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1권 철종즉위년 1849년 7월

싸라리리 2025. 4. 2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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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병신

빈전(殯殿)에 나아가 삭전(朔奠)을 행하였다.

 

7월 3일 무술

시·원임 대신을 소견하였다.                        【영부사                           조인영(趙寅永), 판부사                           정원용(鄭元容)과 권돈인(權敦仁), 좌의정                           김도희(金道喜), 판부사                           박희수(朴晦壽)이다.】                      대왕 대비가 이르기를,
"듣자니, 어휘(御諱)의 글자가 저들012)                                             의 휘자(諱字)와 자양(字樣)은 비록 다르지만 음은 비슷하여, 밖에서 여러 말이 있다 하오. 이 글자의 변(邊)이나 뜻이 모두 저들 휘자와는 가당치도 않지만 먼 외국의 일이라 혹 예측치 못할 일이라도 있을까 모르니 참작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소. 어휘를 개정함이 좋을 듯하니 부망(副望)으로 개정하고, 어압(御押)도 따라서 고쳐야 하며, 어자(御字)도 개정함이 좋을 것이오."
하였다.

 

어압(御押)을 대내(大內)에서 써서 내리라 명하였다.

 

7월 5일 경자

영부사                     조인영(趙寅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번 어명(御名)의 일로 회의하였을 때에 신은 조반(朝班)의 윗자리에 있으면서 더더욱 경근(敬謹)했어야 함에도 오늘날 자음(字音)이 저들의 휘와 근사한 탓으로 망단(望單)을 환입(還入)하여 개정하기에 이르렀으니, 대성인(大聖人)의 심사 원려(深思遠慮)를 신은 참으로 흠앙(欽仰) 찬탄(讚歎)하옵니다. 과연 지금 개정하여 앙주(仰奏)하였습니다마는, 그간의 황름 미조(惶懍靡措)하였음을 어떻게 다함이 있었겠습니까? 목하(目下) 신의 병세는 걷기에 가장 지장이 있습니다. 산릉(山陵)을 살펴보려면 오로지 다리의 힘에 의지해야 하는데, 좌우로 생각해 보아도 다만 실정을 호소하고 해직을 비는 길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특별히 신의 총호사(摠護使)의 책임을 면하게 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명의 개정을 자성(慈聖)께서 의외의 일을 염려하시어 만전을 기하여 후고(後顧)의 염려가 없게 하고자 하신 뜻에서 그러하신 것이고, 연중(筵中)에 내린 교지에서도 정녕하게 개석(開釋)하셨으니, 경에게 무슨 실착(失錯)이 있었겠소? 이제 이로써 인책함은 참으로 만만 과중한 일이오. 경같이 노성한 분이 어찌 이를 양해하지 못한단 말이오. 또 총호사의 소임은 송종(送終)하는 도리를 다하는 자리입니다. 경의 정례(情禮)로 보아 어떻게 사양하겠소? 경은 안심하고 사퇴치 마오."
하였다.

 

7월 6일 신축

산릉 간심 도감(山陵看審都監)의 당상 이하의 관원을 소견하였다. 대왕 대비가 이르기를,
"살펴본 여러 곳 중에서 어느 곳이 가장 좋을 듯한가?"
하니, 도감의 당상                     조학년(趙鶴年)이 아뢰기를,
"좌향(坐向)의 길한 곳을 취(取)하여 보니 모두 열세 곳이었는데, 일일이 간심(看審)한 뒤에 그중에서 다섯 곳을 골라 상지관(相地官)의 산론(山論)을 별단(別單)으로 엮어 입계하였습니다."
하매, 대왕 대비가 이르기를,
"다섯 곳 중에서 어느 곳이 가장 좋은가?"
하니, 조학년이 아뢰기를,
"다섯 곳 가운데 경릉(景陵)의 능상(陵上)을 살펴보니, 십전 대길(十全大吉)의 땅이였고, 숭릉(崇陵)의 우강(右岡)도 역시 대길한 곳으로 경릉의 다음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이르기를,
"여러 상지관도 소견을 말함이 옳을 것이다."
하니, 상지관 양종화(梁鍾華)와 박대희(朴大熙) 등이 아뢰기를,
"경릉은 용세(龍勢)나 혈증(穴證)이 풍후(豐厚)하여 십전 대길의 땅이라 하겠고, 숭릉도 용혈(龍穴)의 법도가 역시 대길의 땅이었으나 경릉에 비하면 조금 못하겠기에 부망(副望)으로 정했습니다."
하자, 대왕 대비가 이르기를,
"경릉이 첫째로 십전 대길의 땅이기에 수망(首望)으로 하였단 말인가? 삼간심(三看審)을 한 뒤에 확정해야 할 것인데, 재간심(再看審)은 어느 날 하겠는가?"
하니, 조학년이 아뢰기를,
"재간심 날짜는 총호사의 초기(草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좌의정                     김도희(金道喜)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명의 단자(單子)로 회의했을 때에 신은 시임(時任)으로 있었으니, 그 책임이 남다릅니다. 손수 쓴 것도 신이요 봉진(封進)한 것도 신이었으니, 정작 심신(審愼)치 못하였음을 따지자면 신이 실로 으뜸이 되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이 어찌 경이 인책할 의리가 된다고 이렇게 인책하는 것인가? 만만 과당(過當)하고 만만 불가한 일이오. 경은 이 점을 양찰하여 안심하기 바란다."
하였다.

