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9권, 고종29년 1892년 10월

싸라리리 2025. 1. 23.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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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을묘

전교하기를,
"요즘 도적이 생기는 우환이 경외(京外)가 다 같은데 기찰해야 할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자목관(字牧官)은 체포하지 못하여 민심이 소란하고 길이 막히게까지 되었다. 전후하여 내린 신칙을 빈 문서장과 같이 여기니 어디에 국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의정부(議政府)에서 좌우 포장(左右捕將)을 불러다가 특별히 엄칙(嚴飭)하여 기한을 정하여 죽이거나 체포하게 하며 또한 말을 만들어 각도(各道)에 관문(關文)으로 신칙하라.
수도와 읍(邑)이나 진(鎭)을 막론하고 만일 또 소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있다면, 해당 포장(捕將)과 도신(道臣), 병사(兵使), 수사(水使), 수령(守令), 진장(鎭將)과 영장(營將)들이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연코 찬배(竄配)하는 법을 적용하고 절대로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역시 의정부(議政府)에서 엄한 말로 신칙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전 황해 감사(前黃海監司) 이경직(李耕稙)의 보고를 보니, ‘도내(道內)의 오차(吾叉)에 단독 진(鎭)을 설치한 연후에 장연부(長淵府)의 해안(海安), 대곡(大曲), 신화(薪花)의 3방(坊)을 해진(該鎭)에 이속(移屬)하였습니다. 그 중 2방은 추후에 감영(監營)에서 실정을 들어 보고하여 단지 해안방(海安坊) 하나만 넘겨주었는데, 해진에서 2방 기어이 환속(還屬)시키려고 하니 만일 다시 분할한다면 장차 피폐한 마을로 될 것이고, 또 오차진은 이왕 단독 진이 된 이상 규모와 인원을 좀 늘리지 않을 수 없으므로 피차간에 모두 불편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읍과 진에서 이 문제 때문에 서로 갈등이 생긴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지난번에 본도(本道)에 가부(可否)를 알아보니 지금에 와서 조정하는 것보다는 종전대로 그냥 두는 것이 나으므로 오차진(吾叉鎭)과 해안방을 도로 해부에 귀속시켜 이전과 같이 관장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서공순(徐公淳)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10월 2일 병진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가운데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최한응(崔漢膺)과 서병호(徐丙祜)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10월 3일 정사

김규홍(金奎弘)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10월 4일 무오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면상(李冕相)을 주진 독리(駐津督理)로, 서상교(徐相喬)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10월 5일 기미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 조병세(趙秉世), 우의정(右議政) 정범조(鄭範朝)이다.】  ‘종묘(宗廟)에 친히 제사를 지내겠다고 한 명을 중지하소서.’라고 하니, 하는 수 없이 따르겠다는 비답을 내렸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종묘에 지내는 동향대제(冬享大祭)에 대신을 보내어 섭행하도록 하되 일체 친제(親祭)하는 예로 마련하라."
하였다.

 

10월 6일 경신

우의정(右議政) 정범조(鄭範朝)가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을 사직하니,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정범조(鄭範朝)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김교헌(金敎獻)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10월 7일 신유

안무사(按撫使) 민종묵(閔種默)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친군 경리청(親軍經理廳) 병정(兵丁) 연조(演操) 때의 정령관(正領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민영달(閔泳達)과 이완용(李完用)을 육영공원 판리사무(育英公院辦理事務)로 삼았다.

 

10월 9일 계해

근정전(勤政殿)에서 추도기(秋到記)를 설행하였다. 강(講)에서는 유학(幼學) 윤두한(尹斗漢), 시(詩)에는 진사(進士) 김병억(金炳億)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과제(科題)를 이미 진시(辰時)에 내려 보냈는데 시관(試官)들이 여러 차례 사고를 핑계 댄 결과 날이 저물어서야 시험을 시작하였으니 어찌 그와 같이 거리낌없는 버릇이 있을 수 있는가? 해당 시관 【박용원(朴用元)과 정만조(鄭萬朝)이다.】 에게 다같이 견파(譴罷)의 형전을 시행하라. 해방(該房)의 승지(承旨)  【한광수(韓光洙)】 로 말하더라도 잘 살피지 못한 책임이 없지 않으니 월봉(越俸) 3등의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민영규(閔泳奎)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았다.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 민종묵(閔種默)을 상소로 체직(遞職)시키고 이건하(李乾夏)로 대신하였다.

 

10월 10일 갑자

김수현(金壽鉉)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근수(李根秀)를 참판(參判)으로 삼았다.

