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5권, 고종25년 1888년 9월

싸라리리 2025. 1. 2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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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기유

홍문록(弘文錄)을 행하였다.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윤긍주(尹兢周), 이병교(李秉喬), 장승원(張承遠), 윤시영(尹始榮), 서상집(徐相集), 이종칠(李鍾七), 오춘영(吳春泳), 서상기(徐相耆), 윤충구(尹忠求), 정문섭(丁文燮), 이석종(李奭鍾), 이호성(李鎬性), 윤병수(尹秉綬), 이종원(李種元), 김상덕(金商悳), 김병식(金炳軾), 이성렬(李聖烈), 조종집(趙鍾集)이다.

 

창성부(昌城府)의 표호(漂戶), 퇴호(頹戶)와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9월 5일 계축

전교하기를,
"듣건대 이 봉조하(李奉朝賀 : 이유원(李裕元))의 병이 매우 심하다고 하니, 어의(御醫)를 보내 필요한 약물(藥物)을 가지고 가서 병세를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9월 6일 갑인

이호철(李鎬喆)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옥천(沃川)과 황간(黃澗) 등 고을에서 소호(燒戶)와 화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봉조하(奉朝賀) 이유원(李裕元)이 졸(卒)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대신은 정밀하고 민첩한 자질과 강직한 지조를 지녔으니, 지난날 의지하면서 일을 맡기고 공을 도모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란 것이 과연 어떠했는가? 나이는 비록 많았지만 기력이 여전히 왕성하였기에 물러가 쉬고 싶다는 뜻을 이루도록 허락은 했지만 도움을 바라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였다. 나라를 위하여 어려운 일을 담당하고 곧바로 나가서 의혹스럽고 위험한 때에도 꺼리지 않고서 일이 닥치면 일처리를 메아리가 응답하듯이 하였으니, 쉽고 어려운 일을 구별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가 갈고 닦은 재주와 계책을 갖고서 온 마음을 다해서 보답했으므로, 나는 ‘의주견권(倚注繾綣)’ 네 글자로써 표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끝났다. 언제 다시 그의 모습을 보겠는가? 말을 하자니 감회가 이는데 슬픈 생각을 무슨 말로 표현하겠는가?
고(故) 이 봉조하(李奉朝賀)의 상(喪)에 동원 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고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承旨)를 보내서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제문은 내가 직접 짓겠다. 시호를 내리는 은전(恩典)은 봉상시(奉常寺)에서 행장(行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즉시 거행하게 하라. 녹봉은 3년 동안 보내주고 예장(禮葬)하는 등의 일은 규례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9월 7일 을묘

조석여(曺錫輿)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9월 9일 정사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김한제(金翰濟)는 화순 옹주(和順翁主)의 사손(祀孫)이니 사악(賜樂)하고, 옹주 내외의 사판(祠版)에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이호준(李鎬俊)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삼았다.

 

9월 10일 무오

김영수(金永壽)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았다.

 

9월 11일 기미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박기양(朴箕陽)은 문열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의 후손이니,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특별히 새로 급제한 송종오(宋鍾五)를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임명하고, 새로 급제한 이범찬(李範贊)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조중구(趙重九)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모두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북청(北靑) 백성들이 소장을 안고 횃불을 들어 정소(呈訴)한 것과 관련하여 남병사(南兵使) 이용익(李容翊)이 범한 죄목 13가지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철저히 파헤쳐서 등문(登聞)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함경 전 감사(咸鏡前監司) 이돈하(李敦夏)의 사계(査啓)를 보니, 이용익이 마구잡이로 재물을 허다하게 빼앗은 상황은 백성들의 소장과 대체로 같으나, 전후하여 횡령한 돈의 실제 액수는 비교(裨校)가 공술(供述)한 것 외에도 도신이 별도로 탐문한 것이 많다고 합니다. 그가 잡혀오기를 기다려서 사본(査本)을 근거로 문목(問目)에 보태어서 공초(供招)를 받겠습니다. 현재 도피 중인 간사한 향리 조봉원(趙鳳遠)과 조기석(趙基錫)은 기한을 정해 놓고 탐문해서 체포하도록 도신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12일 경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특별히 새로 급제한 김직현(金稷鉉)을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로 삼고, 정현오(鄭顯五)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삼았다.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전교하기를,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를 차대(差代)할 동안 협판(協辦) 조병직(趙秉稷)이 사무를 서리(署理)하라."
하였다.

