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갑인
신단(申檀)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호면(李鎬冕)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수원 유수(水原留守) 민영상(閔泳商)의 보고를 보니, ‘황해도(黃海道)의 대청도(大靑島)와 소청도(小靑島) 두 섬은 정묘조(正廟祖) 때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해 잡역을 면제시켜 주고 본영(本營)에 이속시킨 다음, 기패관(旗牌官)과 별무사(別武士)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둔전을 감독하며 섬의 백성들을 통솔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호(家戶)가 100여 호에 불과하고 물고기를 잡고 해초를 채집하는 것으로 겨우 생계를 꾸리는데, 모리배(牟利輩)들이 백령진(白翎鎭)에 사주하여 관례(官隷)들과 한통속이 되어 제멋대로 침탈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본 영에서는 여러 차례 금지하고 신칙하였으나 갈수록 더욱 심하여 마침내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폐단을 막고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할 방도는 다만 이적(移籍)하는 한 가지 일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두 섬은 서쪽의 먼 바다 가운데 있는데, 토양이 소금기가 많고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하니 이미 불쌍히 여겨야 할 일이고, 대개 둔전을 설치하고 백성을 모집한 것도 조정의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하여 그 진(鎭)의 관속들이 침탈하여 끝없이 횡포를 부린단 말입니까?
저 불쌍하고 하소할 곳이 없는 잔약한 백성들이 소장을 안고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길가에서 헤매고 있으니 참으로 매우 불쌍합니다. 이에 마땅히 속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니 이제부터 두 섬의 장적(帳籍)을 모두 수원 유수영(水原留守營)에 이속시켜서 백성들을 위무하여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 2일 을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복상(卜相)하라고 명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복상(卜相)을 행하였다. 〖천망(薦望)을 받은 사람은〗 봉조하(奉朝賀) 김병국(金炳國), 송근수(宋近洙),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신응조(申應朝),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심순택(沈舜澤), 김홍집(金弘集),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시(金炳始), 판중추부사 조병세(趙秉世)이다. 심순택(沈舜澤)을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조병세(趙秉世)를 좌의정(左議政)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에게 하유하기를,
"경이 의정(議政)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로 나는 마음이 편치 못하여 경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언제나 변함없이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경도 나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건대 백성과 나라의 어려움이 이처럼 심한 때는 없었으니, 내가 지금 다시 명하는 것은 공연히 그러는 것이 아니다. 경도 반드시 이해할 것이니, 격식을 갖추어 굳이 사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빨리 명령에 응하기를 도모하여 머뭇거리지 말고 나의 간절한 기대에 부응하라."
하니, 좌의정(左議政) 조병세(趙秉世)에게 하유하기를,
"경이 중추부(中樞府)에서 한가하게 지낸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으니 한갓 나의 마음이 서운할 뿐 아니라 평소에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경으로서는 반드시 백성과 나라를 근심하리라는 것을 짐작하여 알 수 있다.
지금 다시 제수하는 것은 나의 고충에서 나온 것이지만 또한 조야(朝野)의 여망(輿望)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경은 돈독하게 권면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마땅히 헤아리는 바가 있을 것이니, 어찌 많은 말을 하겠는가? 모름지기 형식을 갖추어 지나치게 겸양하지 말고 즉시 조정에 나와서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는 나의 마음에 보답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일전에 학교(學校)에서 강학하는 일로 제유(提諭)한 적이 있는데, 만일 마음을 다하여 감독하고 통솔하지 않는다면 혹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가 끝에는 게을리 할 염려가 있을 수 있다.
또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도 한 사람에게만 전적으로 책임지우기 어려우니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와 대사성(大司成)이 같이 돌아가면서 날마다 가르치되, 혹 일을 벌였다가 중도에 그만둔다는 탄식이 없게 하도록 다시 묘당(廟堂)에서 특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이준호(李俊浩)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이용직(李容稙)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근수(李根秀)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
2월 3일 병진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사직 대제(社稷大祭) 문묘 석전제(文廟釋奠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은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생신이다. 도승지(都承旨)에게 문안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2월 4일 정사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경모궁(景慕宮) 춘향 대제(春享大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조병세(趙秉世)가 상소하여 정승(政丞)의 직임을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나는 경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알기에 경이 늘 나의 돌아보는 심정을 틀림없이 체득하여 명을 받자마자 곧 일어나 나와 번거롭게 형식을 꾸며 굳이 사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문득 사양하는 글이 온 것을 보고는 나 자신도 모르게 아연실색하였다.
돌아보건대 지금 백성과 나랏일의 형편이 날로 궁색하고 위급해 더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을 경이 잘 알고 있고 걱정하는 바이다. 이런 때에 오로지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경으로서야 더구나 어찌 임금을 도와 함께 바로잡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경이 소장에서, ‘심오하고 주밀한 계책을 내며 협력하여 돕는 사람은 반드시 신중히 골라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경의 말은 옳다. 오직 신중히 골라야 하기 때문에 내가 경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경은 너무 지나치게 사양하며 곧 나오려고 하지 않으니 그것은 고락을 같이 하는 의리로 보아 어긋나지 않겠는가?
경은 다시는 더 말하지 말고 곧 명에 응하여 정승(政丞) 자리에 엄숙히 나와 다같이 공경하고 협력하여 서로 도와 나라를 떠받들며 힘을 다하며 조정을 편안하게 만들 생각을 하라. 이것이 내가 깊이 원하는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과 좌의정(左議政) 조병세(趙秉世)에게 재차 칙유(勅諭)하였다.
2월 6일 기미
한성근(韓聖根)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2월 7일 경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신이 오늘 외람되이 전석(前席)에 나온 것이 어찌 병을 이겨낼 수 있거나 직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겨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동궁 저하의 생신을 만났는데 다른 해와는 달라 경하하여 기뻐함이 끝이 없으니, 신이 비록 병들어 쓰러져 있지만 어찌 감히 견마(犬馬)의 정성을 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염치를 무릅쓰고 나온 것입니다. 신은 지금 나이가 많고 병이 고질이 되었습니다. 삼가 빨리 물리쳐 주십시오."
하니, 전교하기를,
"이번에 다같이 경사스러운 때를 맞이하니 나의 마음이 기쁘다. 그런데 나라에서 정승(政丞)을 둠에 있어서 어찌 나이 많은 것을 가지고 나오거나 들어가게 한 적이 있었는가? 다시는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를 보좌하고 백성을 구제하기를 도모하도록 하라."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지금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 31년이 되었습니다. 천도(天道)의 건장함을 법 받아 실행하면서 안일함이 없었습니다. 옛날 주공(周公)께서 임금으로 하여금 공경하고 두려워하게 하고자 하여 편안히 놀고 즐거움을 탐하는 것에 대해 정성스럽게 간하였고, 소공(召公)은 임금으로 하여금 나라를 영구히 보존하도록 하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덕을 공경하고 민심을 따를 것을 간절히 말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밤낮으로 정사에 임하시어 편안할 겨를이 없지만, 주공과 소공이 자기 임금들에게 올린 말씀에 더욱더 유념하소서.