 

10월 11일 을축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가운데 경과 별시(慶科別試)를 행하였다. 문과에서 심상필(沈相弼) 등 20명을 뽑고 무과에서 조관현(趙觀顯) 등 564명을 뽑았다.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이규재(李圭宰), 송종규(宋鍾奎), 민관식(閔瓘植), 이범익(李範翊), 김귀수(金龜洙)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관리들이니 모두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10월 12일 병인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가운데 구일제(九日製)를 행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이기호(李琦浩)를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10월 13일 정묘

천추전(千秋殿) 북쪽 행각(行閣)에 화재가 났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좌부승지(左副承旨) 노영경(盧泳敬)이다.】 "어젯밤 천추전(千秋殿) 근처에서 군사가 파수하는 사이에 화재가 일어나서 용부문(用敷門) 행각까지 번졌는데 다행히 이내 불은 껐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대궐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이런 화재가 일어난 것은 심히 놀랍고도 두려운 일입니다. 화재의 원인을 철저히 사핵(査覈)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수하던 군사를 병조(兵曹)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하게 하고 평상시 잘 신칙하지 못한 해당 당직 장령(將領)는 엄중히 처벌하여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원인은 해영(該營)에서 사핵하게 하고 장령 나문(拿問)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원본】 33책 29권 65장 A면【국편영인본】 2책 438면
【분류】군사-금화(禁火) / 왕실-종사(宗社) / 사법-재판(裁判)
"어젯밤 천추전(千秋殿) 근처에서 군사가 파수하는 사이에 화재가 일어나서 용부문(用敷門) 행각까지 번졌는데 다행히 이내 불은 껐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대궐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이런 화재가 일어난 것은 심히 놀랍고도 두려운 일입니다.
화재의 원인을 철저히 사핵(査覈)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수하던 군사를 병조(兵曹)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하게 하고 평상시 잘 신칙하지 못한 해당 당직 장령(將領)는 엄중히 처벌하여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원인은 해영(該營)에서 사핵하게 하고 장령 나문(拿問)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10월 16일 경오

전교하기를,
"세자(世子)가 시전(市廛)이 영락하여 가는 것을 염려하여 한 달 전에는 은전을 베푼 일까지 있었다. 이것은 백성을 돌보아 주려는 나의 지극한 뜻을 받든 것이므로 매우 가상하다. 경사를 만나 혜택을 널리 베푸는 뜻으로 보아 규례를 벗어나더라도 폐단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각 시전의 폐단을 알아보아 춘방(春坊)으로 하여금 일일이 봉입(捧入)하도록 하라."
하였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하교(下敎)하신 대로 각 시전의 폐단을 물어서 일일이 봉입(捧入)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0월 17일 신미

강녕전(康寧殿)에서 재차 회작연(會酌宴)을 행하였다. 【의식은 위와 같다.】


【원본】 33책 29권 65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3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풍속-연회(宴會)

 

윤용구(尹用求)를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이승순(李承純)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정기회(鄭基會)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한인호(韓麟鎬)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친군장위영(親軍壯衛營)에서, ‘승정원(承政院)에서 올린 계사(啓辭)에 대한 비답(批答)대로 천추전(千秋殿) 근처에서 수비하는 사이에 화재가 일어난 원인을 철저히 사핵한 결과 군사 김원식(金元植)과 이순만(李順萬)이 공술(供述)하기를, 「둘이 함께 파수하다가 파수등(把守燈)이 깨져서 바람에 불이 꺼지려고 했기 때문에 군막 가에 옮겨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기름통이 여러 해 묵은 것이어서 구멍이 나 있어서 거기로 불이 번져 들어가자 즉시 등이 깨지면서 불이 닿았습니다.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중에서도 비록 있는 힘을 다하여 끌려고 하였지만 짚 위에 기름이 흐른 탓에 불은 점점 크게 번져나가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명은 위급한 사정을 보고하기 위하여 직소(直所)로 달려가고 한 명은 근처에서 파수하던 몇몇 군사들과 힘을 합하여 끌려고 애썼지만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황송하여 지만(遲晩)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대궐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이런 전례 없는 일이 생긴 것은 매우 놀랍고 두려운 일입니다. 모두 신의 군영(軍營)에 구류하고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아뢰었다.

 

10월 18일 임신

근정전(勤政殿)에서 감제(柑製)를 설행하여 시(詩)에서는 진사(進士) 송병옥(宋秉玉)과 유학(幼學) 서정직(徐廷稷)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직부(直赴)하도록 한 송병옥(宋秉玉)은 계방(桂坊)의 관리이니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민영달(閔泳達)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10월 20일 갑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호남 균전관(湖南均田官) 김창석(金昌錫)은 지금 이미 품계를 올려 주었으니 균전사(均田使)로 하비(下批)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1일 을해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가운데서 별시 문무과(別試文武科)의 방방(放榜)을 행하였다.

