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7권, 고종27년 1890년 3월

싸라리리 2025. 1. 2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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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경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통제사(統制使) 정기택(鄭騏澤)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3월 2일 신미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갔다. 세자가 따라가서 참석하였다. 기로 유생(耆老儒生)들에게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정해관(鄭海觀), 이준(李儁), 이주순(李周淳), 김만수(金萬秀), 정순교(丁洵敎)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기로과(耆老科)는 여느 과와 다른 만큼 새로 급제한 정해관, 이준, 이주순, 김만수, 정순교에게 모두 특별히 가자(加資)하여 첨지 가설(僉知加設)에 단부한 다음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기사 당상(耆社堂上)을 인견(引見)하고 음식을 하사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전하의 효성에 감응되어 동조 전하(東朝殿下)의 옥체가 빨리 회복되었으니, 무릇 오늘 온 나라 백성들이 기뻐 고하면서 모두 만수무강의 복을 축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특별히 효도를 장려하는 어진 정사를 미루어 경사를 기념하는 분부를 크게 베풀어 장차 온 나라와 함께하고자 은혜를 베풀고 널리 경축하기 위하여 기신(耆臣)을 부르고 기로 유생(儒生)에게 시험을 보이시니, 이것은 실로 더없이 큰 길상(吉祥)이고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하시려는 생각입니다. 신들이 몸소 이 모임을 보게 되었으므로 더욱더 기쁘고 송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길이길이 장수하기를 축원하는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내 마음의 기쁨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전 강원 감사(前江原監司) 정태호(鄭泰好)를 소견(召見)하였다.

 

민영규(閔泳奎)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회방인(回榜人) 원석오(元錫五)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3월 3일 임신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지내고 서계(誓戒)를 받았다. 왕세자도 따라갔다.

 

민영규(閔泳奎)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홍철주(洪澈周)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3월 4일 계유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설행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민영기(閔泳琦)를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고 이어 사악(賜樂)하라고 명하였다.

 

사옹원(司饔院)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보고한 것을 보니, ‘전라 감영(全羅監營)에서 3월분 삭선(朔膳)의 물품을 진위(振威)에 와서 화적(火賊)을 만나 빼앗겼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막중한 공선(供膳)을 중도에서 도적을 맞았으니, 아주 놀랍고도 황송한 일입니다. 해당 지방관인 진위 현령(振威縣令) 이태정(李台珽)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죄를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6일 을해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보고한 것을 보니 전라 감영(監營)의 삭선(朔膳) 물품을 화적(火賊)에게 빼앗겼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옛날에 없던 큰 괴변으로서, 보통 행인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듣기에 놀라워 잡아 죽이려 하는데, 더구나 나라에서 사용할 공수(公需)가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못하는 짓이 없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리지어 모여 패거리를 이루고 있는 자취가 이미 드러났고, 백주대로였던 만큼 얼굴을 다 구별할 수 있어 알아내려면 알아낼 수 있고 잡으려면 잡을 수 있는데도 모두 남의 일 보듯 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돌아보고 두려워하며 도대체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이 없으니, 국법을 어디에 시행하겠습니까? 말을 하자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지방관은 이미 사옹원(司饔院)에서 나문(拿問)하여 처벌할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제 굳이 다시 논할 필요가 없지만, 전후에 걸쳐 특교로 신칙한 것이 거듭 엄하게 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중앙과 지방의 모든 법을 맡고 있는 관리는 마땅히 정성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여행자가 끊어지고 도로가 막히는 우환을 미리 방지해야 할 것을 생각해야 하는 법인데, 누가 그 책임을 맡겠습니까?
도를 살피는 직책에 있는 사람도 곡진히 용서하기는 어렵습니다. 경기(京畿)와 충청(忠淸) 두 도의 도신(道臣)에게 월봉(越俸)의 형전을 시행하고, 그들에게 각 해당 진영장(鎭營將)과 각 해당 지방관들을 신칙하여 방책을 강구해서 즉시 도적을 잡아 없애게 한 후에 등문(登聞)하도록 말을 만들어 팔도(八道)와 오도(五都)에 엄히 신칙하여 일체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7일 병자

이헌경(李軒卿)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3월 8일 정축

융문당(隆文堂)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왕세자는 추안당(秋安堂)에서 재숙하였다.

