들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혐의를 피하는 곡절을 계판(啓板) 앞에 불러다가 물어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보고하기를,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물으니 아뢰기를, ‘이전에 대사간(大司諫) 신(臣) 허직(許稷)이 올린 상소 가운데에 「박영효(朴泳孝)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돈을 내서 묻어준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그 당시 묻어준 사람은 바로 신들입니다. 죄상이 이미 드러나고 대간(臺諫)들의 규탄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성명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태연하게 벼슬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황송하여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여러 번 간곡하게 신칙했는데도 줄곧 버티니 이것이 과연 강경히 항의하는 것인가 아니면 맞서는 것인가? 신하의 의리와 본분상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애당초 대간(臺諫)들의 규탄에 지적한 것이 없는 이상 더욱 혐의를 피할 단서가 없는 것이다. 다같이 다시 엄하게 신칙하여 숙단(肅單)을 빨리 받아서 봉입(捧入)하라."
하였다.

 

7월 24일 을묘

광주 유수(廣州留守) 김윤식(金允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타고난 성격이 어리석어서 무슨 일을 만나면 대뜸 진행하고 가려서 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큰 과오를 범하곤 합니다. 갑신년(1884)의 역적인 박영효(朴泳孝)의 아버지 박원양(朴元陽)은 바로 신의 매부(娣夫)의 원래 생가집 형입니다. 변고가 났을 때 박원양은 늙고 병들어 집에 있다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신에게 고생(孤甥)이 있었으나 거두어 묻을 힘이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박원양은 법으로 볼 때 응당 연좌(連坐)에 해당되지만 역적인 아들과는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썩어가는 유해를 도성 안에 오래도록 둘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을 내주고 품을 사서 도성 밖에 묻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 대간(臺諫)들의 상소에 신의 죄에 대해 발언하였으니 절로 죄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성명을 밝히지 않았다고 하여 태연히 벼슬자리에 그냥 있는다면 어찌 매우 뻔뻔스러운 자가 아니겠습니까?
문을 닫아 걸고 엎드려서 일을 폐한 채 엄한 처분이 내리기를 기다렸는데 전하가 하늘같은 도량으로 견책하여 파면시켰다가 철회하고 귀양을 보냈다가 곧 용서해 주실 줄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또 천패(天牌)가 오고 심지어 물어서 보고하도록 한 조치까지 받았는데 신칙하는 명령이 정중하며 재촉하는 것이 엄하고 절절하니 어디를 보아도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처벌로 죄를 가릴 수 없게 된 처지에서 다시 영화로운 지위를 차지하며 스스로 아무 일 없었던 사람과 똑같이 여긴다면 하늘이 싫어하고 귀신이 노해서 반드시 그 화를 받게 될 것이니 명령을 받들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것을 무릅쓰고 스스로 열거하는 것이니 신을 법사(法司)에 넘겨서 해당한 법을 적용하여 왕장(王章)을 밝히고 여론에 사죄하도록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물어서 보고한 데 대한 비답에서 말했는데, 문득 물러가서 상소를 올리고 아직까지 나와서 명령을 받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더구나 사람들의 말이 애초에 순전히 허황한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결코 이렇게 억지로 혐의를 피하여서는 안될 것이니 빨리 명에 숙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승지(左承旨) 어윤중(魚允中)이 상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러하였다.
"신은 사리에 어둡다보니 망령된 짓을 하여 자신이 죄를 재촉하고도 3년이 지나도록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전 대사간(大司諫) 허직(許稷)이 상소하고 나서야 신의 죄가 이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스스로 감추면서 자수(自手)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도성 밖에 거적을 깔고 엎드려 천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 은혜로운 임명이 여러 번 내리고 간곡한 신칙이 이를 데 없었습니다. 심지어 물어서 보고하도록 하는 명령까지 받았는데 그 은혜로운 명령이 정중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전하가 죽여야 할 사람을 구원하여 편안하게 살도록 한 것이니 황송하여 사례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와 같은 여러 역적들이 불행히도 관리의 반열에서 나왔는데 이들은 바로 온 나라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까지 공동의 원수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명백한 의분이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는데, 어떻게 사은(私恩)을 베풀기 위하여 그의 아버지를 묻어주자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갑신년(1884) 겨울에 시골의 여막에 있다가 변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올라와서 외람되게 재추(宰樞)와 함께 대궐에서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 때 큰 변란을 겪었으므로 응당 먼저 도성을 깨끗이 하기 위해 널려 있는 시체를 모두 들것에 실어 묻게 했는데, 박원양(朴元陽) 부부는 집에서 죽었으므로 거두어 묻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이 박원양에게 어릴 때에 글을 배운 정의가 있어서만은 아니고 흉측한 물건을 오래도록 궁문(宮門) 가까이에 그냥 덮어두어서는 안될 것이었습니다. 또 국율(國律)을 놓고 판단한다 하더라도 드러난 시체의 목을 넘겨준 데 대한 법조문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냥을 주어 들것으로 내가게 한 다음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말하고 감히 스스로 숨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신의 죄입니다.
성은(聖恩)이 아주 극진하기는 하지만 신의 죄는 자신이 진 것이므로 회피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신에게 시행할 당률(當律)을 의논하여 나라의 법을 엄하게 하고 여론에 사죄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문계(問啓)에 대한 비답을 보지 못했는가? 이미 용서하여 주었는데 또 이렇게 버티면서 이때까지 신칙하고 명령한 것을 문득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신하의 분수인가? 다시는 깊이 혐의를 피하지 말고 빨리 명에 숙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5일 병진

시임 대신(時任大臣) 및 원임 대신(原任大臣)들, 봉조하(奉朝賀)·종친(宗親)·의빈(儀賓), 시임 각신(時任閣臣)과 원임 각신(原任閣臣), 빈객(賓客), 내외 아문의 당상(堂上官)과 낭청(郎廳), 종정경(宗正卿), 6조와 양사(兩司)의 장관(長官), 2품 이상, 승지(承旨)와 한림(翰林), 홍문관,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에게 사찬(賜饌)하라고 전교하였다. 탄신(誕辰)이기 때문이다.

