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43권, 고종40년 1903년 7월

싸라리리 2025. 2. 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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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양력

【음력 계묘년(癸卯年) 윤(閏) 5월 7일】 조령을 내리기를, "이처럼 흉년이 든 뒤끝에 보리까지 또 이렇게 익지 않았으니, 현재 부황이 난 참상을 보면 당장 화가 닥칠 지경으로 황급하기 짝이 없다. 불쌍한 백성들을 생각하면 비단옷과 쌀밥이 마음에 걸리고 잠자리에서도 뒤척거리면서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하니, 마치 내 몸이 아픈 듯이 가슴속에 오만 가지 시름이 서린다. 백성들이 한창 식량난에 부대껴 살아 나갈 길이 없는 형편인데 무뢰배들까지 걸핏하면 함부로 빼앗아 그에 따라 소요가 일어나고 안착할 수 없게 하니, 어떻게 편안히 살며 생을 즐길 수 있겠는가? 이 또한 좀도적에 대한 걱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서울에서도 거리낌 없이 날뛰고 있으니,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단속해야 할 책임을 지닌 사람들이 자기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방자해지고 해이해졌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경위 총관(警衛總管)과 경무사(警務使)를 우선 엄중하게 견책하여 그들로 하여금 대책을 각별히 세워 철저히 체포하여 10일 이내에 거리와 마을을 안정시키게 하되, 혹 그럭저럭 미루면서 철저히 금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모두 해당 형률을 시행하고 절대로 너그럽게 용서치 않을 것이다. 지방의 백성들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사정이 모두 민망하지만, 도적(盜賊)에 대한 우환은 삼남 지방이 더욱 심하다고 한다. 내부(內部)를 시켜 해당 관찰부(觀察府)에 시급히 통지하여 그들로 하여금 여러 군(郡)들에 신칙하게 해서 법을 만들어 기한 내에 어김없이 체포하되 각기 자기의 경내에서 처리한 성과를 평정하여 즉시 부(部)에 보고하게 해서 반드시 상벌과 출척(黜陟)을 시행하라. 천리 밖의 일이라 하더라도 다 알 수가 있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현상이 가장 많은 지방의 관찰사(觀察使)도 엄중한 형률로 다스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각기 두려운 마음으로 거행하여 후회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원본】 47책 43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88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재판(裁判) / 왕실-국왕(國王)
조령을 내리기를,
"이처럼 흉년이 든 뒤끝에 보리까지 또 이렇게 익지 않았으니, 현재 부황이 난 참상을 보면 당장 화가 닥칠 지경으로 황급하기 짝이 없다. 불쌍한 백성들을 생각하면 비단옷과 쌀밥이 마음에 걸리고 잠자리에서도 뒤척거리면서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하니, 마치 내 몸이 아픈 듯이 가슴속에 오만 가지 시름이 서린다. 백성들이 한창 식량난에 부대껴 살아 나갈 길이 없는 형편인데 무뢰배들까지 걸핏하면 함부로 빼앗아 그에 따라 소요가 일어나고 안착할 수 없게 하니, 어떻게 편안히 살며 생을 즐길 수 있겠는가? 이 또한 좀도적에 대한 걱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서울에서도 거리낌 없이 날뛰고 있으니,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단속해야 할 책임을 지닌 사람들이 자기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방자해지고 해이해졌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경위 총관(警衛總管)과 경무사(警務使)를 우선 엄중하게 견책하여 그들로 하여금 대책을 각별히 세워 철저히 체포하여 10일 이내에 거리와 마을을 안정시키게 하되, 혹 그럭저럭 미루면서 철저히 금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모두 해당 형률을 시행하고 절대로 너그럽게 용서치 않을 것이다.
지방의 백성들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사정이 모두 민망하지만, 도적(盜賊)에 대한 우환은 삼남 지방이 더욱 심하다고 한다. 내부(內部)를 시켜 해당 관찰부(觀察府)에 시급히 통지하여 그들로 하여금 여러 군(郡)들에 신칙하게 해서 법을 만들어 기한 내에 어김없이 체포하되 각기 자기의 경내에서 처리한 성과를 평정하여 즉시 부(部)에 보고하게 해서 반드시 상벌과 출척(黜陟)을 시행하라. 천리 밖의 일이라 하더라도 다 알 수가 있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현상이 가장 많은 지방의 관찰사(觀察使)도 엄중한 형률로 다스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각기 두려운 마음으로 거행하여 후회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민영찬(閔泳瓚)을 적십자회 위원(赤十字會委員)으로 임명하여 먼저 스위스에 가서 회의에 함께 참가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수부 기록국 총장(元帥府記錄局總長) 백성기(白性基)를 군무국 총장(軍務局總長)에, 참장(參將) 윤웅렬(尹雄烈)을 기록국 총장에 임용하였다.