 

9월 13일 신유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14일 임술

만경전(萬慶殿)에 나아가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대호군(大護軍) 한장석(韓章錫)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하늘에 죄를 얻어서 갑자기 어미가 돌아가는 흉변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완고하고 보잘것없는 이 목숨은 상이 끝나도 죽지 못했습니다. 한스럽게도 세월은 머물러주지 않아 넓은 천지간에 의지할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깊은 산속에서 묘소를 붙잡고 부르짖으며 쓸쓸하게 슬픔만 삼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년상이 끝난 뒤에 미천한 옛 신하를 기억하며 등용해 주시는 은혜를 홀연히 입게 되어 제수 전지가 연달아 날아오니, 궁벽한 시골이 갑자기 형색이 바뀌었습니다. 신은 예전과 같이 은혜를 내려주심에 감격하였으나, 영광을 고할 곳이 없는 것이 가슴 아파서 교서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아! 생명을 가진 인간치고 누군들 자애로운 어머니의 은정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또 어디에 신처럼 젖 먹고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반백이 될 때까지 언제나 길러준 혜택을 받고, 말을 배울 때부터 관복을 입고 벼슬살이를 할 때까지 어느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믿고서 살아온 것이 55년인데 갑자기 품에서 떨어져 뻔뻔하게 홀로 남았으니, 이 어찌된 사람이란 말입니까? 녹봉을 위해 벼슬하려고 작정한 것은 본래 하루라도 부모를 봉양하기 위한 것인데, 이제는 녹봉으로 봉양할 곳이 없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지난날 기쁘게 해 드린 것은 다시는 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이제 관을 털어 쓰고 갓끈을 치렁거리며 나서본들 그저 일신의 영화만 되는 짓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이문(里門)을 바라보면 이문에 기대어 기다리시던 어머니 모습이 아른거리고 조의(朝衣)를 잡으면 바느질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놀라니, 신이 목석이 아닌 이상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신은 몇 년 전에 특별히 말미를 허락 받아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는 소원을 이루었으니, 뼈에 사무치는 은혜를 죽은들 잊어버리겠습니까? 그리고 아직도 그때 심정을 진달하여, ‘임금 섬길 날은 많고 어버이 섬길 날은 짧으므로, 간절한 마음을 호소합니다.’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 지금 짧은 석양이 이미 저물어 홀연히 미칠 수가 없게 되었고, 까마귀가 어미 새 섬기던 정성이 이승에서는 끝나버렸습니다. 다만 벼슬살이를 근실하게 하지 못했으니 온몸을 다 바쳐서 성상은 은덕에 보답하는 것이 윤리상 당연한 도리입니다. 게다가 대궐을 떠난 지 몇 해가 지났으니, 사모하는 구구한 마음에 전하를 한번 만나 뵙고 싶은 심정이야 어찌 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시골에서 잔명을 이어가고 있는 이 몸이 이상한 질병에 심하게 걸렸는데 병의 뿌리가 아주 깊어 영위(榮衛)가 모두 탈진하였고 혈해(血海)가 이미 말라버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으니, 현재 수명이 다해가는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서리 맞은 뒤의 연약한 풀이 다시는 소생할 의지가 없는 것처럼 설사 쇠약한 몸을 끌고 억지로 길에 오른다 하여도 형편상 갈 수가 없습니다. 심정은 이러하고 병세 또한 이러하니 충성과 효도에서 모두 어그러지는지라 자신을 반성하며 스스로 슬퍼합니다.
새로 제수하신 벼슬은 매우 과분하니 구차하게 무릅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장황하게 모두 진달할 형편이 못되어 이번에 현(縣)과 도(道)를 통하여 간절한 속마음을 다 털어 놓습니다.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시고 가련히 여기시어 신의 직명을 체차(遞差)하시어 선영 가까이에서 목숨을 다하게 하여 조금이나마 지극한 정을 펴게 해 주시기를 실로 크게 바라 마지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학식으로 인하여 이 벼슬자리에 기대를 건 지 오래다. 무슨 많은 말이 필요한가? 즉시 올라와서 숙배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김우용(金禹用)이 삼남(三南)에 흉년이 들고 의주(義州)에서 수재를 당한 문제로 상소를 올려 수령(守令)을 잘 선택하며 구휼곡(救恤穀)을 마련해 나누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병문(李秉文)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서상우(徐相雨)를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서주순(徐胄淳)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9월 15일 계해