 

원악지 정배 죄인(遠惡地定配罪人)인 조존두(趙存斗)·김가진(金嘉鎭)·김학우(金鶴羽)·전양묵(全良默)을 모두 특별히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7월 26일 정사

윤치성(尹致聖)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민병승(閔丙承)을 시강원 겸 필선(侍講院兼弼善)으로, 김춘희(金春熙)를 겸 문학(兼文學)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신칙도 하고 비답도 내려주었는데 줄곧 거역하고 항거하니 이와 같은 분수와 의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더구나 이 문제는 또 이미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하여 바로 온 조정(朝廷)이 다같이 양해하고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다시 혐의를 피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어서 이와 같이 맞서는 것인가? 광주 유수(廣州留守) 김윤식(金允植)과 우윤(右尹) 어윤중(魚允中)을 다같이 다시 패초(牌招)하여 사은 숙배토록 재촉하라."
하였다.

 

7월 27일 무오

김병익(金炳翊)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심상학(沈相學)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본 아문은 경비가 방대한데 애초에 일정한 규정을 마련한 것이 없기 때문에 매달 봉급을 줄 때면 매번 궁색한 것을 걱정하게 됩니다. 각읍(各邑)에서 올려다 바치는 삼세(三稅) 가운데 잡부(雜卜)의 남은 이자 명색은 선주들이 모두 써버리니 어이없기 그지없습니다. 이제부터 본 아문에 영원히 넘겨서 봉급을 내주는 데 쓰도록 정식(定式)으로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8일 기미

전교하기를,
"육영 공원(育英公院)에서 앞으로 학과를 설치해야 할 것이니, 수문사(修文司) 당상(堂上官)은 총리대신(總理大臣)에게 가서 토의하여 절목을 만들어서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9일 경신

특별히 민종묵(閔種默)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제수하고 민치헌(閔致憲)을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삼았다.

 

도목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김문현(金文鉉)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양현(金亮鉉)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윤치성(尹致聖)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조동희(趙同熙)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조병식(趙秉式)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서상조(徐相祖)를 부사(副使)로, 윤헌(尹攇)을 서장관(書狀官)로, 김선용(金善容)을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원세개(袁世凱)가 ‘조선 정세를 논함〔朝鮮大局論〕’이라는 글을 써서 의정부(議政府)에 보냈다.
그 글의 내용에,
"조선은 동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 나라로서 영토는 3,000리(里)에 불과하고 인구는 1,000만 명도 못되며 거두어들이는 부세도 200만 석(石)이 못되고, 군사도 수천 명에 불과하니 모든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빈약한 나라입니다.
지금 강대한 이웃 나라들이 조여들고 있는 때에 사람들은 안일만 탐내고 있습니다. 역량을 타산해보면 약점만 나타나서 자주 국가로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강국의 보호도 받는 데가 없기 때문에 결코 자기 스스로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자연적인 이치로서 천하가 다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부유하고 강대한 나라들이 구주(歐洲)에 많이 있으니 영국(英國)과 프랑스〔法國〕를 끌어들여 보호를 받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말하므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영국과 프랑스는 남의 나라를 망치고 남의 영토를 탐내므로 호랑이를 방안에 끌어들인 것처럼 필경은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다른 나라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있어 그 힘이 동시에 미치기 어려우므로 채찍이 길다 해도 말에 닿을 수 없는 것과 같은 형편이다.’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이 ‘영국과 프랑스를 믿을 수 없다면 독일〔德國〕과 미국(美國)은 어떠한가?’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독일은 병력이 강대하고 미국은 나라가 부유하지만 사건을 발생시키기를 좋아하지 않고 남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나라를 보존하는 것은 잘하지만 먼 나라에는 뜻을 두지 않으므로 함께 도모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또, ‘그렇다면 서로 인접하고 있는 러시아〔俄國〕에 의지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므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진짜로 문을 열고 도적을 불러들이는 것으로서 나라의 존망에 대해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이다. 대체로 러시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아주(亞洲)를 욕심내어 항구를 점령하고 계속 수사(水師)를 주둔시켜 병탄(幷呑)할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 만일 조선을 먹지 않는다면 어느 나라를 먹겠는가? 끌어들이지 않아도 곧 올 것인데 불러들일 것이 있는가?
그런데 지금 곧 오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을 바로 서북 일대의 배치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블라디보스톡〔海參葳〕 항구가 겨울이 오면 얼어붙어 길이 막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겸하여 국내의 내란이 끝나지 않았으며 재정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밖으로는 수사가 영국만 못한 데다가 영국이 서쪽에서 경계하면서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고, 육지로는 터어키〔土耳其〕를 막아야 할 형편인데, 터어키가 정말 뒤로부터 공격해 온다면 러시아는 군사를 동원하는 데 수개 월이 걸려야 할 것이다.
