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43권, 고종40년 1903년 5월

싸라리리 2025. 2. 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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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양력

태의원 도제조 윤용선(尹容善) 이하를 소견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영친왕의 제절이 계속 태평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리 부위와 발바닥에 아직 딱지가 다 떨어지지 않은 곳이 있다."
하자, 윤용선이 아뢰기를,
"그것은 으레 있는 증세입니다. 딱지가 차례로 떨어지는 것은 모두 길한 징조입니다. 두후를 앓기 전에는 늘 걱정했는데 이제부터는 복과 수(壽)를 오래오래 이어갈 것입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심정은 상하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짐의 생각도 그러하다. 모든 법도에 과연 숙성하여 짐이 한 번 훈계한 일과 타이른 말을 항상 가슴속에 새겨서 잊지 않고 성실하게 힘써 실천한다. 심지어 노는 일도 언제나 책과 붓 같은 것을 가지고 논다."
하자, 윤용선이 말하기를,
"영명한 자질에 이렇듯 호학(好學)의 성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우러러 칭송해 마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소에 각 전궁(殿宮)에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던 일을 이번 두후를 앓을 때에도 하루도 거르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 역시 매우 가상하고 기쁜 일이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지금 이런 어린 나이에도 이렇듯 정성스럽고 독실하니 비록 노성한 때에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 효성과 우애의 정성이 고금에 탁월하여 대궐 안에 화기가 차고 넘쳐서 칭송이 밖에도 널리 퍼졌으니 이는 참으로 나라의 경사스러운 복입니다."
하였다.

 

5월 5일 양력

장례원(掌禮院) 김세기(金世基)가 아뢰기를,
"영회원 참봉(永懷園參奉) 유상우(柳相佑)의 보고를 접하니, ‘오늘 신시(申時)쯤에 원(園)에 화변이 있었는데 섬돌 위로부터 원 위로 불이 번져서 두세 자나 탔으므로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막중한 원에 이런 천만 뜻밖의 변이 생긴 것은 극히 두려운 일이니 위안제(慰安祭)는 날을 받지 않고 설행하며, 보수하는 절차는 의정부(議政府) 이하가 나가서 봉심(奉審)한 뒤 품처하겠습니다. 당해 양 재관(齋官)이 함부로 재실(齋室)을 비운 죄와 평소에 꼼꼼하게 살피지 않은 죄는 면하기 어려우니, 우선 본관(本官)을 면직시키고 법부(法部)로 하여금 엄하게 처리하게 하며, 당일 입번(入番)한 원역(員役)은 본군(本郡)에서 잡아 가두고 각별히 조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되, 원역배들도 법부(法部)에서 실화(失火)의 원인을 각별히 엄하게 조사하여 법에 의거하여 무겁게 처벌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 영회원(永懷園)의 화변으로 위에서 응당 3일 동안 변복하고 정전을 피하고 감선과 철악하는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절차를 전례대로 마련하여 들이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5월 6일 양력