 

내부대신 임시서리 의정부참정(內部大臣臨時署理議政府參政) 김규홍(金奎弘)이 아뢰기를,
"근래에 도적이 횡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제대로 금지하지 못한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니, 흉년으로 궁핍해진 백성들이 할 수 없이 하는 짓이라고만 핑계 댈 수 없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금지하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그들 역시 어찌 이렇게까지 전혀 거리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전날 각 진영(鎭營)과 토포사(討捕使)가 겸하여 관할하는 고을들 중에서 긴요한 곳을 선택하여 포교와 군졸을 두고 각 해당 군수(郡守)들로 하여금 옛날처럼 관할해서 전적으로 체포하도록 하였고, 각 해군(該郡)들에서도 형편을 보아 편리한 대로 염탐하여 금지시키기 위한 대책을 세워 기한 내에 엄격히 단속함으로써 기어이 도로에서 사단이 생기거나 항간에서 도적이 들었다는 경보가 없도록 하였습니다. 혹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지방관(地方官)에 대해서는 각 해당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내부(內部)에 급히 보고하게 하여 즉시 파면시키고 죄를 주게 하였는데, 시행해야 할 규식(規式)은 본부에서 참작 마련하여 시급히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3일 양력

칙령(勅令) 제10호, 〈지방 제도 중 인천(仁川), 동래(東萊), 덕원(德源), 경흥(慶興), 옥구(沃溝), 무안(務安), 창원(昌原), 평양(平壤), 삼화(三和), 길주(吉州)의 부윤(府尹)을 군수(郡守)로 개정하는 건〉, 제11호, 〈개항 시장 재판소(開港市場裁判所)를 설치한 가운데 성진항 재판소(城津港裁判所) 증치 건(增置件)〉, 제12호, 〈임시 박람회(臨時博覽會) 사무소 설치 건(設置件)〉을 모두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7월 5일 양력

한성부 재판소(漢城府裁判所) 검사 시보(檢事試補) 이광하(李匡夏)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정한조(鄭漢朝)가 아뢰기를,
"능(陵)이나 원(園)의 복호(復戶)와 결전(結錢)은 특별히 중한 것이므로 각 고을의 결전 가운데서 받는 대로 우선 납부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길 수 없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여러 해 전부터 내려오면서 모호하게 처리하여 연체시키는 버릇이 생겨 바쳐야 할 달은 물론 겨울과 봄이 지나도록 늦장을 부리면서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번 칙교(勅敎)를 내렸는데도 줄곧 시간만 보내며 본원(本院)의 독촉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으니, 사체로 헤아려 보건대 해괴하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게다가 현재 제반 지출이 모자라 여간 시급하지 않으니, 미납한 각 군수(郡守)는 법부로 하여금 잡아다 다스려 조속히 독촉해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더없이 중한 비용을 이렇게까지 체납하는 것은 너무도 놀랍고 탄식할 일이다. 이제부터 그 달을 넘기는 자가 있거든 즉시 법부(法部)를 시켜 잡아다 다스리고 독촉하여 받아들이는 것으로 뚜렷하게 정식을 삼으라."
하였다.

 

7월 7일 양력

종2품(從二品) 김사준(金思濬)을 법부 사리국장(法部司理局長)에 임용하고, 궁내부 참서관(宮內部參書官) 이근상(李根湘)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였다가 다시 외부 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학부(學部)에서 의학교(醫學校) 졸업 시험을 행하여 지성연(池成沇) 등 15명을 뽑았다.

