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5권, 고종25년 1888년 8월

싸라리리 2025. 1. 2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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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경진

만경전(萬慶殿)에 나아가 각 국의 공사들을 접견하고 이어 사찬(賜饌)하였다.

 

시임 및 원임 각신(閣臣), 승지(承旨), 사관(史官), 홍문관(弘文館), 내무부(內務府)의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에게 사찬(賜饌)하였다.

 

특별히 경범 죄수를 석방하였다.

 

8월 4일 계미

이헌영(李𨯶永)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홍우창(洪祐昌)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한장석(韓章錫)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돈하(李敦夏)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호준(李鎬俊)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민치헌(閔致憲)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8월 5일 갑신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왕세자가 시좌(侍座)한 가운데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는데 제술(製述)로써 강(講)을 대신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조중구(趙重九)·조선구(趙善九)·김상덕(金商悳)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경학원(經學院)의 장훈(掌訓)을 선택해서 의망(擬望)하지 않을 수 없다. 원(院)에 상주할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한 자리를 음관(蔭官) 6품직으로 시행하되, 전 군수(前郡守) 이헌영(李憲永)을 차하(差下)하여 빨리 원(院)에 나아가 학업을 성취하게 하라."
하였다.

 

윤우식(尹雨植)을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삼았다.

 

8월 6일 을유

종묘(宗廟)에 나아가 전알하고 이어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왕세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8월 7일 병술

전교하기를,
"흥완 군부인(興完君夫人)의 병이 대단히 심하다고 하니, 어의(御醫)를 보내 알맞는 약을 가지고 가서 문병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연세는 비록 많지만 아직 기운이 왕성하여 기뻤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들으니 놀랍고 가슴 아픈 마음을 어떻게 다 형언하겠는가? 지난날을 생각하면 슬프기 그지없다. 흥완 군부인(興完君夫人)의 상사(喪事)에 동원 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특별히 골라서 보내주고, 부의는 호조(戶曹)에서 넉넉하게 실어 보내도록 하라. 예장(禮葬)은 3등의 예장으로 거행할 것이며, 성복일(成服日)에 내시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흥완 군부인(興完君夫人)의 초상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보내서 상주를 위로하고 오도록 하며, 각종 비단 5필(匹), 전칠(全漆) 1두(斗), 목(木)과 포(布) 각 5동(同), 돈 1,000냥, 쌀 30석(石)을 특별히 실어 보내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대궐 안이 얼마나 엄숙한 곳입니까? 그런데 듣자니 내반원(內班院)의 군사들이 노름을 하다가 서로 싸움질하여 살인하는 변고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놀랍고 통분한 일이어서 차라리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요즘 왕궁이 엄숙하지 못한 것이 어찌하여 이토록 극도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만약 병조(兵曹)에서 규정대로 적간(摘奸)하였다면, 어찌 생기(省記)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는 놈이 있겠으며 또 어찌 고금에 없는 변괴가 생겨나겠습니까? 그날 입직(入直)한 병조의 당상(堂上)은 견파(譴罷)의 형전을 시행하고, 낭청(郎廳)은 나문(拿問)하여 감처(勘處)하소서.
싸움질을 한 근본 원인은 중관(中官)의 직소(直所)에 있었던 만큼 평상시에 신칙하지 않았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으니 해당 중관을 해부로 하여금 나문하여 엄히 처벌하게 하고, 죄를 범한 여러 놈들도 전례에 따라 감단(勘斷)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니 형조(刑曹)에서 구핵(鉤覈)하여 주모자는 군문(軍門)에 넘겨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고, 그 나머지 여러 놈들도 모두 엄히 형신(刑訊)하여 도배(島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상소를 올려 재상직에서 사직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김성근(金聲根)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이순익(李淳翼)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8월 8일 정해

칠석제(七夕製)를 성균관(成均館)에서 설행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이성렬(李聖烈), 진사(進士) 이오응(李五應)에게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 전시(殿試)의 시권(試券)에 어보(御寶)를 찍는 것을 각별히 살펴 원래의 시권 외에는 한 장도 이중으로 허락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약 다시 이전처럼 뒤섞인다면 해당 승지(承旨)는 엄하게 감처(勘處)하고 하인들도 특별히 엄하게 처벌할 것이니, 그리 알고 거행하라."
하였다.

 

8월 9일 무자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왕세자가 시좌(侍座)한 가운데 경과 별시 문무과(慶科別試文武科)의 전시(殿試)를 행하여, 문과에서 송종오(宋鍾五) 등 39인을 뽑았고 무과에서 신현모(申鉉謨) 등 282인을 뽑았다.