약원에서 【도제조(都提調) 김병시(金炳始), 제조(提調) 이순익(李淳翼), 부제조(副提調) 민영소(閔泳韶)이다.】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가뭄 끝에 백성들의 형편이 갈수록 황급해지고 있다. 어제 총무관(總務官)의 말을 들으니 연로(沿路)에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이 많았다고 한다. 내년 봄에 무슨 수로 구제해 내겠는가?"
하니, 김병시(金炳始)가 아뢰기를,
"벌써 백성들이 흩어지고 계속 어려움을 겪는 것이 걱정인데, 춘궁기에 이르면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더욱 답답한 일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하면 속이 타고 답답할 뿐이 아니니, 앞으로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할지 모르겠다."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백성들의 일로 성상께서 이처럼 근심하시니 백성들의 일이 차츰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재주없는 신이 이런 직임을 차지하고 있으니 내내 불안하고 민망합니다. 이런 때 한 가지 계책을 계획하거나 한 가지 계획도 수립하지 못하니, 여기에서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환히 아실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마다 두루 잘 처리하여 백성과 나라를 안정시킨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이것은 성상의 하교를 기다릴 것 없이 신도 역시 지극히 원하는 바이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힘이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흉년은 늘 있는 일인데 어떻게 해마다 풍년이 들기를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종전에는 흉년을 당하더라도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곡식을 이송하는 방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고갈된 때이니 전혀 살려낼 대책이 없습니다. 게다가 민심을 굳게 결속시키지 못하여 크게 술렁거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러서는 재해가 없는 지역에서도 똑같이 소요가 일어나고 있어 백성들이 지탱하고 보존할 수 없으니, 이것이 더욱 염려됩니다. 비단 기근 구재만 급한 일일 뿐 아니라, 먼저 힘써야 할 일은 그들을 돌보고 진정시키는 정사인 것입니다.
금년의 기근이 근심스러운 것은 마른 수레바퀴 자국 안에서 헐떡거리는 붕어보다 더 심하여 위기에 처한 백성들은 먹여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재실(災實)의 분등(分等)에 대해서는 수계(修啓)하여야 하는데도 이렇게 급하게 구두로 논의하는 것은 늦어질까 염려해서입니다.
도성의 물품 공급은 전적으로 남쪽 지방에 의지하고 있는데, 내년에 양세(兩稅)의 부과액을 완전히 채울 수 있을지 실로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녹봉과 방료(放料), 공인(貢人)과 시전(市廛) 상인에게 주는 수가(酬賈)를 장차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재해민들을 살려내고 경사(京司)에서 쓰는 경비는 모두 다 당장 급한 일인 만큼 미리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으니, 일찌감치 준비해 놓아야 때에 닥쳐서 낭패를 보는 우려를 면할 수 있습니다. 부세(負稅)를 담당한 신하는 거기에 대하여 속으로 충분한 계산이 있을 것이니, 먼저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의 당상(堂上) 및 양향청(糧餉廳)의 당상들로 하여금 충분히 논의하고 대책을 강구하여 각자 의견을 갖추어 백성을 구제하기 쉬운 계책을 조목조목 진달하도록 한 뒤에 의정부(議政府)에 계하(啓下)하여 참작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것은 과연 오늘날의 급박하고 절실한 일이니, 아뢴 대로 각기 조목조목 진달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이와 같은 일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서 조정해서 처리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과연 그렇다. 재정과 부세를 담당한 신하들도 반드시 의견이 있을 것이니 좋은 의견을 받아들여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장황하게 상소하여 진달하지 말고 별단(別單)의 형식으로 그 일의 편리함과 불편함, 이로움과 해로움을 조목조목 변론하여 성상께서 보시기에 편리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몇 해 전에도 이와 비슷한 예가 있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좋았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서관(庶官)을 잘 선발하는 것은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중요한 문제입니다. 최근에 관방(官方)이 더욱 문란하여 품계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규례를 준수하지 않으니, 요행히 승진하는 길과 마구잡이로 관직을 주는 폐단이 이로부터 생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관(銓官)들은 모두 전교를 받든다고 칭하면서도 혹 정식(政式)을 어기거나 애당초 실상에 근거하여 임금께 아뢰지 않으면서도 선부(選部)의 책무와는 관계없는 듯한 태도를 취하니, 이것이 어찌 임금의 뜻을 받들어 나가는 도리이겠습니까?
