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6권, 고종26년 1889년 12월

싸라리리 2025. 1. 2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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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임신

일식(日食)이 있었다.

 

왕세자가 올린 두 번째 상소에,
"신이 어제 우러러 청한 것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정상적으로 시행해 온 떳떳한 법이며 실로 온 나라 사람들의 다 같은 지극한 소원입니다. 정성을 다해 외람되이 간청하여 윤허하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막상 비지(批旨)를 받들어 보니, 성인(聖人)으로 자처하지 않고 사양한 채 차지하려 하지 않으시니, 어찌 그저 신의 정성이 전하를 감동시키지 못한 것일 뿐이겠습니까? 높고 낮은 신하와 백성들의 실망이 응당 어떠하겠으며, 성세(盛世)에 의문(儀文)을 갖추지 못하는 것은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생각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아버지이고 임금이며 신은 아들이고 신하입니다. 아들로서 그 아버지를 위하는 사사로운 은정이 진실로 지극히 간절하기도 하지만, 신하로서 그 임금을 위하는 공적인 의리는 본래 가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설사 신이 어리석고 무식하여 신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 못 된다고 하더라도 온 조정이 다같이 송축하고 온 나라가 간절히 기대하고 있는데 이것을 장차 어떻게 막겠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성상의 풍성한 공렬(功烈)은 백대를 지나오면서 모든 임금들과 견주어 보아도 융성함을 비교할 임금이 없습니다. 왕업을 거듭 넓혀서 나라의 터전이 반석 위에 올려지고 큰 덕화를 펴서 백성들이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니, 성상의 은혜가 골수에 스며들었습니다. 이러하니 조상을 빛내고 후손을 풍요롭게 할 것이며 지극한 다스림이 널리 미쳐갈 것입니다.
또한 생각건대 우리 곤성(坤聖) 전하는 부덕(婦德)이 길한 운수에 맞고 모범을 보여 숨은 공로가 내조에서 드러나고 중궁으로서의 덕망은 역사책에서도 보기 드문 바이기에 《시경(詩經)》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과 같은 지극한 덕화를 팔도(八道)의 백성들이 다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두 전하의 공과 덕을 큰 붓으로 특별히 써서 옥책(玉冊)을 높이 받드는 이 예식은 해마다 거행해도 날이 모자랄 것입니다. 더구나 하늘에서 거듭 경사를 내려 복록이 몰려들고 또 내년은 더없이 큰 경사를 만나는 만큼, 기쁨을 기록하여 휘호(徽號)를 천양하는 것은 바로 우리 조종(祖宗)의 아름다운 규범입니다. 나라의 전례(典禮)에서 경사를 장식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신하이자 자식의 지극한 소원 중에 어찌 부모를 드러내는 것보다 더한 일이 있겠습니까? 신은 오직 옥첩(玉牒)에 금박으로 글자를 쓰는 것으로는 공렬을 다 표현할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음악을 연주한들 어떻게 덕음(德音)을 형용하여 칭송할 수 있겠으며, 세 번 만세를 부르고 아홉 번 술잔을 올리는 예를 거행한들 또한 어떻게 송축하는 정성을 펼 수 있겠습니까?
신은 못난 자질로 외람되게 두 분 전하의 지극히 자애로운 은혜를 받았으니, 조금이라도 보답하려고 하는 것은 오직 그 덕의 만분의 일이나마 드러내어 신하와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다하려는 것뿐입니다. 또한 어찌 감히 옛 법을 따르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묻지도 않은 채 스스로 사정(私情)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대성인의 겸손한 덕으로 비록 겸손히 사양하려고 하시지만 따라야 하는 것은 정상적으로 시행해 온 전례이며 막기 어려운 것은 여러 사람의 똑같은 마음이기에 감히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거듭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은미한 정성을 굽어 살피어 빨리 윤허를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앞서 비답에서 부득이 칭하(稱賀)를 허락했으니 너의 정성을 펼 만할 텐데, 이제 또 어찌하여 말을 꺼내는가? 작년 일을 생각하면 아직까지 부끄러운 생각이 남아 있다. 나는 원하지 않는 것을 네가 기어이 억지로 청하려고 한다면 부모에게 순종하는 뜻에 있어 돌아보건대 어떻겠는가? 너는 한창 학문에 힘써 《논어(論語)》 1부를 다 읽게 되었으니, 마음에 터득하고 행동에 체현하여 학문을 빛내고 계속해서 공부하여 넓히는 효과가 있도록 하라. 그렇게 된다면 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을 것이다. 형식을 갖추는 일로 말하면, 급급하게 이렇게까지 애써 간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진찬(進饌)하는 예는 비록 또 애써 허락은 하였지만 지금처럼 어려운 때에 어떻게 장대하게 할 수 있겠는가?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설행할 것이다. 여러 가지 의식 절차는 되도록 검소하게 하여 모름지기 걱정하는 내 뜻을 본받도록 하라."
하였다.

 

윤우선(尹宇善)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익용(金益容)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12월 2일 계유