 

전교하기를,
"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을 장차 종묘(宗廟)에 배향하여 세상에 드문 예전(禮典)을 처음으로 거행하게 되니, 추모하는 정이 더욱 간절하다. 교서(敎書)를 선전(宣傳)하는 날 신위(神位)에 치제(致祭)할 때에 특별히 승지를 보내 추모하는 뜻을 표시할 것이며, 제문은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지어 바치도록 하라.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의 신위는, 듣자니 고향집에서 이미 교서를 공경히 받았다고 하므로 치제하는 일을 함께할 수 없으니 몹시 섭섭한 마음이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여양 부원군을 추향하는 예전을 장차 거행하려고 하여 이미 치제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자의 인정과 예의상 사모하는 정이 매우 간절할 것이니, 또한 교서를 선전하고 치제하는 날에 춘방(春坊)으로 하여금 계달(啓達)하게 한 다음 일체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영철(金永哲)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순익(李淳翼)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은용(李垠鎔)을 시강원 겸필선(侍講院兼弼善)으로, 김학수(金鶴洙)를 필선(弼善)으로, 정세원(鄭世源)을 겸문학(兼文學)으로, 박기양(朴箕陽)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운송사업〔轉運〕이 한시가 급하니 전 총무관(總務官) 조필영(趙弼永)을 특별히 분간(分揀)하여 그대로 전직에 임명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요즘 도적으로 인한 소란이 기내(畿內)에서 더욱 심한 만큼 잡아서 모조리 없앨 방책을 세우는 것이 시급한데, 기읍(畿邑)의 수령들이 자기 직무를 비워두고 서울에 와 있으면서 곧바로 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사체로 헤아려 볼 때 말하자니 통탄스럽습니다. 이제부터는 도신(道臣)에게 말미를 받지 않는다면 마음대로 지방에서 떠날 수 없게 하며, 이미 서울에 올라 와 있는 자는 재촉하여 관직으로 돌아가 방략을 강구하여 기필코 기한을 정해 소탕하게 할 것입니다. 다른 도에서 말미를 받고 서울에 왔거나 아직 하직하지 않은 수령들은 일체 재촉하여 즉시 내려 보내되, 역시 이런 내용으로 말을 만들어 각도(各道)의 도신에게 행회하며 도적 떼가 출몰하는 고을이 수령에게는 말미를 주지 말도록 특별히 엄하게 신칙하고, 오도(五都)에도 관문으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9일 무인

계속 융문당(隆文堂)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윤횡선(尹宖善)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조경묘(肇慶廟)와 경기전(慶基殿)의 개수를 감동(監董)한 도신(道臣) 김규홍(金奎弘)에게 가자(加資)하였다.

 

3월 10일 기묘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존호(尊號)를 추상하는 데에 따른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대내(大內)에서 내올 때에 지영(祗迎)하고, 이어 종묘(宗廟)에 나아가서 희생과 제기를 살펴보고서 재숙하였다. 세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원희(李元會)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3월 11일 경진