 

판부사                     정원용(鄭元容)과 박회수(朴晦壽)가 연명으로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명을 개정할 때에 신 등은 모두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이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는 심정은 어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감히 연소(聯疏)를 올려 자핵(自劾)하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이 과연 그만둘 수 없는 일이 되겠소? 하루 이틀 차례로 인책하여 마치 나라를 그르치고 일을 어그러지게 하는 사람들처럼 하니, 그 뜻을 알려 해도 모를 일이오. 경 등도 또한 자성(慈聖)의 뜻이 어디 있었는지를 헤아려 알고 있을 것이오. 경 등은 양찰하기 바라오."
하였다.

 

7월 10일 을사

산릉(山陵)을 간심(看審)한 제신들을 소견(小見)하였다.

 

7월 12일 정미

약원(藥院)013)                                             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入診)하였다. 시·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을 소견하였으니, 공제(公除)가 끝난 이튿날이기에 문안을 드린 것이다.

 

소대(召對)하여 《소학(小學)》 제1권을 강하였다.

 

김난순(金蘭淳)을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로, 윤의검(尹義儉)을 우변 포도 대장(右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집의                     김기찬(金基纘)이 십조(十條)를 소진(疏陳)하기를,
"성효(聖孝)를 돈독히 하고, 성궁(聖躬)을 잘 보호하며, 성지(聖志)를 분발하고, 성학(聖學)에 힘쓰며, 현준(賢俊)을 초래(招來)하고, 언로(言路)를 열며, 검덕(儉德)을 숭상하고, 기강(紀綱)을 세우며, 수령(守令)을 가려 쓰고, 과규(科規)를 엄히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십조(十條)로 진면(陳勉)하니 권권(眷眷)한 우애(憂愛)가 매우 가상하오. 의당 체념(體念)하겠소."
하였다.

 

김좌근(金左根)을 한성부 판윤으로, 이관희(李觀熙)를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봉영 대신(奉迎大臣) 판부사                     정원용(鄭元容)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는데, 승지                     홍종응(洪鍾應)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주서(注書)                     한경원(韓敬源)과 검열(檢閱)                     윤정선(尹定善)은 6품에 올렸다.

 