한 번 남보다 뒤떨어지게 되면 이전의 공적도 다 헛일로 될 것이므로 러시아가 경솔히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러시아가 결국 한 번은 야욕을 채우려고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실정에서 자체 방어도 못하겠는데 어떻게 남을 원조해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또, ‘구주에서 원조를 받을 계책이 없다면 아주의 일본밖에 없지 않는가?’라고 하므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더욱 저속한 논의이다. 일본은 영토가 조선과 비슷한 나라인데, 서법(西法)을 적용하여 공리(功利)만 강조함으로써 겉으로는 강한 것 같지만 안은 비었으며, 당쟁이 번갈아 일어나 자기 자신도 돌볼 겨를이 없는데 어느 틈에 남을 돕겠는가? 뿐만 아니라 본성이 교활하여 이익만을 노리므로 그와 화친 관계는 맺을 수 있어도 의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또, ‘만약에 조선이 중국(中國)과 관계를 버린다면 앞으로 나라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므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조선은 본래 중국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 중국을 버리고 다른 데로 향하려 한다면 이것은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에게서 떨어져서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조선이 중국에 의지하면 유리한 점이 여섯 가지가 있다.
중(中)        한(韓)은 인접하여 있고 수륙(水陸)이 서로 잇닿아 있으므로 천진(天津)·연대(烟臺)·여순(旅順)·오송(吳淞)의 군함이 하루 이틀이면 각 항구에 와 닿을 수 있으며, 봉천(奉天)·길림(吉林)·훈춘(琿春)의 육군들은 10일이면 한성(漢城)에 와 닿을 수 있다. 아침에 떠나 저녁에 와 닿을 수 있으므로 유사시에 마음대로 통할 수 있으니 그 역량을 믿을 만하다. 이것이 첫째로 유리한 점이다.
중국은 천하를 한 집안처럼 여기고 변방의 나라들을 한몸처럼 대하기 때문에 한 번 변란이 생기면 즉시로 평정한다. 장수를 임명하고 군사를 출동시키는 데 군사 비용을 아끼지 않으며 물자 공급도 요구하지 않는 것은 임오년(1882)과 갑신년(1884)에 이미 실천한 사실이 있으니 그 은혜를 믿을 수 있다. 이것이 둘째로 유리한 점이다.
중국은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보살핌에 있어서 지극히 어질게 대하고 의리를 다한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를 중국의 군현(郡縣)으로 만들지 않고 그 지역에서 조세로 받지 않으며, 다만 입술과 이의 관계를 든든히 하여 인민이 편안하기만 바랄 뿐이다. 겉으로는 복속된다는 명색을 띠지만, 안으로는 실제 영토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자자손손이 무궁토록 보전될 것이니 그 심정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셋째로 유리한 점이다.
중국이 조선을 돌보아준 지 이미 수백 년이 되었으므로 상하(上下)가 다같이 의뢰하고 신하와 백성들이 기꺼이 따른다. 만일 구장(舊章)을 성심으로 따른다면 온 나라가 편안히 지내게 되고 정령(政令)도 쉽게 시행될 것이니 그 혜택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넷째로 유리한 점이다.
강대한 이웃 나라들이 주위에서 염탐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노리고 있지만 만약에 중국과 조선이 굳게 결합되어 틈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보며, 조선은 오직 중국에 의지해 있고 중국은 곧 조선을 돕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호랑이와 같은 야망도 저절로 사그라질 것이며, 누에처럼 먹어 들어가려는 마음도 없어질 것이니 그 위력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다섯째로 유리한 점이다.
중국은 조선을 믿어 의심하지 않으며 조선은 중국을 굳게 믿게 된다면 내란도 일어나지 않고 외부의 침략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니, 이런 때에 정령을 바로잡고 어질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등용하여 생각을 가다듬어 정사를 잘하게 되면 나라의 부강을 점차 이룩할 것이니 그 계기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여섯째로 유리한 점이다.
조선이 중국을 배반하면 네 가지 해로운 점이 있다.
옛날부터 좋은 관계를 맺은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면 친하던 사람은 점차 멀어질 것이며 멀어지면 반드시 의심을 사게 되는 것이며 멀어진 사람을 친하려고 하면 반드시 의심을 사게 되는 것이다. 멀어진 사람을 친하려고 하면 친하려 할수록 더욱 꺼려하게 되는 것이다. 의심과 꺼림이 생기면 화가 즉시에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첫째로 해로운 점이다.
중국을 배반하고 자주(自主)를 하자면, 형세로 보아 반드시 구주의 나라들을 끌어들여다 원조를 받게 될 것인데, 구주의 나라들의 본성이 잔인하여 남을 침략할 것을 꾀하므로 많은 선물과 달콤한 말로 백방으로 회유하여 틈을 타서 들어와서는 반드시 먼저 그 이권을 빼앗고 그 다음에는 중요한 지역을 점령할 것이다. 이것이 둘째로 해로운 점이다.
중국은 조선과 아주 가까이 있는데 조선이 하루아침에 다른 나라의 소유로 된다면 결코 좋게 여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륙으로 동시에 진출하여 재빨리 남보다 먼저 상륙하여 잠깐 사이에 대병력이 경내를 뒤덮으며 비록 구주에 구원해 줄 군사가 있다 하더라도 사태가 급하게 되어 그것을 기다릴 사이도 없이 조선은 벌써 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셋째로 해로운 점이다.
조선에서 지금 붕당(朋黨)이 일어나고 있고 반란도 계속되고 있는데, 만약에 한 번 중국을 배반하게 되면 상하가 서로 의심하고 사람들의 마음도 이탈하고 배반하여 중국에서 군사를 일으켜 죄상을 따지기도 전에 내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넷째로 해로운 점이다.