 

특별히 제수하여 새로 급제한 김병억(金炳億)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민관식(閔瓘植), 박승억(朴勝億)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이규재(李圭宰), 송병옥(宋秉玉)을 부교리(副校理)로, 이범익(李範翊), 윤교영(尹喬榮)을 수찬(修撰)으로, 김귀수(金龜洙), 송종규(宋鍾奎)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모두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10월 22일 병자

특별히 제수하여 새로 급제한 심상필(沈相弼)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다.

 

10월 23일 정축

정범조(鄭範朝)를 제배(除拜)하여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이용익(李容益)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특별히 제수하여 새로 급제한 서상린(徐相隣)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민상현(閔象鉉), 서병호(徐丙祜)를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정승조(鄭升朝), 이인규(李寅奎)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모두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10월 24일 무인

우의정(右議政) 정범조(鄭範朝)에게 하유하기를,
"지난번에 사임을 윤허한 것은 비록 경이 애써 간청하는 것을 거듭 거절하기 어려워서 한 일이지만 나는 경을 그리며 하루도 경을 생각하지 않는 적이 없었으니 경도 역시 어찌 편안하게 있으면서 민사(民事)와 국계(國計)에 대하여 잊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 다시 임명하는 뜻은 쓸데없이 하는 것이 아니니 경은 반드시 간곡하게 권면하지 않아도 마땅히 헤아리는 점이 있을 것이다. 경이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즉시 일어나 명에 응함으로써 옆에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는 나의 생각에 부합되게 하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10월 25일 기묘

전교하기를,
"정무사(靖武祠)는 오제독(吳提督)  【오장경(吳長慶)】 을 위하여 세운 사당인데 옛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감회가 깊어진다. 나는 언제나 오통령(吳統領)이 처음 우리나라에 와서 수고한 것을 간절히 생각하며 오래도록 잊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추보(追報)하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예조(禮曹)로 하여금 택일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제반 절차도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규례를 따라 거행하게 하라.
그날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되 제문(祭文)은 예문관(藝文館)에게 짓게 하며 관군(官軍)으로서 함께 제사지낼 만한 사람에 대해서도 일체 품지(稟旨)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오차진(吾叉鎭)을 도로 장연부(長淵府)에 소속시키고 종전과 같이 관장하도록 이미 의정부(議政府)의 초기(草記)에 대해 윤허하셨습니다. 해진(該鎭)이 이미 장연부에 소속되었으므로 상선(商船)을 단속하는 데 지장이 있을 것 같으니 해당 첨사(僉使)가 맡아보던 사검관(査檢官)의 임무를 그대로 해당 부사(府使)가 겸관(兼管)하여 살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6일 경진

우의정(右議政) 정범조(鄭範朝)가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을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우의정(右議政) 정범조(鄭範朝)에게 재차 하유(下諭)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정무사(靖武祠)에 종향(從享)할 길일을 12월 11일로 추택(推擇)하였습니다. 향사(享祀)의 시일(時日)은 매년 3월과 9월 중정일(中丁日)에 있는 정무사의 향사일(享祀日)에 함께 설행하소서. 축문(祝文)은 예문관(藝文館)에게 찬출(撰出)하게 하고 제물(祭物)과 제의(祭儀)의 절차(節次)는 모두 정동관 군사(征東官軍祠)의 규례대로 거행하고, 헌관(獻官)과 집사(執事)는 이조(吏曹)에서 차정(差定)하게 하고 제물과 제기의 조성 및 상탁(床卓)의 포진(鋪陳) 등의 일은 호조(戶曹)와 각 해사(該司)에서 마련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함께 제사지낼 만한 사람 9인(人)을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인 뒤에 계하(啓下)를 기다려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8일 임오