예조에서 혼전(魂殿)과 휘정전(徽定殿)의 축식(祝式)을 유신(儒臣), 대신의 의논으로써 아뢰었는데, 영부사        조인영(趙寅永)은 헌의하기를,
"순조실(純祖室)을 황고(皇考)라 칭하고 전하는 효자(孝子)라 칭함에 대하여 명(明)나라        가정(嘉靖) 때의 예론을 상고해 보니, 거기에 이르기를, ‘형(兄) 무종(武宗), 고(考) 효종(孝宗)’이라 하였으니,014)                   가히 원용(援用)할 만합니다. 익종실(翼宗室)을 황형(皇兄)이라 칭하고 전하는 효사(孝嗣)라 칭함은 우리 영조(英祖)의 경종실(景宗室)에 대한 축식에 이미 우리 나라에서 이미 행했던 예(禮)가 되었으니, 아울러 갱론(更論)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혼전(魂殿)과 휘정전(徽定殿)의 축식에 있어서는 선유(先儒)들의 의논을 상고해 보니 많이 계통을 소중히 여겼고 서차(序次)에는 구애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역대로 행해진 일은 없었습니다. 오직 당(唐)의 선종(宣宗)만은 경종(敬宗)·문종(文宗)·무종실(武宗室)에 대하여 본래 숙부로서 조카의 대통을 이었기에 다만 ‘사황제(嗣皇帝) 신(臣) 모(某) 소고우(昭告于)’라 칭했으니, 경종·문종·무종에게 묘호(廟號)만을 바로 썼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됩니다. 기왕 사(嗣)라 칭하고 신(臣)이라 칭하고 모(某)라 칭하면서 〈감소고우(敢昭告于)〉의 감(敢)자를 쓰지 않음은 그럴 리가 없으니, 혹 사기에 궐문(闕文)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일 것입니다. 다만 우리 나라 축식에 고·증조(高曾祖) 이상은 단지 묘호만 쓰고 속칭(屬稱)을 쓰지 않음이 혹 거기에서 방조(旁照)한 일례(一例)가 될 것입니다."
하였고, 판부사        정원용(鄭元容)은 헌의하기를,
"제왕은 계통을 중히 여깁니다. 비록 아우로서 형을 잇고 숙부로서 조카를 이었다 하더라도 그분의 생시에 이미 제부(諸父)와 형제를 신하로 삼았었습니다. 제부와 형제로서 뒤를 이은 사람도 또 아들이 아비의 복을 입듯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노 문공(魯文公)의 일에 관한 《춘추(春秋)》 삼전(三傳)015)                  의 논한 바나 송 진종(宋眞宗) 때의 상서성 집의(尙書省集議)에서는 모두 세차(世次)016)                  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가(禮家)에서 이른바 친친(親親)017)                  으로서 존존(尊尊)018)                  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역대의 행전(行典)019)                  을 상고해 보면 모두 천속(天屬)020)                  으로 서차(序次)를 하고 습니다. 또 우리 나라의 예(禮)로 말하더라도 영묘(英廟)가 경묘(景廟)에게 황형(皇兄)이라 칭하고 효사(孝嗣)라 칭하였으니, 오늘날 선례를 따른다는 의의에서 익종실(翼宗室)에 이 예(禮)를 원용한다면 순묘(純廟)에는 의당 예위(禰位)021)                  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대행조(大行朝)022)                  에 대한 숙질의 서차에 있어서는 당(唐)나라 선종 때 예원(禮院)의 축식에서 경종·문종·무종에게 다만 ‘사황제(嗣皇帝) 신(臣) 모(某) 소고(昭告)’라고만 칭하였는데, ‘다만이라 칭하였다[但稱]’는 두 글자로 본다면 친속 관계의 칭호를 붙이지는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오늘날 근거할 만한 선례가 될 듯도 합니다만, 예절이란 매우 중대한 것이어서 감히 질정(質定)하여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며, 판부사        권돈인(權敦仁)은 헌의하기를,
"금번 예조에서 청한 축식의 의논은 비단 우리 나라에서만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또한 역대(歷代)의 극히 드문 일입니다. 역대에는 당(唐)        선종(宣宗)의 고사(故事)가 있고 국조(國朝)에는 영묘조(英廟朝)의 이미 행했던 예가 있으나, 고금(古今)을 절충하여 일대(一代)의 전례(典禮)를 갖추어 이룸에 있어서는 신같이 몽매한 소견으로써 감히 망론(妄論)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고, 좌의정        김도희(金道喜)는 헌의하기를,