유리한 점은 저렇고 해로운 점이 이러하니 굳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러나 중국의 강대성은 구주(歐洲)만 못하니 조선이 구주를 끌어들여다 자기를 보위한다 해도 중국에서는 기필코 따지지는 못할 것이다. 월남(越南)과 버마〔緬甸〕에서 있었던 사실을 보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므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월남과 버마는 먼 바닷가에 외따로 있지만 조선은 중국의 바로 옆에 있다. 북쪽으로는 발상지인 성경(盛京)001)                  과 아주 가깝고 서쪽으로는 천진(天津)과 연대(烟臺)의 요충지로 견제하고 있어서 조선이 없으면 동쪽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므로 중국으로서는 군사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마에 대해서는 허용하고 월남에 대해서는 좀 늦출 수 있었지만 조선은 결코 놓칠 수 없다.
조선이 만일 중국을 배반한다면 중국은 필연코 재빨리 군사를 동원하여 신속히 와서 점령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을 것이다. 그 때 가서 구주에서도 군사를 동원하여 승부를 다투게 될는지 꼭 알 수는 없지만 나그네와 주인의 형세는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중국은 편안히 앉아 멀리서 오는 피로한 적들과 맞닥치게 될 것이며, 또 구주가 어떻게 군사를 모두 긁어가지고 동쪽으로 오면서 그 배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국의 병력이 구주만 못하지만 정병이 30만이고 전선(戰船)도 100여 척(隻)이 되며 해마다 들어오는 수입도 6,000만 석(石)이나 되므로 만약 일부 부대를 출동시켜 조선을 점령하려고 한다면 돌로 달걀을 깨듯이 쉬울 것이다.’ 라고 하니,
어떤 사람이 비웃으면서, ‘공의 말과 같다면 이것은 조선이 중국를 몹시 두려워한다는 말인데 중국도 조선이 중국를 두려워하듯이 오히려 구주를 두려워하는데 어떻게 구주를 방비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므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렇지 않다. 중국은 영토가 넓고 백성들이 많으며 나라 안은 태평하다. 그래서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사람들을 죽여 들판에 차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진 사람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지 구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프랑스와의 전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이 중국을 두려워하는 것은 옳지만 구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조선이 병든 나라이므로 서인(西人)이 전력을 다하여 차지하려고 꾀하지만, 중국이 반드시 대병력으로 도와줄 것이니 그들이 군사를 오래도록 동원하고 군량을 소비한데도 얻는 것으로는 잃는 것을 보상할 수 없을 것이며 더구나 꼭 얻을 수도 없지 않는가?
조선이 만약에 밖으로 예의를 다하여 외교하고 안으로 중국의 원조를 받는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함부로 속이고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 해마다 있는 사실을 놓고 보더라도 모두 중국 사람들이 스스로 손을 쓴 것이지 어찌 다른 사람들이 억지로 시켜서 한 것이겠는가?’라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만약 그렇다면 조선은 끝내 자주(自主)를 할 가망이 없겠구나.’ 라고 말하므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웬 말인가? 조선은 자기 나라를 자체로 통치하고 자기 백성들을 자체로 거느리며 각 나라들과 조약을 맺어 자주국(自主國)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만 중국의 관할을 받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일 남의 신하로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자주라고 한다면 이것은 문자상의 체면이나 유지하는 것이지 나라가 망하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헛된 이름을 취하려다가 실화를 당하게 될 것이며 아침에는 황제라고 부르다가 저녁에는 벌써 파면될 것이니 어느 것이 성공하고 실패하겠는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가령 조선의 백성들이 많고 나라가 부유하며 정병(精兵)이 수십 만이 되어 아주에서 강대한 나라라고 불리면서 자립을 도모하려고 한다면 혹시 기대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상하가 단합되지 않았으며 나라는 쇠약하고 백성들은 빈곤하다. 만약 아주 가깝고도 강대하며 아주 어질고도 공정한 하나의 나라를 찾아서 비호를 받으려 한다면 중국을 제쳐놓고 어느 나라를 따르겠는가?
중국에 의지하여 스스로 보존할 것을 도모한다 해도 오히려 다른 걱정이 있을텐데 더구나 다른 나라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라고 하니, 어떤 사람이 이 말을 다 듣고 나서 훤히 깨닫고,
‘공의 말은 참으로 눈을 틔워주고 귀를 열어주었으니 약도 침도 이만은 못하다.’"
하였다.
원세 개(袁世凱)가 또 주상전하(主上殿下)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생각건대 제가 조선에서 사업한 지 이제 5년이 되었습니다.
임오년(1882) 가을과 겨울부터 이미 전하가 생각을 가다듬어 정사를 잘하여 나라의 부강을 이룩하는 데 뜻을 두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애쓰며 몹시 고심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하가 단합되지 않고 나라는 쇠약하며 백성들은 가난하므로 변고가 계속 일어나서 위태롭기가 마치 달걀을 쌓아놓은 것과 같으니 정사를 잘해보자는 전하의 애초의 마음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것입니다.
만일 전하가 자신에게서 그 잘못을 찾는다면 온 나라 사람들이 타당하지 않다고 할 것이며, 정신(廷臣)들이 자신이 그 잘못을 책임진다면 공정한 논의가 또한 그렇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 까닭을 찾아본다면 대개 위에서 정사를 잘하려는 생각이 있지만 소인들이 그만 그르치기 때문입니다.