그리고 수령(守令)의 교체가 빈번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는 제수되고 나서 바로 직임을 바꾸어 버려 그 고을은 몇 달이나 비어 있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부임지로 가는 도중 수레를 돌려 임지를 서로 바꾸기도 합니다. 설사 부임하였다 하더라도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습니다. 한 고을에서 한 해라는 짧은 기간에 심지어 서너 번이나 자리가 바뀌니, 관직이 총총히 쉬었다 가는 자리에 불과하여 백성들을 돌봐주는 정사도 널리 베풀지 못할 것인데 어떻게 성상의 은덕을 펼칠 겨를이 있겠습니까? 수령을 영접하고 전송할 때 아전들이 이것을 계기로 온갖 간사한 짓을 부려 토색질하니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더구나 거듭 흉년을 당한 백성들의 사정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재해를 입은 고을의 수령이나 임기가 만료되지 않은 수령은 천전(遷轉)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니, 주의(注擬)할 때 간혹 구전(舊典)을 준수하지 않고 범범하게 고식적으로 처리하면, 그날 정사를 행한 전관(銓官)에 대해서는 파직 전지를 곧바로 받아들이고, 규찰하지 못한 해당 승지(承旨)도 일체 파직하는 형전을 시행하도록 법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대체로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수령(守令)에 결원이 있으면 즉시 보충하는 것은 백성의 일을 중시하는 뜻입니다. 듣건대 지금 수령 자리가 빈 곳이 많다고 합니다. 북청(北靑) 같은 고을은 방금 백성들의 소요를 겪었기 때문에 민심이 안정되지 못했으니, 단 하루도 수령 자리를 비워둘 수 없는 것은 특히 다른 때와 다릅니다. 그런데 아뢰어 파면시킨 지도 여러 날이 지났고 정사(政事)도 여러 번 행하였는데 아직 후임을 임명하지 않은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백성들의 일을 급하게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겠습니까? 사체(事體)를 놓고 볼 때 문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사를 행하고도 후임을 임명하지 않은 해당 전관에게는 현고(現告)를 받고 엄하게 추고하는 형전을 시행하고, 수령(守令)이 현재 비어 있는 곳은 승정원(承政院)을 시켜 전관을 패초(牌招)하여 정사를 열어 선발하여 임명하게 한 다음 모두 재촉하여 내려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고 하교하기를,
"각별히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보통 때에도 관직을 비워 둘 수 없는데 더구나 지금 백성들의 근심이 한창 심하고 가을철 농사일이 바쁜 때에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그리고 백성들의 소요 때문에 파직된 수령의 후임을 오래도록 임명하지 않고 있으니, 그 고을 백성들은 필시 조정에서 백성들의 사정을 잊고 내버려 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과연 사체에 어긋난다. 경이 아뢴 내용으로 정식(定式)을 만들라."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이것은 옛법으로서 새로운 규례가 아니니, 다시 정식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특별히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뒤이어 하교하기를,
"오늘 전강(殿講)을 시험 보였다. 요즘 듣자니 선비들 가운데 독서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한다.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삼경(三經)을 암송한다 한들 어떻게 큰 선비가 되겠습니까만, 요즘 이 과거를 자주 설행함으로 인하여 감독하는 공부를 자못 성실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는 전하께서 성취시켜 주는 교화의 덕분입니다. 일전에 소대(召對)하라는 명이 있었고 동궁도 서연(書筵)을 여니, 기쁨을 이길 수 없고 모두 다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9월 21일 기사