숙종 대왕(肅宗大王), 인경 왕후(仁敬王后), 인현 왕후(仁顯王后), 인원 왕후(仁元王后)에게 존호(尊號)를 추상하는 데에 따른 옥책문(玉冊文)과 금보(金寶)를 직접 올린 다음 친히 제사를 지냈다. 왕세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이윤재(李允在)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삼았다.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3월 12일 신사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서 옥책문(玉冊文)과 금보(金寶)를 올려 경축하고 진하를 받은 다음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왕세자가 따라 나아가 시좌(侍座)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훌륭한 왕업을 잇고 천명(天命)을 밝게 받아 만대에 영원할 계책을 생각하며 선대의 효성을 추모하여 조상의 공적을 크게 빛내는 동시에 세 왕후에게 옥책문(玉冊文)을 올리나니, 태묘(太廟)에 제사를 지내고 온 나라에 크게 고하노라.
삼가 생각건대, 숙종 현의 광윤 예성 영렬 유모 영운 홍인 준덕 배천 합도 계휴 독경 장문 헌무 경명 원효 숙종 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章文憲武敬明元孝肅宗大王)은 큰일을 한 임금으로서 비길 데 없는 업적을 세우셨다. 굳세고 중정(中正)한 덕을 품부 받아 하늘의 원덕(元德)을 체행하셨으며, 하늘의 질서에 따라 현자에게 관직을 주고 죄 있는 이를 토벌하는 법에 힘써서 한결같이 천리(天理)에 근본하셨다. 임금으로서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같이 효성이 독실하니 인륜이 지극한 성인이시며, 온 나라가 당요(唐堯)와 우순(虞舜)과 같은 어진 이로 떠받들어 백성들의 표준이 되었다. 나라의 모든 정령(政令)을 조처하심은 학문 가운데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폐백으로 은둔한 현자를 초빙하시니, 다스리는 법은 하늘의 덕과 임금의 도리에서 구한 것이며, 탕왕(湯王)이 상림(桑林)에서 경건하게 기도하듯이 제사 지내시니 나라를 위한 계책과 백성을 위한 성심을 볼 수 있었다.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는 내용의 그림을 걸어 놓고 정사에 대해 부지런히 자문하여 보필할 사람을 뽑았으며, 궁전 기둥에 써서 붙여서 출척(黜陟)을 명백히 하여 관리들을 살폈다. 근본을 함양하여 신명을 대하듯 조심했기 때문에 일에서는 강물처럼 거침없이 성과가 나타났다.
심지어 전에 없던 예식을 다 거행한 것은 실로 성군의 훌륭한 결단에서 나온 것이다. 위화도(威化島)의 공적을 드러내어 밝히고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사당을 높이시니 조상들에게 영광이 있고, 단종(端宗)의 지위를 회복하고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사당을 세우시니, 천지에 내세워도 어그러지지 않았다. 문묘(文廟)에 승무(陞廡)하는 차례를 바로잡으니 도학(道學)이 정통을 전하게 되었고, 황단(皇壇)에 대통(大統)을 높이니 정밀한 의리는 선대의 뜻을 밝혔다.
해와 달처럼 밝으시니 곤의(壼儀)가 다시 새로워짐을 우러러보고, 신속함이 바람과 우레와 같으니 다행히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졌다. 백대(百代)의 왕들을 등급을 나누어 평가해 보아도 이렇게 훌륭한 일이 없으며, 한 마음을 정밀히 하여 이로써 전해주셨다. 총명하고 슬기로운 지혜로 임금 자리에 올라 개연히 삼대(三代)의 훌륭한 정치에 뜻을 두었으며, 예약과 형정(刑政)이 자신에게서 나와 우뚝하게 한 왕자(王者)의 규범이 되었다. 아! 50년 동안 인도하여 교화가 이루어졌고 진실로 억만년의 터전이 굳건해졌다. 비록 허공의 구름같이 이미 지나가버려 드높은 업적을 형용하기 어렵지만 아직도 남은 혜택은 잊혀지지 않아 추연히 다시 보는 듯하다.