무릇 크고 작은 조처에 있어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것을 정사로 삼고 민심을 따르는 것을 명령으로 삼는다면 하늘이 도와서 온갖 복록이 다 모이며 억만 년 무궁한 아름다움이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니, 오직 밝으신 성상께서는 힘쓰기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이 말에 넘치니 진실로 감탄하게 된다. 삼가 마음속에 새겨 잊지 않겠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오늘의 빈대(賓對)는 금년 초두의 성대한 일입니다. 아랫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와 성상께서 애쓰시는 바가 모두 다른 때보다 갑절이나 더합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어진 마음과 어진 정사로 백성을 위하여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법과 기강이 해이해지고 명령이 시행되지 않음이 근래보다 더 심한 적이 없으니 백성들이 어찌 근심과 탄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들이 한가롭게 놀고 스스로 편안하게 있을 때가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하들에게 자문하시어 방책을 강구하여 충분히 위로하고 봄볕처럼 은택을 베풀어 만물이 다 잘 자라게 하십시오. 그런 뒤에야 온 나라에 화기가 넘치고 복록이 스스로 이를 것이니 이에 감히 우러러 권면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나는 스스로 힘써야 하겠지만 경도 일에 따라 나를 도우라.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생각건대 우리 동궁 저하는 보령(寶齡)이 꼭 20세에 찼으니 나라의 복록이 억만 년을 길이 이어갈 것입니다. 동궁의 생신이 임박한 까닭에 성상께서 기뻐하시고 높고 낮은 모든 백성들이 춤을 추며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은 이러한 때에 더욱 우러러 권면할 것이 있습니다.
기자(箕子)의 홍범 구주(弘範九疇)에 오복(五福) 가운데서 덕을 좋아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덕을 좋아하는 요체는 학문을 좋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지금 예학(睿學)이 점점 고명해지고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올바른 도리로 솔선수범하고 근면함으로 몸소 가르치며, 반드시 도덕이 높고 박학한 선비를 선발하여 견문을 돕게 하고 논사(論思)의 바탕이 되게 한다면 태만한 마음과 외물(外物)에 흔들리는 일이 들어올 데가 없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에 힘입어 공고해지고 백성의 풍속이 이에 따라서 밝아져서 실로 나라의 무궁한 기업이 될 것이니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동궁의 생일을 하루 앞두고 있으니, 나의 마음이 기쁘다. 동궁의 덕을 진취시키기 위한 경의 말이 이처럼 간절하고 지극하니 마땅히 힘쓰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시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법이다. 더구나 지금 사설(邪說)이 횡행하니, 더욱 마땅히 유학을 천명해야 한다. 성균관(成均館)으로부터 주현(州縣)의 있는 향숙(鄕塾)에 이르기까지 잘 이끌어 주고 가르쳐서 그 중에 우수한 자들을 선발하여 등문(登聞)하면 내가 거두어서 등용할 것이니, 옛날의 향공법(鄕貢法)을 본받는 것도 좋을 것이다. 모든 규례와 제도를 묘당(廟堂)에서는 성균관 당상(成均館堂上)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특별히 절목을 만들어 계달하여 그대로 따라서 행하되, 반드시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성균관의 월과(月課)하는 규례는 예부터 있어온 것인데, 몇 해 전에도 잠시 시행하다가 곧바로 그만두었습니다. 대략 향공법을 본받아서 몸을 삼가고 독서하는 선비를 가려 읍(邑)에서는 영(營)에 보고하고 영에서는 성균관에 보고하게 하여 재(齋)에 거하다가 응시하게 하여 차차 거두어 등용한다면, 성균관은 실로 어진 선비의 관문이 되고 인재들 또한 국가에서 거두어 쓸 것이니, 어찌 성대하지 않겠습니까? 성균관 당상과 함께 절목을 의논하여 계하(啓下) 받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월과는 훌륭한 규례이지만, 모든 일은 반드시 처음이 있고 끝이 있은 뒤에야 그 실효를 거둘 수 있습니다. 옛 규례에 성균관에서 천거한 선비는 도목 정사 때마다 맨 먼저 차제(差除)하였으니, 조정에서 선비를 우대하는 도리가 이와 같았습니다."
하니, 정범조가 아뢰기를,
"학교를 일으키고 선비의 추향을 바로잡는다면 그 공효가 어찌 이단을 물리치는 일뿐이겠습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대경대법(大經大法)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유학을 숭상하고 풍화(風化)를 돈독히 하는 것은 거창하게 말하면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태평성대에 견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월과를 만약 옛 규례를 거듭 밝혀 시행한다면 영재를 교육하고 인재를 진작시키게 될 것이니 국가가 인재를 얻는 성대함이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선비들의 기개가 고무되지 않음이 없고 뭇사람이 모두 칭송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근래에 재에서 거하는 유생들 가운데에 서울의 자제는 한 사람도 없다고 하니, 매우 한탄스럽다. 초사(初仕)를 성균관에서 천거한 선비에게 시킨다면 일반적인 조용(調用)보다 훨씬 낫고, 반드시 그 명분에 걸맞게 실제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정범조가 아뢰기를,
"절제(節製)는 옛날 법에 출석 일수 300점이 찬 뒤에야 비로소 응시를 허락하였습니다. 출석 점수가 차지 못한 사람은 애당초 응시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방외(方外)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감제(柑製)의 경우에만 방외를 통틀어 허락한 것은 과일을 바쳐 경사를 축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사시(進士試)는 3년에 한 번 설행했던 것입니다. 성균관에 올라간 뒤에 비로소 초사(初仕)에 의망하고 출석 점수가 찬 뒤에야 비로소 절제(節製)에 응시하도록 허락한다면, 벼슬시키는 규례가 조리가 있게 되어 혼란스럽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시권(試券)을 한 번 제출하여 요행으로 과거에 입격하는 것은 진실로 선비를 취하는 의리가 아니다. 이후로는 원점(圓點)을 계산하여 과거를 실시하고자 한다."
하니,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번 연석에서 한 말을 절목 가운데 넣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영조조(英祖祖) 때에는 간혹 의식을 간략히 하여 문묘(文廟)에 나아가 알성(謁聖)하였으므로 성균관에서도 미처 알지 못하였다고 하며, 정종조(正宗朝)에는 어느날 성균관 유생들을 춘당대(春塘臺)에 와서 기다리게 하고는 출제하여 임금이 직접 살펴보고 우수한 자를 취하여 직책을 주었으니, 이는 모두 성대한 일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몹시 개탄할 만한 것은 옛날에는 여항(閭巷)사이에 글 읽는 소리가 많이 들렸는데 요즘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니, 정범조가 아뢰기를,
"사기(士氣)를 배양하고 문교(文敎)를 널리 편 것은 정종조 때보다 더한 적이 없었고, 우리 순조조(純祖朝) 때에 이르러서는 팔태사(八太史)가 있어서 문장이 성대하였다고 일컬어졌습니다. 이제라도 크게 변혁하고자 하신다면 실로 전하께서 어떻게 인도하고 솔선하는가에 달려 있고, 또한 결심만 하면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이니, 이것을 항상 유념하소서."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박정양(朴定陽)이 아뢰기를,
"본조에서 관할하는 황해도(黃海道) 각읍(各邑)의 세미(稅米), 세태(稅太), 세전미(稅田米)는 원작전(元作錢)과 별작전(別作錢)의 규례가 있으니, 당시의 곡식 값에 준하여 정식(定式)을 만들어서 세금을 받는 것입니다.