만경전(萬慶殿)에 나아가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 비교를 실시하였는데 제술(製述)로써 강(講)을 대신하였다. 율시(律詩)를 지은 유학(幼學) 심의순(沈宜純)을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명진(金明鎭)이, 본 도의 농사가 가뭄으로 인하여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진휼을 설행하여 구제하는 조치를 잠시도 늦출 수 없다고 하면서 올린 장계(狀啓)에, ‘내무부(內務府)의 관문으로 인하여 남겨 놓은 정해년(1887)의 세미(稅米) 3만 석 중에서 처분하고, 상납전(上納錢) 중에서 30만 냥에 한하여 획급해 주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교남(嶠南)이 근래에 거듭 흉년이 들었으므로 이미 근심스러웠는데, 올해의 가뭄은 또한 옛날에 보기 드문 것이었으므로 농사는 마침내 흉작이고 백성들의 목숨이 위기에 처하여 도신(道臣)이 분등(分等)하는 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치계(馳啓)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본 도에는 풀어 놓을 만한 창고도 없고, 이웃의 도에도 옮겨 올 곡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계미년(1883)에 이미 실행한 전례를 참작하여 도내의 공납전(公納錢) 가운데서 30만 냥에 한하여 획급해 주어 곡식을 마련하여 기근을 구제해서 마을을 떠나는 폐단이 생기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장계에서 청한 세곡(稅穀)은 중요한 정공(正供)인 만큼 경솔하게 논의하기 곤란한 점이 있으니 아울러 이런 내용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상 감사 김명진이, 목화 농사가 참혹하게 흉년이 든 상황을 아뢴 장계에, ‘각영(各營)과 각 아문(衙門)에 상납하는 군포(軍布)와 악공보포(樂工保布)를 모두 순전(純錢)으로 대신 바치고 친군영(親軍營)에 바치는 포보포(砲保布)는 5분의 4에 한하여 돈으로 대납하도록 허락하는 문제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경영(京營)의 형편을 보면 재정이 완전히 고갈되어 요구대로 윤허해 주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병조(兵曹)와 각 영에는 4분의 1에 한하여 대납하도록 허락하고 각사(各司)에 상납하는 포를 돈으로 모두 대납하는 것과 포보(砲保)는 사체가 더욱 각별하니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헌직(李憲稙)이, 부안(扶安) 등 36개 고을과 진(鎭)의 농사가 흉년든 정상을 낱낱이 진달하면서 올린 장계에, ‘각 군문(軍門)에 바칠 돈과 면포를 내년 가을까지 기한을 연기해 주고, 관서(關西)의 산성양향미(山城糧餉米) 3만 석을 특별히 획급해 주고, 대소의 백성들 가운데서 만약 곡식을 희사하여 구제하는 자가 있으면 수령(守令)의 초사(初仕) 자리에 일반적인 규례와 순서를 무시하고 발탁하여 등용하도록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올해의 심한 재해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재실 분등(災實分等)을 하기도 전에 도신의 장계에서 36개 읍과 진을 지적해서 근심스런 상황을 보고한 것을 보면 백성들의 정상이 황급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흉년에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에 무엇을 아끼겠습니까마는 군수용으로 쓰는 면포와 돈을 일체 정지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참으로 몹시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니, 교남(嶠南)의 전례를 참작해서 병조 각 영에 바치는 것은 4분의 1에 한하여 대납하도록 허락하고 포보는 각별히 중요하니 그만두소서.
진휼을 실시하여 백성을 구제하고 살리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지만 미리 대책을 강구하는 것은 논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관서의 산성양향미 총량도 현존하는 것이 많지 않으니 사실 억지로 요구하기도 곤란하므로, 도내의 공납전(公納錢) 가운데서 30만 냥에 한하여 획급해 주어 편리한 대로 곡식을 사서 적당히 배당하여 빨리 구제할 방도를 찾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도적을 없애는 일로 엄하게 거듭 신칙했고 이미 포도대장(捕盜大將)을 논경(論警)하는 거조까지 있었으나 줄곧 게을리하여 없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점점 더욱 횡행하여, 대낮에 길을 막고 마구 물건을 빼앗는가 하면 야밤에 문을 부수고 얼굴을 드러내 놓고 강도질을 하는데, 때때로 수십 명까지 모여 들어 거의 없는 날이 없이 마을이 소란합니다. 그 종적과 소굴에 대하여 탐문하고 기찰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만이 유독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단 말입니까? 법과 기강을 헤아려 볼 때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만약 알고도 일부러 놓아 준다거나 현장에서 붙잡고도 숨겨준다면, 이것은 결국 도적을 가르쳐서 그 악행을 조장하는 것이 됩니다. 이래서야 법이 어떻게 시행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비록 상사(上司)의 노비나 각 영의 군사들에 대해서도 기찰하여 잡은 후에 그 소속에 가서 명단에서 지우고 법대로 처리할 것이며, 만일 도적의 족속이나 친구로서 그들의 강한 세력을 믿고 강제로 빼앗고 난동을 부리는 자가 있으면 일체 도적을 다스리는 형률로 다스릴 것입니다. 이번에 신칙한 뒤에도 또 종전처럼 태만하면 해당 포도대장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논경하는데 그치지 않을 것이니 정신을 차리고 집행하고 기일을 정하여 체포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만일 이와 같다면 포도청(捕盜廳)을 설치한 본의(本意)가 어디 있겠는가? 아뢴 대로 엄히 신칙하도록 하라. 대궐 안의 하인이라 하더라도 만일 기찰 중에 잡힌 자가 있으면 구애받지 말고 죄를 다스리는 한편 입품(入稟)하도록 좌우변포도대장에게 패를 보내어 전교를 듣게 하라."
하였다.