한장석(韓章錫)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윤영신(尹榮信)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왕세자가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아뢰기를,
"하늘은 말하지 않아도 지극한 정성은 반드시 이루어주며 성인이 자랑하지 않아도 공론(公論)은 반드시 따라줍니다. 자식으로서 어버이의 덕을 드러내는 것은 지극한 정성이 발현된 바가 아니겠으며 신하로서 임금의 덕을 송축하는 것은 다 같이 원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늘의 형상은 깊고 은미하며 땅의 도는 지극히 고요하여 넓고 넓어서 형용할 수 없거늘 《주역(周易)》에서 찬양하기를 ‘굳세고 순수하다.’라고 하고, ‘포용하고 너그러우며 빛나고 위대하다.’라고 했습니다. 요(堯) 임금은 겸양의 덕이 있고 순(舜) 임금은 저절로 교화가 이루어져 넓고 커서 더할 수 없거늘, 《서경(書經)》의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에서 ‘백성을 고루 밝혀 만방(萬邦)을 협력하고 화합하게 한다.’라고 하고, ‘깊고 명철하고 문채 나고 밝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인들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노래하면서 동시에 후비(后妃)의 덕을 함께 칭송하여 왕의 덕화가 나온 근본을 밝히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이미 큰 덕이 있고 또 지위와 녹(祿)이 있다면 칭호와 장수는 이치상 반드시 얻는 것입니다. 하늘이 성인에게 보답하는 것은 오직 이것이고 신하가 임금에게 바라는 것도 오직 이것입니다. 그래서 화(華) 땅의 봉인(封人)이 요 임금을 위해 세 가지를 축원하면서 장수를 말하였고, 《시경(詩經)》 〈천보(天保)〉에는 ‘아홉 번 같다〔九如〕’는 말로 임금의 장수를 빌었습니다. 주 나라 문왕이 장수하기를 빈 노래와 군자(君子)의 만년 장수에 대한 송축은 바로 후세에서 옥책문(玉冊文)에 금문자를 새겨 아름다움을 천양함으로써 상제(上帝)가 내린 아름다움을 받게 된 근원을 밝힌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정성을 다하여 거듭 호소하여 전하께서 감동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감히 목욕재계하고 온 조정의 벼슬아치들의 말을 다시 아뢰니, 오직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어 살펴 주소서.
전하는 상성(上聖)의 자질로써 나라를 중흥시킬 운수에 순응하고 덕은 요순과 같으며 생각은 우(禹), 탕(湯), 문왕을 겸하여, 모든 법도를 다 갖추고 모든 정사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태실(太室)에서 7대의 덕을 보고 성대한 예를 종묘에서 지냈습니다. 선대 임금의 왕비들을 나라의 재물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봉양하여 옥책문(玉冊文)에 전하의 효성을 빛냈습니다. 밤낮으로 근심하고 근로하면서 복잡한 정무를 총괄한 결과 역수(曆數)를 거듭 밝히고 큰 재난을 널리 구제했습니다. 곤궁한 백성들을 보호하여 편안히 살게 하고 위태로운 형세를 전환시켜 나라가 태산 반석처럼 안정되었으며, 기쁨이 온 나라에 넘치고 공적이 해와 달과 별보다 밝아서 이 백성들이 어진 세상과 장수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아! 훌륭합니다.
또한 생각건대 우리 중궁 전하는 덕이 하늘에 비길 만큼 드러났고 지위는 성인의 배필로 높아졌습니다. 중궁이 된 지 24년인데 아름다운 소문이 왕실에 계승되고 숨은 교화가 온 나라에 두루 퍼졌습니다. 임금에게 간언을 올려 부도(婦道)를 길이 바르게 하고 법도를 밝혀 훌륭한 계책을 널리 폈으니 사관(史官)이 역사책에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입니다. 왕비가 길하다는 글도 그 가운데 있고 당(唐) 나라 황후의 훌륭한 보좌도 아름답게 여기기에 부족하니, 주 나라 왕실의 성녀(聖女)인들 어떻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더구나 이제 새해를 맞이하면 보령이 40세가 되니 온 나라 백성들이 누군들 손뼉을 치고 축하하며 서로 큰 덕이 있는 사람은 그에 알맞은 높은 칭호를 얻을 징조라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시작하여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는 소자의 정성이 또 어찌 그저 일반 백성들과 같겠습니까? 신이 가만히 두 분 전하의 덕을 우러러보건대, 하늘과 땅에 짝하여 높고 밝으며 넓고 두터워 오래되어도 끝이 없으니 장래에 억만년 이어질 큰 역수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신이 한창 《논어(論語)》를 배우고 있는데, ‘부모의 나이를 몰라서는 안 되니 한 편으로는 기쁘다.’라는 말이 있으니, 기쁨을 표시하는 것이 응당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술잔을 올려 장수하시기를 축원하고 만세를 불러도 오히려 그 효성을 다하기에 부족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옥돌에 새기고 음악을 연주하여 무궁토록 큰 업적을 선양하고 막 이른 큰 복을 맞이하여 위로는 하늘의 은덕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심정에 부응하는 것이 실로 오늘 그만둘 수 없는 성대한 일입니다. 이것은 신 한 사람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바로 모든 관리들과 나라 사람들이 다 같이 원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겸손한 생각을 돌리시고 시원하게 윤허를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앞서 할 수 없이 허락한 것도 참작하고서 한 것이라는 것을 여러 번 자세히 비답에서 유시하였는데 또 어떻게 크게 벌리는 행사를 하겠는가? 너의 정성을 가상히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나라의 성대한 예인 만큼 진실로 선뜻 청하는 것이 옳지 않은데 또한 어떻게 갑자기 허락하겠는가? 내가 일부러 버티는 것이 아니라 실로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재차 아뢰기를,
"삼가 성왕(聖王)은 세상을 다스리면서 사정에 따라서 알맞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무릇 하늘과 땅의 이치에 당연하고 백성들의 도리와 사물의 법칙으로 보아 반드시 해야 할 것이면 조금도 주저 없이 곧바로 행하니, 대개 예라 하고 의라 하는 것이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은 깊이 사랑하는 정성으로 여러 사람의 일치한 논의에 따라 소장을 안고서 간절함을 진달하고 재차 호소했으나 재차 윤허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또 높고 낮은 신하들과 같이 모두 대궐 뜰에 나와 일치된 소리로 호소했으나 전하의 윤허는 더욱더 아득해졌습니다. 지금 신이 청하는 것은 바로 이른바 당연한 일이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인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망설이는지 감히 알지 못하겠으니 진실로 황송하고 답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아! 새해를 맞이하여 큰 운수가 돌아와 우리 전하와 우리 중궁 전하께서 보령이 더 많아지는데, 천만년토록 장수하여 눈썹이 세고 길어지며 흰머리가 다시 누렇게 되는 것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이며, 해처럼 달처럼 남산처럼 장수하는 일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이니, 신이 기뻐 뛰고 춤추며 경축하는 것이 바다와 같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무릇 경사를 만나 기쁨을 표시하는 것은 떳떳한 이치입니다. 비록 일반 백성들조차도 부모를 효도로 봉양하는 사람은 모두 부모의 나이를 알아 가족들이 서로 경축하며 반드시 기쁨을 표현하고 아름다움을 칭송하여 드러내려고 하는데, 하물며 신이 외람되게 세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만일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감화되어 효도하는 기풍을 일으키게 하겠습니까? 옛글에 이르기를, ‘큰 덕을 지닌 이는 반드시 그에 알맞은 이름을 얻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 알맞은 장수와 이름은 모두 큰 덕을 지닌 이가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두 분 전하의 큰 덕은 상소와 계사로써 대략 진술했지만, 하늘과 땅 같은 기상과 해와 달 같은 광채가 어찌 신의 서툰 말솜씨로 형용하여 말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서경(書經)》의〈요전(堯典)〉과 〈순전(舜典)〉에서 찬양하여 서술한 바는 바로 우리 부왕 전하를 찬양하여 서술한 것이고 《시경(詩經)》의〈주남(周南)〉과 〈소남(召南)〉에서 노래한 것은 바로 우리 모비(母妃) 전하를 노래한 것입니다. 임금 자리에 오른 이후로 26년 동안 정사하는 법과 정사하는 계책은 역사책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만,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으며 선조를 받들고 백성들을 화합시키며,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유교를 부흥시키며 과거를 엄하게 하여 선비들의 추향을 바로잡으며, 공명정대하게 복잡한 정사를 처리하고 은택을 베풀어서 만물을 기르셨으니, 예법과 음악이 널리 퍼지고 밝아지며 지치(至治)가 융성하여 한 세상을 화락하고 태평한 영역에 오르게 했으니, 그 사업은 빛나고 그 공로는 높습니다.