"순조실(純祖室)에 황고(皇考)라 칭하고 전하는 효자(孝子)라 칭하며, 익종실(翼宗室)에는 황형(皇兄)이라 칭하고 전하는 효사(孝嗣)라 칭하는 데에 대하여 이미 예조에서 원거(援據)한 계사(啓辭)가 있었으니 더 의논할 일이 없겠으나, 혼전(魂殿)이나 휘정전(徽定殿)의 축식에 있어서는 따로 방조(旁照)할 만한 선례(先例)가 없고 오직 당(唐)나라 선종(宣宗) 때의 축식에서 경종·문종·무종에게 다만 ‘사황제 신 모’라고만 칭한 바 있는데, 이것이 혹 근거할 만한 예가 될런지요? 또 태묘(太廟)의 축식에서 고·증조 이상은 다만 묘호만 쓰고 친속 관계의 칭호를 쓰지 않았으니, 지금도 묘호만 쓰고 친속 관계의 칭호는 쓰지 않음이 합당할 듯하오나, 막중한 전례(典禮)에 관계된 일이라서 확정해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며, 판부사        박회수(朴晦壽)는 헌의하기를,
"예가(禮家)에서 주장하는 말은 계통을 잇는 것을 중히 여겼으나, 역대로 행해진 전례(典禮)는 세차(世次)를 위주로 하여 정하였으니, 지금 마땅히 행해진 전례를 따라 순조는 의당 고위(考位)가 되고, 익종은 황형이라 칭해야 됩니다. 대행조(大行朝)의 축식은 기왕 당나라 선종 때의 원거할 만한 선례가 있으니, 신은 별다른 소견이 없습니다."
하였고,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        김학성(金學性), 지춘추(知春秋) 윤정현(尹定鉉), 규장각 직제학        조병준(趙秉駿), 동춘추(同春秋)        홍의석(洪義錫)·이원익(李源益)·이경재(李經在) 등은 모두 억견(臆見)으로 답할 수는 없다 하였으며, 좨주(祭酒)        홍직필(洪直弼)은 헌의하기를,
"숙부로서 조카를 이은 예를 사적(史籍)에서 가려 보건대, 오직 주 효왕(周孝王)이 의왕(懿王)에게, 당 선종(唐宣宗)이 무종(武宗)에게와 우리 전하께서 대행 대왕(大行大王)에게 뿐입니다. 선유(先儒)는 말하기를, ‘효왕은 숙부이자 신하요, 의왕은 조카이자 임금이다. 친친(親親)이 존존(尊尊)에 방해롭지 않음은 군신의 분의(分義)가 있기 때문이다. 종묘의 예(禮)에는 사군(嗣君)이 선군(先君)에게 절하는 것이지 숙부가 조카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고, 선정(先正) 문원공(文元公) 신(臣) 김장생(金長生)도 이르기를, ‘제왕가(帝王家)에서는 승통(承統)을 중히 여겨 비록 숙부로서 조카를 잇고 형이 아우를 이었다 해도 모두 부자의 도리가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만세(萬世)에 바꿀 수 없는 정의(正義)입니다. 비록 부자의 도리가 있다고는 하나 친속 관계의 칭호에 있어서는 마땅히 형제 숙질의 서차(序次)를 써야 하는 것이니, 전하께서 효정전(孝定殿)에는 황질(皇姪)이라 칭하고 휘정전(徽定殿)에는 황질비(皇姪妃)라 칭해야 할 듯합니다. 숙질의 명칭이 비록 고례(古禮)에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이미 정자 ·주자 양부자(兩夫子)의 정론(定論)이 있습니다. 명나라[皇朝]        헌종 황제(憲宗皇帝) 때에 이르러 경태제(景泰帝)023)                  를 추복(追復)하는 시책(諡冊)에서 황숙(皇叔)이라 일컫고 자신을 조카라고 일컬었으니, 이는 좇아서 계승할 것이 되겠으나, 또 《강목(綱目)》의 당(唐) 선종기(宣宗紀)를 상고해 보면 예원(禮院)에서 주달(奏達)한 목종(穆宗)·경종·문종·무종 네 황제에게의 축문에서 다만 ‘사황제 신 모’라고만 칭했으니, 이 또한 오늘날의 원증(援證)으로 삼을 만한 일입니다."
하였으며, 부사직(副司直)        송내희(宋來熙)는 헌의하기를,
"제왕이 입계(入繼)하는 의의는 지극히 중하고 엄하여 비록 아우가 형을 잇고 숙부가 조카를 이었다고 하더라도 다만 승통(承統)으로 차서(次序)를 삼기 때문에 부자의 분의는 있으나 부자의 명칭은 없는 것입니다. 무릇 윤속(倫屬)을 일컬음에 있어서 또한 문란하게 할 수 없었으므로 영묘(英廟)께서 경묘(景廟)에게 황형(皇兄)이라 칭하고 효사(孝嗣)라 칭했으니, 익종실의 축식에 원거(援據)할 만하리라 봅니다. 혼전이나 휘정전의 축식에 있어서는 예서(禮書)에 적실한 출처가 없으나, 당 선종 때에 목종·경종·문종·무종 4실(室)의 체제(禘祭) 축문을 상고해 보면 다만 ‘사황제 신 모’라고만 칭했습니다. 선종은 목종에게는 아우요 경종·문종·무종에게는 숙부이지만 사황제라 통칭했으니, 지금도 사왕(嗣王)이라 통칭함이 혹 원거할 만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특별히 사(嗣)자 위에 효(孝)자를 더하고 있는데, 당초에 의정한 본의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문원공 신 김장생도 일찍이 이 예(禮)를 논하면서 ‘마땅히 《통전(通典)》024)                  에 따라야 할 것이다. 선군(先君)에게 사황모(嗣皇某)라 칭한 것도 마땅히 구별하여 호칭하여야 할 것 같으나, 지금은 선유(先儒)의 정론이 없으니 감히 창론(創論)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이 점은 오늘의 예와 사실 다름이 없습니다만, 선정도 감히 창설(創說)치 못한 것을 더구나 어떻게 감히 경솔하게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왕 대비가 황질(皇姪)·황질비(皇姪妃)로 호칭하는 것은 유신(儒臣)의 의논에 따르게 하고 ‘사왕(嗣王) 신(臣)’의 호칭은 대신의 의논대로 시행하라 명하였다.