생각건대, 광열 선목 혜성 효장 명현 인경 왕후(光烈宣穆惠聖孝莊明顯仁敬王后)께서는 큰 현인의 후손으로서 원비(元妃)의 높은 지위에 있었다. 시(詩)와 예(禮)를 전해오는 훌륭한 가정에서 배우고 여러 대에 걸쳐 높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었으며, 도서(圖書)와 역사를 생활의 거울로 삼고 네 전하의 기뻐하는 마음을 받들었네. 몸을 유순하고 바름에 두니〈관저장(關雎章)〉003)  이 남국(南國)의 옛 교화를 일으키듯 하였고, 마음을 겸손함에 두니 한(漢) 나라 마황후(馬皇后) 탁룡궁(濯龍宮)에서 외가 친척의 사사로움을 깨끗이 하듯 하였다. 6년동안 왕후의 지위에 있다가 세상을 버리신 것이 슬프나, 칠첩(七牒)의 옥검(玉檢)에 아름다운 공렬이 남아 영원히 전해지리라. 또한 생각건대, 효경 숙성 장순 의열 정목 인현 왕후(孝敬淑聖莊純懿烈貞穆仁顯王后)께서는 밝음이 일월과 부합되어 왕비가 되었는데, 지초의 뿌리〔芝根〕와 단물샘에 아름다움이 모이듯 하였으니, 아름다운 가르침은 내외의 법도 있는 훌륭한 가문에서 받은 것이며 규목장(樛木章)004)  과 강타장(江沱章)005)  에 노래가 퍼지듯 은공(隱功)은 옛날의 명철한 왕후에 비길 만하였다. 소인들의 모해를 당했으나 아름다운 업적은 더욱 빛났고, 왕후로 다시 높아진 것을 우러러보게 되었으니 인륜이 비로소 바로잡혔다. 돌아가시자 종묘(宗廟)에 모셨으니 〈채빈장(采蘋章)〉을 읊으며 감회를 일으키고 합장(合葬)을 하여 하늘과 짝하신 신령을 기쁘게 하니 관을 부여잡고 추모하는 마음을 부친다.
또 생각건대, 혜순 자경 헌렬 광선 현익 강성 정덕 수창 영복 융화 휘정 정의 장목 인원 왕후(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徽靖定懿章穆仁元王后)께서는 마음이 깊고 고요하며 슬기로운 학문이 물 흐르듯 하였다. 성명(聖明)의 정사에 큰 교화를 도와 닭이 울면 일어나는 경계를 보존하였고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에 큰 계책을 결단하여 자손들에게 훌륭한 계책을 물려 주셨다.
주(周) 나라의 열 명의 훌륭한 신하들 속에는 부인이 있었으니, 공로는 여와씨(女媧氏)보다 높았고, 50년 동안 문모(文母)의 교훈을 받아 칭송하는 말이 온 나라에 넘쳤다. 하늘에 밝게 계시니 생전에 옥난간에서 노니시던 자취는 이미 아득하지만, 사람에게 미친 영향은 많고 많으니 역사책에 남긴 아름다운 사적으로 징험할 수 있다.
덕이 적고 몽매한 과인에 이르러 왕업을 물려받았으므로 선조의 계책과 업적을 이어나갈 방도를 생각하였다. 이에 신령이 오르내리는 것을 생각하니 어찌 가정의 아름다운 전통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나의 제사를 돌아보시니 다만 부지런히 밤낮으로 제사를 올릴 뿐이다.
이제 영묘(英廟)에 존호를 가상하는 날을 맞이하여 옛날 조상의 사당에 아름다움을 돌리는 정성을 생각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마음은 이승이건 저승이건 차이가 없어 양양(洋洋)하게 위에 계신 듯하고 아래에 계신 듯하며, 훌륭한 덕성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그 소리는 분명하고 그 신령은 빛날 것이다. 오직 선조의 뜻을 잇고 사업을 이어받는 계책은 선대 임금을 힘써 생각하는 것인데, 더구나 빛나는 업적을 드러내는 조치는 우리 왕가의 예법에도 마땅하다. 그래서 이미 떳떳한 법을 그대로 따르고 또 왕후들의 업적도 함께 드러내는 바이다. 올해 3월 11일에 숙종 대왕에게는 ‘정중 협극 신의 대훈(正中協極神毅大勳)’이라는 존호를, 인경 왕후에게는 ‘순의(純懿)’라는 존호를, 인현 왕후에게는 ‘원화(元化)’라는 존호를, 인원 왕후에게는 ‘정운(正運)’이라는 존호를 추상하였다. 존호를 추상하는 성대한 의식은 선조(先祖)이신 숙종 대왕을 즐겁게 해 드리고, 세 분 왕후의 훌륭한 덕음(德音)에 부합될 것이다.
대서특필하여도 고명하고 후덕한 덕은 표주박과 대통 같은 좁은 안목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만, 이미 높이고 또 높여서 바르고 밝음이 옥책문(玉冊文)에 일컬은 바와 부합된다. 조상을 추모하고 선조의 아름다운 덕을 거울삼는 것은 나라를 편안하게 한 임금이 도모한 일을 따르는 것이고 경축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은 상천(上天)의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덕을 본받는 것이다. 대궐 뜰에서 교서를 반포하니 모든 관리들이 기뻐서 춤추며 은택을 온 나라에 펴니 만물이 밝게 소생하도다.
이달 12일 새벽 이전에 지은 죄로 잡범으로서 사죄(死罪) 이하의 죄인을 모두 용서한다.
아! 귀신과 사람이 서로 기뻐하니 종묘(宗廟)는 더욱 중해졌다.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가니 효도하고 공경하는 기풍이 크게 일어나며, 나라의 운명이 새로워지니 다같이 어질고 장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모두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한장석(韓章錫)이 지어 올린 것이다.】