지난 정묘년(1867)에 의정부(議政府)의 초기(草記)로 인하여 평산(平山)의 쌀, 콩, 좁쌀과 장산(長山) 이북의 황주(黃州) 등 11개 읍의 콩에 대해서는 시가를 비교하여 세금을 증액하도록 정식을 고쳤는데, 나머지 각 읍의 각 곡식은 오늘날까지 옛 규례를 그대로 지키고 있어, 현재 시가와 몇 배 서로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세액의 많고 적은 것이 고르지 못하고 이쪽과 저쪽이 차이가 있으니 공평하게 정사를 베풀어야 하는 의리로 볼 때 실로 매우 불합리합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각 읍의 세미, 세태, 세전미에 상응하는 원작전과 별작전을 임진년(1892)부터 시작하여 모두 참작하여 정식을 고친다면 백성들이 납부함에 있어서는 서로 차이가 나지 않게 될 것이고, 나라에서 세금을 거둠에 있어서는 공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정(稅政)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감히 편의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대신들에게 하순(下詢)하여 처리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여러 대신들의 의견이 일치하자,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영달(閔泳達)이 아뢰기를,
"능원(陵園), 묘소(墓所)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인데 근래에 날이 갈수록 더욱 몹시 허술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복호 결가(復戶結價)의 높고 낮음이 같지 않은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에 바로잡고자 한다면 오직 결가의 높고 낮음을 참작하여 다소 변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신중히 처리해야 할 일이니 감히 제멋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외읍(外邑)에 흩어져 있는 향탄 위토(香炭位土)에 이르러서는 세월이 오래되면서 폐단이 많이 생겨 양안(量案)은 그저 빈장부일 뿐이고 세납(稅納)은 실제 숫자를 알 수 없으니, 본조(本曹)에서 철저히 조사하고 옛 정식을 밝혀 준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요즘 능원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 점점 예전만 못하여 항상 걱정하고 있었다. 아뢴 대로 하라. 복호결(復戶結)은 묘당(廟堂)과 의논하여 좋은 쪽으로 변통하고 영구히 준행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각릉(各陵)을 개수하는 일은 이제부터 경기 감영(京畿監營)에서 각 지방관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편리하고 좋을 듯 합니다. 호조에서 거행하는 것이 비록 법전(法典)이기는 하지만, 수시로 고칠 수가 없기 때문에 매번 역사(役事)가 방대하게 되고 또 비용이 너무 많이 듭니다. 이 또한 변통하자는 논의가 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수원(水原)의 능원은 본영(本營)에서 개수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가장 완전하니, 이것은 모두 정묘조(正廟朝)의 효성의 소치이다. 전주(全州)에 있는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묘(肇慶廟)도 다 감영(監營)에서 역사를 감독하는가?"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수원의 예대로 하는 것이 매우 좋을 것이니 역시 예조 판서와 서로 의논하여 잘 처리하라."
하였다.
내무부(內務府)에서, ‘해연 총제영(海沿總制營)의 제치 절목(制置節目)을 써서 들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해연 총제영을 막 신설하였으니 이전 해방영(海防營)에서 관할하던 통진(通津), 풍덕(豐德), 영종(永宗) 장봉(長峯)에 있는 둔전답(屯田畓)을 모두 해영(該營)에 이속시켜 군수(軍需)에 보충하여 쓰도록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신정희(申正熙)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정항조(鄭恒朝)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2월 8일 신유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에게 사찬(賜饌)하였다. 왕세자(王世子)의 탄신일(誕辰日)이었기 때문이다.
각국 공사(各國公使)를 소견(召見)하고 사찬(賜饌)하였다.
당(堂)에 앉아서 하례(賀禮)를 받을 때와 선온(宣醞)하고 사찬(賜饌)할 때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이하와 각 차비(差備)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예모관(禮貌官) 윤창섭(尹昌燮), 상례(相禮) 김덕수(金德洙), 선전관(宣箋官) 윤종영(尹鍾永)을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전교하기를,
"매번 이 날을 맞을 때마다 그 기쁨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마는 더구나 금년은 다른 해와는 더욱 다르니 어떠하겠는가? 신하와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짐작할 만하다. 지금 기쁨을 기념한 뒤에 마땅히 경사를 널리 미치게 하는 조치가 있어야 하니, 조관(朝官)으로서 나이 80세 된 사람들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 올려주고, 나이가 20세 된 사람들에게는 각각 내하 표리(內下表裏) 1차(次)를 제급(題給)하며, 사서인(士庶人)으로서 나이가 80세 된 사람들에게는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호적(戶籍)을 살펴 옷감을 해조(該曹)에서 제급하게 하고, 나이 20세 된 사람들에게는 각기 명주 1필을 하사하라.
이에 내탕전(內帑錢) 30만 냥을 특별히 내리니, 공인(貢人)에게 10만 냥을, 시민(市民)에게 20만냥을 내무부(內務府)에서 적절히 헤아려 나누어 주고, 현방(懸房)의 요역(徭役)은 30일에 한해 탕감해 주어 널리 은혜를 베푸는 나의 뜻을 보이라."
하니, 또 전교하기를,
"조관인 노인에게 가자하는 것은 단지 일찍이 정직(正職)을 거친 사람에게만 시행하도록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통지하라."
하였다. 【조관으로서 나이 80세 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가자한 사람은 행 대호군(行大護軍) 박홍수(朴弘壽) 등 81인이었다.】
【원본】 34책 30권 7장 A면【국편영인본】 2책 448면
【분류】재정-역(役) / 왕실-사급(賜給) / 재정-공물(貢物) / 상업-상인(商人) / 인사-관리(管理)
관학유생(館學儒生)의 응제(應製)를 경무대(景武臺)에서 설행하였다. 표(表)에서는 유학(幼學) 이재극(李載克)과 이신(李信)을,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홍재두(洪在斗)와 동몽(童蒙) 김용현(金龍玹)을, 시(詩)에서는 유학(幼學) 차영한(車永翰)과 손달원(孫達遠)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일찍이 계방(桂坊)을 거쳐 등제(登第)한 자는 마땅히 즉시 춘방(春坊)이 되어야 하는데 한권(翰圈)과 각권(閣圈)에 참여하지 못하면 정사(政事)의 격식에 구애되어 통의(通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특별히 곧바로 전랑(殿廊)에게 통의한 뒤에 그대로 춘방에 의망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처분한다면 통의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수현(金壽鉉)을 앞으로 나오라 명하고 전교하기를,
"일찍이 계방을 거친 사람으로서 한권과 각권에 참여하지 못하면 춘방에 의망할 수 없다고 한다. 지금부터는 특별히 곧바로 전랑에게 통의한 뒤에 그대로 춘방에 의망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이번 연설(筵說)을 정안(政案)에 기재하여 정식으로 삼으라."
