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37권, 고종35년 1898년 7월

싸라리리 2025. 1. 29.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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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양력

【음력 무술년(1898) 5월 13일】 큰 비가 왔다. 【전라남도(全羅南道)에서는 장맛비가 계속 퍼부어 민가가 떠내려가고 잠겼으며 제방이 터지고 논밭이 씻겨나가고 모래가 뒤덮였는데 모든 고을이 다 그러하였다. 강원도(江原道)의 평해(平海), 울진(蔚珍) 두 군(郡)에서는 개울물이 넘쳐나고 언덕이 무너졌으며 민가가 떠내려가고 논밭이 물에 잠겼다.】


【원본】 41책 37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4면
【분류】과학-천기(天氣)
큰 비가 왔다. 【전라남도(全羅南道)에서는 장맛비가 계속 퍼부어 민가가 떠내려가고 잠겼으며 제방이 터지고 논밭이 씻겨나가고 모래가 뒤덮였는데 모든 고을이 다 그러하였다. 강원도(江原道)의 평해(平海), 울진(蔚珍) 두 군(郡)에서는 개울물이 넘쳐나고 언덕이 무너졌으며 민가가 떠내려가고 논밭이 물에 잠겼다.】


【원본】 41책 37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4면
【분류】과학-천기(天氣)

 

7월 2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국가(國家)가 사전에 방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이다. 어느 때인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오늘에 있어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때문에 지난번에 육군과 해군을 직접 통솔하겠다고 조칙(詔勅)을 내렸다. 군사의 위력은 수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양성하고 교련하고 운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많고 적은 상태에 대해서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육군은 10개 대대(大隊)에 한하여 우선 증설(增設)하고, 그 경비는 탁지부(度支部)의 재용(財用)이 넉넉해지기 전까지 몇 년 동안은 마땅히 궁내부(宮內府)에서 조치하여 획급해 내려야 할 것이다. 해군은 아직도 정해진 제도가 없는데 비록 미처 겨를이 없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너무 소홀히 하는 것이다. 상비(常備)해야 할 인원과 편제(編制)하는 방법, 그리고 이들을 지원할 계책을 군부(軍部)에서 충분히 의논하여 미리 운용해 나갈 원칙을 강구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토지를 측량하는 일에 관해서는 이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어 재결 받은 것이 있다. 별도로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사무 처리 규정은 의정부에서 의정(議定)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민병석(閔丙奭)에게 태의원 경(太醫院卿)을 겸임(兼任)하도록 하였다.

 

칙령(勅令) 제22호, 〈친위 각대 편제 개정 건(親衛各隊編制改正件)〉과 제23호, 〈보병 1중대를 포병으로 삼아 거행할 건〔步兵一中隊爲砲兵擧行件〕〉과 제24호, 〈무관학교 개정 건(武官學校改正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금년 5월 9일에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산릉(山陵)에 직접 제사를 지내고 보니 슬픈 마음이 더욱 새로워진다. 그리고 국내(局內)에 나무를 심을 때 각릉(各陵)의 능군(陵軍)과 양주(楊州)의 백성들이 정성을 다하여 애썼으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특별히 뜻을 보여 주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니 의정부에서 회의하여 품재(稟裁)하도록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정성을 다하여 나무를 심은 것에 대해 깊이 유념하여 은지(恩旨)를 특별히 반포하기를 이와 같이 간곡하게 하셨습니다. 신 등이 삼가 칙명(勅命)을 받들어 양주 군수(楊州郡守) 임원호(任原鎬)에게 물었더니, 성책(成冊)하여 보고한 내용에, ‘각 능과 각원(各園)의 군사는 1,110명이고 양주군(楊州郡) 각면(各面)의 민호(民戶)는 1만 2,875호이며 검칙(檢飭)하고 간역(看役)한 교리(校吏)는 6명이고 어린 나무를 자원하여 가져다 심은 사람은 37명이며 산판(山坂)을 자원하여 바친 사람은 11명입니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일제히 모여서 충분히 의논하였는데 뜻을 보이는 데에는 폐단을 줄여주는 일 만한 것이 없습니다. 각 능과 각 원의 군사와 양주 각 면의 민호에 부과되는 올해 추등(秋等) 호포전(戶布錢)을 이 숫자대로 특별히 견감(蠲減)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탁지부(度支部)의 예산의 실수(實數)에 관계되므로 급대(給代)하지 않을 수 없는데, 급대하는 방도는 신 등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검칙하고 간역한 교리 6명과 연화사(蓮華寺)의 승도(僧徒) 3명에게는 응당 포목(布木)으로 시상(施賞)해야 하는데, 오직 성상의 재결에 달려 있습니다. 어린 나무를 자원하여 가져다 심은 것은 나무를 심은 것과 같고 이미 양주군 각 면의 민호의 숫자 안에 포함되어 있으니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판을 자원하여 바친 것은 왕토(王土)와 관련되는 만큼 어찌 바치고 바치지 않은 것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그만 두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라. 급대하는 방도는 의정부에서 회의하여 품재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3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망제(望祭)와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전 함경남도 관찰사(前咸鏡南道觀察使) 서정순(徐正淳)을 감봉(減俸)하라고 명하였다. 덕안릉(德安陵)의 화소(火巢) 내에 화재가 일어난 변고가 있었는데 즉시 보고하지 않은 까닭에 장례원(掌禮院)에서 계품(啓稟)하였기 때문이다.