만일 진짜로 정사를 잘하자고 한다는 것을 인정받자고 하게 되면 지난 몇 해 동안에 시행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한 계책들을 응당 모두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전대로 해나간다면 정사를 잘하려고 해도 성과는 없고 변란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갑신년(1884)의 변란을 살펴보건대, 김옥균(金玉均) 등은 자체로 노력하여 나라를 튼튼하게 할 계책을 극구 진술하고 자주(自主)를 할 방침을 은밀히 제기하여 전하의 생각을 유혹시키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손을 좀 쓰게 되자 대신들을 죽이고 전하를 협박하여 거의 뒤집어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제기한 말을 한 번 생각해보면, 그들의 심보나 행사(行事)와는 근본적으로 서로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소인들이 임금의 생각을 혼란시켜 권세와 이익을 얻으려고 하여 겉으로는 외부의 원조를 끌어들여 나라를 강하게 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외부의 원조를 이용하여 국정을 혼란시키는 것이므로 그들의 모략이 작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전하가 10월 17일 이전에 그들의 마음을 살피고 행사를 헤아려 의심을 하고 막았더라면 이러한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간계(奸計)가 그대로 실현되어 헤아릴 수 없는 변란이 생겼더라면 전하는 천백 년이 지나도 씻을 수 없는 원한을 어떻게 발명(發明)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적신(賊臣)들이 처단되어 위태로운 것이 안정 상태로 전환되었습니다.
저는 소인들의 음모가 이제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전날의 실패는 오히려 교훈으로 될 것이니, 이것을 역시 조선이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거나 하는 하나의 커다란 전환의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휴가를 받아 고향에 돌아가서 두어 달 집에 있다가 지난겨울에 다시 와서 일을 하면서 가만히 정세를 보니, 앞으로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밤낮으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수다스런 말로 여러 신하들을 타일러 전하를 존중하고 종사(宗社)를 영원히 공고히 하여 신민을 보전하도록 했으나 생각과는 달리 힘이 약하고 재능이 적어 빈말로 되어 도움이 되지 못해 마침내는 금년 7월의 사변이 있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소인들은 모두 지위가 낮고 명망이 보잘 것 없으며 품은 뜻이 비루하여 부귀와 이권(利權)을 탐내는 것입니다. 지위가 낮고 명망이 보잘 것 없으면 반드시 그럴듯한 말로 전하의 귀를 솔깃하게 하여 믿어주게 하고, 품은 뜻이 비루하면 반드시 아첨을 들어주게 하여 전하가 가까이 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가까이 하고 믿는 것이 오래된 다음에는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말을 조작하고 신기한 이론을 만들어서 전하를 유혹시키는데 한 번 그 술책에 빠지면 구원할 길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전하도 때를 보아 변혁을 한다면 자강(自强)할 수 있지만 소인들이 오로지 이것을 빙자하여 조정(朝政)을 개혁하고 대신들을 죽여 자기 한몸의 부귀와 권력과 이익을 위한 계책으로 삼고, 나라를 망치는 화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수 있으니, 김옥균(金玉均)의 전철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인들이 감언(甘言)과 휼계(譎計)는 아주 쉽사리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는 김옥균 등이 평소에 제기한 말들을 사람을 시켜 책에다 죄다 써서 곁에 두시고 수시로 봄으로써 명백한 교훈으로 삼기 바랍니다. 만일 소인들의 계(啓)가 이들의 말과 부합되는 것이 있으면 그들을 김옥균과 같이 보고 계속하여 그들의 심보와 행사하는 것을 살핀다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비근하고 지극히 평이한 명백한 증거이니 전하를 위한 염려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소인들은 자기가 등용되기만 하면 반드시 부국강병(富國强兵)할 계책이 있다고 하면서 일을 할 수 있는 직권을 줄 것을 요청하는데 정사를 어지럽히고 나라를 그르치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 자가 드뭅니다. 원세개(袁世凱)가 여기서 일한 5년 동안에 전하를 도운 것이 몇 차례 되는데 마음 속에 늘 잊을 수 없으니 어떻게 차마 전복될 위험을 가만히 앉아서 보면서 구원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는 때때로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다는 것을 생각하여 원세개가 눈물겹게 속만 태우는 일이 없게 해준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삼가 비유하는 말 네 가지와 당면한 일 열 가지를 제기하려고 하니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1. 나라를 세우는 것은 집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조선은 중국과 서로 인접한 가까운 이웃입니다. 동쪽의 이웃집이 무너지면 서쪽의 이웃뜰과 마루도 반드시 쉽사리 밖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저는 서쪽의 이웃집 사람입니다. 동쪽의 이웃집이 기울어져가는 것을 보고 매일 동쪽의 이웃집 문 앞에서 외치기를 ‘집을 급히 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무너진다.’라고 하면 똑똑한 사람은 그 소리를 듣고 그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 기꺼이 응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보고도 멍하게 있으면서 도리어 동쪽의 이웃집이 기울어지는 것이 서쪽 집에 무슨 상관인가라고 하면서 매일 태연히 지내면서 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하찮게 여길 것입니다.
이리하여 마음이 몹시 상한 사람은 그 후부터 반드시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기둥이 넘어지고 대들보가 부러지는 소리를 듣고도 형편을 물어보지도 않지만 동정심이 많은 사람은 계속 수고와 나무람도 마다하지 않고 때때로 애를 쓰면서 이웃집이 무너질까봐 염려합니다. 더구나 제가 여러 차례 수리까지 대신해주었는데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 조선은 못쓰게 된 배와 같습니다. 재목은 다 썩고 돛은 다 떨어져 나가버렸으니 나무와 돛을 바꾸어 튼튼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보는 사람이 다시 수리할 힘이 없다 하더라도 수시로 물이 새는 곳을 조사해 보고 방도를 세워 메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같은 배에 나쁜 놈이 있게 되면 배 안에 있는 돈을 가지려고 물이 새는 곳을 메우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를 일부러 요동시켜서 침몰시킨 다음에 돈을 가지고 도망칠 것입니다.