하였다.
2월 9일 임술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제술(製述)로써 강(講)을 대신하였는데,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변규창(邊奎昌)을 표(表)에서는 유학(幼學) 이명직(李明稙)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생원(生員), 진사(進士), 유학(幼學)으로서 올해 나이가 20세가 된 사람들에게 이달 12일에 응제(應製)에 친림(親臨)하여 시취(試取)하겠다."
하였다.
송헌경(宋憲卿)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이용구(李容九)를 좌랑 겸 시강원문학(佐郞兼侍講院文學)으로, 홍우상(洪祐相)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2월 10일 계해
전교하기를,
"오는 3월 10일에 수릉(綏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히 제사를 지낸 다음 이어 숭릉(崇陵)과 경릉(景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내겠다."
하니, 또 전교하기를,
"헌릉(獻陵)과 인릉(仁陵)에 나아가 전알하고 친히 제사를 지낼 것이다. 날짜는 오는 4월 10일 전으로 택하여 들이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4월 4일로 날을 받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양로 외연(養老外宴)의 길일을 오는 3월 10일로 택한 데 대해 계하(啓下)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행행(幸行)과 상치(相値)되니 다시 같은 달 22일로 택하였습니다. 외연은 20일로 정하여 행하고, 내연(內宴)은 22일로 정하여 행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이 날로 정하여 행하라."
하였다.
2월 12일 을축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갑술년(1874)에 태어난 사람들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시(詩)에는 입격한 유학(幼學) 이기재(李䕫在), 진사(進士) 정인오(鄭寅五), 유학(幼學) 전규풍(田圭豐)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경사를 널리 함께 누리는 때를 만나 마땅히 은택을 베푸는 은전이 있어야 하니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풀어주고 윤리와 기강에 관계되어 전적으로 풀어 줄 수 없는 자에 대해서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묘당(廟堂)에 나아가 논의하여 참작하여 등급을 감(減)하고, 옥에 갇혀 있는 죄수 중에 미처 기록하지 않은 자는 각 해도의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문안(文案)을 열람하여 소상히 기록한 다음 빨리 등문(登聞)하도록 분부하라. 그리고 해방 승지는 의금부(義禁府)와 전옥서(典獄署)에 달려가서 옥문을 열고 일체 풀어 준 후에 즉시 서계(書啓)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궐문(闕門)에 대해 신칙한 것이 전후로 어떠하였는가? 그런데 근래에 잡인들이 별 어려움 없이 출입한다 하니, 법과 기강에 있어 매우 놀랍다.
각문의 파수들에게 엄하게 조칙을 가하고, 이 후로 혹시라도 전과 같이 함부로 들어오는 폐단이 있다면 병조 당상(兵曹堂上)과 낭청 및 각 수문장은 엄한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2월 13일 병인
입격한 유생(儒生)들을 소견(召見)하고 하교하기를,
"이번 과거는 다른 과거와 다르니 직부(直赴)의 자격을 받은 이기재(李䕫在), 정인오(鄭寅五), 진사(進士) 강용주(姜龍珠), 임양국(林良國), 박찬호(朴瓚浩), 남홍우(南鴻祐)에게 특별히 사악(賜樂)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방금 소녕원(昭寧園) 겸 수길원(綏吉園) 담당 관원의 보고를 보니, ‘본원(本園)의 각 제향에 쓸 향축(香祝)을 받들고 나아가는 것은 으레 하루 노정(路程)으로 마련하는데, 서울과의 거리가 족히 70리는 되고 그 사이에는 큰 내와 높은 고개가 있어서 향축을 받들고 나아가 재(齋)에 이를 때면 매양 날이 저물어서 거행하기 어려우니, 원도(遠道) 능침(陵寢)의 규례대로 이틀 노정으로 계품(啓稟)하여 마련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보고한 바와 같다면 더없이 중요한 향축을 날이 저물 무렵에 받들고 나아가는 것은 매우 송구하니, 사전(祀典)을 중히 여기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변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본 원의 각 제향에 쓸 향축 및 6개월분을 받는 향을 모두 이틀 노정으로 마련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듯 합니다. 이것으로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상소하여 병세에 대하여 진달하고 체차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연석(筵席)에서 이미 면유(面諭)하여 남김없이 다 말하였으니 경은 반드시 알아들었을 것인데 지금 이 사양하는 소장이 또 무엇 때문에 이르렀는가? 나는 진실로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돌아보건대, 지금 정승(政丞)의 자리가 이미 갖추어져서 백성과 나라가 의지할 데가 있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군신과 상하가 정신을 모아 잘 다스려지길 부지런히 도모해야 할 때이다.
경의 병을 어찌 염려하지 않겠는가마는, 봄의 따뜻한 기운이 점점 화창해지니 마땅히 저절로 빠르게 회복될 것이다. 또한 근력을 써서 분주하게 일할 것을 경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 아니니 몸을 조양(調養)하는 데에도 그다지 해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어제 받고서 오늘 사양하는 것이 어찌 대관(大官)이 출처하는 의리이겠는가? 노성한 경이 너무나 깊이 헤아리지 못하였다.
경은 나의 뜻을 깊이 체득하여 속히 상소를 올리는 일을 그만두고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과 함께 마음을 합하여 세상의 어려움을 널리 구제하도록 하라. 이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에게 하유하기를,
"방금 상소에 대하여 내린 비답(批答)에서 속마음을 다 털어놓았으니 경은 반드시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또 어찌 이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할 것이 있겠는가마는, 그대에게 의지함이 지극하여 나 자신도 모르게 자꾸 반복하게 된다.
내가 경에게 중책을 맡긴 것은 마치 배와 수레에 바퀴와 노가 있는 것과 같다. 지금 나라의 위태로운 상황은 마치 수레가 가파른 언덕을 달려 내려가고 배가 성난 물결을 만난 것과 같으니, 힘을 다해 밀고 끌고 버틴다 해도 오히려 갑자기 전복될까 두렵다. 그런데 마침내 손을 놓고자 하니, 진실로 국가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대신으로서 차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백성과 나라의 일은 하나의 배와 노에 같다는 말로도 그 위태로움을 견줄 수가 없다. 더구나 경은 나이가 높고 덕이 높은 원로로서 국가의 안위를 가슴 속에 잊지 않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변함없는 충성과 사랑을 품고 있으니, 한결같이 사양하여 정사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있는 나를 딱하게 여기지 않고 험난한 곳을 회피하고 편안한 곳을 나아가며 강 건너 불 보듯 해서야 되겠는가?
이것은 내가 경을 잘 알고 있고 경이 반드시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특별히 하유하는 것이다. 경은 잘 알고 다시는 번거롭게 거론하지 말며 바로잡아 구제하는 책무에 더욱 힘써라."
하였다.