 

7월 6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효전(景孝殿)의 신탑(神榻)에 대한 제도(制度)를 옛 예를 참고하여 좋은 날을 받아 개수(改修)하되 크게 벌일 필요는 없으며 도감(都監)은 설치하지 말라. 그러나 사체(事體)를 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감동(監董)하는 관리가 없을 수 없으니,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과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이 함께 감동하라."
하였다.

 

칙령(勅令) 제25호, 〈양지아문의 직원 및 사무 처리 규정〔量地衙門職員及處務規程〕〉을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사무 처리 규정〉
제1조
양지아문은 내부(內部)와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 청의(請議)한 사항을 처리하는 곳으로 정한다.
제2조
양지아문의 직원은 총재관(總裁官) 3명, 부총재관(副總裁官) 2원, 기사원(記事員) 3원, 서기(書記) 6원을 둔다.
1. 총재관 3원과 부총재관 2원은 조칙으로 임명된다.
2. 기사원 3원은 내부와 탁지부(度支部), 농상공부의 주임관(奏任官) 가운데에서 총재관이 각각 1원씩 추천하여 임명한다.
3. 서기 6원은 내부, 탁지부, 농상공부의 판임관(判任官) 가운데에서 총재관이 각각 2원씩 선정한다.
4. 기사원과 서기 중에 영어(英語)를 아는 사람 1원과 일본어를 아는 사람 1원을 선발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
제3조
총재관 3원은 양지아문에 속한 사무를 총체적으로 관할하여 처리하며 특별히 상주하여 재가를 받아야 할 사항에 대해서는 의정부 의정을 거쳐 상주하여 재가해 줄 것을 요구하며 일체의 공문에 성명을 연이어 서명하되 순서는 품계에 따른다. 다만 총재관 3원 가운데에서 1원 혹은 2원이 일이 있어 지방에 있을 때에는 부총재관이 총재관의 직무를 대신하여 처리하도록 하며 공문에 성명을 대리로 서명한다.
제4조
부총재관은 총재관의 직무를 보임(補任)하며 본 아문의 사무를 정리한다.
제5조
기사원과 서기는 총재관 또는 부총재관의 지휘 감독을 받아 여러 가지 사무에 종사한다.
제6조
총재관 이하 설치한 각 관원이 현재 맡고 있는 실직(實職)에서 원임되거나 혹은 교체되어도 토지 측량 사무가 끝나기 전에는 본 아문의 직무를 그대로 처리하며 서툰 사람에게 넘길 수 없다.
다만 기사원과 서기는 현재 맡고 있는 실직에서 승진된 경우에는 이 예에 해당하지 아니한다.
제7조
총재관의 봉급은 각부(各部)의 대신(大臣)에게 적용하는 봉급 예에 따르며 부총재관의 봉급은 각 부 협판(協辦)의 2등 봉급 예에 비추어 지급하며 기사원과 서기의 봉급은 본직의 등급에 따라 지급한다.
제8조
총재관과 부총재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현재 맡고 있는 직무가 있다 하더라도 품계만 서임한다.
제9조
수기사(首技師) 1원은 외국 사람을 초빙하고 기수보(技手補) 10명 이내를 고용하여 수기사의 지휘 감독을 받게 하며 본 사무를 견습하기 위하여 본국의 영어와 일본어를 아는 학도(學徒) 가운데에서 20명을 채워 넣는다. 다만 기수보는 본국 사람이나 혹은 외국 사람 가운데에서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수석 기사가 시취(試取)하여 가르친다.
제10조
수기사와 기수보의 월급은 양지아문의 총재관 3원이 적당하게 금액을 정한다.
제11조
수기사는 양지 아문의 총재관과 부총재관의 지휘 감독을 받아서 종사한다.
제12조
양지아문에 고원(雇員) 3인, 사령(使令) 9명, 방지기〔房直〕 3명을 두되 내부와 탁지부, 농상공부에서 균등하게 배정되어 옮겨오며 월급은 당해 각 부에서 이전 월급에 비추어 지급한다.
제13조
양지아문의 인장(印章)을 만들어 각부(各府)와 부(部), 원(院), 각 지방 관청에 알려주어 기준으로 삼게 한다.
제14조
양지아문의 총재관은 각 부와 부의 대신과 대등하므로 경무사(警務使)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각 관찰사(觀察使) 이하의 관리를 지휘 감독하여 양지 사무에 종사하게 하되 위반하는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관할하는 부에 조회하거나 견책하여 감봉하거나 파면시키는 것을 경중에 따라 시행한다.
제15조
관찰사 및 지방관 가운데 특별히 부지런하고 유능한 사람을 선발하여 양지 사무를 수행하는 데 성과가 있도록 한다.
제16조
양지 사무가 잘되게 하기 위하여 수기사의 초빙 연한을 5년으로 특별히 정하되 각 부와 부, 원(院), 청(廳)에서 외국인을 초빙하는 경우에는 이 예를 기준으로 하지 못한다.
제17조
토지 측량은 한성부 5서(署)를 시작으로 하여 가까운 곳에서 먼 지방으로 전개해 나간다.
제18조
양지아문과 지방에 나간 기사 일행은 순검(巡檢)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
제19조
양지아문의 경비는 사무가 많아지기 전에는 중추원(中樞院)의 예에 비추어 가감하여 예산을 정한다.
제20조
양지아문 각원의 봉급과 기계, 책, 각 항의 물건을 구입해 사용하는 데 드는 비용과 수기사 이하의 월급은 탁지부에서 지출한다.
제21조
기사 일행의 지방 출장 여비는 양지아문의 명령서를 받아서 도착한 해당 지방 관청에서 영수하게 하고 당해 명령서는 본 아문에 첨부해 보내 탁지부에 넘겨 대조하여 처리하게 한다.
제22조
양지아문을 설치할 청사(廳舍)와 수기사가 거처할 집은 탁지부에서 마련한다.
제23조
양지아문 사무처리세칙은 총재관이 의논하여 결정한다.
제24조
본령은 반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칙령 제26호, 〈철도사 관제(鐵道司官制)〉와 칙령 제27호, 〈함경북도 길주군 구역 내에 성진군 신설 건〔咸鏡北道吉州郡區域內城津郡新設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종1품(從一品) 박정양(朴定陽), 심상훈(沈相薰), 종2품(從二品) 이도재(李道宰)를 양지아문 총재관(量地衙門總裁官)에, 정2품(正二品) 이채연(李采淵), 2품(二品) 고영희(高永喜)를 양지아문 부총재관(量地衙門副總裁官)에 임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홍릉(洪陵)에 나무를 심을 때의 각릉(各陵)과 각원(各園)의 군사들과 양주(楊州)의 백성들에게 추등(秋等) 호포(戶布)를 급대(給代)하는 방도에 관해 의정부에서 회의를 거친 결과, 탁지부(度支部)에서 급대하는 것이 사리에 맞겠다는 표제(標題)가 10이고, 궁내부(宮內府)에서 급대해야 한다는 표제가 1입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표제가 많은 쪽으로 시행하라."
하였다.