봉심(奉審)한 대신 이하를 소견하였다. 【의정(議政) 이근명(李根命), 학부 대신(學部大臣) 민영소(閔泳韶),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민종묵(閔種默), 궁내부 대신 서리(宮內府大臣署理) 윤정구(尹定求),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세기(金世基)이다.】 영회원(永懷園)을 봉심한 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막중한 원(園)에 실화의 변고가 있었으니 극히 놀랍고 두렵다. 봉심한 상황에 대해 읽어보기는 하였다만 목격한 것이 어떠한지 상세히 말하라."
하니, 이근명이 아뢰기를,
"신 등이 달려가서 봉심하니 섬돌 위부터 원(園) 위로 불이 번졌는데 수 척 가량이 불에 탔습니다. 그 원인을 따져 물으니 당일 원의 관리가 재실(齋室)을 비웠는데, 수복(守僕)들이 원 위에 불빛이 있는 것을 바라보고 황급히 사람을 불러 모아 바로 불을 껐다고 합니다. 입번한 수복과 원군(園軍)들을 엄하게 조사하여 사실을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되며, 원관이 함부로 재실을 비워서 이런 천만 뜻밖의 변고가 생겼으니 그 죄상을 끝까지 밝혀 내야하며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실화에는 반드시 증거를 찾을 만한 흔적이 있을 것이다. 철저히 살펴 근본 원인을 밝혀 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김세기가 아뢰기를,
"개성부(開城府) 두문동(杜門洞)에 어필비각을 중건한 것은 우리 성상께서 전 왕조의 충현(忠賢)을 생각하는 지극한 뜻이니 만만 찬송할 일입니다. 고도(故都)의 유민이 황은(皇恩)을 받아 감격하고 흥기하는 여정(輿情)을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영묘(英廟) 때에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낸 일이 있는데 제단의 터가 아직도 있습니다. 이번에 또 일신하여 수축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조(聖祖)의 제사는 매우 성대한 덕스러운 일이다. 응당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양로연(養老宴)과 외연(外宴)은 음력 7월 18일로, 내연(內宴)은 같은 달 23일로 길일(吉日)을 택하여 행하라고 명하였다. 장례원(掌禮院)에서 주청(奏請)하여 아뢰었기 때문이다.

 

광제원장(廣濟院長) 강홍대(康洪大)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7일 양력

육군 참장(陸軍參將) 이근택(李根澤)·이봉의(李鳳儀)를 육군 부장(陸軍副將)에, 육군 부령(陸軍副領) 구영조(具永祖)를 육군 참장에 임용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세기(金世基)가 아뢰기를,
"영회원(永懷園)의 화변(火變) 때문에 폐하께서 변복(變服)하고 정전(正殿)을 피하고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한 때로부터 이미 3일이 지났으니, 내일부터는 정전에 다시 거처하시고 길복(吉服)을 입으며 복선(復膳)과 복악(復樂)하는 절차를 알려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 9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서울로 불러들인 향대(鄕隊)를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니, 주둔하는 동안의 봉급과 경비를 서울 시위대(侍衛隊)의 규례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원수부 검사국 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 이근택(李根澤)을 군부 대신(軍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기록국 총장(記錄局總長) 주석면(朱錫冕)을 검사국 총장에 임용하였다.

 

5월 10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번 음력 4월 17일은 바로 수릉(綏陵)의 기신제(忌辰祭)이다. 망곡례(望哭禮)는 비록 거행할 수 없겠지만 향(香)과 축문(祝文)을 편전(便殿)에서 친히 전하므로 추모하는 정성을 펴려고 하니, 헌관(獻官)과 여러 집사(執事)를 각별히 선발하여 차출하라."
하였다.

 

육군 법원장(陸軍法院長) 백성기(白性基)를 원수부 기록국 총장(元帥府記錄局總長)에, 육군 참장(陸軍參將) 구영조(具永祖)를 육군 법원장(陸軍法院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12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수릉(綏陵)의 제사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육군 보병 부령(陸軍步兵副領) 양성환(梁性煥)을 시위(侍衛) 제1연대장(第一聯隊長)에 보임하였다.

 

5월 13일 양력

원수부 회계국 총장(元帥府會計局總長) 이봉의(李鳳儀)를 군부 대신(軍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경위원 총관(警衛院總管) 이근택(李根澤)을 원수부 회계국 총장(元帥府會計局總長)에 임용하였다.

 

5월 14일 양력

함녕전에 나아가 황태자가 시좌(侍坐)한 상태에서 독일국 판리공사(辦理公使) 살데른〔謝爾典〕  【쌀대른】 과 이탈리아국 판리공사(辦理公使) 모나코〔毛樂高 : Attilio Monaco〕  【모나】 , 프랑스 총영사(總領事)  【퐁네】 를 접견하였다. 독일, 이탈리아 두 공사가 국서(國書)를 봉정하였기 때문이다.

