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부록5권, 순종7년 1914년 3월

싸라리리 2025. 2. 9.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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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양력

【음력 갑인년(甲寅年) 2월 7일】 특별히 남작(男爵) 이재극(李載克)에게 일금 500원을 내리고, 덕수궁(德壽宮)에서도 300원을 내렸다. 그의 처 정경 부인(貞敬夫人) 조씨(趙氏)의 상(喪) 때문이다. 


【원본】 6책 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79면
【분류】왕실-사급(賜給)
특별히 남작(男爵) 이재극(李載克)에게 일금 500원을 내리고, 덕수궁(德壽宮)에서도 300원을 내렸다. 그의 처 정경 부인(貞敬夫人) 조씨(趙氏)의 상(喪) 때문이다.

 

사무관(事務官) 이겸제(李謙濟)·조동원(趙東源)·최건영(崔鍵榮), 찬시(贊侍) 김영갑(金永甲)·이교영(李喬永)·이성묵(李聖默), 전사(典祀) 유해종(劉海鐘)·박주빈(朴胄彬)·김윤구(金倫求)에게 명하여 대정박람회 시찰단(大正博覽會視察團)에 가입하여 토쿄〔東京〕에 가게 하여 문물 제도를 견학하도록 하였다.

 

3월 5일 양력

토쿄시〔東京市〕 대정박람회〔大正博覽會〕 개최 때 이왕직 박물관(李王職博物館)에서 물품을 내고 인원을 출장 파견하여 진열하라고 명하였다.

 

3월 9일 양력

본 연도 세출의 경상부문에서 양궁(兩宮)의 임시 사용금 및 향연비가 예산을 초과하여 해당 부족액 돈 5,620원을 예비금(豫備金) 중에서 지출하였다.

 

3월 10일 양력

이왕직(李王職)에서 종래 빈민구료를 위하여 매년 돈 1만 2,000원을 조선 총독부 의원(朝鮮總督府醫院)에 기부하던 것을 내무부 장관(內務部長官) 우사미 가쓰오〔宇佐美勝夫〕의 건의로 올해부터는 자혜 의원(慈惠醫院)에 이송하였다.

 

3월 11일 양력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는데 북장문(北牆門)을 경유하여 동가(動駕)하였다.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이하 고등관(高等官) 및 종척(宗戚), 귀족(貴族) 제인(諸人)이 참반(參班)하였다.

 

3월 12일 양력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오찬(午餐)을 베풀어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차관(次官) 및 이준 공(李埈公), 귀족(貴族) 제인(諸人)이 배참(陪參)하였다.

 

본 연도 예산의 궁내 대신(宮內大臣) 인가서(認可書)가 이왕직(李王職)에 도착하였다.

 

3월 13일 양력

특별히 동북구주재해구제회(東北九州災害救濟會)에 일금 1,000원을 내렸다. 덕수궁(德壽宮)에서도 500원을 내렸다.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王妃)도 따라갔다. 이어 선원전(璿源殿),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의효전(懿孝殿)에 전배(展拜)하였다.

 

3월 25일 양력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왕비(王妃)도 함께 나아갔다. 보령 41세의 탄신에 이준 공(李埈公) 이하 종척(宗戚), 귀족(貴族) 및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과 차관(次官), 장시계(掌侍係)의 고등관(高等官) 등의 축하를 받았다. 이어서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 및 이왕직 고등관 등을 소견(召見)하고 오찬과 배식을 하사하였다.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王妃)도 따라갔다. 이어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인정전(仁政殿) 동행각(東行閣)에 나아가 정재(呈才)를 관람하였다.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이하 및 종척(宗戚), 귀족(貴族) 제인(諸人)이 배관(陪觀)하였다.

 

이왕직(李王職) 직원을 광주군(廣州郡)에 보내어 헌릉(獻陵) 인릉(仁陵) 국내(局內)의 부속산림을 감독하라고 명하였다. 조림지적(造林地積)이 30정(町)이었다.

 

이왕직 사무관(李王職事務官)        쓰가루 히데마로〔津輕英麿〕, 무라카미 유키치〔村上龍吉〕가 궁내성(宮內省)의 징계에 의해 견책당하였다. 쓰가루가 덕수궁(德壽宮) 사무주임으로 있었던 작년 12월 30일 덕수궁 사무실 일부가 소실되었고, 무라카미가 주전(主殿) 주임으로 있을 때 대조전(大造殿) 욕실이 반 정도 탔다. 이는 부하의 감독을 주도면밀하게 하지 못하고 직무에 태만하였기 때문이다.

 

3월 27일 양력

양궁(兩宮)에서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인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을 총독부(總督府)에 보내어 사다코내친왕〔聰子內親王〕과 나루히코왕〔稔彦王〕 집안의 결혼식에 축사를 전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정무 총감(政務總監)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및 각 부 장관(長官)과 고등관(高等官)을 접견하고 사찬(賜饌)하였는데, 이준 공(李埈公) 이하 종척(宗戚), 귀족(貴族) 및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고등관이 모두 배식(陪食)하였다. 이어서 동행각(東行閣)에 나아가 정재(呈才)를 관람하였다.

 

3월 30일 양력

황태후 폐하(皇太后陛下)가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하여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을 총독부(總督府)에 보내어 문후를 아뢰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3월 31일 양력

태왕 전하(太王殿下)가 국왕 전하의 탄신일 축하를 위하여 삼축당(三祝堂)에서 오찬(午餐)을 베풀었다. 종척(宗戚), 귀족(貴族)과 여러 부인들이 배참(陪參)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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