 

7월 12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재차 상소하여 사임을 청하니,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시켜 주었다.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 윤용선(尹容善)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경무사서리 시종원경(警務使署理侍從院卿) 이유인(李裕寅)에게는 견책의 형벌을 시행하고, 경무 국장(警務局長) 김사묵(金思默)에게는 2개월 간 감봉(減俸)하는 형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황제(皇帝)가 수도 백성들의 식량난을 특별히 걱정한 것으로 인하여 내장원(內藏院) 창고의 쌀을 가게의 상인들에게 값을 낮추어 팔아 주었는데 간상(奸商) 모리배들이 쌀을 숨겨 두고 팔지 않아 항간의 여론이 물 끓듯 하였으므로, 경찰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성실하게 검찰하지 못한 과오를 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유인(李裕寅)과 김사묵(金思默)이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했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7월 14일 양력

정3품(正三品) 김성기(金聖基)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7월 15일 양력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와 함께 일본 공사(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 영국 공사, 프랑스 공사를 접견하였다.

 

7월 16일 양력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조병필(趙秉弼)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으며, 특진관(特進官) 남정철(南廷哲)을 홍문관 학사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7월 17일 양력

군부 대신(軍部大臣) 이봉의(李鳳儀)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기록국 총장(記錄局總長) 윤웅렬(尹雄烈)을 군부 대신(軍部大臣)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충청남도 관찰사(忠淸南道觀察使) 홍승헌(洪承憲)을 궁내부 특진관에, 비서원 경(祕書院卿) 윤용식(尹容植)을 전라북도 관찰사(全羅北道觀察使)에, 원수부 검사국 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 주석면(朱錫冕)을 충청남도 관찰사에, 종2품(從二品) 김종규를 경상북도 관찰사(慶尙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육군 법원장(陸軍法院長) 구영조(具永祖)를 원수부 기록국 총장(元帥府記錄局總長)에 임용하였다.

 

7월 18일 양력

군무국 총장(軍務局總長) 백성기(白性基)를 원수부 검사국 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에, 부장(副將) 이봉의(李鳳儀)를 원수부 군무국 총장에,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윤덕영(尹德榮)을 비서원 경(祕書院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으며, 특진관(特進官) 김만수(金晩秀)를 봉상사 제조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7월 19일 양력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벨기에국 영사(領事)를 접견하였다.

 

