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윤8월

싸라리리 2025. 4. 28. 09:25
반응형

윤8월 1일 갑신

주강(晝講)하였다.

 

가평(加平)·양근(楊根)·진위(振威)·양성(陽城) 등 고을의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집과 익사(溺死)하거나 압사한 사람에게 휼전을 내렸다.

 

윤8월 2일 을유

주강하였다.

 

부안(扶安) 등 9개 고을의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집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게 휼전을 내렸다.

 

윤8월 3일 병술

희정당(熙政堂)에서 중궁전(中宮殿)의 초간택(初揀擇)을 거행하였다.

 

윤8월 4일 정해

소대(召對)하였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홍우순(洪祐順)을 불러 보았는데,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영광(靈光)·나주(羅州)·창평(昌平)·무안(務安)·흥양(興陽) 등 고을의 떠내려간 집에 휼전을 내렸다.

 

안변(安邊)·단천(端川)·이원(利原) 등 고을의 무너진 집과 갑산부(甲山府)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게 휼전을 내렸다.

 

윤8월 5일 무자

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좌의정 김흥근(金興根)이 아뢰기를,
"청컨대 재변을 만나 수성(修省)하고 더욱 성학(聖學)에 힘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 수재(水災)는 과연 심상치 않아 떠내려간 집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 대한 보고가 잇달고 있으니, 매양 부르짖고 괴로워하는 참상을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침식이 편치 못하다. 이제 수성(修省)하라는 뜻이 이처럼 간절하니, 감히 가슴에 새기지 않겠는가? 경 역시 일에 따라 수성을 제시(提示)하여 재변을 상서(祥瑞)로 변화시키도록 도모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또 탐장(貪贓)을 징계하는 일을 아뢰니, 대왕 대비전에서 비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탐장을 징계하는 법이 엄절(嚴截)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점차 실효(實效)가 없어 무고(無辜)한 백성만 유독 그 피해를 입으니, 어찌 놀랍고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이번에 도로 징계하는 거조는 구법(舊法)을 신명한데 불과하니, 이번 거행할 조목(條目)을 8도(道)에 반포하여 먼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수령을 금칙(禁飭)하게 해야 한다. 만약 수령만을 논하면 도신된 자는 자기를 거기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조금도 경척(警惕)하지 않겠지만 역시 어찌 별도의 도리가 없겠는가? 도신이 먼저 자신을 단속한 후에야 열읍(列邑)을 단속할 수 있다. 이 거행 조목과 비답(批答)을 8도(道)와 4도(都)087)  에 행회(行會)하여 벽에 걸어두고 항상 보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비(吏批)088)  의 허사과(虛司果)는 원사(元仕)를 구처(區處)한 연후에 차례로 안배(按排)하여 참하(參下)에 주의(注擬)하고, 상(賞)에 의하여 승륙(陞六)089)  하며, 본직(本職)의 사만(仕滿)이 지난 자를 먼저 의망(擬望)하여 원사(元仕)의 예에 의해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학년(趙鶴年)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이천부(利川府)의 무너진 집에 휼전을 내렸다.

 

윤8월 6일 기축

이약우(李若愚)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윤8월 9일 임진

감동(監董)한 대신 이하를 불러 보았는데, 인릉(仁陵) 능 위의 사초(莎草)를 수개(修改)한 뒤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윤8월 10일 계사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구일제(九日製)090)  를 행하였다.

 

이원달(李源達)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윤8월 11일 갑오

신창(新昌) 등 고을의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집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게 휼전을 내렸다. 또 공주(公州) 등 고을의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집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게 휼전을 내렸다.

 

윤8월 13일 병신

희정당에서 중궁전(中宮殿)의 재간택(再揀擇)을 거행하였다.

 

대왕 대비전에서 명하기를,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 김문근(金汶根)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하라."
하였다.

 

윤8월 15일 무술

장성(長城) 등 고을의 무너진 집과 익사(溺死)한 사람에게 휼전을 내렸다.