 

7월 7일 양력

경무사(警務使) 신석희(申奭熙)를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전환국장(典圜局長) 이용익(李容翊)을 철도사 감독(鐵道司監督)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7월 8일 양력

종1품(從一品) 이유승(李裕承), 특진관(特進官) 정낙용(鄭洛鎔), 종1품 현석운(玄昔運), 정2품(正二品) 원우상(元禹常)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박용대(朴容大), 종2품(從二品) 이용직(李容稙)·이성렬(李聖烈)·이중하(李重夏)·이근호(李根澔)·윤치호(尹致昊)를 중추원 1등의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고, 종2품 강우형(姜友馨)·고영근(高永根)을 중추원 1등의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이종건(李鍾健)에게 경무사(警務使)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7월 9일 양력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심상훈(沈相薰)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군부 대신(軍部大臣) 민영기(閔泳綺)를 탁지부 대신에, 특진관 심상훈(沈相薰)을 군부 대신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從二品) 윤웅렬(尹雄烈)을 경무사(警務使)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고, 부령(副領) 김재은(金在殷), 참령(參領) 이종림(李鍾林)·이남희(李南熙)를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윤치호(尹致昊)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서 다행히 훌륭한 폐하(陛下)를 만나 폐하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독립회(獨立會)를 설치하여 황실(皇室)을 보호하고 국권을 유지할 것을 도모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지난달 25일에 내리신 조칙을 삼가 읽고서 경축하는 마음 그지없었습니다. 옛글에 이르기를, ‘훌륭하십니다. 왕의 말씀이여. 한 마디의 말로 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다.’고 하였으니, 오늘 이 열 줄의 은혜로운 윤음(綸音)이 바로 우리 대한(大韓)이 중흥할 수 있는 기회이므로 신들이 기뻐 본회(本會)에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어 생각해 보면 폐하께서 독립의 기초를 세우고 오대주(五大洲)에 균등하게 시행되는 권한을 잡고서 홍범(洪範)을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법령을 신하와 백성들에게 반포하였으니, 법이 훌륭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규정이 좋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을 실천하여 나간다면 훌륭한 정사를 이룩하지 못함을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의정부에는 청류(淸類)가 다 없어지고 탁류(濁類)가 횡류하여 위로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널리 알릴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아래로는 현명하고 능한 자에게 사양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수치를 무릅쓰고 녹봉만 받으면서 태연히 차지하고 있으니 의정(議政)의 직책에 있는 자가 그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정한 도가 문란해지고 부정한 길이 거듭 생겨 크고 작은 일과 높고 낮은 관직 보기를 거간꾼이 물건 보듯 하니, 인사를 맡은 자가 그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기강이 문란하고 송사(訟事)를 처리함이 공평하지 못하여 형옥(刑獄)이 함정을 설치하는 격이 되고 있으니, 법을 집행하는 자가 그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장수가 군사를 알지 못하며 군사가 장수에게 복종하지 않고 문벌에 기대어 절충(折衝)의 직임을 함부로 맡고 병략(兵略)에 전혀 어둡고 단속하는 제도조차 알지 못하니, 군사를 맡은 자가 그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외교의 정성과 신뢰가 믿음을 받지 못하고 외교부서의 응대가 예의에 어두워 위협하는데 겁을 먹고 능욕과 모멸을 당하니 교섭하는 직무를 맡은 사람이 그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세가 균등하지 못하고 화폐가 퍼지지 못하여 간악한 짓이 거듭 생기고 나라의 재정이 궁색해지니, 재정을 맡은 자가 그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선비를 양성한다고 이름을 걸고 창고의 쌀만 허비하며 겉치레에만 물들며 실학(實學)을 배우기에 힘쓰지 않으니, 선비 양성을 맡은 자가 그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농부는 그 본업을 잃었고 상인은 그 이득이 없으며 제조하는 방도에 어둡고 이름과 실지가 맞지 않으니, 생업을 장려하는 자가 그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궁중이 엄숙하지 못하고 경계와 호위가 엄격하지 않아 소인배들이 틈을 엿보아 들어오고 정직한 자가 용납되기 어려우니, 경찰(警察)을 맡은 자가 그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름은 자문하는 원(院)이라고 하면서도 아침에 임명하였다가 저녁에 파면시켜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길을 만들고 있으니, 중추원(中樞院)을 맡은 자가 그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들이 밤낮으로 생각하여도 매우 의혹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폐하의 