외부 협판(外部協辦) 이중하(李重夏)에게 대신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도록 명하였다.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 민영철(閔泳轍),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민형식(閔衡植),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김정근(金禎根)에게 견책하는 형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전최(殿最)의 기한이 지났는데도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추원 의관 김성기(金聖基)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아룁니다. 우리의 역대 임금들이 문(文)을 숭상하여 융성하게 나라를 다스리신 것을 폐하께서 계승하여 교화를 널리 펴서 풍속을 아름답게 만들었으니, 물론 무력을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에 병사를 징발하라는 조령(詔令)를 내리신 것이 어찌 문무(文武)를 병행하려는 장구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에서 대비가 없어서는 안 되니, 아! 훌륭하십니다. 폐하의 덕이 광대하게 운행하여 성스럽고 신묘하시며 문이 있으시고 무가 있으시니, 신은 너무도 흠모하고 송축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변방에 비적(匪賊)들이 날뛰어 백성들이 흩어지고 있는 만큼, 지금이야말로 분발하여 대책을 강구하고 견고하게 방비할 길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이어 삼가 생각하니, 몇 해 전에 평안북도의 뜻이 있는 인사들이 변방의 대비가 허술한 것을 우려하여 충의계(忠義契)를 만들고 무기를 다루는 법을 습득하여 뜻밖의 사변에 대처하도록 하였는데, 참으로 그 뜻이 지극하고도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적으로 만든 것이다 보니 자연 견제가 많아 훌륭한 의도를 다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옛것을 따르면 풍속이 절로 안정되어 일이 쉽사리 성취되며, 마음을 따라주면 기꺼이 쓰여 공이 반드시 곱절이 될 것입니다. 만일 조정에서 다시 이런 계를 확장시키고 단속하여 도(道)에서는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고 고을에서는 두령(頭領)을 두어 총괄하게 하되, 두령은 매달 재주를 시험하여 매년 연말에 우수한 사람을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그 중에서도 특히 우수한 사람을 원수부(元帥府)에 올리고, 원수부에서는 시관(試官)에게 아뢰어 영광스럽게 해 준다면 사람마다 절로 고무되어 집집마다 무예를 익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평안도의 사람들은 모두 병사가 될 것이고, 부모와 처자식, 묘지와 재산까지 다 이곳에 있으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 지킬 것이니, 차라리 적 앞에 나아가 함께 죽을지언정 차마 물러서서 저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손무(孫武)와 오기(吳起)의 병법(兵法)인들 어찌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습니까? 장차 천하에 대적할 상대가 없을 것이니, 이 어찌 방어하는 정도로만 끝나는 것이겠습니까? 나라에서는 비용을 조금도 들이지 않고서 몇 십만 명의 병사에 해당되는 군비를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조조(鼂操)가 변방을 수호하고 요새를 방비하는 데 대해 말하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그 지역에 늘 살고 있는 사람을 뽑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거기에 집과 땅까지 갖추어 주면 고을 사람들이 서로 가서 도와줄 것이다. 어찌하여 죽음을 피하지 않는가? 이는 친척을 온전하게 지키고 자기의 재산을 위해서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방을 지키기 위한 계책은 토병(土兵)과 둔전(屯田)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비용을 줄일 뿐만이 아니니, 이들은 지형에 익숙하고 형편을 잘 아는 데다가 의지할 데까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충의계도 그러한 것입니다. 제도를 개선하고 규정을 엄격히 세워 단속하고 교육하면 그래도 유사시에 충분히 동원하여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 역시 징병의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송(宋) 나라 신하 충세형(种世衡)이 청간성(靑澗城)을 지킬 때에 아전들과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하여 상벌을 시행하였는데, 그것을 가지고 부역을 지우고 속죄도 시켰을 뿐만 아니라, 은 술잔에 술을 따라 고무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이미 검증된 훌륭한 방책으로 오늘날 응당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신의 이 의견을 유사(有司)에게 내려 특별히 시행함으로써 미리 대비하여 변방의 방어를 견고하게 하여 문무(文武)를 병행한다면 백성과 나라가 모두 그 덕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정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7월 20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한규설(韓圭卨)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육군 참장(陸軍參將) 권중현(權重顯)을 육군 법원장(陸軍法院長)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농상공부령(農商工部令) 제41호, 〈임시 박람회(博覽會) 진열관(陳列館) 규정〉을 시행하였다.

 