내무부(內務府)에서 아뢰기를,
"도성 내 오부(五部)의 방(坊)과 리(里)의 호적에 올라있는 가호(家戶)는 각기 집문서가 있는데 이것이 돌아다녀 매매하는 증빙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인심이 점점 야박해져 간사한 속임수를 부리는 일이 많이 일어나 혹은 문권(文券)을 위조하기도 하고 혹은 집안에서 훔쳐다가 저당을 잡히거나 헐값으로 팔아먹기도 하면서 꺼리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하여 본래 주인은 가만히 않아서 자기 집을 잃게 되니, 송사가 그치지 않고 애달픈 하소연이 날마다 들려옵니다. 어찌 이와 같이 놀랍고 한탄스런 풍조가 있단 말입니까?
이에 대해서 엄하게 과조(科條)를 세워 폐단을 막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지금 이후로는 경상(卿相)의 집 이하 각방(各坊)의 모든 가호(家戶)에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문권을 간행하여 일일이 나누어주게 한 다음 이 문권이 아니면 감히 매매할 수 없다는 뜻을 정식을 만들어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김성근(金聲根)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2월 14일 정묘
면천군(沔川郡)의 정배 죄인(定配罪人) 김윤식(金允植)을 방축향리(放逐鄕里)하라고 명하였다.
2월 15일 무진
전교하기를,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은 우리 열성조께서 서로 전하신 법이다. 그리하여 나라의 근본이 확고해져 훌륭한 정사가 아름답고 빛나게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이른바 유관(儒冠)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은 자들이 공리(功利)만을 일삼고 학업에 힘쓰지 않으니 말류의 폐단은 옆길로 빠져 들었다. 그리하여 허황된 말을 만들어내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부추기고 속여서 재물을 빼앗고 무리를 불러 모아 일당을 만들며 유생을 빙자하여 속이고 선동하고 있다. 이는 세교(世敎)가 발전하느냐 쇠퇴하느냐와 관계가 있으니, 어찌 사소한 일이라 하겠는가?
양기가 자라면 음기가 소멸되고 원기가 진출하면 사기(邪氣)가 물러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진실로 잘못된 길로 빠진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의 추향을 바로잡는 방도는 오로지 유학(儒學)을 드러내고 밝혀 장려하고 흥기시키는 데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내가 유술(儒術)에 마음을 두고 누차 신칙했던 것이다. 비록 나의 명을 어떻게 받들어서 거행할지 모른다 하더라도 재능과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보고 되는 대로 즉시 뽑아 쓰겠다. 하지만 우둔하고 완고하여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계속 이단을 고수하며 교화되기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유자로 대접할 수 있으며, 나라에 상법(常法)이 있는데 어찌 임금의 주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아! 교화가 밝혀지지 못한 것은 오직 내가 군사(君師)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반성해 보면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그러나 그들을 하지 못하도록 타이르는 것은 여러 유사들이 성실하게 마음을 쏟는 데에 달려있지 않겠는가?
묘당(廟堂)에서는 이에 이런 뜻으로 말을 만들어 서울과 지방에 특별히 신칙하여 각기 추향할 바를 알고 법에 저촉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 먼저 가르쳐주고 후에 처벌하며, 아픈 사람을 돌보아 주고 적자(赤子)를 보호하듯이 하는 나의 지극한 뜻을 보여주도록 하라."
하였다.
정배 죄인(定配罪人) 이학영(李學永) 등 22인을 풀어주었다. 의금부(義禁府)에서 특별 사면으로 계품(啓稟)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심상훈(沈相薰)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윤우선(尹宇善)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2월 16일 기사
윤길구(尹吉求)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2월 17일 경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연석(筵席)의 하교대로 성균관(成均館) 규제를 성균관 당상(成均館堂上)과 상의하여 절목을 만들어 들입니다.’라고 아뢰었다.
2월 18일 신미
관학 유생(館學儒生)인 진사(進士) 이건중(李楗重)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생각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항상 학문에 종사하시고 유도(儒道)를 숭상하고 중히 여기시며 학교를 정비하시고 유생들에게 양식을 넉넉히 주시어 허황된 놀이를 떨쳐버리고 추락된 도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모두 추향을 올바르게 하고 근본을 튼튼하게 만드는 데 정성을 쏟으시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거듭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정학을 지키고 이단을 물리치는 의리를 간곡히 거듭 말씀하셨으니, 우리나라에서 떳떳한 도리를 갖춘 사람이라면 누군들 고무되고 흥기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근래에 이단의 학문이 연이어 계속 출현하여 학설을 나열하고는 올바른 도라고 표방하며 서로 부추기고 고무한단 말입니까? 또 일종의 좌술(左述)을 행하는 무리들이 유복(儒服)을 입고도 경전의 교훈을 저버린 채 괴력(怪力)을 숭상하고 주문을 외우고 부적을 붙이며 무리를 모아 궁궐문 앞에서 소리쳐 고의적으로 국법을 범하니, 그들이 거리낌 없이 날뛰는 짓은 몰래 숨어서 사도(斯道)를 해치면서 오히려 남이 알까 두려워하는 부류보다도 해가 더 심합니다.
이런데도 엄하게 성토하지 않는다면 어찌 나라에 올바른 법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신들은 격렬한 울분으로 인해 감히 상소를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큰 결단을 내리시어 저들이 소두(疏頭)라고 이르는 자를 엄하게 추궁하여 실정을 알아내서 속히 상헌(常憲)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는 것은 반드시 학문에서 말미암는다.’고 하였으니 사도(斯道)를 강구하여 밝힌다면 어찌 사설(邪說)이 복종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응당 조정에서 조치가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그리 알고 학업에 더욱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9일 임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전 지평(前持平) 조강환(曺康煥)이 올린 상소에 대한 비지(批旨)에,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상소문의 원본을 가져다 보니, ‘근일에 사악하고 편벽된 도가 횡행하여 그 폐해가 하늘에 닿는 홍수와 들판을 불태우는 화재보다 더 심합니다. 그러나 정학을 숭상하고 인도해서 돌아오게 하는 것은 오직 상벌(賞罰)을 명확하게 하고 적절하게 조처를 하는데 있으니, 그렇게 하면, 저 무리들은 금령(禁令)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대개 정당한 학문을 숭상하는 것은 전후로 내린 칙교에서 거듭 말했을 뿐만 아니라 방금 계하(啓下)한 태학절목(太學節目)이 있으니, 모든 직무를 맡은 유사(有司)들은 심력을 다하여 받들어 거행하여 꼭 절목을 작성한 성과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상벌을 명확히 하는 한 조항은 오직 과조(科條)를 엄격히 세우고 사설(邪說)과 정학(正學)을 투철하게 변별하는 데에 달렸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도(道)로 인도하고 조치하는 요건이며, 또한 먼저 교화를 하고 나중에 형벌을 시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번에 전 대신(前臺臣)이 진달한 말은 모두 조리가 있으니 먼저 이러한 뜻을 서울과 지방에 다 알리고, 개도(開導)하고 권계(勸戒)하는 방도를 특별히 더 강구하여 사술(邪術)에 빠지고 미혹된 무리들로 하여금 구습(舊習)을 크게 고쳐서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강문형(姜文馨)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김온순(金蘊淳)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김덕수(金德洙)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재완(李載完)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신정희(申正熙)를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 삼았다.