집안은 교화의 시작인데 부지런하여 부덕(婦德)이 길한 운수에 맞고 자손을 많이 두어 복을 넓혔습니다. 안에서 정치와 교화를 도와 자식처럼 백성을 길러 아름다운 명성이 온 궁중에 퍼지고 두터운 혜택이 팔도(八道)에 미쳤으니, 높고 훌륭한 공렬은 거의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바입니다. 두 분 전하께서 모두 큰 덕을 지니고 능히 하늘의 마음을 얻어 큰 혜택을 두루 받고 큰 복이 흘러들게 한 것이니, 바로 반드시 장수하고 반드시 칭호를 얻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더구나 자전(慈殿)의 보령이 꼭 마흔 살이 차는 날이 되니, 신의 찬양하고 기리는 마음은 특히 다른 때에 비할 것이 아니며, 금옥에 새겨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국조 이래로 언제나 있었던 떳떳한 법입니다. 어찌 신이 처음으로 시행하고 꾸미는 것이겠습니까?
은혜를 받았으면 보답하는 것은 누구나 다 같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돌아보건대, 신이 우리 두 분 전하의 두터운 은혜를 받은 것이 하늘처럼 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이 15세가 넘도록 보답한 것이 없으므로 그저 떳떳한 법에 있는 바로써 만분의 일이나마 정성을 조금 펴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지극한 자애로 어루만지고 사랑해 주셨으므로 반드시 따라 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에 대하여 유독 신의 정성을 헤아리지 않고 신의 말을 살피지 않으시니 신의 답답한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온 조정의 의논이고 원래 신 한 사람의 사사로운 소원이 아니므로 진정에 북받쳐 저도 모르게 탄성이 저절로 나오니, 더욱더 황송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빨리 윤허를 내림으로써 신의 구구한 축원에 부응하소서.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름이라는 것은 실제의 손님이다. 일찍이 이 일이 백성과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더구나 그에 걸맞은 덕이 없으면서 그저 그 이름만 가진다면 나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는 뜻을 받드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너는 헤아리도록 하라."
하였다. 세 번째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듣건대, 부모는 정성으로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정성이라는 것은 성실한 것으로, 성실에는 거짓이 없는 인정이 있고 인정에는 막을 수 없는 의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목욕재계하고 거듭 호소하면서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그만둘 줄 모르는 까닭입니다. 옛날에 성스럽고 밝은 제왕은 높고 커서 더할 수 없는 덕과 공이 있으면 반드시 훌륭히 장식하고 드러내어 큰 복을 내려준 은혜에 보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내세워도 어그러지지 않고 백대 후에 물어 보아도 의혹되지 않을 떳떳한 법과 큰 의리로서 바로 우리 열성(列聖)께서 이미 시행해 온 큰 예이고 성대한 전례(典禮)이며 조정과 민간의 신하와 백성들이 사랑하고 받들며 다 함께 원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준 복은 받들어 나가지 않을 수 없고 사람들의 마음은 굽혀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은 단지 신이 부모를 사랑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는 정성이 아닙니다.
아! 부왕 전하께서 26년 동안 나라를 태평하게 잘 다스려 역사에 빛나고 있는 데 대해서는 앞서 대략 진술했으나, 그것은 만분의 일도 형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 같은 덕과 바다와 같은 은택은 대개 위대한 순 임금의 효도에 근원을 두고 훌륭한 주(周) 나라의 어진 정치로 발현되었으므로, 신명(神明)에 통하고 해와 달처럼 빛납니다. 태실(太室)에 새로 모시고 대대로 제사를 드리고 선대 왕비들에게 누차 휘호(徽號)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공물과 부세를 감면하여 기민(饑民)을 구제하고 폐백을 갖추어 현인을 초빙하여 먼 지방의 백성을 안정시켰으며, 바른 도를 지키고 선비들의 추향을 바로잡았으며, 선량한 사람을 뽑아서 정치하는 방도를 높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악과 교화가 유행하고 정령(政令)과 조처가 시행되어 자연히 태평 시대의 아름다움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좋은 상서가 내리고 자주 풍년이 들어 온 나라를 어질고 장수하는 데로 오르게 하고 근본을 문명으로 돌렸으니, 끝없는 경사가 생기는 운수가 실로 여기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모비(母妃) 전하는 덕이 국모(國母)에 알맞고 교화가 부덕을 드러내어 대궐에서는 아름다운 기풍을 이었고 임금을 돕는 데서는 내조가 깊으며 숨은 교화를 널리 펴서 사직에 공을 세우고 어진 덕을 쌓아 혜택을 베풀었으니, 이런 것은 역사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보령이 꼭 마흔 살이 되는 때를 만나 큰 복이 만년토록 더욱 이어지고 남은 경사가 몰려들어 뭇사람이 성대하게 찬양하고 있는 만큼 사실을 모아 실로 선하고 아름다움을 칭송하여 알리고 높이 드러내는 것은 단지 예가 그러할 뿐만이 아닙니다. 큰 덕을 지닌 이는 그에 알맞은 이름을 얻는 의리로 보아 혹시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조물주의 공이라 하면서 덮어 둔 채 공이 없는 듯이 여기고 겸손하게 사양하는 정성으로 억누른 채 칭호를 차지하려 하지 않고 계십니다. 전문(箋文)을 받들어 올리고 술잔을 올리는 데 대해서는 설사 다행히 윤허를 받았지만 신의 구구한 정성은 자연히 기어이 이루고자 하는 소원과 꼭 시행하려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바로 조정 신하들의 의논입니다. 금옥에 새겨 그 형식을 갖추며 하늘을 본뜨고 해를 그려서 그 공덕을 드러내며, 훌륭한 글을 지어 천운(天運)을 밝혀 천만년 길이 전하는 법을 삼는다면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하찮은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빨리 윤허를 내려 열성의 떳떳한 법을 계승하고 신하와 백성들의 축원을 따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와 계사로써 간절히 말하고 마침내 그만두려고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효성이 더욱 돈독함을 볼 수 있다. 내가 허락을 아끼는 것은 그런 덕이 없고 그럴 시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신(朝臣)들이 서로 닦고 서로 힘쓸 것이 단지 이것뿐이고 다시 실제에 힘쓸 일은 없다는 말인가? 함부로 받는 것이 비록 대단히 부끄럽기는 하지만 버티는 것도 지루한 생각이 든다. 여러 차례 생각한 끝에 하는 수 없이 따르기는 하지만 끝내 마음에 편치 못한 것이 있다."
하였다.