이준용(李埈鎔)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조경하(趙敬夏)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0월 29일 계미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근래에 도적들이 일으키는 소요가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대낮에 큰길의 여기저기에 떼를 지어 다니며 가게들을 모두 털고 길가는 사람의 물건을 약탈하며 나라에 바치는 공물(公物)을 빼앗고 수령(守令)이 다니는 길을 탐지하여 물건을 약탈하므로 길이 막혀 소문이 몹시 소란합니다.
심지어 도성문 안이나 수도에서까지 남의 옷이나 갓을 빼앗는 변고가 왕왕 있는데 도하(都下)가 이러하니 지방에 대해서도 짐작할 만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지난날에 없던 일로 이웃 나라에 전해져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난 날 매우 엄하게 명령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끝내 체포한 성과가 없었으니 해당 관리들이 만일 성실한 마음으로 대양(對揚)하였다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법망이 분명히 있으니 갈수록 놀랍고 한탄할 일입니다. 좌우 포장(左右捕將)에게 견파(譴罷)의 형전을 시행하고 철저히 규찰하며 기일을 정하고 도적들을 쓸어내도록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방의 경우에는 감사(監司)나 수령들이 전혀 이들을 막거나 다스리지 않아 점점 불어나게 내버려 두었으니 이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맡은 직무를 받들어 시행하려는 의리이겠습니까? 경기(京畿)의 수령들은 오래 자리를 비우지 말고 도적을 막는 데 주의를 돌리도록 이미 지난 날 신칙한 만큼, 현재 서울에 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일로 임지로 돌아가서 여러 가지 계책을 세워 일일이 체포하게 하되, 만일 조정의 명령을 하찮게 여기며 등한시하여 다시 경외(京外)에서 도적이 생겼다는 경보가 있을 경우 해당 수령에 대해서는 우선 즉시 보고하고 파면시키며 해도(該道)의 수신(守臣)은 엄하게 논감(論勘)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러 번 신칙하였으나 경외에서 도적이 발생하는 일이 계속 멎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규율이 서지 않고 규찰을 엄하게 하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 포청(捕廳)이 있은들 어디에 쓰겠는가? 두 포장(捕將)에 대해서는 아뢴 대로 처리하라. 각 해당 수령(守令)들이 방책을 세우지 않아 이렇게 점점 도적이 성하게 된 것은 그들만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인가? 이와 같이 신칙한 다음 만일 또 전과 같이 도적이 없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나타나는 대로 찬배(竄配)하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해도의 수신도 중한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다시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어 하교하기를,
"경외에 도적이 늘어나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한데다가 또한 평민으로서 그에 물드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그전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이것은 모두 규율이 서지 않고 도적을 엄하게 막지 못한 결과이니 특별히 신칙하여 꼭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도적을 막는 조치로 말하면 만일 지금 없애지 않는다면 더욱더 불어나게 될 것이니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도적이란 벽을 뚫거나 담장을 넘어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요즘의 도적은 떼를 지어 다니거나 패거리를 이루어 무기까지 가지고 있으며 또한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흩어진다고 합니다.
중앙에서는 그 책임을 두 포청에 지우고 지방에서는 감영(監營)에서 공문을 신칙하여 각 해당 고을로 하여금 백성들과 힘을 합하여 경내에 수상한 사람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한 개 고을에서 이렇게 하고 다른 여러 고을에서도 같은 규례로 한다면 도적질하는 일이 없게 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수령을 적임자로 얻는 것과 수령 자리를 오래 비우지 않는 데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수령 자리를 오래 비워 두면 폐해가 없지 않을 것이다. 듣자하니 경기 안의 고을 중에 계책을 세우고 도적을 잡아서 고을 경내가 편안한 곳이 있다고 하니 틀림없이 이것은 관민(官民)이 힘을 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수령은 포상해야 할 것이니 꼭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다면 과연 포상하여야 할 것이니 응당 자세히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비단 수령뿐만 아니라 우선 포교(捕校)부터 격려하는 정사가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후하게 상을 주는 데는 반드시 용감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반드시 격려하는 정사가 있은 다음에야 도적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한(漢) 나라 광무(光武) 때에 도적이 크게 성하였는데 도적을 많이 잡았는가 적게 잡았는가 하는 것으로 업적을 평가하고 도적을 숨기는 사람은 죄를 주니 서로 다투어 체포하였으므로 도적들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런 규례는 지금도 본받아서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방금 전 안무사(前按撫使)가 보고한 등본(謄本)을 보니, 회령부(會寧府)에 또 민란이 일어나서 심지어 안팎 관청 건물을 부수는 변고까지 있었습니다. 회령부는 변경 통상(通商)의 중요한 곳인데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소란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놀랍고 통분하여 차라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해당 전 부사(前府使)는 조사한 다음에 논감(論勘)하겠지만 자세히 조사하는 일은 지체될 수 없으니 북청 부사(北靑府使) 엄주한(嚴柱漢)을 안핵사(按覈使)에 차하(差下)하여 즉시 가서 엄하게 조사하여 등문(登聞)하게 하소서. 지금 이 계본의 내용이 자세하지 못하니 소홀히 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전 안무사 남정순(南廷順)에게 월봉(越俸)의 형전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비궁(閟宮)의 동향 대제(冬享大祭)에 대신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게 하되 친제(親祭)의 규례대로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정희(申正熙)를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이봉의(李鳳儀)를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10월 30일 갑신

민영달(閔泳達)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조종필(趙鍾弼)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승순(李承純)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이재순(李載純)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삼았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근수(宋近洙)가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평양(平壤) 등 고을의 물에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집들과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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