2월 21일 갑술
대사간(大司諫) 윤길구(尹吉求)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근일 일종의 좌술(左述)을 행하는 기괴한 무리들이 유건(儒巾)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고 와서 상소를 올린다고 칭탁하면서 방자하게 대궐의 지척에서 부르짖었습니다. 이 얼마나 패악스런 무리들이기에, 기꺼이 상헌(常憲)을 범한단 말입니까? 비록 저들이 어떤 무리이며 저들의 상소가 어떤 상소인지 모르지만, 길에서 전해들은 바로 헤아리자면 부적과 주문으로 속이는 것을 사람들을 현혹하는 장기(長技)로 삼고, 괴력을 숭상하고 패거리에 의지하는 것으로 난리를 선동하는 계제(階梯)를 삼고 있으니, 성인의 가르침을 저버리고서 기강을 범하고 정도를 더럽히며, 날뛰고 떠들면서도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습니다. 이것을 만약 일찌감치 막지 않는다면 장래의 우환이 반드시 홍수나 맹수의 화보다도 더 심하여 세교(世敎)의 쇠퇴와 융성, 정학의 흥기와 침체에 크게 관계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스스로 잠시 물러났다고 해서 마음 놓아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도당(徒黨)의 숫자는 늘어날 것이고 그 괴수의 속임수가 있을 것이니, 진실로 소굴을 소탕하고 그 흉악한 싹을 끊어버린 뒤에야 무지개가 감히 다시 해와 달에 침범하지 못하고 쭉정이가 다시 좋은 곡식을 어지럽히지 못하듯이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큰 결단을 내리시어 저들이 소두(疏頭)라고 이르는 자를 엄하게 추궁하여 실정을 알아내고,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분간하여 나라의 법을 쾌히 시행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는 싹을 자르고 뭇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만일 항성(恒性)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이미 상도(常道)에 어긋나고 무엄하니 지금 그에 대해 조처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이남규(李南珪)가 언사(言事)에 관한 일로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바른 것을 지키고 덕행으로 인도하고 법으로 다스릴 방도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2월 22일 을해
융문당(隆文堂)에 나아가 능행(陵行) 때의 군령(軍令)을 판하(判下)하였다.
주진 독리(駐津督理) 이면상(李冕相)과 종사관(從事官) 서상교(徐相喬)를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2월 23일 병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병석(閔丙奭)의 등보(謄報)를 보니 함종부(咸從府)에서 또 민란(民亂)이 있었다고 합니다. 설령 관(官)에 실정(失政)이 있어 백성들이 원망과 고통을 참을 수 없다고 해도 만일 소원을 호소하려고 한다면 어찌 적절한 방도가 없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그런데 감히 무리를 모으는데도 누구도 어찌하지 못하여 관아에 침범하여 관원을 협박하고 건물을 부수고 가호에 불을 질렀습니다.
근일 평안도(平安道) 한 지방 내에 그렇지 않은 고을이 거의 없으니, 어찌 상하와 중외(中外)에 유지되던 명분과 기강이 이 지경에 이르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놀랍고 개탄스러워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강계(江界)와 성천(成川)을 안핵(按覈)하는 일행이 이미 도내에 있으니 우선 그가 일을 끝내기를 기다려서 일체 샅샅이 조사하도록 청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사세상 시일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도신의 사계(査啓)에 모두 확실한 근거가 있으니, 법에 따라 우선 수악(首惡)인 장두(狀頭) 고능호(高能浩)와 이지익(李之翊)은 기찰하여 잡아다가 모두 효수(梟首)의 형률을 시행함으로써 완악한 자를 경계하고 난민(亂民)을 징계할 방도로 삼고 그 밖의 갇혀있는 죄인들은 등급을 나누어 엄하게 처벌하고, 도망친 여러 놈들은 기한을 정하여 기찰하여 잡아들여서 역시 해당 형률을 시행하되 모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이번 난민들이 일으킨 변고는 전적으로 해당 부사 심인택(沈仁澤)의 탐학과 불법에 연유한 것입니다. 도신이 이미 파직시키고 잡아들이기를 청하였으니, 의금부(義禁府)에서는 형률에 따라 처벌해야 마땅합니다. 그가 횡령한 돈은 도신이 계사(啓辭)에서 아뢴 실제 액수대로, 형조(刑曹)로 하여금 가동(家童)을 잡아들여 빠른 시일 안에 그 돈을 징수한 다음 본도(本道)의 감영(監營)에 내려 보내어 해당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역시 통지하겠습니다.
이 고을은 지금 수령이 없으니 이조(吏曹)에 분부하여 일반적인 격식에 구애받지 말고 각별히 가려 차임하여 지체 없이 내려 보내소서.
도신의 계사 가운데 민란이 일어난 달과 날짜, 불타버린 가호(家戶)의 숫자가 모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사체로 헤아려 보건대 소홀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해당 도신을 추고(推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이렇게 불법을 저지른 무리들은 특별한 처분이 있어야 할 것이니 두 고을을 조사한 내용을 안핵사에게 빨리 계문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2월 24일 정축
윤용구(尹用求)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조종필(趙鍾弼)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돈하(李敦夏)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용직(李容稙)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남학희(南學熙)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2월 25일 무인
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 차자(聯名聯名)를 올려, 【응교(應敎) 신대균(申大均), 부응교(副應敎) 윤충구(尹忠求), 교리(校理) 이원긍(李源兢)과 이재현(李載現), 부교리(副校理) 조범구(趙範九)와 송정섭(宋廷燮), 수찬(修撰) 이인창(李寅昌)과 이범찬(李範贊), 정자(正字) 오형근(吳衡根)과 서상훈(徐相勛)이다.】 ‘동학(東學)의 괴수를 참수하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일전에 대사간(大司諫)의 소비(疏批)를 그대들도 보고 알았을 것이다."
하였다. 수찬 이범찬과 홍종찬(洪鍾燦)이 서로 연이어 상소를 진달하니, 아울러 비답하기를,
"이미 연명 차자의 비답(批答)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부사직(副司直) 홍종헌(洪鍾憲), 전적(典籍) 김각현(金珏鉉), 부교리(副校理) 조범구(趙範九)가 연명 상소(聯名上疏)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미 대간(臺諫)의 상소에 비답하였다."
하였다.