 

이교영(李敎榮)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8월 10일 기축

김정규(金貞圭)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8월 11일 경인

만경전(萬慶殿)에 나아가 각 국의 공사를 접견하였다.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왕세자가 시좌(侍座)한 가운데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의 응제(應製)를 행하여,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장기연(張紀淵), 표문(表文)에서 유학 이하준(李河駿)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두 번째 상소를 올려 재상직에서 사임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8월 12일 신묘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영준(閔榮駿)이 의주부(義州府)에서 사람이 물에 빠져 죽고 민가가 물에 떠내려가거나 무너졌다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 장계(狀啓)를 보니, 마음 가득 놀랍고 참혹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의주부는 바로 변경의 중요한 진(鎭)으로서 조정에서 중시하는 것이 다른 곳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체의 도가 풍년을 고하는 이때, 갑자기 이 한 고을만 유독 침수 피해를 당하여 민가가 1,927호나 물에 떠내려가고 303명이 물에 빠져 죽었으니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실로 나에게 덕이 없기 때문이니, 백성들에게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사나운 물결에 휩쓸려 아우성치고 고통스러워하는 참상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입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다. 시체를 묻어주고 집을 지을 방도에 대하여 도신(道臣)과 부윤(府尹)이 마음을 다하여 돌봐주겠지만, 어찌 규례대로만 하고 말겠는가?
정주 목사(定州牧使) 이교직(李敎稙)을 특별히 위유사(慰諭使)로 차임하여 달려가 피해 상황을 두루 살피도록 하고, 내탕고(內帑庫)의 돈 1만 냥을 적절히 나눠 주면서 백성들을 직접 만나 타일러 줌으로써 아끼고 보호하는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 죽은 사람은 할 수 없으니 따로 강변에 제단 하나를 만들고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물에 빠져 죽은 넋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도록 하라. 살아 있는 사람들도 의복도 먹을 것도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몸을 가리고 입에 풀칠을 하겠는가? 추위가 닥치기 전에 빨리 안착시켜 한 사람도 살 곳을 잃고 유리하는 한탄이 없도록 하라. 산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신역, 환곡, 군포를 모두 탕감하고 그들이 지고 있는 부역과 관련하여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돌봐줄 수 있는 것들은 위유사(慰諭使)가 도신, 부윤과 충분히 논의하고 강구해서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괴산(槐山) 등 고을에서 표호(漂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8월 13일 임진

함경 감사(咸鏡監司) 조병식(趙秉式)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
"궁궐문을 출입하는 데는 원래 정식(定式)이 있으나, 근래에 법적 통제가 해이해져 옛 법을 준수하지 않으므로 난잡한 지경에 이르러도 거의 아무 제한도 없으니 이보다 심히 놀랍고 개탄할 습속은 없다. 지금부터 법을 위반하는 조정 관리들과 중관(中官), 액속(掖屬)들은 초기(草記)한 다음 논죄하여 처벌하고, 신칙하지 못한 도승지(都承旨)와 병조 당상(兵曹堂上)도 엄하게 감처(勘處)함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내용으로 다시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조영하(趙榮夏)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8월 14일 계사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이석종(李奭鍾)은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의 봉사손(奉祀孫)이니, 사악(賜樂)하라. 새로 급제한 신좌균(申佐均)은 장무공(莊武公) 신여철(申汝哲)의 봉사손이니, 사악하고 그 사판(祠版)에 치제(致祭)하라. 새로 급제한 김용덕(金容悳)은 문효공(文孝公) 김만중(金萬重)의 종손이니 사악하라. 새로 급제한 김영의(金永儀)는 서연관(書筵官) 김낙현(金洛鉉)의 아들이니, 사악하라. 새로 급제한 윤병수(尹秉綏)는 계방(桂坊)이니, 사악하라."
하였다.

 

8월 15일 갑오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번 남병사(南兵事)에 대한 처분은 충분히 헤아려보고 부득이해서 나온 것인데, 지금 도신(道臣)의 장계에 나열된 것은 가릴 수 없는 사실이고, 북쪽 백성들의 울분은 더욱 격해지고 있다. 사체와 기강으로 헤아려볼 때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만큼 남병사(南兵使) 이용익(李容翊)을 해부(該府)에서 잡아다가 엄하게 신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6일 을미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갔다. 왕세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세 번째 상소를 올려 재상직에서 사임할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차해 주었다.