7월 22일 양력

전 의관(前議官) 강홍대(康洪大)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아룁니다. 삼가 요즘의 시국(時局)을 보면 넘쳐나는 근심거리와 당장 들이닥치는 위험한 사태들을 일일이 진달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일 우려되고 분통스러운 것은 현재 외국인들이 저들의 강한 힘과 위세를 믿고 유린과 공갈을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사(電社)나 군함(軍艦)과 같은 문제는 한낱 상업(商業)에 관계되는 것에 불과한데도 그것을 확대시켜 국제적인 분쟁거리로 만들어 못하는 협박과 모욕이 없으니, 온 나라의 신민들치고 누군들 매우 원통하고 분발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그래도 소소한 갈등일 따름이니, 자연 타당하게 처리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훗날의 끝없는 우환 거리는 바로 서북쪽 연변의 삼림(森林) 문제입니다.
대체로 러시아 사람들이 만주(滿洲)를 침략한 것이 물론 하루아침의 일은 아니지만, 그들이 권력을 수립하고 세력을 늘리는 행위가 갈수록 불어나고 있는데, 특히 밀접한 관계를 지닌 곳은 바로 우리나라의 서북쪽 연변 지대입니다. 서북쪽 연변 지대는 부여(扶餘), 예맥(濊貊), 발해(渤海), 거란(契丹), 말갈(靺鞨), 여진(女眞), 몽고(蒙古), 합단(哈丹) 야인(野人)들이 대대로 변경의 우환 거리를 만들면서 우리의 강토를 침략하지 않은 시대가 없었습니다.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북쪽으로는 육진(六鎭)을 개척하고 서쪽으로는 사군(四郡)을 설치하여 긴 강을 천연적인 해자(垓字)로 만들어 남북의 한계를 갈라놓으시고 진(鎭)과 보(堡)를 설치하여 요해처를 지키는 데에 무엇이든지 다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으셨습니다. 청(淸) 나라의 세조(世祖)가 성경(盛京)에서 일어난 후부터는 국경을 정해놓고 각기 서로 지켰으므로 변방이 편안하고 진과 보들이 조용하여 200여 년 동안이나 변방이 무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삼엄하던 변방의 방비가 조금씩 해이해져 진과 보를 버려두었으니, 실로 변방의 방어가 극도로 허술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러시아 사람들이 수만 명의 어마어마한 무력을 오소리(烏蘇哩), 혼춘(琿春), 봉황성(鳳凰城), 안동현(安東縣) 등지에다 주둔시켰는데, 대체로 이 지역들은 우리나라와 한줄기 강을 사이에 둔 지대로서 병사를 주둔시켜야 할 필요성이 긴요하지 않은데도 러시아 사람들이 기어이 어마어마한 병사를 주둔시킨 것은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산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대고 수많은 러시아 군사들이 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용포(龍浦)에 와서 주둔하였으니, 두만강(豆滿江), 압록강 전 유역의 연변 수천 리 땅에 있는 삼림도 다 보호하겠다고 하면서 마찬가지로 와서 주둔하는 우환이 또 결코 없으리라고 장담하기가 어렵습니다. 설사 러시아 군사가 와서 주둔하는 일이 결코 없다고 하더라도 변방 고을을 노략질하면서 여러 해 동안 우환이 되었던 저 향마적(嚮馬賊)들이 만주를 본거지로 삼고 있는 이상, 이후에 만일 만주, 요해(遼海) 사이에서 갑자기 사변이 생겨 전란이 계속된다면 저 탐욕스러운 비적 무리들이 계속 침입하게 될 것은 형편상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날에는 동여진(東女眞)이나 합단이 일으켰던 재앙과 같은 것을 또 면하기 어려울 것이고, 성조(聖祖)께서 일어나 우리나라의 터를 닦은 발상지가 틀림없이 노략을 당하고 시끄러워지는 등의 해악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러시아가 또 분명 보호한다는 구실을 대고 마치 의화단(義和團) 사건 때에 점령한 것처럼 군사를 이동시켜 와서 주둔할 것이니, 이것을 또한 어떻게 막아내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사전에 만전을 기하고 미연에 방지해야 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신이 비록 우매하고 보잘것없지만 이러한 우려 때문에 화가 치밀어 병이 되었는데, 가끔 한두 명의 관리와 대책을 강구하면서 몸을 다 바쳐 성상의 은혜에 만 분의 일이나마 보답하기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생각하니, 신은 본래 북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어서 변경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신이 본 것과 들은 것으로 아뢰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살펴주소서.