방외 유생(方外儒生)인 유학(幼學) 박제삼(朴齊三)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이 저 이른바 동학당(東學黨)의 무리들이 돌린 통문(通文) 4통과 전주 감영(全州監營)에 정소(呈訴)한 글을 보니, 모두 임금을 섬기는 오늘날의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심보를 따져보고 그 하는 행동을 보면 겉으로는 이단(異端)의 학설을 빙자하면서 속으로는 반역 음모를 도모하였습니다. 선생(先生)을 신원(伸寃)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며 새로운 명목을 표방하여 내세우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꾀어 들여서 같은 패거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팔도(八道)에 세력을 뻗치니, 움직였다 하면 숫자가 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며, 마을에서 제멋대로 행동하고 감영과 고을에서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수령(守令)은 겁을 먹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감사(監司)는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감히 누구도 어떻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회유하고 무마하기를 마치 인자한 어머니가 교활한 자식을 기르고 연약한 상전이 억세고 사나운 종을 다루듯 하면서 구차하게 그럭저럭 눈앞의 근심만 피하려 하니, 지렁이처럼 결탁하려는 계책과 올빼미처럼 드센 형세는 들판에 타오르는 불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역참(驛站)의 길목까지 연달아 미치고 여파가 성도(城都)에까지 흘러들었습니다. 먼저 저주(咀呪)와 참위(讖緯)의 내용이 담긴 부적을 사람들이 통행하는 길가에 게시하고, 나중에는 패악하고 법도에 어긋나는 말을 감히 궐문 앞에서 부르짖었습니다. 속에 품은 흉악한 계책과 술을 빚듯 키워온 역모(逆謀)는 나라의 공론(公論)을 떠보고 인심을 현혹하게 하지 않음이 없으며, 마침내 도적의 나머지 술수를 드러내어 온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전하의 백성이 될 수 없게 하려고 한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도 알 수 있습니다. 아아! 문관(文官)과 무관(武官)들은 안락에 빠져 걱정하지 않고 대각(臺閣)의 관리들은 입을 다물고 침묵하면서 말하지 않으며 관학(館學)의 유생(儒生)들은 시속에 아첨만 하고 묻지 않고 있습니다. 혹 의로운 기개를 떨쳐서 눈을 부릅뜨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의리는 오히려 밝혀지지 못하고 역량은 오히려 미치지 못하여 단지 천박한 견해만 들 뿐이니, 족히 음흉한 적의 음모를 막을 수 없습니다. 온 세상에 한 사람도 없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까? 요망스러운 적들이 제멋대로 날뛰고 기세를 부리면서 거리낌 없이 행동하여 그 반역 죄상이 이미 드러나고 흉계는 점점 굳어 가는데, 지금에 와서 발본 색원하지 못하고 곁가지만 잘라내어 고식적인 것만 일삼아서 큰 재난을 가져오게 한다면, 종묘 사직은 관(冠)에 매달린 구슬처럼 위태롭고 백성들의 운명은 염교 위의 이슬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들이 설사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 바쳐 나서서 나라의 은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고 한들 될 수 있겠습니까?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창을 부여잡고 북을 치며 떠들어대면서 호랑이를 쫓는 것보다는 잠들었을 때에 얼른 죽이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오늘날 저 무리들은 단지 잠자는 호랑이 정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처단하거나 성토하는 모든 조치를 잠깐이라도 늦출 수 없으니, 속히 그 괴수와 무리들을 찾아내어서 죽여야 할 자는 죽이고 효수(梟首)해야 할 자는 효수하며 회유해야 할 자는 회유해야 합니다. 지나간 일을 소급하여 추궁하지 말며 스스로 새롭게 할 길을 보여준다면, 아무리 간악한 무리라도 단련하고 연마하며 떨쳐 일어나게 하는 속에서 은근히 꺾이고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전(經傳)에도 이르지 않았는가? ‘떳떳한 도리를 회복할 뿐이니, 떳떳한 도리가 바르게 되면 백성들이 흥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대들은 물러가서 경전을 연구하여 밝히는 데 더욱 힘써라."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윤긍주(尹兢周)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요즘 동학(東學)과 예수교가 여기저기에서 번성하여 양주(楊朱), 묵가(墨家), 노장(老莊), 불가(佛家)의 무리가 백성에게 해를 끼친 정도만이 아닌데, 세상에는 맹자(孟子)나 한유(韓愈) 같은 사람이 없으니, 매우 걱정됩니다. 저들이 운운하는 것은 학문이나 교리라고 논할 것이 못 되며, 잇속으로 서로 부르고 자기의 당파를 두둔하며 그 음흉한 속셈을 실현하는 것이 다른 것 같지만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괴이한 무리들이 방자하게 궐문을 두드림에 거리낌이 없었으니, 살아있는 사람치고 누군들 통분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의지하고 믿는 것은 그 무리를 불러 모으고 재주를 부려서 현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친병을 앓는 어린아이가 앞뒤 없이 발악하는 것과 같은 만큼 백성의 부모로서는 제지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속히 형조(刑曹)로 하여금 형신(刑訊)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고, 괴수로서 글에 능하여 주장한 자를 즉시 서울과 지방에 신칙하고 독촉하여 일일이 잡아다가 의리로써 타이르고 법으로써 책망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고 귀화하게 하소서. 만일 가장 심하게 중독 되어 계속 허물을 고치지 않고 반드시 남을 물들일 무리들은 단연코 나라의 법을 적용하여 엄하게 징계한다면, 나머지 무리들은 아무리 수가 많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스스로 흩어져서 보통 백성이 될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근래에 정당한 학문은 크게 쇠퇴하고 선비들의 추향이 바르지 않아 불순한 교리가 횡행하게 된 것이 이렇게 심하므로, 식견이 있는 사람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신도 가슴을 두드리며 계속 한숨을 내쉬게 됩니다. 대체로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전하에게 달려 있으니, 행동을 살피며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덕을 닦으며 자신이 솔선하여 인도하고 유학(儒學)을 숭상하며 학교를 일으키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이재호(李在浩), 의녕원 수봉관(懿寧園守奉官) 서홍렬(徐鴻烈) 등도 모두 상소를 진달하여 동학의 괴수를 죽일 것을 청하니, 세 상소에 대하여 모두 비답을 내리지 않고 단지 계자인(啓字印)만 찍어주었다.
전교하기를,
"이번에 여러 상소에서 논한 바는 자못 취할 만한 점이 있으니,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6일 기묘
전교하기를,
"고과(考課)를 엄하게 하지 않는 것과 관련하여 지난번에 처분이 있었던 것은 역시 백성을 위한 나의 고심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관리가 된 자들이 만일 다 어진 정사를 한다면 백성들의 원망과 소란을 일으키는 일이 무엇 때문에 종종 들려오겠는가? 칙교(飭敎)한 다음에는 각별히 더욱 조심하며 응당 개선할 방도를 생각하여야 하는데 원계(原啓)를 그대로 되돌려 올리고 있으니, 비록 스스로 그 뜻을 행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임금의 명이 중하다는 데 대해서는 유독 생각하지 않는가? 일의 대체에 관계되는 만큼 참작하여 용서할 수 없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경직(李耕稙)과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헌영(李𨯶永)에게 다같이 파직(罷職)하는 법을 시행하라."