저는 주장(舟匠) 같이 여러 차례나 대신 수리했습니다. 전하와 여러 신하 및 백성들은 모두 배를 탄 사람들인데 만일 배를 요동시키는 대로 내버려두고, 주장(舟匠)이 잠깐이라도 소홀히 여기고 미처 수리하지 못하면 배 안의 사람들은 떠내려가다 어디서 빠져 죽을지 모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지난겨울부터 오늘까지 10달도 못되었는데 처음에는 뮐렌도르프〔穆麟德 : Möllendorf, Paul George von〕의 사건이 있었고, 계속하여 김옥균(金玉均)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금년 7월 사건이 있었으니 벌써 배를 요동시켜 침몰될 뻔한 적이 3차례나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배 만드는 주장의 임무를 담당했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3. 치국(治國)은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선의 병은 골수에 든 병입니다. 훌륭한 의사는 반드시 좋은 약을 보내줍니다. 그러나 좋은 약은 입에 씁니다. 앓는 사람은 그것이 병에 이롭다는 것을 모르고 싫증을 내며 거절합니다.
이런 때 달콤한 맛이 있는 것을 권하는 사람이 있으면 병자는 그것이 입에 맞는다고 기뻐하면서 먹습니다. 한 번 먹으면 병이 더해지고 두 번 먹으면 병이 아주 심해져서 구원할 수 없게 되어서야 달콤한 맛이 있는 것을 권한 사람의 해독을 알게 되지만 사실은 이미 때가 늦은 것입니다.
4. 나라는 사람의 몸과 같습니다. 몸에 비록 화려한 옷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집안이 거덜이 나서 아무런 먹을 것도 없다면 무엇으로 살아나가겠습니까?
치국자(治國者)는 우선 내정(內政)을 닦고 그 다음에 바깥 정사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비유해 말하건대 오늘 배가 부르다면 의복은 남루해도 손상될 것이 없지만 그렇지 않고 굶주림을 참지 못할 형편이라면 아무리 날마다 비단옷을 입은들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당면한 일 열 가지에 대한 의견을 올리려고 합니다.
1. 대신 임명에 대한 문제〔任大臣〕
대신이란 다 국은(國恩)을 입은 사람으로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벼슬이 높아지고 녹봉이 많아진 이상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宗社)를 보존하는 영원한 계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국가가 영원해지면 곧 그들의 녹위(祿位)도 영원하고 종묘와 사직도 영원할 것이며, 그들의 공훈도 명예도 영원해질 것입니다.
더구나 여러 대신들 가운데는 일을 많이 겪어보고 대의(大義)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특출한 공로를 세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역시 대사를 그르치지는 않을 것이니 그들을 믿고 일을 맡긴다면 백성들은 따르고 나라가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니, 반드시 관리로 등용했다면 의심하지 말아야 하며 의심스러우면 반드시 등용하지 말아야 일이 잘 이루어질 것입니다.
2. 간사한 신하들을 멀리 하는 문제〔屛細臣〕
세신(細臣)은 자기 한 몸의 명리(名利)에만 급급한 나머지 국가의 안위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한 번 벼슬자리를 얻게 되면 자그마한 충성과 믿음으로 남의 마음을 안정시키며 자그마한 좋은 일과 선심으로 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달콤한 말과 교묘한 계책을 백방으로 쓰다가 심하게 되면 매국(賣國)하고 영예를 구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게 될 것이니, 그 해독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소인들도 쓸만한 잔재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단지 각 관청에 소속시켜서 그의 장점을 나타내게 하면 되는 것이고, 날마다 임금의 곁에 있게 하여도 안되며 국정에 함께 참가시켜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가령 김옥균(金玉均)과 홍영식(洪英植) 등에게도 처음부터 전하를 가까이하는 권한을 주지 않고 각 관청의 밑에만 돌게 했더라면 갑신년(1884)의 변란이 일어날 리가 있겠습니까?
3. 여러 관청을 이용하는 문제〔用庶司〕
한 사람의 총명과 재능으로는 결코 이러저러한 복잡한 정사를 다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요(堯) 순(舜)같은 성인에게도 번거로운 사무를 맡아서 하지 말라고 경계한 신하가 있었던 것입니다.
크고 작은 일을 다 위에서 처리하는 것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법입니다. 신하들을 멀리하면 소인이 이 틈을 타서 나라의 권력을 몰래 틀어쥐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겉으로는 권력이 위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벌써 아래로 옮겨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폐단으로서 오늘 만국에는 없는 일입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여러 관청에 분임(分任)하고 전하는 그 큰 줄기만 틀어쥐고 잘잘못을 가려서 상벌을 분명하게 적용한다면 수고하지 않고도 제대로 다스려질 것이며 떠들 것도 없이 일이 제대로 되어갈 것입니다.
4. 민심을 얻는 문제〔收民心〕
지금 민심이 흩어졌으니 시급히 돌아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민심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흔들리고서야 지엽(枝葉)이 무성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민심을 얻는다는 것은 자그마한 은혜를 베푸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마다 큰물과 가뭄, 전염병으로 백성들의 곤궁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만일 한두 가지의 가장 나쁜 정사를 제거하기 위하여 힘을 쓰고, 다시 각사 대신들과 의논하여 어진 수령을 등용하고 백성들과 함께 이로운 일을 장려하고 해로운 일은 제거하게 하며 임기를 길게 하여 그들의 업적을 전최(殿最)한다면 백성들은 모두 선뜻 감화되어 메아리가 울리듯 형체에 따라 그림자가 비추듯이 될 것입니다.