 

7월 13일 무신

소대(召對)하였다.

 

7월 14일 기유

소대하였다.

 

별강(別講)하였다.

 

전(前) 정언(正言)                     강한혁(姜漢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온 나라가 다 함께 분통해 하는 사람은 바로 조병현(趙秉鉉) 그 사람입니다. 아! 저 조 병현의 위복(威福)을 도둑질하고 재물을 탐하며 조정을 협제(脅制)하고 군부(君父)를 멸시한 허다한 그 죄악에 대하여는 대평(臺評)025)                                             이 갖추어져 있고, 단안(斷案)이 이미 내렸는데도 허다한 무리들이 같은 부류끼리 모여 있고, 그 중에서 조병현에게 가장 울타리가 되고 있는 것은 윤치영(尹致英)입니다. 처음에는 조병현의 권세와 지위를 부러워하여 손바닥의 노리개 됨을 감수(甘受)하다가 마침내는 조병현의 하는 짓을 도습(蹈襲)하고 심력(心力)의 의탁함을 저버림이 없었으므로, 양년 동안에 다섯 번이나 승자(陞資)하여 차례도 없이 갑작스럽게 건너뛰었고, 한집안에 삼귀(三貴)가 나서 현혁한 권세는 두려워할 만합니다. 그 간사한 정상이 마침내 선대왕(先大王)026)                                             의 일월 같은 밝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혹은 엄히 꾸짖어 찬축(竄逐)하고 혹은 가벼이 소척(疏斥)하는 뜻을 보였으나, 조병현은 교외에 편히 쉬면서 궁중의 동정을 밀탐하고 윤치영은 관각(館閣)에서 드날리면서 조정을 능멸하고 있으니, 숲속의 복병(伏兵)이나 우리를 벗어난 호랑이 같아 참으로 예사로운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동조(東朝)에 아뢰어 속히 조병현과 윤치영에게 절도 안치(絶島安置)의 형전(刑典)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하나는 선왕께서 이미 죄주신 사람이고 하나는 선왕과 가까왔던 사람인데, 한 장의 종이 위에 함께 늘어놓았으니, 충후한 기풍이 모자란다."
하였다.

 

장령        이정두(李廷斗)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정언        강한혁(姜漢赫)이 상소하여 조병현·윤치영 두 사람을 논죄한 바를 보니, 그들의 천죄 만악(千罪萬惡)은 단안(斷案)도 있고 공론도 막을 수 없겠으나, 오히려 미진한 바가 있는 것은 대개 3, 4명의 무변(武弁)을 함께 논하지 않는 점입니다. 아! 저 이응식(李應植)과 이능권(李能權)은 원래 추잡하다고 일컬어진 무리들로서 오로지 아첨하는 행태만 익혀 원융(元戎)의 인수(印綬)와 총융(總戎)의 절부(節符)를 차례로 돌려가며 차지하는 등 좋은 자리 좋은 직책을 일시에 독차지하니, 세리(勢利)를 탐하는 무리들이 온통 같은 행투(行套)를 이루었는데, 종내(終乃)는 간특한 신관호(申觀浩)와 교람(驕濫)한 김건(金鍵)의 무리들이 다투어 본을 받아 더욱 설치게 되었습니다. 큰 도(道)의 병사(兵使) 자리를 몇해 동안에 역임(歷任)하여 해독은 오로지 어리석은 백성에게 돌아갔으며, 융부(戎符)를 풋내기들에게 독차지하게 하니, 음직(蔭職)은 젖내 나는 아이들에게도 미치게 되었습니다. 신이 더욱 놀라고 분통해 하는 바는 얼마 전 심저(沁邸)027)                  에서 봉영(奉迎)할 즈음에 이응식은 사사로이 파발을 띄워 비보(飛報)하는 말[馬]이 배위(陪衛)의 행차보다 앞서 갔으니, 그 속셈이 어디 있었는지를 헤아릴 수가 없어 군정(群情)은 의아하고 여론은 비등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응식·이능권·김건·신관호 등에게 아울러 절도 정배(絶島定配)의 형전(刑典)을 시행하는 일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참으로 그렇게 공분(公憤)이 있었다면, 어찌 앞서는 말하지 않다가 이제야 망극한 상중(喪中)에 이렇듯 시끄럽게 구느냐? 말단(末端)에 논한 일은 진정 이러하다면 매우 해괴하고 못된 일이다."
하였다.

 

7월 15일 경술

빈전(殯殿)에 나아가 망전(望奠)과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소대하였다.