 

임금이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과 예조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전례(典禮)를 문의한 후에 하교하기를,
"이미 시행한 예를 원용했는데 이것은 인정과 예의에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우리 왕가의 떳떳한 전례이다. 대왕대비전의 가상존호도감(加上尊號都監)과 왕대비전의 가상존호도감을 합쳐 설치하고 거행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에 진찬(進饌)하는 문제에 대하여 어제 세자의 상소로 인하여 이미 삼가 풍년이 든 다음에 설행하라는 전교를 받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의식 절차를 미리 준비하도록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전과 중궁전에 존호를 더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미 윤허를 받들었습니다.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거행하는 것을 조금도 늦출 수 없는 만큼 도감 칭호를 가상존호도감으로 하고, 정관(政官)을 패초(牌招)하여 정사(政事)를 열어 도감의 당상과 낭청을 차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김병시(金炳始)를 가상존호도감(加上尊號都監)의 도제조(都提調)로, 민영상(閔泳商)·한장석(韓章錫)·윤영신(尹榮信)을 제조(提調)로, 홍종헌(洪鍾軒)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응하(李應夏)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12월 5일 병자

빈청(賓廳)에서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묘호 망단자(廟號望單子)를 영조(英祖)로, 시호 망단자(諡號望單子)를 정문 선무 희경 현효(正文宣武熙敬顯孝)로, 존호 망단자(尊號望單子)를 중화 융도 숙장 창훈(中和隆道肅莊彰勳)으로,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존호 망단자를 원렬(元烈)로, 정순 왕후(貞純王后)의 존호 망단자를 정현(正顯)으로 의계(議啓)하였다.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묘호(廟號)와 시호(諡號)와 추상(追上)할 존호(尊號), 정성 왕후(貞聖王后)와 정순 왕후(貞純王后)에게 추상할 존호에 대한 의호단자(議號單子)를 친히 받았다. 왕세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어 왕세자가 올리는 전문(箋文)과 백관(百官)이 올리는 전문을 받았다.

 

12월 6일 정축

만경전(萬慶殿)에 나아가 각 국의 공사를 접견하였다.

 

12월 7일 무인

왕세자가 정청(庭請)할 때 사(師)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추상존호도감(追上尊號都監)에서 계청(啓請)하여 영조 대왕(英祖大王)        옥책문 제술관(玉冊文製述官)에 심순택(沈舜澤)을, 서사관(書寫官)에 이유승(李裕承)을,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에 민영환(閔泳煥)을, 금보전문 서사관(金寶篆文書寫官)에 김홍집(金弘集)을, 정성 왕후(貞聖王后)        옥책문 제술관에 한장석(韓章錫)을, 서사관(書寫官)에 조동희(趙同熙)를, 악장문제술관(樂章文製述官)에 조강하(趙康夏)를, 금보전문서사관(金寶篆文書寫官)에 서상우(徐相雨)를, 정순왕후(貞純王后) 옥책문 제술관(玉冊文製述官)에 윤자덕(尹滋悳)을, 서사관에 이용원(李容元)을, 악장문 제술관에 정범조(鄭範朝)를, 금보전문 서사관에 김창회(金昌熙)를 차출하였다.

 

12월 8일 기묘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황해 감사(黃海監司) 오준영(吳俊泳)의 장계(狀啓)를 보니, ‘장연(長淵)의 오차진(吾叉鎭)은 장산곶(長山串)에 위치하고 있는데, 바로 서해에 배들이 드나드는 길목이지만 진의 형편이 영락하여 변방 정사가 허술합니다. 그대로 독립된 진(鎭)을 설치하여 전적으로 지휘하게 하되 군병을 증가시켜 초하루에 지방(支放)하며 관청 건물과 배들을 수리하고 만들도록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바닷가의 요해지인 만큼 때에 따라서 적당히 제어하여 진보(鎭堡)를 고쳐 꾸리고 국경 방비를 튼튼히 하는 데는 과연 인용할 만한 지난날의 전례가 있습니다. 도신(道臣)이 청한 바는 다 변경을 튼튼히 하는 방도에 적합하니, 장계의 내용대로 독립된 진으로 시행하고, 군사의 정원을 늘리고 줄이는 것과 장교(將校)와 서리(胥吏)의 지방과 관청 건물을 수리하고 배를 만드는 등과 같은 일들은 모두 도신으로 하여금 알맞게 처리하게 한 다음에 등문(登聞)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9일 경진

김성근(金聲根)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정기회(鄭基會)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12월 10일 신사

빈청(賓廳)에서 왕대비전(王大妃殿)의 가상 존호(加上尊號)를 ‘단희(端禧)’로 의논하여 올렸다.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왕대비전(王大妃殿)의 존호 단자(尊號單子)를 친히 받고 이어 전문(箋文)을 친히 올렸다. 왕세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논어(論語)》에 대한 진강을 마친 뒤 계속하여 진강할 책자를 사(師)와 빈객(賓客)에게 수의(收議)하도록 하였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왕세자가 《논어(論語)》를 다 진강한 뒤에 계속해서 진강할 책에 대해서 사(師)와 빈객(賓客)에게 의견을 수렴하니, 사 심순택(沈舜澤)은 「선유(先儒)들이 책을 읽는 데에는 본래 차례가 있으니, 먼저 《논어》를 읽고 계속해서 《맹자(孟子)》를 읽었습니다. 대개 그 대의는 천리(天理)를 넓히고 인욕(人欲)을 막는 것입니다. 세자의 학문이 진보해 가며 계속해서 밝힐 공부로는 진실로 이 책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좌빈객(左賓客) 정범조(鄭範朝), 우빈객(右賓客) 민영환(閔泳煥), 좌부빈객(左副賓客) 민영상(閔泳商), 우부빈객(右副賓客) 한장석(韓章錫)의 의견도 이와 같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의견을 수렴한 것이 이와 같으니 《맹자》를 계속해서 강론하라."
하였다.