조칙 가운데 ‘진실로 그 적임자가 있다면 어찌 정사가 잘 다스려지지 않음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탄식하는 말까지 있었으니 국무 대신(國務大臣)이 그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은 신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성상께서 환히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 이미 그 적임자가 아니라면 어째서 이들을 등용하여 그전대로 포용하여 위로는 성상께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원통한 마음을 품게 합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속히 배척해 물리치시고 어질고 훌륭한 사람을 다시 선발하여 각각에 맞는 직무를 맡기소서. 그렇게 하면 정사가 잘 시행되지 않음을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당요(唐堯)가 50년간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림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조정에 묻고 한편으로는 재야에 물었는데, 조정에 있는 사람이란 것은 곧 모든 관리와 12목(牧)이며 재야에 있는 사람이란 곧 모든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모두 현명하다고 한 후에 등용하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한 후에야 배척하라.’고 하였으니, 이는 한 번 등용하고 한 번 배척할 때에 나라 사람들의 의견을 반드시 따라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요즘 구라파(歐羅巴)의 여러 나라들에서 비록 전제 정치(專制政治)라고 하더라도 국사(國事)를 의논하는 상, 하 의원(議院)을 둠으로써 국시(國是)를 자문하며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놓았습니다. 이는 조칙에서 한 번 상을 주고 한 번 벌을 주는 일을 함부로 시행하지 말고 다 공론에 부치라고 하신 뜻이 너그럽고 위대하니, 더없이 넓고 높은 성덕(聖德)이 옛날의 훌륭한 정사에 부합되며 만국에 통행하는 규례에 맞습니다. 비록 신들이 우매함으로도 더욱더 감격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어 성상의 위엄을 피하지 않고 감히 어리석은 충심을 진술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준수하고 훌륭한 선비를 널리 구하고 여론을 겸손히 따르시어 크고 작은 정령(政令)에 대해 위로는 백료(百僚)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묻고 널리 받아들여 시행하신다면 만백성이 매우 다행일 것이며 천하가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내용이 비록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조정의 일에 대해 지위를 벗어나 망녕되이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7월 11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이재순(李載純)을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고, 군부 협판(軍部協辦) 주석면(朱錫冕)을 법부 협판(法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군부 대신(軍部大臣) 심상훈(沈相薰)에게 내부 대신(內部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도록 명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병직(趙秉稷)이 아뢰기를,
"전 군수(前郡守) 황기인(黃夔仁)의 언사소(言事疏)에 대한 비지(批旨)에 ‘공초(供招)한 여러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하는데 어째서 이름을 지적하지 않는가? 법부(法部)에서 조사해서 아뢰도록 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삼사 성지(聖旨)를 받들고 황기인을 불러들이려고 할 때에 해당 관원이 스스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공초에서 나온 여러 사람들에 대해 어째서 지명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조사하니 공초한 내용에, ‘법사(法司)에서 조사하는 일을 신중히 하고 비밀리에 하는데 어찌 최시형(崔時亨)의 공초에서 나온 줄 알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풍설(風說)을 들으니, 최시형의 공초에서 벼슬아치들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하였습니다. 또 해당 관원의 직명(職名)을 전 군수로 상소하였는데 공초하는 장소에서는 경인년(1890)에 영덕 현령(盈德縣令)에 제수(除授)되었다가 신묘년(1891)에 당진 현감(唐津縣監)에 이배(移拜)되었다 공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어긋나는 데 대해 물으니, 공초에서 근래에는 외임(外任)을 모두 군수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렇게 썼다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임금께 아뢰는 글이 얼마나 신중하게 살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해당 관원이 감히 시기하는 생각으로 방자하게 상소하여 직명이 사실과 맞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 죄범을 따져 보면 죄가 마땅히 감처(勘處)해야 하나 성지를 받들고 조사하는 과정인 만큼 본부(本部)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삼가 성상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조율(照律)하여 징계하고 처리하라."
하였다.