5. 시기심과 의심을 푸는 문제〔釋猜疑〕
이때까지 상하가 서로 의심을 품으며 사람마다 자기 몸만 생각했는데 바로 이 때문에 모든 일이 날마다 잘못되어 가서 진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하가 침체된 것을 추켜세우고 의심을 깨뜨리며 결단하여, 의심스러운 사람은 파면시키고 믿을 만한 사람을 임명하여 사람마다 각기 자기의 장점을 다 힘써 나타내도록 하며 시기하고 의심하던 것을 얼음이 풀리듯이 싹 풀리게 한다면 신하들이 분발하여 당면한 곤란한 문제들을 함께 타개할 것이며, 정치가 날로 잘 되어 나갈 것입니다.
6. 재정을 절약하는 문제〔節財用〕
수입을 타산해서 지출하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다같이 그러한 것입니다.
근래에 창고의 저축이 줄어들고 국채(國債)가 늘어났으나 사실을 놓고 말하면 한 가지도 효과 있게 쓰이지 못하고 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이용되었으며, 소인들은 한갓 나라의 부강을 도모한다는 명색 밑에 저들의 이익만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전환국(典圜局)·제약국(製藥局)·기기국(機器局)을 설치하며 윤선(輪船)을 사오는 등과 같은 문제들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조선의 형편을 놓고 논한다면 이런 것부터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내정을 바로잡아 재물을 마련할 길을 열고 절약하는 일에 힘써서 나라의 재정이 넉넉해지고 집집마다 사람마다 풍족하게 되었다는 것이 인정된 다음에 차례로 시행해서 부강을 서서히 도모해야 합니다.
만일 재정의 출입을 타산하지 않고 단지 겉치레만 많이 한다면 앞으로 성과는 없고 낭비만 날로 더해질 것이며 재정은 고갈되어 더욱 빈약해질 것이니 지금 고치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7. 신하들의 말을 신중히 듣는 문제〔愼聽問〕
인군(人君)이란 한 나라의 원수입니다. 슬기있는 신하이건 어리석은 신하이건 모두 다 임금이 자기 의견을 채택해 줄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보면 매우 나쁜 놈들이 사변을 꾸며내어 재화를 다행으로 여기면서 그 속에서 이득을 얻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속이는 것입니다. 임금의 의도를 타산해가지고 이익으로 유혹시키되 임금의 마음에 들고 귀에 솔깃한 소리를 하기도 하며 혹은 당장 큰일이 날 것 같은 말을 하여 두려워하기만 바랍니다. 이런 잡류배들을 죄를 줄 것이고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자들입니다.
신하들의 말을 들을 때는 우선 그 말이 이치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따져보며 계속해서 그 말이 과연 진실한가, 진실하지 않는가를 살펴보고 조금이라도 속이는 데가 있으면 먼 지방으로 내쫓음으로써 의견을 제기하는 길을 깨끗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명확히 알고도 그대로 쓴다면 이것은 곪은 곳을 짜버리지 않고 근심을 남겨두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첨하는 말을 하는 자들은 날로 많아지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날로 적어질 것이니 나라의 복으로 될 수 없습니다.
바른 말을 받아들이고 아첨하는 말을 거절하는 것은 은탕(殷湯)과 주무왕(周武王)이 흥성하게 된 까닭이며 아첨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바른말을 거절하는 것은 하걸(夏桀)과 은주(殷紂)가 망하게 된 까닭이었습니다. 지난 시기의 교훈이 먼 옛날의 일이 아니니 어찌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8. 상과 벌을 정확히 주는 문제〔明賞罰〕
대체로 상벌은 정령의 근본이며, 인심에 관계된 문제입니다. 상은 반드시 신의가 있게 하고 벌은 어김없이 집행해야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신하들을 통제도 하고 처벌도 할 수 있습니다.
법사(法司)에서 처결을 공정하게 하고 출척(黜陟)을 엄격히 하여 털끝만치도 사견(私見)을 가지지 않는다면 상벌이 명백해지고 정사에 대한 명령이 집행되며 사람들의 마음도 다 밝은 데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9. 친할 사람을 가까이 하는 문제〔親所親〕
중국과 조선은 서로 의지한 지 수백 년이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굳게 결합되어 온 것도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며 아침에 떠나면 저녁에 당도할 수 있게 잇닿아 있으니 위급한 일을 함께 타개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친밀하게 서로 의지한다면 외인(外人)이 자연히 이간질을 할 수 없고 떠도는 말도 저절로 없어져서 인심이 그 덕에 안정되고 종사(宗社)가 그 덕에 영원히 굳건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친밀하게 지낸다는 것은 겉치레나 하는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서로 성의를 다해 관계하며 두 나라가 한마음이 되어 피차간에 서로 믿으면 어떤 일이건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중국이 성원하면 외부의 침입이 생길 수 없으므로 얼마든지 생각을 가다듬어 정사를 잘하여 나라의 부강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인데 무슨 이롭지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10. 외교를 조심하는 문제〔審外交〕
외교란 만국의 이목이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서 또한 나라의 중요한 일이니 외서(外署)들이 성실하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밖으로는 예의를 다하고 안으로는 믿음을 보여야 우의(友誼)를 오랫동안 두텁게 하여 각기 서로 편안히 지내게 됩니다.