 

12월 11일 임오

삭과인(削科人) 송주현(宋胄顯)을 특별히 복과(復科)하여 이번에 알성시(謁聖試) 방목(榜目) 끝에 붙이라고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헌직(李憲稙)의 장계(狀啓)를 보니, ‘갑술년(1874)에 태(胎)를 묻을 때 결성(結城) 등 6개 고을에서 예전 재결(災結)에 조세를 억울하게 물린 몫에 대하여 탈(頉)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때 급결(給結)한 336결(結) 남짓이 이제 기한이 찼으므로 응당 조세를 내야 하는데, 그 후에 한 치도 개간한 땅이 없으니 지금 만일 징수한다면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5년 동안만 다시 더 연기해 주도록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거듭 기한을 연기해 달라는 것은 실로 백성들의 고통을 돌봐주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개간한 땅이 없고 백성들이 아직 도로 모여들지 않았는데, 지금 만일 친족이나 이웃 사람들에게 물린다면 이는 실로 시행할 수 없는 정사입니다. 특별히 5년 동안만 더 조세를 면제하고 각기 해당 고을에 별도로 신칙하여 기필코 원래의 총량을 채우도록 하라고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규홍(金奎弘)의 보고를 보니, ‘나주(羅州) 등 11개 고을에서 병술년(1886)과 정해년(1887)에 없어졌거나 묵은 토지는 지금 면세 기한이 찼습니다. 그런데 고장을 떠나간 백성들이 돌아오지 않아서 개간할 희망이 없는 묵은 땅이 나주에 1,010결 남짓, 광주(光州)에 455결, 순천(順川)에 275결, 김제(金堤)에 196결 남짓, 영암(靈巖)에 277결, 임피(臨陂)에 190결, 만경(萬頃)에 91결 남짓, 부안(扶安)에 125결, 옥구(沃溝)에 168결 남짓, 함평(咸平)에 211결 남짓, 홍양(興陽)에 864결 남짓이 되니, 다시 몇 해 동안 특별히 조세의 징수를 정지할 것을 허락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몇 해를 기한으로 조세를 감세하는 것이 벌써 조정의 큰 은전인데 한번 묵히게 되면 개간하지 않다가 기한이 차면 대뜸 청하곤 하니, 부세를 중요하게 여기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각 해당 고을들은 또 작년에 큰 흉년을 겪어서 실로 조세를 물릴 수 없으니, 모두 다시 3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 주고 총량을 회복하기를 도모하라고 도신(道臣)에게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12일 계미

전교하기를,
"직부(直赴) 이해창(李海昌)에 대해서는 방방(放榜)하는 날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당에 종정경(宗正卿)을 보내 경건히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익용(金益容)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12월 13일 갑신

가상존호도감(加上尊號都監)에서 계청(啓請)하여 왕대비전의 옥책문 제술관(玉冊文製述官)에 김재현(金在顯)을, 서사관(書寫官)에 박제관(朴齊寬)을,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에 정기회(鄭基會)를, 옥보전문 서사관(玉寶篆文書寫官)에 조병세(趙秉世)를 차출하였다.

 

12월 14일 을유

전교하기를,
"이 집안에서 과거에 입격한 소식은 매우 기쁜 일이니, 직부(直赴) 민병한(閔丙漢)에 대해서는 방방(放榜)하는 날에 문충공(文忠公)의 사판(祠版)에 승지(承旨)를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옛일을 회상하니 슬픈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고 참판(參判) 민창식(閔昌植)의 사판에도 함께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 집안에서 과거에 입격한 소식은 매우 드문 일이다. 옛일을 회상하니 슬픈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직부 한인호(韓麟鎬)에 대해서는 방방하는 날에 충숙공(忠肅公) 한규직(韓圭稷)의 사판에 승지를 보내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승헌(洪承憲)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민영준(閔榮駿)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내수사(內需司)의 보고를 보니, ‘명례궁(明禮宮)에서 관리하는 양산군(梁山郡) 대저도(大渚島)는 을유년(1885)에 홍수가 난 후에 제방이 허물어지고 토지가 묵었는데, 섬 백성들에게 조세를 물려 육지에 사는 백성들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이 문제는 드러나지 않은 고통과 관련된 만큼 돌보아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궁(本宮)에서 재화를 덜어내어 본도(本道)의 진결(陳結) 370결(結)을 일구게 하고 총량을 회복하며 백성들이 모여들 때까지 조세를 감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궁방에 소속된 토지는 원래 매우 중요하지만, 섬의 전지가 이렇게 묵었는데 어떻게 관계없는 육지 민호에까지 마구 징수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의 고통과 관련되는 만큼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소생할 때까지 특별히 조세를 감해줌으로써 점차 총량을 회복하도록 하라고 도신(道臣)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16일 정해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감리경흥통상사무(監理慶興通商事務) 김우현(金禹鉉)의 보고를 보니, ‘본 고을을 경장(更張)할 때에 백성들을 안정시킬 방도로 뜻을 보여주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덕원(德源)의 전례대로 본부(本府) 경내에 사는 선비와 무사 중에서 해마다 공도회(公都會)에 입격시킬 1인과 무과 1인을 뽑아 가자(加資)할 사람까지 합쳐서 3과(窠)를 안무영(按撫營)에 보고하여 방목 끝에 붙여 계문(啓聞)하도록 하소서.’ 하였습니다.
멀리 변방에 사는 선비와 무사들에 대해서는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정사를 시행해야 하고 또 덕원의 전례도 있으니, 문예(文藝)는 매년 가을에 한 사람을 뽑아서 공도회 방목의 끝에 붙이고, 무기(武技)는 우등 두 사람을 뽑아서 1과는 직부회시(直赴會試)하게 하고, 1과는 가자하여 병조(兵曹)에 보고하여 시행하도록 안무사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안무사(安撫使) 남정순(南廷順)의 장계(狀啓)를 보니, ‘경흥부(慶興府)는 성첩(城堞)과 관청 건물이 곳곳이 허물어졌는데, 이제 고을을 옮기려고 하지만 모두 원하지 않으므로 예전 터에 그대로 관청 건물을 중건(重建)하고 성첩을 고쳐 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이니 초봄에 가서 공사를 시작하게 하고, 경원(慶源), 종성(鍾城), 온성(穩城) 등의 나루터에 사는 백성 168호를 이 고을에 이속시키며 서수라(西水羅) 등 3개 진(鎭) 가운데 무이 만호(撫夷萬戶)를 혁파하고 그 진의 백성과 돈, 쌀도 이획(移劃)하도록 모두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해읍(該邑)의 중요성은 원래 특별했을 뿐만 아니라, 또 세 나라의 국경이 교차된 곳인 만큼 무릇 백성들을 돌보고 미리 대비하는 방도를 진실로 최선을 다하여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락한 상태는 날마다 더 심해져 관청 건물은 다 허물어지고 아전들과 백성들은 모두 흩어져서 지금은 고을이 고을이라고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저도 모르게 걱정하며 탄식하게 되어 이 때문에 지난날 관문(關文)으로 신칙한 것입니다.
고을을 옮기는 문제는 백성들이 원하지 않고 있는 만큼 과연 억지로 행하기 어려우니, 예전 그대로 중건할 계획을 미리 준비하였다가 봄에 가서 공사를 시작하도록 하소서. 이웃의 가까운 고을의 나루터에 사는 민호들을 이속시키고 무이 만호를 혁파하는 문제는 모두 장계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도록 하고, 그 민호와 돈과 쌀은 적당히 조처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원본】 30책 26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37면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법제(法制) / 정론-정론(政論)