 

윤8월 16일 기해

소대(召對)하였다.

 

윤8월 17일 경자

강계부(江界府)의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집에 휼전을 내렸다.

 

윤8월 18일 신축

경릉(景陵)과 건원릉(健元陵)에 나아가 친제(親祭)하였다.

 

윤8월 19일 임인

친제(親祭) 때의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고,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인고(李寅皐), 집례(執禮) 부사과(副司果) 이노규(李魯奎), 대축(大祝) 수찬(修撰) 남병길(南秉吉)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였다.

 

윤8월 20일 계묘

소대하였다.

 

조휘림(趙徽林)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윤8월 21일 갑진

주강(晝講)하였다.

 

윤8월 23일 병오

주강을 하였다.

 

갑산(甲山)·삼수(三水)·길주(吉州)·이원(利原)·북청(北靑) 등 고을의 무너진 집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게 휼전을 내렸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 홍종응(洪鍾應)이 흉년의 상황을 상소하고, 인하여 본도(本道)의 곡식 1만 석, 다른 도의 곡식 3만 석과 각종 상납할 것 가운데 호조(戶曹)·균역청(均役廳)의 돈 3만 냥을 한정하여 특별히 구획해 보내기를 청하였습니다. 각 해도(該道)로 하여금 속히 짐을 꾸리어 차원(差員)을 정해 운송(運送)하게 하고, 영남·호남에서는 정박하고 있는 조선(漕船)으로 편리한 대로 실어 운반하여 기한에 맞춰 수용(需用)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前) 정언(正言) 홍우길(洪祐吉)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본생(本生)의 증조(曾祖)가 당초 귀양간 것은 단지 장범(贓犯) 때문이었고, 마지막 천극(栫棘)된 것은 단지 제방(隄防)을 신엄(申嚴)한 것이었습니다. 무릇 악역(惡逆)을 범한 홍국영(洪國榮) 및 정형(正刑)에 처한 홍복영(洪福榮)과는 친숙(親叔)과 친질(親姪)이 되니 그때에 연좌(連坐)된 바가 가볍지 않고 중했음을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전후의 대장(臺章)과 무릇 정조(正祖)의 판부(判付)에서 문호(門戶)에 대해 분별(分別)하였고, 공화(公貨)에 대해 나열했었습니다. 이제 그의 손자가 장범(贓犯)을 억울하다고 하면서 역안(逆案)에 연좌(連坐)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혹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만 생각건대 율명(律名)이 이미 엄중했으며 세월도 오래 지났으니, 지금은 우선 그냥 두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사람의 일은 단지 장범(贓犯)에만 연좌되었으니 당시에도 이미 할 말이 있었다. 이제 70여 년이 되었는데 그 이름이 아직도 도류안(徒流案)에 남아 있으니, 그 손자인 자가 이와 같이 억울하다고 하는 것은 실로 괴이할 것이 없다. 홍낙빈(洪樂彬)의 일은 즉시 효주(爻周)091)  하여 그 억울한 마음을 펴도록 하라."
하였다.

 

윤8월 24일 정미

희정당에서 중궁전(中宮殿)의 삼간택(三揀擇)을 거행하였다. 대왕 대비전에서 대혼(大婚)을 김문근(金汶根) 집에 정하라고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주량(舟梁)092)  의 예(禮)를 이미 정하였다. 4세(世)의 충정(忠貞)한 의열(義烈)을 어찌 이루 추념(追念)할 수 있겠는가? 임인년093)  에 절의(節義)를 세운 여러 집안을 모두 특별히 절혜(節惠)094)  의 은전(恩典)을 내렸는데 하물며 이 집안이겠는가? 증 찬성(贈贊成) 김제겸(金濟謙)은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의논할 것이며, 증 이조 참의(贈吏曹參議), 김성행(金省行)에게는 찬성(贊成)을 더 추증하되 일체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諡號)를 의논하라."
하였다.