 

5월 15일 양력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일본국 공사(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를 접견하였다.

 

의정(議政) 이근명(李根命)이 상소하여 재상직을 사임시켜 줄 것을 청한 데 대하여,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주었다.

 

정1품 이근명(李根命),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홍승목(洪承穆)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에 서임하였는데, 이근명은 1등에, 홍승목은 4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 조병승(趙秉承)을 봉상사 제조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5월 18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임시 혼성여단(混成旅團)을 해산하고 수도에 올라와 주둔한 각대(各隊)는 도로 내려 보내게 하라."
하였다.

 

특진관        이근명(李根命)을 태의원 도제조에 임용하고,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용직(李容稙)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1등에 서임하였다. 충청북도 관찰사(忠淸北道觀察使)        조종필(趙鍾弼)을 황해도 관찰사에 임용하고, 원수부 군무국 총장(元帥府軍務局總長) 심상훈(沈相薰)을 충청북도 관찰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찬정(贊政) 성기운(成岐運)에게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의 사무를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5월 19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우리 영조(英祖) 때에 두문동(杜門洞) 72현의 절의를 기려서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낸 일이 있는데, 이번에 어필 비각을 다시 중건하게 되니 더욱 감회가 새롭다. 지방관에게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세기(金世基)를 태의원 경(太醫院卿)에, 특진관(特進官) 김사철(金思轍)을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23일 양력

서울에 올라와 주둔했던 진위(鎭衛) 각대(各隊)들을 도로 내려 보낼 때에 위관(尉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종2품(從二品) 곽치년(郭致秊)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25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윤용선(尹容善)을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에게 칙유하기를,
"경이 푹 쉬면서 몸조리를 한 지도 이미 해가 바뀌고 달수를 계산해 보아도 꼭 반년이 되는데 밤낮으로 경을 생각하면서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지난번에 경에게 병환이 있었던 것은 비록 늘그막에 으레 생기는 증세이지만 속으로 근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근래 몇 달 동안 상약(嘗藥 : 태의원)의 직임을 주선하여 연석에서 여러 번 접견하면서. 경의 기력과 정밀한 식견을 보니 경이 집에 있던 때에 들려 오던 소문보다 낫고 또 지난해에 비하더라도 조금도 못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짐이 속으로 가만히 기뻐하면서 다시 제수하는 이번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지금 백성과 나라의 위태로운 형편이 날이 갈수록 더욱 극심해지고 있으니, 이것은 경이 밤늦도록 잠들지 못한 채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걱정하고 탄식하던 일이다. 모름지기 빨리 국가의 원로인 노성한 경이 뜬소문을 진정시키고 어려운 시국을 널리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짐이 경에게 이처럼 간절하고 시급하게 기대하고 있으니 경도 의당 송구하게 여기고 떨쳐 일어나야 할 것이다. 특별한 은전을 직접 내려주는 일도 하룻밤 밖에 남지 않았는데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일을 경이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경은 즉일로 조정에 나와서 자리를 비워 놓고 간절히 기다리는 짐의 마음에 부응하라."
하였다.

 