 

12월 17일 무자

빈청(賓廳)에서 대전(大殿)에 가상(加上)할 존호 망단자(尊號望單子)를 ‘요준 순휘 우모 탕경(堯峻舜徽禹謨湯敬)’으로, 대왕대비전에 가상할 존호 망단자를 ‘희상(熙祥)’으로, 왕대비전에 가상할 존호 망단자를 ‘수현(粹顯)’으로, 중궁전(中宮殿)에 가상할 존호 망단자를 ‘정화(正化)’로 의계(議啓)하였다.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근정전(勤政殿)에 돌아와 각전(各殿)의 의호 단자(議號單子)를 친히 받았다. 왕세자가 따라 나아가 의식을 행하였다.

 

왕세자가 《논어(論語)》제 7권에 대한 강론을 끝낸 후에 사(師)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12월 18일 기축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갔다. 왕세자가 시좌(侍座)하였다. 알성 문무과(謁聖文武科)를 실시하였는데, 문과에서는 진사(進士) 이면상(李冕相) 등 7인을 뽑고, 무과에서는 이규정(李圭正) 등 2,513인을 뽑았다. 이어 합격자 방방(放榜)을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집안에서 과거를 보았다는 소식은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옛일을 추억하니 슬픈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새로 급제한 민영찬(閔泳瓚)의 방방일(放榜日)에 충숙공(忠肅公) 민겸호(閔謙鎬)의 사판(祠版)에 승지(承旨)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민영찬(閔泳瓚)에게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갑술년(1814) 생으로 이번 방목에 들어간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니, 새로 급제한 심형택(沈衡澤), 강시갑(康始甲), 이범세(李範世), 김재항(金在恒)에게 특별히 사악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김영전(金永典), 정만조(鄭萬朝)에게 특별히 사악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정순원(鄭淳元)은 옛날의 어진 신하 정여창(鄭汝昌)의 종손이다. 특별히 사악하라."
하였다.

 

특별히 새로 급제한 이면상(李冕相)을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로, 김영전(金永典)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새로 급제한 이해창(李海昌)·홍승운(洪承運)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정만조(鄭萬朝)·한인호(韓麟鎬)는 부교리(副校理)로, 김경규(金敬圭)는 부정자(副正字)로, 김영의(金永儀)는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새로 급제한 정운경(鄭雲景)·이설(李偰)은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는데, 모두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12월 19일 경인

왕대비전의 옥책문 제술관(玉冊文製述官) 김재현(金在顯)이 사직시켜 달라고 상소하니, 예비로 정범조(鄭範朝)를 차정하여 대신하였다.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갔다. 세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실시하였다. 제술(製述)로 강(講)을 대신하였다.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이설(李偰)은 연성 부원군(延城府院君) 이시방(李時昉)의 사손(祀孫)이므로 특별히 사악(賜樂)하고, 그 사판(祠版)에 지방관을 보내서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행하였다.〖권점을 받은 사람은〗김갑수(金甲洙), 이호성(李鎬性), 서공순(徐公淳), 민영국(閔泳國), 조민희(趙民熙), 윤창섭(尹昌燮)이다.
대교 권점(待敎圈點)을 행하였다.〖권점을 받은 사람은〗 민영찬(閔泳瓚), 박승길(朴勝吉), 박태희(朴台熙)이다.

 

김갑수(金甲洙)를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박승길(朴勝吉)을 대교(待敎)로, 민영찬(閔泳瓚)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12월 20일 신묘

새로 급제한 심의순(沈宜舜)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이채(李寀)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모두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가상존호도감(加上尊號都監)에서 계청(啓請)하여 대전(大殿)의 옥책문 제술관(玉冊文製述官)에 심순택(沈舜澤)을, 서사관(書寫官)에 이승오(李承五)를, 옥보전문 서사관(玉寶篆文書寫官)에 김홍집(金弘集)을,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에 민응식(閔應植)을,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옥책문 제술관에 윤자덕(尹滋悳)을, 서사관에 조동면(趙東冕)을, 옥보전문 서사관에 조병호(趙秉鎬)를, 악장문 제술관에 심이택(沈履澤)을, 왕대비전(王大妃殿) 옥책문 제술관에 김영수(金永壽)를, 서사관에 홍순형(洪淳馨)을, 옥보전문 서사관에 홍철주(洪澈周)를, 악장문 제술관에 이순익(李淳翼)을, 중궁전(中宮殿)의 옥책문 제술관에 한장석(韓章錫)을, 서사관에 민영소(閔泳韶)를,  옥보전문 서사관에 조병세(趙秉世)를, 악장문 제술관에 민영환(閔泳煥)을 차출하였다.

 

12월 21일 임진

전교하기를,
"오늘은 대원군(大院君)의 생신이니 도승지(都承旨)를 시켜서 문안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12월 22일 계사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갔다. 왕세자가 함께 시좌(侍座)하였다. 감제(柑製)를 실시하였다. 표(表)에서는 유학(幼學) 임병두(林炳斗)를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영상(閔泳商)을 소견(召見) 하였다 하교하기를,
"옥책문(玉冊文)을 새기는 일은 언제 마칠 수 있겠는가?"
하니, 민영상이 아뢰기를,
"계속 일을 감독하고 있지만 신중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직도 이렇게 끌고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무슨 신중히 할 일이 있어서 그런가?"
하니, 민영상이 아뢰기를,
"종묘(宗廟)의 각 실에 있는 왕후의 위판(位版)에 추상(追上)한 옥책문 가운데 ‘조비(祖妣)’ 두 글자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습니다. 축문의 격식으로 말하면 먼 왕후는 다 ‘조비’ 두 글자를 썼지만 옥책문에 대해서는 아직 일정한 규례가 없습니다. 때문에 이번에 정성 왕후(貞聖王后)와 정순 왕후(貞純王后) 옥책문 가운데 ‘조비’라는 두 글자를 써야 할지 쓰지 말아야 하는지를 감히 질정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일 호조 판서와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종묘에 나아가 제1실의 신덕 왕후(神德王后)와 제12실의 정성 왕후에게 추상한 옥책문을 모두 각별히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니, 민영상이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하교대로 각별히 봉심하고 오겠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문묘(文廟)에 작헌(酌獻)할 때에 동궁이《논어(論語)》의 강을 끝내고 와서 정성을 펴서 나의 마음이 기쁘니 보여주는 거조가 있어야겠다. 대사성(大司成) 윤용성(尹容善)은 특별히 가자(加資)하고, 묘사(廟司)인 사성(司成) 박용원(朴用元)은 수령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제일 먼저 의망하여 들이고, 장의(掌議) 정운석(鄭雲晳)은 임기가 거의 차 가는 초사(初仕) 자리에 의망하여 들이도록 하라. 동서 재임(東西齋任) 및 집사 유생(執事儒生)들에게는 각각 《오경백편(五經百編)》 1건(件)을 사급(賜給)하고 사지 수복(事知守僕)들에게는 첩가(帖加)를 만들어 주며, 그 나머지 수복(守僕), 전복(典僕), 서리(書吏) 등에게는 해조에서 전례를 참고하여 목(木)과 포(布)를 될수록 후하게 제급(題給)하도록 하라."
하였다.