 

9월 22일 경오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영남(嶺南)과 호남(湖南) 양도(兩道)의 도신(道臣)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도내의 흉년든 상황을 낱낱이 진달하면서 진휼할 물자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줄곧 가물어서 들판에는 수확할 곡식이 없고 백성들은 구학(溝壑)에 굴러 떨어질 정도로 급박하다고 한다. 이 보고를 듣고는 측은한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조정에서 양도에 대하여 돌봐주는 것이 다른 곳에 비하여 특별히 다른데도 이처럼 참혹한 재변을 만났으니 불쌍한 저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에게 덕이 없기 때문이다. 다같이 돌봐주는 처지에서 어떻게 피차에 다르게 대우하겠는가. 그러나 고을이 많고 적은 것이라든가 재해의 정도에 대하여 차례로 분등(分等)하여 아뢸 것을 한창 기다리고 있지만 과연 정밀하게 기근이 든 백성들을 뽑아내어, 지나치게 기록하거나 누락시키는 폐단은 없는가? 또 백성을 사랑하고 어루만져 주는 정사가 미진하여 도리어 침해하는 일은 없는가? 아직 추운 겨울이 되기도 전인데 황급함이 벌써 이 지경이 되었으니, 만약 춘궁기에 이른다면 꼬리를 물고 죽거나 무리를 지어 마을을 떠나갈 것을 또한 상상할 수 있다. 묘당(廟堂)의 계사가 있자마자 진휼할 물자에 대하여 대책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자랄 것 같아서 걱정된다. 영남에 유치(留置)해 둔 곡식 중에서 영남에 1만 석, 호남에 1만 석을 특별히 획송(劃送)하고 잘 헤아려 마련(磨鍊)하여 진휼을 시행할 때 보태 쓰도록 하여 조정에서 돌봐주는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
민사(民事)의 중요함은 어느 때인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기근을 당한 해에는 정말 백성의 곁에 있는 관리들이 어떻게 구제하고 보호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 만큼 각기 정신을 가다듬어 몹시 근심하는 나의 생각을 체득하고 나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다 살아나게 하고 각기 제 고장에서 안착하게 하여 굶주리다 못해 마을을 뜨는 지경을 면할 수 있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글을 만들어 양도의 도신들에게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범조(鄭範朝)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이호준(李鎬俊)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민영환(閔泳煥)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윤영신(尹榮信)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직현(金稷鉉)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9월 23일 신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25일 계유

흥복전(興福殿)에 나아가 각 국의 공사(公使)와 영사(領使)를 접견하였다.

 

9월 26일 갑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상소를 올려 재상직에서 사임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9월 27일 을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시(金炳始)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어제 올린 글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나의 진심을 다 털어놓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임을 청하는 글이 어떻게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라를 걱정하는 경의 정성으로서는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앞장서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같이 해야 할 텐데, 매번 지극히 어렵게 나오고 남이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겨 쉽게 물러나니, 이 때문에 나는 속으로 섭섭하다. 한가하게 지내려는 태도를 고수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군신(君臣) 사이의 의리는 피할 수 없고, 백성과 나라에 대한 근심은 늦출 수 없으며, 사람들의 기대는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생각건대 지금 재물과 곡식이 고갈되어 요식(料食)이 모자라고 노략질이 곳곳에서 벌어져 행인들의 왕래가 거의 끊어져, 형세는 거꾸로 매달린 듯 극도의 위험에 직면했고 기강은 무너져서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다.
또 가을 이래로 배고픔을 호소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고 죽음에 처한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백성들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는데도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백성들이 다 없어지면 누구와 함께 임금 노릇을 하겠는가?
경은 이미 중앙과 지방에서 벼슬을 지낸 경력이 있으니 반드시 좋은 계책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때 묘당(廟堂)의 일을 주관하여 마치 귀신처럼 도와준다면 더욱 기뻐서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만일 덕망과 재주에서 온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난국을 타개하고 백성들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인데, 내가 보건대 도대체 경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경은 한번 생각해 보라. 대신의 거취(去就)는 실로 나라의 존망과 관계된다. 지금과 같이 위급한 정황을 만난 때 어찌하여 시골에 물러가 편안히 지낼 생각을 하는가? 그리고 외면하고 가버리려는 경의 행동이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도 건져 줄 생각을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가 막연하게 방도를 잃은 것은 마치 물 가운데서 돛대를 잃고 등불 없이 가는 것 이상이다. 경은 어찌하여 차마 나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는가?
이번 선유(宣諭)는 나의 마음속 진심을 모두 털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경이 만약 줄곧 외면하면서 조금도 마음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참으로 나의 정성과 예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니, 사실 마음 가득 부끄러운 생각뿐일 것이다. 매우 많이 기대하고 의지하니, 스스로의 그림자를 돌아보며 스스로 개탄하지 않겠는가? 경은 반드시 깊이 이해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다시는 번거롭게 글이 오가게 하지 말고 나의 안타까운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심순택(沈舜澤)이 차자를 올려 총리(總理)의 직책에서 해임시켜 줄 것을 청하고 계속하여 아뢰기를,
"옛법을 널리 상고해 보면, 정부(政府)와 주사(籌司 : 비변사(備邊司))가 합쳐지기 전에는 주사가 중앙과 지방의 군국 기무(軍國機務)를 총괄했으나 현재는 원임 의정(原任議政)이 다 제조(提調)를 겸하고 있으며 계복(啓覆)하여 재결(裁決)하는 것은 시임(時任)이 실재 주관했습니다. 사무가 이로부터 갈라지지 않았으면서도 나라의 사체가 이로부터 마땅함을 얻었으니 이것을 오늘날 끌어다 쓸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총리에 대한 임명은 특지(特旨)에서 나왔으니, 비록 주사가 관례로 겸임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혹 시임들이 다같이 총리 직책에 있는 만큼 시임이 전적으로 주관하는 것이 사리에 타당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감히 진달하여 우러러 전하(殿下)의 결재를 청합니다. 바라옵건대, 널리 물어서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벼슬을 그만둔 다음부터 나는 마치 무엇을 잃은 듯이 섭섭해하고 있다. 총리의 직임이 몸조리하고 양생(養生)하는 데에 별로 장애가 없으니 이와 같이 사양할 필요가 없다. 주사의 전례를 인용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혹 타당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소소한 일에 지나치게 얽매여 따지고 법식 만드는 것을 일삼는가? 경은 잘 헤아리라."
하였다.