 

7월 14일 양력

종1품(從一品) 조병식(趙秉式)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에, 정2품(正二品) 윤용선(尹容善)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군부 대신(軍部大臣) 심상훈(沈相薰)에게 호위 총관(扈衛總管)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도록 명하였다.

 

의정부 총무국장(議政府總務局長) 이상재(李商在)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바로 의정부(議政府) 소속의 한 관료입니다. 그 직책의 담당 범위는 비록 상관의 지휘와 명령을 정성껏 준수하는 데 불과하지만 타고난 떳떳한 성품이야 어찌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못한 것이 있겠습니까? 근래의 형국을 가만히 보건대, 조약을 맺은 여러 나라들이 서로 곁눈질해 보면서 무기, 배, 수레를 접경 지역에 잇대어 놓고 있으며 서로 이익을 다투고 각각 토지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거울삼을 일이 먼 곳에 있지 않으니 분쟁의 불길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때에 편안히 즐길 것만을 일삼고 떨쳐 일어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끝없는 화가 반드시 입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만큼 오늘날 역시 어찌 조금 편안한 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어리석은 백성들도 명백히 알며 매우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전에 백성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한 목소리로 상소를 올렸는데 결과적으로 의정부에 대해 반대하는 꼴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신 역시 의견이 차이가 없었으므로 같은 말로 논의하는 데 참가하였으니, 이것은 의정부에 속한 관료로서 감히 의정부의 잘잘못을 말한 데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신이 어떻게 태연하게 외람되이 자리를 차지하고 스스로 녹봉을 탐하여 양쪽에 가담한다는 비난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우러러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신의 현직을 체차함으로써 조정의 체면을 보존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굳이 인혐(引嫌)하는가?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임을 살피라."
하였다.

 

7월 15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심순택(沈舜澤)을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7월 16일 양력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조병식(趙秉式), 찬정(贊政) 서정순(徐正淳)을 소견(召見)하였다. 수릉(綏陵)과 예릉(睿陵)을 봉심(奉審)한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학부 협판(學部協辦) 고영희(高永喜)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7월 18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경효전(景孝殿)의 삭제(朔祭)에 쓸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병직(趙秉稷)이 아뢰기를,
"방금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의 문의서를 보니, ‘피고 최시형(崔時亨)의 공초에, 「병인년(1866)에 간성(杆城)에 사는 필묵(筆墨) 상인 박춘서(朴春瑞)에게 동학(東學)의 선도(善道)와 병을 치료하는 주문과 강신문(降神文)을 받아 가지고 열군(列郡)의 각도(各道)를 두루 돌아 다녔습니다.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13자의 주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8자의 강신문(降神文)과 동학의 원문인 제1편 〈포덕문(布德文)〉, 제2편 〈동학론(東學論)〉, 제3편 〈수덕문(修德文)〉, 제4편 〈불연기연문(不然其然文)〉과 궁궁(弓弓)과 을을(乙乙) 자를 새긴 부적으로써 백성들을 현혹시켰으며 도당(徒黨)을 체결하였습니다. 또 복주된 최제우(崔濟愚)의 「만년토록 뻗어 있는 가지에 천 송이의 꽃이 피고 사해(四海)의 구름 속에 달이 한 번 비친다.〔萬年枝上花千朶 四海雲中月一鑑〕」는 시구를 숭상하고 사모하여 법형(法兄), 법제(法弟)의 칭호를 법헌(法軒)이라는 칭호로 바꾸어서 불렀으며, 해월(海月)이라는 인장(印章)을 새겼고 교장(敎長), 교수(敎授), 집강(執綱), 도집(都執),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의 두목에게 각 지방을 맡겨 두었습니다. 또한 포장회(布帳會)를 설치하였는데 모인 무리들이 수천 수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으며 최제우의 원통함을 푼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계사년(1893)에 그 도제(徒弟) 수천 명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고 곧바로 해산하였으며, 또 보은(報恩)의 포장회 안에 많은 무리들이 모였을 때는 순무사(巡撫使)의 선유(宣諭)로 인하여 각각 스스로 흩어져 갔습니다. 「갑오년(1894) 봄에 피고 전봉준(全琫準)은 고부(古阜) 지방에서 패거리들을 불러 모아서 기회를 틈타서 관리를 살해하고 성(城)과 진(鎭)을 함락시키는 바람에 호서(湖西)와 호남(湖南) 지방이 결딴이 나고 뒤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하였습니다.
피고가 지시하고 화응한 일은 없지만 그 변란이 일어나게 된 근원을 따져 보면 피고가 주문과 부적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킨 데 있습니다. 피고 최시형은 《대명률(大明律)》 〈제사편(祭祀編)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의 일체 좌도(左道)로써 바른 도를 어지럽히는 술책과 혹은 도상(圖像)을 숨겨놓고 향을 피워 사람들을 모으고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며 거짓으로 착한 일을 닦는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데에서 우두머리가 된 자에 대한 형률에 비추어 교형(絞刑)에 처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해당 범인 최시형을 원래 의율(擬律)한 대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19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삭제(朔祭),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따라 나아가서 예를 행하였다.