 

홍재룡(洪在龍)을 훈련 대장으로, 유상필(柳相弼)을 금위 대장으로, 이경순(李景純)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대사헌                     이경재(李景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정언                     강한혁(姜漢赫), 장령                     이정두(李廷斗)의 소본(疏本)을 보니, 온 나라가 함께 분개하고 왕법(王法)으로 의당 베임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아! 조병현(趙秉鉉)의 천죄 만악은 연전에 대각(臺閣)의 평론이 곧 그에게 단안(斷案)이 되었으며, 윤치영(尹致英)은 간교하고 사나우며 잔꾀를 부림이 습성이 되었습니다.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드러나게 멀리하는 뜻을 보이셨으나 오히려 개전(改悛)치 않고 공공연히 불평을 늘어놓았으니, 온 세상이 손가락질하고 식자(識者)들이 한심해 한 지가 오래입니다. 장헌이 논한 바는 바로 추잡하고 염치없는 무부(武夫)에 관한 일이니, 참으로 붓을 적셔 논할 가치조차 없는 일입니다마는, 저 이응식(李應植)·신관호(申觀浩)의 무리들은 모두 한미(寒微)한 선비로서 감히 조정의 권세를 쥐었는데, 신관호는 부정(不正)한 경로로 의원(醫員)을 궁중에 들였으니 벌써 용서 못할 죄를 범한 것이며, 사가(私家)에서 약을 만들었으니 어떻게 무장(無將)028)                                             의 형률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굳이 그 근원을 따지자면, 오로지 이능권(李能權)과 김건(金鍵)이 맨 먼저 길을 트자 서로 추장(推奬)한 데서 연유하였습니다. 이 응식은 전번 〈어가(御駕)를〉 봉영(奉迎)하던 날 사사로이 파발(擺撥)을 보내서 배위(陪衛)의 행차보다 앞서 달려갔으니, 측량키 어려운 속셈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 해악(駭惡)한 일일 뿐이겠습니까? 빨리 두 신하의 소청을 윤허하소서. 작년에 서상교(徐相敎)가 김흥근(金興根)을 논할 때에 말 가운데 ‘궁위(宮衛)를 엿보고 현저하게 체결(締結)하려는 형적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궁위(宮衛)’ 두 글자만 해도 이미 더없이 엄중한 곳을 범하였고, 체결(締結)이라 말한 것은 스스로 무핍(誣逼)029)                                             의 죄과를 범한 것인데, 이를 주장한 자도 윤치영이요 사주(使嗾)한 자도 윤치영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윤 치영과 서상교를 모두 왕부(王府)030)                                             로 하여금 나국 엄핵(拿鞫嚴覈)케 하여 속히 전형(典刑)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몇 사람의 일을 하필이면 이렇게 과장한단 말인가? 하단(下段)의 일은 그에게 무슨 책임이 있었는가? 몰지각(沒知覺)의 소치(所致)로 돌림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이돈영(李敦榮)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이돈영(李敦榮)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7월 16일 신해

빈전(殯殿)에 나아가 결과(結窠) 뒤의 별전(別奠)을 행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대사간                     임백수(任百秀)가 소를 올려 조병현(趙秉鉉) 등의 일을 대관(臺官)의 청대로 윤허해 줄 것과, 윤치영(尹致英) 등을 나국 엄핵(拿鞫嚴覈)할 것을 청하였다.

 

집의                     신좌모(申佐模)가 소를 올려 조병현 등에게 빨리 절도 안치(絶島安置)의 형전(刑典)을 베풀 것과 서상교 등의 나국 엄핵을 청하였다.

 

사간                     목인배(睦仁培)가 소를 올려 조병현 등의 일을 빨리 사헌부의 청대로 윤허할 것과 윤치영 등의 나국 엄핵을 청하였다.

 

판부사                     권돈인(權敦仁)이 차자(箚子)를 올려 스스로 인책(引責)하기를,
"춘간(春間)에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환후(患候)가 더하시자, 전라 감사                     남병철(南秉哲)이 늘 신을 대하여 걱정하여 애를 태웠는데, 이내 성상께서 방외(方外)의 정통한 의원(醫員)을 만나보고 싶어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침 신의 집에 시골 무변(武弁)들이 군문(軍門)의 일로 올라와 묵고 있었는데 꽤 의술에 정통(精通)한 자가 있어 신이 과연 말씀을 올렸었으나, 이름이 내의원(內醫院)에 올라 있지 않았으므로 역시 천단하여 들여보낼 길이 없었습니다. 그 얼마 후에 대행 대왕께서 그 때에 금영(禁營)의 초관(哨官)으로 있던 그 사람을 생각하시고 금위영 대장                     신관호(申觀浩)더러 데리고 들어오라 명하시어 진후(診候)케 하셨으니, 이 일의 전말은 이와 같을 뿐입니다. 신이 자수(自首)하지 않으면 대소(臺疏)에서 논한 바 용서치 못할 죄안(罪案)을 신은 요행으로 면하겠지만, 도리어 당치도 않은 신관호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할 것이니, 어찌 뒤바뀜이 되지 않겠습니까? 빨리 신을 사죄(死罪)의 형전(刑典)으로 의논하여 왕법(王法)의 정당함을 얻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의 전말에 대해서 지금 경의 말을 듣고 비로소 그렇게 된 까닭을 알게 되었다. 경에게는 애당초 상관이 없었던 것을 이제 이렇게 인책하니, 만만 과당(過當)한 일이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방금 대신에게 비답을 내렸듯이, 잘 살펴보지도 않고 주달한 허물을 면하기는 어려우니, 전 대사헌 〈이경재에게〉 파직의 형전(刑典)을 시행하라."
하였다.