 

9월 28일 병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제학(大提學)을 품계에 따라 내무부 당상(內務府堂上)에 예겸(例兼)으로 단부(單付)하도록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민영상(閔泳商)이 목화 농사가 흉년든 정상을 구체적으로 진달한 장계에서, ‘도내(道內) 각읍(各邑) 군포(軍布)에서 면포로 상납하는 몫은 금년 10월부터 내년 9월까지 병조(兵曹)의 각 아문(衙門)에 내는 것은 3분의 2를 대납하고, 친군영(親軍營)에 내는 포보(砲保)는 절반을 대납하게 하며, 서천(舒川) 등 7개 고을의 각종 군포에서 모시로 상납하는 것도 내년 가을까지 대납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목화 농사가 가뭄으로 인하여 피해를 당한 건 형편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양남(兩南)과 비교해 본다면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더구나 지금 경영(京營)의 군수품이 완전히 고갈된 형편에서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흉년든 백성들의 형편을 돌봐주지 않을 수 없으니 병조(兵曹)와 각영(各營)에 대해서는 5분의 1까지 대납을 허락하고 각사(各司)에는 모두 돈으로 대납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포보는 특별히 중한 것인 만큼 그만두고 7개 고을은 청한 대로 대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홍우창(洪祐昌)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종필(李種弼)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한철우(韓喆愚)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송종오(宋鍾五)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응하(李應夏)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9월 29일 정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종필(李種弼)의 직임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종묘(宗廟)의 동향 대제(冬享大祭) 섭행(攝行) 헌관(獻官)으로서 탈품(頉稟)하고 시간에 늦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분간(分揀)하고 다시 임명하였다.

 