 

독일인〔德國人〕 워르터〔花爾德〕에게 강원도(江原道) 금성(金城) 광산 채굴을 허락하였다.

 

7월 20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오익영(吳益泳)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7월 21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미 생기(省記)가 없는데 함부로 궁중에 숙직하여 사체(事體)를 어긋나게 하였으니 책비(責備)가 없을 수 없다. 참정(參政) 조병식(趙秉式)을 우선 면관(免官)시키라."
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서정순(徐正淳)에게 의정(議政)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특진관(特進官) 김병시(金炳始)를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에, 특진관 김영수(金永壽)를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에, 종1품(從一品) 조병호(趙秉鎬)를 학부 대신(學部大臣)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규장각학사(奎章閣學士) 조동면(趙東冕)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 윤용선(尹容善)을 규장각학사 겸 시강원일강관(奎章閣學士兼侍講院日講官)에, 정2품(正二品) 조종필(趙鍾弼)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7월 22일 양력

전 중추원 의관 윤치호(尹致昊)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은 모두 성상의 백성으로서 나라의 형편이 피폐한 때를 만나 현재 위망(危亡)의 근심을 감히 앉아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만 번 죽는 것을 피하지 않고 어리석은 소견을 감히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비지(批旨)를 읽어 보면, 내용에 ‘아뢴 내용이 비록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조정의 일은 지위를 벗어나 망령되이 논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황송하기 그지없는 가운데 다시 의혹이 더욱더 심해집니다.
대체로 군국(君國)에 대한 근심은 관리나 백성이나 차이가 없기 때문에 《대학(大學)》의 장구(章句) 가운데 신안(新安) 주문공(朱文公)의 주석(註釋)에 이르기를, ‘비록 처지가 천한 필부라도 역시 그 임금을 요(堯) 순(舜)으로 만들고 그 백성을 요(堯) 순(舜)의 백성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자기 분수 안에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풀 베고 꼴 베는 자에게 묻는다.’고 하였으며, 구라파(歐羅巴)의 경계하는 글에도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면 나라가 이 때문에 편안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치란(治亂)에 관한 말은 그 지위에 있어야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지난번에 아뢴 내용은 모두가 현재 폐단의 근원에 정확히 근거한 것이었고, 그것을 바로잡을 방도는 법령은 홍범(洪範)을 다 준수하고 정승은 어질고 훌륭한 사람으로 다시 선발하고, 이득과 폐단은 백성들의 의견을 널리 수렴하는 것이 오늘 급선무의 대강령(大綱領)과 대제목(大題目)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 가운데 ‘지위를 벗어나서 망령되이 논했다.’ 하셨으니 어리석은 신들로서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저 오늘날 나라의 형편이 이와 같이 급하게 된 것은 첫째 정승을 그 적임자로 등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둘째 정승이 그 직무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셋째 정승이 종묘 사직의 안위에 대해서는 애당초 우려하지 않고 다만 사정(私情)으로 처리하고 녹봉이나 타먹을 것을 생각하며 어질고 능한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을 일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승과 신하들을 포용하고서 즉시 내쫓지 않는 것은 폐하께서 잘 다스려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훌륭한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 간사하고 미련한 무리들이 어찌 기회를 타서 등용될 것을 꾀하여 아첨하는 습성으로 폐하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과 나라를 해치지 않겠습니까?
지금 폐하께서는 다만 눈앞의 편안한 계책을 위하여 순순히 받들고 어기지 않는 사람들을 등용하고, 심지어 위에 고하고 아래에 선포한 홍범(洪範) 14조(條)와 새로 정한 법령들은 시행하기도 하고 시행하지 않기도 하여 실제 적용하는 것이 한결같지 않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보면 법령의 폐단과 나라가 위태로워진 것은 실로 이러한 정승에게만 책임을 추궁할 것이 아니라, 아마도 폐하께서 위태로운 변란을 자초하고자 하시는 듯하니, 어찌 하늘에 호소하고 통곡하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덕을 지니신 우리 폐하께서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때를 만나 하나의 정령, 하나의 조치를 취함에 있어서도 마땅히 가다듬고 쇄신하신 후에야 천하에 쌓인 수치를 통렬히 씻을 수 있으며 부강(富强)의 기초를 확고히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임시방편의 안일한 방법으로 장구한 계책을 잊어버려 위로는 태조(太祖)께서 풍찬노숙하며 이루어 놓은 간고하고도 큰 왕업을 무너뜨리며 아래로는 백성들이 곤궁하여 흩어지는 상황을 살피지 않습니까? 아, 동양과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날로 번성하고 강대해지는 이유가 모두 백성들의 의견을 묻고 협의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미약한 형편으로 천하의 나라와 비교한다면 더이상 달리 짝할 만한 나라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군신 상하가 모두 통탄해 마지않을 일입니다. 이 때문에 감히 폐하의 위엄을 무릅쓰고 다시 다급한 목소리로 일제히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결단성 있게 단안을 내려 실지로 홍범을 따르고 어질고 훌륭한 사람을 다시 선발하고 백성들의 의견을 널리 채용하는 세 가지 문제를 특별히 윤허하여 이천만 백성들을 구렁텅이와 도탄에서 구제하신다면 종묘 사직에 더없는 다행이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말한 내용에서 혹 취할 것이 있지만 이와 같이 여러 차례 번거롭게 구는 것이 지루하지 않은가?"
하였다.