 

대사헌                     이돈영(李敦榮)이 조병현 등의 일을 대관(臺官)의 청대로 빨리 윤허할 것과 윤치영 등을 국청(鞫廳)을 열어 실상을 파악케 하도록 소청하였다.

 

7월 17일 임자

고부 청시 겸 승습(告訃請諡兼承襲)을 주청할 세 사신을 소견(召見)하였으니,                        【정사(正使)                           박회수(朴晦壽), 부사(副使)                           이근우(李根友), 서장관(書狀官)                           심돈영(沈敦永)이다.】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소대(召對)하였다.

 

7월 18일 계축

빈전(殯殿)에 나아가 표리(表裏)031)                                             를 올리고, 이어 조전(朝奠)032)                                             ·조상식(朝上食)·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7월 19일 갑인

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033)                                             하였다. 좌의정                     김도희(金道喜)가 아뢰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왕실의 근친으로서 자성(慈聖)의 명을 받아 우리의 크고 큰 기업을 이으시고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 영광스럽게도 염유(簾帷)에 납시어 몸소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늘이 전하를 어질게 해주고 역년(歷年)도 내려주실 것인가는 모두가 초두(初頭)에 달려 있는 것이오니, 근신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촌심(寸心)에 감격한 바를 눌러 둘 수 없어 삼가 오늘날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것에 대해서 조진(條陳)하려 합니다. 첫째는 성효(誠孝)를 다하시고, 둘째는 대본(大本)을 세우시며, 셋째는 성학(聖學)에 힘쓰시고, 넷째는 민은(民隱)을 가엾게 여기시며, 다섯째는 요행의 길을 억제하시는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진면(陳勉)한 여러 말이 매우 좋으니, 복응(服膺)치 않겠는가?"
하였다.

 

삼도감(三都監)의 이예(吏隷)들이 작간(作奸)하는 폐단을 신칙하였다.

 

양서(兩西)034)                                             에서 칙사(勅使)의 접대에 낭비되는 폐단을 신칙하였다.

 

양전(兩銓)035)                                             에 신칙하여 수령(守令) 중 초사자(初仕者)는 잘 가려 쓰라 명하였다.

 

총융청(摠戎廳)에 북도(北道)                     참군(參軍)의 출륙(出六)036)                                             을 본청(本廳)의 규례에 의하여 하라고 명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연차하여                        【대사헌                           이돈영(李敦榮), 대사간                           임백수(任百秀), 집의                           신좌모(申佐模), 사간                           목인배(睦仁培), 장령                           이정두(李廷斗), 지평                           조광준(趙光濬), 헌납                           박준우(朴浚愚), 정언                           안희수(安喜壽)이다.】                      빨리 여러 사람의 청대로 윤허하기를 청하였다.

 

옥당에서 연차하여                        【교리                           서당보(徐堂輔), 부교리                           윤행모(尹行謨)·윤육(尹堉), 수찬                           이유겸(李維謙), 부수찬                           송정화(宋廷和)이다.】                      빨리 처분을 내리기를 청하였다.

 

양사에서 합계(合啓)하여 윤치영(尹致英) 등을 국핵(鞫覈)할 것과 조병현(趙秉鉉)을 절도 안치할 것과 이능권(李能權) 등의 절도 정배를 청하였다.

 

7월 20일 을묘

소대하였다.

 

별강(別講)하였다.

 

홍종응(洪鍾應)을 형조 판서로, 이가우(李嘉愚)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양사에서 합계하였다.

 

7월 21일 병진

소대하였다.

 

시·원임 대신(時原任大臣)들이 연차하여 조병현 등의 일을 빨리 대관(臺官)의 청대로 윤허해 주도록 청하였다.

 

양사에서 합계하였다.