【원본】 31책 27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46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왕실-의식(儀式)


[註 003] 〈관저장(關雎章)〉 : 《시경(詩經)》 주남(周南)의 편명(篇名). 주 문왕(周文王)이 숙녀(淑女)를 후비(后妃)로 얻은 것을 찬탄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 관저는 후비의 덕(德)이요 풍교(風敎)의 첫머리이며 천하를 교화하여 부부(夫婦)를 바루는 뜻이라 한다.[註 004] 규목장(樛木章) : 《시경(詩經)》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편명(篇名).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 태사(太姒)가 은덕(恩德)으로써 여러 첩들을 접하고, 여러 첩들도 후비에게 친부(親附)하였으므로, 규문(閨門)의 예의(禮儀)가 성했던 것을 말함.[註 005] 강타장(江沱章) : 《시경》 소남(召南)의 강유사(江有氾). 주남(周南)의 규목과 함께 모두 중첩(衆妾)을 잘 다스린 부인의 덕을 읊고 있음.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친히 올릴 때와 직접 제사를 지낼 때, 진하를 올릴 때 그리고 세자가 당에 앉아 축하 받을 때의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와 추상존호도감 도제조(追上尊號都監都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홍순학(洪淳學)·이헌경(李軒卿), 대거 승지(對擧承旨) 이근수(李根秀), 선교관(宣敎官) 김용원(金容元), 선전관(宣箋官) 엄주영, 예모관(禮貌官) 민영달(閔泳達), 상례(相禮) 윤창섭(尹昌燮), 독옥책관(讀玉冊官) 송세헌(宋世憲), 독금보관(讀金寶官) 조병직(趙秉稷), 추상존호도감 제조(追上尊號都監提調) 민영상(閔泳商)·홍철주(洪澈周)·이순익(李淳翼), 도청(都廳) 서공순(徐公淳)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이번에 존호(尊號)를 추상한 데 대해 칭경(稱慶)과 관련한 경과(慶科)는 별시(別試)로 마련하고 합쳐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계품(啓稟)하였기 때문이었다.

 

박홍수(朴弘壽)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윤창섭(尹昌燮)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3월 13일 임오

조만승(曺萬承)을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삼았다.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3월 14일 계미

김만식(金晩植)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정은조(鄭誾朝)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희원(李喜元)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민영숙(閔泳肅)을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윤우식(尹雨植)을 시강원 겸사서(侍講院兼司書)로,  조만승(曺萬承)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민영숙(閔泳肅)은 음정(陰正)이다.

 

3월 15일 갑신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세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조한복(趙漢復)과 최종호(崔宗鎬)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왕세자가 《맹자(孟子)》 제1권에 대한 강(講)을 지금 다 마쳤으니, 제2권을 계속 진강하겠습니다.’라고 아뢰니, 사(師)와 빈객(賓客),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翼衛司)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우의정(右議政) 조병세(趙秉世)를 소견(召見)하였다. 원릉(元陵)에 표석(表石)을 세우고 능상(陵上)을 봉심(奉審)한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3월 16일 을유

〖청(淸) 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세 사신을 소견하였다.  【정사(正使) 이돈하(李敦夏), 부사(副使) 이희로(李僖魯), 서장관(書狀官) 윤시영(尹始榮)이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원릉(元陵)에 표석을 세울 때의 묘호도감(廟號都監)의 도제조(都提調)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약원(藥院)에서 구계(口啓)를 올려,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병환을 입진(入診)하겠습니다.’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증세가 점점 나아가니 경들은 입진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3월 18일 정해

민영준(閔泳駿)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조재관(趙載觀)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이종순(李鍾順)을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이재호(李在頀)를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약원(藥院)에서 올린 구계(口啓)에,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병세를 입진하고 약제를 의논한 다음 본원(本院)에서 윤직(輪直)하는 명을 허락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내에서 여러 증상들을 진찰한 결과 증상이 빨리 회복되어 가니 너무도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다. 경들은 입시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3월 19일 무자