대체로 나라에서 미리 방비 대책을 세워 변경을 엄하게 지킴에 있어서 서쪽과 북쪽의 두 변경에 대해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변 지역에다 진(鎭)을 설치하고 요해지에다 성채(城砦)를 쌓아 마치 상산(常山)에 산다는 솔연(率然)이라는 뱀처럼 전후좌우로 서로 바라보고 호응할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1리(里) 마다 하나의 보(堡)를 두고 보에는 2개의 포(砲)를 두었으며 10리 마다 하나의 성채를 두고 성채에는 10개의 포를 두었는데, 보에는 보장(保長)이 있고 성채에는 성채장(城砦長)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형의 형편에 따라 50리 혹은 100리에 하나의 진을 두고 진에는 진장(鎭長)이 있어 보장과 성채장을 통솔하였습니다. 적이 쳐들어올 경우 나발을 불어 신호하게 되면 각보의 군사들과 부근의 백성들이 일시에 다 일어나 서로 구원하면서 함께 막았기 때문에 적들이 감히 침략해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변경을 넘어가는 우리나라의 백성이 있는 경우에는 보장이 기어이 포를 쏘아 죽인 다음 성채장에게 다 보고하고 성채장이 진장에게 보고하면 이것을 다시 상부에 보고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변경을 넘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변경을 지키는 대체적인 방략입니다.
그러나 진과 보를 일단 버려 둔 뒤로는 적이 쳐들어와도 막아낼 도리가 없거니와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가도 제재할 수단이 없습니다. 비록 북청(北靑)과 종성(鍾城) 등의 지방에 진위대(鎭衛隊)의 군사가 있기는 하지만 다 변경으로부터 4, 500리 혹은 1천여 리나 떨어진 먼 곳에 있으므로 아무리 쉬지 않고 달려간다 하여도 제때에 닿을 수가 없으니, 실로 변경을 지키기 위한 계책에는 아무런 도움도 없습니다. 오늘날의 계책은 진과 보를 두었던 옛 제도를 다시 복구하는 데 있습니다. 서쪽과 북쪽 연변의 여러 군(郡)에서 옛 터를 답사하여 보와 성채, 진과 보루를 설치하고 사냥을 업으로 하는 산포수를 모집하여 파수를 서는 부대를 편성하되, 그것을 운영하기 위한 방략은 일체 옛 제도에 의거하면서도 오늘날의 형편을 참작하여 마련해서 각 해군(該郡)들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강 연안의 전역에 있는 가장 중요한 곳에다 별도로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해서 싸워 지킬 대비를 세운다면 비적 무리나 적군들이 쉽게 침범하고 싶어도 형편상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대개 서북쪽 사람들은 강하다고들 하는데, 산포수들도 다 총과 창, 활과 말에 익숙하고 모두 날래고 건장하고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정교한 서양 총과 왜포(倭砲)를 가지고 몇 년 간 다루어 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당백(一當百)의 몫을 할 것이니, 실로 세상에 더없이 강한 군사가 될 것입니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지형과 도로 사정, 비적을 막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근력과 담도 튼튼하기 때문에 결코 동남쪽 여러 지역의 군사들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군량(軍糧)을 조달하기 위한 방도로서는 둔전(屯田)보다 더 편리한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육진의 여러 군들은 토질이 매우 비옥하고 땅이 넓은데, 추위가 일찍 닥쳐 벼농사에는 맞지 않지만 기장, 조, 콩, 보리, 수수와 같은 잡곡은 어느 것이나 다 재배하기에 적합합니다. 모두 보의 군사로 하여금 둔전을 개간하게 하고 소를 주어 경작하도록 하여 농사를 널리 짓게 하는 동시에 목장도 설치하여 봄과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가을과 겨울에는 사냥을 해서 입고 먹는데 보탠다면, 몇 년 되지 않아서 식량도 풍부하고 군사도 넉넉해져 10만의 군사를 수고하지 않고도 키울 수 있을 것이고, 서북쪽 두 변경도 편안해져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변경을 지키는 훌륭한 계책일 뿐 아니라 적을 막는 좋은 방도이기도 합니다. 속히 채용해서 시행함으로써 북쪽 변경에 대한 근심을 덜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을 설치할 때에 만약 적임자를 임명하지 못하여 올바로 조처하지 못하게 되면 도리어 소란스러운 폐단만 많아질 것이니, 이것 또한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이 이에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우러러 성상께 자세하게 아뢰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유념하고 살피시어 속히 받아들이신다면 나라에도 매우 다행일 것이고 신민들에게도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정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7월 26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윤용선(尹容善), 이근명(李根命)과 영친왕부 총판(英親王府總辦) 윤택영(尹澤榮) 등을 소견하였다. 