 

삼사(三司)에서 합사(合辭)하여                        【대사헌                           이돈영(李敦榮), 대사간                           임백수(任百秀), 집의                           신좌모(申佐模), 사간                           목인배(睦仁培), 장령                           신태운(申泰運)·이정두(李廷斗), 지평                           조광준(趙光濬), 헌납                           박준우(朴浚愚), 정언                           안희수(安喜壽), 교리                           서당보(徐堂輔), 부교리                           윤행모(尹行模)·윤육(尹堉), 수찬                           이유겸(李維謙), 부수찬                           송정화(宋廷和)이다.】 윤치영(尹致英)을 국핵(鞫覈)할 것과 조병현(趙秉鉉)을 절도 안치(絶島安置)할 것과 이능권(李能權) 등을 절도 정배(絶島定配)할 것을 청하였다.

 

7월 22일 정사

삼사에서 합사하여 윤치영 등을 국핵할 것과 조병현 등을 형률대로 처치할 것을 청하였다.

 

7월 23일 무오

대왕 대비가 윤치영 등은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하고, 조병현은 도치(島置)하며, 이능원 등은 도배하라고 명하였다.

 

삼사에서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 청대(請對)하였다.

 

승정원에서 의계(議啓)하여 빨리 반한(反汗)037)                                             할 것을 허락해 주고, 삼사의 청을 쾌히 윤허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전 북병사(北兵使)                     구신희(具信喜)가 과시(科試)의 기록에 허위 사실을 기재해 주고 많은 뇌물을 받았습니다."
하니, 구신희를 양양부(襄陽府)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7월 24일 기미

성원묵(成原默)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재전(金在田)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25일 경신

도정(都政)038)                                             을 행하였다. 하비(下批)하여 김좌근(金左根)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이계조(李啓朝)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양근(金穰根)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병기(金炳冀)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정기원(鄭岐源)을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게 하였다.

 

금오(金吾)039)                                             에서 연차하여                        【판의금                           이약우(李若愚), 지의금 이정신(李鼎臣), 동의금 이원익(李源益)이다.】 윤치영 등의 일에 대하여 작처(酌處)한 성명(成命)을 빨리 정지하기를 청하였다.

 

금오에 배소(配所)를 마련하여 즉각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금오에서 윤치영 등의 배소를 정하여 압송했다고 아뢰었다.

 

7월 27일 임술

수령과 변장(邊將)의 초사인(初仕人)을 소견(召見)하였다.

 

이노병(李魯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우순(洪祐順)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28일 계해

이계조(李啓朝)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성수묵(成遂默)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시·원임 대신(時原任大臣)이 연차하여 조병현 등의 일을 대관(臺官)의 청대로 빨리 윤허하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렸다.

 

7월 29일 갑자

대왕 대비가 조병현에게는 위리(圍籬)의 형전을 시행하고 윤치영 등에게는 모두 안치(安置)의 형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금오에서 조병현은 위리하고 윤치영은 안치했다고 아뢰었다.

 

7월 30일 을축

영부사                     조인영(趙寅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절(禮節)에 관한 일을 초기(草記)로 품정(稟定)하기는 마땅치 않을 듯하여 감히 단차(短箚)를 올려 예람(睿覽)을 번거롭게 하옵니다. 삼가 역대의 능침(陵寢)으로 합봉(合封)한 전례를 상고해 보니, 후릉(厚陵)·헌릉(獻陵)·영릉(英陵)·명릉(明陵)의 네 곳은 왕비의 장례가 앞에 있었고 대왕의 장례가 뒤에 있었으나 능호(陵號)는 모두 그대로 본릉의 호를 썼으니, 오늘날 원용하기에 합당할 듯하오나, 오직 선조 대왕의 목릉(穆陵)만은 의인 왕후(懿仁王后)와 합봉하였는데, 《보략(譜略)》의 왕후릉 주(註)에 이르기는 ‘초호(初號)는 유릉(裕陵)이다.’ 하였는 바, 유릉을 목릉으로 고친 지가 하도 오래 된 일이라서 고정(考定)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합봉한 능침이 전후하여 열여덟 곳이나 되지만 표석(表石)은 모두 한 좌(坐)만 설치하였는데, 오직 영조(英祖)의 원릉(元陵)만은 정순 왕후(貞純王后)와 합봉하여 신구(新舊) 두 표석을 썼습니다. 이는 모두 예문(禮文)과 제도(制度)에 관계된 일인 만큼, 아래에서 천단(擅斷)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대신과 예조 당상에게 수의(收議)하여 준행(遵行)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수의한 일을 그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민치성(閔致成)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유치명(柳致明)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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