전교하기를,
"장적(帳籍)을 해마다 수정하는 일은 빠뜨릴 수 없는 일인데, 근래에 와서는 태만해져서 감독하지 않기 때문에 종종 누탈(漏脫)이 생길 뿐만 아니라 전혀 정납(呈納)하지 않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으니, 호구(戶口)가 늘고 준 것을 조사할 길이 없고 간사한 무리들의 출몰을 가려낼 길이 없다. 도성과 사방으로 통하는 큰 도회지에는 확실한 주소가 없는 교활한 무리들이 자취를 숨기고 섞여 있어서 폐단이 생기지 않을 수 없으며, 물건을 훔치고 빼앗는 악행도 모두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있으니, 참으로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중앙과 지방의 호적을 정확히 수록하여 혹시라도 빠뜨리거나 잘못하는 일이 없도록 내무부(內務府)에서 거듭 강조하고 엄히 신칙하여 간사한 짓을 막을 방도를 별도의 절목을 갖추어 행회(行會)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우선(尹宇善)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3월 20일 기축

광무총국(鑛務總局)에서 아뢰기를,
"양서(兩西)의 석탄과 구리 채광에 대한 업무가 점점 더 방대해지는 만큼 그에 대한 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수안 군수(遂安郡守) 현흥택(玄興澤)을 감리(監理)로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1일 경인

민병한(閔丙漢)을 시강원 겸설서(侍講院兼說書)로 삼았다.

 

3월 22일 신묘

우의정(右議政) 조병세(趙秉世)가 상소를 진달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이 임무를 맡은 후로 나는 경을 늦게 만났다고 생각하면서 좋은 계책으로 곤란을 타개할 것을 기대했는데, 품은 재능을 발휘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사직하는 상소가 올라온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현재 걱정스러운 형편은 진실로 하루아침에 생겨난 일이 아니다. 경이 말한, 기강이 날로 해이해지고 법도가 날마다 바뀌어서 하나도 믿을 만한 일이 없고, 한 군데도 병들지 않은 데가 없다고 한 것은 진실로 경의 말과 같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단지 정승에게 있으니, 비유하면 마치 수레를 밀고 음식물을 요리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경이 또 잘 비유하였다.
이런 때이므로 책임이 더욱 중하고, 오직 경이기 때문에 기대고 바라는 것이 더욱 절실한 것이다. 더구나 경은 대대로 충성을 지켜왔고 나라와 고락을 같이한 의리가 있는데, 어찌 차마 무관심하게 나를 버려두고 갑자기 손을 놓으려고 하는가? 이것은 실로 말이 되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니, 어찌 내가 번거롭게 말을 되풀이하기를 기다린단 말인가? 경은 서로 공경하여 정사를 도울 방책에 더욱 힘써서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공손히 하고, 성과를 기대할 수 있도록 하라. 실로 구구하게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3월 23일 임진

내무부(內務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들으니, 예산 현감(禮山縣監) 윤상구(尹相耉)가 곤(棍)으로 중국 상인의 죄를 다스렸다는 공문이 외서(外署)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해당 수령이 장정(章程)을 무시하고 예사롭게 약조를 위반했으니 우선 파직하고, 현장에서 거행한 읍속(邑屬)들은 본 도의 감영으로 하여금 경중을 구분하여 징계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5일 갑오

내무부(內務府)에서 아뢰기를,
"통상(通商)을 한 이래로 선박을 고용하는 일은 원래 장정(章程)에 있는데, 방금 들으니 전운 위원(轉運委員)이 일본의 윤선(輪船)을 고용한 뒤 곧장 진주(晉州)로 가서 세곡(稅穀)을 실었다고 합니다.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일이 물론 아주 긴급하다고는 하나 장정 또한 위반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의정부(議政府)에 통지하는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해관(海關)의 증서도 없이 마음대로 외양(外洋)에서 배를 고용하여 통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항구에 왕래하였으니, 규정에 위반되는 것은 물론 후일의 폐단에도 크게 관계됩니다. 해당 위원인 장재두(張在斗)를 우선 태거(汰去)하고 죄상은 해부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6일 을미

조경묘(肇慶廟)와 경기전(慶基殿)을 개수할 때의 지방관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3월 27일 병신

약원(藥院)에서 구계(口啓)를 올려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환후를 입진한 다음 직숙(直宿)하겠습니다.’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증상이 나아가더니 지금은 병세가 더해져서 매우 애가 탄다. 자내(自內)의 예(例)로 입진할 것이니 경들은 본원에서 윤직(輪直)하라."
하였다.