 

세자가 문묘(文廟)에 동여(動輿)할 때 배종(陪從)한 사(師)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12월 23일 갑오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갔다. 세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영상(閔泳商), 예조 판서(禮曹判書) 한장석(韓章錫)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경들이 종묘(宗廟)의 두 성후(聖后)의 옥책(玉冊)에 실려 있는 글을 봉심(奉審)해 보니 과연 어떠하던가?"
하니, 민영상이 아뢰기를,
"두 옥책에는 모두 ‘황조비(皇祖妣)’라고 쓰여 있었는데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옥책에는 ‘효증손사왕신(孝曾孫嗣王臣)’이라고 쓰고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옥책에는 ‘효손국왕신(孝孫國王臣)’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한장석이 아뢰기를,
"황(皇) 자를 대(代)가 먼 데 쓰고 사(嗣) 자를 왕후의 위패에 쓴 것은 옛날에 의문(儀文)이 갖추어지지 못해서 그런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렇다. 왕후의 옥책에 ‘조비(祖妣)’ 두 글자를 쓰는 것이 근거할 만한 글이 있고 또 종묘(宗廟)의 축문 격식도 그러하니, 이번에 추상하는 두 옥책도 이 규례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한장석이 아뢰기를,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옥책(玉冊文)에는 ‘조비’ 두 글자를 쓰지 않았고 신덕과 정성 두 성후의 옥책에는 다 ‘조비’ 두 글자를 썼습니다. 혹 쓰기도 하고 혹 안 쓰기도 했으나 각각 상고할 만한 규례가 있고, 또 이것은 예법에 크게 관계되는 문제가 아닌 만큼 오직 위에서 결단하기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여러 번 근거를 찾기에 힘쓴 뜻은 실로 신중히 하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축문 격식에 있는 것도 명백한 증거의 하나로 될 만하니 이를 원용하여 정하라는 성상의 하교는 참으로 타당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신의 의견은 어떠하다고 하는가?"
하니, 한장석이 아뢰기를,
"신들도 대신들과 사적으로 의논하였는데, 모두 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모두의 의견이 이러하니 두 성후에게 추상하는 옥책에 ‘조비’ 두 글자를 삼가 쓰도록 도감(都監)에 분부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또 하교하기를,
"이 문제는 비록 예법에는 크게 관계되지 않지만 일정한 규례가 있어야 할 것이니, 이 연설(筵說)을 도감의궤(都監儀軌)와《예조등록(禮曹謄錄)》에 자세히 기록하여 훗날에 참고할 바탕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새로 급제한 이봉순(李鳳淳)을 특별히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제수하였다.

 

유랑하며 구걸하는 백성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12월 25일 병신

윤영신(尹榮信)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민영달(閔泳達)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정인승(鄭寅昇)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민영국(閔泳國)을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 신대균(申大均)·황장연(黃章淵)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삼았다. 신대균(申大均) 이하는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12월 26일 정유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종묘에 춘향 대제(春享大祭)를 행하고 서계(誓戒)를 받았다. 왕세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순익(李淳翼)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12월 27일 무술

홍철주(洪澈周)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정해륜(鄭海崙)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민영기(閔泳綺)를 황해도 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12월 28일 기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명재(李命宰)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변원규(卞元圭)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오준영(吳俊泳)이, ‘연안부(延安府) 남대지(南大池)를 명년 봄에 파내는 일에 대하여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주소서.’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보통 물을 채웠다가 관개하는 것과는 다르니 봄에 따뜻하게 된 다음에 노력을 동원하여 파내되, 함부로 개간하거나 불법으로 경작하는 것을 일체 엄금하여 혹시라도 전과 같이 막히는 일이 없도록 묘당에서 미리 각별히 단속하고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9일 경자