영친왕(英親王)이 천연두(天然痘)에 걸렸다가 나은 지 100일이 된 것과 관련하여 문안을 드렸기 때문이었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영친왕이 천연두에 걸렸다가 나은 지 지금 100일이 되었는데 전보다 더욱 건강해졌으니, 폐하(陛下)의 기쁨이 예전에 비해 곱절이나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들의 구구한 마음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봄에 몸이 회복되었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지금 100일이 되는데, 조섭을 잘하여 정유년(1897) 백일 때보다 기특하고 다행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못하지 않다."
하였다. 그리고 이어 여러 신하들에게 영친왕을 우러러 바라보라고 명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이처럼 무더위가 닥친 때에는 실로 옥 안의 죄수들을 걱정해 주어야 하거니와 오늘은 여느 날과 다른 날이기도 하다. 법부(法部)와 원수부 검사국(元帥府檢査局)의 죄질이 가벼운 죄수들과 70살 이상 15살 이하의 죄수들을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7월 28일 양력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김성근(金聲根)이 아뢰기를,
"상납(上納)을 체납시킨 일을 가지고 본부(本府)에서 논하여 아뢴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또 삼가 특별 판부(判付)를 받아 보니 명령이 엄격하고도 중하여 명령을 엄하게 독촉하기를 매우 극진하게 하지 않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지방의 군(郡)들에서는 으레 있는 일로 여기면서 아무 염치도 없이 잇속을 채우기만 일삼으며, 마감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해가 다가도록 질질 끌고 있어 마치 무법천지와 같습니다. 그 소행을 따져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대궐의 저축이 거덜나고 나라의 경비가 바닥나고 있는 때인데, 만일 별도로 엄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정식 공납물(貢納物)들을 다 찾아내어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고 법도 시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묵은 각 해의 미납물들에 대해서는 이미 음력 7월 10일까지로 기한을 정하여 공문을 띄웠으니, 지금은 우선 참작하여 용서해 주되 그 기한이 된 다음에 다시 아뢸 것입니다. 임인년(1902) 분은 이미 기한이 지난 지 오래 되었으니, 농간을 부리도록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각도(各道)의 각군 가운데 가장 체납이 심한 마전 군수(麻田郡守) 김연승(金然昇), 용강 군수(龍岡郡守) 최시영(崔時榮), 석성 군수(石城郡守) 김용범(金容範), 군위 군수(君威郡守) 장한기(張漢基), 서흥 군수(瑞興郡守) 유석응(柳錫膺), 교하 군수(交河郡守) 권재중(權在重)에 대해서는 본관(本官)을 면직하고 법부(法部)로 하여금 잡아다가 독촉하여 받아 내고 법률에 따라 엄하게 징계하게 하고, 그 다음가는 각 군수들도 순차로 아뢰어 파직시킴으로써 묵은 것들을 깨끗이 청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9일 양력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남정철(南廷哲)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종1품(從一品) 장석룡(張錫龍)을 홍문관 학사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從二品) 이병성(李秉性)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찬정 군부대신(議政府贊政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면직(免職)을 청하는 마당에 군무(軍務)에 대해 함부로 논해서는 안 되지만, 새로 구비한 군함(軍艦) 양무호(揚武號)에 대해서 말씀드린다면 이미 구매한 것으로 다시 계약을 파기하기가 어려운 만큼 그냥 바다에 매어두는 것은 비용도 갈수록 많이 들고 배도 갈수록 파손이 될 것이니 매우 답답합니다. 이에 대해 조처할 방법을 서둘러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은 천하 각국이 서로 관계를 가지며 경쟁하고 있으므로 해군(海軍)과 전함(戰艦)이 제압을 하고 방어를 하는 좋은 계책이라고 여기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당한 우리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삼면이 바다인데도 한 명의 해군과 한 척의 군함도 없어 오랫동안 이웃 나라에게 한심스럽다는 빈축을 사고 있으니 무엇이 이보다 수치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국계(國計)에 여유 자금이 없으니 해군에 대해 갑자기 논의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 한계를 짓는 견해입니다. 