5월 26일 양력

의정부 의정 윤용선에게 재차 칙유하기를,
"짐이 이미 경을 기어이 불러내려는 뜻으로 유시하였고 또한 절대로 머뭇거리며 물러나 사양할 수 없는 의리까지 있으므로 경이 선뜻 명에 응하여 혹시 홀로 정무에 수고하는 짐의 노고를 덜어 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보내 온 글을 보니 슬프게도 기대했던 바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예우하고 공경해야 할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어찌 억지로 권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지고 권할 수 있겠는가?
경의 요즘 상황으로 말하자면 짐이 친히 접견 것이 서너 번에 불과하니 합(閤)에 누워서 정사의 도를 논해도 충분하다. 그러니 경의 말은 참으로 만만부당한 말이다. 그런데도 고집하는 것을 요체로 삼아 몸을 받들어 아주 벼슬에서 물러나려고만 하니 결코 평소에 경에게서 기대하던 바가 아니다. 경의 많은 나이와 숙덕(宿德)을 중외(中外)가 서로 바라보면서 두루 다스리고 바로잡고 구제하여 어렵고 위태로운 시국을 타개해 주기를 마치 한창 앓고 있는 사람이 의사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한결같은 경의 충애(忠愛)로 의당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니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내일의 거조는 경에게만 영광이 될 뿐 아니라 나라의 성세(盛世)를 빛내는 일이기도 하다. 짐이 난간에 임하여 기다릴 것이니 경은 그리 알라."
하였다.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조동만(趙東萬)을 영회원 제조(永懷園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으며, 정2품(正二品) 이호익(李鎬翼)을 사직서 제조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5월 27일 양력

정3품 신대균(申大均)을 평양 감리(平壤監理)에 임용하고, 정3품 이태정(李台珽)을 창원 감리(昌原監理)에 임용하고, 정3품 고영철(高永喆)을 삼화 감리(三和監理)에 임용하고 모두 주임관(奏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수륜원 서무 국장(水輪院庶務局長) 오귀영(吳龜泳)을 동래 감리(東萊監理)에 임용하고, 정3품 하상기(河相驥)를 인천 감리(仁川監理)에 임용하고 모두 주임관 5등에 서임하였다.

 