 

전 승문원 정자(前承文院正字) 고영중(高永中)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예로부터 성왕(聖王)이 어찌 한 사람이라도 죽이지 않고 천하를 다스리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한번 나쁜 기운이 모여 화가 국가에까지 미치면 형법(刑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에 옥사(獄事)의 실정이 아직도 반신반의한다고 하는데, 그 근본을 따져보면 요컨대 대역(大逆)의 죄과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어째서입니까? 수색하여 체포하라는 칙령(勅令)이 있자 기미를 알아차리고 도망쳐 버리고 잡히지 않았으니 그 마음에 죄가 있고 임금을 무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른바 청년애국회(靑年愛國會)의 흉서(凶書)가 수도와 민간에 일시에 우편으로 전해져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켜서 역모(逆謀)의 자취를 덮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안경수(安駉壽)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필시 안경수의 패거리들이 한 짓일 것입니다.
폐하께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35년 동안 억조 백성들이 받들기를 원하고 있는데, 아! 저 흉도(凶徒)가 감히 우리 황태자(皇太子)와 우리 황국 신민(臣民)들이 차마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말을 하니, 이것은 우리 폐하에게 불충(不忠)한 것입니다. 우리 폐하께는 충성하지 않으면서 우리 황태자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흉악한 계획은 속셈이 훤히 보이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라 형적이 이미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현재 갇혀 있는 죄수 중에 반드시 공모한 자가 있을 것이며, 혹은 실정을 아는 자도 있을 것이고, 혹은 무고하게 끌어들인 자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크게 수색을 벌여 색출하고 끝까지 신문해서 사실을 캐낸다면 역적의 무리들을 전멸시킬 수 있으며, 밖에서 틈을 엿보는 자는 다시는 희망이 없어져 황실(皇室)의 기업(基業)이 태산반석처럼 안정될 것입니다.
그런데 법관의 직책에 있는 자가 그럭저럭 시간만 보내면서 사소한 일인 양 여기고 적발(摘發)하는 데 귀신같지 못하고 도리어 비호해 주기에 겨를이 없는 듯하니, 이것은 역적을 두려워하고 폐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며, 자신을 사랑하면서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애통하지 않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국가의 기강(紀綱)이 이처럼 서지 못하고 전형(典刑)이 이처럼 시행되지 않는다면 난신적자(亂臣賊子)가 거리낌이 없어서 반드시 계속 이어져 일어날 것입니다. 신은 물론 이 말이 직책에서 벗어난 것인 줄을 알지만, 국가를 위하여 한 마디 말을 하고서 죽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유념하고 밝게 살펴서 특별히 충직한 신하를 선발하여 형법의 권한을 주어 엄히 살피고 끝까지 다스림으로써 난의 싹을 끊어 국가를 편안히 한다면 종묘사직에 더없이 다행일 것이며 신 등에게도 더없는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옥사의 체모는 신중을 기해야 하므로 잠깐 동안에 다 살필 수 없다. 일에 앞서 다른 사람을 논하는 것은 너무나 근거가 없다."
하였다.

 

7월 23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에게 칙유(勅諭)하기를,
"경이 비록 물러나 시골집에 있지만 백성과 나라에 대해서 늘 잊어버리지 않고 있을 것이다. 짐은 경의 한결같은 충성심과 사랑하는 마음이 벼슬에 나오든 물러가든 간에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간 직임을 맡겨도 번번이 다시 사양하고 갔던 것이 경이 늙어서 일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또한 경의 마음속에 고충이 있어 그렇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오늘날의 황급한 형편은 지난날보다 더하지만 위급한 국면을 안정 국면으로 전환할 기회도 역시 오늘날에 달려있다. 이에 다시 경에게 이 직임을 제수하는 것이니, 짐이 경에게 기대하는 바에 대해서 경은 마음속으로 환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어찌 많은 말을 하겠는가? 경은 즉시 나와서 짐이 옆자리를 비워 놓고 기다리는 마음에 부응하라."
하였다.