 

조병세(趙秉世)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규원(李奎遠)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8월 17일 병신

심순택(沈舜澤)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심동신(沈東臣)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홍우창(洪祐昌)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홍철주(洪澈周)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창희(金昌熙)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안주(安州) 등 고을에서 표호(漂戶), 퇴호(頹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8월 18일 정유

전교하기를,
"군사에 관한 정사는 나라의 큰 정사이다. 통제사(統制使)가 삼남(三南)의 수군을 관할하고 있으나, 육군은 한결같이 한가하게 내버려두어 소루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청주(淸州)는 삼남(三南)의 요충지이다. 지금부터는 충청 병사(忠淸兵使)를 삼도육군통어사겸 충청병사(三道陸軍統禦使兼忠淸兵使)로 고쳐 하비(下批)하고, 영(營)의 제도를 전부 통영(統營)의 규례대로 시행하라. 모든 조치는 해당 수신(帥臣)이 총리대신(總理大臣)에게 나아가 계품(啓稟)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병시(金炳始)를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으로 제배(除拜)하였다.

 

민응식(閔應植)을 삼도육군 통어사(三道陸軍統禦使)로, 정범조(鄭範朝)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김재현(金在顯)을 시강원 좌빈객(侍講院左賓客)으로, 정세원(鄭世源)을 설서(說書)로, 윤우식(尹雨植)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일본 체신성(日本遞信省)과 판리통련만국전보약정서(辦理通聯萬國電報約定書)를 체결하였다.
〈판리통련만국전보약정서(辦理通聯萬國電報約定書)〉
조선 정부에서 부산 항구까지 전선을 연결하는 일이 지금 준공되었다. 이에 조선과 일본 양국 정부에서는 모두 위원을 파견하여 부산항에 회동하여 세계 각 국과 전보 통신을 연결하는 세절(細節)을 협의하였다. 당해 조관은 다음과 같다.
제1관
부산을 경유하는 전보는 만국전보연합조약(萬國電報聯合條約) 및 세절(細節)에 준하여 구주(歐洲)의 대외법을 적용한다. 그러나 조선, 일본, 청국 및 부근의 지방에서 【홍콩〔香港〕 이동에서 블라디보스톡〔烏拉日阿斯德〕 이서에 이르기까지】 상호 한문으로 전보하는 경우에는 숫자로 표시하여 합계하는데 매 3자를 한 단어로 하고 나머지 숫자는 비록 3자가 차지 않아도 한 단어로 계산한다.
제2관
부산을 경유하여 일본 및 기타 여러 나라에 발송하는 전보로서 부산 이외에 관련된 것은 당해 전보비를 각 국의 금은 화폐의 시가에 따라 때로 올리고 내리며, 혹 연합한 나라 가운데 임시 개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는 부산에 있는 일본 우편 전신국(日本郵便電信局)에서 당해 개정표기를 별도로 보낸다. 또 부산을 경유하여 부산 이북의 기타 각 국에 보내는 전보비용은 조선의 부산 전보국(釜山電報局)에서 따로 당해 개정표기를 보내 상호 계산하여 은화〔銀洋〕로 보상한다.
제3관
양국이 교송(交送)하는 전보는 그 건수와 명목을 상세히 기록하여 수수(授受)를 분명히 해야 한다.
제4관
양국 간에 오간 전보의 비용은 그 다음날 오전 11시에 별표의 갑호, 을호에 근거하여 기록으로 남겨 뒷날의 증거로 삼는다.
제5관
합동 결산은 매 월말에 별표 병호의 등기 문서에 근거하여 공제액의 액수를 감정한다. 나머지가 있을 경우, 기한을 연장하여 청산할 수 있다. 다만 늦어도 다음달 10일을 넘길 수 없다.
부산에 있는 일본 우편 전신국에서 갚아야 할 것이 있을 경우 조선의 부산전보국에 보내며, 조선의 부산 전보국에서 갚아야 할 것이 있을 때에는 부산에 있는 일본 우편 전신국에 보내 합당하게 결산한다. 10일이 지나도록 청산하지 않았을 때에는 부산의 감리(監理)와 부산에 있는 일본 영사가 공문으로 상환을 감독하여 기한을 어기지 못하도록 한다.
제6관
양국 간의 전보국 전보〔局報〕는 영어를 사용하며, 비용 변상, 보고 등의 문제로 각 국과 교섭할 때에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통용한다.
제7관
양국 간에 교송(交送)하는 세계 각 국의 전보 및 그 응용 문서에 기재하는 월, 일은 모두 양력을 사용한다. 이상에 대하여 양국 위원은 모두 정부의 위임을 받아 상호 서명하고 도장을 찍어 신용을 밝힌다.
대조선국(大朝鮮國) 개국(開國) 497년 8월 18일
통훈 대부 전보국주사(通訓大夫電報局主事) 김관제(金觀濟)  대일본(大日本) 명치(明治) 21년 9월 23일 체신성 외신국 차장(遞信省外信局次長) 나카노 무네히로〔中野宗宏〕


【원본】 29책 25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2책 300면
【분류】외교-왜(倭) / 군사-통신(通信) / 재정-국용(國用)
대일본(大日本) 명치(明治) 21년 9월 23일
체신성 외신국 차장(遞信省外信局次長) 나카노 무네히로〔中野宗宏〕