 

우의정 조병세(趙秉世)에게 하유하기를,
"지난번 비답에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타일렀으니 다시 더 말할 것은 없으나 기대가 지극한 만큼 자연히 번거롭게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꺼리지 않게 된다. 경은 생각해 보라. 오늘날 나라를 위한 계책과 백성의 일에 대해서 고식적으로 인습하고 바로잡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반드시 맹렬히 힘을 써서 분발하고 노력을 기울이며 야박한 것을 되돌려 순박하게 하고 위급한 형편을 전환시켜 안전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은 반드시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경은 사려가 깊고 후덕하며 의지가 확고하여 인심을 안정시키는 데는 평소부터 위엄과 명망이 있고, 평소에 뜻을 세움에 굳세고 과감하여 지조가 흔들리지 않았다. 침착하고 곧은 지조와 나라 일을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 대해서 나는 충분히 듣고 주시한 지 오래이다. 상앗대를 잡고 있으면서 훌륭한 뱃사공을 사절하며, 약에 대해 물으려고 하면서 뛰어난 의원을 쫓아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경의 갑작스런 사직을 듣고서 허락할 수 있겠는가? 경도 반드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단지 번거롭게 응답만 하는 것은 결코 서로 믿는 뜻이 아니다.
기대고 바라는 마음 간절하여 특별히 이렇게 선유(宣諭)하는 것이니, 경은 부디 앞으로 상소를 올리는 일을 속히 그만두고 더욱 독실하게 보좌하는 일에 힘쓰며, 정승의 직책에 있으면서 한결같이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데 마음을 쓰기 바란다."
하였다.

 

민영준(閔泳駿)을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로 삼았다.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조동면(趙東冕)과 부호군(副護軍) 조동윤(趙東潤)에게 특별히 입직(入直)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강원 감사(江原監司)가 이미 체차해 달라는 일로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전 도신(道臣)이 감영으로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맞이하고 보내는 폐단을 더욱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전 감사 이원일(李源逸)을 우선 잉임(仍任)시켜 앞으로 성과를 거두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정해륜(鄭海崙)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이순익(李淳翼)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이헌직(李憲稙)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송세헌(宋世憲)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조동면(趙東冕)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한장석(韓章錫)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삼았다.

 