 

참령(參領) 김승규(金昇圭)를 부령(副領)에 임용하여 친위(親衛) 제1연대장(聯隊長)에 보임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병직(趙秉稷)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전 정자(前正字) 고영중(高永中)의 상소를 보니, 그 상소 가운데에는 신을 모함하는 구절이 끝이 없었습니다. 직무를 망친 것이 현저히 드러나고 악명(惡名)이 마구 가해지고 있으니, 이는 창랑(滄浪)의 물결처럼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러나 도망친 자는 붙잡지 못했고 잡아온 자는 신문을 다 끝내지 못하였는데, 저 고영중이 어떻게 옥중의 전말(顚末)을 알고서 멋대로 가로막아 두둔하였다는 등의 말을 꺼낼 수 있습니까? 이것은 그 의도가 단지 신을 배척하려는 것뿐입니다. 신이 만약 사임하고 떠나지 않는다면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반드시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신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의 직책을 빨리 체차(遞差)하여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도로 제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에 벼슬하던 사람이 망령되게 하는 말을 무슨 따질 것이 있어서 마침내 인혐(引嫌)하는 상소를 올리는가? 돌아보건대, 현재 옥사에 대한 조사가 한창이니, 경이 절대로 사적인 말을 할 때가 아니다. 경은 다시 말을 꺼내지 말고 즉시 사무를 보라."
하였다.

 

7월 24일 양력

종1품(從一品) 이익순(李益淳), 참장(參將) 백성기(白性基)를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從二品) 윤창근(尹昌根)을 중추원 1등의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7월 25일 양력

내부령(內部令) 제14호, 〈지방 관리 치적 반고 규정〔地方官治績頒考規程〕〉을 반포하였다.

 

7월 27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에게 재차 칙유(勅諭)하기를,
"이번에 특별히 임명한 것은 진실로 기어코 경을 어쩔 수 없이 나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미 이전의 칙유에서 다 말하였으니, 마땅히 헤아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부주(附奏)한 글을 보니, 짐이 경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전부 상반된다. 경이 짐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경은 원로 대신으로 시골집의 한가로운 중에서 몸을 보양해야 하지만, 조야(朝野)의 기대가 마른 벼싹이 단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정도가 아니니, 어찌 한갓 짐 한 사람이 밤낮으로 경을 목마르게 기다릴 뿐이겠는가? 현재 나라의 안위(安危)와 휴척(休戚)이 경의 출처에 달려 있다. 만약 편안히 팔짱을 끼고 방관만 하는 것은 경이 차마 할 일이 아니며 짐이 기대하는 바도 아니다. 경의 병은 늘그막에 으레 오는 증세이지만 애당초 경에게 분주한 일을 책임 지우려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경은 합문(閤門)에 누워 있으면서 조정을 진정시키면 되는 것이니, 다시는 사양하지 말고 즉시 올라오라."
하였다.

 

칙령(勅令) 제28호, 〈성진군의 위치와 관할 구역 획정 건〔城津郡位置管轄區域劃定件〕〉과 칙령 제29호, 〈철도사를 철도국으로 개칭하는 관제 개정 건〔鐵道司改稱鑯道局官制改正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철도국(鐵道局)에는 칙임관인 감독(監督) 1명, 칙임관 혹은 주임관인 국장(局長) 1명, 주임관인 기사(技師) 2명, 판임관인 주사 2명, 기수(技手) 5명이다.】


【원본】 41책 37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9면
【분류】사법-법제(法制)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교통-육운(陸運)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종2품(從二品) 민형식(閔亨植)을 회계원 경(會計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군부 대신(軍部大臣) 심상훈(沈相薰)이 특별히 청의(請議)한 것으로 인하여 각 지방에서 잡은 도적은 해당 지방 재판소(裁判所)에서 처리하는 문제, 탁지부(度支部)에서 청의한 이미 교체된 각도(各道) 관찰사(觀察使), 각군(各郡)의 군수(郡守), 각 군 아전(衙前)들이 공전(公錢)을 나이(挪移)한 데 대해 사핵(査覈)하는 문제, 외부(外部)에서 청의한 일본에 몰래 간 우리나라 사람들을 불러서 돌아오게 하는 문제를 회의를 거쳐서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또 ‘탁지부에서 청의한 것으로 인하여 정식 화폐를 주조하는 문제에 관해 의정부에서 회의를 거친 결과 금(金)으로 원화(元貨)를 만들고 은(銀)으로 보조 화폐를 만드는 문제에 대해서는 표제(標題)가 8이고, 은이나 동(銅)을 보조로 하고 금을 기본으로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표제가 7이니, 삼가 성상께서 재결하시기 기다립니다.’라고 아뢰니, 제칙을 내리기를,
"표제가 많은 쪽으로 시행하라."
하였다.

 

7월 28일 양력

종2품(從二品) 민영찬(閔泳瓚)을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7월 29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누차 비답을 내려 칙유(飭諭)하였는데, 줄곧 글 올리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은 나라의 체용에 손상을 주는 것이고 신하의 분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는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병직(趙秉稷)은 우선 본관(本官)을 면직(免職)하라."
하였다.

 

부의장(副議長) 신기선(申箕善)을 법부 대신(法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特進官) 박기양(朴箕陽)을 태의원 경(太醫院卿)에,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오익영(吳益泳)을 비서원 경(祕書院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강찬(姜𧄽)을 봉상사 제조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7월 30일 양력

법부 대신(法部大臣) 신기선(申箕善)에게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과 고등재판소 재판장(高等裁判所裁判長)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이도재(李道宰)에게 외부 대신(外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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