하니, 또 전교하기를,
"요즘 관리와 선비들이 올린 소론(疏論)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놀라고 한탄하게 된다. 괴이하고 황당한 말로 현혹시키고 선동하여서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에 따라서 점점 물들어 자기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법이 두려운 줄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먼저 교화하고 나중에 형벌을 적용하는 것은 왕법(王法)에서 숭상하는 바인데, 감히 간사한 말로 방자하게 대궐 문 앞에서 부르짖어 지극히 무엄하고 거리끼는 바가 없었으니, 단지 무식하고 몰지각한 부류를 회유할 수만은 없다. 그들이 이른바 소두(疏頭)고 하는 자는 서울과 지방에 특별히 신칙하여 기일을 정하고 염탐하여 체포하게 할 것이며, 그 밖의 어리석은 자들은 깨우치고 신칙하여서 금지하도록 하여 각기 생업에 안착하게 하라. 만일 뉘우치지 않고 무리를 모아 시끄럽게 한다면 그 관리된 자만 유독 들어서 알지 못하겠는가? 만일 들어서 알면서도 수수방관한다면 이는 벌써 인도하는 책임을 상실한 것이고 또한 단속하고 막는 일을 태만히 한 것이니, 이것을 직책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중앙에서는 법을 맡은 관청에서, 지방에서는 감영과 고을에서 그 지방에 따라 먼저 해당 관장(官長)을 규탄하고 일체 동일한 법조문을 적용하되 결단코 관대하게 용서하지 말라. 묘당(廟堂)에서 우선 이런 내용으로 글을 만들어 엄하게 신칙함으로써 편안하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안정하게 하고 또한 법은 반드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이번 양로연(養老宴) 때 음악을 연주하는 절차는 삼가 각년(各年)의 전례를 참고해서 마련해야 하나, 순전히 아악(雅樂)만 쓴 예도 있고 아악과 속악(俗樂)을 겸해서 쓴 예도 있으며 순전히 속악만 쓴 예도 있으니,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속악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2월 27일 경진
전교하기를,
"양로연(養老宴)을 행한 뒤에 회례연(會禮宴)이 있어야 하는데 일을 크게 벌이게 되므로 의식 절차를 진찬연(進饌宴)이나 회작연(會酌宴)의 규례대로 마련하며 동궁(東宮)도 회작연에 참석하도록 하라. 의식 절차는 이대로 마련하되, 회작연을 배설(排設)할 때 용교의(龍交椅)로 하고 이튿날에는 교의(交椅)로 거행하며, 임금이 글을 짓고 세자가 글을 지을 때 선창 악장(先唱樂章)과 후창 악장(後唱樂章)은 여령(女伶)으로 하여금 연습하게 할 것이며 이틀 동안 쓸 찬품(饌品)을 적당히 마련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라도 균전사(全羅道均田使) 김창석(金昌錫)의 장계(狀啓)를 보니, ‘진전(陳田)을 개간한 곳은 기한을 정하여 조세를 감면한다는 것은 이미 행회(行會)하였습니다. 김제(金堤) 등 7개 고을에서 새로 개간한 면적 158결(結) 87부(負) 1속(束)은 전례대로 특별히 정세(停稅)하도록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새로 개간한 땅에 대해 기한을 정하여 면세하는 것은 본래 법례이니, 이것도 그대로 시행하도록 해조(該曹)와 해도(該道)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내무부(內務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친군 경리청(親軍經理廳)의 초기(草記)를 보니, ‘본청에 속한 전 영장(前營將) 남양 부사(南陽府使)와 그 관하(管下)인 대부도(大阜島)를 총제영(總制營)에 소속시켰으니 대임(代任)을 임명하는 일은 내무부(內務府)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주소서.’라고 하여, 윤허하였습니다.
관하(管下)의 읍(邑)과 진(鎭)을 지금 이미 다른 영(營)에 옮겨 붙였으니, 응당 궐원이 나는 대로 대임을 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단지 염려되는 것은 경기(京畿) 내의 각 고을은 모두 원래 속한 관할이 있는데 저곳을 혁파하여 이곳으로 옮긴다면 반드시 불편한 점이 많을 것입니다. 군제(軍制)는 중요한 바이니,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때에 따라서 변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해청(該廳)에서 관할하는 파주(坡州)와 장단(長湍)은 좌영장(左營將)과 우영장(右營將)이 시행하게 하고, 전영장(前營將), 중영장(中營將), 후영장(後營將)은 우선 감하(減下)하며, 전에 남양부(南陽府) 관하에 있던 양천(陽川)을 이제부터 파주에 옮겨 소속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호남(湖南) 유생(儒生) 김택주(金澤柱) 등이 상소하여 동학(東學)의 소수(疏首)를 엄하게 신문하여 형벌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사설(邪說)과 정학(正學)을 엄격히 구분하려면 응당 덕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바로잡는 방도를 강구하여야 할 것이니, 그대들은 그렇게 알고 물러가서 학업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용직(李容稙)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김문현(金文鉉)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윤영신(尹榮信)을 광주부 관찰사(廣州府觀察使)로 삼았다.
2월 28일 신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부호군(副護軍) 이남규(李南珪), 부사과(副司果) 윤긍주(尹兢周)와 이재호(李在浩), 전 수봉관(前守奉官) 서홍렬(徐鴻烈) 등의 상소를 모두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여러 상소를 가져다 보니, 취할 만한 점도 많이 있지만 또한 시행하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사설(邪說)을 물리치고 정학(正學)을 지키며 덕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바로잡는 방도에 이르러서는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처럼 똑같습니다. 대체로 하늘이 백성을 낳아 기르는 데에는 다 법칙(法則)이 있는데, 그것을 따르면 천명(天命)에 순응하는 것이고 어기면 천명을 거슬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 저 일종의 간사한 무리들이 자칭 동학(東學)이라고 하면서 함부로 주문(呪文)과 부적(符籍)을 만들어 사람을 꾀고 감히 참위설(讖緯說)에 의탁하여 선동하고 현혹하니, 바로 음흉하고 요사스러우며 황당하고 괴이하며 법도에 어긋나는 말일 뿐입니다. 나라에서는 응당 금지하여야 할 것이고 법으로는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응당 직위에 구애되지 말고 논의하는 일과 법을 밝히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이 사악한 괴수의 신원(伸寃)을 위해 대궐 문 앞에 와서 호소한 행적을 보면 무엄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니, 더욱 지극히 통탄스럽습니다. 모조리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으니, 징계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삼가 일전에 내린 특교(特敎)를 보니, 훌륭한 임금의 말씀은 형벌보다 엄한데, 소두(疏頭)만 처벌하고 그 밖의 무리들은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살리려는 생각을 미루어 스스로 새롭게 할 길을 열어 주었으니, 아무리 짐승같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응당 두려워하고 조심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만일 일체 법으로 처리한다면, 그 역시 먼저 교화하고 나중에 형벌을 적용한다는 전하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니, 속히 서울과 지방에 통지하여 이른바 소두를 며칠 안으로 체포하고 엄하게 조사하여 실정을 캐내야 합니다. 그들의 괴수는 전형(典刑)을 밝혀 바로잡고, 잔당들은 특별히 잘 깨우쳐서 잘못을 깨닫고 귀화하게 하소서. 만약 가장 심하게 물들어서 끝내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속히 해당 법률을 시행함으로써 나라의 법을 엄하게 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김성근(金聲根)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이근명(李根命)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민형식(閔亨植)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았다.
2월 29일 임오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대보단(大報壇) 춘향 대제(春享大祭)의 서계(誓戒)를 받는 의식을 행하였다. 왕세자가 따라서 나아갔다.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조동희(趙同熙)를 시강원 겸보덕(侍講院兼輔德)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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