금보(金寶)를 조성할 때의 감동 당상(監董堂上)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이기호(李起鎬)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원규(李源珪)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현익(李玄翼)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함흥부(咸興府)의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조병식(趙秉式)이, ‘삼수부(三水府)에 찬배(竄配)된 죄인 이주헌(李周憲)은 관청에 드나들고 멋대로 배소(配所)를 떠나 변방에 폐단을 끼치며, 남편 있는 여자를 강탈하고 정해 준 요미(料米)보다 더 요구하여 빚놀이를 하고 빚을 받는 등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권력으로 백성들을 압제하던 옛 버릇을 고치지 못하여 가난한 백성들의 정소(呈訴)가 날마다 이르고 있습니다. 같은 부에서 종노릇을 하는 죄인 이태연(李泰淵)은 바로 역적 이병연(李秉淵)의 아우인데, 죄상이 중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제멋대로 갑산(甲山) 등지에 왕래하여 백성들의 소장에 오르기까지 하여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갑산 부사(甲山府使) 임면호(林冕鎬)를 우선 파출(罷黜)하고 그 죄상을 유사(攸司)에서 품처(稟處)하게 하고, 삼수 전 부사(三水前府使) 김재구(金載九)는 이미 체직되었다는 이유로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그 죄상도 유사에서 품처하게 해 주소서.’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정배된 죄수가 멋대로 배소를 떠나서 폐단을 일으켰다니 듣기에 극히 통탄스럽다. 이것은 법과 기강이 해이해진 데 원인이 있다. 도신(道臣)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더 차하(差下)하여 이주헌과 이태연을 모두 감영 뜰에 잡아다가 한 차례 엄히 형신(刑訊)한 후에 도로 배소로 보내게 하라. 제대로 검속하지 못하고 그들이 마음대로 왕래하게 놔둔 두 고을의 수령(守令)은 모두 해부에서 나문(拿問)하여 감처(勘處)하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원 감사(江原監司) 정태호(鄭泰好)의 계본(啓本)을 보니, ‘통천군(通川郡)에서 백성들의 소란이 다시 일어난 문제와 중한 죄수가 도망친 사연에 대하여 해군(該郡)에서 조사하고 문건으로 보고하여 왔기 때문에 후록(後錄)하여 치계(馳啓)하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소란이 다시 일어난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이며, 중한 죄수를 멋대로 풀어주었으니 이를 차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윤직(尹稷)이란 자가 얼마나 사나운 인물입니까? 처음에는 좌수(座首)가 되어 소란을 꾸며 협박하다가 끝내 죄수로서 통문을 돌려 선동하였으며 끝없이 사람을 위협하여 재물을 빼앗았고 못하는 짓이 없이 마음대로 흉악한 짓을 했습니다. 법은 본래 엄한 것인 만큼 만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감영의 중군(中軍)을 시켜 빨리 해읍(該邑)에 달려가서 군사와 백성들을 크게 모아 놓고 효수(梟首)하여 대중을 경계하게 하고, 도망친 윤영창(尹永昌)은 특별히 기찰하라고 신칙하여 즉시 법조문을 적용한 후 등문(登聞)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광양현(光陽縣) 안핵사(按覈使) 김규식(金奎軾)의 계본을 보니,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킨 곡절을 조사하여 등문하니 묘당에서 품처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옥사를 조사하는 것은 큰 정사인 만큼 충분히 분명하고 신중하게 하지 않고 혹 조금이라도 소홀하거나 누락되게 하면 어찌 형벌을 잘못 적용했다는 탄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조사 보고서를 여러 번 보니, 적이 의심스러운 자는 바로 갇혀 있는 백지홍(白智洪)입니다. 그가 관리된 몸으로 나랏일에 복무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교묘하게 기회를 엿보면서 교활한 계책을 꾸미고 나라의 재물을 사사로운 용도로 써 버린 것은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이 조항에 대해 면밀하게 계획을 짜서 선동한 정적을 가릴 수 없는 만큼 사실대로 공술을 받아야 마땅하겠으나 결국 결말을 짓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조사하는 원칙이겠습니까? 다시 철저히 끝까지 조사하여 즉시 치문(馳聞)한 후에 품처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박창규(朴昌圭)는 백성들의 소란을 격발시키고 수령을 협박하여 내쫓았으니 법이 본래 엄한 만큼 사형에 처해도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진영에서 군사와 백성들을 크게 모아놓고 효수(梟首)하여 대중을 경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밖에 좌수(座首) 김경문(金瓊文), 호장(戶長) 박창휘(朴昶徽)는 현장에서 극력 구원하지 못했으니, 관장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의리로 보더라도 완전히 용서할 수 없으므로 모두 형배(刑配)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논죄한 끝부분의 말에 번잡하고 외람된 점이 많이 있으니, 해당 안핵사는 우선 엄하게 추고(推考)하고, 전 현감(前縣監) 김두현(金斗鉉)은 뜻밖에 생긴 사건이므로 죄를 깊이 따질 것은 없으니 나감(拿勘)하고 특별히 용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강원 감사(江原監司) 정태호(鄭泰好)의 계본을 보니, ‘흡곡현(歙谷縣)에서 소란을 일으킨 죄인들을 조사하여 형률을 논하고 삼가 묘당(廟堂)에서 품처하기를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고을은 도내에서 지극히 영락한 곳으로 바닷가의 가장 먼 지방에 있고 풍속도 본래부터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수령이 과격한 변란을 무마하지 못하여 여론이 들끓자 기미를 알아차리고 홀몸으로 피했으니 전후의 행동이 진실로 지극히 해괴하고 망녕됩니다. 전 현감 안창렬(安昌烈)은 이미 감처(勘處)를 받았으므로 이제 다시 논할 것이 없습니다. 죄인 이희재(李喜載)는 고을 정사가 잘 되고 못 되는 것이 그에게 관계가 없는데 어찌하여 통문을 돌려서 패거리를 모았으며, 백성의 원망이 있고 없는 것이 그에게 무슨 상관이기에 끝내 집을 부수는 등 소란을 야기시켰단 말입니까? 수창(首倡)하였다는 말이 구초(口招)에 본래 있으니 감영의 중군을 시켜 빨리 해읍에 가서 군사와 백성을 많이 모아놓고 효수하여 대중을 경계시키게 해야 할 것입니다.
고태양(高太陽)은 현재 관리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어찌하여 정사를 도울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잡된 것들과 결탁하여 간악한 습관을 멋대로 자행했으니, 두 차례 엄하게 형신한 뒤에 원악도 정배(遠惡島定配)해야 할 것입니다.
차성식(車成植)은 본래 귀신이나 물여우 같은 인간으로서 스스로 매나 개처럼 남의 앞잡이가 되어 관청을 드나들며 뇌물질하는 길을 거간함으로써 전례 없는 변란을 초래하게 했으니, 이 죄수의 죄는 고태양보다 더한데, 어찌 명령을 내리기 전에 나갔다는 이유로 시일을 끌 수 있겠습니까? 빨리 잡아다가 두 차례 엄하게 형신한 뒤에 원악도에 종신토록 정배하고 물간사전(勿揀赦前)해야 할 것입니다.
김재규(金在奎), 이진실(李珍實), 최광순(崔光淳)은 모두 두목(頭目)의 직에 있었는데, 조그마한 잘못도 없다고 하면서 오로지 말을 꾸며내기만 일삼았으니 더욱 교활하고 흉악합니다. 모두 형배(刑配)해야 할 것입니다. 방명술(方明述) 이하 여러 죄수들은 본 도에서 징계하고서 풀어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장연(長淵) 오차진(吾叉鎭)은 바로 서해의 배들이 드나드는 중요한 길목인 만큼 중국 상인들이 사사로이 무역하며 몰래 운반하는 것을 조사하고 금지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해진(該鎭)의 첨사(僉使) 유완수(柳完秀)를 사검관(査檢官)으로 차하(差下)하여 인수받아서 일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묘호도감(廟號都監)에서 계청(啓請)하여 원릉표석음기 제술관(元陵表石陰記製述官)에 한장석(韓章錫)을, 서사관(書寫官)에 이순익(李淳翼)을, 전문 서사관(篆文書寫官)에 김성근(金聲根)을 차출하였다.

 

12월 30일 신축

의정부(議政府)에서, ‘각 도의 재결(災結)을 1만 6,786결(結)로 특별히 비준하여 급재(給災)해 주도록 허락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26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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