만일 명령이 한결같지 않고 정사도 여러 갈래로 나온다면 각국의 웃음거리로 될 뿐 아니라 앞으로 외인에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불측한 심보를 가진 나쁜 놈들이 사단을 빙자하여 우롱해서 집어삼킬 흉악한 계책을 실현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난리를 초래하는 길이 됩니다. 만약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할 것 없이 꼭 대신들과 공동으로 의논하여 처리한다면 어떻게 음모가 있을 수 있고 어떻게 은밀히 해치는 일이 생길 수 있으며 어떻게 갑신년의 변란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이상의 좁은 소견과 사리에 맞지 않는 논의는 오랫동안 쌓여있던 저의 생각으로서 다른 신하들도 능히 말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제 와서 비로소 전하에게 진술하는 것은 이 저의 계사에 대해 반드시 헐뜯는 사람들이 나타나 뒷전에서 말하기를, ‘원아무개가 우리의 내정에 간섭하려 하니 그 심보를 알 수 없으므로 말을 믿을 수 없다.’라고 할 것 같고 저는 그렇게 아뢰는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하에게 아뢰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앞서 여러 신하들이 말했을 때에도 틀림없이 헐뜯는 사람이 있어 뒷전에서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보신(保身)할 것만 알았지 큰 계책에는 밝지 못하다.’ 라고 하면서, 모함하여 함정에 빠뜨려서 간교한 모략을 굳혔을 것입니다. 이래서 여러 신하들은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감히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헐뜯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건대, 어느 것이건 사람들을 모조리 사기를 잃고 패망하게 하여 거기에서 이득을 보려는 것이었으니, 이들이 김옥균 등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제가 늘 아뢰기를, ‘김옥균을 일본에서 찾아내려고 할 필요가 없으며 조선 안에서 생겨나는 김옥균을 막아야 한다.’ 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요즘에 듣자니 전하가 명철한 결단으로 전날의 잘못을 힘써 고치려 한다고 하기 때문에 감히 한두 가지 의견을 적극 제기하는 것입니다.
저의 본성이 고지식하므로 기탄없이 말했으니 잘 살펴주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총리(總理)        원세개(袁世凱)에게 회답하기를,
"어제 보낸 편지를 보았는데 충고가 극진했습니다. 어리석은 이 몸을 가르칠 수 없다고 여기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타일러 주었는데 글자마다 약석(藥石)이 되어 글을 읽으면서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나라가 천조(天朝)를 섬겨온 지 200여 년이 되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황은(皇恩)을 입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근래에 와서 시국이 일변하면서 외교 관계가 더욱 넓어져가나, 이 나라는 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면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홀로 지냈습니다. 이런 때에 천조에서 이끌어주고 일깨워주며 친목을 도모하고 협약을 토의 체결하여 서로 의지하게 했으니, 여기에서 천지가 만물을 덮어주듯 지공무사(至公無私)한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도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임오년과 갑신년의 변란이 생겨서 종사가 몹시 위태롭게 되고 사람들이 도탄에 빠졌는데 제때에 천조에서 군사를 출동시키고 재물을 쓴 덕으로 난리를 평정하고 위험에서 구원되게 되었습니다.
외인이 틈을 타서 책동할 우려가 있으면 그때마다 난리를 수습하기 위하여 번개처럼 빨리 와서 종사를 다시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나라가 다시 이전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또 계속 은혜롭게 보살펴 주었으니 이는 자신의 이익을 생각지 않고 도운 성대한 덕과 크나큰 은혜입니다.
필부필부(匹夫匹婦) 조차도 한 술의 밥을 얻어먹은 은혜에 대해서 갚을 생각을 하는데, 더구나 이전에는 섬겨온 의리가 있고 뒤에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은혜를 입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그 은혜가 온몸에 사무치고 있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설사 잠시라도 잊으려 한들 천지(天地)와 같은 은혜를 어떻게 잊으며 신명(神明)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나라들이 외교 관계를 맺은 이래로 외진 나라에서 아는 것이 적고 근본이 공고하지 못한 데다가, 나이 젊고 경박한 무리들이 낡은 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해서 거짓말을 만들어 의혹되게 하는데 이것이 암둔한 나의 두통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옛글에는, ‘높은 태산(泰山)도 개미 구멍 때문에 무너진다.’ 라고 했습니다. 이 무리들을 두려워할 것은 못되지만, 혹 이 때문에 그릇된 말이 다시 많아질 것 같아서 엄하게 더 막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요언(謠言)이 여러 갈래로 생겨서 막자고 해도 이루 다 막을 수 없습니다. 이는 부모 형제간에서는 남들이 이간하는 말을 한다 해도 속으로 반성하면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족하(足下)는 우리 나라에 온 5년 동안에 좋은 일 궂은 일을 함께 치루었고, 환난도 같이 겪어서 나의 마음속을 족하가 다 알고 호응하기 때문에 위급할 때에 오직 족하에게 의거했으며, 족하 역시 이험(異驗)을 가리지 않고 남들의 말도 탓함이 없이 한결같은 정성으로 이 변방 나라를 보호함으로써 밤낮으로 이 나라를 생각하는 황제의 근심를 푸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하기를 하늘의 해가 비추듯이 하였으니, 우리 나라의 높고 낮은 사람들치고 그 누가 족하의 의리를 흠모하고 감격의 칭송을 하지 않을 것입니까?
근래에 이 나라의 정령이 하나도 집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 암둔한 내가 똑똑치 못해서 일처리를 잘하지 못하고 안팎의 여러 신하들은 우물쭈물하면서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족하만은 간곡하게 일깨워주며 시폐(時弊)를 명확하게 논하여 황제까지 보도록 했으니, 이것은 암둔한 나를 도와서 스스로 날로 새롭게 하는 성과를 거두게 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히 마음과 뜻을 깨끗하게 씻고 신정(新政)을 도모함으로써 고심어린 족하의 기대에 부합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족하는 두터운 우의를 아끼지 말고 때때로 교훈적인 말을 해줌으로써 나의 마음을 확 트이게 하여 언제나 막히지 않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삼가 회답을 보냅니다. 복을 받기를 빕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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