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1948년 집권 후 헌법을 고쳐가며 장기집권을 해왔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
1948년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이승만은 1952년의 발췌개헌을 통한 직선제로 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따라서 1956년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면 더 이상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다시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헌법을 고치고 싶었다.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은 11월 27일 개헌안을 표결한다. 203명 재석에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부결되었다. 202명의 3분의 2가 찬성해야 하므로 135.3333 명 이상, 즉, 136명의 찬성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음날 자유당과 정부가 사사오입을 해야 한다며 소숫점을 버리고 135명의 찬성했으니 가결되었다고 우긴다. 야당의원들이 모두 퇴장하고 자유당 의원들이 가결발표를 한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진다.
우리역사넷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은 1954년 제3대 국회에서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위헌 통과시킨 사건이다. 1952년의 발췌개헌에 이은 두 번째 개헌이었다. 헌법개정의 주요 목적은 이승만 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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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대구학생시위
장면 후보의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는데 학생들이 유세현장에 갈 수 없도록 일요일 등교를 강제적으로 지시했고, 이에 반발한 고등학생들이 2월 27일 시위를 벌이고, 다음날인 28일 결의문을 낭독했다.
3.15 부정선거
1960년 2월 3일 자유당정부는 선거일을 3월 15일로 변경한다. 이는 미국에서 치료를 받던 조병옥 대통령 후보가 선거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해 이승만이 당선되려는 계략이었다. 조병옥 후보는 미국에서 갑작스럽게 죽는다. 이로써 이승만의 대통령당선은 유력해졌지만, 부통령으로 내세운 이기붕이 장면에게 이길 수 없어 보였다. 당시 이승만의 나이 85세로 유고시 부통령에게 정권이 넘어가기 때문에 이승만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이승만은, 4할 사전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야당 참관인 쫓아내기, 3인조, 5인조 투표, 뇌물살포, 협박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부정선거를 한다. 개표도 조작한다. 밤에 몰래 투표함을 바꾸는 올빼미표, 책상 아래서 무효표를 만드는 피아노표, 위아래만 확인해서 모두 이기붕으로 만드는 샌드위치 개표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내무장관 최인규는 박정희 때 3.15 부정선거의 최종 책임자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3월 15일 선거 당일 경상남도 마산에선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한다.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했는데, 경찰의 발포로 9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민주당원들이 시위를 시작했고, 시민들이 모여 시위를 함께 했다. 경찰과 반공청년단들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차 마산의거라한다.
4월 11일 김주열(당시 고등학생)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었다. 김주열의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있었다. 실종 27일 만에 발견된 것이었다. 당시 경비주임이었던 박종표(아라이 켄키치)가 3월 15일 경찰의 최루탄 발포로 사망한 김주열의 시신을 바다에 던졌기 때문이다. 마산에서 다시 시위가 발생한다. 2차 마산의거라 한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
고대 본관 앞에 있는 인촌 동상 앞에 모여, "민주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하면서 재선거 실시를 요구했다. 평화적인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가 동원한 정치깡패들이 시위 후 돌아가는 학생 시위대를 습격하여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국민들이 분노하게 되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9일
깡패들이 평화 시위를 하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습격해 폭력을 자행했다는 것은 크나큰 분노를 가져왔다.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 이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했다. 서울에서만 시위대의 규모는 10만에 육박했다. 경찰은 중앙청(현재 광화문광장 부근)에서 저지선을 만들고 강경하게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했다. 시위는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이 날 서울에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04명으로 이중 3명은 경찰이다.
시위대는 이승만 독재와 자유당 정권을 옹호하던 서울신문사에 불을 지르고, 시민들을 압박하던 반공회관에도 불을 질렀다. 서울 각지의 파출소도 파괴되고 방화되었다. 일부 시위대는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는 오후 3시 서울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계엄군은 경찰과는 반대로 중립을 지키고 발포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서 시위는 진압되기 시작한다. 경찰과 계엄군에게 시위대는 쫓겨났다.
마지막 시위대가 고려대 교정으로 몰렸다. 이때 조재미 준장은 두 명의 부관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진입한다. 강당으로 들어가서 희생자들 앞에서 조의를 표하니, 시위대는 해산한다.
미국과 자유진영 국가들이 이승만을 비판한다.
4월 21일에는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내고 23일에 장면 부통령이 사임서를 낸다. 이기붕 부통령은 당선 사퇴를 고려한다고 발표한다. 24일에는 이승만이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한다.
4월 25일 교수들의 시위
서울대 대학교수단이 시위를 벌였다. 4.19와는 다르게 이승만을 대통령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를 직접적으로 했다. 경찰은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시위는 다음날까지 이어지면서 광화문 일대에 1만여 군중이 모였다. 계엄군이 출동했지만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위대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4월 26일 이승만 하야
오전 10시 30분 경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발표한다.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다음날 경무대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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