5월 28일 양력

함녕전에 나아가서 의정부 의정 윤용선(尹容善)이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올린 표(表)를 받고서 의정(議政)에게 칙고(勅誥)를 주었다. 윤용선이 공손하게 받고 문후를 여쭈자 상이 이르기를,
"경은 나라의 주석(柱石) 같은 원로이고 나라의 시귀(蓍龜)로서 누구나 존귀하게 여기는 나이와 벼슬과 덕망의 세 가지를 갖추었으며 한결같은 충애(忠愛)가 진실하여 다른 마음이 없으니, 짐이 깊이 위임하며 조야가 중하게 의지하고 바라는 바이다. ‘하늘은 선한 사람을 도와 큰 복을 누리게 한다.’는 서쪽 누각(樓閣)의 제첩(題帖)대로 짐과 함께 장수를 누리니 이는 참으로 열성조에서도 보기 드문 성대한 일이다. 궤장을 받는 특전은 경에게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연석에 오른 것이 나라의 길조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폐하의 분부가 융숭하고 지극하니 신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부족한 자질과 허약한 체질을 가지고서 요행히 성세(聖世)를 만나 임금의 은택을 입어 상상(上相 : 영의정)의 지위에 이르렀고 나이도 고희(古稀)를 넘겼으니 이것은 다 신이 평소에 기대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작년에 몸소 영수각(靈壽閣)의 성대한 의식에 참석하였는데 또 궤장을 하사받는 특이한 은전을 입었습니다. 영광이 극도에 이르러 두려움이 생기고 계속해서 분수에 걸맞지 않는다는 부끄러움이 깊습니다. 마침 사고가 생긴 데다 몸에 병까지 있어서 즉시 공경스럽게 받들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겨우 사은(謝恩)을 하니 하정(下情)에 어찌 송구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신은 노둔하고 식견도 없어서 전혀 보잘것없습니다. 비록 성은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려고 해도 사실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다만 변함없는 충정으로 밤낮 깊이 축원하는 것은 폐하께서 만수무강하시고 국가가 태평한 것뿐입니다.
지금 세상의 흥망을 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운수(運數)라고 하면서 모두 어쩔 수 없는 형편으로 돌려버립니다. 대체로 운수라는 것은 물론 하늘이 하는 일이지만 실은 임금이 하는 일에 관련되니 임금이 잘 다스리려고 생각하면 흥하고 어지럽힐 것을 생각하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명백한 고사(故事)를 가지고 논해 보겠습니다.
은(殷) 나라 고종(高宗) 시대에 은나라 왕실이 떨치지 못하였는데 고종이 학문에 전념하고 덕을 닦아 나라를 안정시키자 은 나라의 도가 흥하였고, 주(周) 나라 선왕(宣王) 시대에 주 나라 왕실이 거의 기울었는데 선왕이 망해가는 것을 일으키고 폐단을 바로잡고 문왕과 무왕의 정사를 수복하니 주 나라 왕실이 흥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누구나 중흥(中興)을 이룬 어진 임금이라고 칭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면 하늘에 어찌 정해진 운수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오직 임금의 마음이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지금 밝으신 임금이 위에 있고 천명(天命)도 새로우니 이는 참으로 폐하가 한번 치세(治世)를 이루실 시기입니다. 정사(政事)의 요점은 명분을 바로잡고 기강을 세우며, 상을 신중히 주고 죄를 반드시 처벌하며, 재용을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백성을 사랑하려면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하는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요령은 또한 세금을 줄이고 탐관오리를 징벌하여 군신상하가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의리를 바르게 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근본은 전적으로 임금의 마음이 바르게 되는 데 있습니다. 임금의 마음이 바로 서면 조정이 바르게 되고 조정이 바르면 군자가 나오고 소인이 물러나게 되어 온 나라가 바르지 않음이 없으며 천하가 태평하게 다스려져서 만민이 인수(仁壽)의 구역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로 요순(堯舜)의 복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평생 식견이 이런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감히 성상을 송축하는 기회에 이 한 마디 말씀을 올리니 성상께서는 깊이 유념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아뢴 말을 들어보니 지극히 간절하여 나를 걱정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충정을 더욱 깊이 알 수 있다. 약석(藥石)과 같은 이런 말을 가슴속에 새겨 두고 힘써 시행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윤용선이 이어서 의정의 직임을 면직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위로하며 간절히 권면하고 나서 친제시 한 수를 하사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은하수가 환히 비추듯 폐하의 글이 찬란히 빛나니 장차 대대로 영원한 가보로 전하겠습니다. 신은 무한한 영광과 감격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동궁이, 짐이 기사(耆社)에 들어갈 때에 세 상신(相臣)이 동시에 같이 들어간 것은 보기 드문 경사라고 하여 지금 앞자리에서 직접 술을 따라 경사스러운 마음을 표하려고 한다. 그리고 짐도 역시 직접 술을 따라서 권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어서 선온(宣醞)을 가져오라 명하고, 친히 술을 따라서 비서원 경에게 전하게 하였다. 황태자도 술을 따라 친히 전하고 이어서 예제시(睿製詩)를 하사하였다. 윤용선이 술을 마시고 안주를 맛보고 나서 아뢰기를,
"성상의 총애와 보살핌이 더욱 융숭하니 하정(下情)에 너무도 황송하고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대궐의 진귀한 반찬과 옥 같은 술을 신이 삼가 집으로 가지고 나가 은혜와 영광을 기리고 자랑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다. 은병(銀甁)과 은술잔은 경의 집에 두라."
하자, 윤용선이 아뢰기를,
"은병과 은술잔을 하사해 주시니 은혜가 또한 지극합니다. 삼가 함에 보관해 두고 대대로 전할 가보로 삼는다면 영광과 감격이 더욱 지극할 것입니다."
하였다.

 

5월 29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이제 음력 5월 6일은 바로 수릉(綏陵)의 기신이다. 이번에도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니, 향과 축문을 편전(便殿)에서 직접 전함으로써 간절한 정성을 조금이나마 풀어야 하겠다. 헌관과 제집사(諸執事)를 각별히 택하여 차임하라."
하였다.

 

5월 31일 양력

함녕전에 나아가 수릉(綏陵)의 기신제에 쓸 향과 축문을 직접 전하고 이어서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지냈다. 황태자도 따라가서 예를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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