통어사(統禦使) 박제관(朴齊寬)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남(三南)은 바로 우리나라의 울타리인데 조령(鳥嶺)과 추풍령(秋風嶺)이 영남(嶺南)과 호남(湖南) 사이에 있는 군사상 가장 중요한 지점입니다. 대개 요해지가 있어도 방비가 없으면 그 요해지는 소용이 없고, 방비가 있어도 실속이 없으면 방비는 효과를 내지 못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요해지를 방비하는 데는 우선 조령과 추풍령보다 더 중요한 데가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조령은 지난 무자년(1888)에 성을 쌓고 장수를 두어 훌륭한 계책을 치밀히 세우지 않은 바가 아니지만, 그 진(鎭)의 형편을 보면 영락하여 갖추어진 것이 없고, 성안의 호구가 적어 경비하기 어려우니 앞으로 오랜 세월 유지하면서 꼭 근심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대저 문경(聞慶) 고을 소재지는 북으로 견고한 조령에 의지하고 남으로는 석현(石峴)의 좁은 목에 웅거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죽령(竹嶺)과 소백(小白)의 큰 산이 줄지어 있고 서쪽으로는 괴산(槐山), 연풍(延豐)의 요해지를 끼고 있습니다. 석현의 고무성(姑無城)과 어룡(魚龍)의 고부성(姑夫城)이 대치하여 양쪽에서 적을 제압할 수 있으며 토잔(兔棧)과 대탄(大灘)이 그 사이를 빙 둘러 나왔는데 천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고 만 명의 적도 쳐들어올 수 없어 농사도 짓고 싸움도 할 수 있는, 참으로 천연적으로 마련된 요새이며 하늘이 내린 곳입니다.
일찍이 임신년(1752)에 해현(該縣)에 처음 성을 지키는 독진(獨鎭)을 만들었으나, 명색만 있고 실속이 없어 무릇 방비하였다는 것은 단지 초창기뿐이었고 미처 더 정비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좁고 작은 진(鎭)이나 현(縣)에 더없이 중요한 요충지의 일을 맡기는 것은 실로 방비를 공고히 하는 좋은 방책이 아니므로 마땅히 다시 현을 승격시켜 부(府)로 만들고 다른 옛 땅을 도로 찾아서 소속시키며, 열읍(列邑)의 첨정(簽丁)을 관할하여 석현의 옛 성을 수축(修築)하여 토잔과 대탄을 가로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북쪽에 변고가 있으면 조령을 지키고 영남으로 통하며 남쪽에 변고가 있으면 토성(兔城)을 지키고 영북(嶺北)으로 통하여 안팎에서 지원하여 오로지 진에 주력하게 한다면 적을 제압하는 요해지가 될 것입니다.
더구나 충주(忠州)의 달천(㺚川)은 조령에서 50리(里) 떨어져 있고, 상주(尙州)의 삼탄(三灘)은 토잔에서 40리가 되니 영북의 곡식은 금탄(琴灘)을 거슬러 올라와 달천에 댈 수 있고, 영남의 미(米)는 낙동(洛東)을 거슬러 올라와 삼탄에 다다를 수 있으니, 급한 일이 있으면 배로 운반하는 것은 실로 성고성(成皐城)에 웅거하여 적을 막고 오창(敖倉)에 의거하여 군량을 해결했던 옛 전법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장령(掌令)인 신하 강무선(姜茂先)과 유생(儒生)인 신하 민우룡(閔雨龍)이 상소를 올린 것006)  은 모두 나라 일을 걱정하고 먼 장래를 생각하는 데서 나온 것으로 모두 임금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추풍령은 그 산맥이 조도치(鳥道峙)로부터 뻗어 내려와 상주를 거쳐 남동쪽으로 황간계선(黃澗界線)에 이르러 끊어져 평평한 육지로 되어 땅으로 말하면 요해지로 되었고 지형으로 말하면 평탄한 곳으로 되어 있으니, 두 갈래의 길이 교차되는 지점에 있어 사방이 막힌 험난한 곳이 없습니다.
곤수(閫帥)가 봄 가을로 순시하는 것이 비록 전해오는 관례이기는 하지만 어설픈 허점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지난 임진왜란 때에 조방장(助防將) 장지현(張智賢)의 군사가 패전하고 자신도 죽었는데 만일 평소에 미리 방비했더라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열공(文烈公) 신 조헌(趙憲)이 반드시 왜적의 우환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북령(北嶺)에 장수를 선발하여 지키게 하도록 청했으니, 그의 주밀한 계책과 정확한 견해는 지난날의 전철(前轍)을 교훈으로 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물굽이와 산길을 직접 통행하고 말을 타고 다니며 마음대로 강탈하고 집을 모조리 불태우니 영남과 호남의 백성들은 두려워서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제 양 영(嶺)에 진을 설치하여 엄하게 지키는 것이 첫째는 먼 장래를 위한 계책이고, 그 다음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나라의 힘을 공고히 하고 인심을 묶어 모을 방도라고 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재량(裁量)하여 처분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내무부(內務府)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8일 정유

민영달(閔泳達)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정해륜(鄭海崙)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심이택(沈履澤)을 시강원 좌부빈객(侍講院左副賓客)으로, 민영환(閔泳煥)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서공순(徐公淳)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3월 30일 기해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금백(錦伯)이 보고한 것을 보니, 철원 전 부사(鐵原前府使)가 과천(果川)에서부터 함부로 역마(驛馬)를 잡아타고 성환역(成歡驛)에 이르러 제멋대로 악형(惡刑)을 가하면서 마세(馬貰)를 토색질하고, 마침내 역민(驛民)들의 큰 싸움을 일으켜 결국 사람이 죽게까지 했습니다. 밀부(密符)도 마패(馬牌)도 갖지 않고 사사로이 다니면서 역마를 타는 것이 벌써 나라의 법을 위반한 것인데, 더구나 사인교(四人轎)를 품계(品階)에 맞지 않게 함부로 탄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칙(申飭)한 글이 마르기도 전에 예사롭게 죄를 범하고 차마 참혹한 짓을 했으니, 그 행동거지가 해괴망측합니다. 이름을 조직(朝籍)에 두고 어찌 감히 이럴 수 있겠습니까? 이미 도신(道臣)이 보고한 만큼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철원 전 부사 이희진(李喜晉)을 해부(該府)에서 나문(拿問)하여 엄히 감처(勘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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