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갑오
봉심(奉審)한 대신과 지사(地師) 한정후(韓廷厚)·양종화(梁鍾華) 등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아뢰기를,
"인릉(仁陵)은 청룡(靑龍)이 낮고 혈(穴)의 전순(前脣)이 길며, 창릉(昌陵)·장릉(長陵)의 왼쪽 등성이가 좋으나, 희릉(禧陵)·후릉(厚陵)의 오른쪽 등성이만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2월 2일 을미
인정전에 나아가 경모궁(景慕宮)의 춘향(春享)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2월 3일 병신
인정전에 나아가 문묘(文廟)의 석전(釋奠)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서희순(徐憙淳)을 이조 판서로, 서유훈(徐有薰)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한익(金漢益)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4일 정유
인정전에 나아가 사직단(社稷壇)의 춘향(春享)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이돈영(李敦榮)을 예조 판서로, 조병준(趙秉駿)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봉심(奉審)한 대신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듣건대 후릉(厚陵)의 양쪽 등성이는 국초(國初)에 무학(無學)이 점지(占地)한 곳이라고 하는데, 근래에 어찌 이와 같은 지술(地術)을 지닌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영부사 정원용(鄭元容)이 말하기를,
"근래의 지사(地師)를 어찌 그와 견주어 논할 수 있겠습니까? 듣건대 능지(陵誌)에 기재된 것이 있는데 영상(領相)이 보았다고 합니다."
하니,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말하기를,
"신이 과연 보았습니다. 이것은 명사(名師)가 점지한 곳이었습니다."
하였다.
2월 5일 무술
남단제(南壇祭)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이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춘도기(春到記)010) 를 행하여 강경(講經)에 유학(幼學) 최익현(崔益鉉), 부(賦)에 진사(進士) 안익희(安益熙)를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011) 하게 하였다.
2월 8일 신축
전라 감사 서헌순(徐憲淳)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사폐(辭陛)012) 한 때문이었다.
2월 9일 임인
춘당대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행하여, 부(賦)에 유학(幼學) 정해상(鄭海尙)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2월 10일 계묘
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入診)하였다.
유장환(兪章煥)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2월 13일 병오
산릉 도감(山陵都監)의 당상관(堂上官) 이하를 소견하였다.
2월 14일 정미
서상오(徐相五)를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심의면(沈宜冕)을 이조 참판으로, 윤치정(尹致定)을 형조 판서로, 홍종서(洪鍾序)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홍재철(洪在喆)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2월 15일 무신
윤정현(尹定鉉)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2월 16일 기유
윤정현(尹定鉉)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2월 18일 신해
정기세(鄭基世)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간심(看審)한 대신을 소견하였다.
2월 19일 임자
유광로(柳光魯)를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2월 21일 갑인
간심(看審)한 대신을 소견하였다. 영부사 정원용(鄭元容)이 말하기를,
"오늘 길시(吉時)에 두 곳의 봉표(封標)를 순조롭게 완성시켰습니다. 신이 봉표하기에 앞서 여러 지사(地師)들과 세 번이나 간심하였는데, 건원릉(健元陵)은 재실(齋室) 뒷산의 형세가 양쪽으로 싸안고 있어 형국(形局)이 맑고 고와서 여러 지사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습니다. 보통 사람의 안목(眼目)으로 보아도 모두 상길(上吉)의 땅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자, 하교하기를,
"수목(樹木)을 솎아낸 뒤 본 것이 두 번째 간심하였을 때와 견주어 어떻다고 하던가?"
하니, 정원용이 말하기를,
"건원릉의 재실 뒤에 대해서는 여러 지사들의 말이 두 번째 간심하였을 때에 본 바와 견주어 더욱 좋다고 했습니다."
하니, 날짜를 가려서 천릉(遷陵)과 천원(遷園)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전 전라 감사 정기세(鄭基世)를 소견하였다.
2월 22일 을묘
감시(監試)의 회시(會試) 일소(一所)·이소(二所)에서 방목(榜目)을 올렸다. 일소에서는 유학(幼學) 황정연(黃正淵)이, 이소에서는 유학 이만수(李晩綏)가 으뜸을 차지하였다.
2월 25일 무오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2월 26일 기미
홍재철(洪在喆)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2월 27일 경신
화성(華城)의 행궁(行宮)에 나아가 경숙(經宿)하였다. 하교하기를,
"경내(境內)의 유생(儒生)과 무사(武士)는 마땅히 응제(應製)와 시예(試藝)에 응시해야 된다. 유생은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유수(留守)와 함께 내일 교궁(校宮)에 같이 가서 시취(試取)하여 오도록 하고, 무사는 환궁(還宮)한 뒤에 시예(試藝)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8일 신유
현륭원(顯隆園)과 건릉(健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제(親祭)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화령전(華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교궁(校宮)에서 유생들에게 응제(應製)를 행하여 부(賦)에 유학(幼學) 성이경(成履慶)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삼가 원(園)·능(陵)에 전(奠)을 올렸고, 또 정전(幀殿)을 직접 뵈었다. 이 해에 이런 예(禮)를 행하게 되니, 추모하는 사정(私情)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는가? 당시에 부로(父老)들에게 잔치를 내린 것은 곧 대성인(大聖人)이 부모(父母)를 영구히 모시고자 하는 애틋한 효성에서 내리신 성대한 일이었다. 따라서 나 소자(小子)가 뜻을 보이는 행사가 없을 수 있겠는가? 본부(本府)의 부로(父老)들 가운데 나이 80세 이상된 사람들에게 쌀과 고기를 하사함으로써 내가 선왕(先王)의 뜻을 계술(繼述)하는 정성을 보이고자 한다."
하였다.
건릉(健陵)과 현륭원(顯隆園)에 친제(親祭)하였을 때의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집례(執禮)인 집의 심의원(沈宜元), 대축(大祝)인 부사과 조병학(趙秉學)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2월 29일 임술
하교하기를,
"당초 입적(入籍)되지 않았는데, 무난히 시험에 나갔다가 이렇게 발거(拔去)당하는 경우를 초래(招來)하였으니, 어찌 이런 사습(士習)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용교(韓龍敎) 등 3인은 모두 정거(停擧)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이어 환궁(還宮)하였다.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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