【원본】 29책 25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2책 300면
【분류】외교-왜(倭) / 군사-통신(通信) / 재정-국용(國用)

 

8월 19일 무술

좌의정(左議政) 김병시(金炳始)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이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에서 한가히 지낸 지 이제 3년이 되었다. 나는 진실로 경이야말로 나라의 중책을 맡길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 경도 어찌 시골에 있으면서 조정에 대한 근심이 없었겠는가? 지금 남방은 가뭄이 들고 서쪽 지방에는 수재가 났으며, 북쪽에서는 백성들이 소란을 피운다는 보고가 날마다 꼬리를 물어 놀랍고 두려운 데다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재정은 파탄이 나 중앙과 지방이 텅 비었으니 위태로운 기미와 패망할 증거가 있는데 믿을 것이란 하나도 없다. 이러한 때 나라의 존망을 걸머진 몸으로 두루 다스리고 널리 구제하여 나라의 형세를 반석에 올려놓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착시키는 일을 경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정승의 자리에 다시 등용하여 어려움을 구제하는 데 다시 쓰려는 것은 나 혼자만 마음으로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설령 경이 겸손하게 사양하면서 물러나려고 한들 어찌 뜻대로 되겠는가? 내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경 역시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지극히 간절한데서 나온 만큼 형식을 차리지 않을 것이다. 경도 규례를 갖추는 행동을 하지 말고 선뜻 나와 응하여 갈망하는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 비교는 하교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내무부(內務府)에서 아뢰기를,
"군수물자의 부족이 요즘과 같은 때가 없으나 달리 조치를 취할 방도가 없습니다. 관서 산성(關西山城)의 향곡(餉穀) 가운데서 4만 석(石)에 한해 당분간 먼저 가져다 쓰되, 유사시를 대비하여 물자를 신속히 도로 채워 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입본(立本)하는 절차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대책을 강구한 다음 보고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1일 경자

조병직(趙秉稷)을 전보국 총판(電報局總辦)으로, 이완용(李完用)을 회판(會辦)으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병조 정랑(兵曹正郞) 김사철(金思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지난번에 내리신 전지(傳旨)를 받드니, 신을 주차미국참무관(駐箚美國參務官)으로 임명하여 빨리 가서 사신(使臣)의 일을 처리하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신은 명령을 받고 여러 날 동안 스스로 묻고 스스로 의문을 가졌지만, 실로 우리 전하(殿下)의 깊고도 밝은 소견으로 어째서 이처럼 선발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조사해보건대, 우리나라와 구미(歐美) 각 국이 조약을 체결하던 초기에 성명(聲明)을 내어 자주(自主)를 승인했지만, 전권 대표(全權代表)를 파견하여 주재시킬 때는 무수한 곡절이 있는 것입니다. 신이 상세한 것은 모르지만, 대체로 나라의 체제와 조약 내용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스스로 해결할 길이 없어 결국 임금의 권한을 제한하고 있으니, 사신의 명목도 실속이 없게 되었습니다. 외국에 주재하는 신하가 아무리 임금의 명령을 욕되지 않게 하고 나라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나라의 일을 위하여 감히 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날 각 국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상호 주재시키는 것은 모두 상업에 관한 일을 보호하며 교섭관계를 처리하려는 견지에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통상을 한 지 10년이 되지만, 한 명의 상인도 부지런히 원대한 계획을 세워 해외에서 무역을 하였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으니, 사신을 파견하여 상주시키더라도 사실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신을 내보내는 경비를 놓고 말하더라도, 한 번 움직이는데 만 냥이라는 거액이 드니 각 국의 규례처럼 경비를 충당할 길이 없는데, 유독 수도에 주재시키는 일을 각 국에서 하는 것처럼 한다면 그 형세는 틀림없이 나라의 채무만 더욱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 지경에 이르게 되면 사신으로 나간 여러 신하들 자신과 집안의 고통에 대해서는 논할 것도 없고, 나라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나라의 재정을 축내는 면에서는 게다가 어떠하겠습니까? 자신이 사신으로 임명되어 사신으로서의 직책을 다하지도 못하고 한갓 나라의 재정만 허비한다면, 맡은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죄와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다는 비방을 스스로 불러들이게 되리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것이 또한 신이 나라의 재정을 위하여 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신은 성품이 완고하고 식견이 고루하여 최근에 와서 시행되고 있는 공법(公法), 조약, 규정, 각서, 등 일체 현행 중요 사무에 관한 문건이 한문으로 번역된 것을 본 일이 없으며, 혹 보았다고 해도 그 본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그 규례와 투식이 어떠한지도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외국에 나가면 자주 외국 사람과 교제하게 되는데, 문자와 언어는 가는 곳마다 서양 문자와 서양 언어가 아닌 것이 없으니, 신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갑자기 그런 것을 대하게 되면 오관(五官)이 비록 구비되어 있지만 사실 세 가지 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입으로 말할 수 없으니 벙어리이고, 귀로 들을 수 없으니 귀머거리이며,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소경인 것입니다. 벙어리에 귀머거리, 소경까지 겸했으니 이웃 나라에 글을 전할 수도 없거니와, 더구나 참무관으로서 사신의 직무까지 맡게 된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먼 바다와 험한 풍랑에 몸을 의지하고 여러 나라에 주재하며 교섭을 진행하는 과정에 장차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것이 또한 신이 나라의 체모를 위하여 감히 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신은 몇 년 후에 나라의 형세가 좀 펴지고 상업이 점차 번성해진 다음 그때 가서 파견하여 주재시킨다 하더라도 늦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에 와서 그만둘 수 없다면 이미 파견되어 있는 공사관(公使館)의 관원을 임시로 충당하여 그대로 주재시키는 것이 비용을 줄이는 하나의 방도가 될 것이며 또한 대신 처리함에 있어 적절히 조처하는 면에서도 편의로 보아도 잘못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사해보건대, 각 국 공사관에서도 흔히 이런 규례를 적용하고 있으니, 성명(聖明)께서 세심하게 살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신의 직무는 가벼운 것이 아닌 만큼 사임하지 말고 빨리 떠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2일 신축