지금 해외의 여러 나라 중에 국토의 넓이와 백성들의 수가 우리나라의 절반도 안 되는 나라에도 수십만의 해군과 수십 척의 전함이 있는데, 어찌 그 재물을 귀신(鬼神)이 가져다 주어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절제하고 법도를 신중히 하여 알맞게 조치하여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애당초 힘도 써보지 않고 ‘우리는 할 수 없다.’고만 한다면 천하에 어찌 하루라도 이룰 수 있는 일이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광무(光武) 2년 7월 5일의 조지(詔旨)를 보니, ‘해군에 대해 아직도 제도를 정하지 못한 것은 비록 겨를이 없어서이긴 하지만, 크게 소홀히 하는 문제인 만큼 상비군(常備軍)의 인원과 편성할 방법과 꾸려갈 계책을 군부로 하여금 충분히 의논하여 방도에 대해 미리 강구하게 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신은 이에 대성인(大聖人)의 미리 대비하는 방비와 근본을 확고하게 한다는 경계를 우러르고서 먼저 이미 해외를 두루 다녔습니다. 지금 군함을 새로 구비하는 것은 바로 성상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천리 먼 길을 가는 자는 문을 나가는 것에서 시작을 하는 것이니, 저 백만 명의 용감한 군대와 매우 많은 군함이 사해를 달리고 만국(萬國)을 능가하는 것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 척의 군함을 사자마자 문득 다른 의견을 내세우니, 어찌 성상의 밝으신 조칙(詔勅)의 뜻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 군함을 구매할 처음에 신이 비록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처음 있는 일이므로 널리 논의했어야 하는데, 의정부(議政府)에서 충분히 논의하게 하지 않고 군부에서만 계약을 맺게 하여 사체(事體)에 잘못되어 의견이 분분히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우리 나라의 군제(軍制)에도 원래 수군과 전함이 있었으니 통제영(統制營)과 각 수영(水營)이 지금 비록 없어지긴 하였지만 그 당시 설치하고 꾸려갈 수 있었던 자본이 과연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그때보다 땅이 더 작아지지 않고 재물이 더 줄어들지 않았는데도 겨우 한 척의 군함을 구비하려 하자 먼저 비용부터 걱정을 하니, 이 점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군량(軍糧)을 지급하지 못할 걱정이 없을 듯합니다. 이전에 해방영(海防營)이 강화(江華)와 부평(富平) 등지에 있고 통제영이 진남군(鎭南郡)에 있었는데, 이 두 영(營)의 관청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 강화와 진남의 두 진위대(鎭衛隊)를 해군영(海軍營)으로 바꾸고 그곳을 쓰게 한다면 나라에서 영(營)을 설치하는 비용을 내지 않고도 해군이 대략 갖추어질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해적(海賊)이 암암리에 나타나서 상선(商船)이 다니기 어려워 연해(沿海)의 어귀나 기슭에서 몰래 장사하는 폐단이 생긴 데이겠습니까? 이 군함으로 바다 여기저기를 순찰하게 한다면 비적(匪賊)들을 막아서 국경을 보호할 수가 있으니, 어찌 쓸모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군함에 필요한 1년치 비용이 매우 적지 않으니 별도로 재물을 모아야 합니다. 이전 해방영이 있을 때에는 이른바 각 포구(浦口)의 영업세(營業稅)라는 것을 해당 영에 소속시켜서 경비로 쓰게 했습니다. 그런데 해당 영이 폐지된 뒤에는 그대로 객주(客主)들이 이익을 보는 창구가 되고 말았으니 지금 도로 해군영에 소속시켜야 합니다. 그 밖의 해세(海稅)와 선세(船稅) 등의 항목도 본래는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니, 이것도 다시 영의 비용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 또 통영(統營)과 수영(水營)에 속한 경비에 대해서도 더욱 더 샅샅이 조사하여 본영(本營)에서 쓰게 한다면 여유 자금이 생길 것이니, 군사를 모집하고 군함을 만드는 것을 점차 증가시켜 확장시켜 나가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우매한 신이 감히 이 일이 옳은지 시행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라에 군함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마음에서 경솔히 진술하였으니 더욱 더 송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셔서 신의 상소를 의정부에 속히 내리셔서 회의(會議)하고 품처(稟處)하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제수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갑자기 사직하는가? 말미(末尾)에 진술한 것은 의정부로 하여금 충분히 의논하여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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