 

전(前) 승지(承旨) 김문근(金汶根)을 영은 부원군(永恩府院君)으로 봉작(封爵)하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삼았다.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 및 각신(閣臣)을 불러 보았는데 영은 부원군의 승후(承候) 때문이었다. 정원용(鄭元容)이 말하기를,
"명문에 가득한 경사(慶事)와 동조(東朝)의 의친(懿親)으로 문상(文祥)의 예를 크게 정했고 삼간택(三揀擇)이 이미 이루어져 육례(六禮)를 연길(沿吉)095)  하니 대소 여러 사람의 마음이 더욱 간절하게 송축(頌祝)합니다."
하였는데, 대왕 대비전에서 말하기를,
"삼간택(三揀擇)의 예가 이루어져 중궁전의 덕용(德容)으로 이제 장복(章服)을 착용한 후에 더욱 거지(擧止)가 단중(端重)하고 복기(福氣)가 얼굴에 가득하니, 억만년 무강(無彊)한 아름다움이 어찌 이보다 지나치겠는가?"
하니, 정원용이 말하기를,
"이제 자교(慈敎)를 받으니 더욱 경하하는 정성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전에서 말하기를,
"나이에 비해 의용(儀容)이 숙성하니, 실로 종사(宗社)의 경사이다. 대전(大殿)의 춘추(春秋)가 정성(鼎盛)096)  하여 대례(大禮)가 한시가 급하므로 가례(嘉禮)를 9월 안으로 택일하였다."
하니, 정원용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날로 앙축(仰祝)하는 바이니, 성혼(成婚)의 기일을 정한 것은 바로 막대한 경사입니다. 임금에게 선덕(善德)이 있으면 천심(天心)도 기뻐하여 큰 은혜를 내려주어 복록(福祿)이 번창하고 자손이 많음은 모두 하늘이 그 덕을 도와 주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선심(善心)을 미루어 덕정(德政)을 행하여 하늘이 준 복을 누리는 도를 삼으소서. 전하의 신상(身上)에 복록이 함께 임하는 것은 바로 종사의 끝없는 복이요 백성들의 끝없는 복입니다."
하니, 대왕 대비전에서 말하기를,
"이제 대신이 아뢴 바가 매우 좋으니, 주상(主上)은 마음에 두고 체념(體念)할 것을 바라는 바이오."
하였다. 대왕 대비전에서 말하기를,
"승지(承旨)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부원군(府院君)인가?"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일진(日辰)이 좋은 날 삼간택(三揀擇)의 예를 마쳤는데, 중궁전의 덕용(德容)이 완비되고 행동이 단아(端雅)하니 기쁜 마음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다. 경은 소심 겸약(小心謙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이 오늘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 검소함을 스스로 지키고 반드시 근신(謹愼)하여 평생에 이 마음을 잊지 않으면 어찌 국가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니, 김문근이 말하기를,
"자교(慈敎)가 지당하십니다. 입궁(入宮)한 후 가르쳐 성취시키는 방도는 또한 오직 자성(慈聖) 전하께 달려 있으니, 일에 따라 교도(敎導)하여 억만 년 끝없는 아름다움의 터전을 삼는 것이 신의 구구한 소망입니다. 천신(賤臣)의 사사로운 분의는 오직 두려워하며 조심할 뿐이니, 자교(慈敎)를 평생토록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하니, 대왕 대비전에서 말하기를,
"만일 가르칠 만한 일이 있으면 어찌 가르치지 않겠는가만 경 역시 항상 출입하면서 더욱 힘써 보도(輔導)하라. 대전(大殿)의 성품이 평소 검소하여 사치를 좋아하지 않으니, 중궁전 역시 우러러 본받아 검약을 숭상한다면 어찌 기쁘고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하니, 김문근이 말하기를,
"대전의 검소한 덕이 이와 같으시니, 천신의 구구한 바람은 다시 이보다 더함이 없습니다."
하였다.

 

윤8월 25일 무신

주강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