의주부(義州府)의 백성들을 위유(慰諭)하기를,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하다. 너희 의주 백성들아, 그대들이 사는 곳은 먼 서쪽 지방으로 중국과 교제하는 관문이며 중진(重鎭)이다. 변경은 원래 일이 많은데다가 사신의 왕래가 그칠 사이가 없었다. 밤낮으로 근심하는 나의 생각에 언제 하루인들 너희들을 잊은 적이 있겠는가? 바야흐로 다행히 온 도에 풍년이 들었다는 보고가 올라오던 중에 갑자기 이 고을에서 사고가 발생하였으니, 때 아닌 홍수에 놀랍고 참혹한 생각뿐이다. 물에 떠내려간 민가가 거의 2,000호에 가깝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300여 명이나 된다니, 수재가 있은 이래로 이와 같이 한 고장만을 참혹하게 만든 때는 없었다.
아! 이 백성들은 죄 없는 나의 백성들이다. 큰 물살에 휩쓸며 울부짖으며 떠내려가는 가운데 아비는 자식을 구하지 못하고 자식은 아비를 구하지 못했으며, 집은 떠내려가고 혈육은 물에 빠져 죽었다. 부유한 집들은 저축했던 것이 다 없어지고, 가난한 집들은 그릇조차 남은 것이 없다. 온 들판이 물결에 휘감겨 도랑의 경계마저 없어졌으며 모든 곡식이 물에 잠겨 수확할 가망이 없으니, 울부짖는 애통한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고 신음하는 모습은 눈으로 보는 듯하다. 내가 너희들의 부모가 되어 궁궐에 거처하면서 비단 옷과 쌀밥이 마음에 편하겠는가? 잠자리에 드는 시각에도 불을 밝혀놓고 날이 밝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니, 이것은 다 나에게 덕이 없어 자연 현상이 순조롭지 못하여 이런 드문 재변을 초래한 것이다.
지금 뽕나무밭이 변하여 바다가 되듯 잠깐 사이에 세상이 변하였으니, 기댈 데 없는 홀아비, 과부들이 누구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며, 부모 잃은 어린아이들을 누가 보호하여 키우겠는가? 죽은 사람도 참으로 참혹하거니와 산 사람 역시 가엾다. 물에 빠진 시신과 집기들을 건져내는 와중에 질병이 발생하였으니, 놀랍고 황급한 상황에서 살아갈 길이 막연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저도 모르게 벽을 맴돌면서 서성이게 된다. 더구나 임진년(1592)에 어가(御駕)를 호종한 충신과 신미년(18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의병을 일으킨 공적에 대하여 역대 조정에서 높이 표창하였고 평상시에 크게 의지하던 곳이니, 어찌 금성철벽으로서 나라의 울타리가 될 뿐이겠는가? 저 물에 떠내려간 민가와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이 다 그들이 남긴 후손들이니, 나의 근심과 슬픔은 더더욱 끝이 없다.
이번에 위유하는 명은 나의 마음을 다 털어놓은 것이다. 피해 복구로 지급하는 내탕전(內帑錢)의 돈 1만 냥은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니, 이것으로 어찌 백성들이 만분의 일인들 살 터전을 마련하여 안정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골고루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지 적은 것이 걱정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옛날의 가르침이다. 도신(道臣)과 부윤(府尹)은 응당 구휼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추위가 닥치기 전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차례차례 집을 지어주어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잃어 버렸다는 한탄이 없도록 하라.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강변에 제단을 만들고 술을 부어서 혼(魂)을 불러서 명막(冥漠) 중에 헤매는 원통하게 죽은 넋을 위로하도록 하라.
아! 먼 곳의 백성들도 가까운 곳에 있는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백성이라는 것이 나의 한결같은 마음이며,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한 사람이라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 또한 나의 고통이다. 돌봐주고 안착시키는 모든 방도가 타들어 가는 들불을 잡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니, 구렁텅이에서 구원하여 잘 안착시키는 것이 바로 이때에 해야 할 일이다.
생각건대 이 몇 가지 구휼(救恤)의 은전은, 궁지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고, 물에 빠진 사람들을 소생시키고, 놀란 사람들을 조금 안정시키고, 살림살이가 점차 완비되어 죽이라도 끓여 끼니를 이을 수 있고, 대충이라도 집을 만들어 거처를 마련하게 하는 방도에 가깝지 않겠는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막론하고 신역(身役), 환곡(還穀), 군포(軍布)를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라. 그리고 그들이 지고 있는 부역과 관련하여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구휼할 수 있는 것들은 위유사(慰諭使)가 도신, 부윤과 함께 사안에 따라 낱낱이 열거하여 계속 보고하면 마땅한 조처가 있을 것이다.
아! 너희 의주 백성들은 나의 위유를 거듭 듣고 믿을 것이며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다.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이순익(李淳翼)이 지었다.】