9월 30일 무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통어사(統禦使) 민응식(閔應植)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게 진찬(進饌)하는 예식을 가을에 거행하겠다는 뜻을 지난번에 명하였다. 그러나 지금 백성들에 대한 걱정과 나라의 재정이 어렵기 때문에 결코 풍성하게 거행해서는 안 된다는 대왕대비의 간곡한 교지를 여러 번 받았으니 인정으로나 예의로나 매우 섭섭하지만 부모의 뜻을 받드는 도리로 볼 때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제반 의식절차를 아직 마련하지 말도록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라."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진심을 털어놓고 함부로 호소하면서 꼭 사직시켜 줄 것을 진달하고 사적인 요청을 다행히 들어 줄 것을 기대했는데 도리어 온화한 비지(批旨)를 내리시고 은혜로운 하유를 계속 내려 덕망과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시고, 언제나 생사고락을 함께해야 한다고 면려하여 용렬한 저를 거듭 계도하고 기대하여 의탁함이 더욱 절절하셨으니 신이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대우를 받는단 말입니까?
전하(殿下)께서 신을 비호하시며 책려하심이 매우 곡진하지만 지금 할 수 없는 일을 책임지우고 감당할 수 없는 직책을 억지고 맡기신다면, 신의 몸이 고꾸라져 자신도 돌볼 겨를이 없을 것인데, 나라와 백성들이 당하는 낭패가 어찌 극도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지난번에 신이 외람되게 응한 이래 신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신에게 잘못 기대를 걸었다가 눈앞에 나타난 성과가 없자 도리어 조소와 비방이 집중되었으니, 세상에서 결국은 신이 실속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시무(時務)를 독려하시고 시정(時政)을 우려하시는 것은 지금 재정을 늘리고 재정을 만드는 것이 한창 급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족한 나라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고 어려운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신이 오늘 아뢴 것은 전부 이와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나라의 재정에 대하여 말하면 절약을 제도로 세우자는 데 불과하고, 백성의 일에 대하여 말하면 탐오를 엄격히 배격하자는 데 불과할 뿐이니, 신이 비단 어려운 재정을 풀고 곤궁을 구제하는 대책을 강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 방도를 억누르고 그 근원을 막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월(越)에 가면서 북쪽으로 달리고, 더운 것을 구하면서 얼음을 찾는 것과 같으니, 신에 대하여 의론하는 사람들이 신이 전혀 일을 모른다고 했는데도 이같이 직책을 붙잡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며, 서둘러 대는 지경에 절주(節奏)를 논하고 위험한 시기에 도인(導引)을 강구하면서 일은 하나도 수습하지 못하면서 그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있으니 명예를 노린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신이 자신을 헤아리지 않고 속마음을 망녕되게 내놓았으나 좁은 소견과 보잘것없는 견문이 시조(時措)에 매우 어둡다는 것을 역시 속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형편에서 아무리 신을 등용하려고 하여도 재주가 적합하지 않으며 신을 용서하려고 하여도 잘못을 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이 일전에 청한 것을 하루라도 빨리 윤허하시면 나라를 위하여 참으로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신이 성상의 은택을 받는다면 꼭 결초보은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일전의 상소는 천만뜻밖의 것이라 비답은 일반적인 규례를 따른 것이었으나 진심을 다 쏟아서 효유하였는데 부주(附奏)와 사직 상소가 차례로 또 이르니 실망하던 나머지 도리어 절절히 개탄하였다.
경의 말이 혹 성립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개 나라의 형편을 여유 있게 도모하려고 한 것이었으니, 역시 ‘허물을 보고서 그 어진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거취(去就)를 급작스럽게 해서, 한갓 발끈하는 간관(諫官)처럼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경이 일찍이 스스로 세상 사정에 오활하다고 하였는데 절약을 제도로 하자는 것은 바로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며, 탐오를 엄격하게 배척하자는 것은 바로 조정을 엄숙하고 청렴하게 하려는 것으로서, 현재의 급한 일로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그리고 재정을 늘리고 재정을 만드는 데 대해서는 옛글에서도 ‘이득을 보는 것이 폐해를 제거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경의 말은 마디마디가 절절하고 타당하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누군들 현상(賢相)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월에 가면서 북쪽으로 달리고 더운 것을 구하면서 얼음을 찾는 격이라고 한 경의 말은 참으로 지나치다. 군신(君臣) 사이에 귀중한 것은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일이 없는 한가한 날에도 거짓으로 겉모습을 꾸며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지금처럼 위급한 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원래 경의 충성을 알고 있는 이상 결코 이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아니 나만 유독 무슨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기꺼이 하겠는가? 병환을 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그다지 많지 않으니 연석에 나오는 것이 어려울 거라고 여기지 않는다.
대체로 경의 병은 나라의 병통과 같다. 경의 병에는 인삼과 창출(蒼朮), 탱자와 복령(茯笭) 같은 알맞는 약제가 원래 있어서 치료되지만 나라의 병통은 어쩔 수 없는 지경으로 내달리는데 이런 때에 어찌 유독 자기 병만 말하면서 나라의 병통을 생각지 않을 수 있는가?
모두 나의 정성과 예의가 부족하여 오늘날 이렇게 글이 오가게 만들었으니 매우 부끄럽다. 그렇기는 하지만 줄곧 우기는 것은 도리어 예의로 대우하는 데 결함이 되는 만큼 의정(議政)의 직임을 사직하는 것을 이번에는 우선 허락한다. 임헌(臨軒)하여 섭섭해지는 마음을 형언할 수 없다. 그리고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벼슬에 나와서도 근심이고 물러나서도 근심이니 묘당(廟堂)에서건 시골에서건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워서 몸조리를 하더라도 더욱더 좋은 계책을 생각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 주는 것이 사실 더 큰 바람이다."
하였다.

 

심순택(沈舜澤)을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김홍집(金弘集)을 좌의정(左議政)으로, 김병시(金炳始)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통어영(統禦營)은 새로 설치한 군영이므로 사무에 관해서 품정(稟定)할 일이 많을 것이니 통어사(統禦使)는 편리한 대로 왕래하도록 하고 왕래하는 동안 진영(鎭營)의 사무는 판관(判官)과 중군(中軍)이 대행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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