【원본】 29책 25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2책 301면
【분류】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좌의정(左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이 직임에는 기필코 다시 제수 되어서는 안 되며 결코 감히 다시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것은 실로 신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전하께서는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무능한 사람에게 억지로 시켜보는 것이 혹 시험해 보기 전이라면 그럴 수도 있고, 맞지 않는 자리를 무릅쓰고 맡는 것이 혹 일을 해보기 전이라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시켜보아 성과가 없었으니 다시 강요하는 것은 타당치 않으며, 일을 맡아 처리하지 못하였으니 다시 무릅쓰고 맡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구나 신이 외람되게 이 직임을 차지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그 또한 익히 살피고 충분히 헤아리셨을 것입니다. 신에게 이번에 제수된 직임은, 직책으로 보면 신이 이미 그르친 자리이고, 사람으로 보면 이미 물러난 몸인 만큼, 다시 이런 그릇된 명령이 있을 줄은 생각 밖이어서 신은 사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 자리가 빈다고 하여 당분간 자리나 지키게 하는 거라면 나라의 체모상 이와 같이 군색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또 변변치 못한 사람에게 맡기면서도 잘못될 것을 우려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임금이 잘못 취한 조치에 대하여 감히 강경하게 간쟁을 하는 것은 신하의 직분입니다. 이번의 조치에 대하여 신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신은 하찮은 신의 믿음을 고수하고 감히 전하의 엄숙한 위엄에 맞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신을 헤아려보지 않고 함부로 일을 해보려고 마음먹고 용감하게 나서는 것은 역시 어느 정도 혈기가 있을 때의 일입니다. 신은 노쇠하고 기가 꺾여 옛날과 같지 않습니다. 망상조차도 모두 식은 재가 되고 풀린 얼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잃고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중에도 때로 잠깐 정신이 들면 근심과 걱정이 앞서 참으로 한번도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계책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온갖 생각을 하며 조금이라도 보답하려 해봐도 결국은 누차 진달했던 진부한 의견을 벗어나지 못하고, 가슴속이 텅 비어 더 이상 펼칠 계책이 전혀 없으니, 신의 의지와 기개가 꺾여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형세는 또한 오랫동안 병들어 치료할 수 없게 된 것과 같습니다. 온몸이 모두 다 마르고 마비되어 가는데, 단지 치료할 수 없다는 핑계로 더 이상 찜질하고 침을 놓는 일도 의논하지 않는다면 되겠습니까? 성상께서 근심스러워하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심정을 가지고 있는 만큼 문제는 크게 수습할 훌륭한 인재가 속히 시험하여 증상에 대해 약을 투여하는 데 달려있으니, 성심으로 도와줄 이를 구한다면 어찌 적임자가 없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 신중히 적임자를 선택하고 정력을 기울여 나라를 다스린다면, 짧은 기간에 위기를 전환시켜 안정한 세상을 가져오지 못하리라고 어찌 알겠습니까? 신이 이 때문에 구구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신 같은 사람이 부당하게 이런 자리를 잠시라도 외람되게 차지한다면 한갓 조심하면서 세월만 보낼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백성과 나라의 계책을 깊이 생각하시고 빨리 신의 좌의정의 직함을 체차(遞差)해 주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며칠 전에 돈유(敦諭)를 내리고 나서 조정에 나오겠다는 소식을 기다렸으나 부주(附奏)를 보니 계속 사임을 청하는 글이어서 대청에서 기다리던 나머지 맥을 놓고 실망하였다. 경이 이처럼 나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백성들과 나라의 형세는 마치 오랜 병이 고질로 되어 온몸이 다 마르고 마비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온갖 증상이 번갈아 침범하여 치료할 수 없게 된 것과 같다는 경의 말은 참으로 좋은 비유이다. 그런데 만일 훌륭한 의원을 구하여 속히 약을 투여해 크게 수습하고자 한다면 경을 버리고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다시 정승으로 임명한 조치에 대하여 나는 늦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람들도 모두 다 늦었다고 인정하는 판에, 경은 잘못된 임명이라고 생각하니 어찌 그릇된 생각이 아니겠는가? 한탄스러운 것은 경이 전후하여 낱낱이 진달한 충성스러운 말과 훌륭한 계책이 모두 다 진지하고 적중하여 나라의 병폐를 고치는 약석(藥石)이 아닌 것이 없건만, 내가 덕이 없고 사리에 어두운 탓으로 실제적으로 체득하여 힘껏 시행하지 못하여 경의 애타는 마음과 지극한 정성을 많이 저버린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경은 자세히 헤아리고 깊이 따져보아 기어이 사임을 청하지 말고 며칠 안으로 조정에 나와 현 난국을 크게 수습한다면, 나라에 매우 다행하고 백성들에게 아주 다행하겠다."
하였다.

 

8월 24일 계묘

좌의정(左議政) 김병시(金炳始)에게 두 번째로 하유(下諭)하였다.

 

문형 회권(文衡會圈)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민정식(閔正植)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이돈하(李敦夏)를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삼았다.

 

추도기(秋到記)를 근정전(勤政殿)에서 설행하였다. 강(講)에서는 유학(幼學) 이호용(李浩溶), 제술(製述)의 시(詩)에서는 유학 민후식(閔厚植)·홍종영(洪鍾榮)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광무국(鑛務局)에서 아뢰기를,
"본 국의 사무가 갈수록 더욱 방대해지니, 전 부사(前府使) 오경연(吳慶然)을 방판(幫辦)으로 차하(差下)하고 봉산 군수(鳳山郡守) 서정규(徐廷圭)를 해서 감리(海西監理)로 차하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관리하고 단속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5일 갑진

봉조하(奉朝賀) 김상현(金尙鉉)이 상소를 올려 병든 사정을 진달하면서 문형 회권(文衡會圈)을 열라고 하신 명을 변통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실제 병세가 이와 같으니, 예문관(藝文館)의 고사(故事)에 따라 즉시 상소로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성근(金聲根)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8월 26일 을사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아뢰기를,
"현재 가장 급하고 절실한 문제는 민사(民事)입니다. 백성들이 없으면 어떻게 나라가 되겠습니까? 백성들은 지금 곤경에 처하여 있습니다. 근거 없는 말이 한번 나돌면 민심이 쉽게 소란해집니다. 게다가 탐욕스러운 관리들까지 침해하는데다가 핍박하고 재물을 긁어 들여, 이 불쌍하고 곤궁에 처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으니, 백성의 위태로움이 참으로 두려울 지경입니다.
재원(財源)은 나라의 혈맥이니, 재원이 고갈되면 나라에 폐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금 재물을 만들어 내는 방도가 여러 갈래여서 생산이 빠를수록 용도는 더욱 부족해지니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방도는 오직 제도를 만들어 절약하는 데 있습니다.
대체로 재물에 경중이 있는 것은 자연적인 형세입니다. 돈을 많이 주조해 낼수록 물건 값은 따라서 올라가는 것인데, 어찌하여 한 관청을 운영하기 위하여 한 개의 주조소(鑄造所)를 설치할 수 있겠습니까? 전환국(典圜局)에서 주조하는 돈이 어떤 형태의 돈인지는 모르겠으나 기계와 그 건물의 비용만도 이미 몇 백만 냥이 되는데, 사용하기도 전에 말썽이 일어나 나라의 재물을 소모하고 민심을 어겼습니다. 지난날의 낭비는 따질 수 없으나 앞으로의 절약에 대해서는 그래도 빨리 손을 써야 하는 만큼 즉시 혁파하소서.
그리고 여러 곳에 주전소를 설치한 것도 모리배들에게 농간 당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부득이해서 주조한다면 한 곳만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전환국의 일에 대해서는 뜻한 바가 있는 만큼 다시 논의해야 하겠다. 외국과 통상하려면 이 돈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요즘 외국의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데, 잘 모르겠습니다만 크고 작은 나라, 잘 살고 못사는 나라를 막론하고 천하 각 국에 우리나라와 같은 곳이 있겠습니까? 여러 나라들도 다 부강한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것도 나라마다 정도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형편을 돌아보면 어느 한 가지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으니, 기강이 섰습니까, 민심이 안정되었습니까, 군사 제도가 정비되었습니까? 각 국의 제도를 본받으려 한다면 반드시 다스리는 법과 정사 계책에 볼 만한 것이 있어야 하겠는데, 지금 구하고자 하는 것은 기계나 완구에 불과하여, 실용적인 우리의 것을 허비하면서 저들의 쓸데없는 물건을 가져오니 비단 손해만 볼 뿐 아니라 치욕을 당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것이 분하고 통탄할 일입니다.
또 요즘 듣건대 광점(鑛店)을 설치한 것이 몇 곳인지 알 수 없으나, 간사한 백성들과 모리배들이 도처에서 마구 파헤치고 강제로 농민을 부리는 통에 졸지에 농사를 짓지 못하고 있으며, 남의 묘지를 파괴하고 남의 토지를 몰수하며 돈과 재물을 토색질하여 제 주머니를 채우기 때문에 광점의 일이 결국 허망한 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북관(北關) 백성들의 소요가 여기에 기인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모두 속히 혁파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현재 백성과 나랏일에 대한 계책이 위기에 처하여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전하의 슬기로 환히 꿰뚫어 보시고 간곡하게 잘 다스리려고 하지 않은 적이 없건만, 조치를 취한 것을 보면 모든 것이 어긋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혹시 전하의 이목에 막힘이 있어 미처 두루 통찰하지 못해서가 아닙니까? 매번 명령이 내릴 때마다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승정원(承政院)을 경유하지 않는 것도 있으니, 전하께서 함께 일을 의논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사람들에게 물어보라.’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의견을 물어보니, 다 같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조정에 가득 찬 계책과 숱한 사람들의 의견이 역시 여러 사람들에게 알아본 것이고 의논함에 같은 의견이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모두가 공로를 탐내고 이득을 추구하며 출세의 요행수를 바라는 자들인 만큼 나라를 위하여 심원한 계책을 세우는 자들은 아닙니다. 간혹 간절한 말과 정직한 논의가 있어도 사람들이 떠들어 대며 시비를 걸고 사리에 어둡다고 주장하며 또 명예를 노린다고 몰아대어 도리어 조소와 비난을 당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른 말이 들어올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이처럼 위태롭고 언로(言路)가 이처럼 막힌 것은 실로 전하께서 간언을 받아들여 시행하는 것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 원인입니다. 그래서 좋은 말은 들어오지 못하고 잡된 말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깊이 살피시어 간사한 것과 바른 것을 구별하시고 단호히 용단을 내리시어 과감히 시행하시기를 신은 축원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절실하니, 마음에 새겨 두겠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남쪽 지방에는 기근이 들고 북쪽 백성들은 소요를 일으키고 있는데다가 또 하늘의 재변과 시세(時勢)의 변고가 이러하니, 오늘날 토목공사를 벌이는 것은 적당한 시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건물을 중건하는 공사는 당분간 중지하여 위로는 하늘의 경고에 답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심정을 위로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런 때에는 과연 공사를 벌이기 곤란한데 경이 또 이렇게 주달하니, 응당 중지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본조의 폐단이 이제 극도에 달하여 낱낱이 진달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내달 이후로는 창고에 저축된 것도 없고 정해진 예산도 없습니다. 각 도와 각 고을의 세납을 엄하게 신칙하도록 이미 묘당(廟堂)에서 연석(筵席)을 통해 여쭙고 기한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해가 다 지나가는데도 아직 대부분 납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전 무리들이 농간을 부리며 도적질한 것이 아니면 선주(船主)들이 횡령한 것이니, 법과 기강으로 따져볼 때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각 해도(該道)의 도신(道臣)이 더 엄격하게 독촉하여 바치는 대로 자문〔尺文〕을 조세대장과 맞춰보았다면 어찌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기한이 지났는데도 납부하지 못한 고을의 수령(守令)에 대해서는 낱낱이 적발한 다음 계문(啓聞)하여 처벌을 청하도록 하라고 글을 지어 각 도의 도신들에게 행회(行會)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각별히 신칙하여 기필코 실효를 거두도록 하라."
하였다.

 

문형 회권(文衡會圈)을 행하였다. 〖회권(會圈)을 받은 사람은〗 김상현(金尙鉉), 한장석(韓章錫), 윤자덕(尹滋悳), 김영수(金永壽)이고, 한장석(韓章錫)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구일제(九日製)를 성균관(成均館)에서 설행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이범찬(李範贊)과 김직현(金稷鉉)에게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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